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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통보제선사비(廣通普濟禪寺碑)는 1377년 개성시 해선리에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에 있는 비문으로,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사찰의 명칭도 光巖寺, 雲巖寺로도 불렸다. 이 사찰은 선종(禪宗) 즉 조계종(曹溪宗)에 속하게 하고 이름도 광통보제선사로 바꾸었다. 대신 시흥종에는 조계종에 속해있던 천화사(天和寺)를 갖도록 하였다.
<공민왕릉의 앞산 전경>
그러나 정릉과 관련된 기사에서는 대체로 〈雲巖寺〉로 등장하고 있다.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의 뒤쪽으로는 공민왕의 왕비의 능인 玄陵과 正陵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노국대장공주는 원나라 황실인 위왕(衛王)의 딸로서 1349년(충정왕 1)에 당시 원나라 황궁에 숙위하고 있던 공민왕과 결혼하였고, 1352년(공민왕 1) 원나라 황실에 의해 고려의 국왕으로 임명된 공민왕과 함께 고려에 고려에 들어와 왕비로 지내다가 1365년(공민왕 14)에 세상을 떠났다. 공민왕은 왕비의 죽음이후 통곡하며 거의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그녀의 영을 돌보기 위한 혼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한 무덤도 공민왕이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여 9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다. 공민왕은 왕비를 위하여 광암(光嵓) 골짜기에 정릉(正陵)을 축조하고 아울러 자신의 사후를 대비한 능 현릉(玄陵)도 같은 곳에 만들도록 한 후, 주변에 있던 광암사(光嵓寺)를 자신들의 원찰로 지정하여 크게 중수하였다.
<현릉과 정릉>
광통보제선사의 건립은 1365년(공민왕14)에 왕비가 승하하자 이해 4월에 능을 마련하고 1372년(공민왕 21)에 사찰의 건립을 시작하여 1377년(우왕3)에 공사를 마쳤다. 사찰은 미륵전과 관음전 해장지당(海藏之堂; 장경각의 기능), 선방, 요사채, 종루 및 고루 등의 모두 100여채 이상의 건물이 지어졌다. 특히 건물중 미륵전, 관음전, 海藏殿은 주예배공간으로 이들의 전각배치는 미륵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전과 海藏殿을 배치했을것으로 생각된다.
사찰의 공사와 함께 진행된 비석의 건립은 공민왕이 시찰의 건립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기 위하여 중국에서 좋은 돌을 구해오게 하고 이색(李穡)과 한수(韓修)에게 각기 비문을 짓고 쓰도록 명령하였었다. 하지만 공민왕은 공사가 진행 중이던 1374년(공민왕 23)에 승하하였고, 비문은 공사가 완료된 1377년(우왕 3)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비석은 『조선금석총람』 제작 당시 광통보제선사 터에 남아 있었지만 마멸이 심하여 읽을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다행히 『동문선(東文選)』과 이색의 문집인 『목은집(牧隱集)』에 비의 원문이 전하고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원문>
▨▨▨절동덕찬화공신 삼중대광 한산부원군 영예문관사(▨▨▨節同德贊化功臣 三重大匡 韓山府院君 領藝文館事)인 신(臣) 이색(李穡)이 왕명[敎]을 받들어 지음.
수충찬화공신 대광 상당군 진현관대제학(輸忠贊化功臣 大匡 上黨君 進賢館大提學)인 신(臣) 한수(韓脩)가 왕명[敎]을 받들어 씀.
수충찬화공신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 상호군 제조서운관사(輸忠贊化功臣 匡靖大夫 政堂文學 藝文館大提學 上護軍 提調書雲觀事)인 신(臣) 권중화(權仲和)가 왕명[敎]을 받들어 전액을 씀.
