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 행복 / 이영복
내가 존경하고 따르던 인척 어른 한 분이 계셨다. 오래간만에 만나 하시던 말씀 중에, “요즘 내가 마음이 몹시 편해졌다네, 이것이 행복이 아닐까 할 정도로 마음에 평화가 오네” 하고 차분하게 말씀하시었다.
그때는 그 말씀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팔순을 훨씬 넘긴 연세에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명망도 있으셨다. 자식은 모두 제 직분에 충실했고, 손자 손녀도 바르게 성장하였다. 더구나 육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을 일으키고 아우 모두를 공무원, 교사로 훌륭하게 키워내시었다. 튀지 않고 평범하게, 그리고 흠결 없이 평생을 무탈하게 사신 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는 아니지만 내게도 일흔을 넘기면서 마음에 평온이 오는 것 같다. 전과 달리 여유가 생기고 조급한 생각이 덜해졌다. 생각이 담대해지고 기분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다. 자연히 짜증이 없어지고 웬만한 아픔은 긍정의 힘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이상한 자신감마저 생긴다. 이것이 진짜 행복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에 기쁨이 있으니 스스로 행복하다고 위안하고 싶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나름대로 노력한다. 마음이 허전하면 종교에 귀의(歸依)하기도 하고, 자연을 찾아 심신 치유에 나서기도 한다. 소중한 시간을 쪼개어 자원봉사도 하고 타인에 양보와 배려를 실천하며 복된 삶을 위한 노력도 한다. 스포츠나 기타 예술 활동에도 몰두하며 자기만족을 위한 투자에 아끼지 않는다. 어찌 보면 행복도 자신의 노력과 투자의 산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비하면 나는 거저 얻은 행복이다. 평생을 내 몸만 아끼고 희생을 두려워하며 편하게 살기를 갈망했다. 때로는 인색한 마음에 베풀기를 주저했다. 구세군 자선냄비를 그냥 지나치기도 했고, 손 벌리는 불우 이웃에 동전 한 잎 적선한 기억도 없다. 남의 위태한 상황에 선뜻 나서서 구원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평탄한 삶에 안주했기에, 열심히 노력했고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자랑할 수도 없다,
친절을 베풀면 자신이 행복해진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남에게 친절을 베풀지도 못한 나에게 이런 행복이 온다는 건 아무래도 길 잃은 행복이 잘못 찾아왔거나, 아니면 질이 많이 떨어지는 작은 행복일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반성할 여지는 남아있지만, 공연히 또 다른 행복을 찾아 헤매고 싶지는 않다.
아직 속물근성도 여전하다. 먹는 욕심 입는 욕심 그리고 예전 같지 않지만 무얼 이루고 싶은 욕망도 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별 게 아니다. 이런 행복감이라면 노년기에 이르면 누구에게나 오는 어떤 현상이 아닐까? 어느 먼 곳에 또 다른 차원 높은 행복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에겐 이라도 과분하고 소중하다. 소중한 만큼 놓치고 싶지도 않다.
돌아보면 아쉬웠던 삶이 더 많지만, 어제 사 온 양식이 자못 넉넉하고 내일 입고 나갈 옷이 제법 반반하다. 집에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잠자리가 있으니 걱정도 없다. 아직 아픈 어깨가 낫지 않았고 조금 불편한 무릎이 있어도 친구와 만날 약속 장소에 나갈 수 있으니 다행이다. 그리고 읽어야 할 책이 책상 위에 있으니 아직 할 일도 남아있다.
그렇다고 당장 아들을 불러 나처럼 살라 권하고 싶진 않다. 너만큼은 네 아내에게 명품 가방을 사줄 정도의 능력도 갖추고, 네 자식이 원하는 만큼 충분한 교육을 시킬 것이며 넉넉하게 재산도 모으라 하고 싶다.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르지만 내 임종을 지켜보지 못할 정도의 중요한 책무가 네게 있다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너를 용서하겠노라 말하겠다.
아직 스스로 불행하다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나처럼 뻔뻔한 행복도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