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미열. 07

[베베룬]

07.

사람 사이에서도 N극과 S극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감정에 있어서 흐트러짐 하나 없는 남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여자에게 끌려버릴 때, 이는 곧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처음은 레스토랑 종업원, 두 번째에는 회사 주차장에 만취한 상태로, 세 번째 만남은 부하 직원으로. 어쩌면 되풀이 되는 우연에 속아 자석처럼 끌리는 걸 수도 있다. 이 나쁘지 않은 기류가 흐르는 이유는 누군가는 N극, 곧 상대편은 S극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낯 설은 이 느낌, 이 감정이 싫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은 곧 바로 해야 하는 성격임에도 연애에서는 그렇질 못했다. 사실 여자관계에 있어서 그는 매우 쿨하다라고 평가 된다. 단지 그는 함께 밤을 보내고, 밥을 먹는 여자들이 궁금하지 않을 뿐이다. 좋은 감정도, 사랑이란 감정도, 특히나 소유하고 싶은 감정은 더더욱 들지 않았다. 그냥 지나치면 좋은 추억이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애걸복걸 달려드는 여자도, 그처럼 쿨하게 가는 여자도 기억에 남질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어느 때와 같이 비서들에게 인사를 받으며 사장실로 들어섰다. 자신들이 하고 있던 일이 있기 때문에 방해하는 것을 원치 않아 비서들에게 눈길은 주지 않는 것이 그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지영을 살짝 보니, 그녀 또한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그는 책상위에 꽂혀있는 흰색 프리지아를 발견했다. 마지막 출근인 오 비서가 그의 스케줄 표를 전달하기 위해 그와 같이 들어섰다.

“오 비서. 이 꽃은 누가 가져다 놨지?”

그의 방에 처음으로 꽂힌 꽃.

“윤지영 씨요. 어머님이 꽃집 하신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윤지영 씨?”

“신입 직원입니다. 비서실에 곳곳에도 꽃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사장실은 그냥 치울까요?”

오 비서가 다가와 꽃병을 들려고 했을 때, 그가 저지했다.

“향이 좋아. 그냥 두도록 해.”

“예. 사장님. 그럼 스케줄 안내 해드리겠습니다.”

“오 비서. 오늘 마지막 날 아닌가?”

마지막 날을 기억해주는 그에게 감동을 받은 오 비서가 말했다.

“마지막 날이라 많이 아쉽습니다. 그동안 사장님을 모시면서 정말 배운 것 많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저녁 스케줄 있다면 캔슬해.”

“예?”

“오 비서 작별 회식이나 하지. 신입 비서들 환영회 겸.”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비서실에 그렇게 알리겠습니다.”

한 번 한성 그룹, 사장 비서실에 발을 담갔던 사람들은 업무 환경이 좋아 이직률이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가정사로 일을 그만뒀던 비서들도, 더 조건이 좋은 곳으로 이직했던 비서들도 그가 작별 회식을 챙겨주었다. 오 비서는 들뜬 마음으로 스케줄을 안내해준 뒤, 방을 나섰다. 그 때, 그의 목소리가 다시 오 비서를 붙잡았다.

“다음 주부턴 누가 스케줄 담당이지?”

“강미주 씨한테 지시할까 합니다.”

그와 더 친분이 있어 보이는 신입인 미주가 사장실에서 잘 해낼 것 같은 느낌에 오 비서가 내린 결정이었다.

미주와 마주칠 일이 계속 되면 그녀의 마음이 더 커질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런 상황을 막는 것이 옳은 판단이라 생각했다.

“이 꽃, 신입 직원 윤지영 씨 작품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그럼 사장실 청소 및 스케줄 담당은 윤지영 씨에게 지시하도록 해.”

비서실에서 제일 말단 직원은 청소 및 스케줄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스케줄을 담당한단 것은 매일 아침, 얼굴을 마주해야한다는 것. 그것도 가장 가까이. 그가 단지 미주의 마음을 정리시키기 위해 지영에게 이 일을 지시하는 걸까? 오 비서가 응답한 후, 사라지자 자리에 앉은 그가 책상 위에 꽂힌 프리지아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점점 이상해지는 군.”

