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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文明의 어머니 江
黃河流域 사람, 사람들!
黃河(Huanghe 황허)를 거슬러 오르면서 ③ 네이멍구(內蒙古), 닝샤(寧夏), 칭하이(靑海)
厚堂 고 광 창
5. 네이멍구(內蒙古 Neimenggu 내몽고)자치주
(1) 네이멍구(內蒙古)의 역사
네이멍구(內蒙古)의 면적은 우리 한반도의 5배이고 인구는 2,200만 명 정도로 인구밀도가 낮은 몽골족 자치주다. 몽골족은 청해, 신장 등지로 떠나고 漢族들이 인구의 85%정도를 차지하여 큰 기업체, 호텔, 식당, 상점 등을 경영하고 있었다.
몽골 유목민 ‘테무진’이 유목민 부락을 통일하여 몽골 제국을 만들고 자신을 ‘징기스칸’이라 했다. ‘징기스’란 몽골어로 ‘절대적인 힘’을 말하고 ‘칸’이란 군주를 말한다.
징기스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칸’이 ‘元’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했다. 元나라는 서쪽으로 영토를 넓혀 서남 아시아와 동부 유럽을 장악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만들었다. 몽골군이 모두 騎馬兵이었기 때문에 군대의 이동과 배치가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징기스칸’과 그의 아들 ‘오고타이’가 죽은 후 後繼 자리를 놓고 권력 다툼이 생겨 결국 元나라는 망하고 그 뒤 明나라와 淸나라를 거쳐 일본의 괴뢰국 ‘몽강국’이 되었으나 1945년 일본이 폐망하자 몽골은 두 조각으로 나누어 북쪽은 소련이 담당하고 남쪽은 중국이 담당하여 독립을 도와주기로 했다. 중국이 담당한 지역은 1945년 9월 중국 공산당에 흡수되어 지금 현재는 ‘내몽골자치주’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한 省이 되어 있고, 소련이 담당한 지역은 1990년 5. 10일 선거를 통해서 독립을 하여 ’몽골‘이라는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Mogolia란 말이 줄어서 ’몽골‘이 되었고 이를 중국 한자로 표시한 것이 ’蒙古‘다.
‘蒙’자는 ‘입다’. ‘덮어 씌우다’는 뜻을 지녔는데 매우 추운 곳임을 입증하는 것 같다. 중국 지도를 펴 보니 내몽골의 대부분은 천연 牧草地인데, 사띠(沙地 사지)와 사모(沙漠 -사막)도 있다. ‘사띠(沙地)’란 용어를 이곳에 와서 처음 들었는데 모래 밭 중 적은 것은 ‘沙地’, 큰 것은 ‘沙漠’이라 한다는데 지도를 보면 沙漠보다는 ‘沙地가 더 많았다. 地下에서는 석탄과 철광석도 많이 생산된다고 하며 沙地와 沙漠에는 풍력 발전기가 여러 대 세워져 있었다.
(2) 후허하오터(呼和浩特)와 초원(草原)
후허하오터(呼和浩特)는 내몽골의 省都이며 ‘푸른 도시’라는 뜻이다. 몽골은 沙地와 沙漠이 많은 곳인데 그 중에서도 이곳에 푸른 초원이 많이 있었던가 보다. 몽골에서 볼 거리는 초원, 말타기, 몽골인 생활 방식 경험해 보기 등이다. 여행사에 가서 차오위안(草原 초원) 여행을 신청했다. 이튿날 아침 여행사 빠오처(包車 봉고차)는 우리 일행 10명을 태우고 2시간 정도를 달려 시라무런(西柆木仁)초원에 도착했다. 땅은 모두 모래 바닥인데 드문드문 풀밭이 보였고 몽골인들의 주거 형태인 게르(ger)가 몇 채 늘어서 있었다. 우리는 배정 받은 게르(ger)에 짐을 풀었다.
