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위치: 유럽북서부
인구: 17,231,612명 (2023년 추계)
수도: 암스테르담
면적: 41,85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네덜란드 왕국 (Kingdom of the Netherlands)
기후: 서안해양성기후
민족 구성: 네덜란드인(87%)
언어: 네덜란드어
정부/의회형태: 입헌군주제 / 양원제
종교: 로마가톨릭(31%), 네덜란드 개혁교회(13%), 이슬람교
화폐: 유로 (€) 환율계산기
국화: 튤립
대륙: 유럽
국가번호: 31
GDP: USD 945,327,000,000
인구밀도: 409명/km²
전압: 230V / 50Hz
도메인: .nl
네덜란드와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유럽에 있는 국가. 수도는 암스테르담이고 행정부는 헤이그에 있다. 공식어는 네델란드어이지만 영어도 사용된다. 화폐단위는 유로다. 강하고 잘 정돈된 혼합경제로 금융업, 경공업, 중공업 및 무역업 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 1648년 30년 전쟁 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양원제를 운영하는 의회제도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면적 41,850㎢, 인구 17,231,612(2023 추계).
북에서 남으로 282km, 동에서 서로 176km 뻗어 있는 이 나라는 북쪽과 서쪽으로는 북해, 동쪽으로는 독일, 남쪽으로는 벨기에와 접하고 있으며 약 7,464㎢의 내수(內水)를 포함한다. 대다수의 국민이 네덜란드인이다. 공용어는 네덜란드어이지만, 영어도 함께 사용한다. 종교는 로마 가톨릭교와 개신교 같은 그리스도교가 많지만, 이슬람교도도 있다. 화폐단위는 유로(€)이다.
네덜란드의 남부와 동부 지역은 대개 평원과 기복이 있는 몇몇 산마루들로 이루어져 있다. 서부와 북부 지역은 저지대이다. 이들 지역은 조이데르 해의 폴더(polder: 제방에 둘러싸인 저지로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간척지)와 라인·뫼즈·스헬데 강들을 아우르는 삼각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지역은 거의 해수면보다 낮아서 모래언덕과 인공제방으로 보호된다(→ 삼각주 계획).
인구밀도는 높지만, 출산률은 낮은 편이다. 발달된 시장경제체제로 대부분 금융업, 경공업, 중공업 및 무역업 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양원제를 운영하는 의회제도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원수는 국왕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로마 정복 시대에 켈트 족과 게르만 족이 이 지역에 거주했다. 로마 통치기에 무역과 산업이 융성했다. 하지만 AD 3세기 중반 로마의 권력은 다시 힘을 모은 게르만족과 바다에서 일어난 침식작용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게르만족의 침입(406~407)은 로마의 통치를 종식시켰다. 메로빙거 왕조는 로마 제국을 따랐지만, 7세기 카롤링거 왕조에 지배권을 빼앗겼다. 카롤링거 왕조는 기독교로 그 지역을 개종시켰다.
814년 샤를마뉴가 사망한 이후, 이 지역은 바이킹 공격의 목표가 되는 일이 잦아졌다. 중세 로렌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로렌). 로렌 왕국은 세속적 힘을 주교와 대수도원장에게 부여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에 편입되는 것을 피했다. 그리고 제국적 교회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12세기부터 많은 영토에 대규모 제방 건설이 시작되면서 바다를 개간했다. 플랑드르는 섬유산업 중심지로 발달했다. 14세기 후반 브루고뉴 공작이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 16세기 초까지 오늘날의 베네룩스 3국이 된 저지대 국가들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 다스려졌다. 네덜란드는 어업과 조선업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17세기 네덜란드의 놀랄 만한 번영의 초석이 되었다.
문화적으로는 반 아이크, 토마스 아 켐피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의 시대였다. 캘빈주의와 재세례파 교리는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였다. 1581년 북부 7개 지역에서 캘빈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고, 1648년 스페인은 30년전쟁 후에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했다.
