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작품상
책 도둑
김 남 식
꽃 도둑과 책 도둑은 흉이 아니라고 했던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즉시 경찰서에 끌려가 엄벌을 받을 텐데도 여전하다. 훔쳐가는 것보다 떼어 먹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유명수필가이자 사범학교 은사님이신 元鍾麟 교수님으로부터, ‘책 도둑’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찾아뵙지 못해서 송구스러웠다. 정년퇴임하자마자 문학공부를 하다가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단숨에 달려갔더니 벌써 연세가 여든넷이신 것을 알고는 더욱 송구스러웠다. 배구와 테니스 등 운동에 뛰어나셔서 누구보다 건강하셨는데 초췌해진 모습이 안타깝다. 수년전 사모님을 여위셨다니 얼마나 적적하실까. 방문할 때마다 반가와 하신다. 돌아가실 때까지 한두 달에 한 번 쯤은 찾아뵈었다. 뜸하다 싶으면 먼저 전화를 하신다.
“뭐해, 바쁜가 보지?”
어서 오라는 신호다. 뵈러 갈 때마다 마다 온 집안을 정결하게 닦아 놓으셔서 놀라게 된다. 곳곳에 사모님과 지내던 침실에는 금슬 좋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가슴이 뭉클하다. 알록달록 가꾸어 놓은 화분들이 재롱떠는 손자들처럼 재깔거린다. 천장까지 올라 간 아기 나팔꽃들은 숨바꼭질하는지 시시덕거리며 야단들이다.
뵐 때다 인생을 뜻 있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이번에는 ‘책 도둑’ 에 관련된 말씀을 들었다. 댁에 도착하니 무언가 쓰고 계셨다. 유명작가이어서 작품을 만드시는 거시려니 했는데 의외다. 전국 각지의 문인들로부터 전해 온 책을 받고 답장을 쓰신다는 것이다. 두꺼운 확대경을 들고 또박또박 써내려 가시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잘 보이지도 않는데 뭐 하러 계속해서 쓰셔요. 전화나 하시지.”
돌아오는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김 교장도 글 쓰잖아. 한편 쓰려면 얼마나 힘든지 잘 알 텐데 그래. 책 한 권을 펴내는 일은 그야말로 뼈를 깎는 일이지. 귀한 책을 받고 어떻게 그냥 말 수 있어. 명색이 작가인데 책 도둑은 되지 말아야지.”
실은 나에게도 그러셨다. 수년 전 첫 번째 수필집 『빨간 동그라미』를 펴냈더니 편지를 써서 건네주셨다.
‘김 교장 큰일 해냈네, 자네 쓴 글들에 내가 쳐 준 「빨간 동그라미」마다 사랑이 댕글댕글 맺혀 있네 그려. 수필작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더니 나보다 훨씬 잘 썼군….’
첫 번째 수필집인데도 감동적으로 엮었다며 과분한 찬사를 하셨다. 다른 사람들도 감상문과 시와 장문의 감상문을 보내왔다. 어떤 이는 책값이라며 소액환까지 부쳐주어서 놀라웠다. 아낌없는 격려가 지금까지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얼마 전 수필집 6집 『마음이 흔들린다』를 발간했다. 가장 먼저 드려야할 선생님이 안 계셔서 허전했다. 보내 줄 사람과 주어서는 안 될 사람을 따져보았다. 우선 나를 적극적으로 응원해준 사람을 꼽았다. 글이나 말로 충고하거나 응원해 준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몇 권 째 보냈어도 전화 한통도 없는 이는 아예 제쳐 놓았다.
주일마다 함께 예배드리는 40여 명의 교회청년부원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었다. 아무 반응이 없어서 서운했다. 얼마 후 상처 받을까봐 망설이다가 안 되겠다 싶어 질문을 했다.
“내 책 전체를 읽은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 한 편이라도 정독해 본 사람, 고맙다고 말한 적 있는 사람, 느낌을 글로 적어서 보낸 사람….”
손드는 사람이 없다. 마침 자리를 비운 여학생이 보낸 이메일을 읽어준다.
“부장님 고마워요, 귀한 좋은 책을 주셔서. 『마음이 흔들린다』를 읽다보니 제 마음도 흔들리네요.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어서 잠시 내려놓았어요. 함께 있던 엄마도 감동적이라며 눈물을 흘리시네요. 다 읽으면 감상문을 써서 보내드릴게요.”
초등학생 가르치듯 충고한다.
“어린 애도 사탕 하나만 받아도 고맙다고 하는데, 하물며 어렵게 펴낸 책을 받고 그냥 말면 안 되지. 어떤 형태든지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하는 법이야. 애써 만들어 준 책을 떼어 먹어서야 쓰나. 80넘은 나의 은사님도 일일이 감상문을 보내시는데.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옛말이야. 명심하게 이 사람들아.”
실은 나는 더했다. 애써 만들어 보내 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글 한 편만이라도 몰입해서 읽었는지 모르겠다. 고맙다고 말을 건네준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글을 보낸 적은 더더욱 없다. 그건 고사하고 휴지통에 버린 일은 없었는지를 따져보자니 정신이 펄쩍 든다. 책 도둑보다 더 나쁜 짓을 얼마나 했을지 걱정이다. 스스로에게 꾸짖어본다.
“더 이상 책 도둑은 되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