‘게르(ger)’는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짐승의 털로 만든 천을 덮어 만든 이동식 몽골 전통 가옥을 말한다. 초원에서 가축을 기르는 유목민들은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만들기 쉽고 헐기 쉬운 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 ‘게르’는 관광객을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겉모습은 게르처럼 만들고 ‘게르’ 안쪽 실제로 사용하는 부분은 벽돌이나 시멘트를 사용하여 튼튼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게르’안쪽에는 징기스칸의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1인당 1박 2일 요금이 840元인데 말타기는 별도로 20元을 더 받았다. 우리는 초원을 천천히 걸으면서 길바닥의 풀을 보았는데 풀이 굉장히 억세고 빳빳하게 보였다. 물이 적고 밤낮으로 기온차가 심한 곳에서 모질게 살아가는 풀의 형태인 것 같았다. 식사는 양고기 탕인데 무척 맛있었다. 몽골 음식이 우리와 잘 맞는다는 말을 들었는데 직접 먹어보니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입이 황홀하고 코도 향기로웠다.
우리 이웃 ‘게르’에서는 가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놀음하는 사람들이
경찰들의 눈을 피해 이곳에 와서 놀다가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돌아간다고 한다.
밤 10시경 여행사 직원이 우리들에게 옷을 두텁게 입고 나오라고 한다. ‘별 구경하는 시간’ 이란다. 밖에 나가서 별을 보니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로 하늘이 무척 아름다웠다. 오늘은 바람이 없어 모래가 흩날리지 않아 별 보기에 아주 좋은 날이라고 여행사 직원이 설명해 준다. 하지만 추워서 별 하늘 사진만 몇 장 찍고 얼른 ‘게르’ 안으로 들어왔다. 사막이라 낮에는 덮고 밤에는 추워 등에 담요를 걸치고 나갔어도 아래턱이 떨릴 정도로 무척 추웠다. 하루 낮밤 기온차가 30~40도는 더 되는 것 같았다.
이튿날 후허하오터(呼和浩特)로 나왔는데 시가지가 조용했다. 혹시 분리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의 시위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여행사 직원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 네이멍구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한다. 티벳과 신장지역은 분리 독립주의자가 많아 외국인의 출입을 제한 한다고 하던데 이곳은 몽골인들이 인원수가 적어 분리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이 없는 모양이다. 초원에서 먹은 양고기 탕 생각이 나서 식당에 가서 양고기 탕을 주문해 먹었는데 맛도 초원에서 먹은 것과 비슷했다. 역시 맛있었다.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회원 중 커피를 즐겨 마시는 회원이 커피를 마시고 싶어 카이수이(開水 끓는 맹물)를 요구했더니 종업원이 뜨거운 茶물을 가져왔다. 커피 봉지를 보여 주면서 카이수이(開水 끓는 맹물)를 요구해도 얼른 못 알아듣는 것 같다. 식당에 온 손님 중에 한 분이 우리의 뜻을 알고 종업원에게 다가가 설명을 하니 그때서야 우리의 요구 사항을 알았는지 작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 난로 위에 얹으면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곳에서는 보통 따뜻한 물 하면 러수이(熱水 따뜻하게 끓인 茶물)를 생각하고, 카이수이(開水 끓는 맹물)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징기스칸(成吉思汗)의 릉(陵)을 보고 싶었으나 릉(陵)이 있다는 곳이 여러 군데여서 어디가 진짜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릉(陵)을 잘 보전하기 위해서란다.
여기까지 왔으니 황사(黃砂) 현장의 주범인 ‘고비사막’을 보고 싶었는데 고비사막의 몸체는 몽골에 있고 내몽골에는 조금 걸쳐있는 정도여서 ‘고비사막’이 중국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황사는 봄철에 북서풍이 불 때 생기기 때문에 지금 같은 여름철에는 볼 수 없다고 한다. 황사현상의 주범 얼굴을 좀 보려고 했는데 꿈을 접는 수밖에 --
고비사막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게 알아보지 못하고 온 우리의 잘못이 크지만 우리 여행코스가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몽골은 여행코스가 아니므로 어쩔 수 없었다.
