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진자앙은 배를 타고 대력공을 익히고
맹방평은 밧줄을 던져 진자앙을 구하다.
1
광주에서 배를 타고 하룻길을 내려가면 주강구(珠江口)로 나오게 되는데, 강변에서는 멀리 마을이 보이지만 이미 바다나 다름없이 넓어 망망무제의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섬들이 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다시 하룻길을 더 가면 대호도(大濠島)와 향항(香港)을 필두로 만산군도(万山群島)의 무수한 섬들이 수평선을 가리고 나서니 배는 섬과 섬 사이를 곡예하듯 헤쳐 나가야 한다.
이곳 바다에는 모래톱이 많아 오랜 경험을 가진 수로(水路) 안내인이 배마다 타고 앞길을 지시해 주지 않으면 오도가도 못 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미로 같은 길은 주강구를 마개처럼 막고 펼쳐져 있는 단간열도(杆列島)를 지나서야 끝이 나고, 그때부터 비로소 문자 그대로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대해양(大海洋)으로 나서게 되는 것이었다.
거기에서부터 항주까지는 다시 십육 일이나 걸렸다. 그리고 그 여정 동안 노인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하루에 서너 번씩 선실 맨 아래층의 우리로 가서 나귀를 보살피고 오는 것 외에는 어둡고 냄새나는 삼등선실 구석에 기대고 누워만 있었다.
밥도 진자앙이 가져다 줘야 먹을 뿐, 무슨 사색이라도 길게 하는지 노상 눈을 감고 지내는 것이다.
동행이 그러면 답답해서라도 먼저 말을 걸 만도 하련마는 진자앙은 그럴 생각도 않았다. 그만큼이나 말이 없던 소삼중과 지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무공수련을 했다.
그들이 탄 배는 돛이 두 개 달린 중형 화물선, 흔히 이장선(二檣船)이라 불리는 일백 섬(石)짜리 범선이었다.
먼 대양을 항해하는 배 중에는 오백 섬(石)을 실을 수 있는 초대형의 범선도 있다고 하지만,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다가 중간중간 포구마다 들러 여객을 내리고, 화물을 싣고 다음 포구를 향해 가는 연근해용의 배는 그 정도로 클 필요가 없었다. 자연 갑판도 그리 넓지 않고, 선실도 적었다.
게다가 그와 노인이 탄 삼등선실은 최하층의 여객들이 타는 곳이다.
침상도 없고, 방 구별도 없이 그저 배 밑바닥 넓은 방 하나에 사오십 명이나 되는 승객들이 남녀노소의 구별도 없이 한꺼번에 밀어 넣어 진 선실이었다.
바닥에 귀를 대면 그 아래로 지나가는 물고기의 지느러미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듯하고, 누가 토하기라도 하면 그 냄새가 빠져 나갈 창문도 없는 답답한 밀실이었다. 게다가 천장에 매달아 둔 등불 하나를 제외하고는 불빛도 없어서,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옆에 앉은 사람 얼굴도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 승객들은 낮에는 거의 갑판에 올라가 숨을 돌리고, 밤에만 내려와서 이리저리 비비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이런 공간에서 어떻게 무공수련을 하는가.
진자앙은 낮에는 어두운 실내에 앉아 지식법을 수련하고, 밤에는 갑판에 나가 대력공을 익혔다. 나머지 금강삼십육로의 수련과 연운십팔박도 연습하려 들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파도를 따라 위아래로 오르내리고 좌우로도 흔들리는 이중의 움직임을 갖는다. 파도가 잔잔한 날에도 인체의 중심 감각이 흔들려 멀미를 하는데, 하물며 거기에서 뛰고 구르는 수련을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연운십팔박은 둘째 치고 대력공도 하기 어려웠다. 대력공은 중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필수인데, 배 위에선 그것이 힘들었던 것이다. 그냥 서 있으라면 못 서 있을 것은 없었지만 땅을 움켜쥐듯이 하고 대지와 자신을 일치시키며, 주위의 어떠한 움직임에도 중심을 잃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자앙은 처음 사흘 동안은 눈을 감고 똑바로 서서 중심을 유지하는 연습만 했다.
눈을 감고 서 있는 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원래 아무 움직임이 없는 땅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때도 눈을 감고서 꼿꼿이 서 있기란 어려운 일이니,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배 위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해내었다. 사람의 능력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라 어떤 환경이든 참고 노력하면 적응할 수 있는 법이었다. 배의 움직임이 그의 신체에 하나의 운율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을 때, 진자앙은 더 이상 배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대력공을 수련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욕심이 생겼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대력공을 수련할 수 있다면 연운십팔박을 못 할 이유는 또 뭔가. 그가 예전부터 자신없어했던, 그리고 그 때문에 오히려 가장 열심히 했던 연운십팔박이었다.
그가 연운십팔박을 굳이 하려고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산에서와는 달리 사람들이 많은 인가에서는 금강삼십육로 중 동적인 수련들을 하기가 불편했다. 남들 있는 앞에서 철우경지를 하고 이어타정을 했다간 미쳤다고 손가락질받기 십상일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기회가 없어 하지 못했던 것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연운십팔박 속에 금강삼십육로의 수련들을 섞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이 진 노육에게 부탁해서 사 온 사백 근의 납으로 가능해졌다.