그의 손이 하얀 프리지아 꽃으로 향했다. 새하얀 꽃, 맑은 그녀를 닮은 꽃이다. 창문 밖, 비서실에 열심히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지영을 보았다.

“저 여자 때문이라면 이상해질 만도 하지.”

이내 그의 입술이 아무도 모르게 호선을 그었다. 지영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자, 그가 리모컨을 조종해 사장실 윈도우 블라인드를 닫았다.

“………….”

뭐지? 분명 사장실 블라인드가 열려있었던 것 같은데. 지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업무에 집중하려 했다. 그 때, 사장실에서 나온 들뜬 오 비서의 목소리가 비서실에 울렸다.

“여러분. 오늘 저녁은 신입 비서 환영식 겸 제 작별 회식하신다 하네요. 사장님도 동행하신다고 하시니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주세요. 특히, 신입들은 꼭 참석해야 해요!”

오, 마이 갓! 그래. 환영식, 작별식, 회식, 다 좋다 이 말이야. 근데 사장님인 그가 참석한다고? 지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미주가 은근 좋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영에게 물었다.

“지영 씨. 회식 갈 거죠?”

“네, 넷?”

“사장님도 참석하신데요. 말단 직원들 회식까지도 챙기는 다정한 남자였다니….”

미주의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파랗게 질린 지영의 얼굴을 확인한 미주가 괜찮냐며 그녀를 불렀다.

“차, 참석해야죠. 물론. 첫 회식인데, 빠져서야 되겠어요? 하하. 사, 사장님 참 좋은 분이시네요. 비서들 환영식까지 다 챙겨주시고.”

울분을 삼키며 지영이 모니터로 고개를 박았다. 그와 한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시방석인데, 회식이라면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 아닌가! 엊그제 점심시간에 그가 다가와 떨어진 재킷을 주워 다시 매주었을 때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일도 제대로 못했고, 머릿속이 그의 생각으로 꽉 차서 혼란스러웠단 말이다. 지영은 제발 그와 얽힐 일은 없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지영이 그의 생각을 떨치고 있을 때, 미주가 혼자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자신의 머리를 콩콩 쥐어박고 있는 그녀가 귀엽단 생각을 하며 보다가 문득 시선에 들어온 종이 가방을 가리켰다.

“지영 씨. 이거 뭐에요?”

“아아. 이건….”

미주가 묻는 종이가방의 정체는 엊그제 그 문제의 재킷이 들어있었다. 재킷을 둘러준 건 고맙지만 저 재킷 때문에 그와 그런 일이 있던 게 아닐까 하고 한탄을 해보는 지영. 재킷이 없었다면, 재킷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가 그렇게 다가와 그녀의 심장을 들었다 내렸다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다가 빌리게 된 재킷이요. 참 고마우면서도…, 원망스러운 그런?”

“어제 치맛단 뜯어져서 허리에 두르고 있던 재킷 맞죠? 디자인만 봐도 남자 재킷이던데.”

“아아.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어떤 직원이 빌려주셨어요. 참 고마운 분이죠.”

“참 착한 사람이네요. 그 남자, 혹시 지영 씨가 마음에 들었던 거 아니에요?”

“네? 에이. 말도 안돼요.”

“남자들은 웬만해선 그렇게까지 안 해요. 바보가 아니고 서야 어느 누가 자기 재킷까지 벗어줘요? 제가 이런 쪽으론 일가견이 있는데요. 관심 없는 여자한테는 눈길조차도 안 주는 게 바로 남자에요.”

미주는 잘 알았다. 마음이 있는 여자에게 하는 남자의 행동, 마음이 전혀 없는 여자에게 하는 남자의 행동에 대해선 정확히 구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정말 그 남자가 저한테 관심이 있어서 이 재킷을 줬을까요?”

