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부사의 주요 업무]
1. 대민 업무 농업은 조선 시대에 가장 중요한 생업으로서 백성의 근본이었으며, 이를 흥하게 하는 것이 고을 수령의 으뜸가는 책무였다. 1764년(영조 40) 동래부에서는 농업에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 농우(農牛)[소]가 돌림병으로 많이 폐사하는 바람에 농사에 큰 차질이 생겼다. 당시 동래 부사 강필리(姜必履)[1764년 8월~1766년 11월 재임]는 관아의 비용을 마련해 암소 70마리를 사들이고, 이를 소가 없는 면리에 나누어 주어 돌아가며 경작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관아의 소에 대한 사육 책임과 관리 지침이 포함된 절목(節目)[기준 법령]을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이듬해에 펴낸 『동면하단 관우 절목(東面下端官牛節目)』이라는 법령이었다. 관아에서 백성들에게 소를 나누어 경작하여 농사짓게 하고, 송아지를 번식하게 하여 영구히 면리마다 고루 퍼뜨리게 한 것이었다. 또 농사에는 수리 시설이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수령이 긴밀하게 챙겨야 할 부분이었다. 동래 부사 이경일(李敬一)[1787년 2월~1788년 9월 재임]은 낙동강 하류에 접해 있는 사면(沙面)에 제방을 쌓아 농사 피해를 줄이고, 개간 사업을 하여 땅 약 1,000여 마지기를 새롭게 확보할 수 있었다. 고을 백성들이 그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이경일 축제혜민비[府使李敬一築堤惠民碑銘]이다. 또 고을의 호구는 가장 중요한 농업 노동력이면서 부역과 군역 부과의 기본 단위였다. 따라서 수령은 호구를 증대시키는 것이 중대한 임무였으며, 동시에 정기적으로 호구를 파악하게 되어 있었다. 동래 부사는 아전들로 하여금 고을의 면리 단위로 제출한 호구 단자(戶口單子)를 취합하여 호적 대장(戶籍大帳)을 작성하게 하였다. 1789년 작성된 『호구 총수(戶口總數)』에 의하면 동래부는 8개면에 104개리로 조사되어 있고, 인구는 2만 8,864명이었다. 이어서 1832년(순조 32) 간행된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 방리조(坊里條)에 의하면 읍내면, 동면, 남촌면, 서면, 북면, 동평면, 부산면, 사상면, 사하면 등 9개면에 호현리, 명장리 등 114개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인구는 3만 2,158명으로 약간 증가된 통계로 나타났다. 1896년(고종 33) 9월 반포된 대한제국 말 「호구 조사 규칙(戶口調査規則)」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조선 시대의 호적 운영 원칙에 따라 호구를 관리하였다. 가호별로 호주와 배우자 및 각각의 4조(祖)의 나이와 직역 및 노비의 동태 등을 상세히 조사하고, 이를 5가(家) 단위마다 1통(統)으로 하여 이(里)·면(面) 단위로 상향하여 동래부의 호적 대장이 작성되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 호적은 식년(式年)에 맞춰 3년에 한 번씩 개수하였는데, 동래부에서는 이 과정에 서사(書寫)[문서 작성자]를 맡은 사람들이 호구 단자를 제출하는 각 가호로부터 분단채(分單債)[단자 수수료]로 5푼에서 2전까지 받는가 하면, 동네마다 다니면서 식사와 돈을 요구하는 등 폐단이 많았다. 그리하여 동래 부사 박기수(朴綺壽)[1817년 9월~1820년 2월 재임]는 호적과 관계되어 부당하게 요구하는 적비전(籍費錢)을 폐지하여 백성의 고질을 제거하고자 개혁 조치를 취하였다. 이것이 바로 1819년 윤4월에 반포한 「동하면 적폐 이정 절목책(東下面籍弊釐正節目冊)」이다. 지금 아쉽게도 조선 후기의 동래부 호적 대장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다행하게도 대한제국 말 호적 대장의 일부는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1908년(순종 2)에 작성된 『경상남도 동래부 동하면 장적(慶尙南道東萊府東下面帳籍)』이 그것이다. 