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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부모님은 이북분들로 "함북 성진" 입니다.
제 고향은 "서울" 입니다.
부모님은 일본유학 중 6·25전쟁으로
고향에 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독자였던 부친은 전쟁이 끝난 후 서울에서 무역업을 하셨는데 밀수로 가져 온 일본 모리나가(?)우유 창고에 불이 나는 바람에 감옥에 가게 되었답니다.
출소 후 아편중독자로 자신의 인생을 끝냈습니다.
'모친' 은 포목상을 했던 부자집딸로 끼가 전혀 없는 지식인입니다.
부모가 강제로 시킨 결혼은 신혼 초부터 단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답니다.
거기다 6·25전쟁까지 겪고 그후부터 더 고달파진 운명과 환경에 삶에 회의를 느끼면서 차츰 냉담해진 모친은 삼남매에게 정 없이 오로지 교육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어린 제게 '장녀' 라는 책임이 부여되었고, 장녀의 역할을 감당 못할 때마다 늘 야단치는 모친과 다투게 되었는데 그 끝에는 "하는 짓마다 지애비 꼭 닮았다" 라는 꼬리가 붙어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싫어 하루 빨리 어른이 되어 우리집에서 내호적을 빼서 영원히 집에서 탈출하는 것이 꿈이 되었습니다.
늘 외로웠던 소녀시절엔 동네에서 깡패라는 별명을 안고 살았지만, 교회안에서는 여회장 노릇까지 하면서 중·고 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후반부터, 영화배우가 되고싶어 연극영화과를 다녔습니다. 스카라극장주변과 영화판을 돌아 다니다가 배우과 내적성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몇건의 엑스트라 역을 끝으로 1년 반쯤 넘어 배우의 꿈을 접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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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음악DJ로 꿈을 바꿨습니다.
서울 영등포역 근처 소라다방에 보조DJ로 취직을 했습니다.
DJ로 근무하던 어느날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깡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 바쁘게 도망치다가 음식점에서 행길 도로에 내놓은 수도줄에 걸려 심하게 넘어졌습니다.
시멘트 바닥에다 얼굴 앞면을 심하게 다쳤는데 그때 콧등이 갈리고, 위·아래 앞니 끝이 모두 깨졌습니다.
그 일이 너무 무서워서 DJ의 꿈도 접었습니다.
21살의 나이에 첫사업으로 의상실을 차렸습니다. 의상실을 꾸미면서 공장도 2구미 돌렸고 모델활동도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집을 나와 가족들과 모두 인연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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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상실과 모델 활동을 하면서 24세가 되던 늦가을, 어느날!
호적을 빼는 꿈이 무참하게 깨져 버렸습니다.
모친이 사고로 뇌를 다치고 식물인간이 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동생들 공부와 결혼까지 시키며 가족을 돌보는 소녀가장이 되었습니다.
1985년 7월, 35세때 선교사 사명을 안고 청소년 선교센터를 창설하면서 다시 집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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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0년간 청소년선교센타를 운영하면서
선교센타에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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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청소년센타 운영 당시!
현대종교 '탁명환 소장' 이 이단들에게 타살되었습니다.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962
5. 청소년센타 운영 당시!
현대종교 '탁명환 소장' 이 이단들에게 타살되었습니다.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962
'탁명환소장' 이 타살되기 전
↓ 제게 보내주셨던 글입니다.
42세에 장학금을 받으며
컴퓨터 그래픽 전공을 했습니다.
⬇ 외국 나갈 때 사용했던
컴퓨터 그래픽 전공수료증
⬇ 외국으로 출국하여 근 10년간 일본, 중국, 홍콩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외국에서는 선교사 직분과 함께 여행사와 에벤에셀의류회사에서 지사장으로 근무했습니다.
이 시기에 남동생도 한국을 떠나 모스크바로 갔습니다. 남동생은 선교목사로 현재 미국시민권자이며,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 IMF가 발생한 후, 귀국했습니다.
그때 한국은 IMF사태가 터진 후에로 보증 등 여러 빚문제들로 인해 인맥들이 무너지고, 의리로 뭉쳤던 동창 등 모든 지인관계들이 무너졌고, 우애를 발휘하던 가족들간의 화목과 믿음이 깨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이런 한국의 환경과 외국생활로 인한 공백기까지 겹쳐 있었기에 그 시절에 한국사회에서 견디어 낸다는건 완전 전쟁 그 자체였습니다.
명일동 명성교회 근처에다 살집을 구하고 천호동에다 작은 사무실을 얻었습니다.
