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장 폐허가 된 유운장
밤이 깊어선지 가을 바람이 몹시 싸늘했다. 이 외딴 폐허에는 날짐승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았다. 이곳은 너무나도 황막하여 있다면 도깨비나 남아 있을까, 살아 있는 생명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드문드문 서 있는 허물어진 담벽들과 잎새가 말라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금방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였다.
그 허물어진 담벽 속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이지러진 구름을 보노라니
바람에 밀려 파도가 이는 듯
구름 송이 하나 남아서
마을을 장식하누나
강산이 짓밟히고 인걸이 뒤바뀌니
쓸쓸한 그 광경 애처롭기 그지없네
뉘 말했던고,
산천이 의구하고
고국의 모습 강개하였다고
모든 것은 유수처럼 흘러가 버리고
하늘엔 석양빛만 붉게 타누나.
산천과 영웅을 기리는 노래이건만 그 노랫소리는 애간장을 말릴 듯 한없이 처량했다.
멀리 울창한 수림이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그 속에서 어른거렸다. 검은 옷을 입은 그 사람은 멍하니 서서 허물어진 폐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드러난 폐허의 광경은 무척 기괴하게 보였다. 불에 타다 만 흔적들은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끔찍했으나 그 사람은 별다른 기색 없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축축한 밤이슬을 맞은데다가 소슬한 가을바람까지
불어오자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산(珊), 산…… 가엾은 사람…… 그대가 그렇게 죽다니. 단 하룻밤밖에 정을 나누지 못했는데……. 그 기나긴 밤에 난 변경에서 돌아와 그대에게 머리 장식품을 주었지. 평소에 머리 장식품을 그렇게도 즐기던 그대가 그날은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다만 사시나무 떨듯 하면서 나만 꼭 끌어 안았지. 그날 밤 우린 날이 밝을 때까지 서로를 꼭 끌어안고만 있었지. 그 밤이 지나자 난 사부님
의 일로 또 바삐 보내게 되었는데 그대가 이렇게 죽어 버릴 줄이야……. 내가 그 놈을 죽일 테야. 그 놈을 꼭 죽여 버리고 말겠어."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오래도록 폐허를 바라보았다.
한편 무너진 길다란 담벽 위에 자그마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마치 농가의 어린애가 구들에 한가롭게 걸터앉아 있듯 앉아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웃어대기 시작했는데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 없었다. 그는 한바탕 웃고 나서 또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자고로 악인들이 강량(强梁)을 떠들었지만
그가 어찌 무검(舞劍) 항장(項庄)에 미칠 수 있으리오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 방벽을 이루었고
목왕(穆王)이 여덟 준마 휘몰아
서왕모의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도다
그대 정녕 악인이 되려 할진대
여불위 뒤에 시황제가 있듯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음을 깨달아야 하리라
하건만 이 모든 풍류 귀객들
가차없이 한줌의 흙이 되었어라!
그는 웃다가 울다가 하며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허물어진 담벽 앞에는 그말고도 두 사람이 더 서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아무 기척도 없이 발자국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채 그 작은 사람 앞에서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노인이었는데 남루한 옷을 걸치고 풀이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눈에 핏발이 섰고 손도 시뻘겋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 하나를 등에 들쳐 업고
있었는데 아이는 오래 전에 죽은 듯 눈이 말라붙고 입이 까매졌을 뿐만 아니라 역한 시취까지 풍겼다. 그 노인은 노래 부르는 어린아이를 뼈다귀째 씹어 삼킬 듯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노인의 옆에 서 있는 사람도 나이가 꽤 들어 보였는데 깨끗한 얼굴에 선비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도 음흉한 웃음을 띤 채 담벽에 걸터앉아 노래부르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노인이 입을 열었다.
"두아야, 너 지쳤구나. 지쳤으면 이 할애비랑 가서 자자. 남의 음식을 먹어서는 안 돼. 남의 음식이란 좋지 않단다. 좋은 음식이 라도 먹으면 안 돼. 남의 집 꿀떡 속엔 독이 있어."
노인은 머리를 돌려 자애로운 표정으로 등에 업힌 아이를 쓰다듬었다.
옆에 서 있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큰형님, 그러지 마슈. 그 앤 이미 죽었어요. 벌써 독이 퍼져 냄새까지 나는데 왜 자꾸 그러시우?"
노인이 버럭 역정을 냈다.
"둘째, 지금 뭐라 했나? 두아가 죽었다구? 자네야말로 죽었어. 자네야말로 벌써 죽었어야 했어!"
그는 흥분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두 사람은 주먹과 손바닥을 엇갈아 내밀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사정없이 치고 받고 하였으나 사형제 처지라 서로 상대방의 권법에 아주 익숙하여 수십 합을 싸워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들은 몹시 지쳐 숨이 턱에 차서야 싸움을 그만두었다.
속문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갈정 형님, 나한테 이러자 마슈. 형님의 원수는 저쪽에 앉아 있는데 저 놈 죽일 생각은 않고 왜 나한테 분풀이요?"
"둘째, 두 번 다시 두아가 죽었다는 말을 입에 올리면 자넬 죽여 버릴 테야!"
제갈정은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거칠게 내뱉고는 머리를 돌려 담벽에 걸터앉아 있는 아이를 보더니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대들도 오셨군!"
