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여리고 -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리고'(Jercho)는 오늘날 텔 에스 술탄(Tell es Sultan)이란 곳으로 판명되었는데, 그 위치는 사해(死海)에서 북쪽으로 12km, 요단에서 서쪽으로 9km, 또 예루사렘에서 동북 방면으로 약 30km지점이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굴 결과, 당시 여리고 성의 넓이는 대략 8에이커(1 에이커 = 약 4 평방킬로미터)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느 므깃도의 14에이커(acre), 라기스의 18에이커, 특히 하솔의 200에이커에 비하면 작은 도시 국가이지만, 여호수아 시대에는 가나안의 평균 도시 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 성읍 규모에 비하여 여리고 성의 비중은 매우 컸다. 즉 여리고 지역은 좋은 샘들을 가진 '오아시스'(oasis) 지대인 만큼 일찍부터 개발된 고대 도성으로서 성경은 일명 '종려의 성읍'(The city of palm trees)으로 지칭하기도 했다(신 34:3). 그리고 요단 대평원 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여리고 성은 그 전략적 위치상 매우 중요한 가나안의 방어 거점으로서 군사 요충지일 뿐 아니라 가나안 중부로 통하는 교통의 요로(要路)였다. 따라서 여호수아 군대가 가나안 도시 국가들의 남북 연합 작전을 미연에 차단하고 가나안 정복의 주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리고 성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은 직접적인 군사 작전으로서는 거의 공격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천연 요새였다. 즉 가파른 경사지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여리고 성은 적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 밖으로 3-4m 높이의 석조 장애물을 설치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본성의 중앙 벽과 약 35도 각도로 경사지에 만들었다고 한다(Kathleen Kenyon, Digging up Jericho, New York : Frederick A. Praeger, 1957). 따라서 그 가파르고 미끄러운 경사지와 여러 방해물 때문에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접근하는 행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유일한 방법으로써는 장기간의 포위 작전을 구사할 수 밖에 없었으나, 그렇게 하자면 오랜 기간이 지체되어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이 연합, 반격할 기회만을 줄 뿐 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여리고 성은 성문을 굳게 닫고 마냥 버티는 작전을 구사했던 것이다(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그러나 여호수아 군대에게는 하늘 만군의 군대 장관 여호와가 함께 하고 계셨다.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 '닫다'의 히브리어 '사가르'는 '문을 닫다', '빗장을 질러 잠그다'를 뜻하는 말로서, 원문에서는 이 말이 반복 사용됨으로써 그 의미를 강조해 주고 있는데, 영역본인 KJV, NIV, Living Bible과 그리고 공동 번역은 모두 '굳게 닫다'로 번역하였다. 성문을 굳게 잠그는 것은 전시(戰時)에 특별한 경계를 펴는 것을 뜻하는 표현으로(Calvin), 이는 여리고 사람들이 전투 태세에 들어갔음을 알게 해준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친히 여리고 성을 멸망시키려고 계획하셨기 때문에(5:13-15; 6:2-5), 그들이 성문을 닫는 일 뿐 아니라 그외 어떠한 조치를 취한다 할지라도 이미 작전에 들어간 하나님(군대 장관)의 계획을 취소시킬 수는 없었다. 실로 흐르는 요단 강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에게 있어 닫힌 성문을 열게 하는 것 쯤은 더욱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Calvin). 출입하는 자 없더라 - 앞에 기록된 '굳게 닫혔고'라는 말을 보강하는 말로서, 여기서 '출입'은 성 밖으로 '나가는'(go out) 행위와 성 안으로 '들어오는'(come in) 행위를 합하여 표현한 말이다. 성의 안과 밖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성문을 굳게 닫아 놓았으므로 아무도 드나들 수 없었던 것이다(Keil). 이와같이 여리고 사람들이 성문을 굳게 닫고 출입하지 않은 것은 출애굽 사건과 요단 동편의 아모리 족속 두 왕의 전멸 사건(2:10), 그리고 요단 강 도하 사건 등으로 인해 정신을 잃고 간담이 녹았기 때문이다(5:1).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 2-5절의 말씀은 5:14, 15의 말씀과 연결되는 말씀이다. 따라서 1절은 단순히 괄호와 같은 삽입 구절임을 알 수 있다(Keil, Velde, Vonk, Clarke, Goslinga). 따라서 여기서 '여호와'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5:14)이라고 볼 수 있다(Keil, Clarke, Lias). 보라 - 히브리어 '레에'는 주위를 환기시키는 간투사(間投司)로서, 바로 뒤에 상술되어 있듯이,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무너질 운명임을 강조해주고 있다. 왕과 용사들 - 여리고의 왕(2:2)과 용사들이 언급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성(城)이 무너진 후에 군사적인 저항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24:11에서 여리고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웠다는 기록은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Woudstra). 네 손에 붙였으니 - 여기서 '손에 붙이다'란 용어는 군사적 의미로는 '권력이나 통치권을 넘겨주다', '어떤 사람에게 승리를 허락하다'를 뜻하는 말이다.(Westmann). 일찍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왕들을 이스라엘 사람의 손에 '붙이실' 것이라고 말하였는데(신 7:24), 본절은 하나님께서 이미 '붙이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승리가 이미 확정되었음을 선언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낸 표현이다(Woudstra, Maxwell). 곧 그 성취가 아직도 미래적인 일이긴 하지만, 그 일이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있으므로 이미 성취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Keil). 이같이 표현은 가나안 정복과 관련하여 10:8, 12, 19, 30, 32; 11:6, 8; 21:44; 24:11; 삿 1:2, 4; 3:10, 28; 4:7, 14; 7:7, 9, 14, 15; 8:3, 7 등 여러 곳에서 사용되었다.
