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거스틴의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해서
I. 들어가면서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는 일반적으로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범위와 관련된 인간의 독립성, 자율성, 임의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한편 신학 일반으로 들어가면 인간의 타락과 죄에 관한 이해뿐만 아니라 동시에 구원의 성격에 대한 이해와도 맞물려 있다. 특히 예정론 및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와 깊이 관계한다.
이 모든 이해는 동일한 성경 앞에서도 다양한 견해로 갈라져 있다. 역사적으로 펠라기우스나 알미니우스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과장되고 그릇된 입장 때문에 교부시대와 종교개혁시대 때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물론 모든 시대의 교회와 인간은 펠라기우스와 알미니우스를 스승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우지 않았을지라도 스스로 펠라기우스 자신이며 스스로 알미니우스 자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정죄할 수 있었던 객관적 근거로서 성경의 내용과 정신에 부합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cf. 마 22:29) 의지에 대한 이해가 교회의 유산으로 주어졌다. 특히 루터가 노예의지론을 취하고 칼빈이 자신과 모든 이들이 존중하는 교부들의 견해까지 반박했던 근간에는 어거스틴의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한 입장이 있었다. 그 내용이 우리의 잃어버릴 수 없는 유산이며 반드시 물려줘야 할 기업이다. 그 복된 과제를 우리가 지금 끌어안고 있다.
II. 어거스틴이 말하는 의지의 정체성
1. 피조물로서의 의지
어거스틴이 의지에 대해 갖는 당연한 전제는 “마음(animus)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창조주”1> 라는 그의 견해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해는 ‘의지(voluntas) 역시 피조물’임을 말하는 객관적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루터가 단순히 타락과 죄뿐만 아니라 유한한 피조물임을 전제로 인간의 노예의지를 말한 것은 결코 새로운 견해가 아니라 어거스틴을 선행자로 두고 있음을 드러낸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자유의지라는 용어를 사람이나 천사 및 어떤 피조물에게도 돌릴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하다고3> 주장한 반면에 어거스틴은 그 용어의 사용을 오히려 피조물, 특히 인간에게 돌린다. 루터와 칼빈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자유의지라는 용어의 폐기4> 까지 고려한 반면에 어거스틴은 은혜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자유의지를 부인하거나 혹은 은혜를 옹호하면 자유의지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었다.5>
그러나 어거스틴이 자유의지를 인정한 것은 의지의 독립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의지’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루터와 칼빈과 마찬가지로 어거스틴 역시 하나님의 의지만을 제 1원인으로 돌리고 인간의 의지는 제 2원인으로 판단한 것이다. 현대과학 역시 이런 정신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의지보다 앞서서 의지를 작용시키는 의지의 선행 인자가 있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그릇으로서의 자유의지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음을 계시하셨다고 확언한다.6> 그가 이해하는 자유의지에 대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하라 말라 명하신 바들 모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을 예로 들고 있다.7> “악에게 지지 말라”(롬 12:21),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니라”(시 32:9), “네 어미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잠 1: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니라”(잠 3:7),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3:11), “음녀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잠 5:2),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마 6:19),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마 16:24), “세상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등등. 이러한 하나님의 교훈들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다면 무의미하다고까지 어거스틴은 말한다.8> 그의 이런 발언은 자유의지를 높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낮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자유의지를 명백히 인정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이와 같은 명령들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자유의지가 없다면 주어질 수 없는 요구이다. 따라서 자유의지가 있는 이상 자신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한다.9> 여기서 그가 자유의지를 말하는 입장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핑계를 돌릴 수 없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의 명령이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주어졌다면 동시에 그런 하나님의 뜻을 행했을 때에도 자유의지는 손상됨 없이 자신의 자리가 여전히 있다는 입장이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면 선한 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 그 선행에 대한 보상(상급)을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는 말씀을 따라 기대할 수도 있다고 한다.10>
3.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
어거스틴은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가 이런 식으로 가능하다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의 자리(adjutorio et gratiae Dei locus)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런 사고를 가진 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자이거나 혹은 의로운 삶을 스스로 이룬 것처럼 생각하는 자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그런 자에게는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는 악담만 기다린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펠라기우스주의 이단(haeresis Pelagiana)의 특징이라는 것이 어거스틴의 지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행을 이루기 위해 사람에게 소망을 두거나 우리의 육체적 팔을 강하게 하지 말 것을 권한다. 아울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니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시 27:9)라고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11>
이후 ‘은혜가 없으면 선행을 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입장은 확고하게 드러난다. 그는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제자들의 물음을 의지의 능력과 관련된 물음으로 이해했고, 이에 대한 주의 답변 즉,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quibus datum est, 주어진 자)라야 할지니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선물(Dei donum)의 성격을 드러내는 답변으로 이해했다(마 19:10, 11). 따라서 주어지지 않은 자는 그런 뜻을 갖지도 않고, 혹은 그런 뜻을 가질지라도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어진 자는 뜻한 바를 성취한다고 하였다(Quibus enim non est datum, aut nolunt, aut non implent quod volunt: quibus autem datum est, sic volunt ut impleant quod volunt).12> 또한 하라 말라는 주의 명령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제할지라도 즉, 자유의지가 없다면 주어지지 않았을 명령일지라도 동시에 그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힌다.13> 이와 같은 성경 이해는 어거스틴이 인정하는 자유의지란 하나님의 선물보다 앞설 수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여러 성경 본문을 인용하며 설명한다.