의미심장한 미주의 말에 지영은 의아함이 번졌다. 그래. 분명 그 남자 활짝 웃으면서 자신이 어디 부서의 어느 팀장인지, 이름까지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분명 옷을 돌려받기 위해 주소지를 알려주듯, 자기소개를 했겠지만 이상하리만큼 활짝 웃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재킷을 주었다. 그녀 같아도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할 것 같다.

“나도 내 치맛단 뜯어졌을 때, 재킷 둘러주는 남자 있었으면 좋겠다.”

“미주 씨가 그런 말 하니까 너무 웃긴데요? 미주 씨는 남자친구 없는 거예요?”

“네. 없어요. 누구 하나만 바라보느라고요.”

밝던 미주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아아. 좋아하는 사람 있구나….”

“네.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포기하고 싶지 않은, 아니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요.”

“제가 또 짝사랑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 말하는 건데 꼭 그 사람, 미주 씨 좋아하게 될 거에요. 이렇게 예쁘고 착한 미주 씨라면 분명 그 사람이 알아봐 줄 거예요. 그러니 포기 하지 말아요.”

그녀는 포기했었다. 첫사랑이 짝사랑으로 끝이 났다. 미주는 그런 아픔을 겪지 않길 바랐다. 짝사랑에 있어서 아픈 경험을 한 선배로써 지영은 미주를 작게나마 응원했다.

미주의 짝사랑의 대상은 누구일까? 이렇게 예쁘고, 어리고, 능력까지 되는 여자를 바라봐주지 않는 남자는 대체 어떤 여자가 좋길래 미주를 받아주지 않는 걸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복에 겨웠지! 이런 미주 씨같은 여자가 어딨다고! 지영은 의문이 들었지만 미주와의 유쾌한 대화를 이어나가다 다시 일에 몰두했다.

##

점심시간, 분명 홍보 1팀의 팀장이라던 하성민이란 남자도 점심은 먹겠지. 지영은 직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홍보 1팀에 들려 재킷을 전해주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재킷이 든 종이가방을 챙겨 나왔다. 비서실 팀원들과 직원 식당으로 향하던 도중,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 진선미? 뜻밖의 전화였다. 대학 동기인데 별로 친하지는 않은 친구였다.

“여보세요?”

[ 지영아. 나 선민데 지금 한성 그룹 앞에 디저트 카페거든. 이 근처에 볼일 있는 김에 너 좀 만나고 가려고. 지금 점심시간이면 잠시 나올래? ]

“선미야. 나 지금 선배들이랑 점심 먹으러….”

[ 나오는 줄 알고 이만 전화 끊는다? ]

뚝. 그녀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전화가 끊겼다. 전화 너머 크게 울려대는 선미의 목소리 때문에 이미 같이 엘리베이터에 있던 미주를 포함한 선배들은 그녀의 상황을 알아챘다. 그녀에게 급한 연락 같으니 갔다 오라며 말했고 지영은 이내 자신도 원하지 않게, 회사 앞 디저트 카페로 향했다.

“본인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느닷없이 찾아와선 만나자니! 여전히 이기적이구나. 진선미 너는!”

그녀가 툴툴대며 디저트 카페에 들어섰고 그 때, 양손을 들어 보이며 반기는 붉은 립스틱을 바른 선미가 그녀의 눈에 포착됐다. 그래도 오랜만에 반기는 얼굴에 쏘아 붙이자는 생각은 포기한 채 테이블로 다가가자 더욱 얄밉게 선미가 활짝 웃었고, 지영은 선미 옆에 홀연히 앉아있는 남자를 확인하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지영아. 잘 지냈니?”

지독히도 싫은 남자의 목소리. 지영이 자리에 앉았을 때 정확히 그녀의 이마에 인내천 자가 그려졌다. 눈치 없이 선미가 웃으며 반가운지, 다 연기인 건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상윤 선배. 오랜만이지?”