=====6:3
성을 둘러 성 주위를...돌되 - 여기서 '두르다'(사바브)와 '돌다' (니카프)는 종종 함께 사용되가어 '에워싸다','둘러싸다'를 뜻한다.(시 22:16). 따라서 이말은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행진을 했다기 보다는 성을 빙 둘러싸고 그냥 천천히 도는 행위를 묘사한 것이다(Fisher).
=====6:4
제사장 일곱...일곱 양각 나팔...제 칠일...일곱번 - '일곱'(쉬브아)이라는 숫자가 4절에만 네 번, 6장 전체에 걸쳐 열 네번이나 언급되었다. 성경이 함축하고 있는 숫자의 상징적 의미상 '일곱'(7)이란 숫자는 하나님께 속한 신성한 숫자로서 보통 '완성', '완전', '극치', '성별'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적 섭리나 사역과 관련하여 이 단어는 성경에서 수없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창 21:28, 30; 출 20:10, 11; 23:15; 25:37; 29:30; 왕하 5:10; 시 119:164; 계 1:20; 10:3). 따라서 우리는 여기 이 숫자를 통해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성전(聖戰)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을 정복케 하되 완전히 정복케 하도록 하심을 알 수 있다(Campbell). 한편 여기서 '양각 나팔'은 '나팔'을 뜻하는 '요벨'과 '뿔'을 뜻하는 '쇼파르'의 합성어인데, 특히 '요벨'은 보통 전쟁 때 사용하는 은 나팔(민 10:1 이하)과는 달리 '수양의 뿔로 만든 나팔'(trumpet made from a ram's horn, Living Bible)을 가리킨다. 이 양각 나팔은 회중을 불러 모으거나, 어떤 사람의 출현을 알리기 위한 경우(본절과 출 19:13)와 희년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경우(레 25:9, 10)에 주로 사용되었다(Goslinga, Alexander). 한편 혹자는 여리고 전투에서 이처럼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이것은 '이방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승리'를 예표하는 행위로 보기도 한다.
언약궤 - 3:3 주석 참조.
=====6:5
길게 울려 불어서 - 이 말은 원어상 '존재한다'는 뜻의 '하야'와 '뻗치다', '길게 늘어뜨리다', '연장하다'는 뜻의 '마솨크'로 이루어진 단어로, 문자적으로는 '오랫동안 늘어뜨리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침묵 속에서 길게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는 여리고 사람에게는 공포심과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커다란 확신과 격려의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 '큰 소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루아'는 함성을 뜻하는 말로서 본절을 포함하여 삼상 4:5; 삼하 6:15 등에서 언약궤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Woudstra). 또한 '외쳐 부르다'의 히브리어 '루아'는 '귀먹게 할 정도로 소리지르다', '개가를 올리다' 등을 뜻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큰 소리는 이미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고 있던 가나안 사람들로 부터 그 남아있는 마지막 전의(戰意)마저 송두리째 빼앗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그 소리는 승리를 예고하는 큰 함성이 되었을 것이다.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 직역하면 '성벽이 편편하게 깔려질 것이다'란 의미로, 곧 여리고 성의 성벽이 그 밑바닥 기초까지 철저히 무너져 내릴 것이란 뜻이다. 한편 가나안의 중요 거점인 여리고 성의 멸망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질 이세상 심판의 모형이다. 즉 아무리 오랫동안 세상 권세가 그 철옹성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항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그 나라가 일순간에 멸망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적들에게 분명히 입증해 주셨던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 p. 71).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 즉 좌우를 두리번 거리거나 머뭇 거릴 필요 없이 힘차게 곧장 성 안으로 공격해 들어가라는 뜻이다(20절 ; Keil)
=====6:6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지휘자)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 여호와의 작전 명령을 받들어 그대로 전달했다. 여호와를 전폭 신뢰하는 여호수아의 신앙이 돋보일 뿐 아니라, 이는 가나안 정복 전쟁의 실질적인 총지휘자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4절 주석 참조.
