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한 조선의 인물들 3 - 송순, 송찬
- 송순(宋純, 1493~1582), 향수 90세
면앙정(免仰亭) 송순(1493~1582)은 조선 중기의 저명한 문신이다. 자(字)는 성지(誠之) 혹은 수초(守初), 호(號)는 면앙정 혹은 기촌(企村)이다. 본관은 신평(新平)이며, 시호는 숙정(肅定으로, 1493년 담양(봉산면 기곡리 상덕마을)에서 태어났다.
1513년 진사가 되고 1519년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고,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했다. 1547년에는 진문사(秦聞使)로 북경을 다녀왔으며 그후 대사헌(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2년간의 유배 후 풀려난 1552년, 고향에 머물면서 자신의 호를 단 면앙정(免仰亭)을 세웠다. 여기에 기대승이「면앙정기」를 쓰고, 임제가 「면앙정부」를 지었으며 임억령, 김인후, 박순, 고경명 등이 영시(詠詩)로써 면앙정삽십영을 지었다. 면앙은 하늘을 우러르고 땅에 굽어보아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굳굳한 선비정신을 담고 있다. 정자의 오른편 마루에는 정조 임금의 어제(御題)가 붙어 있다. 시제는 ‘하여면앙정(荷輿俛仰亭)’이다.
그는 1562년에는 기로소(耆老所, 퇴직고관 모임)에 들어갔는데, 복직하여 1568년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이후 의정부우참찬 겸 춘추관사가 되었으나, 1968년(79세) 지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했다. 그 후 14년간 향리에 묻혀 유유자적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1582년 9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고,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무려 50여 년간 관직 생활을 한 송순은 성격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특히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이었다. 호남 시가(詩歌)의 원조이며 김인후, 박순, 기대승, 고경명, 정철, 임제 등 많은 후진을 배출한 시가와 학문의 대가였다.
그는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급제 60주년에 열리는 '회방연'(回榜宴)을 가질 정도로, 드물게 장수한 분이다. 회방연 때 박순, 이후백, 임제, 정철 등 제자이자 명망 높은 문인, 학자들이 직접 가마를 메고 그를 모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215년 후에 과거시험 문제로 출제되기도 했다.
그는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국문가사 「면앙정가」를 비롯한 많은 한시와 시조 20여 수를 남겼다. 그는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거기 머물지 않고,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노래했던 현실참여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시 한 수를 소개한다.
농가의 원성[田家怨]
송 순 (宋純)
지난해 곡식은 벌써 다 떨어졌다고 하는데 (舊穀已云盡)
새로 핀 이삭 여물 날 언제일지 기약없네. (新苗未可期)
날마다 서쪽 언덕에서 나물을 캐와도 (摘日西原草)
그 굶주림을 채우기엔 부족하구나. (不足充其飢)
아이들 배고파 우는 거야 참는다지만 (兒啼猶可忍)
늙으신 부모님은 또 어찌하리오. (親老復何爲)
사립문 밖에 나가 보아도 (出入柴門下)
갈 곳이 없어 아득할 뿐이네. (茫茫無所之)
아전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官吏獨何人)
세금 닦달하고 또 사사로이 뜯어 가네. (責公兼徵私)
항아리를 뒤져봐도 이미 비어 있고 (窺缸缸已空)
베틀을 보아도 역시 망가져 있으니 (視機機亦亡)
아전 또한 어쩌지 못해 화를 내며 (吏亦無奈何)
소리치고 성내며 아이들을 묶어 가다니 (呼怒繫諸兒)
의지하고자 원님에게 고하였더니 (持以告官長)
사또 또한 슬퍼하지도 않네. (官長亦不悲)
차꼬를 목에 씌우고는 (桎梏加其頸)
치고 때리고 다리에 주리를 튼다. (鞭打苦其肢)
해 저물녘 서로 부둥켜 안은 채 (日暮相扶持)
일제히 통곡하는 소리 울 안을 감도네. (齊哭繞故籬)
하늘에다 모두 죽여 달라 빌어도 (呼天皆乞死)
들어줄 자 그 누구란 말이더냐. (聽者其又誰)
슬프고도 슬프도다. 구제받지 못한다면 (哀哀不見救)
언덕과 골짜기에 시신만 공연히 쌓일 텐데. (丘壑空積屍)
- 송찬(宋贊, 1510~1601); 향수 92세
송찬(宋贊)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진천(鎭川)이고 자(字)는 치숙(治叔), 호는 서교(西郊)이다(송순과 동시대 인물이며 17년 아래로, 같은 송씨이나 본관은 다르다). 중종· 인종· 명종· 선조의 4조(朝)에 걸친 중신으로 경기감사, 영흥부사, 판돈녕부사,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매우 청렴했던 인물이었다고 하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중종32년(1537)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1543년 예문관 검열(檢閱), 홍문관 정자(正字)를 거쳐 승문원 참교(參校)로 『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명종 즉위년(1545)에는 홍문관 수찬(修撰), 다음 해에 시독관, 교리(校理), 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그 이듬해에는 성균관 직강(直講), 병조정랑, 홍문관 부교리를 지냈으며, 황해도에 어사(御史)로 나가서 민정을 살피기도 했다.
1548년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을 지내고 구황어사(救荒御史)로 경상좌도를 살펴보고 와서 '구황을 소홀히 한 수령들을 처벌하라' 고 보고하였다. 또 평안도의 수령들이 불법을 저지르는지 살펴보러 갔다 오기도 했다. 1549년에는 홍문관 응교(應敎) 등을 거쳐 1551년 전라도 구황어사(救荒御史), 검상(檢祥), 사인(舍人)을 지내고 민폐를 조사하러 경상도에도 어사로 갔다 왔다.
다음 해에는 전한(典翰), 직제학, 우부승지를 지낸 뒤, 1557년 대사간이 되었다. 명종16년(1561) 필선(弼善)을 거쳐 다시 우승지, 좌승지를 거쳐 1563년 한성부 우윤을 지내고, 1565년에는 경상도관찰사로 갔다. 이듬해 도승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음 해에는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도 다녀왔다. 그 다음해(1568년)에 다시 전라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선조3년(1570)에는 호조참판으로 『명종실록』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1573년 경기관찰사, 영흥부사를 지냈고, 진하사(進賀使)로 또 명나라에 다녀왔다. 72세(1581년)에는 다시 경기관찰사를 지냈고, 85세(1594년)에 첨지중추부사, 우참찬을 거쳐, 나이 90(1599년)에는 판돈녕부사 ․ 판중추부사의 직에까지 올랐다.
그동안 중종, 인종, 명종, 선조 등 네 임금을 모시면서 무려 90세까지 관직에 있었던 셈이다. 당시로선 매우 드물게 92세까지 장수하였으며, 1601년 타계하였다. 숭정대부가 추서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글, 서예 등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9년 연배인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이 송찬에게 화답한 시가 전한다.
화기송상(和寄宋相) - 정승 송찬(宋贊)에게 화답하여 부치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큰 산을 구름이 감추니 봉우리가 하늘을 버티고 (泰嶽雲藏 天柱峯)
상공이 돌아와 이르러 조용히 타이르며 다스리네. (相公來到 爲開容)
산속 늙은이 욕됨을 묻으니 술 취한 무리도 없어 (山翁忝麥 醺無類)
고명한 분 더불어 마주하니 넉넉함이 다하지 않네. (對與高明 未有窮)
- 남명선생집1권(南冥先生集卷之一)
글; 무 애 (한국선도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