이 같은 대민 통치 항목 중에서 부세(賦稅)와 군역(軍役)의 운영, 환곡(還穀)의 운영, 지역 사회 내에서의 제반 문제로 제기되는 등장(等狀)·민장(民狀)의 처리, 옥사(獄事) 등은 관내 백성들의 생활 내지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들로 가장 일상적인 업무였다. 18~19세기에는 지방 고을의 재정 부담이 증대하는 추세였다. 따라서 동래 지방에서도 늘어나는 재정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서 토지로부터 징수하는 결세(結稅)를 늘이거나 고리대(高利貸) 방식으로 환곡제 운영을 하였다. 그 운영 방식으로 재임 중에 동래 부사는 식리전(殖利錢)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군뇌청(軍牢廳)의 군뇌와 사령청(使令廳)의 사령들을 위한 급료로 지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향청(鄕廳)·무청(武廳)·질청(作廳)으로 구성되는 ‘삼청의 수족’이라 불리는 관부의 하급 실무자들이었다. 동래 부사는 이들의 급료를 조달할 방도를 마련하도록 삼청에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삼청 실무자들은 중앙 관부나 왕실에 세금을 바치는 둔토(屯土)를 매각하여 그 수입으로 전채(錢債)를 놓아서 이익을 불리려고 노력하였다. 둔토의 매각 대금은 4,928냥이나 되었으며, 그중에서 957냥을 잘라서 먼저 매달 삭료로 나누어 주고, 그 나머지 3,971냥을 각소에 나누어서 원전과 이윤을 합쳐서 지급하려 하였다. 그런데 애초에는 군뇌와 사령들의 임금을 쌀로 환산하여 지급하려 하였으나 그 병폐가 생길 우려가 높아서 돈으로 지급하려 한 것이었다. 바로 이 방책은 김석(金鉐)[1859년 1월~1859년 6월 재임]이 동래 부사로 재임할 때 재정 보충책으로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그의 정무 일기인 『내부 일기(萊府日記)』에 보인다. 이때 동래 부사는 이상과 같은 조치를 취한 정책 집행 과정과 관련 절목을 상급 관청에 보고하였다. 이런 보고문을 품목(稟目)이라 하였다. 물론 이 같은 조치는 그 이전에도 비슷한 성격의 대책을 도색한 동래 부사들이 있었다. 더구나 동래의 지역적 특성으로 동래 부사는 여타 고을과 달리 또는 그 이상으로 이행해야 할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즉 관방 시설의 수축, 왜관의 통제, 왜사의 접대 등으로 이것들이 가장 막중한 업무였다. 2. 성곽 업무 성곽은 크게 나누어 읍성과 산성으로 구분된다. 읍성은 부·목·군·현 등 고을 중심지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은 것이고, 산성은 도읍이나 도시 등 해당 지역을 외곽에서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시대는 마치 성곽 국가라고 할 정도로 도읍은 물론 각 군현과 주요 산지에도 성곽을 축조하였다. 먼저 동래읍성은 동래 부사가 고을을 통치하고 왕명을 받드는 동헌과 객사 등 핵심 관청과 소속 기관들이 있는 중심 읍치를 둘러싼 성곽이다. 고을 백성은 읍성 안과 밖에 각각 거주하였으며, 동래 향교나 사직단 등 성 밖에도 관에서 운영하는 시설이 있었다. 이와 같이 통치의 권위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읍성을 늘 관리하며 때로는 보수와 증축을 하는 것이 동래 부사의 중요한 임무였다. 그래서 부사는 군사 장교들과 함께 자주 성곽의 시설을 점검하거나 순시하기도 하고, 경상도 관찰사나 조정에 성곽 문제에 대하여 견해를 상계하기도 하였다. 특히 동래 부사 정언섭(鄭彦燮)[1730년 8월~1733년 1월 재임]은 동래가 나라의 중요한 관문임을 인식하여 임진왜란 때 허물어져 부분 보수된 동래읍성을 증축할 것을 계획하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1731년(영조 7) 정월에 축성의 재가를 얻어 공사를 시작하여 200여 일 만에 완공하였다. 