그는 그것으로 네 개의 고리를 만들었다. 팔목보호대처럼 넓고, 하나하나의 무게가 백 근이나 나가는 네 개의 고리였다. 그것을 팔다리에 끼우고 연운십팔박을 수련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그리고 그의 목적에 맞게도, 고리들은 그가 단지 그것들을 달고 걷기만 해도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같이 힘들게 만들었다. 이제 이 상태로 연운십팔박을 수련한다면, 그래서 그가 사백 근의 무게를 몸에 달고도 뛰고, 구르고, 달릴 수 있게 된다면? 그의 체력은 전보다 한결 상승된 상태가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는 창백한 달빛만이 비추이는 갑판에서 연운십팔박을 처음 시전했을 때에야 비로소, 대력공을 수련할 수 있을 정도로 중심을 잡은 것은 아무도움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서 중심을 잡는 것과 계속 움직이면서 중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음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허리를 굽혔다 펴면 어느새 그는 쓰러져 있었다. 다리를 들었다가는 옆으로 휘두르기도 전에 벌써 갑판을 굴러 저만치 난간에 부닥쳐 뒹굴고 있기가 일쑤였다. 그나마 그러한 난간이 없었다면, 그는 벌써 검푸른 바닷물 속에서 물을 이불삼아 잠들어야 했을 것이다.
온갖 고생을 하며 간신히 연운십팔박을 일 회 시전한 뒤에 그는 머리를 감싸고 앉아 고민에 빠져 들었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그와 부딪친 갑판이나 난간이 아파한다면 모를까, 그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난간이 부서질 위험만 없다면, 이리저리 부닥친다는 것은 그것으로 유타의 수련을 겸할 수 있으니 차라리 반가울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중심을 잡을 수 없는가가 문제였다. 무림인에게, 특히 그와 같이 맞는 것이 주특기요, 유일한 장기인 무인에게는, 중심을 잡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일이었다.
가령 한 대 얻어맞아 쓰러져서 두들겨 맞고 짓밟혀도 가죽이 두꺼워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결코 이긴 것이 아니다.
그렇게 누워 뒹굴면서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으니 너는 졌노라’고
말한다면 상대에게 비웃음을 사는 것은 물론, 지고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비루한 녀석으로 낙인이 찍혀 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심지어는 훗날 생길지도 모를 아들까지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중심을 유지하는 것은 그의 무공의 성패와도 관련이 되는 중차대한 일이었다.
진자앙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섰다.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어!’
그날 밤 그는 넘어지고 꼬꾸라지면서도 연운십팔박을 마흔여덟 번이나 수련했다. 아마 마지막에 난간이 부서져서 밖으로 굴러 떨어질 뻔하지 않았다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그는 뱃전에 매달려 있다가 간신히 갑판으로 끌어올려진 후 깊이 허리를 굽혀 감사의 뜻을 표했다. 동행한 노인이 어느새 나타나 그의 옷자락을 잡지 않았다면 그의 유해는 물고기 뱃속에서 찾아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를 뜯어 먹을 수 있을 만큼 이빨이 날카로운 물고기가 있을 경우에 말이다.
노인은 한 손으로 진자앙을 들어올려서 가볍게 갑판에 올려놓았는데, 그건 몹시 놀라운 일이었다. 몸무게만 해도 백이십 근은 너끈히 나가는 데다 납 덩어리까지 차고 있어 적어도 오백이십 근은 나갈 진자앙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도 노인은 힘든 표정 하나 보이지 않은 것이다.
“멍청한 놈!”
노인이 말했다. 비록 욕설이긴 했지만 배에 오른 후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건 셈이었다.
진자앙은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벅벅 긁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끄러워서 잘 수가 있어야지!”
노인은 핀잔을 주고는 돌아서 버렸다.
‘그렇게 시끄러웠나?’
진자앙은 면목이 없어 노인의 뒤를 따라 조용히 걸었다. 하긴 오백 근이나 나가는 무게가 갑판 위에서 뒹굴었으니 쿵쾅거리기도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소리가 배 밑바닥까지 전해지기는 어려울 것이고, 또 그렇게 시끄러웠다면 다른 사람은 왜 나오지 않았을까?
진자앙은 그제야 그가 수행하는 노인이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를 한 손으로 들어올린 것 하며, 천리독각추라는 영물에 가까운 나귀를 타고 다니는 것까지.
그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노인을 보다가 흠칫 놀랐다. 배의 흔들림에 따라 좌우로 약간 다리를 벌리고 걷는 진자앙과는 달리 노인은 뒷짐을 지고 일 자로 걷는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게다가 그 뒷등에서 풍기는 태산과 같은 무게감.
진자앙이 여태 목표로 삼고 노력한 그 기도(氣度)를 노인의 자세가 모범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셈이었다.
진자앙은 멍청히 노인의 발만 보면서 따라 걸었다.
‘어떻게 해야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이 그 후 사흘 동안 그가 다시 속으로 수천, 수만 번을 더 떠올린 의문이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어떻게 그렇게 걸을 수 있는가’라고 그냥 물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자앙은 물어 보는 대신 관찰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루 종일 노인만 보고 있다가, 노인이 나귀에게 갈 때나 소피를 보러 갈 때를 막론하고, 움이기만 하면 그 뒤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노인의 걸음걸이를 보고, 할 수만 있으면 그 비밀을 밝혀 보려는 행동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그런 진자앙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흘이 지난 어느 저녁, 문득 입을 열었다.
“응신양기(凝神養氣)의 공부는 좀 한 모양이군.”
응신양기.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항심(恒心)과 그 항심의 바탕이 되는 기공(氣功)을 말한다. 진자앙을 칭찬한 셈인데 진자앙은 그게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몰라 되물었다.
“예?”
“대신 둔하군!”
진자앙은 그제서야 자기에게 말한 것인 줄 알아듣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노인이 물었다.