두 사람을 발견한 아이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던지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속문성이 입을 열었다.
"사숙님, 우리 오형제는 사숙님을 대단찮게 보아 왔었는데 오늘 만나 뵙고 나니 큰 오산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숙님의 총명하심은 우리 형제들은 비길 바가 아니십니다."
속문성이 굽신거리자 아이가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 너희들 오형제는 너희들 사부한테 하는 것과는 달리 날 여지없이 깔보았지. 그런데 오늘은 어찌하여 날 사숙님이라 부르면서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사숙님은 아주 총명하십니다. 사숙님께선 이젠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손에 넣었으니 자연히 천하 으뜸이 되었소이다. 만일 다른 사람이 이런 비적을 얻었더라면 가만히 숨어서 그 무예를 마저 익혔을 것인데, 사숙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으니 우리 오형제가 어찌 사숙님을 죽일 수 있겠소이까. 그러니 저희가 어찌하면 사숙님께서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감추신 곳을 알 수 있겠소이까?"
속문성의 말에 아이는 삿대질을 하며 웃어댔다.
"너희 오형제처럼 어리석은 놈들은 세상에 또 없을 거다. 내가 만약 합마공의 내공심법을 터득했다면 벌써 너희들 다섯 놈과 가족들을 몽땅 독살해 버렸지 이라고 있겠느냐?"
속문성이 천천히 말을 받았다.
"사숙님이 아무리 대단한 재간을 가졌다 해도 우리들 다섯 형제를 한꺼번에 죽이기는 어려울 겁니다. 만일 저와 큰형님, 셋째 동생이 함께 손을 쓰게 되면 사숙님 하나 정도야 죽이고도 남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돌변하면서 이를 갈았다.
"넌 내 마누라를 죽였어. 난 네 놈의 가죽을 벗기고야 말 테다. 이 괘씸한 놈!"
그러자 아이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받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난 네 말대로 했을 뿐인데. 넌 분명 네 마누라를 싫어하지 않았느냐? 난 네가 한 말을 듣고 너를 도운 것 뿐이야. 속담에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지. 부부간의 정이란 그렇게 깊어야 하는 거야. 한데 네 놈은 나에게 네 여편네를 대신 죽여 달라고 하지 않았나? 너희들 연놈이 억지로 붙어 살고 있는 판인데 내가 널 대신해서 그 년을 죽여 버리지
않는다면 네가 어떻게 젊고 예쁜 계집을 얻을 수 있겠느냐? 이 놈아, 다 너를 위해 한 일인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이제 와서 무슨 딴소리야?"
이때 제갈정이 소리쳤다.
"이 개자식아, 우리 두아를 살려내! 우리 두아를 살려내란 말이다!"
그는 곧장 아이에게로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이 맞붙더니 주먹과 손바닥이 정신없이 오갔다. 싸우는 그들을 지켜 보면서 속문성은 속으로 머리를 굴렸다.
'네 놈들이 언제까지 싸우는지 보자. 제갈정이란 교활한 늙다리가 열넷이나 되는 일가족이 저 놈의 마수에 걸려 죽지만 않았어도 이처럼 대노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 절호의 기회다. 이 둘째한테 이처럼 훌륭한 기회가 주어질 줄이야!'
제갈정은 불붙는 듯한 분노로 평소보다 더 지독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우리 두아를 살려내! 우리 두아를 살려내란 말이다!"
제갈정은 끓어오르는 비분으로 목이 메였다. 아이는 대꾸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제갈정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이윽고 큰소리로 말했다.
"제갈정, 이 바보야. 자네는 유운장에 수십 년 간 살면서 장가를 들어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이 자식을 낳았지. 개미가 쳇바퀴 안을 맴돌 듯 말이야. 자네는 유운장이 천하에 가장 무서운 곳이라는 걸 모르진 않겠지? 하늘에 걸렸던 무지개도 찢겨 내려오는 곳인데 사람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런데 그처럼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그 많은 가족 가운데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는 것은 괴이한
일 아닌가? 이번에 내가 자네를 대신해서 그들을 보내 버린 것을 자네는 감사하게 생각해야 해. 잠 한 번 편히 못 자고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하게 하던 시름거리를 덜어 준 셈이니 말야."
그건 맞는 말이었다. 사실 아내와 자식들이 없으면 혼자 몸으로 얼마나 자유롭겠는가? 숱한 식솔들을 거느리느라 제갈정은 정말이지 여간 마음 고생을 한 게 아니었다. 식솔들의 의식주 문제를 일일이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이 유운장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언제 어떻게 죽어 나갈지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결국 비명에 죽고 말았다. 그는 이것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의 말을 듣곤 난 그는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어쩌면 사숙의 말이 옳은지도 모르지. 내가 여편네를 얻지 않았던들 자식들이 생겨나지 않았을 테고, 또 자식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이처럼 손자를 잃어 가슴 아파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사뭇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제갈정, 인생도 초목과 같아 한번 가면 오질 않아. 자네의 가족이 그렇듯 전부 죽어 버렸는데 자네만 살아서 뭐 하겠다는 건가? 살아서 무슨 낙이 있겠느냔 말이야? 제갈정, 자네는 50년 동안이나 공력을 들여 장가를 들고 아들들이 숙성해지고 손자 놈들이 무릎 아래서 재롱을 부리는 걸 보아 왔지. 하지만 50년 세월이 흘러 결국엔 그것을 몽땅 잃어버렸는데 어디 가서 찾아오려나? 차라리
따라 죽는 편이 낫지. 그러면 큰 시름을 덜게 될 거니까."