읍성 수축을 마친 뒤에 수성청(守城廳)과 수성창(守城倉)을 설치해 군대와 곡식 비축에 만전을 기하였다. 완공한 결과 대략 읍성의 둘레가 3.8㎞, 높이 4m 내외의 우람한 성곽이 되었다. 읍성 수축에 동원된 일꾼 5만 2,000명, 쌀 4,500섬, 베 1,550필, 돈 1만 3,000냥이 쓰였는데 모두 정언섭 부사가 낸 것으로 백성에게 걷지도 국고를 축내지도 않고 하였다는 점에 의미가 컸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증축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내력을 상세히 적어 1735년(영조 11) 동래 부사 최명상(崔命相)[1734년 6월~1736년 4월 재임]이 내주 축성비[萊州築城碑記]라는 커다한 비석을 건립하였다. 비석의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 내역과 결과 등의 사실을 기록하고, 뒷면에는 축성에 참여한 사람의 직책과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동래읍성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축성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그로부터 30년 지나서 1765년(영조 41) 가을에 동래 부사 강필리가 비석을 농주산에서 이전해 왔고, 이어 1820년(순조 20) 가을에 동래 부사 이화(李墷)[1820년 3월~1821년 2월 재임]가 비석을 다시 이전해 세웠다. 여기에도 도감(都監) 이하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 공사 때 옛 성의 남문 터에서 발견된 유해들을 거두어 동시에 출토된 부러진 창이나 화살촉과 함께 안장하면서, 정언섭 부사는 직접 그 내력을 써 놓았는데 바로 임진 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다. 현재 무덤과 비석은 온천장 금강 공원 안에 있다. 19세기 후반에 와서 동래 부사는 다시 읍성을 보수하며 수축하였다. 『내부 일기』에 의하면, 김석 부사는 3월 초10일 당일 조반을 먹고 성 쌓기 노역하는 곳에 가서 일꾼들에게 술과 음식을 먹인 뒤에 관아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또 3월 28일 동래 부사가 적취정(積翠亭)에서부터 성을 순시한 뒤에 해질 무렵 관아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어 4월 초7일에는 정원루(靖遠樓)에 가서 모대전(牟代錢)[보리철의 조세가 모조(牟租)이고, 그것을 금전으로 대신 납부하는 돈] 1,200냥을 동원된 역부 각 1명마다 1냥 2전씩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역사(役事)를 마치고 나서 5월 초10일에 동래 부사는 각 부분에 사용된 지출 기록을 정리하였다. 동래부의 성을 수축한 구역을 7개소로 구분하여 중군 이하 천총·파총·별장·초관 등 군관들이 도패장(都牌將)·1패장·2패장으로 나누어 맡았다. 구역은 남문~북문[1소], 서문~암문[2소], 암문~북문[3소], 북문~인생문[4소], 인생문~곡성[5소], 곡성~동문[6소], 동문~남문[7소]이었다. 그 내역은 짐꾼들의 노임과 회(灰)·기와·개석 등 각종 잡비의 지출 기록이었다. 이렇게 성을 수축 내지 보수하는 일이 중요하다 보니 동래 부사는 고을 백성을 동원하는 역사를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에는 10년 지나 동래 부사 정현덕(鄭顯德)[1867년 6월~1874년 1월 재임]이 다시 크게 수축하였고, 마지막으로는 1892년(고종 29) 동래 부사 이호성(李鎬性)[1891년 7월~1893년 6월 재임]이 읍성의 체성(體城)[성벽의 몸체]과 여첩(女堞)[성벽의 윗부분~머리 부분] 등을 복구하는 사업을 수행하였다. 특히 이호성 부사는 금정산성의 동헌, 내아, 지방고, 동문루, 군기고 등도 함께 중건하였다. 