“넌 왜 날 따라오게 된 것이냐?”
“당숙 어른께서 보내신 것인데……”
진자앙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네 당숙 어른이 누군데?”
“진 자, 탁 자 쓰시는 어른입니다.”
노인의 인상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네가 천기홍화곤의 멍청이 손자라는 말이냐?”
진자앙은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노인은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긴 침묵이 흐르고 난 뒤에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난 맹방평이다. 네 할아버지와는 안면이 있으니 아주 무관한 사이는 아니지.”
이번에는 진자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놀라움 때문이었다. 광주로 오면 먼발치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혹시 하는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동행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노인, 맹방평이 말했다.
“그 인연으로 네게 한 가지 요령은 가르쳐 주겠다만……, 난 멍청이는 싫어하니 듣고 바로 깨닫지 못하면 그뿐, 두 번은 묻지 마라! 날 졸졸 따라다니지도 말고.”
그는 한마디로 짧게 중심을 유지하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중심은 네 안에 있는 것이지, 외물(外物)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자앙이 일어나 인사를 하려 하는데, 맹방평이 돌아 누워 버렸다. 더 이상 말하기도 싫고, 절을 받기도 싫다는 표현이었다.
진자앙은 일어나 선실을 나갔다. 맹방평의 가르침을 수련에 적용해보려는 것이다.
2
중자릉이 말해 준 창랑보의 구결이 그랬던 것처럼, 맹방평의 구결도 지극히 간단해 보이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진자앙은 그것이 원론(原論)과 실제(實際) 사이의 간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생각만 했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원론적인 것, 즉 이치는 만물을 꿰뚫기 때문에 항상 옳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에 어떻게 적용되느냐는, 원론이 옳고 그르고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면, 원론을 아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진자앙은 주저앉아 그가 알고 있는 것과 새로 들은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일어나 미친 듯이 연운십팔박을 시전했다.
그리고 꼬꾸라졌다. 그가 생각한 것이 틀렸거나, 제대로 응용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그는 다시 앉아 생각에 잠겼다.
원래 그가 이해하고 있던 중심의 의미, 요령은, 얼마나 대지와 밀착하느냐, 라는 것이었다. 대력공을 수련할 때, 땅을 움켜쥐듯이 발가락을 모으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닌가?’
실제로 발가락을 모은다고 해서 땅을 움켜쥘 수는 없다. 그런 자세를 취하면 기가 발바닥을 통해서 땅으로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것이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 그 흐름을 느낀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그럼 뭔가……?’
진자앙은 머리를 싸매었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갔다. 배는 광동성을 지나 복건성에 속하는 해안을 옆으로 하고 흘러가고 있었다. 하문(廈門), 천주(泉州), 광화(光化)의 포구들을 지나, 어제는 복건성의 성도인 복주부(福州府) 포구에 들렀다 떠나왔다. 이제 곧 , 항주까지는 사흘이면 도착할 것이다.
진자앙은 그 동안 낮이면 어두컴컴한 선실 안에서 생각에 잠기고, 밤이면 갑판에 나와 뒹굴었다. 그러는 그를 보면서도 맹방평은 아무 말도 보태 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배가 폭풍을 만났다. 복건성과 절강성의 경계를 막 지날 즈음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배에까지 날아와 먹이를 찾던 갈매기들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때도 하늘은 그저 맑기만 했다.
그러나 선원들은 불안한 얼굴로 수군거렸고, 선장은 돛을 돌리고 노를 저어 조금이라도 더 해안에 가까이 붙으려고 애를 썼다.
날씨가 심상치 않음을 배에 탄 승객들이 느낀 때는 하늘 한구석에 조그맣게 일어난 검은 구름이 점차 커져 순식간에 온 하늘을 덮어 버리고 난 후였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우박같이 굵은 빗방울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선원들이 이리 뛰고, 저리 구르며 돛을 끌어 내렸다. 더 이상 해안으로 다가가다간 암초에 걸려 좌초되기 십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선장이 무거운 닻을 선수와 선미에서부터 각각 하나씩 바다로 내렸다. 배는 지금 선 자리에서 그대로 버틸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먼 바다로부터 일어난 파도가 뱃전을 부숴 버릴 듯이 달려들어 거세게 부딪고, 그래도 남은 힘으로 배를 타넘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배는 중풍 걸린 노인의 손처럼 걷잡을 수 없이 떨려야 했다.
여태 바다에 익숙하다고 자신했던 승객들도 창자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쏟아 내었다. 그 위로 사람들이 굴러다녔다.
옆이 위가 되고, 위가 아래로 되는 듯한 격심한 요동 속에서 제자리에 버티고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 한 명, 맹방평을 제외하고는.
진자앙은 선실 벽을 이루고 있는 널판지 사이의 홈에 손가락을 걸치고 떠밀려 다니지 않으려고 한껏 힘을 썼지만 몇 번이고 반대편 벽에 굴러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닥에 못 박힌 것처럼 벽을 기대고 앉아서 그저 눈을 감고 있는 맹방평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 바닥에, 혹은 선실 벽에 그를 잡아 주는 손이라도 있는 것처럼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렇게 힘을 쓰는 것 같지 않은데도 그의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진자앙은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쓰러져서 정신없이 반대편 벽까지 굴러갔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그는 그대로 선실의 벽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려는 것이었다.
폭풍우를 만나면서 그는 자신의 공부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맹방평은 버티는데 그는 그러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단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을 만났든 간에 그 자신이 중심을 잡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수련은, 다른 누구와의 경쟁이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만큼, 도달할 목표가 있는 한, 그리고 거기까지 갈 길이 있는 동안은 어떻게든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고난과 맞서 싸우는 데에서 찾아져야 했다.
