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太陽天府
혈랑, 그는 울고 있었다.
그의 품속,
지금 그곳에는 천후가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안겨 있었다.
핏물로 붉게 물들은 백의는 처참하기만 했다.
심한 내상을 입은 듯 그의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 없었다.
힘겹게 떠올린 그의 두 눈,
그곳으로는 혈랑의 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순 천후는 흐릿하게 웃으며 물었다.
"혈랑! 왜 울고 있지?"
혈랑은 재빨리 고개를 돌린다.
"내가 왜 바보 같은 주군을 모셨는가 하고 한심해서 울고 있소!"
"후후후! 알고보니 그대는 겉으로만 차갑지, 사실은 울보로군…으윽!"
천후는 괴로운 듯 말할 때마다 시뻘건 선혈을 쏟아낸다.
그러자, 혈랑의 붉게 충혈된 눈은 더욱더 붉어진다.
"내가 울보라도 좋소. 대신 말이나 하지 마시오."
"후후! 그대는 역시 마음이 약하다."
"그렇소. 나는 마음이 약하니 제발 말하지 말라고 하지 않소?"
"후후후!"
혈랑의 말을 들으며 천후는 또다시 흐릿하게 웃었다.
지금 혈랑은 천후를 안은 채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봉우리쪽을 향해…
그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혈랑! 그리로 가면 그대는 죽는다."
그러나 혈랑은 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사방을 살피다 입을 열었다.
"또 말하시오? 죽음 같은 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 전이오."
"이런 바보, 나는 처음부터 그대를 죽이기로 작정했었다."
"글쎄, 작정했건 안했건 더 이상 피를 토하면 안되니 그냥 입 다물고 계시오."
천후는 툴툴 웃었다.
"이런…못된 자가 있나? 주군에게 입 다물라니…우욱!"
말을 하다말고 천후는 또다시 각혈했다.
혈랑은 급히 그의 가슴을 쓸어주며 냉막하게 말했다.
"한 번만 더 말한다면 그냥 팽개쳐 버리겠소."
"후후후… 우욱!"
"웃지도 마시오."
"후후후! 그래도 그대의 그 괴상한 웃음보다는 낫다."
천후는 혈랑의 주의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떠들어댔다.
그때 혈랑은 바짝 긴장한 채 음성을 낮추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주군! 이제는 정말 입을 다무시오. 적이오."
천후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혈랑을 주시했다.
"예상했던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를 놓고 가라."
순간, 혈랑은 정색을 지은 채 두 눈을 크게 뜬다.
"주군이라서 봐주오. 그 말은 그냥 못들은 것으로 하겠소.
하나, 한 번만 나를 시험하는 말을 한다면…?"
"한다면…?"
일순, 혈랑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주군을 죽이고 나도 죽겠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는 천후,
단지 그의 두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고 있었다.
'용서해라. 혈랑!
나는 처음부터 그대들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는지도 모른다.'
가볍게 내리까는 그의 두 눈은 파르르 떨렸다.
길다란 속눈썹 밑으로 투명한 물기 같은 것이 반짝였다.
그때, 그들 두 사람은 긴 곡의 제일 깊은 곳까지 다다라 있었다.
주위를 잠시 둘러보던 혈랑, 그는 돌연 커다랗게 소리쳤다.
"지옥마영대는 들으라!"
다음 순간, 주위사방에서 기다렸다는 듯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예!"
그러나 그들의 형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대들은 들었는가? 주군은 처음부터 우리들을 죽이기로 작심하셨다."
"영광입니다!"
주위사방으로부터 서슴없이 흘러나오는 이 대답,
그것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누구의 지시에 대한 것도 아닌,
스스로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대답임을 잘 알 수 있었다.
혈랑은 괴이하게 웃었다.
"크크크! 주군, 들으셨소? 이것이 바로 지옥사망궁이오."
"그들 전부가 그대를 닮아 멍청해서 그렇다."
"크크크!"
천후의 말에 이번에는 혈랑이 그 괴상한 웃음을 계속 흘려냈다.
"웃지 마랏!"
천후는 냅다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그의 두 눈에서 반짝 흘러내리는 눈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혈랑은 다시금 주위사방을 향해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지옥마영대는 들으라.
본 궁은 천 년만에 처음으로 주군을 모셨다.
그러나 그런 주군은 지극히 바보요, 멍청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의 물음이 떨어지자 마자, 지옥마영대의 형체없는 대답이 다시 들려왔다.
"죽음으로써 적을 막겠습니다."