=====6:7
무장한 자들이...궤 앞에 행할지니라 - 이 말은 3-5절에는 빠져 있는 내용으로 행군의 순서를 보다 자세히 상술한 말이다(Keil). 그리고 여기서 '무장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할루츠'는 '전쟁에 대비하다', '싸울 준비를 갖추다'란 뜻을 가진 '할라츠'에서 파생하였는데, 혹자들(Kimchi, Rashi)은 이들을 요단 강 동편을 차지한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서 선발된 군인으로 보고 있다(1:12-15; 4:12, 13; 민 32장). 이런 맥락에서 영역본 NEB는 'men drafted from the two and a half tribes'라고 번역하였다(Maxwell).
=====6:8
양각 나팔 - 4절 주석 참조. 여호와 앞에서 - 4, 6, 7, 13절의 '여호와의 궤 앞에서'와는 달리 '궤'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궤(櫃, the ark)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기 때문에 이 말은 '여호와의 궤 앞에서'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4:13;민 10:35, 36;삼하 6:14; Wodstra). 여호와의 언약궤 - 3:3 주석 참조.
=====6:9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 여기서 '후군'(마아세프)은 본절과 1절의 '무장한 자들'(헤할루츠)과 대조되는 말로, 곧 무장한 자들인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지파에서 선발된 군인들을 가리킨다(Kimchi, Rashi, Keil). 한편 공동 번역은 '무장한 자들'을 '정예 부대'로, '후군'을 '후위 부대'로 번역함으로써 그 의미를 살리고 있다.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 여기서 '불다'에 해당하는 '타카'는 원래 '때리다', '손으로 치다', '못을 박다'란 뜻이지만, '나팔'이란 말과 함께 사용될 때는(8, 13, 16, 20절) 항상 '불다'(blow)란 뜻으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계속', '진행'을 뜻하는 '할라크'와 같이 사용되어 '나팔을 계속하여 불다'(blow continually, RSV)를 뜻한다(Keil).
=====6:10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려 - '들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는 '듣다'를 뜻하는 말로서, 곧 이 문구는 '너희 음성을 들리지 않도록 하며'를 뜻한다(KJV, RSV, NTV). 이와같이 성 주위를 돌 동안 완전히 침묵을 지키도록 한 것은 (출 14:14; 슥 2:13) 거룩한 나팔 소리를 보다 주의깊게 듣고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Matthew Henry). 외치라 하는 날 - 이 날은 제 7일째 되는 날이다. 이 날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길게 울려 불면, 그 소리에 맞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도록 되어 있었다(4, 5절).
=====6:11
진에 돌아와서...자니라 - 진(陣)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길갈' 근처임에는 틀림없다(4:19; 5:10; Maxwell). 그리고 여기 '자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룬'은 대개 어떤 장소에서 밤을 보내려고 숙박하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는 말로, '숙박하다'(lodge, KJV), '밤을 지내다'(spend the night, NTV)를 뜻한다(창 19:2; 28: 11; Kaiser).
=====6:12,13,14
제사장들이...진에 돌아오니라 - 본문은 8-11절에 나타난 행동 요령을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명령을 좇아 그대로 엿새동안 계속 반복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6:15
여전한 방식으로 - 직역하면 '이와같은 방법으로'인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끝까지 순종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그 어떠한 행동도 제멋대로 하지 않는 '정돈된 열성'(regulated zeal)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고 계셨던 것이다(Calvin). 일곱번 돌기는 그날 뿐이었더라 -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4절)라는 명령의 실천을 보여주는 문구이다. 한편 여기서 '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크'는 부사로서 '오로지', '확실히'를 뜻하는 말인데, 이에 따라 직역하면 '오직 그날에만 일곱 번 돌았다'(KJV, RSV, NTV, 공동번역)라는 의미이다.
=====6:16
일곱 번째에...외치라 - 성을 일곱 번 돈 후 제사장들이 나팔을 길게 울려 불 때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외치면 성은 무너질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 여리고 성 함락 사건에서는 특히 '일곱'(7)이란 숫자가 많이 등장한다. 즉 일곱 제사장, 일곱 양각 나팔, 제 칠 일, 일곱 번 등이 그것이다(4절). 그런데 성경상에 나타난 숫자의 상징성을 고려 할 때 '일곱'(7)은 흔히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리고 성 함락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작전하에 진행된 하나님의 성전(聖戰)임을 알 수 있다. 너희에게...주셨느니랴 - 미래에 확실히 일어날 사건을 이미 이루어진 과거처럼 표현한 소위 '예언적 완료형'(prophetic perfects)으로서, "네 손에 붙였으니"(2절)란 표현과 같다.