심기가 어지러워진 제갈정은 마음속으로 자문해 보았다.
'정말 이렇게 사느니 죽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온 집안 식솔들이 모두 비명에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서 무슨 낙이 있겠는가. 차라리 죽어 버리느니 만 못하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그는 이윽고 천천히 두 손을 치켜 들었다.
곁에서 지켜 보던 속문성이 다급히 소리쳤다.
"형님, 형님은 가족을 위해 복수하기를 포기할 참이오?"
제갈정이 그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무슨 복수를 한단 말인가? 두아가 죽고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죽었는데 나 혼자만 살아 뭣해?"
속문성은 몹시 초조해졌다. 만일 제갈정이 자결이라도 한다면 자기 또한 사숙의 적수가 못 되는 만큼 이곳에서 죽게 될 게 뻔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소리쳤다.
"형님, 형님이 늙은 독물 신독행한테 몸을 맡긴 건 대악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소? 그런데 되려던 악인은 못 되고 오히려 남의 손에 죽으려 하니 이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소?"
"내가 악인이 되려 했다고? 악인이 돼서 뭘 하겠나? 온 가족이 다 비명에 죽어 버렸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갈정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면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는 제 손으로 자기의 머리를 후려치려 했다.
다급해진 속문성이 얼른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깨의 정혈(井穴)을 눌렀다. 그러자 제갈정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이가 손뼉을 치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둘째, 자네가 꾀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계책에 말려들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임자와 제갈정은 모두 그 늙다리만 생각하고 나를 잊어버렸단 말야. 이젠 늦었어.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됐지."
아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둘째, 자네는 아주 총명한 사람이니 말해 보게. 자네의 사부가 죽게 될 때면 누구에게든 그 합마공 심법을 전수해 주지 않겠는가?"
둘째는 한동안 망설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사부님 성미로 보아 꼭 전수할 것이오. 당초에 사부님께서는 우리 다섯 사람을 눈에 들어하지 않았던 터라 거짓말을 했지요. 하시는 말씀이, 경성 변량에 그의 전인(博人)이 있는데 우리들더러 주련 한 폭을 갖고 가서 그 전인을 찾아내어 맞추어 보라는 거예요. 우리가 그 사람을 없애 버릴까봐 두려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정말 그의 전인을 찾아내게 하려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에게도 생각이 있었어요. 우리는 사부님한테 세상 없는 글벌레를 찾아다 주기로 약속했지요. 아무리 가르쳐 봤자 악인으로 만들지 못할 그런 작자를 찾아다 주자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늘이나 알 노릇이지, 우린 끝내 오산을 한 것이지요. 지금 사숙이 사부님의 내공심법을 갖고 있는데 우릴 이렇게 못살게 굴 필요가 어디 있소? 너무 억누르면 모두가 죽고 맙니다."
그의 말에 아이가 담장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불똥이 튀는 듯한 눈으로 속문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째, 솔직히 하는 말이지만, 난 그 내공심법이란 걸 가져온 일이 없네. 자네가 믿지 않아도 할 수 없어."
속문성은 그의 말을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남의 말을 그대로 믿다가는 모가지가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곳이 바로 이 유운장이 아니던가. 아이는 하는 수 없이 자세한 내용을 속문성에게 차근 차근 얘기해 주었다.
그날 밤 아이는 쾌도가 죽은 뒤 암실의 통로를 찾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급한 나머지 온 마을 사람들을 몽땅 불러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한나절이 넘게 찾아도 신독행의 종적은 여전히 묘연했다.
그는 분통이 터진 나머지 한 하인의 손에서 횃불을 빼앗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신가 놈아, 너를 태워 죽일 테다. 이 산장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기 전에 냉큼 나오지 못하겠느냐?"
그는 횃불을 휘둘러 여기저기에 불을 붙였다. 불이 번져 나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일제히 자기 집으로 달려가 세간살이를 챙겨들고 뿔뿔이 도망쳤다. 불길이 점점 세차게 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아이는 구양봉과 신독행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불길이 뜨겁게 타올라 용마루가 주저 앉았는데도 두 사람의 모습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불지르길 잘했어. 합마공의 심법을 손안에 넣지 못할 바에야 신독행 그 놈을 태워 죽이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러나 불타 버린 폐허를 둘러보는 동안 그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신독행과 구양봉이 정말 불에 타 죽었는지 어쨌는지 흔적조차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난 속문성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나더러 지금 그 말들을 믿으라는 거요?"
"믿지 못한대도 하는 수 없지. 하지만 난 자네에게 내 말을 믿으라고 권하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자네한테도 좋은 점이 없을 테니까."
속문성이 아이에게 물었다.
"그래, 어떻게 할 작정이시오?"
"유운장은 없어졌어도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만일 자네들 두 사람이 내 말을 따를 생각이 있다면 함께 강호로 나가세. 힘만 합하면 강호 사람들한테도 우리 유운장의 본때를 보여 줄 수가 있지 않겠나?"