갑판 위는 끔찍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낮이었는데 지금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비바람만이 요란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선원들은 하나같이 몸에 밧줄을 감고 어떻게든 저 비바람에 떠밀려 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거기 진자앙이 버티고 섰다. 양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무릎을 약간 구부린 채 대력공의 기본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발이 미끄러졌다. 단박에 그는 비틀거리며, 뛰다시피 밀려가서 돛대에 머리를 박았다.
아프지는 않고, 그저 귀만 조금 멍한데 맹방평이 한 얘기가 그 멍한 귀에 이명(耳鳴)처럼 울려 왔다.
─`중심은 네 안에 있는 것이지 외물(外物)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 어디에?’
진자앙은 기둥을 잡고 일어서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거대한 삼각형의 철탑 같은 파도가 밀려와 뱃전을 때리고 갑판 위를 물바다로 만들며 흘렀다.
진자앙은 그 파도에 휩쓸릴 듯 미끄러져서 갑판 위에 유일한 목조건물의 벽에 부딪혔다.
‘내 안 어디에 중심이 있나?’
문득 전에 중심을 안정시킨다는 뜻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사부도 아니고, 할아버지도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진자앙은 건물의 벽을 잡고 일어서면서 필사적으로 그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다시 파도가 배를 때렸다. 진자앙은 비틀거리며 기대고 있는 건물에 부딪혀 갔다. 그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
─`일반적인 무공을 펼칠 땐 중심이 안정돼야 한다고 해서 보통 기해혈을 중심으로 한 하단전에 기를 모으지. 그러나 경공술에 있어서는 중단전을 중심으로 기를 운용하는 것이 옳아.
창랑보를 가르쳐 주면서 중자릉이 한 말이었다.
‘그게 지금 무슨 소용이지?’
별 쓸데없는 기억이 다 나는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하단전에 기를 모았다. 의식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몸이 절로 반응을 한 것이다.
그가 정신통일을 하고, 온몸에서 기를 쥐어짜서 모은 다음 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수련을 해왔다면 지금 그렇게 쉽게 기가 모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동작을 취하면 기가 흐르는 대로 두는 수련을 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기를 모을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만 일으키면 기가 따라 일어나는, 오랫동안 내공을 익힌 내가고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그에게서 나타났다.
그리고 기적처럼 중심이 안정되었다.
분명 건물 벽에 가 부딪히려던 찰나였는데 한 치 차이를 두고 그의 몸이 오뚝이처럼 바로 섰다. 그리고 두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진자앙이 오히려 어리둥절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그리고 너무도 쉽게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는 한참이나 그대로 서 있었다. 쏟아지는 파도가 갑판 위를 휩쓸고 지나가도, 돛대가 수면에 닿겠다 싶을 정도로 배가 기울어져도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바보같이……!”
한참만에야 그는 입을 벌려 스스로를 꾸짖었다. 하나 그게 실수였다.
입을 벌리면 진기가 흐트러지는 것을 몰랐던 탓이었다. 그의 발은 그 순간 바닥에서 떨어졌고, 파도가 뱃전을 때렸다. 그는 그대로 허공에 떠서 바다로 떨어져 갔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진작에 단전에 진기를 모으면 중심이 안정된다는 것을 몰랐던가.
중심은 다른 것에 의하지 않고 오직 스스로에 의한다는 것을 왜 미처 깨닫지 못했던가.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에게 있어서 단순한 깨달음의 기쁨으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그는 서글픔, 혹은 분노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집에서 체계적으로 무공을 배웠다면 모른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간단한 진리를 그는 어렵게 배워야 했다. 그것에 대해 만감이 교차하는 것이었다.
그 자신 그러한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깊이를 모르는 검푸른 바다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헤엄을 칠 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광란하는 파도에 이미 몸을 담그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손발에 매달린 납덩이의 무게는 물속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진자앙은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해 갔다.
그때 눈앞에 무엇인가 빛나는 물체가 나타났다. 그것은 금빛의 뱀처럼 보이는 무엇이었다.
진자앙은 총망중에도 그 뱀을 쫓아 버리기 위해 손을 저었다. 물속에서 그의 속도는 정말 보잘것없었고, 금빛 뱀은 몹시 빨랐다.
뱀은 어느새 그의 팔목을 휘감았다.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진자앙은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물밖으로 건져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금빛 뱀은 그의 팔목에서 풀려 맹방평의 손에 둥글게 감겨지고 있었다.
그때에야 그 금빛 밧줄이 포교들이 범인을 묶을 때 쓰는 포승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맹방평이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르게 나타나서 밧줄을 던져 그를 끌어올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갑판에 떨어져서도 그저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감사의 표시조차 받지 못한 맹방평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것은 정말 제 할애비를 꼭 빼닮았군!”
3
배는 바다처럼 넓은 항주만(抗州灣)을 거쳐 어디까지가 바다였고 어디서부터가 강이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전당강(錢塘江)으로 진입했다.
바다처럼 무수한 섬들을 얹고 넘실거리고 있는 그 푸른 물결을 따라 항주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해도 뉘엿뉘엿 떨어져 가는 저녁나절이었다.
맹방평이 진자앙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것도 그때였다.
“난 널 데리고 다닐 여유가 없다. 부근에서 물어 보면 우리가 왔던 길을 거꾸로 되짚어 가는 배가 있을 테니, 타고 돌아가라!”