그들의 우렁찬 대답이 울려퍼진 순간, 혈랑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됐다.
"제군들, 여기서 이별이다.
그동안 십 년이 넘도록 함께 동거동락했음을 죽어서도 기쁨으로 알겠다."
그의 명이 떨어지는 순간
, 주위사방에서 오십여 명의 인물들이 솟아나왔다.
한데, 실로 기이하기 그지 없었다.
땅속, 나무 위, 바위 속 등
주위사물 속으로부터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몸을 은신할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가…
나타난 오십여 명의 인물들, 그들은 바로 지옥마영대였다.
그때, 지옥마영대는 일제히 천후를 향해 부복의 자세를 취했다.
"주군, 먼저 가는 저희에게 용서를……."
그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천후는 냅다 그들에게 고함쳤다.
"꺼져 버려! 이 바보들아! 어서 내눈 앞에서 꺼져 버려!"
그러나 그의 말끝은 목이 꽉 메여 흘러나온 것이었다.
지옥마영대는 깊숙이 몸을 숙이며 마지막 인사를 한다.
"주군, 부디 안전하시길…"
그에 이어 그들은 혈랑에게도 예를 취했다.
"대장! 그럼 구천에서…"
다음 찰나 그들 오십여 명의 지옥마영대,
그들의 모습은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한줄기 바람이 잠겨들 듯이…
파파파 팡!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빈공터,
혈랑은 그곳을 망연히 주시하며 예의 괴소를 흘려낸다.
"크크크!"
분명 그것은 울음소리였다
. 그러나 울음소리보다도 더욱 처절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때 천후가 다시 큰소리를 지른다.
"이 피묻은 개 같은 자야! 그만 웃지 못하겠느냐?"
커다란 그의 목청은 꽉 잠겨 듣기가 거북스러울 정도였다.
바로 그때였다.
돌연 수림 속으로부터 한 소리 비명성이 들려왔다.
"크…아… 악!"
그 순간 흠칫 놀라는 혈랑,
그는 급히 천후를 끌어 안은 채 허공 높이로 몸을 날렸다.
조그만 협로, 그곳은 바로 조금 전 천후와 혈랑이 지나왔던 곳이다.
돌연, 그곳에 백여 명의 핏빛 인영이 나타났다.
선두에 선 인물, 그는 바로 금령매공자였다.
한동안 주위 사방을 유심히 살펴보던 금령매공자,
그의 입에서 나직한 뇌까림이 흘러나왔다.
"이곳이다."
이어, 그는 핏빛 인영들을 향해 명을 내린다.
"사중고루혈마단은 들으라.
상대는 지옥사망궁의 지옥마영대다. 모두 조심하도록…각자 흩어져랏!"
명이 떨어진 찰나, 백여 명의 핏빛 인영들은 바람처럼 흩어져 갔다.
스스스스 슥!
그렇다. 그들은 바로 사중고루혈마단이었다.
유령 같은 신법을 전개해 서서히 앞으로 전진해 가는 그들.
그 광경은 마치 홍무(紅霧)가 이동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때였다.
길 한옆에 우뚝 서 있는 하나의 바위,
그곳으로부터 한 명의 인영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왔다.
찰나, 사중고루혈마단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크… 아…악!"
한데 바위 속으로부터 튀어나온 암습자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없지 않은가?
실로 절묘한 솜씨였다.
이를 필두로 하여, 사방에서 뾰족한 비명성이 터져나왔다.
"크…악!"
"크…아…악!"
"커…억!"
그것은 모두 사중고루혈마단의 인물들이 죽어가며 내지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 한 사람 암습자의 정체는 커녕 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그때 금령매공자는 경악한 채 급히 외쳤다.
"상대는 은신술의 대가들이다. 바위, 나무, 풀 속 등을 조심하라!"
금령매공자, 그는 실로 대단한 안목을 지닌 자였다.
찰나지간에 지옥마영대의 허실을 발견해 냈으니…
사중고루혈마단, 그들 역시 금령매공자 못지 않게 무서운 실력들을 지니고 있었다.
지옥마영대의 허실이 파악되자 그들은 무섭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크… 아…악!"
"커…억!"
"으…"
"으…악!"
이번에 터져나오는 비명은 지옥마영대의 그것이었다.
그렇게 사중고루혈마단의 무서운 공격이 얼마나 계속 되었을까?
한순간, 숨어있던 지옥마영대들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파파파 팟!
사중고루혈마단의 공격을 그대로 받고 있을 수 만은 없지 않은가?