아울러 우리 정부와 기업체에서 황사 현상 예방차원에서 이곳 사막에 나무를 심고 가꾸기 시작한지가 10여 년이 넘었으니 지금 쯤 무성하게 자랐을 나무들도 보고 싶었는데 ---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서 선예 치타이처(深夜 寢臺車 심야 침대차)를 타고 닝샤(寧夏)자치주의 省都인 인촨(銀川)으로 향했다.
6. 닝샤(寧夏 Ningxia 녕하)자치주
선예 워처(深夜 寢臺車 심야 침대차)는 아침 새벽 동이 틀 무렵에 닝샤(寧夏 녕하)에 도착했다. 차 탄 시간은 10시간 쯤 걸렸고 우리도 차 안에서 3~4시간은 잔 것 같다. 寢臺車는 의자 하나하나를 모두 뒤로 젓쳐서 침대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잠자는데 아주 편했고 야간에 이동함으로 숙박비가 절감되고 여행 시간도 아낄 수 있어 참 좋은 교통수단인 것 같았다. 요금이 비싼 게 좀 문제지만 ---
닝샤(寧夏 녕하)는 후이(回)족의 자치주다. 면적이 66,400㎢로 가장 적은 省이고, 인구의 1/3은 후이족(回族)으로 省 남쪽에 살고 있다. 후이족(回族)은 당나라 때 중국에 왔던 아랍과 이란 상인들의 후예들인데 모두 ‘이스람교도’다. 그래서 이스람교를 이곳에서는 ‘回敎(후이 종교)’라고 한다. 외국인 후예들이 모여 자치주가 된 곳이다.
닝샤(寧夏 녕하)는 건조한 중국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기후가 혹독하다. 겨울에는 무척 춥고 여름에는 덥다. 하지만 닝샤(寧夏)란 地名에서 알 수 있듯이 여름은 편안한 곳이다. 얼마나 겨울이 추웠으면 편안한 여름(寧夏)이라 했을까?
이곳은 생명선인 黃河가 없었다면 사람이 살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강이나 강에서 뻗어져 나온 관개수로 근처에 모여 산다.
서쪽의 허란산(賀蘭山 하란산)이 몽골 사막을 막아주고 황하가 있어 풍부한 물을 공급 받고 있는데 그래도 살기가 어려워 回族만 살았는데 1958년 내몽골 바오터우(包頭 포두)에서 간쑤성(甘肅省 감숙성) 란저우(蘭州 란주)까지 철도가 완공되면서 교통이 편리해 지자 漢族들도 이주해 들어왔다고 한다. 漢族이 소수민족 자치주에 가서 호텔, 식당, 가게 등을 하겠다고 하면 州 정부에서 자금을 대여해 준다. 漢族이 주인이 되고 소수민족이 그 밑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하도록 함으로서 少數民族을 中國化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1) 인촨(銀川 은천)
인촨(銀川 은천)은 닝샤(寧夏 녕하)省의 성도인데 아주 깨끗한 도시였다. 건물들이 거의 대부분 흰색이었다. 기차역 바로 앞은 새로 개발된 新도시이고 기차역 뒤쪽은 舊도시로 호텔, 식당, 상점, 시외 버스터미널 등이 있었다.