그는 말을 마치고 큰소리로 웃었다.
속문성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께서 돌아가시자 유운장은 얼음이 녹듯 절로 무너져 내렸다. 나와 큰 사형, 셋째 사제, 거기다가 소리 한마디 지르지 못하는 두 작자는 강호에 나가도 어쩌지 못할 것이며 사숙과 한패거리 노릇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속문성이 비로소 대답했다.
"우린 사숙과 한패거리 노릇은 할 수 없소. 사숙은 툭하면 남한테 마수를 뻗쳐 인명을 해치기 일쑤인데 우리가 어찌 사숙과 함께 있을 수 있겠소?"
그러자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들 스스로를 잘 판단해 봐. 하나는 미친놈이고 다른 하나는 어리석기 짝이 없지. 만약 나와함께 하지 않을 경우 자네들이 강호에서 무슨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가?"
속문성은 마음이 흔들려 제갈정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큰형님, 어쨌든 우린 무공이 사숙님만 못하니 사숙님 뜻에 따르는 게 어떻겠소?"
제갈정은 그의 제안이 탐탁치 않았으나 혈도가 막힌 관계로 반대할 수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사숙을 쏘아보았다
"사숙, 당신은 내 가족을 죽인 사람이오. 그런데 내가 어찌 당신과 한패거리가 될 수 있겠소?"
"자네가 나와 손잡기만 하면 천하를 주름 잡으며 무림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것이 이런 개인적인 은원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그의 말에 제갈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제갈정의 혈도를 풀어 준 후 세 사람은 담벽에 걸터앉아 폐허를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천하의 악인이 될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해도 지금은 은신할 곳조차 없는 처량한 신세인 것이다. 세 사람은 사실 그 큰 유운장이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나자 서운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각자 착잡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광풍이 일더니 검은 옷을 입은 사나
이가 나타나 칼을 휘둘렀다. 그는 정면으로 사숙을 내리치며 외쳤다.
"산의 목숨을 살려내! 산의 목숨을 살려내란 말이다!"
사숙은 그가 사정없이 칼을 휘두르자 반격할 틈도 없이 그저 피하기에 급급했다. 사나이는 더욱더 민첩하게 칼을 휘둘러 대면서 바싹 다가들었다.
다급해진 사숙이 소리쳤다.
"제갈정, 속문성! 자네들은 그곳에 멍하니 서서 뭐하는 건가? 빨리 손을 써서 이 놈을 막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두 사람은 다 움직이려고 들지 않았다. 잠자코 바라보고 있던 속문성이 빈정대듯 말했다.
"사숙님, 당신이 이 셋째 동생한테 손을 쓰면 우리 셋째 동생이 아마 당해 내지 못할 겁니다. 큰형님한테 본때를 보이던 것처럼 한 번 본때를 보여 주시지요. 저 사람 눈엔 존장(尊長)이라는 게 없으니 사숙께선 그리 아시오."
이때까지도 얼떨떨해 있던 제갈정이 비로소 제정신이 드는 듯 중얼거렸다.
"나도 저 놈을 죽여야 한다. 암, 죽여야 하고말고. 우리 두아를 위해 복수해야지! 우리 두아를 위해 복수해야 해!"
그가 사숙에게 덤벼들려 하자 속문성이 그를 붙잡으며 말했다.
"큰형님, 셋째 동생의 칼 쓰는 기법을 좀 보시오. 여지껏 본 적 없는 수법이 아닌가요?"
아닌게아니라 석초수의 칼놀림은 실로 기가 막혔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그 방식이 괴이하고 수법이 달라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제갈정은 갑자기 깨달은 바가 있어 입을 열었다.
"실로 종래에 본 적이 없는 것이군. 저 기법은 실로 괴이해. 옳아, 그렇지. 셋째가 저렇게 칼을 쓰는 건 왼손이 칼을 쓸 때마다 바깥쪽으로 돌기 때문인 거지. 안 그런가? 둘째, 셋째의 저 기법은 자네를 대적할 때 쓰던 기법이야, 안 그런가?"
속문성이 음흉스럽게 말을 받았다.
"자세히 보슈. 저 칼 쓰는 법은 복판이 아니라 비스듬히 머리를 겨누는 거요. 저건 분명히 형님을 대적할 때 쓰던 '출수운수(出水雲袖)'란 기법이외다."
두 사람은 속으로 움찔 놀랐다. 평소 석초수의 행동거지로 보아 이런 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지금 석초수는 자기 처자가 살해당한 복수심에 불타 평소 익혀 두었던 칼 쓰는 법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아이는 그가 결사적으로 나오자 내심 은근히 걱정되었다. 석초수 하나야 크게 두려울 것이 없지만 그 옆에 다른 두 사람이 버티고 있지 않는가. 제갈정과 속문성 역시 자기를 죽일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로서 무공도 이 석초수보다 약하지 않았다. 석가 녀석을 물리쳐 버리지 못한 채 두 놈마저 덤벼들게 되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생각이 이쯤 미치자 아이는 큰소리로 외쳤다.
"석초수, 내가 독을 쓰겠다!"
이 거친 사나이는 평소 아이가 독을 사용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되어 사숙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그는 그와 더불어 죽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네 놈이 독을 쓴다 해도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그는 아이의 위협 따위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여전히 빈틈없는 자세로 칼을 휘둘러 댔다.