17세기는 네덜란드 문명의 황금 시기였다. 베네딕트 디 스피노자와 르네 데카르트는 지적 자유를 즐겼고, 렘브란트와 요한네스 페르메이르는 대작을 완성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아시아 식민지들을 확보했고, 네덜란드의 생활 방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18세기에 네덜란드의 제해권은 쇠퇴했다. 그 지역은 프랑스 혁명 전쟁 동안에 프랑스에 정복되었고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 네덜란드 왕국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지대로 남아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다. 전쟁 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령 뉴기니(지금의 이리안자야)를 잃었다.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유럽 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EEC)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21세기 초에 네덜란드는 강하고 잘 정돈된 혼합경제의 장점을 누렸으나, 국외로부터 이민이라는 사회·경제적 도전과 씨름해야 했다.
자연환경
네덜란드는 뚜렷하게 2개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남쪽과 동쪽의 고지대로, 대부분 기복이 있는 평야와 거의 해발 100m를 넘지 않는 산마루들로 이루어져 있다.
최남동부의 발세르베르흐 산(320m)이 이 나라의 최고봉이다. 다른 하나는 남서쪽·서쪽·북서쪽·북쪽의 저지대로 라인 강을 비롯해 뫼즈 강과 스헬데 강을 낀 삼각주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지역은 거의 해수면보다 낮다. 높은 인공제방에 의해 강화된 해안가의 긴 모래언덕이 간척지를 둘러싸고 있어 육지를 침식시키는 조류로부터 저지대의 매우 넓은 부분을 보호하며 간척지의 사용을 가능하게 해준다. 연평균유출량이 초당 약 2,500㎥인 라인강, 뫼즈강, 스헬데 강이 이 나라에서 가장 큰 하천이다.
기후는 온화하며 대체로 북해와 멕시코 만류의 영향을 받는다. 연평균기온은 10℃로서 겨울의 1.7℃로부터 여름의 18℃까지 변화하며, 760㎜인 연평균강우량은 1년 내내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성장계절이 길고 간척지에 훌륭한 목초지가 있어 낙농업 발달에 큰 도움이 되며, 치즈·버터·달걀 수출에서 세계적으로 수위를 차지한다. 토지의 거의 3/5이 경작되고 있는데 그중 약 60%는 목초지, 30%는 농경지, 나머지는 시장출하용 채소재배 농지로 쓰인다. 장식용 식물, 화초, 구근 식물과 특히 이 나라의 상징인 튤립 등의 수출지향적 재배가 주요산업이다. 온실재배에 의해 오이·토마토·양상치·화초 등을 대부분 수출용으로 생산한다.
1980년대 중반에 천연 가스 매장량은 서유럽에서 제2위였으며, 국내 에너지 수요량의 절반 이상을 공급했다. 다른 광물자원으로는 석유·소금·석탄 등이 있다.
국민
연인구증가율은 1980년대에 계속 떨어졌다. 출생률은 1945∼54년 기간에 비해 반 이하로 떨어졌고 사망률은 비교적 변화가 없다. 평균수명은 높아서 남자는 80.2세, 여자는 83.4세로, 여자가 남자보다 약간 높다. 영아사망률은 출생영아 1,000명당 불과 3.9명이다. 전인구 중 14세 이하 연령층은 비교적 적은 비율인 16.59%를 차지하고 60세 이상은 상당히 높은 비율인 18.37%를 차지하고 있다(2020).
출국이민보다 입국이민이 많은데, 대부분 독일을 비롯해 네덜란드의 옛 식민지였던 수리남·모로코· 영국 등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캐나다와 미국으로 가는 이민의 수는 1956∼57년의 연 3만 명이었던 것이 1980년대 중반에는 연 5,000명 수준으로 격감했다. 매년 약 6,000명이 독일로, 약 5,000명이 벨기에와 터키로 이민을 간다.
민족구성면에서는 약간의 인도네시아인 및 수리남인과 함께 네덜란드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의 위그노를 비롯해 잘츠부르크인, 스위스인, 포르투갈계 유대인, 독일인 등이 이 나라로 이민을 왔다. 오늘날의 국민들은 프리지아인· 색슨족· 프랑크족의 혈통이 섞인 후손들이다.