식당이 있어 들어갔는데 후이족(回族)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후이족 식당은 양고기 요리가 전문이다. 그래서 음식을 주문하고 벽을 보니 漢字로 글씨가 씌여 있는데 내용은 ‘第一次不來你的做錯,第二次不來我的做錯’ (처음 오지 않는 것은 당신의 잘 못이고, 두 번째 오지 않는 것은 우리 잘 못이다“)이었다. 보통 벽면에는 사진이나 그림을 걸어두는 경우가 많은데 특이하게 글씨를 써 놓았고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내용을 메모해 두고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종업원이 뭐라고 답변은 하는데 답변이 시원찮다. 내가 이해할 수 없으니 --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나왔다. 食後景이라더니 밥을 먹고 나니 그 옆에 큰 건물이 보였다. 이슬람식 아치와 녹색 타일을 깐 돔 지붕이 보인다. 칭전쓰(淸眞寺)라는 이스람 사원이다.
(2) 텡게르 사막
우리는 내몽골에서 ‘고비 사막’을 보지 못했으니까 꿩대신 닭이라고 이곳에 있는 작은 사모(沙漠 사막)인 ‘텡게르 사막’을 보기로 했다. ‘사포터우’(沙坡斗 사파두) 치처짠(汽車站 버스역)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길옆에 있는 산속을 보니까 시멘트 담 벽이 오래되면 부서져 내리듯이 산속에 있는 큰 바위들이 허물 벗는 것처럼 風化作用에 의하여 부슬부슬 부서져 내리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즉 沙漠化가 한 창 진행 중이었다. 좀 더 걸어가니 ‘사포터우 사막연구소(沙漠硏究所)’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 연구소는 바람에 밀려온 모래 언덕이 鐵道(감숙성 난주 방면)를 뒤덮은 것을 방지하는 방법을 개발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하니 모래 바람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케 했다.
※ 이곳에서는 기차는 훠처(火車), 버스는 치처(汽車)라고 부른다. 우리와는 달라 혼돈하기 쉽다.
入場 티켓을 끊고 들어가니 낙타가 앉아 있는 곳으로 안내 되었다. 案內員의 말에 의하면 모래밭이라 걷기도 힘들지만 사막에 왔으니 沙漠의 교통기관(交通機關)인 ‘낙타 타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낙타 타는 것이 무서우니 그냥 걷겠다는 회원이 있었으나 許容되지 않았다. 入場 料金에 낙타 타는 요금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안 된다고 하는 것 같았다.
앉아있는 낙타의 등 위에 올라탔으나 낙타가 일어나는 순간 내 몸의 균형(均衡)을 잡을 수 없어 앞으로 넘어질 뻔 했다. 참 위험했다. 사람을 등에 태운 낙타들은 숙달된 듯이 한 줄로 서서 沙漠으로 올라갔다. 낙타를 20여 분 정도 타고 올라가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낙타에서 내리니 옛날 민방위 교육 받을 때 교육장과 비슷한 모습을 갖춘 곳이 있었다. ‘사막 자동차’ 타기 전에 주의 사항을 말해주는 장소 같았다. 中國語와 英語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맨 먼저 ‘임산부(姙産婦)’나 ‘심장병(心臟病)환자’는 앞쪽으로 불러냈다. ‘사막 자동차’를 탈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분류하는 것 같았다. 차드까지 만들어 보이면서 임산부와 심장병 환자는 안 된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은 미세(微細)먼지의 주범인 黃沙가 어떻게 해서 發生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함인데 사막에 낙타를 데려다 놓고 ‘사막 자동차’까지 넣어 사막을 觀光地化한 줄은 미처 모르고 왔지만 결국은 사막 관광지(沙漠 觀光地)를 구경하러온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사막자동차’는 보통 차보다 바퀴의 크기가 큰데다가 타이어의 두께 또한 보통 차의 4~5배 정도나 되었고 트랙터 바퀴처럼 미끄럼 방지가 되어 있었다. 차에 오르니 안전벨트를 매라 하는데 온 몸을 위아래 옆 등 여러 군데를 칭칭 조여 맸다. 이건 安全벨트가 아니라 生命벨트였다.