(1)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14>
‘이루라’는 명령 (자유의지에게 전달)
+ ‘두렵고 떨림’ (스스로 이룰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자신을 자랑할 수 없도록)
이런 내용에 대해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증거로 13절 말씀이 이어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
(2)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15>
① “선한 싸움을 싸웠다”
신 8:17, 18
고전 15:57
롬 8:37
②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롬 9:16
③ “믿음을 지켰다”
고전 7:25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엡 2:8, 9
III.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어거스틴의 비판
1. 공로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공로에 따라 주어진다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입장은 어거스틴에게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슥 1:3)는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공로(meritum)로 여기고, 그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에게 돌이키시는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면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소서”(시 80:7),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시 85:6)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16>
또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동일한 입장에서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대상 28:9)는 말씀에서 ‘찾으면’은 공로로, ‘만날 것이요’는 은혜라고 이해하는 점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의 공로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은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는 것(gratiam non esse gratiam)이라고 비판했다.17>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공로와 상관없는 은혜를 말한 바가 있다면 유일하게 죄사함의 은혜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주어지는 은혜인 영생은 여전히 공로의 결과로 돌린다. 이런 견해에 대해 어거스틴은 공로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 말한다면 비난할 이유가 없지만, 이처럼 인간의 공로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면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는 말씀을 들을 것을 권고한다. 이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공로는 없다(non ab illo sunt merita tua)는 어거스틴의 견해가 확립된다.18>
여기에 이르기까지 확인된 것은 죄에 대한 책임은 있을지언정 자신의 선행이 은혜를 받는 공로나 조건이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문제점은 주로 ‘조건적 명령의 형식’에 대한 문자주의 해석에서 드러난다. 오늘날 대다수의 신자들의 오해는 여기에서 접촉점을 갖는다.
2. 명령과 기도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들을 명령하시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것들을 명하심으로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을 배우게 하시며, 율법이 명하는 바를 기도로써 얻는 것 역시 믿음이라고 답변한다.19> 이런 이해는 이미 그의 참회록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앞에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나님의 명하신 것을 주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명하소서”(Da quod iubes, et iube quod vis).
IV. 나오면서
상기에서 살핀 입장들이나 증거는 모두 의지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과 관련된다. 어떤 교부들이나 개혁자들도 의지 자체를 부정한 역사는 없고 다만 그 의지의 성격에 대해서 다양한 프리즘을 제시했다. 불링거(Bullinger)는 ‘타락 이전의 의지, 타락 이후 중생 이전까지의 의지, 중생 이후 영화 이전까지의 의지’로 구별하여 말하고, 여기에 우르시누스(Ursinus)는 더 추가하여 ‘영화 이후의 의지’까지 다루기도 한다.