그때, 금령매공자가 크게 소리쳤다.
"적이 나왔다. 추살하랏!"
"옛…!"
사기도 드높게 일제히 우렁차게 대답하는 사중고루혈마단,
과연 그들의 공격은 가공하게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핏빛 뿌연 인영들
, 그들이 번뜩일 때마다 절세의 고수 지옥마영대는 죽어가고 있었다.
피[血], 처참하게 도륙된 시신들.
삽시지간 그곳 계곡은 피바다로 돌변해갔다.
지옥마영대, 그들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미 그들은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인가?
자신의 한몸을 던져가며 그들은 상대와 맞서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죽이고 죽어가는 지옥마영대와 사중고루혈마단,
그러나 지옥마영대는 숫적으로 훨씬 불리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지옥마영대는 불과 몇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덤벼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금령매공자, 그의 입에서는 여린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천후, 그대는 실로 좋은 부하들을 두었군."
나직하게 뇌까리는 금령매공자
, 적의 수하를 칭찬해주는 그의 찬사는
왠지 모르게 말끝에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혈랑, 그는 천후를 깊이 안은 채 계속해서 수림 속으로 신형을 날려갔다.
그는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문득, 그의 품에 안긴 천후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냐?"
"열극천담(熱極天潭)!"
혈랑은 간단하게 대답한 후 계속 몸을 날린다.
"열극천담은 왜…?"
"그곳에 태양천부가 있소!"
혈랑의 대답에 천후는 일시 흐릿하게 미소지었다.
"이봐! 나는 이미 내장이 으스러지고 갈빗대가 완전히 부러졌다.
한마디로 나는 가망이 없다!"
그러나 혈랑은 천후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잘라 말한다.
"열극천담에 가면 주군은 살 수 있소."
"그대가 그것을 장담하는가?"
"예감이오."
그들이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한곳에 도착해 있었다.
한데, 그곳은 바로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 앞이 아닌가?
바로 그때였다. 수많은 인영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파파파 팟!
아…사중고루혈마단,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는 금령매공자의 모습도 보였다.
혈랑은 그만 흠칫 놀라고 만다.
"아니? 버…벌써 이들이…?"
일순, 그의 만면에는 절망의 빛이 어린다.
그때, 금령매공자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결국 이곳까지 왔군. 그러나 이제는 안된다."
그의 음성은 지극히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한 음성에는 무서울 정도로 가슴을 짓누르는
그 무엇이 실려 있었다.
그 순간, 혈랑의 두 눈끝은 파르르 떨리고 만다.
이어, 그는 급히 천후를 절벽 끝에다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사중고루혈마단 앞을 막아섰다.
어느 사이 그는 검을 뽑아 비껴들고 있었다.
"누구든지 주군을 해하려는 자는 내 시체를 넘어가야만 한다!"
그의 태도는 당당하고도 의연하기 그지 없었다.
감히 그 누구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이…
그때, 사중고루혈마단은 서서히 그의 앞으로 다가들었다.
거의 오십여 명이나 될까?
일순 장내에는 숨막히는 살기가 고조되었다.
한편, 부상한 몸으로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앉아있는 천후,
그는 금령매공자를 주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그대를 두 번째 만나는군."
"그런 셈이오."
금령매공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천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린다.
"그대가 적이라니? 슬픈 사실이 아닐 수 없소."
천후의 밑도 끝도 없는 말이 끝나자
금령매공자의 두 눈빛이 한차례 거세게 흔들린다.
천후가 계속 말했다.
"한가지 부탁이 있소."
"말하시오."
"저자를 살려주시오."
그는 혈랑을 가리켜 보였다.
천후, 그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적에게, 그것도 자신이 아닌 수하의 목숨을…
그때, 혈랑이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안돼오!"
"주군, 이 혈랑을 욕되게 하지 마시오. 어서 절벽 밑으로 가시오.
그곳에 밧줄이 있소. 어서 그것을 타고 내려 가시오."
"혈랑!"
천후는 뚫어질 듯이 혈랑을 응시했다.
"주군, 지옥마영대는 아직 죽지 않았소.
그러나 주군이 죽으면 우리는 모두 죽은 것이오."
말을 마친 혈랑,
그는 다음 순간 무섭게 사중고루혈마단을 향해 짓쳐들었다
. 검을 비껴든 채로…
"나는 지옥마영대의 대장인 혈랑이다!
다시 말하건대, 나의 시체를 찢고 넘어가기 전에는 주군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추상 같은 호통을 발하는 혈랑, 그의 태도는 완고하기 그지 없었다.
