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으로부터 전래된 인디언,마야,잉카의 문화
- 마야제국의 문화
미대륙 인디언과 잉카가 우리 한민족(동이족)이라고 주장하는데 학계에서는 너무 심한 유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충분히 합리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이 분명한 한, 누구도 부정할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부터 이러한 합리적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멕시코에 팔렝케 유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발견된 마야 파칼왕(파 칸)의 피라미드는 한국의 장군총과 같고 파칼왕의 머리는
가야의 두개골변형임이 입증된 바 있습니다.
멕시코여행을 가고자 하는 분은 그곳 제1유적지인 마야의 피라미드를 반드시 보시게 될 텐데요. 먼저 한국에서 다음 몇 곳의
유적지를 답사해보고 떠나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첫번째는 안동시 안동탑과 산청의 산청탑을 살펴보고, 두번째는 서울 방이동에 있는 백제고분을 답사하고
세번째는 만주의 집안에 있는 고구려 장군총을 보십시요(사진으로라도).
한민족의 전통무덤인 고구려식 피라미드가 어떻게 생겼는지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한민족학자들은 이런 유일의 전통 피라미드가 고조선에서 고구려등(인디언,잉카,마야,이집트 등)으로 이어져 고구려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전세계로 진출했다는 데 이견이 없습니다
네번째는 부산대 박물관으로 전시실에는 이마가 납작한 두개골이 있는데, 가야지역의 경남 김해군 대동면 예안리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두개골의 변형은 이 유골만 아니라 10구의 유골에서도 발견됐는데, 학계에서는 당시의 풍습으로 인위적으로 머리를 변형시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오늘날까지 변화하기 전의 원래 모습이라고 봄이 타당하겠습니다.
이렇게 납작한 형태의 두개골은 가야의 특정한 집단 혹은 특수계층의 사람들이 편두라는 풍습을 가지고 있던 것이라고 봅니다.
고구려식 피라미드와 가야의 편두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멕시코의 팔렝케 유적을 살펴보면, 신전은 3개의 방과 벽면에는 6백여개의 마야 상형문자와 그림들이 있고 피라미드 무덤에서 6구의 유골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여성의 유골도 있는데 유골의 가면은 이마가 편두처럼 푹 꺼져 있어 가야의 편두형 머리와 비슷하고, 회반죽으로 화장해서 만든 두상도 발견됐는데 왕의 얼굴을 기념해 새긴 인위적인 형상으로 보이고 편두 이마의 조각상도 있습니다.
팔렝케유적의 발견 이후 다른 마야 유적지인 과테말라의 티칼에서도 무덤형 피라미드가 발견됐고, 1994년에도 무덤 피라미드가 발견되는데 마야학자들은 최대의 비문이 발견된 팔랑케 피라미드를 기념해 '명각의 신전'이라 부릅니다.
이후 마야학자들은 명각의 신전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해독한 결과 무덤의 주인이 '방패'라는 뜻을 지닌 파칼(칼=칸)왕임을 밝혀냈고, 파칼왕은 12세에 왕위에 오르고 80세(683)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 고구려식 피라미드 (주신문명=고조선문명)
파칼왕의 명각의 신전과 여러 피라미드들은 한국의 고구려 고분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고구려식 피라미드는 만주의 집안과 요녕지역에 약 12000기가 분포돼 있는데, 파칼왕의 피라미드는 그 규모나 구조가 집안에 있는 고구려 장군총을 연상케 합니다.
차이점은 파칼왕의 피라미드가 지하에 석실과 석관이 있다면, 장군총은 5층에 석실과 석관이 있고 파칼왕은 1개의 석관인데 장군총은 부부의 무덤으로 2개의 석관이 있다는 점으로써, 이는 고구려식이 더 발전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그러나 양 피라미드의 유사성을 비교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신전으로서, 멕시코 고고학자들이 파칼왕 피라미드의 독창성을 주장하는 증거물이기도 합니다. 즉, 파칼왕의 피라미드는 정상에 신전이 세워져 있는 반면 장군총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장군총 꼭대기 형태까지 보면 무엇인가를 위해 비워둔 공간이라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즉, 원래부터 빈 공간은 아니라 무엇을 위한 공간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맨 꼭대기까지 탑을 쌓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타당한 것입니다.