그러나 의지에 대한 논의는 타락을 배제시켜 이해하기 힘든 구조 안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기에 결코 배제시켜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만큼 의지 자체가 타락을 불문하고 피조물이라는 사실 역시 명백히 드러나야 하는 사실이다. 피조물이라는 사실 자체로 피조물에 합당한 자리를 기억해야 하며, 그런 차원에서도 의지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cf. 요 15:5). 이런 측면에서 의지에 대한 논의를 인간론이나 죄론의 차원에서 혹은 구원론의 내용인 구원의 서정의 맥락에서만 제한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더 나아가 창조론이나 궁극적으로 신론의 차원에서도 논의의 방향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또한 성경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명령의 형식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이라는 우리의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분명한 사실 때문에 자유의지 홀로 그 말씀 앞에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 없이는 그 명하신 바를 결코 이룰 수 없는 존재에게 명하심으로 오히려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경외케 하도록 이끄신다. 피조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창조주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죄의 저자가 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섭리로 죄를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확증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명령은 어거스틴의 말대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향해서 말할지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결코 그 명령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고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알아 모든 영광과 칭송과 자랑을 하나님께만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성경의 명령은 우리의 죄성으로 인해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피조물성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열매를 맺도록 그 모든 명령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뜻과 명령 앞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자유의지의 마땅한 본분이며 자신은 쇠하고 주는 흥해야 한다는 세례 요한의 고백대로(요 3:30) 자유의지를 발휘해 자유의지가 흥할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가 왕노릇한 증거를 우리 몸과 심령에 짊어지게 하셨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복은 우리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만 증거되는 것이며 우리가 드러나지 않을수록 그분이 더욱 드러나는 것이라면 거기에 우리의 참된 복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고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복의 내용으로 소개하신 것이다. 이것은 의무와 책임이라는 부담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권과 영광의 내용으로 거저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의 삶은 죄를 짓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는 것 자체가 죄이며(창 4:7),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롬 3:23)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의 명령 앞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항상 있기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의지는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흠모하는 수단으로 있을 때 참으로 자유하다. 이런 의미에서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우리의 의지의 방향을 잘 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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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
1> Augustinus, De Trinitate, IX. xi. 16: "creatura quippe animus, creator autem deus."
2> 그러므로 베른하르트 로제(Bernhard Lohse)가 루터의 이런 이해에 대해 어거스틴과 모든 전승을 초월한 것으로 평가한 것은 성급하며 신중하지 못한 판단으로 볼 수 있다(cf. 베른하르트 로제, 루터연구입문, 이형기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4, 101).
3> "De servo arbitrio," 1525, D.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eimar, 1908, 18 Band, 786: "simul ipsa ratione teste nullum potest esse liberum arbitrium in homine vel angelo aut ulla creatura." ; 636: "Sequitur nunc, liberum arbitrium esse plane divinum nomen, nec ulli posse competere quam soli divinae maiestati. Ea enim potest et facit (sicut Psal. canit [Ps. 135, 6]) Omnia quae vult in coelo et in terra. Quod si hominibus tribuitur, nihilo rectius tribuitur, quam si divinitas quoque ipsa eis tribueretur, quo sacrilegio nullum esse maius possit."
4> Ibid., 638 ; Calvinus, Institutio, 1559, II. ii. 8.
5> Augustinus, De Gratia et Libero Arbitrio, Cap. Primum 1: "Sed quoniam sunt quidam, qui sic gratiam Dei defendunt, ut negent hominis liberum arbitrium; aut quando gratia defenditur, negari existiment liberum arbitrium."
6> Ibid., II. 2: "Revelavit autem nobis per Scripturas suas sanctas, esse in homine liberum voluntatis arbitrium."
7> Cf. Ibid., II. 4.
8> Ibid., II. 2: "quia ipsa divina praecepta homini non prodessent, nisi haberet liberum voluntatis arbitrium."
9> Ibid., II. 4: "Nempe ubi dicitur, Noli hoc, et noli illud, et ubi ad aliquid [Mss., ubi aliquid; omisso, ad. Sed ex his nonnulli pro, aliquid, habent, aliquod.] faciendum vel non faciendum in divinis monitis opus voluntatis exigitur, satis liberum demonstratur arbitrium. Nemo ergo Deum causetur in corde suo, sed sibi imputet quisque, cum peccat."
10> Ibid., II. 4: "Neque cum aliquid secundum Deum operatur, alienet hoc a propria voluntate. Quando enim volens facit, tunc dicendum est opus bonum, tunc speranda est boni operis merces ab eo, de quo dictum est, Qui reddet unicuique secundum opera sua(Matth. XVI, 27)."
11> Ibid., IV. 6.
12> Ibid., IV. 7.
13> Ibid., IV. 8.
14> Ibid., IX. 21.
15> Ibid., VII. 16, 17.
16> Ibid., V. 10.
17> Ibid., V. 11.
18> Ibid., VI. 15.
19> Ibid., XVI.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