무어라 욕을 해도, 또 어떻게 비웃어도 그저 웃기만 하던 진자앙의 얼굴이 그 순간 창백하게 바랬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부둣가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제가 어리고 멍청해서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발 돌아가라는 말씀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맹방평은 한껏 인상을 썼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사실 넌 여기 잘못 온 것이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라.”
진자앙은 입을 벌렸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리는 맹방평의 말을 되새기는 데에 전 노력을 경주해야 했다.
“잘못 왔다고요? 잘못 왔단 말이죠?”
맹방평이 그에게 잘못 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 그가 잘못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길을 잘못 선택했을지도, 아니, 어쩌면 잘못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는 잘못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무가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체질의 아이, 그것이 그였다. 애시당초 무공을 포기하고 다른 길이나 알아 봤어야 옳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진자앙은 고개를 힘껏 저었다.
이젠 절대 아니었다. 잘한 선택이건, 잘못한 선택이건 그는 무공을 배웠고, 목표를 정했다. 이 길이 잘못된 길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가야 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맹방평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보처럼 히죽거리며 웃었다.
“거역하는 것 같아 죄송스럽지만 전 못 돌아갑니다. 때려 죽여도 절 돌려보내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맹방평이 답답한 듯, 화난 듯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그는 손을 젖고는 말을 멈춰 버렸다.
“관두자. 따라오려면 따라오고, 네 맘대로 해라! 죽든 살든 네 복이겠지.”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진자앙이 벌떡 일어나 그 뒤를 따라갔다. 이번에는 진짜로 웃고 있었다.
시험을 볼 수 있게 된 것만도 어딘가 말이다.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맹방평은 밤이 되어도, 아니 어두워질수록 더욱 번화한 항주의 거리를 걷다가 안면객잔(安眠客棧)이라는 이름이 붉은 간판에 쓰여진 곳 앞에 섰다. 나란히 서 있는 객잔들 중에서도 가장 허름해 보이는 곳이었다.
어쨌든 진자앙은 객잔에서 자게 되는 것이 생전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그저 좋았다.
“안면객잔이라……, 여기에서 잠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군요.”
맹방평이 그를 돌아보았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난 수다는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너처럼 멍청한 녀석하고는 더욱 그래.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절대로 입을 열지 말도록! 알았나?”
진자앙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싱글벙글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맹방평이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그리고 이름과 실제가 항상 부합하는 것은 아니야.”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곧 밝혀졌다. 붉은 주렴을 옆으로 밀치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입구 옆에 서 있던 점원이 크게 외쳤다.
“손님 드십니다!”
그는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었다.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장거(掌 :지배인)가 바로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장거는 앉아 있던 의자가 비좁을 정도로 비대한 사람이었는데, 그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신속하게 움직이더니 어느새 맹방평과 진자앙의 앞에 와서 섰다. 그리고는 실낱같은 눈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환대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제 기억이 맞다면 여기 노장 어른은 한번 오셨던 분이군요. 그러니까…… 한참 전에 말입니다. 혹시 아니시라면 세월이 제 기억력을 앗아 갔다는 점을 감안하셔서 널리 용서해 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일단, 저희 객잔이 일층에는 주점, 이층에는 다루를 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는 것이 만일을 위해 합당한 행동이겠지요. 뿐만 아니라 후원에는 손님들을 안락하게 모실 수 있는 방도 준비가 되어 있는데, 거기에 드시면 다섯 가지 과실, 다섯 가지 요리의 식사에, 따로 다과상이 나옵니다. 물론 각 사람이 각 상을 받지요. 그리고 젊은 계집애가 모시고서 노래도 부르고 술도 권하고……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의 숙박비까지 넣어 은 반 냥을 냅니다. 두 분이면…… 금방 계산이 되지요? 한 냥입니다.”
그는 비단 행동이 빠를 뿐 아니라 말도 빨랐다. 진자앙은 그의 둥근 볼에서부터 드러난 가슴팍에 이르기까지 겹겹이 접혀진 살들이 가공할 속도로 흔들리는 것을 구경하느라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사실은 그가 그런 것에 정신을 팔지 않고 귀기울여 들었어도 무슨 말인지 몰랐을 것이다. 장거가 하는 말은 강남 사투리라, 평생 광동어만 사용한 그에게는 외국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원은 넓다. 그런 만큼 종족도 많고, 언어도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세 가지 언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데 진자앙이 어려서부터 해온 광동어가 그 하나요, 지금 장거가 말하고 있는 남방 사투리가 그 둘이며 나머지는 하나는 가장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로, 북경관화(北京官話)였다.
광동어야 광동에서만 사용되는 것이니, 흔히 광동 명문가의 자손들은북경관화까지 같이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강북에서 주로 사용되지만 황명에 의해서 관부에서 정식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진자앙도 물론 그것을 배웠고, 유창하지는 않지만 듣고 말할 줄은 알았다.
그러나 지금 장거가 얘기하는 이 남방 사투리는 북경관화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달라서 진자앙으로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맹방평은 용케도 그의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예전에 내가 여기 왔었던 것은 맞지. 하지만 당신이 날 본 건 아닐 거야. 그땐 아마 엄마 젖을 먹고 있었을 테니까. 어쨌든 우선 내 나귀나 보살펴 주게! 제일 좋은 자리에, 제일 좋은 사료를 주게. 참고로 말한다면 저 녀석은 술을 좋아하지. 난 하루에 한번은 맑은 술에 깨끗한 콩을 삶아 주곤 한다네. 여기에서도 그런 대우를 받길 원하네. 알겠지?
장거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장황한 말로 나귀를 부탁한 맹방평은 막상 그 자신이 묵을 방에 대해서는 대충이었다. 원칙은 단 하나, 싸기만 하면 됐다.