대학교 때 그녀를 지겹게도 쫓아다니던 상윤이다. 조용하다 싶으면 또 그녀의 뒤를 밟고, 사라졌다 싶으면 다시 나타나는 남자. 항상 상윤을 마주할 때면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저런 남자를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한동안 보지 않아 숨통이 트였던 것도 잠시 저 변함없는 능글맞은 미소를 보니 지영은 거북함을 느꼈다. 기름이 반질거리는 얼굴을 들이밀고 그녀와 가까이 앉은 상윤이 웃어 보였다.

“지영아. 축하해. 한성 그룹에 입사했다면서?”

그녀가 선미에게 휙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이게 무슨 일이냐며 말없이 물었다. 선미가 으쓱 거리며 뻔뻔하 목소리를 내었다.

“상윤 선배가 자리를 자꾸 만들어달라고 하는 거 있지? 선배가 너 엄청 보고 싶어 했어.”

지영이 선미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상윤은 원래가 실없고 여자를 밝히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졸업 후 튼실한 직장 없이 빈둥빈둥 놀기만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 이 카페 테이블에 셋이 앉은 상황에서 친구라는 이름의 선미의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절대로 친구가 잘 되는 꼴이 보고 싶지 않은 거지? 그녀가 선미를 살짝 쏘아보았다. 일하는 직장까지 찾아와 이러는 것 보니 제대로 선배 상윤과 엮어주려는 모양인가 보다. 선미는 일자리가 자신보다 나은 지영이 얄미워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짝을 지어주려는 거 보니. 그저 밥 먹으러 가려다, 된통 당한 꼴이 된 지영은 가시방석에 앉아 선미만 쏘아보며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날 궁리만 해댔다. 이 끔찍한 상황이 얼른 종료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머리를 굴려보려 했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녀보다도 선미가 먼저 선수를 쳤다. 곧 이어 선미의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소리를 내었다.

“나 먼저 약속이 있어서 일어나 볼게. 좋은 시간 가져 봐.”

일어서는 선미에게 살려 달라 애원의 눈빛을 내비춰 보지만 역시 예상한대로 도와줄 생각은 하지도 않는 듯 선미는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선미가 그대로 상윤에게 웃음을 흘리며 인사를 하곤 사라져 버렸다.

분명, 이 자리는 그녀의 선택권도 없이 얄팍한 선미의 자존심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희생자는 오로지 그녀일 뿐, 앞에 능글맞게 웃고 있는 상윤에게 있어서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몇 번의 통화를 시도해도 절대 받아주지 않는 지영. 그런 그녀를 포기할 생각 없는지, 쫓아다니는 상윤. 지영은 홀로 남겨진 지금이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이게 꿈이길 빌며 몇 초간 있다 눈을 떠보지만 절망스럽게도 여전히 상윤은 그녀를 보며 앉아있었다. 꿈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 악몽 중, 손에 꼽을만한 악몽이어야 한단 말이야!

“…사, 상윤 선배. 그동안 잘 지냈어요?”

지영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응. 밥 한 번 먹자니까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아. 네 연락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니?”

또 재촉이다. 또. 원래부터가 저런 인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의 스토커 행각도 같이 졸업했다고 생각했다. 졸업은 그야말로 해방이었다. 하지만 졸업 후, 1년에 한 번은 그의 얼굴을 이런 식으로 보는 것 같다. 상윤은 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싫다. 그의 앞에 앉아 있으면 윤지영의 인생이 꼬여버릴 것 같아서,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가 싫다. 이대로 일어서 회사로 돌아가면 될 것이었지만 왠지 초라해질 상윤을 생각하니 또 마음 편하게 돌아설 수가 없었다. 눈치를 살살 보다가 틈이 생기면 빠져나가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해 앞에 있는 생수가 담긴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지영은 물이 급했는지도 모른다. 입 안이 바짝 바짝 마르는 것이 이대로 가다간 목이 죄어 죽을지도 모를 기분이었다.

“어. 그 부분 내가 마신 건데!”

“케, 케켁!”

오오! 맙소사! 지영은 거의 입에서 물을 뿜어냈다. 테이블 위로 분출물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윤이 넉살 좋게 웃었다. 그가 마셨을 거라는 생각에 생수 컵이 무섭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우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 나랑 간접 키스 한 거다?”