=====6:17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 여기서 '바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람'의 기본적인 의미는 '사람이 어떤 물건을 사용하거나 오용하지 못하도록 따로 구분시켜 오로지 하나님께 넘겨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넘겨준다는 것은 (1)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치는 '봉헌'의 의미와 (2)철저히 파멸시키고 저주하는 '진멸'의 의미 등 2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 한편 어떤 대상을 전적으로 구분시켜 오직 하나님께 바친다는 이 '헤렘'의 개념은 레 27:28, 29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그후 이러한 개념은 본절과 민 18:14; 겔 44:29 등에도 나타나며, 철저한 파멸의 뜻으로는 여호수아의 군대가 진멸한 거의 모든 성읍들에 대해 사용되었다(6:21, 여리고;8:26, 아이;10:28, 막게다;11:11, 하솔). 레 27:28; 신 2:34 주석 참조.
기생 라합과...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 이는 두 정탐꾼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서약(2:14)의 실천에 따른 것으로, 가나안 거민 가운데 오직 기생 라합과 그녀와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식구들만이 죽음을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6:18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 직역하면 '바쳐진 물건(헤렘)으로부터 너희 자신을 보호하라'로서(NTV, RSV), 바로 뒤에 부언되어 있듯이 '바쳐질 것을 취함으로써 화(禍)를 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 직역하면 '이스라엘 진영으로 하여금 파멸을 당하게 하여'이다(RSV, NTV). 그러므로 개역 성경은 여기서 '헤렘'을 '바치다'는 뜻으로 해석했으나, KJV처럼 '저주'(Curse), 또는 RSV와 NTV 및 공동 번역처럼 '파멸'(destruction)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17절>.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 하노라 - 여기서 '화를 당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카르'는 '문제를 일으키다', '슬픔의 원인이 되다', '격노케 만들다'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문구는 얼마후 아간(Achan)의 범죄 사건으로 말미암아 현실화되고 말았다(7:24-26;Maxwell). 원래 한 개인의 죄는 그 자신만 책임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의 유기체적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일개인의 죄는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영향을 미쳤다.
=====6:19
은금과 동철 기구 - 레 27:29의 '헤렘'(cherem) 규정에 따라 모든 여리고 거민과 가축들은 진멸의 대상이었으며(21절), 성읍 안의 모든 재산도 소각되어야만 했다(24절). 그런데 금, 은, 동, 철 등의 금속만 예외적으로 '여호와의 곳간', 즉 '성막'에 보관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민 31장에도 나타나 있는데,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특별히 금속을 보관한 이유는,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 다윗이 전쟁에서 노획한 금속과 쇠붙이를 성막 곳간에 보관했다가 솔로몬의 성전 건축 때 사용한 것으로 보아(삼하 8:11; 왕상 7:51; 대상 29:2), 이 당시에 보관된 금속도 성막용으로 준비된 것이라고 추측해 불 수 있다(Matthew Henry).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 '구별될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코데쉬'는 '거룩하게 하다', '신성한 것으로 구별하다'란 뜻의 '카다쉬'에서 유래된 말로, 곧 평범한 것이나 속된 것과는 완전 구별되어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뜻한다(레 10:10; 겔 22:26).
=====6:20
이에 백성은...크게 소리질러 - 여기서는 5절에서 주어졌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Galvin). 히 11:30에서는, 성(城)이 무너지게 된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Woudstra, Velde).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 앞의 문구에서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 문구에서는 약속 이행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Calvin). 실로 여리고 성의 멸망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에 의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한편, 성서 고고학적으로 파괴된 여리고 성읍에 대한 발굴 작업은 가스탕 교수(prof, John Garstang) 팀의 발굴 작업(1930-1936)과 캐넌 여사(Miss Kathleen Kenyon) 팀의 발굴 작업(1952-1958)으로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비록 가스탕 교수가 파괴된 연대를 B.C. 1400년 경으로 캐넌 여사가 B.C. 1500년 경으로 달리 추정하고는 있으나, 여하튼 여호수아 시대를 즈음하여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리고 성터에서는 여러 가지 집기류(什器類)를 비롯하여 무너진 많은 건물 파편들 및 불에 타고 금이 간 많은 벽돌들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성의 몰락 원인도 지진 등으로 인한 큰 진동인 것으로 판명되었다(Garstang, J. The Story of Jericho ; Kenyon, K. Digging up Jericho). 결국 이 모든 고고학적 발굴 결과는 성경의 사건들이 모두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생생히 입증해 준다.