주상(우왕을 가리킴)께서 왕위에 오르신 네 번째 해인 정사년(우왕 3, 1377) 겨울 10월 초하루에 문하부판사 칠원부원군(門下府判事 柒原府院君)인 신(臣) 윤환(尹桓)과 시중 청원부원군(侍中 淸原府院君)인 신(臣) 경복흥(慶復興), 수문하시중 광평부원군(守門下侍中 廣平府院君)인 신(臣) 이인임(李仁任), 판삼사사 철원부원군(判三司事 鐵原府院君)인 신(臣) 최영(崔瑩), 찬성사 판판도사사(贊成事 判版圖司事)인 신(臣) 목인길(睦仁吉), 삼사사(三司使)인 신(臣) 이희필(李希泌), 찬성사 판예의사사(贊成事 判禮儀司事)인 신(臣) 양백연(楊伯淵), 상의(商議)인 신(臣) 양백익(梁伯益), 찬성사 판예의사사(贊成事 判禮儀司事)인 신(臣) 이성계(李成桂), 상의(商議)인 신(臣) 홍중선(洪仲宣), 평리(評理)인 신(臣) 변안열(邊安烈), 신(臣) 임견미(林堅味), 상의(商議)인 신(臣) 왕복명(王福命), 신(臣) 이자송(李子松), 평리(評理)인 신(臣) 조민수(曹敏修), 지부사(知府事)인 신(臣) 왕안덕(王安德), 정당문학(政堂文學)인 신(臣) 권중화(權仲和), 삼사우사(三司右使)인 신(臣) 최공철(崔公哲), 지부사 상의(知府事 商議)인 신(臣) 박보로(朴普老), 정당문학 상의(政堂文學 商議)인 신(臣) 이보림(李寶林), 밀직사판사(密直司判事)인 신(臣) 한방언(韓邦彦), 부사(副使)인 신(臣) 조인벽(趙仁璧), 상의(商議)인 신(臣) 우인열(禹仁烈), 지사(知司)인 신(臣) 조사경(趙思敬), 신(臣) 이림(李琳), 상의(商議)인 신(臣) 홍인계(洪仁桂), 동지(同知)인 신(臣) 심덕부(沈德符), 첨서(簽書)인 신(臣) 강군보(姜君寶), 동지 상의(同知 商議)인 신(臣) 강영(康永), 동지(同知)인 신(臣) 도길부(都吉敷), 상의(商議)인 신(臣) 김용휘(金用輝), 신(臣) 김광부(金光富), 동지(同知)인 신(臣) 안종원(安宗源), 첨서 상의(簽書 商議)인 신(臣) 곽추(郭樞) 동지 응양군상호군(同知 鷹揚軍上護軍)인 신(臣) 박종림(朴宗林), 신(臣) 유영(柳榮), 상의(商議)인 신(臣) 우현보(禹玄寶), 부사(副使)인 신(臣) 배극렴(裴克廉), 상의(商議)인 신(臣) 지용기(池湧奇), 신(臣) 설사덕(薛師德), 부사(副使)인 신(臣) 유실(柳實), 상의(商議)인 신(臣) 이인립(李仁立), 제학(提學)인 신(臣) 윤방안(尹邦晏), 부사(副使)인 신(臣) 유만수(柳曼殊), 상의(商議)인 신(臣) 왕빈(王賓), 부사(副使)인 신(臣) 목충(睦忠), 제학 상의(提學 商議)인 신(臣) 윤진(尹珍), 부사 상의(副使 商議)인 신(臣) 박수경(朴脩敬), 부사(副使)인 신(臣) 송광미(宋光美) 등이 서명하여 글을 올려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삼가 생각컨데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심에도 신성하고 공경하시는 마음을 날로 더하여 종묘를 받들고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고 기르는 마음과 서리와 이슬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새벽부터 저녁까지 마음에 담으시고 공경하고 엄숙하게 삼가고 계시니 아주 큰 신성한 덕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 등은 어리석음을 무릎쓰고 관직에 있면서 선왕(공민왕)께서 거듭하여 부탁하신 바를 전하에게 갚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정(至正 : 원나라 순제(順帝)의 연호, 1341~1367년까지 사용) 신사년(충혜왕 2, 1341)에 선왕께서 열두 살의 나이로 (원나라의) 수도에 입조하심에 (황제의) 총애가 비할 바 없었습니다. 기축년(충정왕 1, 1349)에 (황실의) 종친인 위왕(衛王)의 따님께 장가들어 (고려로부터) 수천 리 떨어진 북정(北庭 : 원나라의 궁궐)에서 친영(親迎 : 혼인식)을 행하였습니다. 신묘년(공민왕 즉위년, 1351)에 황제의 명을 받아 동방을 다스리게 되심에 (왕비는) 승의공주(承懿公主)로 봉해지셨습니다. 