우, 우웩! 그의 얼굴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옆에 두었던 종이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이만 갈게요, 라며 자신 있게 근질거리는 입을 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화장실, 다녀 올게요.”

지영은 상윤의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 화장실로 직행했다. 치마부분이 젖은 것 같아 기분도 많이 상했다. 은근 비싼 정장인데, 참 윤지영의 인생 왜 이럴까?

화장실에서 조용히 자신만의 포효를 울부짖으며 지영이 거울 앞에 서서 여러 가지 궁리를 하였다. 자리를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이대로 간다면 다시 상윤과 엮일 게 분명하다! 정말 지긋지긋해! 선배라는 이유로 대학교 내내 괴롭힌 걸로도 충분했다. 더 이상 그와 엮이기 싫었다.

“휴우….”

지영은 철저히 끊어내겠단 마음을 단단히 먹고 거울 속을 바라보았다. 눈에 힘을 주고 있는 그녀, 자신이 보였다. 어깨에 힘을 싣고 구두를 당당히 세워 걸며 화장실 밖으로 나서는데 어디선가 한 번 본 듯한 얼굴이 남자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엇.”

“윤지영 씨?”

이 남자. 이 남자는 분명 엘리베이터 안에서 재킷을 주던 남자. 그녀가 놀라는 표정으로 주춤대자 성민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이 카페에 점심 먹으러 왔어요?”

“아, 아뇨. 음…. 누구 좀 만나러….”

“이렇게 점심시간까지 쪼개서 볼 사람이면, 혹시 남자친구 있는 거예요?”

그녀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장난스럽게 짓는 성민에게 무언의 부정을 전달하기 위해 가로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말도 안됐다. 남자친구라니! 자신은 그저 불쌍한 희생양일 뿐이다.

“남자친구는 없다?”

“네, 없어요! 남자친구 그런 거.”

“그럼 동기들이랑 온 거에요?”

눈 한 번만 딱 감고 그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바로 앞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하단 듯 묻는 성민을 보며 지영이 꿀꺽 침을 한 번 삼켰다. 결과는 상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며칠 내내 우울하겠지만 지금은 그녀를 구해줄 구세주가 필요했다.

“혹시 저기, 저 남자 보이세요?”

지영은 혼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대며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고 있는 상윤을 가리켰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을 따라 성민의 눈길이 상윤에게 닿았다. 의자에 앉은 남자의 모습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성민은 표정을 피지 않은 채로 어깨를 으쓱 대며 대답했다.

“네.”

“친구가 저 선배하고 절 불러냈거든요. 저는 모르는 상태에서요.”

“아. 그럼 저 선배라고 하는 남자가 지영 씰 마음에 두고 있군요?”

굳이 응하진 않았지만, 그런 것이 분명했다. 아니다. 마음에 두고 있는 게 아니라 이제 한성 그룹에 붙었다니 그녀를 어떻게 해볼 요량일 것이었다. 성민을 향해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던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곤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녕 이 상황을 빠져 나갈 순 없는 것인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도와줄까요?”

그녀가 희망을 품고 성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오케이란 대답도 하기 전에 성민의 발걸음은 상윤이 앉은 테이블로 옮겨졌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화장실 복도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곤 그들을 마음 졸이며 바라보았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간 그가 상윤의 앞자리에 앉아 입을 먼저 떼었다. 몇 번 말을 주고받더니 상윤이 얼굴을 붉히며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곤 성민이 씩 웃어보이며 그녀를 손으로 불렀다. 지영은 기다렸단 듯, 쫑쫑 걸음으로 카운터로 달려갔다.

“나 봤어요?”

성민이 지영을 향해 검지와 중지를 올려 브이를 올려 보였다. 지영이 단숨에 달려가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안 궁금해요? 내가 어떻게 떼어냈는지.”

“…궁금해요.”

“에이. 별로 안 궁금하단 표정인데?”

“구, 궁금해요!”