그는 나귀를 마굿간에 보내도록 지시하고 돌아서는 장거를 향해 말했다.
“방금 말한 그 방은 너무 비싸군. 다른 방이 없다면 우린 나가야겠어. 내가 알기론 다른 방도 있을 텐데?”
장거의 두툼한 살은 표정을 숨기는 데에 유리한 점이 적지 않았다. 나귀를 최고급으로 모셨으니 사람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던 기대가 깨진 실망감을 두터운 살가죽으로 가린 채 그는 유창하게 말했다.
“제가 젖 먹을 적에 오셨었다고요? 그럼 적어도 사십 년 전에는 오셨었다는 말씀이신데, 정말 오랜만에 오셨군요. 다시 환영하는 바입니다.”
그는 거의 굽혀지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동그란 허리를 간신히 조금 구부려 절을 해 보이고는 다시 말했다.
“단골손님께는 단골손님께 합당한 가격으로 대접을 해드려야겠군요. 그래야 다시 사십 년 후에 또 찾아 주실 것 아닙니까. 그러니 저희 객잔의 중급 방을 저렴하게 빌려 드리죠. 방은 아까와 똑같지만 식사는 여기 주점에서 하셔야 하는데, 과실도 있고, 데운 술도 있지요. 당연히 시중하는 계집애는 없고 손님 스스로 술을 따라 마시고 놀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한 사람이 은 이 전이올시다.”
그렇게 한바탕 퍼부어 놓고 나서 장거는 허리춤에서 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았다.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진자앙이 숨이 찰 정도였으니 장거로서는 매우 무리한 운동을 한 셈이었다.
그래서 장거는 그런 무리한 운동을 다시 하고 싶지 않은지
‘이번에는……?’ 하는 기대 섞인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맹방평은 그런 노력을 보고도 냉정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싼 방은?”
장거의 혈색 좋던 안색이 이젠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서서 걸었다. 맹방평과 진자앙이 그 뒤를 따랐다.
주점 안에는 사람이 많았고, 하나같이 한껏 소리를 질러가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두 명의 점원이 쉴 사이도 없이 음식을 나르고 주문을 받았다.
그 복잡한 자리 사이를 장거는 요령 좋게 어디 부딪히지도 않고 걸어서 주방 옆에 뚫린 쪽문을 빠져 나갔다. 불도 켜 있지 않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조금 걷자 거기 몇 개의 문이 보였다.
장거는 그 중 하나의 문을 열었다.
“여깁니다.”
좁은 방안에는 옆으로 몸을 돌려 걸을 수 있는 공간말고는 전부 흙으로 쌓은 구들이었고, 그 구들 위에는 짚이 깔려 있었다. 그것과 벽 한쪽에 걸린 등잔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는데, 등잔의 기름도 떨어져 가는지 손바닥만 하게 뚫린 창문으로 스며 들어오는 달빛이 오히려 밝을 지경이었다.
장거가 심술궂게 웃었다.
“밥은 주방이 바쁘지 않을 때 직접 와서 떠 드시면 되고, 계산은 나중에 나가실 때 돈 되는 대로 주시면 됩니다.”
‘설마 이런 방에서 자랴’하는 표정인데 맹방평은 방을 둘러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내가 전에 여기 왔을 때도 이곳에서 묵었지.”
“그럼 편히 쉬시지요.”
장거는 튀어나온 입을 가리지도 않고 돌아가 버렸다.
4
맹방평은 구들에 올라가 대충 누웠다. 진자앙이 그 한쪽 구석에 가서 앉았다.
그런 상태로 한참이 지났다.
맹방평이 문득 물었다.
“내가 왜 이런 허름한 방을 잡았는지 이상한 거냐?”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먼저 물었을 때는 말을 해도 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입을 벌려 대답했다.
“예!”
계속 궁금해 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배를 타도 삼등선실, 방을 잡아도 돼지우리에 가까운 곳을 잡는다는 것은, 십대고수의 일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맹방평이 간단히 그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돈이 없어서다.”
“아……, 예!”
물론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나귀는 왜 그렇게 호강을 시킨단 말인가.
맹방평은 그의 의문에 답이라도 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나귀는 내 가족이야.”
자기는 대충 굴러도 가족은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진자앙은 다시 물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금문공께서 돈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맹방평이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이름에 금(金)이 들어 있다고 호주머니에도 들어 있는 건 아니지. 멍청이 같은 녀석! 넌 내가 어디에서 돈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 봉록은 한 달에 쌀 스무 섬(石), 은자로 열 냥밖에 안 된단 말이다. 그나마 오래 근무해서 오른 게 그거야. 처음에는 한 달에 쌀 반 섬(石) 받고서 일을 해야 했었지. 이번처럼 공무로 나오면 경비가 지급되지만 나중에 돌아가면 어디에 썼는지 일일이 보고해야 하는데, 술값 같은 건 계산에 올릴 수도 없단 말이다.”
말끝마다 진자앙에게 멍청이라고 하지만 강호에 떠도는 평으로는 그 자신만한 멍청이가 없었다.
무공으로 밥벌이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포두말고 다른 직업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숱한 사람이 포두를, 아니면 포교라도 하려 하고, 또 고수일수록 그런 일을 하는 것인가.
매월 나오는 봉록이 그가 챙길 수 있는 전부라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는 권력이 있고, 권력에는 황금이 따라다닌다.
그게 정답이었다. 봉록 같은 것은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이지만 뒤로 몰래 들어오는 그런 재물이 없다면, 뭐가 좋아서 포두 노릇을 한단 말인가.