아이가 손을 펼치자 한 줄기의 연기가 석초수 쪽으로 풍겨 갔다. 연무가 흩어져 오는 데도 석초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것도 잠시, 연기를 들이마신 석초수가 대경실색하여 소리쳤다.
"당신, 패왕분(霜王粉)을…… 썼구나!"
석초수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속문성이 소리쳤다.
"대단하군요. 사숙님은 실로 고명하외다. 독을 쓰는 덴 정말 고수라니까요. 그 수법엔 제자들도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하지만 제갈정은 말이 없었다. 그는 아직도 사숙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온 식솔을 죽인 그의 지독한 수법이 이가 갈리도록 증오스러웠다.
둘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숙, 당신은 저 사람을 어떻게 할 셈이오?"
"어떡했으면 좋겠나?"
"죽인다고 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지요. 하지만 사숙은 대악인이라 저 사람을 죽이는 따위의 하찮은 짓은 안 할 거요. 저 사람을 살려 두고 사숙을 위해 일하게 함이 어떻겠소?"
속문성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거 놈의 꼴을 보니 나를 위해 일할 성싶지가 않아. 자낸 허튼소리 말게."
속문성이 말을 받았다.
"사숙께선 노파심이 지나치시군요. 저 사람한테 독을 좀 남겨 놓기만 하면 그가 어찌 사숙의 말씀을 안 들을 수 있겠소?"
그의 말에 아이는 손뼉을 쳤다.
"그렇기도 해! 옳은 말이야. 망정산(忘情散) 한 봉지만 먹이면 자연히 내 사람이 될 거야!"
그는 기분이 좋아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유운장이 불바다가 되던 날, 구양봉은 밀실에서 쇠약한 사부를 돌보고 있었다. 그는 열심히 물과 음식을 날랐다. 신독행은 처음에는 그래도 약간의 음식을 들었으나 나중에는 조금도 먹지 못했다.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숱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구양봉이 사부에게 물었다.
"사부님, 밖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요?"
신독행이 그 말을 듣더니 슬그머니 웃으며 대답했다.
"그 꼬맹이 놈이 발광하는 게지. 그 놈이 마을 사람들을 있는 대로 불러내어 이 밀실을 찾고 있는 게야."
그의 말에 구양봉은 깜짝 놀랐다.
"사부님, 그들이 우릴 찾아내면 어쩌지요?"
"네가 합마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으면 달아난다 해도 죽는 도리밖엔 없다!"
사부의 꾸지람을 들은 구양봉은 풀이 죽어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인간에 대해 무자비할 것을 요구하고 사람을 죽이라고 하신다. 하지만 나는 추호도 그럴 생각이 없다. 사부님의 뜻에 어긋난다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천하의 악인이 되라 하는데 내가 어찌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때 밖에서 이상한 바람 소리가 들려 왔다. 거친 소리였다. 구양봉과 신독행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구양봉이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사부님, 어째서 저런 바람이 부는 걸까요?"
신독행이 쓴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바람은 무슨 바람? 그 놈이 마음을 불태우는 소리다."
구양봉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나나 너나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거지. 난 이미 죽을 몸이니 죽으면 그만이구, 어차피 여기가 내 묘지이니 잘 되었다. 너도 여기서 날 배웅하게 되었으니 정말 잘됐어."
신독행은 말을 마친 뒤 눈을 감고는 더는 구양봉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곳까지 불길이 닿을 리는 없지만 나갈 방법이 없게 되는구나. 나는 결국 이곳에 갇힌 채 죽고야 마는 것인가.'
구양봉은 전율을 느꼈다. 그는 미친 듯이 암실 바깥쪽을 향해 달려갔다. 거기서 커다란 석판을 찾아내고는 곧 그것이 출입구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힘껏 그 석판을 떠밀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한편에 자그마한 기관이 있었다. 그는 너무도 기뻐 기관을 틀어쥐고 한나절이나 비틀었지만 삐걱삐걱 소리가 날 뿐 소용이 없었다. 무너져 내린 기와며 담벽들이 석판을 짓누르
고 있었던 것이다. 구양봉은 맥이 풀렸다.
'젠장, 호인이고 악인이고 간에 아무것도 되긴 글렀구나. 어두운 지옥에서 악귀가 될 수밖에 없게 됐어.'
그는 갑자기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며 기관에 대고 주먹질을 해 댔다. 얼마나 두들겨 댔는지 주먹이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불쾌한 기분으로 돌아와 신독행의 맞은편에 주저앉아 입을 확 다물어 버렸다. 신독행이 그를 보곤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나가지 않는 게 좋아. 만일 지금 밖에 나갔다간 그 놈한테 죽고 만다. 차라리 죽으면 그게 낫지, 죽지 않을 만큼만 괴롭히면서 볶아대면 그걸 어찌 견디겠느냐?"
구양봉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형님과 모용쟁의 생각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 왔다. 그 때문인지 신독행에 대한 미움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어찌 이게 훌륭한 사부랄 수 있어? 제 식구끼리 죽이고 해치기를 일삼는 무림의 떨거지들 같으니. 이렇게 하다가는 강호에 나가보지도 못한 채 몽땅 죽어 버리고 말겠는데 어떻게 천하에서 으뜸 가는 대악인이 될 수 있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지.'