=====6:21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칼날로 멸하니라 - '멸하다'의 히브리어 '하람'은 '철저히 파멸시키다'를 뜻한다<17절>. 한편 신 7:2; 20:16, 17의 규정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진멸하도록 설정한 대상은 가나안 거민들 뿐이고, 또 실제로 가나안 동편 땅의 시온과 옥의 성읍을 정복할 때에도 그렇게 하였다(8:26, 27; 10:28; 신 2:34, 35; 3:6, 7). 그런데 여리고 성의 정복에서는 거민 뿐 아니라 가축과 노략물까지 모조리 진멸하였는데, 그이유는 여리고 성은 가나안의 첫번째 성읍, 곧 가나안의 첫 열매로서 하나님께 전적 구별되어 바쳐져야 했기 때문이다(Calvin, Keil). 그리고 진멸할 때 칼날로 진멸한 것은 신 13:15의 규례에 의거한 것이다.
=====6:22
맹세한 대로...이끌어 내라 - 정탐꾼들은 여리고를 탐지할 때 라합에게 은혜를 입은 대가로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를 정복할 때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을 살려주기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약속했었다(2:12-21). 이제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정탐 사실이 누설되지 않았으므로(2:14, 20), 자신들의 맹세한 대로 라합과 그 일가 친족들을 구출할 의무가 있었다.
=====6:23
정탐한 소년들 - 여기서 '소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는 '어린 남자 아이', '소년', '젊은이' 등의 뜻을 모두 포함 하지만, 두 정탐꾼의 대담한 활약상으로 미루어 보아 이들은 어린 소년이라기 보다는 분명 20세가 넘는 담대한 청년들이었을것이다. 70인역(LXX)도 이들을 '호이 듀오 네아니스코이'라고 하여 '두 젊은이'임을 밝혀 주었고 영역본 KJV, RSV, NTV 등도 모두 '소년들'(boys)로 번역하지 않고 '젊은이들'(young men)로 번역하여 같은 입장을 취했다.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 여기서 '밖'(outside)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후츠'는 일반적으로 '집이 없는 바깥 장소'를 가리킨다. 사실 라합과 그 가족들은 이방인으로서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언약 백성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동안 '이스라엘 진(陣)' 밖에 머무를 필요가 있었다(민 5:3; 신 23:14). 이처럼 기생 라합이 언약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사실은 후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방의 세리와 창녀들이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것에 대한 예표이기도 했다(pierson).
=====6:24
불로...사르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라프는 번제(레 4:12), 인신 제사(렘 7:31), 처형의 경우(레 20:14; 21:9) 등에 사용되었는데, 본절에서는 성읍의 파괴에 사용되었다(Harris). 한편 여리고 성을 불사른 것은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사르라'는 신 13:16의 규례에 의한 것이다.
=====6:25
그가...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 라합 및 그 가족은 얼마 후(7일; 민 32:19)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되었다. 특히 라합은 후일 유다 족장 살몬과 결혼하여 다윗의 조상 보아스를 낳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마 1:5). 이처럼 비록 그 신분은 이방인이었으나 믿음으로 행동함으로써(히 11:31; 약 2:25), 결국 그녀의 가계(家系)는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복된 계열에 속하게 된 것이다(마 1:5, 6, 16). 오늘날까지 - 이 말은 여호수아서가 기록될 때까지를 뜻하는 말로, 여호수아서가 여리고 진멸 사건이 있은지 얼마되지 않은 때에 기록되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Velde, Keil), 또한 여호수아서가 기록될 당시에 라합이 아직 생존해 있었음을 보여 준다(Goslinga).