차가 출발해서 沙丘를 오르락내리락 할 때마다 괴성(怪聲)이 들렸다. 즐거워서 내는 소리, 무서워서 내는 소리, 울음소리 등이 합쳐진 묘한 소리였다. 차가 내려갈 때는 내장(內臟)이 위로 올라붙었다가 차가 올라갈 때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온몸의 핏기가 싹 가셔버려 얼굴빛은 하얗고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차 안에 손잡이가 있어 잡았는데 손이 아플 정도였다. 차는 沙丘의 높이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또 속도도 천천히 에서 점차 빠르게로 변해갔다. 자동차 技士가 乘客들의 反應을 살펴가면서 沙丘 높이와 속도를 적절하게 調節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 두려움이 쌓여있던 乘客들도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적응해 갔다. 차를 20분 정도 탔을 때 자동차 타기가 끝났는데 1시간 이상 걸린 것 같은 느낌이다. 차에서 내리면서 이제는 살았다 하는 마음에 휘! 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차에서 내려 沙漠 안을 걷고 싶었으나 管理人이 못 들어가게 한다. 沙漠 안에 길이 없어 찾아오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회오리바람(湧솟을 바람)이 불면 위험하단다. 회오리바람이 세게 몰아 칠 때는 사람도 넘어진다고 한다. 회오리바람(湧솟을 바람)이 왜 이곳 사막지방에 자주 생길까? 하는 의문이 생겨 손짓, 몸짓을 다 해가며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그쪽도 몸짓을 다 해가며 身語로 답변한다. 身語라 해석은 내가 하는 수밖에 없는데 사막지방은 태양열 때문에 공기가 더워지면 상승하고 그 공백은 옆의 공기가 빈 공간으로 들어올 때, 갑자기 세차게 빙빙돌면서 솟아오른단다. 내가 이해를 잘 못했는지 얼른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고개를 끄덕여 알았다는 표정을 해 주는 수밖에 --
모래를 만져보니 밀가루처럼 무척 부드럽고 가볍다. 이렇게 가벼우니 멀리 날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沙漠 안쪽을 바라보니 沙丘의 모습이 바다의 波高처럼 매우 아름답고 沙漠의 끝부분은 하늘과 맞닿아 있다. 自然이 그려낸 그림은 무척 아름다웠다. 인적(人跡)없는 沙漠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노라니 아! 여기가 그동안 내가 오고 싶고 보고 싶었었던 사막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감개무량(感慨無量)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무척 사무쳤다. 沙丘의 모습만 카메라에 담고 내려왔다. 우리가 이곳에 와서 알게 된 점은 沙漠化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모래가 아주 작고 가벼운데다가 회오리바람(湧솟을 바람)이 불면 하늘 높이 올라간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岩 ⇒ 石 ⇒ 砂이기 때문에 사막을 쓸 때는 砂자를 쓰고, 강이나 바닷가에 있는 모래는 沙자를 쓰는 걸로 있었는데 이곳에 와서 보니 사모(沙漠 사막)를 沙漠, 砂漠로 함께 쓰고 있었다.
사모(沙漠 사막)에서 나와 다시 回族 식당엘 갔더니 직원이 우리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한다. 마침 식당 쭈런짱(主人丈)이 있어서 벽에 씌여진 문장의 뜻을 물어 보았더니 우리가 지난번에 한 번 다녀간 것을 알았는지 우리에게 이슬람교 信者인지 물어 본 다음 웃으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主人丈 말에 의하면 ‘자기들 식당이 음식을 잘 하기로 유명한 식당인데 그걸 모르고 오지 않는 것은 그 사람 잘 못이고, 한 번 다녀간 사람이 다시 오지 않는 것은 음식 맛이 없거나 불친절했거나 음식 값이 비쌌기 때문이니 자기들 잘 못’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시 갔으니 이제 자기들 잘못은 없다고 하면서 크게 웃었다. 음식 맛도 괜찮았지만 글귀의 뜻이 궁금해서 다시 갔는데 무척 반기는 표정이다. 직원에게 뭐라고 했는지 음식량도 더 많이 주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여기에서 배운 점은 손님이 우리 식당엘 다시 오지 않으면 우리 잘못이니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서 우리 스스로 고쳐나가야 한다는 상인의 바람직한 자세인 것 같다.