이 주장을 더욱 합리적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었는데, 장군총 정상의 돌덩이를 살펴본 바, 여기에 일정하게 구멍이 뚫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공(柱孔)이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건물의 기초석이 일정한 간격으로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현재 없어진 피라미드 정상의 어떤 모양은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명백하게 밝혀낸 증거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증거를 바탕으로 많은 한민족사학자들은 "장군총 정상에 사당을 짓고 하늘과 조상에 제사를 지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것입니다. 장군총 역시 피라미드 위에 신전이 있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이 피라미드의 축조 시기(연대)입니다. 파칼왕의 피라미드는 683년 이후에 건설된 피라미드로써, 이 시기를 고구려시대와 비교하자면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패망시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로, 파칼왕의 피라미드는 장군총(3세기 이전)보다는 후에 건설된 피라미드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5천년 전, 주신(고조선)시대로부터 전파된 한민족이 이미 상당한 지역까지 진출하여 지배세력화 되었슴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파 칸의 피라미드처럼 무덤은 발견되지 않으나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피라미드는 그 건설 시기가 훨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먼저 멕시코 최대의 국립인류학박물관에서 펴낸 책자를 통해 메소 아메리카문화의 탄생과 발전과정을 보면, 지금부터 4000 ~ 3500년전에는 멕시코에 옥수수를 재배하는 마을이 곳곳에 자리 잡았고, 이후 토기와 토우예술 및 파라미드들이 건설됨으로써
문화가 꽃피게 됨을 알수있습니다.
멕시코 학자들은 이 시기부터 전기고전기(BC.1200년~BC.100년), 고전기(BC.100년~ 900년), 후기고전기(900년~ 1521년)로 나누어 문명의 변천사를 기록하고있는데, 마야문명은 현재 사람들이 알고있드시 메소 아메리카 최초의 문명이 아닌 것으로 보아야
이치에 맞는 생각이라고 보며, 그 무엇인가 선대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본다면 주인공인 파 칸(칼)은 바로 마야문명의 대표적 인물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민족의 고구려식 피라미드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는데 대부분 학자들은 장군총과 같은 피라미드(적석총)는 고구려 초기의 무덤 양식으로 대체적으로 3세기까지를 그 하한 시기로 잡고 있습니다.
반면에 고구려 피라미드가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 정확히 말하는 자료는 없지만 그러나 그 기원은 서기전으로 올라가고 고구려,
그 문화를 고조선으로부터 이어 받았다는 게 학자들 간의 이의가 없는 부분입니다.
즉, 고구려의 파리미드 장묘제 역시 고조선 문화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렇게 보아야 타당하다는 학설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양자강 상류에 있는 용마고성 유적에서 약 5000년 전에 쓰인 제사용 토단이 발견되었는데 제사용 토단은 종교적형태를 갖춘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고고학적 증거입니다.
그리고 장강문명의 기원 연대와 비슷한 또 다른 문명으로 한민족의 발상지와 깊은 관련이 있는 유적이 대륙의 요녕지역에서도 발견됩니다.
1986년에 중국 고고학계의 보고서가 나온 요녕성의 우하량 유적에서 돌제단과 흙으로 구운 신상의 머리가 발굴되어 학계의 관심을 모았는데 연대가 BC. 3700년으로 보고있습니다.
후기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이 유적지에 중국학자들은 홍산문명(紅山文明)이란 이름을 붙였고, 홍산문명은 종교의 권위가 뒷받침하는 정치권력이 등장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고대문명으로 간주합니다.
단국대의 윤내현교수는 "홍산문명은 고조선 등 한민족의 고대사와 직결돼 있기에 중국과 일본학자은 그 중요성을 외면하고 있지만, 홍산문명와 장강문명 등 새로운 고대문명의 면모가 드러나고 있는 이상, 황하중심의 동아시아 고대사 인식은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이는 인류사, 즉 한민족원류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근거입니다.
이렇게 홍산문명과 장강문명에서 피라미드의 원형이 발견됐다는 점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데, 설령 홍산문명과 장강문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그들은 분명, 동이족으로써 그 문화가 고구려로 이어졌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하나 분명한 것은ㅡ 동아시아의 피라미드가 멕시코의 피라미드 건축연대보다 빠르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 원류가 어디인지를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 사항으로써, 주신(고조선)(한국,환국)의 증거라고 보기에 충분한 사항들입니다.
- 가야식 편두
파칼왕의 편두와 가야의 편두는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위해 멕시코시티에 있는 국립 인류학박물관을 통해 살펴 보겠습니다. [*편두- 이마가 납작한 두개골(변형)]
맥시코 시티의 전시실에는 편두 인골을 전시해두고 있는데 부산대 박물관에 있는 것과 같고, 인골에는 마야인이 어떤식으로 편두를 했는지도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야학자들은 왜 마야인이 편두를 하고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편두와 연관된 연구결과가 나왔는데, 마야인은 심령능력 개발에 노력했고 심령능력을 개발했다는 증거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마야의 군주는 '바이'라고 하는 별개의 자아 또는 분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분신은 꿈을 통해 접촉하는 동물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마야도시들의 일정한 건물에는 마야왕들이 <환상의 탐구>를 위한 특별한 침실이 있다]
이것은 편두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데 일찍부터 영적인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가야의 편두도 영적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것인지를 기록에서 살펴보시지요.