을사년(공민왕 14, 1365) 2월 16일에 공주께서 승하하시니 군신들은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라는 존호를 올리고 4월 임진일에 정릉(正陵)에 장사지내었습니다. 돌아가심을 아뢰자 황제께서는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로 추증하셨는데 슬퍼하셔서 올려주신 것입니다. 갑인년(공민왕 23, 1374) 9월 23일에 선왕께서 승하하심에 군신들은 경효대왕(敬孝大王)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10월 경신일에 현릉(玄陵)에 장사지냈습니다.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는 바로 두 분의 명복을 빌기 위한 곳으로 그러한 사실을 기록할 돌은 선왕께서 일찍이 중원에서 구하셨던 것입니다. 돌이 도착하였지만 (사찰을 만드는) 공사가 아직 진행 중이어서 새기지 못하였었는데, 공사를 감독하는 관리인 척산군(陟山君) 신(臣) 박원경(朴元鏡)과 밀양군(密陽君) 신(臣) 박성량(朴成亮) 등이 공사가 끝났음을 아뢰며 돌에 글을 새기기를 청하였습니다. 신 등은 가만히 생각컨데 신(臣) 색(穡 : 李穡)에게 기문을 짓도록 하고, 신(臣) 수(脩 : 韓脩)에게 글씨를 쓰게 하며, 신(臣) 중화(仲和 : 權仲和)에게 전액을 쓰게 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하여 삼가 청합니다.”
(이에) 임금님께서 명령하시기를 “너 색(穡)은 일찍이 문장으로 나의 돌아가신 아버님을 섬겼으니, 훌륭하신 덕을 드러내어 먼 후대에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너의 임무이다. 삼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신(臣) 색(穡)은 엎드려 스스로 생각컨데 임금님의 밝으신 뜻을 감당할 능력이 없사오나 감히 어기지 못하여 뜻을 받듭니다.
삼가 살펴보건데 이 절은 예전에는 시흥종(始興宗)에 속하여 있었으며 여러 차례 그 이름을 바꾸어 광릉사(光陵寺), 운암사(雲嵒寺) 등으로 한 것이 『산천비보지기(山川裨補之記)』에 실려 있습니다. 봉우리의 이름은 무선(舞仙)이고 물의 이름은 주지(周池)인데 모두 가리키는 바가 있습니다. 선왕께서는 불교의 경전에 정통하시고 선종(禪宗)을 높이셨으므로 “가르침이 본래 둘이 없는데 하물며 사원에 있어서인가”라고 하시고 드디어 조계종(曹溪宗)의 천화사(天和寺)를 시흥종에 속하게 하면서 “다시는 감히 광암(光嵓)을 돌아보지 말라”고 하고, 광암사(光嵓寺)를 조계종에 속하게 하면서 “다시는 감히 천화(天和)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시었습니다. (두 종파의) 싸움은 이로써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 절은 10대 사찰에 넣었는데 이 절이 첫 번째에 위치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골짜기를 광암이라고 하고 (사찰의) 이름을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라고 하였으니 대개 이로움이 사물에 미침에 통(通)하지 않는 곳이 없고, 건지지(濟) 못하는 곳이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처음에 공주께서 돌아가셨을 때 산릉의 터를 보기 위하여 사천대(司天臺)의 관원이 그 관속들을 이끌고 큰 언덕과 너른 언덕을 다녀보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광암의 골짜기에 이르러 점을 치니 길(吉)하였습니다. (이에) 곧 장례를 지내려 하였는데 선왕께서 직접 사천대의 관원인 우필흥(于必興)을 불러 명령하시기를 “조금 동쪽으로 하고 가운데 터를 쓰지 말라. 