우리는 선예 치타이처(深夜 寢臺車 심야 침대차)를 타고 다음 행선지인 칭하이(靑海)로 향했다.
7. 칭하이(靑海 Qinghai 청해)
이른 아침에그동안 꿈에 그리던칭하이(靑海)에 도착했다. 아침 공기가 무척 상쾌하다. 여기가 중국의 지붕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곳인가? 실감이 나질 않는다.
칭하이(靑海)는 2,200만 년 전에는 푸른 바다였다는데 지구의 융기(隆起) 현상으로 이렇게 높은 고원지대가 되었고 그때 바닷물이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하고 갇혀 있는 곳이 호수(靑海湖)가 되었는데 물빛이 푸른빛이어서 이곳을 푸른 바다(靑海)라고 했단다. 이건 guide book에 씌여 있는 설명인데 내가 보기엔 잘 못 된 것 같다. 2,200만 년 전 갇힌 물이 지금껏 마르지 않고 고여 있을 수가 없다. 호수 바닥에서 계속 鹽水가 솟아오르고 있기 때문에 여태껏 호수로 존재하는 것이지 ---
칭하이 인구는 대부분 티벳의 소수민족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漢族은 시닝(西寧 서녕)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동부 칭하이는 해발 2,500m~3,000m 사이인 높은 초원 고원지대다. 대부분의 농지는 시닝(西寧 서녕) 주변의 동부에 집중되어 있지만 靑海湖 서쪽의 주변과 산악지역에도 양, 말, 소를 키울 좋은 초원이 있다고 한다.
北西 칭하이는 주로 산으로 둘러싸인 불모의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금기 있는 습지와 鹽湖가 흩어져 있고 겨울철에는 혹한에 시달리는 곳이라 한다.
南部 칭하이는 해발 3,500m 위에 올라앉은 높은 고원이다. 이 지역은 최고봉이 6,500m 이상인 탕글라산에 의해 티벳과 구별된다. 창장(양쯔강)과 메콩강(란찬강)이 모두 이 산에서 발원된다고 하는데, 대부분 초원이고 인구는 반유목(半遊牧) 티벳 목동들이 대부분이라 한다.
(1) 시닝(西寧 서녕)
시닝(西寧 서녕)은 원래 간쑤(甘肅 감숙)성의 서쪽 땅이었기 때문에 시닝(西寧)이라고 했는데 수세기 동안 티벳 영토였던 곳 일부가 18세기 중엽 티벳에서 분리 되어 칭하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省이 되었을 때 시닝(西寧)은 간쑤(甘肅)에서 떨어져 나와 칭하이와 합쳐져 칭하이성의 동부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한 省중 하나이고 1949년부터 범죄자나 정치범들을 격리시키는 귀양지 역할을 했단다.
시닝(西寧 서녕)은 티벳 고원 2,275m 높이에 올라앉은 도시로 칭하이 省의 省都로서 6세기부터 군사 요새와 무역 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왔다. 요즘은 칭하이와 티벳을 다니는 외국인들 경유지 역할을 한단다.
