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
성경본문 에스라 9:5-7
5.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7. 우리의 열조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열방 왕들의 손에 붙이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 같으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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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얼마 전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15살짜리 남녀가 친구 앞에서 보란 듯이 성관계를 갖고 또 이것을 비디오로 찍어서 인터넷 싸이트에 올렸다는 것입니다. 남 앞에서 자기의 알몸이 드러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남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를 갖고, 이것도 모자라 인터넷을 통해서 대중 앞에 공개했다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의 정말 큰 문제는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아니고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란 자신의 약점이나 결점이 남들 앞에 드러나거나 밝혀졌을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자신의 태도나 행동이 다른 사람 또는 공동체라는 거울을 통해서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에 비난을 받게 되거나 문제로 지적 되면서서 생겨나는 일종의 도덕적 관념입니다.
이런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은 남들이 뭐라 하든지 남들에게 어떤 영향이 미치든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행동을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을 잃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도덕적 관념이 무너진 것입니다. 자기 행동을 돌아볼 거울이 없고 도덕적 관념이 무너졌으니 자기가 지금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이란 그 사회의 도덕적 방어막과 같습니다. 부끄러움을 예민하게 느낄수록 그 사회의 도덕적 수준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강도가 약하면 약할수록 그 사회의 도덕적 수준은 낮은 것입니다. 그러다 아예 부끄러움이고 뭐고 느끼지 못하게 되면 그 사회의 도덕은 무너지게 되고 그 사회는 더 이상 사람다운 사람이 사는 곳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성 저 깊은 곳에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우리의 약점이 드러날 때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드러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견디기 어려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 가운데 부끄러움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나오는 것은 창세기 3장입니다. 원래 창 2:25을 보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라는 말씀처럼 아담과 하와는 원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창 3:7을 보면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창 3:8을 보면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나자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던 것입니다.
눅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가 조업을 마치고 그물을 씻고 있는데 주님께서 그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에서 따라온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밤새 한 마디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순했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달려와 무릎 아래 엎드려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자신의 정체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 깨달음이 정말 깊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깊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 후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첫째, 감추는 경우입니다.
삼하 13장을 보면 다윗의 아들 암논과 그 배다른 여동생 다말 이야기가 나옵니다. 암논이 다말을 사랑했습니다. 아픈 척하고 다윗에게 다말에게 음식을 장만해서 자기 집에 오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낫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대로 다말이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암논의 집을 찾았습니다. 침실로 불러들인 다음에 강제로 겁탈을 했습니다.
아마도 겁탈 후에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고 또한 후회했을 것입니다. 그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다말을 자기 집에서 내 쫓았습니다. 나중에 사건 전모가 밝혀지게 됐고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에게 참혹하게 살해 당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나서 이를 감추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거짓으로 덮습니다. 남들을 속이고 또 자기 자신을 속입니다. 교활한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더 큰 부끄러움을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남의 탓을 하는 경우입니다.
창 3장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나무 밑에 숨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그 때 아담이 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부끄러움을 피해 보려고 핑계를 대고 있는 것입니다. 책임을 남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아내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책임을 중하게 물으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참 많습니다. 자기 잘못이 드러나면 핑계를 댑니다. 남의 탓을 합니다. 책임을 전가하려 합니다. 정말 비겁한 일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 앞에 더 큰 부끄러움을 만드는 일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전모를 정확하게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핑계를 댄다고 통할 리 없고, 오히려 핑계 댐을 통해 더 큰 책망을 받을 뿐입니다.
셋째, 화풀이를 하는 경우입니다.
창 4장을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나름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셨는데 가인의 제사는 열납치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가인이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다 저 아벨 때문이라 생각하고 분을 풀려고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자기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자기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느꼈을 때 그 원인을 밖에서 찾고 그곳에 화풀이를 합니다. 정말 사악한 일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 앞에 더 큰 부끄러움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부끄러움의 원인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하면 찾아지지 않을 뿐 아니라 더 큰 부끄러움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그 부끄러움을 감추려 한다든지, 핑계를 대려 한다든지, 화풀이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할 때 점점 우리는 부끄러움을 모르게 됩니다. 부끄러움의 감각이 무뎌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죄를 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됩니다.
고사성어 가운데 후안무치(厚顔無恥)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중국 송나라 때 진사인 왕광원이라는 사람이 출세를 위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힘 있는 사람들에게 비굴하게 청탁을 했답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왕광원이라는 사람은 얼굴 가죽은 열장을 겹친 무쇠 갑옷과 같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얼굴이 두껍고 부끄러움을 모른다 해서 후안무치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후안무치하면 안됩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후안무치하면 안됩니다. 부끄러움의 감각이 무뎌지면 안됩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안됩니다.
부끄러움 아는 사람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줍니다.
첫째, 부끄러움을 더 철저히 느끼라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죄악”이라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그 죄악의 내용이 앞의 1-2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심지어 제사장과 레위사람들이 이방인들과 통혼을 하여 거룩한 족속과 이방족속을 섞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죄악에 지도자들이 앞 장을 섰다는 것입니다.
물론 에스라는 이 죄에서 비켜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는 자기를 포함해서 모든 이스라엘의 죄악이라는 뜻에서 우리 죄악이라고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죄에 대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바리새인처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는 이런 죄악에 휩쓸리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들과 비교해서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그 죄가 곧 자기의 죄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바로 이끌지 못한 죄, 죄악된 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고통 이것을 우리의 죄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에서도 부끄러움을 찾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자랑을 내세워도 될 것에서도 부끄러움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에스라가 바리새인과 다른 점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부끄러움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부끄러움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시인 윤동주]를 좋아합니다. 특히 이 분의 서시는 청소년 시절 제게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특히 서시의 앞 두 행은 제 머리 속에 너무 깊이 각인이 되어있습니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 싶어 한 그 영적 결백주의가 정말 놀랍습니다. 행여 부끄러운 일이 있지 않나 해서 잎 새에 이는 바람결에도 철저하게 자기를 돌아보려는 그 영적 예민함이 감탄스럽습니다. 작은 부끄러움에도 괴로워할 줄 아는 그 영적 순수함이 부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행여라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작은 부끄러움도 철저히 괴로워하고 아파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철저하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저녁 제사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대로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 부끄러움을 고하고 철저하게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끄러움을 느꼈으면 거기서 머무르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부끄러움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느낀 다음 그것을 그대로 가슴에 묻어두면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장애물이 됩니다. 영적 암덩어리가 되어 두고두고 우리 영적 삶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던 다윗도 하나님 앞에 큰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부끄러움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함으로 해결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다윗은 자기의 충직한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새바를 범했습니다. 이 죄를 감추려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와 아내와 동침케 하려 했습니다. 우리아가 말을 듣지 않자 그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다윗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몰염치하게도 밧새바와 결혼까지 했습니다. 삼하 11:27을 보면 이 모든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기 위해 나단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신 그대로 다윗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다윗이 그 자리에서 나단 선지자에게 죄를 시인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그도 죄를 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핑계를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화를 내며 나단을 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 말로 다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 22:6을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 32:3을 보면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위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부끄러움을 정말 심각하게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철저하게 회개를 시작합니다. 다윗의 회개 모습이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시 6:6에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그리고 시 51:3절에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
이 철저한 회개가 다윗을 그 견디기 힘든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움 때문에 괴로워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진정 회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