지영이 재빨리 대답하자 그가 씨익, 환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누난 내 여자라고 했어요.”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누, 누난 내 여자요?”

“지영 씨가 나보다 누나는 아니지만, 연하 남친이 있다는 걸 안다면 분명 쉽게 떼어낼 수 있단 생각이 들었죠. 게다가 이렇게 잘생기기까지 한?”

“그랬더니 저렇게 도망가 버린 거에요?”

이 남자, 자신이 잘생겼단 걸 매우 잘 알고 있다. 그가 웃고 있으니, 주위가 환해진 느낌이었다.

그랬더니 상윤 선배가 도망갔단 말이야? 그래! 이러면 쉬웠을 것을! 남자가 있다고 했으면 저렇게 도망갈 남자였다. 자신보다 어리고 말끔해 보이는 남자에겐 쪽도 못 쓰고 도망가 버리다니 한 편으론 상윤이 측은해졌다. 하지만 지영은 단번에 일을 깔끔하게 처리해준 성민이 고맙기만 했다.

“네. 눈에 힘주면서 말하니까 도망가 버리던데요?”

“너무 고마워요. 잘생기기까지 한 성민 씨!”

“근데 너무 나쁘다. 원래 그렇게 자기가 싫은 사람한텐 매정해요? 안 그래 보이는데.”

“음…. 내가 그런가?”

“하핫. 자신이 그런 것도 모르다니, 점점 무서워지려고 그러는데요?”

지영의 반응이 웃긴지 그는 너털웃음을 냈다. 금세 카페 안은 성민의 웃음만으로 화사해졌다. 카페에 앉은 모든 여자들이 성민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제야 시선을 느낀 지영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든 여자들이 성민을 탐스럽게 쳐다보는 눈빛과 함께 그녀를 시기하는 눈빛도 함께 섞여있었다. 지영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성민에게 궁금증을 안고 물었다.

“근데 만나는 사람은 없었어요? 카페에서.”

“전 혼자 식사하고 있었죠.”

“혼자요?”

“워낙 사람이 많은 직원 식당은 싫어요.”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이렇게 카페에 나와서 간단히 혼자 밥을 먹는데도, 여자들의 눈빛이 쨍해대니. 사람이 붐비는 직원 식당에선 오죽 할까?

“지영 씨. 그거 알아요?”

“네?”

“내가 지영 씨 도와준 거, 두 번 째란 거.”

“그, 그러네요. 어떻게 이런 우연이 두 번 씩이나.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아! 그리고 이거!”

지영이 재킷이 든 종이 가방을 성민에게 건넸다.

“저번에 재킷, 너무 감사했어요.”

“세탁소에 맡겼군요. 냄새가 좋네요. 안 그래도 되는데.”

종이 가방을 받은 성민이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하얀 피부가 눈에 더 가까이 들어왔다. 뽀얗고 군더더기 없는 피부에 잘생기기까지 한 성민은 정말 그녀보다도 동안이었다. 자세히 보니 밝은 캐주얼한 정장이 그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우리 언제 한 번, 밥 같이 먹을래요?”

이 남자, 지금 나한테 밥 같이 먹자 한 거야? 그대로 얼어버린 그녀의 입이 굳게 닫혀 있자 성민이 재촉하듯 말했다.

“다른 부서인데도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신기해서 밥 먹자고 한 건데, 지영 씨는 싫어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 밥 먹자는 말 들은 거야, 윤지영? 이 남자한테?

“시, 싫지 않아요!”

혹시 밥 먹자는 말을 무르기라도 할까, 지영이 소리를 꽥 지르며 대답했다. 그래. 은정이 말대로 해보는 거야. 괜찮은 남자가 다가오면 물불 가리지 않고 이 때다 싶어 확 당겨버리는 것. 한 번 해보자! 윤지영!

“좋아요! 우리 밥 먹어요!”

성민의 미소에 지영은 느낌이 참 좋았다. 홍보 1팀 팀장, 하성민. 이 남자 뭔가 모르게 편안하고 느낌이 좋다.