(2) 칭하이후(靑海湖)
칭하이후(靑海湖)는 시닝에서 150㎞ 떨어진 곳에 있는데 버스(巴士)가 시닝에서 호수까지 15분 간격으로 출발하고 2시산 3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다른 관광객들과 섞이지 않고 우리 계획대로 여행하기 위해 여행사와 2박 3일 일정으로 계약을 해서 빠오처(包車-봉고차)로 우리 4명만 함께 움직였다. 호수에 도착해서 먼저 크기에 놀랬다. 중국에서 제일 큰 鹽湖인데 호수 면적이 4,416㎢로 우리나라 경기도 면적의 절반 쯤 된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2,200만 년 전 지구의 융기현상으로 생긴 이 호수를 보고 있으니 시간이 나를 위해 2,200만 전으로 멈춰 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개무량하다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자연이 빚어낸 걸작품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널따란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 건 호수가 아니라 어머니 품속처럼 푸근한 바다 같다. ‘海’자를 보면 바다는 어머니(母)와 관련이 깊다. 호수가 크기도 크기지만 경치도 무척 아름답다. 물빛을 보나 물맛을 보나 바다가 분명한데 호수라니? 靑海湖는 푸른 바다 같은 호수란 뜻인가 보다.
백두산 여행 다녀온 분들이 天池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오던데 나는 백두산은 못 갔지만 이런 아름다움을 눈으로 보기만 하고 그냥 돌아오기는 좀 아쉽다. 나에게 친한 친구가 있다. 國內여행 選好者라 여기 함께 오지는 않았지만 靑海호를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찍어 오래도록 내 방에 걸어두고 싶은 생각이 난다. 청해호를 보고 온 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선물인 것 같다. 호수가 가을 하늘보다 더 푸르다. 염도가 높고 수심이 깊을수록 더 푸르게 보인다고 한다.
내가 언젠가 이곳에 다시 올 날이 있을런지?
호수에서 또 하나 볼거리는 호수 서쪽에 있는 냐오다오(鳥島 조도 - 새 섬)다. 원래는 섬이었다는데 요즘은 호수의 둑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얼룩머리 기러기, 검은머리 갈매기, 검은 목 두루미, 가마우지를 비롯한 이름 모를 稀貴한 많은 새들이 있었다. 가두어 기르는 것이 아니라 放牧 상태라 새들의 天國이었다. 한 참 동안 새들이 노니는 것을 보고 있자니 忙中閑까지는 안가더라도 자연에서 노니는 이런 기회가 나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 같다. 이곳 섬에도 숙박업소가 있었다. 우리 여행의 1차 목적지인 청해에 도착했으니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 더 보태기 위해 하룻밤을 이곳 호수 속의 ‘새 섬’에서 자기로 했다.
(3) 차카염호(茶佧 鹽湖)’
이튿날은 또 서쪽으로 1시간 정도 달려서 해발 3,200m 고지에 있는 차카 염호(‘茶佧 鹽湖)’를 찾아갔다. ‘차카염호(茶佧 鹽湖)’란 티벳어로 ‘鹽湖의 물가’라는 뜻이란다. 염호는 넓이가 105㎢로 상당히 큰 호수인데 호수 가운데에서 계속 염수가 솟아오른다고 한다. 이 호수는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도 없고 나가는 물도 없기 때문에 햇볕에 호수의 수분이 증발되면 자연히 염도가 높아져 소금 덩어리로 뭉쳐져 호수 아래로 가라앉는다고 한다. 우리가 갔을 때 노동자 3명이 호수 바닥에 있는 소금 덩어리를 당그래(고무래)로 끌어 모아 한쪽에 쌓고 있었다. 이곳이 유명한 관광지인지 관광객이 이미 많이 와 있었다. 잠시 후 덤프차가 들어오니 노동자들이 그동안 쌓아 두었던 소금을 차에 실어 주었고 소금을 실은 차는 어디론지 가버린다. 소금 실은 차가 어디로 가느냐고 여행사 직원에게 물어보니 ‘소금 가공 공장’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런 鹽湖가 이 부근에도 여럿 있다고 한다. 중국 소금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니 가격이 우리보다 훨씬 저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 모 대학연구소에서 중국 소금을 분석해 보니 첫째 불순물이 많이 들어있고, 둘째, 우리나라 까지 오는 도중 소금이 녹지 않도록 화학물질을 넣어 놓았고 셋째, 우리 몸에 필요한 미네랄의 양이 우리나라 천일염에 비해서 부족한 걸로 나타났다고 하니 앞으로 중국 소금은 잘 알고 사먹어야 할 것 같다.