후일에 나를 그 서쪽에 장사지낼 때에 조금도 치우치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후 선왕께서 더욱 나이 들어 해로하지 못하고 태어남에 반드시 죽게됨을 안타깝게 느끼시어 담당 관청에게 (선왕의) 능을 만들라고 명령하시고 시각을 다투어 공사를 하셨는데, 여러 신하들은 감히 한 마디 말도 못하였습니다. 해마다 봄과 가을에는 좋은 날을 택하여 현릉의 친묘(親廟)와 능실에 참배하여 쓸었고 예를 마친 후에는 정릉에 행차하여 주위를 돌아다니며 둘러 보다가 날이 저물어서 떠나셨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높은 관직을 받고서 대궐문에 나와 은혜에 감사하는 의식과 지방으로 부임하는 관원들이 조정에 나와 하직하는 의식, 조정의 조회 등을 모두 능 아래에 와서 예를 행하였으며, 명절을 맞이하면 여러 관청들에서 많은 제물을 갖추어 제사지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공손하게 하였습니다. 아, (이것은) 예절이 변한 것이고 감정이 깊어진 것입니다. 감정에 의거하여 예가 생겨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에 적병을 피하여 남쪽으로 행차하였다가 계묘년(공민왕 12, 1363)에 서울로 돌아와서 성 남쪽의 흥왕사(興王寺)를 행궁으로 삼았을 때에 도적들이 야밤을 틈타 몰래 내정(內庭)으로 들어왔는데, 선왕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문예부(文睿府)의 밀실로 옮기시고 노국대장공주께서 그 방에 앉아 계셨습니다. 도적들이 칼을 들이밀어 대단히 위험하였지만 감히 해치지 못하였고 장군과 재상들이 들어와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흥왕공신(興王功臣)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공주께서 상왕을) 보호하고 도우신 공은 장수들에 비하여도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노국대장공주께서는 고요하고 굳은 덕을 타고나셔서 도덕 있는 임금의 배필이 되실만하셨고, 15년 동안에 한번도 자그마한 사적인 부탁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 공덕이 이처럼 빛나니 마땅히 그 영예를 누리시고 그 보답을 받으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달을 넘겨 출산을 하시다가 마침내 그 몸이 운명하셨으니 온 나라의 신민들은 아픔이 골수에 사무쳤으며 비록 백년 천년을 지난다고 하여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절을 만든 까닭인 것입니다. 하물며 이제 선왕께서는 하늘의 혼령으로 계셔서 여러 신하들이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빛나는 자태를 뵙지 못하니 그 몸과 넋[魄]이 묻혀있는 곳을 어찌 힘써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또한 양부(兩府)의 대신들이 반드시 광암사에 비석을 새기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 절의 신구(新舊)의 토지와 노비, 보원고(寶源庫)와 전해고(典廨庫)에서 지급하는 물건의 항목, (이 절을 관리하는) 도감(都監)에 속한 토지와 노비, 전물(錢物)과 철권(鐵券), 금인(金印) 및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맹세한 사실 등은 역사책에 기록하여 명산에 감추어 둘 것입니다. 그 맹세하는 말에 이르기를 “종묘와 사직의 여러 신들과 천룡팔부(天龍八部) 등은 하늘에서 살피셔서 이 맹세를 어기는 사람은 반드시 죄를 주고 용서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으니 돌에 쓸 것을 기다린 후에야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 그 생각하심이 깊었습니다.