그런데 맹방평은 그런 면에서는 벽창호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던지라, 백년 동안 포두 노릇을 하면서도 떡고물 한번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고도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해왔으니 멍청이라 아니할 수 없다’라는 것이 강호의 세평이었다.
‘내게 돈이 그나마 좀 있으니 이걸로……?’
진자앙은 품속에 든 돈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아들이라고 떠나기 직전에 아버지가 집어 준 여비였다.
그러나 지금 그 돈을 꺼내기에는 왠지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무엇보다 맹방평이 받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진자앙이 주머니를 놓고 손을 빼는데 다른 물건이 손에 닿았다. 사각형의 모서리를 가진 상자였다.
‘이걸 왜 주셔서……!’
진자앙은 가만히 눈썹을 찌푸렸다. 이 상자는 할아버지가 준 것이었다.
그리고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물건이기도 했다. 그가 화룡동에서 주운 벽력탄들을 거기 담아서 주신 것이다.
진자룡의 말로는, 직접 나가서 주인을 찾아 줄 시간이 없으니 진자앙더러 나간 김에 돌려주고 오라는 것이었다. 특별히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를 해두었으니 그렇게 위험하진 않을 거라고 했지만 영 불안한 물건이었다.
‘괜찮겠지.’
걱정한다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진자앙은 그냥 구들 위에 드러누웠다.
주점이 멀지 않은 탓인지 주객들이 떠드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창문 밖에서는 간혹 물 흐르는 소리도 들리고, 어쩐지 악취도 나는 것이, 아무래도 변소가 바로 옆인 것 같았다.
진자앙은 피식 웃었다.
안면객잔이란 이름과 어쩌면 이렇게 정반대일 수 있는가. 들어올 때 맹방평이 한 얘기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맹방평은 미리 알고 온 모양이었다. 어쩌면 이곳에 묵는 이유가 돈이 없어서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려는 건 아닐까?’
진자앙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취하려고 일부러 이런 곳에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필요한……? 어디에?’
진자앙은 그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맹방평이 왜 항주까지 왔는지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점을…… 자신을 시험하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 와야 했을까? 그를 시험하는 데 맹방평까지 동원되어야 하는 것일까?
진자앙은 할아버지가 맹방평과 안면이 있기는 하지만 친하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했다. 만난 적이 거의 없으니 친분을 쌓을 일도 없었을 테고, 마음속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관부의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는 것이 진자룡의 태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물었다.
“저기……, 아까 잘못 왔다고 하신 게 무슨 뜻입니까?”
대답이 없었다.
진자앙은 그 무응답이 대답하기 싫다는 것인지, 아니면 벌써 자고 있어서인지를 몰라 잠시 망설였다. 더 물어 봐야 할 것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때 맹방평이 일어나 앉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싫어서도, 자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기가 막혀서였을 뿐이었다.
“멍청한 녀석! 느려도 한참 느리구나! 넌 양만리라는 신참 포교와 바뀐 거야!”
맹방평이 짐작한 것을 대충 얘기했다. 그것은 거의 사실에 근접한 것이었고, 진자앙은 양만리로 짐작되는 인물을 직접 보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은 명확했다.
진자앙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맹방평이 피식 웃었다. 실소든 무엇이든 진자앙 앞에서 그가 웃는 것은 처음이라 진자앙도 마음이 풀려 같이 웃었다.
“이렇게 됐으니 하는 수 없죠. 그 양만리라는 분이 했어야 할 일을 제가 대신 해드리겠습니다.”
맹방평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그래? 그러겠다고? 후회하지 않을 테냐?”
“물론입니다. 제가 아니었으면 그분이 왔을 텐데, 저 때문에 못 온 것과 다름이 없으니 제가 그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맹방평은 고개를 흔들며 누웠다.
“글쎄 힘들 텐데……?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고.”
진자앙은 그가 사양하는 것이 오히려 미안해 열심히 졸랐다.
“아닙니다. 일을 마치실 때까지 옆에서 시중을 들게 해주십시오. 배에서도 두 번이나 절 구해 주셨고…… 위험한 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자신이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을 기억했다.
“아, 참! 중추절까지는 장안에 가야 하는데……!”
“걱정 마라! 나도 대충 그쪽으로 가니까 중추절까지는 거기 있게 될 게다. 중도에 죽지만 않으면……”
진자앙은 맹방평의 말에 깔린 묘한 조롱기는 눈치 채지 못하고, 그냥 장안까지 시간 맞춰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아했다.
“다행이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안심하고 눕던 진자앙은 그제야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저, 이런 걸 여쭤 봐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일로 나오신 겁니까? 그러니까 이제……!”
“무슨 일을 하게 되느냐는 것이지? 포교가 수배자 잡는 일 말고 무슨 일이 있겠느냐!”
너무나 당연한 질문을 했다고 진자앙도 후회하고 있는 차에 맹방평이 한마디 더 했다. 그것이 폭탄과도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
“무림사마를 잡으러 가는 거다.”
“예?”
진자앙은 자리에서 튀어오르듯이 일어났다. 낮은 천장이 머리에 부딪혀 먼지가 쏟아졌다. 그는 아마 품속에 있는 벽력탄이 한꺼번에 터졌어도 이 정도로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뭐라고요?”
맹방평은 갑자기 먼지를 뒤집어쓰게 되어 화난 표정으로 일어나다가, 얼떨떨해 하는 진자앙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다시 누워 버렸다.
그는 무림사마를 잡으러 강호로 나가는 중이었다. 그것이 이번에 그가 자청한 임무였고, 그의 포두 생활 일백 년을 청산하는 마지막 임무였다.