소금은 음식 만들 때 양념이라 불리 우는데 양념이란 말은 藥念(藥으로 생각)이 변한 말이라고 하니 소금이 바로 건강의 名藥인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금이 프랑스의 ‘게랑트’ 소금인데 미네랄이 풍부한 갯벌에서 만든 토판염(土版鹽)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新安 천일염도 土版鹽이고 미네랄도 풍부한 좋은 소금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우리 신안 천일염을 즐겨 찾는다는데 국내에서는 천일염은 먹지 않고 정제염을 많이 먹기 때문에 소금 값이 너무 저렴하여 업자들이 소금을 생산하지 않고 그 자리에 풍력발전기를 설치한다고 하니, 이 문제는 정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차카(茶佧)鹽湖가 우리 여행의 방향 轉換點이다. 지금껏 1차 목적지인 靑海호를 보기위해 올라왔으니 이제부터는 출발점이자 2차 목적지인 칭다오(靑島)를 향해 내려가야 한다.
(4) 遊牧民 마을
차카(茶佧) 鹽湖에서 나와 초원지대인 동부 칭하이로 갔다. 칭하이호를 지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티벳인들이 사는 遊牧民들의 마을이다. 말이 마을이지 집이 7~8채 밖에 없다. 마을 가게에 들어갔다. 물건도 팔고 밥도 해주는 곳이었다. 식사는 ‘모모스’라고 하는 티벳식 만두(야채와 야크 고기를 넣은 것) 와 ‘툭파’(고기 넣은 국수)였다. 그리고 茶는 茯塼茶(복전차, 숙성차인데 숙성과정에서 모양을 벽돌처럼 만듬)를 주는데 茶맛이 좋다고 하니까 茶를 조금 덜어 포장해 준다. 유목민들은 낮에는 모두 양이나 야크를 몰고 풀밭을 찾아다니니까 만날 수 없단다. 남자들은 많은 양떼를 몰고 2~3일 동안 다니기도 하지만 여자들은 적은 수의 어린 양들을 데리고 가까운 곳을 당일치기로 다닌다고 한다. 높다란 식당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잠시나마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5) 黃河의 발원지를 찾아서
黃河의 발원지를 보고 싶다고 하니까 여행사 직원이 車에 타라고 한다. 20~30분 쯤 가다가 내리라고 해서 내리니 조그만 개울을 가리키면서 여기가 黃河의 발원지라고 한다. 더 위쪽은 차가 들어갈 수 없으므로 걸어가야 한다고 하고 또 발원지도 여러 군데여서 어느 한 군데를 발원지로 지정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황하의 발원지가 콘룬산맥 이라고만 알고 왔는데 發源地 接近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걸 여기 와서 절실히 느꼈다. 칭다오(靑島)에서 출발하여 20여 일 만에 ‘黃河文明의 어머니 江’이라는 黃河의 발원지 근처까지는 왔는데 물빛이 黃색이 아니다. 어디서부터 황색이 되었는지 궁금해서 여행사 직원에게 물어보니 간쑤(甘肅)성에 가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저녁에 시닝(西寧)으로 돌아와 수이장상(水井巷) 시장에서 해물탕을 먹으면서 여행사 직원에게 그동안 수고해 준데 대해 고마움을 전했다.
당초 계획으로는 다음 행선지가 산시(陜西 섬서)省의 시안(西安)이었는데 여기까지 왔으니 어디서부터 黃河의 색깔이 황색으로 변했는지 보고 가자는 의견이 대부분이어서 시안(西安)가는 표 예약을 취소하고 란저우(蘭州)로 가기로 했다.
다음 ④ : 간쑤(甘肅 감숙), 산시(陝西 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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