(이 절을) 짓는 과정을 살펴보니 임자년(공민왕 21, 1372) 봄에 짓기 시작하여 정사년(우왕 3, 1377) 겨울에 공사를 마치니 미륵전, 관음전, 해장지당(海藏之堂 : 해장(海藏) 즉 대장경을 봉안하는 건물), 하늘의 별들을 모시는 곳, 안과 바깥의 참선하는 방, 일하는 사람들이 머물 곳, 승려들의 요사채, 식당, 손님들이 머물 방, 주방과 욕실, 종루와 고루 등 모두 1백 채 이상의 건물이 이루어졌다. 뾰쪽하게 솟은 지붕과 솟구쳐 오른 처마는 새가 날개를 펴고 까치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하였고, 푸른색과 붉은색의 단청은 물고기 비늘처럼 이어지고 안개와 같이 아련하였다. 범패의 도구와 꽃과 등의 공양구 등 모든 필요한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고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이에 크게 세 차례의 법회를 열어 완성을 알렸습니다. 산문의 일이 모두 마쳐지니 온 나라 신민들의 마음이 스스로 위로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아쉬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신(臣) 색(穡)은 삼가 생각컨데 경효대왕(敬孝大王 : 공민왕)께서는 총명하고 신성하셨고 믿음을 체득하고 따르는데 통달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공경하여 정성으로 교(郊)와 사(社)의 제사를 지냈고, 조상들을 공경하여 직접 관(祼)과 증(蒸)의 제사를 행하였습니다. 적전(籍田)을 갈아 농사를 중시하고, 여러 왕릉을 수축하여 조상들의 은혜에 보답하였으며, 선왕들의 초상화 및 진전(眞殿)을 모두 새롭게 하였습니다. 중국을 높이고 제후의 도리로서 삼갔으니 천하에서 훌륭한 예를 행하였고, 조상을 섬기면서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으니 천하의 큰 효성이셨으며, 훌륭한 태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였으니 천하의 큰 계책을 세우셨습니다. 적의 침입을 막아 모욕을 막아냈으니 천하가 그 지혜로움을 높이고, 죄를 잘 살펴서 형벌을 엄하지 않게 하셨으니 천하가 그 인자하심을 중히 여기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셨으니 천하가 그 은혜에 감격하고, 방생하고 살생을 금하였으므로 천하가 그 어짊에 감복하였습니다. 나아가 아악을 바르게 하고, 의복을 명확히 하였으며, 조정에서의 법도를 익히게 하고, 예속을 일으키셨으므로 한 시대의 훌륭한 법도가 아름답게 갖추어짐이 옛날의 훌륭한 시대보다 몇 만 배나 되었습니다. 다만 어려움이 많은 때를 만나고 오래 사시지 못하셔서 우리 백성들이 그 편하게 길러주시는 은혜를 제대로 입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안타까울 뿐입니다. 무릇 이 절에 머무는 사람들은 도(道)로서 자임하는 사람들로서 모두 “내가 국가를 복되게 할 수 있다” “내가 어둠[幽]과 밝음[明]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하며 살펴보니 그러한 말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로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신(臣) 색(穡)은 손을 올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바칩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밝고 밝도다 경효(敬孝)대왕의 덕이여
엄숙하고 온화하도다 노국(魯國)공주의 자태여
금슬과 같이 사이 좋았고 같은 무덤에 묻히었도다.
황지(黃紙 : 임금님의 敎書)가 신령스럽고 우뚝하니 상서롭지 못한 것을 모두 물리치도다.
총림이 이미 만들어짐에 금빛과 푸른빛이 환히 빛나도다.
뛰어난 스님들이 달려오고 종과 북은 아침 저녁으로 울린다.
제사를 성대히 지내니 바람이 시원하도다.
이 뜰에 내려 오셔서 사르는 향에 감응하신다.