독신인 관계로 생활비는 제가 벌어야 했기 때문에 사무실을 얻고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칠순이 넘어서도 완전이 회복하지 못한 모친을 돌아가면서 모셨기 때문에 삼형제 모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점점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연서부터 제 어린시절의 숙제도 풀고, 그 시대의 모친을 이해하고 싶어쳐서 모친의 짐을 가져왔고 모친을 모시려고 나름 노력했었는데, 형편이 허락되질 않아 결국은 모시지 못했습니다.
"미국에는 가지 않겠다"고 우시는 모친을 달래 드리며 "1년안에 꼭 다시 모셔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때가 모친과 인연이 끝나는 마지막 인사였다는 것을 ... 이때가 마지막 시간이였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2005년. 2윌 강남으로 사무실을 옮겼습니다. 그 당시 서울 강남은 세무서가 두곳으로 반포와 강남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여후배의 도움을 받아 2006년 기능성 제품만 제조하는 제조업으로 창업을 하였고 사장과 회장이라는 직급으로 회사를 경영했습니다.
⬇갤러리도 함께 운영하면서 천경자 등의 여러 그림을 지원받아 전시회도 열었고
결정유도자기로 수많은 종류의 자기제품을 만들면서 하나 가격이 3천만원이상 가는 침대부터 자기좌욕기, 5백만원하는 자기 정수기 등등 부자들만 상대하는 제품으로만 제조·제작하였습니다.
⬇ 50세 때 연세대 치과에서도 위, 아래 새의치를 그냥 해주셨습니다. 지금은 의치가격이 많이 내렸지만, 그시절 의치가격은 굉장히 비쌌다고 하더군요. 두곳 병원에서 그렇게 비싼 의치를 그냥 해 주셨다는 걸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서산에 와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경기도 김문수 도지사를 선두로 경경연 활동을 하면서 5번 정도 CEO인터뷰를 했고 단편글도 여러번 올렸습니다.
⬇회사가 궤도에 오르던 중,
회사 사장이었던 후배 (지경순)가 갑자기 구강암에 걸리고 1년만에 뇌까지 암이 번지면서 51세 나이에 하늘로 떠났습니다.
⬇친동생 보다 더 사랑했던 후배의 죽음에 받은 충격이 많이 컸습니다.
"기능성 색조화장품 제조회사" 와
"심피재생연구소" 두곳만 남기고
사업 규모를 줄였습니다.
2011년 10월 ...
그동안 모친 얼굴 한번 뵙지 못했고,
어린시절의 숙제도 풀지 못했고,
모친을 한국에서 모시지도 못했는데 ...
캘리포니아에서 모친이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모친의 유해는 한국으로 모셔와 임진각 근처에 모셨습니다.
제게 어른은 모친 단한분 뿐이었는데 ...
이젠 제가 우리집에서 제일 어른입니다.
모친 소천 후, 삶에 대한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회사와 공장을 오가던 중 2012년 새해 첫주일 저녁입니다.
명일둥 명성교회임원회에 참석하러 가던중
교회앞 골목안에서 뒤에서 오던 큰차에 치는 뺑소니 사고를 당했습니다.
종합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다고 했지만, 교인들의 성화로 개인병원으로 다시 옮겼는데 그 개인병원에서 6주진단을 받았고 기부스까지 하고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입원한 후 병원을 통해 제가 어릴 때부터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이도 어느새 육십이 넘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원한지 7개월이 지나도 다친 왼발이 회복되질 않았고, 대리점 등 여러 방면에서 돈문제가 발생되어 할 수 없이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사업자금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제 몸은 계속 더 아팠습니다.
2014년 초여름, 태안 만대리에 있는 별장을 잠시 빌려 휴양을 오게 되었습니다.
매주 서울에서 금요일 저녁에 내려왔다가 월요일 아침에는 다시 서울에 가고 ... 이렇게 서울·태안으로 오고 갔습니다.
2014년 11월, 만대리에서 핸드폰이 고장나서 태안으로 나왔더니 AS 세타가 없다고 서산까지 가야 한답니다. 서산으로 와서 핸드폰을 맡겼습니다. 몇일 후, 핸드폰을 찾으러 서산에 갔다가 교회에서 김선자 권사를 만나게 되었고 제회사에 투자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원래 저는 욕심이 많은 편도 아니고, 춤이나 화토치는 것도 취미가 없고 형제나 친척도 없고 의논할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항상 혼자서 판단하며 살았습니다.
37세 5월말부터 연애까지 완전히 끝내고
38세 부터는 회사일과 선교만 하면서 육십 넘도록 살아왔기 때문에 남의 말에 넘어가는 일이 없었습니다.