신독행이 입을 열었다.
"그래, 말해 봐라. 너는 도대체 합마공을 배울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구양봉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합마공을 배워 사부님처럼 자기 목숨 하나 건사하지 못할 바에야 배워 뭘 하겠습니까?"
신독행은 갑자기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는 웃다가 상처에 통증이 오는지 미간을 찌푸리더니 버럭 고함을 쳤다.
"이 놈아, 감히 내 유운장의 신공을 업수이 여기다니, 죽고 싶으냐? 당년에 난 이 합마공으로 한 자 두께가 되는 석벽도 뚫어 내었느니라."
구양봉은 그 말에 가슴이 후두둑 뛰었다. 그는 신독행이 더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합마공의 위력은 필시 대단할 것이다.
구양봉이 다급히 물었다.
"제가 합마공을 배운다면 능히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겠소이까?"
생사에 관계되는 문제인 만큼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합마공을 배우기만 한다면 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하를 누비고 다닐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지독한 맹세를 해야 한다. 네가 이 동굴을 빠져 나가게 되면 반드시 유운장의 모든사람들을 손수 죽여 버려야 한다. 제갈정의 온 집안, 석초수네 일가와 속문성네 일가, 그리고 그 막(莫)씨 성을 가진 두 형제까지. 이 밖에도 한 사람이 더 있는데, 그건 그 어린애 같은
사숙이다. 알겠느냐?"
"사부님, 왜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여야만 합니까?"
구양봉의 물음에 신독행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넌 내가 사람을 죽이고 싶어 그러는 줄 아느냐? 그 놈들도 밖에서 우릴 죽일 생각을 하지 않느냐? 그 놈들이 우리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다면 이 산장을 불태우지 않았을 거다. 넌 그 놈들이 너한테 무슨 좋은 마음이라도 품고 있는 줄 아느냐? 그 놈들은 네가 강호에 나오기만 하면 천방백계로 널 대적할 생각만 하고 있다. 만일 네가 합마공을 알지 못하면 그 놈들이 마수를 뻗쳐도 막아내지
못할 게고, 그 외에 다른 어떤 방법을 쓴다 해도 그 놈들이 독을 사용하기만 하면 넌 꼼짝없이 죽고 마는 거다!"
신독행은 독설을 퍼붓다가 실망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를 바라보는 구양봉은 마음이 쓰라려 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합마공을 배우지 않았다가는 끝내 이곳에서 죽고 말 것이타. 그는 사부를 바라보며 결연히 대답했다.
"사부님, 배우겠습니다."
신독행은 몹시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60년이 되도록 강호를 떠돌아다녔건만 적수를 만나지 못 했었다. 하지만 난 허장성세를 하지 않았고 강호에는 내가 유운장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이 별반 없다. 나는 워낙 큰일을 해 보려고 했는데 불행하게도 마흔 살 나던 해에 너의 사숙과 다투게 되었다. 그 사람은 물론 나도 상처가 중하여 세상에 대한 웅심이 없어지고 말았지. 네가 합마공을 배우는데, 두려워할 사람은 당세의 기인
이다. 내가 앞서 들은 말에 의하면 중원에 기서가 있는데, 도종 황제 때 황상이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서 《구음진경》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책은 실로 천하의 무학기보로서 여길 나가게 되면 꼭 그걸 찾아내어 익혀야 하느니라."
구양봉은 조용히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부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가 말하는 《구음진경》은 바로 형님이 중원에서 찾으려는 책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부가 아주 큰 성의를 갖고 말한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독행은 말을 이었다.
"그 《구음진경》이란 책은 실로 비할 바 없이 기묘한 책이다. 일찍이 누구한텐가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은 지금 종남산 전진교의 젊은 교주 왕중양의 손에 있다고 한다. 네가 가게 되면 기필코 그 사람과 한판 겨루어야 할 게다. 그래서 네가 그를 이겨야만 그 경서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큰 교의 교주인 그가 쉽사리 너한테 그 기서를 넘겨줄 리가 있겠느냐?"
이 말을 들은 구양봉은 아주 독한 자가 되어 중원에 가서 그 기서를 수중에 넣을 생각을 해 보았다. 더는 연약한 서생으로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지 않게 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절로 뛰었다.
구양봉은 그 자리에서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공손하게 아홉 배를 하고 맹세했다.
"제자 구양봉은 노독물 신독행을 본받아 강호로 나가서 한평생 독과 악을 행하며 인간다운 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나이다. 사부님의 합마공을 배운 후 나가서 사숙 사자우를 죽이고 유운장의 크고 작은 모든 작자들을 죽여 버리겠나이다……."
그가 머리를 들었다.
"사부님, 마을의 하인들도 죽여야 하옵니까?"
신독행은 수염을 흔들고 두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질렀다.
"당연하지. 왜 죽이지 않겠느냐? 그들이라고 우리를 가만 놔둘 것 같으냐? 그들도 우리를 발견하면 발견하기가 무섭게 죽여 버리고 도망갈 거다. 그런 놈들을 죽여 버린다고 해서 아까울 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한이 풀리지 않는 눈치였다.