인구의 거의 절반이 서부의 두 주인 조이트홀란트 및 노르트홀란트와 중부의 위트레흐트 주에 살고 있다. 북부 주들의 인구밀도는 낮은 편이다. 국내적으로 서부 주들에서 동부 주들로 인구가 이동하는 경향이고, 도시지역 인구는 전체인구의 91% 이상을 차지한다. 2023년 기준 인구는 1,723만 1,612명이다.
언어
네덜란드 저지 독일어(네덜란드어: Nederlands Nedersaksisch)는 네덜란드 북동부에 걸쳐 사용되는 네덜란드의 지역 언어로 저지 독일어의 일종이다. 서부 저지 독일어를 구성하는 언어 가운데 하나이다. 유네스코에 의해 5개의 소멸 위기 단계 중 1단계인 ‘취약한 언어’로 분류되어 있다.
문화
지배적인 예술형태는 그림이다. 이 나라에는 여러 개의 주목할 만한 미술박물관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그림들을 소장한 것으로 유명한 레이크스 박물관, 반 고흐의 그림과 데생들을 수백 점이나 소장한 빈센트 반 고흐 레이크스 박물관, 상당수의 현대화가 수집되어 있는 스테데레이크 박물관 등이 모두 암스테르담에 있다.
오테르로에 있는 크뢸레르밀레르 레이크스 박물관 역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반 고흐의 그림들을 소장하고 있다. 헤이그에 있는 마우리츠호이스에는 17세기 그림들이 다수 수집되어 있고 로테르담에 있는 보이만스반뵈닝겐 박물관 역시 잘 알려져 있다.
데스테일이라고 알려진 20세기의 운동이 서방 미술과 건축에 널리 영향을 미쳤다. 잘 알려진 현대 네덜란드 화가로는 피트 몬드리안, 테오 반 두스부르흐, 케스 반 동겐 등이 있다. 한편 네덜란드어를 쓰는 인구수가 적기 때문에, 네덜란드 연극과 문학은 국제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음악활동은 활발하여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20세기의 가장 잘 알려진 작곡가로는 빌렘 페이페르와 케스 반 바렘이 있다.
역사
켈트족과 게르만족이 로마 정복(BC 1세기) 당시에 살고 있었으며, 5세기초 게르만 민족의 침입으로 로마의 지배가 끝났다.
로마 제국의 뒤를 이어 프랑크족의 메로빙거 왕조가 이 나라를 지배했으나, 7세기말에 피핀 2세 및 그의 계승자들에게 지배권을 빼앗겼다. 이 계승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샤를마뉴이다. 카롤링거 제국은 9세기 중반 경건왕(敬虔王) 루트비히 1세가 죽은 후 분할되었다.
16세기초에 네덜란드는 스페인 합스부르크가(家)의 한 지방이 되었다. 종교개혁 동안 북부지방들은 칼뱅주의로 개종했고, 오렌지 공(公) 빌헬름(1533∼84)이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반(反)종교개혁 정책들에 저항하여, 칼뱅주의자들에 의해 야기된 반란을 주도했다.
연합주들과 스페인 사이의 전쟁은 17세기가 되어서도 계속되었으나 1648년 스페인은 마침내 네덜란드의 독립을 인정했다. 17세기에 광범위한 식민지령을 가진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중요한 상업국가가 되었다. 네덜란드의 해상력을 축소시키려는 잉글랜드의 노력이 있자 1652∼54년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1688년 잉글랜드 의회는 오라니에 공 빌렘과 그의 부인 메리 스튜어트에게 잉글랜드를 다스리도록 초청했고, 그들을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로 칭했다. 그러자 윌리엄 3세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합쳐진 힘을 이용해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18세기 동안 네덜란드의 해상력은 쇠퇴했고 무역은 잉글랜드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1814년 모라니에 공인 빌렘 6세에 의해 오라니에가(家)가 회복되었으며, 그는 빌렘 1세로서 벨기에가 1830년의 반란으로 독립을 얻기까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포함된 새로운 네덜란드 왕국을 세웠다. 184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빌렘 2세는 이 왕국이 의회국가로 변모하는 것을 감독했다. 신(新)헌법(1848)은 영국 체제를 본따서 만들어진 것으로, 의회에 최고 권한을 부여했다.