투자하겠다는 여자의 말에 말없이 미소만 보내고 대답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틀이 지나 그여자가 저를 찾아 와서
"선교사님! 일단 제 빌딩에다 사업자증을 옮기고, 제 상가 오피스텔에서 거주하세요" 하더니. 2015년 1월 서산세무서에 가서사업자등록증까지 직접 옮겼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여자의 말을 안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 그리고는 기름, 쌀, 반찬 등을 준비해 주더군요. 그 여자 대답을 기다리다가 일단 2015년 7월 휴업계를 냈습니다.
⬇ 1년이 지나자 그 여자가 거주지 계약서를 다시 써주었습니다. 전 아무 말없이 연락오기 만을 기다렸습니다
➡ 그런데 그후 두달쯤 지나면서부터
그 여자가 교회에서도 외면을 하더군요.
서울 지인들은 "왜 그렇게 늦는지 붙잡고 물어봐라" 고들 했지만 전 그냥 기다렸습니다.
그 여자의 모든 공급이 중단 되더군요.
제 주머니엔 돈 만원이 없었습니다.
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공항장애가 왔고
아래잇몸이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군데 치과를 갔었는데 풍치가 왔다며
어금니 충치가 심하다고 2십만원이라는 말만 했습니다.
받은 유산이 없으니 연애나 결혼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물질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유난히 자존심이 강하고, 수줍음도 많고, 낯도 너무 많이 가리고, 남자들에게 제 스스로 돈을 뺐는 능력도 없고. 남을 돕는건 잘하지만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돈에 관한 부탁은 절대 못했습니다.
평생을 혼자서 끙끙대며 살았음에도 돈이 필요할 경우엔 구하러 다니는게 아니라 오히려 주변에서 눈치챌 정도로 집에서 아예 누워 버렸습니다.
평생 남의 직원노릇도 거의 안했고,
영업 쪽으로는 전혀 소질이 없어
물건을 팔아본 일도 없고, 30년 넘게 사업을 했지만, 개인적으로잔 머리를 쓰지 못해
투자 멱시 단한번도 받아본 일이 없었습니다.
결국 서산에서 투자는 받지 못한 채,
세월만 보냈습니다.
그 바람에 평생 사업을 했던 저였는데 처음으로 2016년 ...
폐업을 하였습니다.
그해 10월,
파산신청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
서울을 너무 오래 떠나다보니 서울로 돌아갈 용기도 잃었습니다.
주소지를 서산으로 완전히 옮기고, 전문CEO라는 제 타이틀도 서산에서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2년쯤 지나자 아래 잇몸에 허옇게 염증꽃이 피었습니다. 고민고민하다가 보건소 치과를 찿아갔는데 다행스럽게도 좋은 군의관을 만났습니다.
치과 군의관이 말하길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생긴 현상이라며 그때부터 정말 정성것 치료를 해 준 덕분으로 염층은 더이상 진행 되지 않았습니다.
충치 어금니 씌우는데 금액이 2십만원이라고 했는데 6개월이 지나자 25만원으로 올랐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쪽 잇몸까지 상할까봐 걱정을 하다가 할 수 없이 주택청약을 해약해서 강남치과로 갔습니다.
그런 돈으로 윗의치를 먼저 했는데 ...
윗니의치가 깨졌네요 ...
2022년, 처음으로 치과에서 무료검진을 해주고 기타 등등 해준다며 치과에 한번 가보시라며 보건서에서 두군데 치과를 알려주었습니다.
무료검진이라는 말에 그냠 부담없이 허브치과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래의치수술비를 말씀하시는데 ... 그냥 믿음이 갔습니다.
다시 2년 동안 부었던 주택청약을 해약해서 아래의치 수술믈 하자 결심을 하고 은행에 갔는데 갑자기 두번다시 청약저축 해약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직원에게 상담을 했더니 1백5십만원 정도는 신용대출이 된다고 하더군요.
대출을 받아 아래의치 수술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틀어져 있는 아래 치아 하나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 치아가 제눈에 가시였었습니다. 아래 잇몸이 상하면서 그 치아가 치솟고 그 치아가 계속 입술이 깨물렸습니다.수술비가 많이 나올까봐 그런 말씀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장님이 아무 말없이 그 치아까지 뽑고 예쁘게 고쳐주셨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
상한 잇몸 때문에 서산에서 여러 치과를 돌아 다녔기 때문에 유덕우 원장님께 수술비를 재료비 정도만 받으셨고 특별하게 신경써 주셔서 꼼꼼히 치료 해주셨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 떠나는 날까지 잊지 못할껍니다.
추신 :
현재 위의치가 깨져 제 신경이 많이 써집니다. 그래도 일단 신용대출금을 다 갚아야 합니다. 윗의치 바꿀 때 다시 뵙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20222년 2월 18일 환자 허은숙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