그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가장 잡고 싶었던, 그러나 손이 닿지 않았던 자들을 잡아, 법의 심판을 받게 함으로써 자신의 생을 정리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광주에 있던 삼 년, 그걸 위해 그 모든 시간을 바쳤다.”
무림사마가 어디 있는지 정보를 찾고, 그들의 범죄 행위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고, 그들을 고발해서 수배장이 나오게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그래서 삼 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던 것은 바로 관할권을 넘어 수배자를 잡아도 된다는 허가였다. 그것이 진탁의 힘으로 가능해졌던 것이다.
“이제 잡으면 되는 것이지!”
맹방평은 이번에는 전혀 조롱기가 담기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진자앙에게는 그것이 아까의 웃음보다 훨씬 보기 흉했다. 맹방평의 그 웃음에는 묘한 짓눌림, 얼마 간의 증오에 분노가 덧붙여진 비틀린 무언가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여기에도 그 중 하나가 있습니까?”
맹방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저었다.
“넷 중 둘의 거처는 확실하다. 그들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으니까…… 그러나 나머지 둘은 좀 어렵지. 여기는 그 중 하나가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곳이다.”
넷 중 둘이 있는 곳은 찾기 쉬웠다. 둘 다 혼자가 아니라 세력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급여화는 강북 최대의 흑도문파인 화륜맹의 수좌이니 그 속에 있을 것이고, 쾌여풍은 비록 돌아다니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오백이나 되는 수하들, 광풍사의 무리들을 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둘은 달랐다.
운리무는 구름 속에 숨은 것처럼 종적이 없는 데다가 지난 삼십여 년 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영리충도 마찬가지로 찾기 어려웠다. 색마의 속성상 잘생겼다는 소문만 파다하지, 그 용모를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 행적을 말할 사람도 없다. 은밀히 행동하는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의 역용술 때문이었다.
“그놈이 사실은 제일 찾기 어려운 놈이다.
맹방평이 말했다.
“내가 나온 걸 안다면, 그리고 내 목적을 안다면 숨어서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나오지 않을 놈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돕지 않으면 거의 찾을 가능성이 없지. 하지만 다른 자들을 잡기 전에 한번 들러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여기 그가 있단 말입니까? 영리충이……?”
맹방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 가는 곳이 있다. 최근 동태가 심상치 않은 곳이 있는데……, 나는 그 배후에 그가 있지 않나 의심하고 있다.”
“그게 어딥니까?”
“등천비룡문.”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름을 되뇌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인데……, 등천비룡문…… 아니, 등천비룡문이라고요?”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최근 아버지의 골머리를 앓게 했던 곳이 바로 그곳 아닌가.
“들어 본 이름이냐?”
맹방평의 눈이 번뜩였다. 진자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와도 아주 관련이 없진 않군요.”
그 이름이 진자앙으로 하여금 마음을 결정하게 했다.
처음 맹방평의 얘기를 들었을 때는 황당한 일에 말려들었다는 느낌뿐이었다. 물론 무림고수라고 해서 국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지, 무림십대고수, 그것도 하나같이 백 살이 넘은 사람들이라면 이젠 거의 신선에 가깝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하다못해 세속에서 벗어난 느낌이라도 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여태 그가 만나 본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별로 그렇지 않았다. 아니, 사실 할아버지인 진자룡도 탈속한 느낌보다는 그저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올 뿐이니, 그의 시각에는 그리 위대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물며 그 외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 본 뇌공 원굉도에 이제 금문공 맹방평까지 포함해서 무림삼공은 다 만나 본 셈이고,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영리충도 보았었다. 십대고수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지만 거의 그들과 동렬에 속한다는 궁서생 중자릉도 보았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이상한 것일까.
어떤 점에서는, 특히 그들이 잘하는 방면으로는 분명 특별하지만 그외의 방면으로는 보통 사람 이하라고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통 사람보다 정정해서 그런지도……!’
진자앙은 구들 위 짚자리에 누워 그런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면 무림십대고수는 둘째 치고 한 방면에서 이렇다 할 성취를 이룬다는 것이 쉬운 일이던가. 보통의 능력, 보통의 노력에 보통의 집념으로는 그런 성취를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한 방면의 끝을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조금씩 이상하다고 한들 무슨 흉이 될 것인가.
그의 사부 소삼중만 해도 <삼선유서>를 얻은 지 삼십 년, 처음 결심한 때부터 치면 근 사십 년을 한 방면으로 정진하고도 결국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의 사부 소삼중이야말로 평범한 사람, 운이 안 되는 사람은 노력해도 안 된다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사부님……!’
사부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아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임종도`─`분명 돌아가셨을 것인데`─`지켜보지 못하고 무덤도 마련해 드리지 못한 못난 제자의 슬픔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일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키는 대로 산을 내려오고, 시킨 대로 다시 그곳에 가지 않는 것은, 그것이 사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흩뿌리고 통곡을 해서 달래기에는 사부의 한이 너무 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장안으로 가는 것이다.
집을 떠날 때는 진가장의 위명을 드높이겠노라고 했지만, 사실 그가 생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진가장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로 이미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금강당은 그렇지 않다.
그는 금강당 오 대 당주(五代堂主)의 신분으로 비무대회에 참가해서 금강당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야 했다. 우승 같은 것은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오 대를 내려온 금강당의 오기와 집념을 천하에 확인시켜 주는 것뿐이었다. 그것을 위해 장안에 가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 속에 밤은 깊어 가고, 이름과 달리 시끄러운 안면객잔의 소음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