=====6:26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 - '일어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쿰'은 물론 단순히 일어나는 것도 뜻하지만, 본장과 같은 군사적 문맥에서는 흔히 전쟁을 위한 준비(삿 7:15)나 전쟁 수행(출 2:17)등을 뜻한다(Coppes). 그리고 '건축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나'는 성읍의 요새화 작업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는 낱말로(왕상 15:17; 대하 11:5;14:6), 단순히 일반 집을 짓는 것을 뜻하지 않고 성을 요새(要塞)로서 튼튼히 세우는 것을 뜻한다. 이 사실은 뒤이어 나오는 '(성의 기초를 쌓으며', '(성의)문을 세우고'라는 문구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Keil & Delizsch, Vol. II. p. 73). 저주를 받을 것이라 - 파괴된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되리라는 이 선언은 신 13:16의 규례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그 규례에는 불살라 진멸된 성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되어서는 안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 기초...장자...계자를 잃으리라 - 본절에서 선포된 여호수아의 이 예언적 저주는 후일 아합 왕 때(B.C. 870년경) 실제로 벧엘 사람 히엘에게서 일어났다. 즉 히엘은 여리고를 견고한 성읍으로 다시 재건하려고 여리고 성의 터를 쌓다가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던 것이다(왕상 16:34; Keil, Maxwell, Velde, Campbell, Woudstra, Fay). 실로 그 사건은 하나님의 뜻에 불복하는 자의 결과가 어떠한가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Calvin). 한편 여기서 '계자(季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이르'는 '가장 적은', '나이가 어린'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경상에서 이 '차이르'는 창 25:23에서 '어린 자'로, 창 48:14에서는 '차자'로 번역되기도 했으나, 실제로 이 예언이 성취된 왕상 16:34에서는 '말째 아들'로 번역되었다. 또한 KJV, RSV, NTV, 공동 번역 모두 '막내 아들'(the youngest son)로 번역하였다. 한편, 혹자들은 여기 여호수아의 저주를 보다 확대 해석하여 장자는 성의 터를 쌓을 때에, 막내 아들은 성의 문을 세울 때 잃을 것이며, 나머지 그 사이의 자식들 역시 그 중간 단계의 작업 진행 중 모두 잃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Masius, Munsterus).
=====6:27
명성이...퍼지니라 - '여호수아와 함께 하심으로 그를 형통케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1:5-7)이 성취되고 있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요단 도하(渡河) 사건이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에게 높임을 받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면, 여리고 함락 사건은 여호수아를 가나안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스런 존재가 되게 하기에 충분했다(Matthew Henry).
바야흐로 이스라엘이 그토록 숙원(宿願)하던 가나안 정복 전쟁에 있어서 교두보(橋頭堡)가 될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장은 그 내용상 크게 여리고성 함락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1-5절), 여리고 성 함락(6-21절), 라합과 그 가족의 구원(22-27)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본장의 시작 부분이 5장의 마지막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1-5절에서 여리고 성 정복에 대해 지시하는 하나님은 5:13-15에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군대 장관과 동일한 분이시다. 즉 5:13-15에서 하나님께서는 군대 장관으로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친히 싸우실 것을 보여 주셨는데, 이제 친히 그 일을 실행에 옮기시고 계시는 것이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성전(聖戰, Holy War)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복의 첫 관문이었던 여리고 성 점령부터 그분의 지시에 의해 수행되기를 바라셨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6일 동안 여리고 성 주변을 맴돌며 7일째 되는 날에 나팔을 불자 여리고 성이 함락되었다는 6-21절의 기사는 이 여리고 성 함락이 결국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되어진 것임을 강조해 준다. 즉 앞서 하나님께서는 만일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1장), 여리고 성 정복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제 그 약속을 성취시키신 사건임을 보여 준다. 한편 22-27절에서 라합과 그의 가족이 여리고 성이 함락될 때 구원 받았다는 기사는 2장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그들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에 여리고 성을 탐지하다가 죽음의 위험에 처했었던 이스라엘 두 정탐꾼을 구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2장 강해를 참조하라.
1. 여리고 정복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6:1-5)
가나안을 향해 꾸준히 진군하던 이스라엘은 일찍이 요단 동편에서 강력한 아모리 족속을 훼파한 적이 있다(2:10). 더군다나 그들은 바로 앞서 우기(雨期)로 인해 엄청나게 물이 불어났고 급류가 휘감돌던 위험 천만의 요단 강을 하나님의 구가능에 의해, 전혀 조그마한 사고도 없이 물 한 방울 몸에 묻히지 않고 안전히 도하하기까지 하였다(3:14-17). 때문에 일찍부터 이스라엘의 행로(行路)와 동태에 대하여 예의 주시해 오던 여리고 성 거민들은 이제 그러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성읍으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선 철통같은 수비를 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1절). 즉 그곳 거민들은 이스라엘의 침입을 두려워한 나머지 일찌감치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와같은 상황하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미 자신이 여리고 성을 여호수아 손에 맡기셨다고 분명히 단언하신다(2절). 그리고 빈틈없는 수비를 갖춘 여리고 성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친히 일러주신다(3-5절). 즉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모든 군사들로 하여금 매일 한번씩 엿새동안 여리고 성 주위를 돌고 제 7일에는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이 길게 나팔을 불라고 지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분부는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만고 불변의 진리(고전 1:25)를 이 사건을 통해 보여 주려 하셨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묵묵히 순종하자 그토록 견고하던 여리고 성이 저절로 무너지고만 사실에서 충분히 입증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스라엘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순종 여부에 달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순종 ! 