"그럼 하인들도 죽여 버릴 것이며 유운장 안의 크고 작은 사람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리겠나이다. 만일 이 맹세를 어긴다면 이 구양봉은 칼을 맞고 화살 벼락을 맞아 죽을 것입니다!"
구양봉의 확고한 맹세에 신독행은 몹시 기뻐했다.
"내가 너를 찾은 것은 나의 후신을 찾은 것이다. 드디어 지금 네가 나의 뜻을 이어받게 되었으니 이 어찌 내가 중생(重生)을 얻은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그를 지켜 보는 구양봉의 가슴은 노인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말할 수 없이 쓰라렸다. 그는 비록 사부가 한평생 뜻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자기나마 그에게 위로가 되고 마음놓고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해 드려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석살 안에서 구양봉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사부로부터 합마공 심법에 대한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이 합마공 심법은 배우기가 무척 어려우니 잘 듣거라. 너의 사숙은 어렸을 때 조 사부님의 귀여움을 받았는지라 몇 마디를 가만 히 훔쳐 듣고 슬그머니 합마공을 익히려다가 주화입마가 되어 그때부터 키가 자라지 못했느니라. 그 놈은 줄곧 나를 원망하면서 내가 자기를 망쳐 놓았다고 떠벌리고 다니는데 사실과는 다르니라. 그 놈은 합마공을 익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비명에 죽게
될 거다. 내가 그 놈을 미워하게 된 건 바로 이 때문이야. 하지만 너는 총명한 사람이니 무공에 대하여 깊은 깨달음이 있을 것이며 반드시 스스로 합마공을 익혀 낼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내가 내공심법을 알려 줄 테니 잘 듣고 기억해두어라."
신독행은 구양봉에게 합마공의 내공심법에 대해 한마디 한마디 씩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대력 (大力)이 허하면 오규(五竅)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그 실(實)이 온몸에 전부 들어와 올바르게 유도되지 못하면 기가 빠지지 못한다. 기가 온몸에 차고 넘치면 마구 토하고 싶게 되느니라. 손으로 지기(地氣)를 접하여 상지(上肢)를 지탱하면 마치 호랑이나 늑대와 같이 날쌔진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끌어 잡아당기면 지기가 움직이고 그 기가 온몸에 차게 되는 것이다. 즉 지기는 발로
부터 몸에 들어왔다가 손을 통하여 나가며 손으로 들어왔다가는 발을 통하여 나가는데 이처럼 무궁하게 순환하는 법이다. 만일 소리를 내면 꾸꾸꾸 하는 두꺼비 소리가 나는데, 호랑이나 독수리 울음 소리에 비길 바는 못 되지만 그 기가 닿는 한 쇠붙이나 돌도 부서지고 말며 사람의 인력으로는 감당해 내지 못한다."
총칙을 이야기한 뒤 그는 한 단락의 법문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어찌나 총명한지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깨우치고 가르치는 것마다 그대로 다 깨우쳐서 신독행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몸이 성하다면 저처럼 총명한 놈이 있는 한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경계하다가 결국 죽여 버려야 했을 게다. 이 정도로 총명한 놈이면 이 노독물이 죽은 후에라도 이름을 날릴 수 있을 테니 복이 굴러온 셈이구나.'
신독행은 제자의 총명함에 크나큰 기쁨과 위안을 느꼈다.
이 합마공은 사문의 내공심법으로서 이것을 몸에 익히기만 하면 다른 어떤 기술을 배우든지 간에 힘이 덜 들고 효과가 곱절로 높아진다. 구양봉은 사부의 가르침에 따라 조용히 자세를 취하고 일합막준거식(一蛤 踞式)이나 쌍수안전변환수식(雙手眼前變換數式) 등을 연습해 보았는데, 이것들은 다 내력을 끌어내 오는 기공이었다. 그 다음에는 몸을 도약하여 공중에서 자세를 바꾸는 것으로,
공중에서 마음대로 회전하다가 땅에 내려서는 훈련이었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두꺼비처럼 '꾹꾹' 하는 소리도 내었다. 이 소리를 내는 데도 내력을 모아야 하는데, 땅에서 내력을 끌어들여 대력을 키우면 무궁무진한 힘이 솟아 나오게 되어 있었다. 적과 싸울 때 무림의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힘을 이어 대지 못하여 중도에서 무력해지는 것이다. 상대가 열 가지 법수를 알고 있
는데 다섯 가지 법수밖에 모르면서도 맨주먹으로 싸운다면 실속 없는 주먹질과 발길질로 어떻게 상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저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양봉은 이제 합마공을 알게 되었으니 수시로 내력을 끌어낼 수 있으며 남과 싸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한 사람은 정성들여 가르치고 다른 한 사람은 신중하게 배웠다. 다행히 두 사람 다 매우 총명하고 지혜로운 탓에 전수해 주고 배우는 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열흘 동안 배우고 나자 구양봉은 제법 숙련된 합마공을 펼칠 수 있었다. 밤이 되어 사부님이 길이 잠든 틈을 타서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굴 어귀로 나갔다.
'사부님께서 이 합마공을 배우기만 하면 굴 문을 열 수 있다고 했으니 어디 한번 시험해 보자. 나갈 수 있다면 사부님과 함께 밖으로 나가리라.'