<삼국지>'동이열전' 兒生, 便以石厭其頭, 欲其遍, 今辰韓人皆遍頭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펑펑한 머리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지금의 진한 사람들은 모두 편두이다]
이는 중국 진나라 때 진수가 역사를 기록하면서 동이족 국가들의 역사와 풍속을 설명한 글로, 진한은 고대의 동이족 국가를 설명하는 것이므로 이 기록은 의심할 여지없이 3세기 경 한민족의 풍속을 묘사한 것입니다.
*지증대사비문 遍頭, 居昧錦之尊, 語襲梵音, 彈舌足多羅之字 ... 宜君子之鄕也
[편두는 신라왕의 존귀함이 었고 말은 범어를 차용해 썼다 ... 마땅히 군자의 고향이라]
이는 신라의 최치원이 지증대사비에 새겨놓은 것으로, 신라왕이 편두에다가 이상한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 " 예사롭지 않은 대목 " 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지역에서 고대에 이와 같은 구전과 기록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마야문명에서 귀족층의 자제들이 종교적의식으로 편두했고, 신라의 왕이 존귀함의 상징으로 편두를 했다는 기록은 일치를 보여주는 바, (신라 왕비가 인도에서 왔다는 사실 등) 조상이 같은 한민족이라는 역사적 근거가 되는 내용입니다.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로 볼때, 베링해를 건너간 먼 옛날의 아시아인종이 두 대륙에서 독창적으로 편두를 했다는 설명보다는 역사시대에 아시아에 있던 편두형 집단이 당시 아시아와 아메리카대륙이 붙어 있었을 때 아메리카로 건너가 그 자신들의 문화를 이식했다는 것이 합리적이며 더 논리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의 <용봉문화원류>라는 책에는 중앙아메리카 최초의 문명인 '올멕' 문화는 고대의 은(殷)왕조가 주나라에 망해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은왕조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 라고 주장합니다.
- 중요한 역사적 사건
1910년, 청나라의 외교관 구양경이 멕시코에서 멕시코혁명 시 죽은 화교에 대한 배상문제를 협의하는 중에, 멕시코 원주민인 인디오의 지도자가 찾아와 만나기를 요청하여 만났는데, 자신들은 원래 동이족(은복포족=은나라사람)으로써 약 3천 년 전에 이곳으로 왔다고 얘기했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실사로써 정식외교문서인 대만외교부 자료보관처에 보관되어 있는 것인데, 우리는 이 실사에서 몇가지 중요한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정권입니다. 즉, 고구려의 후손들이 중국을 정복하고 세운 동이의 나라 즉 한민족정권의 나라입니다.
이전에도 중국의 관리가 멕시코 등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때는 이들이 중국관리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청나라가 동이의 나라라는 사실을 알고, 찾아와 만났고 같은 동족임을 털어놨다는 사실입니다. - 대만 외교부 공식확인 내용임
이런 사실이 우리에게 충격적인 이유는, 멕시코 원주민인 인디오들 스스로 자신들을 동이족(은왕조)의 후예로 자처했다는 점, 이주한지 3000년이 됐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입증 사실은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입증하는 충격적 사실이며, 놀라운 증거입니다.
또, 있습니다.북미 대륙의 인디언이 3000년 전에 북미대륙으로 아시아에서 살았던 동이의 후예가 이주했을 가능성이 높은 유물과 문자들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3000년 전경으로 보이는 인디언의 돌닻이 발견되었는데, 재질이 미대륙에는 없는 것으로 동아시아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밝혀졌고, 멕시코 올멕 유적지에서 옥으로 만든 홀(笏)에 새겨진 상형문자가 갑골문으로 해독 결과, '치우(蚩尤)'와 '소호(少昊)' 등 동이족(東夷族)의 이름으로 밝혀 졌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한민족참역사의 역사적 주장(인류 최초의 민족으로써 인류 역사 자체...)이 과학적이고 역사적 사실을 근본으으로한 실사임이 다시 확인되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고증 역사가 점차 발전하면서 이집트와 멕시코 문명 등은 한국(환인)의 동이문화가 모체임이 밝혀지고 있어 한민족의 위대성이 세삼스럽지 않다는 당연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 ! 특히, 만주 등지 우리 조상님들의 유적인 거대한 피라밋 고분들을 우리는 반드시 발굴해야만 한다는 의지를 우리는 꼭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원문; 한민족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