그것은 실로 하나님께서 그 무엇보다 우리에게서 기뻐 받으시려는 제물이다(삼상 15:22). 이와 관련된 보다 깊은 교훈과 의미는 다음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여리고 성 점령의 의의(意義) - 본문에는 여리고 거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리고 성 공략을 저지하가 위해서 성문을 굳게 닫아 버리는 장면이 나온다(1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성을 함락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2-5절). 여기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항하려는 여리고 성 거민들은 이스라엘의 요단 강 도하의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을 이길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여리고 성이 아무리 견고하고 성벽이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다 할지라도 흐르는 요단 강물까지 멈추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협상이나 항복을 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항하여 성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즉 그들은 마음이 강팍하여서 파멸을 자초하고 있었다.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하는 모든 자들은 비참해질 수 밖에 없다(욥 15:25). 이러한 사실은 차후에 화해를 요청했던 히위 족속 외에는 가나안 거민들 모두가 이 여리고 성 거민처럼 하나님께 대항하다 멸망당하고만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에 대해서 여호수아서 저자는 11:20에서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운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강퍅하여 저주를 받도록"내버려 두셨다. 마치 바로가 모세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고 강퍅했듯이(출 7:13, 22 ; 8:15, 19, 32)여리고 성 거민들은 여호수아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고 강퍅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 방식 -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여리고 성 공략 방법에 대하여 일러주고 계시는 장면이 나온다(3-5절).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흔히 인간들이 쓰는 방식과는 달리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시고 역사하심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여리고 정복 전략 내용은 단순히 여리고 성을 엿새 동안 돌고 칠일째 되는 날에 나팔을 부는 것 뿐이었다. 이러한 것을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리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사들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어리석은 백성들이라고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성 주변을 돈다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성위에서 갑자기 돌이나 화살이 날아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군사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이 해괴 망착하고 우스꽝스럽고 위험하게 보이는 방법을 통해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종종 일반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곤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멸망시키는 데 있어서 성을 돌고 나팔을 부는 것 외에 실제적으로 일을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묵묵히 당신의 지시에 순응하는 것을 보고선 배후에서 능력으로 역사, 여리고 서을 함락시켜 주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셨다. 이런 사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방법이 그들이 생각할 때 이상하고 불가능해 보알지라도 그 방법을 따르기만 하면 모든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사실 여리고 성 주위를 돌면서 나팔을 분 것과 여리고 성이 함락되는 것은 전혀 관련이 없어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보다 훨씬 더 지혜로우시다. 피상적으로는 별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방법이다(사 55:8, 9).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할 만한 실제적인 방법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라 할지라도 당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안에서 역사하시는 방법은 전혀 우리의 생각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간혹 그 방식은 아주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때때로 목적을 성취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기 못할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방식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여리고 성 함락(6:6-21)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서 받은 하나님의 명령대로(3-5절) 순종한 결과 놀라웁게도 여리고 성이 함락되는 장면이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여호수아는 제사장과 백성들을 불러모아 하나님의 명령을 대언한다(6, 7절). 그러자 백성들은 조그마한 불평이나 이의도 제기함없이 하루에 한 차례씩 성 주변을 돈다(8-14절). 그리고 제 7일에는 성 주변을 일곱 번 돌며(15절) 여리고 성 정복시 주의해야 할 사항을 숙지한다(16-19절). 그러자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여리고 성벽이 무너지고(20절) 백성들은 각기 앞을 다투어 입성(入城), 이미 주의받은 대로 성읍의 모든 것을 깨끗이 진멸한다(21절).
이 같은 사건에서 우리는 믿음과 순종의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된다. 즉 이는 "믿음이 한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라는 말씀의 산 증거가 된다(마 17:20). 실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절대적 능력자이시기 때문이다(빌4:13).
혹 우리 가운데 헤쳐 나가기 어려운 위기에 직면한 자가 있는가 ?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간섭하심을 믿어 보라. 그리하면 이스라엘 앞에서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렸듯 우리의 문제는 산산 조각이 나 무너져 버릴 것이다.