왕국에 복을 내려서 자손이 번창하고
신민은 편안히 지내며 얼굴 색이 평안하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부처님의 은덕이니
넓은 삼계(三界)에서 부처님 아니면 누구에게 귀의하랴.
강물이 그치고 산의 돌은 닳더라도
이 도량만은 나라와 함께 무궁하리라.
미래의 사람들이여 여기에 새긴 글을 보라.
高麗國開城府光嵒洞廣通普濟禪寺之碑(篆 題)」
▨▨▨節同德賛化功臣三重大匡韓山府院君」
領藝文官事臣李穡奉 敎撰」
輸忠賛化功臣大匡上黨君進賢館大提學臣韓脩奉 敎書」
輸忠賛化功臣匡靖大夫政堂文學藝文舘大提學上護軍提調事雲
觀事臣權仲和奉 敎篆」
上之四年歲在丁巳冬十月朔門下府判事柒原府院君臣尹桓侍中淸原府院君臣慶復興」
守門下侍中廣平府院君臣李仁任判三司事鐵原府院君臣崔瑩賛成事判版圖司事臣睦仁」
吉三司使臣李希泌賛成事判禮儀司事臣楊伯淵商議臣梁伯益賛成事判禮儀 司事」
臣李成桂商議臣洪仲宣評理臣邊安烈臣林堅味商議臣王福命臣李子松評理臣曹敏」
修知府事臣王安德政堂文學臣權仲和三司右使臣崔公哲知府事商議臣朴普老政堂」
文學商議臣李寶林密直司判事臣韓邦彥副使臣趙仁壁商議臣禹仁烈知司臣趙思敬臣」
李琳商議臣洪仁桂同知臣沈德符簽書臣姜君寶同知商議臣康永同知臣都吉敷商議」
臣金用輝臣金光富同知臣安宗源簽書商議臣郭樞同知鷹揚軍上護軍臣朴林宗副使」
臣柳榮商議臣禹玄寶副使臣裴克廉商議臣池湧奇臣薛師德副使臣柳實商議臣李仁」
立提學臣尹邦晏副使臣柳曼殊商議臣王賓副使臣睦忠提學商議臣尹珎副使商議臣」
朴脩敬副使臣宋光美等署狀申言恭惟
主上殿下春秋鼎盛聖敬日躋奉
宗廟御邦家天地生育之私霜露愓之感夙夜于懷恭嚴寅畏雖甚聖德蔑以加矣臣等冐」
昩奉職惟懼弗戡
先王付託之重以報於
殿下也至正辛巳歲」
先王年十二朝京師寵遇無對歲己丑尙宗親衛王之女親迎于北庭數千里之地歲辛卯受」
命釐東 制封承懿公主歲乙巳二月十六日
公主薨群臣獻號曰」
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四月壬辰葬于正陵訃旣告 制贈徽懿魯國大長公主哀之也」
故加等焉歲甲寅九月二十三日
先王薨群臣獻號曰
敬孝大王十月庚申葬于玄陵廣通普濟禪寺盖所以追 二陵冥福之所而載事之石」
先王甞求諸中原石至矣而工役方殷繇是未刻也今董役官陟山君臣朴元鏡密陽君臣」
朴成亮等言功訖矣乞文之石臣等竊謂臣穡爲記臣脩書臣仲和篆爲宜爲諽昧死請」
敎曰汝穡甞以文墨事我
先考發揚盛德垂示罔極汝之職也其愼之哉臣穡隕越自度不是以稱塞明旨然敢奉▨」
謹按本寺舊隷始興宗屢改其額曰光陵曰雲嵒載於山川裨補之記峯曰舞仙水曰酒」
池皆有所指云
先王通釋典尙禪宗迺曰法本無二况寺院乎遂以曹溪天和寺隷始興宗曰無敢復顧光嵒」
也以光嵒寺隷曹溪宗曰無敢復望天和也爭端於是絕矣列之十刹於此爲第一旣而名」
其洞曰光嵒題其額曰廣通普濟寺禪盖欲利澤之及於物無所不通而無所不濟也初」