동래 지역에서 국방을 튼튼히 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고 또 고을 백성을 보호하여 재난에 대비하는 책무는 부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 최초로 침략을 당한 곳이기 때문에 동래의 요새가 되는 금정산성의 중요성은 항상 강조되어 왔다. 금정산성은 1703년(숙종 29) 금정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대규모 산성이다. 하지만 쌓은 직후 성곽이 지나치게 커서 방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일시적으로 폐기되었다. 그 후 100여 년 지나 산성 방어론이 대두하면서 1807년(순조 7) 동래 부사 오한원(吳翰源)[1806년 2월~1809년 2월 재임]이 주도하여 재건하였다. 금정산성은 유사시에 초기 전투를 장기전으로 이끌 수 있는 전략적 거점지라는 오한원 부사의 건의가 받아들여져서, 경상 감영으로부터 별비전 2,000냥을 지급받아 축성 비용과 관리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당시는 농촌에서 유리되어 토지도 없고 경작할 땅도 없는 유민층이 산성 안에 들어와 거주할 곳을 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둔전을 설치하고 여기서 경작할 사람을 모집하여 들어와 살게 하였다. 이때 경상 감영에서 산성전(山城錢)을 지급하여 둔전을 설치하고 경작하는 데 모집한 농민층을 산성을 수호하는 병력으로 활용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오한원 부사의 임기는 특별히 1년간 연장되어서 기본적인 공역 사업을 마칠 수 있었다. 19세기 초 당시에 이미 100여 호의 주민이 산성 마을로 이주해 와서 살았는데, 둔전이 확장되면서 이들이 거주하는 산성 마을의 규모도 확대되어 나갔다. 그런데 오한원이 산성 쌓기를 건의하기 직전에 마침 왜관에서 왜인이 도망쳐 나오는 난출(闌出)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즉시 수습되었지만 왜관의 왜인들 동향에 주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금정산성의 보수와 재건 사업이 신속하게 결정되어 진행될 수 있었다. 축성 사업이 완료되면 성곽의 관리를 위해 절목을 새로이 제정하여 지켜 나가도록 하였다. 오한원 부사는 역관 문제·군정 문제·금정산성 수비 문제 등과 관련된 변통책을 제시한 상소 초(上疏草)를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동래 향청 고왕록(東萊鄕廳考往錄)』[1605~1903년까지의 동래에 관한 주요 문서들이 초록되어 있음]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부사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오한원 청덕선정비[府使吳公翰源淸德善政碑]로 금강 공원의 임진 전망유해지총 경내에 있다. 이곳을 비롯하여 동래부 동헌과 동래 향교 일원 및 부산광역시립박물관 경내에 조선 후기 동래 부사의 선정비, 송덕비, 불망비 등 비석들이 현재 남아 있다. 3. 하천 준설 임무 동래부 관내에 흐르는 하천은 농사짓는 데 수리용으로 끌어 쓰기도 하며, 주민들의 생활용으로도 쓰였다. 더구나 하천은 수해가 일어나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큰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준설을 하여 하천을 관리해야 하였다. 하천 준설에는 지역 백성들을 면 단위로 나누어 부역을 동원하였다. 『내부 일기』에 의하면 김석 부사는 1859년 2월 28일 하천을 준설하는 현장에 가서 부역하는 주민들 각 1명에게 1전 3푼씩으로 음식을 베풀어 먹게 한 뒤에 관아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같은 준천 사업과 함께 도로나 교량의 보수 수축도 부사가 챙겨야 할 중요한 민정 업무였다. 