##

“어이. 신입. 너 이거 아주 중요한 서류니까 네가 직접 우체국가서 등기우편으로 붙이고 와. 회식은 강남에 그 왜, 연예인 많이 오기로 유명한 와인바 알지?”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저 먼저 우체국 들렀다 회식하는 데로 가겠습니다!”

잠잠하다 했던 한 비서의 심부름에 지영은 활짝 웃으며 대답을 했지만, 회사를 나서자마자 기운이 빠졌다. 군말 없이 지시하는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신입이 할 일이지만 한 비서는 그녀에게만 자잘한 일들을 떠미는 것 같았다. 당연 진욱과 알고 지내는 사이인 미주는 평탄한 회사 생활을 하는 듯 보였지만 그녀는 달랐다. 원래 남에게 일을 떠맡기기 좋아하는 수행 비서인 한 선배님의 소문은 자자했다. 이제 떠나는 오 선배님이 말하기를 한 선배가 그래도 착한 사람이니 너무 기분나빠하지 말라며 그녀를 위로해줬다.

오늘따라 세찬 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퇴근할 때쯤이면 어두워지는 하늘이 꿀꿀한 것을 보니 기분마저 꿀꿀해졌다. 비가 오려나? 지영은 잽싸게 가까운 우체국에 들러 일을 처리했다. 우체국에서 나서는 길에 오 비서의 전화로 회식 장소를 확인한 지영. 택시를 잡기 위해 발을 한걸음 내딛으니 어깨에 툭, 툭 비가 떨어졌다.

“우산도 없는데….”

후두투둑. 예고도 없이 내리는 비를 지영이 손을 뻗어 확인했다. 갑자기 그녀의 앞길을 방해라도 하듯 세차게 내리는 비. 지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얼른 횡단보도로 뛰어가 택시를 잡을까 했지만 분명 이대로 갔다간 비 맞은 생쥐 꼴로 회식자리에 참석하게 될 것이었다. 지영은 그저 빗물을 손에 담아보며 비가 조금 그치길 바라며 기다렸다.

얼마나 흘렀을까?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다. 지영은 사장님이 오기 전에 와야 한다는 오 비서의 연락을 받은 후,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방을 머리에 얹고 횡단보도로 달리기 위해 준비했다.

그 때였다. 검은색 세단의 차가 그녀의 시선 앞 대로변에 정차한 건. 이내 조수석 쪽 창문이 열렸다. 그 안엔 그녀가 그렇게도 마주치기 두려워하는 눈빛이 반짝이며 그녀를 향해 있었다.

“………….”

지영은 뛰려던 것을 멈추고 말없이 가방을 내렸다. 어느새 세단 운전석에서 나온 남자는 우산을 핀 뒤,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비를 숨기 위해 계단 위에 서있는 지영을 올려다보는 남자.

“사, 사장님.”

“윤지영 씨. 여기서 뭐하는 거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 그는 바로 현진욱이었다. 그들은 비를 가르며 서로의 눈동자를 한동안 깊이 바라보았다.

요즘 글이 왜이리 잘써지는지, 기분이 룰루~ 하네요 ^^

렛미인 여러분, 미열 함께하고 계신 것 맞죠?!

오늘 연극을 보러가는데 두근두근 설렙니다~

제가 사는 곳은 날씨가 꾸릿꾸릿해서

지영과 진욱의 비오는 장면을 연출해봤어요!

다음편 기대해주세요^^

30일 재생기간 만료

가사 뮤비

 

[달려라하니]

타이밍 좋게 지영 앞에 나타났네요 사장님이!! ㅋㅋㅋㅋ
다음편이 너무 기대됩니당!!

[엄마미워]

잘보고가요

[사랑ㅎH서 슬픈날]

너무 잼있어요 ㅎ 다음편두 기대하겠습니다

[레모나.]

와웅 재밋어요ㅋ.ㅋ

[클래식]

잘보고갑니다

[맑은언어]

다시봐도 잼나네요 ^^

[우히히]

잘보고가요~~너무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