그는 꿇어앉는 자세를 취하고 신력을 모아 굴 문을 힘껏 후려쳤다. 와르르 하는 소리에 놀란 구양봉이 얼른 옆으로 비켜서서 굴 어귀를 바라보았다. 흙벽이 무너져 내려 먼지가 뭉실뭉실 피어 올랐으나 길은 들리지 않았다.
'내 힘으로는 이 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모양이로구나. 사부님께서 나를 나무라시겠구나! 만일 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사부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나 혼자 이곳에 남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를 위로해 보려 애썼으나 끝내 절망감에 사로잡혀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자는 줄로만 알았던 신독행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 모르게 가서 시험해 보았던 게지? 그래 굴 문이 열리더냐?"
구양봉은 당황하여 대답했다.
"아니요."
"네가 지금 굴 문을 열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이다. 이제 막 합마공을 익히기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 굴 문을 열어젖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느냐? 내가 이렇듯 몸이 상하지만 않았어도 당장 굴 문을 열었을 텐데……."
구양봉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부상을 입은 몸으로 그럴 힘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아무래도 두 사람이 이 석굴 안에서 나갈 수 있는 날은 올 것 같지가 않았다.
굴 안에 머물러 있는 석 달 동안 사부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구양봉은 사부의 상처가 하루하루 악화되어 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그가 닦은 합마공은 어느 정도 보람이 있어 두 손바닥으로 밀면 석벽의 흙덩이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곤 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신독행은 구양봉의 합마공이 이젠 3, 4할쯤은 숙련되었다고 말했다.
하루는 신독행이 몹시 기진맥진하여 구양봉을 불렀다.
"양봉아, 너는 오늘부터 천하에 드문 악인이고 독물이다. 하지만 너는 절대로 날 미워해선 안……."
구양봉은 눈물을 흘렸다.
"사부님, 사부님께선 저를 구해 주셨고 저는 오직 감사할 따름인데 미워하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날 미워하는 건 대수롭지 않으나 네가 한 맹세만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네가 그걸 시행하지 않는다면 난 죽어서도 귀신이 되어 너를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다."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이며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노라 대답했다.
신독행이 기운을 내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합마공엔 화공대법(化功大法)이란 법수가 있다. 화공대법으로 네 손을 나의 전중혈( 中穴)에 갖다 대면 거기로부터 나의 공력을 흡수할 수 있다. 나의 공력을 흡수하기만 하면 너는 굴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구양봉은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아니, 사부님! 그렇게는 못합니다!"
"넌 그래 이 구사독옹의 문하생이 아니더냐? 행동거지가 이처럼 계집년 같아서야 어찌 나의 제자라 할 수 있겠느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달래듯 말했다.
"양봉아,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난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게다."
그는 기를 쓰고 구양봉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그의 손을 틀어쥐고 자기의 전중혈에 갖다 대면서 힘껏 토해냈다. 그의 대력이 구양봉에게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이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그가 배우는 합마공은 일종의 기공으로서 적수가 강하면 강할 수록 내력이 도리어 더욱 커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부가 기를 쓰고 공력을 토해 내자 이에 따라 그의 내력도 스스로 터져 나와 사부의 공력과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두 갈래의 내력이 한데 모아지자 사부의 전중혈에 갖다 댄 그의 손은 움직이려야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긴장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부의 내력을 받아들였다. 신독행은 자기의 내력이 구양봉한테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자 도리어 기분이 느긋해지는 눈치였다. 그는 한마음으로 구양봉에게 내력을 주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30여 분이 흘렀을까. 신독행은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더니 몸을 뒤틀며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구양봉이 황급히 그를 부축하였으나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구양봉은 쓰라린 심정으로 울먹이며 말했다.
"사부님, 사부님, 이러실 필요까진 없으셨는데……."
신독행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양봉아,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느냐?"
구양봉은 머리를 끄덕였으나 소리를 내지 못하고 흐느끼기만 했다.
"넌 이 사부를 기억하고 천하에 드문 악인이 되어 큰일을 하거라……."
사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숨결은 점점 미미해지다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구양봉은 만감이 교차해서 망연히 사부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사부님께서는 자기의 다섯 제자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나한테만은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 주셨다. 난 반드시 그런 사부님의 뜻을 따라 천하에 드문 악인이 되리라. 난 그 꼬마 사숙을 죽여 사부님의 복수를 해 드릴 테다. 내 손으로 그 유운장의 인간들을 몽땅 죽여 버리고 말리라.'
구양봉은 눈물을 흘리며 굳게 결심했다. 그는 이제 자기의 내력이 커져서 사부의 60년 공력을 몽땅 흡수했음을 절감했다. 기쁨과 슬픔이 한데 얽힌 심정으로 그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이제 이곳에서 나가자.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사부님을 위해 복수하여 사부님께서 구천에서도 편안히 눈을 감으시게 하리라.'
그는 사부의 유체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아홉 배를 한 뒤 소리 내어 말했다.
"사부님, 저는 이제 떠나가겠습니다. 만일 사부님 말씀이 옳으시다면 전 꼭 밖으로 나갈수 있을 겁니다. 제가 나가게 되면 사부님 대신 반드시 복수를 해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뒤 그는 굴 어귀로 향했다. 그는 숨을 길게 들이쉰 다음 내공을 끌어올려 석판을 힘껏 떼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