公主薨相視山陵司天臺臣率其屬景岡胥原靡所不到入光嵒洞卜之吉將葬也
上面諭司天臣于必興曰少東之母用其中他日葬我於其西使無或少偏焉未幾
上益感老之弗克偕生之必有終命攸司作陵室刻日興工群臣無敢出一言矣歲春秋擇良
日拜掃
顯陵」
親廟陵室禮畢則幸 正陵徘徊顧瞻竟日而去朝臣除拜上官謹詣閤門謝 恩出使官朝」
辭朝參皆詣 陵下行禮至節 祠百司盛饌助奠愈久愈謹嗚呼禮之變也情之著也緣」
情起禮其至矣乎歲幸丑避兵南 幸癸卯還京都以城南興王寺爲行宮賊用夜半潜入」
內庭」
上知之移御
文睿府密室
魯國坐當其戶賊露刃于前岌岌乎殆哉而不敢肆其毒將相得以入救今所謂興王功臣是」
巳則其保佑之功雖比之提甲誠無忝焉
魯國禀幽閑貞靜之德足以當文王之逑十五年間未甞有纎毫私謁又其功焯焯如此宜享」
其榮以食其報而彌月之誕竟殞厥身一國臣民痛入骨髓雖歷百千歲不可得而忘焉此」
寺之所由作歟矧今
先王在天之靈群臣莫獲聞乎其聲而親灸其耿光也則其體魄之所藏庸可不思所以盡力」
也哉此又兩府大臣必欲刻光巖之石也若其本寺新舊田民寶源庫典庫供應供辦都」
監田民錢物鐵券金印君臣同盟紀于史册藏之名山其盟之語曰
宗社諸神天龍八部監之在上有渝此盟必殛無赦則不待書之于石然後保其無他矣嗚呼」
其慮之也遠矣考其工程經始於壬子之春訖功於丁巳之冬彌勒殿觀音殿海藏之堂天」
星之位內外禪思之室執事有次居僧有寮膳堂賓位庫廩庖湢之所鍾皷之樓凡爲屋一」
百有奇鈎心鬪角鳥革翬飛浮碧鱗比流丹霞絢梵唄之貝華燈之供凡百所須無一不完」
秩然而序爛然而輝大設三會以落其成山門之事畢矣一國臣民之心度可以自尉也已」
亦可以無憾也已臣穡恭惟
敬孝大王聦明神聖軆信達順敬天地誠格郊社敬 祖宗躬祼烝甞畊籍田以先農修」
諸陵以追遠」
聖容眞殿悉新悉完尊 中國謹侯度天下之達禮也事
聖善盡子職天下之至孝也立
元良端國本天下之大計也折衝禦侮天下推其智議獄緩刑天下重其恕振窮恤患天下感」
其惠放生禁殺天下歸其仁至於正雅樂辨服章講朝儀興禮俗蔚然一代之盛度越古昔」
萬萬矣惟其遭時多難降年不永使吾民不及蒙其休養之澤嗚呼痛哉嗚呼痛哉凡居是」
寺以其道自任者必曰吾能福國家也吾能判幽明也度有以踐其言也斯爲幸矣臣穡謹」
拜手稽首而獻銘銘曰」
明明赫赫
敬孝之德
肅肅雍雍
魯國之容 友之琴瑟 藏同其穴 黃紙靈昌 訶禁不祥 叢林旣作 焜耀金碧
龍象蹴踏 鐘皷朝夕 有祀其豊 有冷其風 陟降庭只 焄藁感通 錫祚王國
子孫千億 臣民奠居 而康而色 而至於斯 繇佛之威 茫茫三界 匪佛曷歸
江流可斷 山石可爛 惟此覺場 與國无疆 告爾來者 視此刻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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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햐~~~~기가 막힌 자료를 올려주셨네요,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