여리고 성 함락의 교훈 - 본문은 이스라가마 백성들이 실로 미련스럽기 짝이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 여리고 성이 함락되는 장면을 보여 준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두가지 큰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백성들이 믿음으로 이 일을 행했다는 점이다. 즉 히브리서 저자가 이 사건을 두고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히 11:30)다라고 기록하였듯이, 여리고 성 함락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엇다. 앞 단락에서도 이미 이야기 되었지만, 사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여리고 성을 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우스꽝스럽고 위험한 일이었다. 또한 6일 동안 여리고 성을 맴돌면서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을 때 그들은 깊은 회의와 갈등에 빠질 가가자성도 있었다.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성 주변을 맴돌아야 한다면 한 번 도는 것이나 백번 도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인데 굳이 6일간에 걸쳐 매일 한 바퀴씩 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또 성이 함락될 수 있다면 첫째날 소리를 지르게 하여 빨리 함락시킬 것이지 왜 마지막 날에 지르더록 하여 자꾸 일을 지연시키려고 하는가 ? 비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이러한 의문도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평상시에는 일주일을 오랜 기일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만일 우리가 별로 의미도 없는 듯한 일을 하면서 일주일을 보낸다면 그것은 매우 지루하고 긴 시간으로 느껴질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성과를 확실히 볼 수만 있으면 그만큼 일은 훨씬 더 쉬워질 것이다. 하지만 힘을 많이 들여도 그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일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그 성과가 곧바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본문에 나오는 여리고 성 정복 사건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엿새 동안 계속하여 여리고 성 주위를 돌았으나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흔들리게 할 수도 있었던 이 모든 요소에도 불구하도 요동하지 않고 견실하게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했다.
그들은 이 명령의 출처가 하나님께로부터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명령에 복종했다. 그들은 어떠한 의심이나 낙담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에 합당한 응답을 주셨다. 우리는 여리고 성 주변을 묵묵히 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에서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깊은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 또한 그들의 강한 인내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전혀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을 참을성 있게 해나갔다. 이스라엘 백
성들이 여리고 성 사건에서 보여 준 인내심은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것이었으며 우리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하겠다.
(2) 백성들이 여리고 거민들을 철저하게 진멸했다는 점이다(21절).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후, 성에 들어가서 남녀 노소 우양과 나귀 등 호흡이 있는 것은 모두 다 진멸하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리고를 정복하도록 한 것은 그 전리품으로 인하여 풍요로와지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대신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멸망시키신 진정한 목적은 죄악의 족속들을 진멸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멀리하고 더러운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백성들이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백분 이해하고 전혀 물욕에 사로 잡히지 않은 채 여리고 성읍을 전멸시킨 것은 참으로 모범적인 신앙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참으로 우상 숭배나 잘못된 종교만큼 인간을 그릇되게 하는 것은 없다. 우상 숭배에 빠지고 잘못된 종교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인간 사회에서 부적합한 사람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우상 숭배와 잘못된 종교는 매우 나쁜 영향을 미치며 모든 거룩한 것을 말살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고전 10:20, 21)고 말함으로써 우상 숭배를 강력히 금지시켰던 것이다.
3. 라합과 그의 가족의 구원(6:22-27)
여리고 성이 멸망하는 와중에서 라합과 그 가족이 구원받는 장면(22-25절)과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재건을 엄격히 금지하는 장면이다(26, 27절).
라합은 전에 두 정탐꾼들을 보호해 준 대가로 여리고 성이 침략당할 때 그녀와 그의 가족들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약속받았었다(2:15-21). 이 약속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2:12, 13) 이제 여호수아는 그 약속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시 여호수아는 성을 멸망시키는 일에 분주한 나머지 라합과 그녀의 가족을 구원하는 일을 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잊지 않고 그들을 다 구원한 것은 그가 그들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가를 잘 나타내 준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직접적으로 구원하는 일은 일전에 라합이 보호해 주었던 바로 그 정탐꾼들이 맡아 하였다(22, 23절). 이들은 친히 라합의 집에 유숙했었기 때문에 (2:1) 그녀와 그녀의 자족들 그리고 그녀의 집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녀와 친히 구원 약속을 맺었던 장본인들이었으니(2:8-21)여호수아의 명을 받들어 라합의 가족들을 구원하는 일에 최적격자들이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본장 마지막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여리고 성을 다시는 재건하지 못하도록 명령하면서 만약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26, 27절). 이러한 금지 명령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의 주제 강해를 참조하라
여리고 성 재건 금지 명령 - 본문에는 철저하게 훼파된 여리고 성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누구든 절대로 그 성을 재건치 못하도록 금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금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꼽을 수 있는 사유로는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한 하나님의 능력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일이든지 빨리 잊어버리기마련이다. 때문에 여리고 성이 멸망을 당해 황폐한 그대로 두면 훗날에 그곳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토록 황폐하게 된 이유를 묻게 될 것이고 그때 그들은 다시 한번 그들의 조상들을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여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었던 우상을 숭배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더라도, 여리고 성의 황폐한 모습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면서 그러한 마음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2) 또한 이것은 가나안에 살고 있는 다른 족속들이 여리고 성의 황폐한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정복한 성읍이었기 때문에 가나안의 다른 족속들이 비참하게 된 여리고의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3)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정복한 첫 열매이므로 하나님께 바쳐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을 다시 재건하여 이곳에서 안주하려고 해서는 안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여리고를 구별시켜 사람들이 그곳에 거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은 당신의 은혜로우심과 의로우심을 영원히 기념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