이는 사람과 마차가 반드시 왕래해야 하는 길, 즉 기반 시설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역대 동래 부사들이 도로 정비와 하천 준설을 할 때 대개 각 동의 일꾼을 동원하여 해결해 왔다. 1763년(영조 39)에는 중앙에서 대규모 통신사 관료와 일행들이 방문하면서 급하게 각 동의 일꾼에게 맡기게 됨에 따라 많은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더구나 도로 보수에 각 해당 지역 전답의 경작자가 춘추(春秋)로 보수하는 규정이 있는데, 유독 동래부에서만은 일꾼을 동원하여 보수함으로써 더욱 안쓰러운 지경이 되었다. 이에 동래 부사 유강(柳焵)[1791년 3월~1792년 6월 재임]은 종래에 도로와 교량의 보수를 위하여 별도의 일꾼을 동원하는 민폐를 폐지하여 도로 보수와 하천 준설은 도로변이나 하천변의 전답 경작자가 책임지고, 읍내 또는 산이나 고개의 도로 보수는 인근 마을에서 도로 감관(道路監官)[도로 보수 감독자]을 정하여 시행토록 결정하는 문서를 정식화하였다. 이것이 바로 1792년(정조 16) 제정한 『동하 도로 교량 준천 수치 절목(東下道路橋梁濬川修治節目)』[임자 유월 일(壬子六月日)]이다. 동래부 관내의 주요 도로 체계는 읍성의 동문 밖으로 광제교를 건너 경상 좌도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으로 통하는 대로가 있었고, 남문 밖으로 세병교를 건너 부산진 첨절제사영(釜山鎭僉節制使營)으로 향하는 대로 및 영선 고개를 넘어 초량 왜관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서문 앞에는 한양으로 향하는 대로가 뻗어 소정역(蘇亭驛)[동래구 온천동]과 십휴정 기찰(十休亭譏察)[검문소, 금정구 부곡동]을 거쳐 양산과 울산 방향으로 길이 나뉘어 있었으며, 기비현(其比峴)[만덕 고개]을 넘어 구법곡 기찰(仇法谷譏察)[검문소, 북구 덕천동]을 경유하여 양산으로 통하는 대로가 있었다. 중요 하천은 동래읍성을 감싸는 범어천(梵魚川)[온천천]과 사천(絲川)을 비롯하여 부산진의 좌자천(佐子川) 등이 있었다. 4. 외교 업무 동래 부사에게는 대외 업무가 여타 고을과 달리 매우 중요한 책무였다. 대민 통치와 같이 일상적인 행정 업무보다도 오히려 외교적 업무의 경우, 즉 대일 외교 측면에서 왜관을 잘못 통제하였거나 또는 일본[대마도·왜관]에 대한 정보 보고가 제대로 없거나 오류가 되었을 때 교체의 사유가 되는 경우가 23.6%나 될 정도로 많은 편이었다. 동래의 외교 업무는 제반 대일 관계상 업무였으며, 그것은 바로 왜관과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 간의 민감한 외교 관계를 감안할 때, 왜관의 일상적 업무나 일본 사신이 왕래할 때의 접대와 처리 등의 문제는 중요한 외교 업무였다. 왜관과 관련된 일상적인 업무는 경상 감사나 조정의 결정을 따르지 않아도 되므로 동래 부사의 판단과 능력에 따라 처리하였다. 동래부는 왜관이 설치되어 있어서 대왜 교섭·전달의 창구 구실을 하였다. 대차왜(大差倭)·차왜 등 대마 사절단을 접대하는 일, 잠상(潛商)[관청의 허가 없이 몰래 장사하는 자]이나 주민들의 왜관 출입을 통제하는 일 등이 동래 부사가 해야 할 책무였다. 동래 부사가 여러 관속을 거느리고 동래읍성을 출발하여 초량 객사까지 가서 대마 사절단을 접대하는 과정은 『동래 부사 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동래읍성, 관원의 행렬, 왜사 숙배식(倭使肅拜式), 연향 의식을 치르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흑단령을 입은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 및 훈도와 별차 등 관속들이 초량 객사 안에서 차왜들의 숙배를 받고, 그들이 진상하는 물건을 간품[물품 검사]하는 장면 등도 볼 수 있다. 