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내가 독일 유학 시절이었다. 독일에 온지 어느덧 1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올해는 어떻게 휴가를 보내야 하나하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득 장인,장모님이 생각이 났다. 나는 가난해서 어렵사리 공부했고,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어서 결
혼 후에도 생활은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장안,장모님이 결혼 초에는 많은 도움을 주셨다.
1980년대 중반 벨기에 소재 국제기구에서 근무할 때는 수당이 많아 생활이 넉넉했는데도 두 분을 모시지 못해 무척 아쉬워
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독일 있는 동안에 두 분을 여행을 한번 시켜드리기로 하고 아내한테 내 계획을 얘기하자 아내가
무척 기뻐하면서 그러자고 하였다. 1994년 6월 한국으로 전화를 했다. 장모님이 받으시길래
“어머니! 저희한테 오셔서 한 달 정도 묵으시면서 여행을 하시면 좋겠어요.”
“아니! 뭘 그렇게 신경을 쓰나. 그저 자네나 열심히 살게”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계속 주장을 하자 결국 독일로 오시기로 했다.
셋째 처남이 미국대학 교수로 있어서 장인·장모님이 미국엔 6개월 정도 계신 적이 있다. 이제는 유럽을 잘 구경시켜 드리는
것이 나에게 맡겨진 것이다. 노인이었기 때문에 편안히 모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 방법은 승용차로 하면 좋은데
내 차가 Volkswagen Passat 웨곤형이어서 꽤 큰 편이었지만 여섯 사람이 여행하기엔 좁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캠핑카
였다. 캠핑카는 8인용을 빌렸다. 그 안에는 냉장고, 화장실, 침대, 주방 시설이 잘 꾸며져 있었고, 6식구가 여행하기에 부족함
이 없었다.
유럽에는 캠핑카가 일반화 되어 있어서 캠핑카 전용 휴게소가 유럽 전역에 여러 군데 있고, 그 곳에는 넓은 공간에 어린이
놀이터, 전기코드, 화장실 비우기 등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7월 25일 드디어 캠핑카를 빌렸다. 여행은 독일의 浪漫街道(romantische Strasse)에 있는 퓌센의 백조의 성, 오스트리아 빈,
인스부르크, 스위스 융프라우, 제네바, 프랑스 리용, 파리 그리고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을 거쳐 독일로 돌아오는 20여 일의
일정을 마련했다. 노인들이었으므로 움직이는 거리를 최소화하도록 했다. 캠핑카의 장점은 어디든지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
면 차를 세워 놓고 쉴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20일을 계속 캠핑카에서 자는 건 피곤할 수도 있어서 사흘에 한 번 정도는 호텔
에서 머물기로 했다. 캠핑카는 처음에는 차가 커서 조금 불안했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차가 커서 시야가 확 터져 운전하기가
편리했고, 속도도 130킬로는 거뜬했다.
장인장모님은 낯선 유럽의 풍경이 마음에 퍽 드셨던 것 같다. 독일 낭만 가도는 27개 중세도시를 따라 340킬로 정도의 길로
관광길이 형성되어 있고 그 도시들은 중세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있는 문자 그대로 낭만이 넘쳤다. 요즘은 올레길, 산티아
고 길 등 많은 길이 알려졌지만, 그 때는 길이 지금처럼 일반화되어 있진 않았다. 독일의 낭만가도를 본 떠서 우리나라에도 동
해안에 240km의 낭만 가도가 만들어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퓌센의 백조의 성, 오스트리아 빈의 공원(Stadt Park), 빈숲(Wienerwald), 모차르트 고향 잘쯔부르크, 인스부르크, 스위스 융푸라우, 제네바를 구경하니 벌써 보름 정도가 지났다.
프랑스로 향했다. 리용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의 에펠탑, 몽마르트 언덕, 세느강 유람선 타기 등 유명 관광지는 어느 정
도 다 보고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갔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궁전이었다. 베르사이유 궁전 앞에 차를 주차시켰다. 엄청난 관광객
이 붐비고 있었다. 노인들에게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두 구경시켜 드릴 수는 없어서 주요한 곳만 관광시켜 드리고 차에 오니 캠
핑카의 차문이 훼손되어 있었다. 캠핑카의 문은 세게 힘을 주어 문을 열면 간단히 문이 열리게 되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
니 서랍장의 옷이 난장판으로 흩어져 있었다. 도둑이 들어와서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다행히 나와 아내는 주요 물품
은 휴대하고 다녔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장인장모님이었다.
내가 물었다.
“어머니 잃어버린 것 없으세요?”
“응! 아무 것도 없어. 염려 말게”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다기에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프랑스를 떠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암스테르담 관광을 마치고 8월 12일 독일의 빌레펠트 우리 집에 도착했다. 도착해서야 장모님이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관광할 때 캠핑카에 미화 3천 달러를 서랍 속에 넣어 둔 것을 잃어버렸다면서 내가 걱정할까 봐 얘기하지 못 했다는 것이었다.
그 돈은 나에게 줄려고 가져 오신 것인데 잃어버려서 줄 것이 없게 되었다며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여행 즐겁게 했으면 됐지요.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했지만 속은 무척 쓰렸다. 그 돈은 당시엔 꽤 큰 금액이었다.
물론 장인장모님은 귀국 후 돈을 부쳐 주시긴 했지만, 즐거운 여행 기분을 망치지 않으려고 사위한테 말 한마디 못하고 속으
로만 애를 끓이고 계셨던 것이다.
귀국 후 장인장모님이 사위 덕분에 유럽구경 잘 했다고 주위에 자랑하시는 걸 들었을 때 나는 마음 뿌듯함을 느꼈다. 우리
가족을 도와주신 은혜를 일부나마 갚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인어른은 내가 95년 8월 귀국한 후 2년 후에 저 세상으로 가셨다. 지금은 천국에 서 비록 그 때 유럽 여행할 때 돈을 잃어버
리긴 했지만, 그 여행은 즐거웠다고 말씀하시리라 나는 믿는다. 장모님은 지금도 그 여행을 언급하시면서 무척 즐거웠다고 하
신다. 지금도 여름이면 캠핑카를 타고 유럽을 종횡무진 여행하던 그 때가 아련히 떠오른다.
첫댓글 눈물나네요 편집장님 장모님 생각하며 눈물단지 하나 제 장모님 생각하며 또 하나
우리 편집장님의 글 솜씨가 워낙 뛰어나, 마치 백담이 유럽을 한 바퀴 돈 것 같습니다.
두어번 읽었는데 또 봐야겠습니다. ㅎㅎ ㅎㅎ 고맙소이다. 댕큐 쎄쎄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이러면 4개국어 하는 거 아닌가요 ..
회장님과 장 편집위원님이 부족한 제 글 읽어주시고 호평까지 해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