빌헬미나 여왕 치세(1890∼1948) 동안 남성들의 보통선거권이 허용되었다. 네덜란드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중립을 지켰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점령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인질로 잡혀갔으며 또한 많은 유대인들이 집단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네덜란드는 중립국의 입장을 버리고 NATO에 가입했고, 1958년에는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했다.
전후의 정부는 가톨릭당(黨)과 노동당의 제휴로 이루어졌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가톨릭당이 개신교도들을 포함해서 재조직한 국민당이 정부에서 우세했으나, 1973년에 그 자리를 노동당에게 빼앗겼고, 1977년 이후에는 다수 연립세력이 계속되고 있다.
종교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갖고 있는 개혁교회 국가였기 때문에, 메노나이트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망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에는 세속화로 인해 개혁교회 신자가 크게 감소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남부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다. 이외에도 옛 동인도 식민지에서 온 이민자들에 의해 힌두교도들도 있고, 소수이지만 유대교 신자도 존재한다. 이슬람교 신자도 있으나 박해의 대상이 된다. 무종교 50.1%, 로마 가톨릭23.7%, 개신교 5.5%, 그 외 기독교 4.5%, 이슬람교 4.9%, 기타 종교1.1% 이다.
네덜란드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우리나라가 네덜란드와 관계를 맺은 것은 조선시대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Weltevree, J., 박연, 朴淵)가 표류, 귀화했던 것이 처음이다. 그 뒤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돌아간 하멜(Hamel, H.)은 우리나라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하멜표류기』를 쓰기도 하였다. 1907년 이준(李儁) 열사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다가 분사(焚死)한 바 있다. 그의 유해는 1963년 서울로 이장되었으며, 유해가 있던 곳에 1977년 10월 묘비가 제막되었다.
네덜란드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7개 회원국의 일원으로서 적극 활동했으며,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지지해 온 주요 우방국이다. 6·25전쟁 참전국으로 강원도 횡성군에는 화란 참전용사비가 있다.
네덜란드는 1949년 7월 대한민국을 승인하고, 1961년 4월 4일 국교 수립에 합의하였다. 1968년 12월 주한 상주공관이 개설되고, 1969년 10월에는 네덜란드 주재 상주공관이 개설되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양국은 1966년 4월에 특허 및 상표 협정, 1970년 4월에 사증 면제 협정, 1970년 6월에 항공 협정, 1974년 10월에 투자보장 협정, 1978년 10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79년 2월에 전대차관 협정, 1982년 12월에 경제기술협력 협정, 1995년 12월에 해운 협정, 2002년 7월에 사회보장 협정, 2003년 7월에 투자보장 협정, 2007년 7월에 세관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네덜란드 수출액은 40억 2400만 달러로 주종목은 제트유 및 등유·무선전화기·승용차 등이며, 수입액은 43억 4900만 달러로 주종목은 반도체제조용장비·반도체제조용장비부품·나프타·고철 등이다.
양국은 경제협력을 보다 원활히 하고 강화하기 위해 1975년 한·화 공동위원회, 1976년 한·화 민간경제협력위원회가 발족되어 상호협의를 해 오고 있으며, 2007년 현재 경제단체로 KOTRA를 비롯하여 삼성전자·LG전자·한국타이어·외환은행 등 40여 개 상사들이 진출해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또한, 한·화란친선협회 및 화란한국전참전용사회·한국전참전화란해군용사회 등이 조직되어 있으며, 1976년 10월 우리나라의 횡성군과 네덜란드의 가스텔시가 자매결연을 맺고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07년 현재 네덜란드에는 719명의 교민 및 1,032명의 체류자가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때에는 271명의 네덜란드 선수단이 참가한 바 있으며, 2002년에 개최된 한·일 공동 개최 월드컵경기에서는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Guus Hiddink) 감독이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아 4강에 진출시켜 전국민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