초량 객사를 비롯하여 연향 대청(宴享大廳)·성신당(誠信堂)의 건물 배경이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지방의 수령[부사, 목사, 군수, 현령·현감]이 조정에 업무를 보고할 때는 항상 감사[관찰사]를 경유하여 상계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원래 동래도 중층적인 보고 체계에 의해 동래 부사~경상 감사~중앙 각처~국왕으로 이어지는 일원화된 행정 체계에 따라 상부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동래의 경우 왜관과의 소통 부분은 한양에서 파견된 왜학 역관이, 왜관에 있는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와 부산 연안에서의 업무 통솔은 부산 첨사가, 차사(差使) 같은 일본 사절이 왔을 때에는 접위관(接慰官)이, 무역은 호조에서 파견된 수세관(收稅官)이 주관하였다. 그러면 동래 부사는 각 직임자에게 올라온 일본의 정세를 수합하여 보고하였다. 하지만 동래에서는 일본인과 관련된 중요한 동향이나 정보 사항이면 사태의 신속성과 중요성을 감안하여 동래 부사가 경상 감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국왕에게 장계(狀啓)로 보고하는 이른바 직계(直啓)의 권한이 주어졌다. 이 조치는 중국 청나라와의 육로 교통로상 변방의 수령이라 할 수 있는 의주 부윤(義州府尹)의 관례에 따른 것이었다. 의주와 동래에서의 이 같은 조치는 여타 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변방의 경계에 위치한 도시가 지니는 특성이었다. 그리하여 동래에서의 직계 제도는 1610년 9월 조존성(趙存性)[1610년 9월~1611년 11월 재임] 부사 때부터 시행되었다. 이는 분명히 임진왜란을 겪은 직후에 변방에 대한 위기의식과 일본이 다시 침략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동래 부사는 한양에 직계한 후에 반드시 경상 감사에게 별도로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동래 부사는 일상적으로 부산 첨사와 함께 왜관에서 일어나는 일과 일본인의 동정을 매월 정기적으로 경상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주로 매월 일본 선박의 왕래에 대한 기록과 왜관 내의 동정 및 왜관의 건물 상태나 수리 관련 내용들이었다. 일본 사절단이 대마도로부터 부산포에 오면 주로 대구 감영에서 경상 감사나 한양에서 접위관이 내려와서 대마도 사절을 접대하게 되어 있었다. 사안이 조금 더 중하면 선위사(宣慰使)가 직접 내려와서 사절과 교섭하고 나서, 그들이 가져온 예단 선물을 선위사나 경상 감사가 직접 검사하였다. 보통 일상적으로 왜관의 우두머리인 관수왜(館守倭)에 대한 접대는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가 함께 주관하여 베풀었고, 대차왜에 대한 접대는 한양에서 내려온 접위관과 함께 주관하였다. 그렇지만 관수왜는 대마번의 지시를 받아서 왜관에서 수동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존재로서, 대일 외교 차원에서 동래 부사와 동격이 될 수 없으므로 결코 외교 상대는 아니었으며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동래 부사와 동격의 외교 상대였다. 동래부에서는 이처럼 대일 외교나 무역의 통로인 왜관의 존재로 동래 부사의 위상이 한층 높은 편이었다. 원래 문관 인사권은 이조에서 추천하였지만, 1642년(인조 20)부터 동래 부사는 이조가 아니라 비변사(備邊司)에서 천거하기 시작하면서 그 과정이 강화되었고 부사의 위격이 향상되었다. 아울러 동래 부사의 자질 내지 자격요건으로서 변방 외직의 경험이나 일본에 대한 정보 인식이 높은 인물이 우선적으로 평가되었다. 비변사에서 추천하는 문관 출신 지방관은 수원 부사, 강화 유수, 의주 부윤, 광주 부윤, 평안 감사, 경상 감사 등이었다. 이들 지역은 한양을 둘러싼 외곽 요충지, 중국·일본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국경 지역의 지방관이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