아니, 의연하기만 했다.
우뚝 버티고 선 혈랑,
그에게서는 태산과도 같은 중압감이 흘러나왔다.
천후는 그를 향해 커다랗게 소리쳤다.
"이 바보야! 어차피 나는 죽는다! 너라도 살아남아야 나의 복수를 할 것 아니냐?"
그러나 혈랑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냉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죽을테니 주군이 나의 복수를 해주시오."
이어, 그는 다시금 검을 고쳐 잡았다.
"어서 내려가시오! 주군, 주군 앞에서 나의 마지막을 보이기 싫소!"
천후의 두 눈이 다시금 파르르 떨렸다.
혈랑, 그의 처절한 외침 속에 담긴 그 깊은 뜻, 그것을 천후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이때, 사중고루혈마단은 서서히 혈랑에게로 다가들었다.
섬뜩한 핏빛 살기를 피워올리며...
그러나 그들은 금령매공자의 명을 기다리는 듯 함부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때, 한동안 깊은 생각에 사로잡힌 듯 묵묵히 서 있던 금령매공자,
이윽고 그의 입술이 벌어졌다.
결국 결심을 굳힌 듯…
"쳐랏…"
명령이 떨어진 순간, 사중고루혈마단은 가공할 기세로 혈랑에게 덮쳐들었다.
"와아…"
"주군! 먼저 가오. 부디…"
당당하게 선 채 그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혈랑,
찰나 혈랑의 전신은 핏빛기류 속에 파묻히고 만다.
파파파파 팟!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소용돌이에 파묻히는 혈랑의 모습은 의연하기만 하다.
파파파파 팟!
무서운 검기가 사방으로 폭출되었다.
"크…악!"
"크…윽!"
"아… 아 악!"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가는 사중고루혈마단,
순식간에 그들은 십여 명이 죽고 말았다.
그러나 그 많은 인물들을 혈랑 혼자 상대한다는 것은 실로 무리였다.
그로부터 잠시 후, 처절무비한 한소리 비명성이 그곳 절곡 내를 찢어울렸다.
"아… 아…악!"
혈랑, 바로 그의 음성이었다.
죽었다. 그는 그렇게 죽은 것이다. 사방에서 검을 맞아 전신이 도륙된 채로…
그 순간, 천후는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오오! 혈랑…"
그러나 이미 대답은 들을 수가 없지 않은가?
천후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때, 사중고루혈마단은 우르르 천후에게로 몰려들었다.
검을 비껴든 채로…
절대절명의 순간, 금령매공자가 급히 외쳤다.
"잠깐 물러서랏…"
그러자, 다가들던 사중고루혈마단은 멈칫한 채 그 자리에 멈췄다.
금령매공자는 서서히 천후 앞으로 다가갔다.
"무사로서 자결할 수 있게 해주겠소."
천후는 흐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방법은…"
금령매공자는 시선을 들며 절벽을 주시했다.
"절벽 밑으로."
"고맙소."
그때 사중고루혈마단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일공자! 천존은 저자의 수급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시끄럽다."
금령매공자는 차갑게 그의 제안을 묵살해 버린다.
그리고는 천후를 향해 알 수 없는 시선을 던졌다.
천후도 잠시동안 뜻깊은 시선으로 금령매공자를 응시했다.
"그럼…"
그는 짧게 말을 마친 후 망설이지 않고 절벽 밑으로 몸을 날렸다.
휙
한줄기 바람이 절벽 밑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끝이었다. 비명도 없었다.
그의 괴이한 웃음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절벽 위에 우뚝선 금령매공자,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그렇게 선 채 절벽 밑을 주시했다.
한순간 그는 두 눈을 들어 저 멀리 하늘을 응시한다.
그의 두 눈, 그곳에는 짙은 우울감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웬일인가? 적을 죽여버린 이 기쁜 순간에…?
이어, 그는 몸을 돌리며 처참하게 죽어 있는 혈랑의 시신을 응시했다.
"그는 의인이다. 잘 묻어주도록…"
나직하게 명을 내리는 금령매공자, 그의 목소리에는 전혀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야윈 어깨, 오늘따라 그의 어깨는 더욱 밑으로 처진 듯했다.
오늘은 참으로 우울한 날이었다.
* * *
열극천담.
그것은 바로 화산(火山)의 지맥에서 생기는 일종의 열담(熱潭)이었다.
천지만물의 화(火)의 기운이 응집된 절세신담, 그 물은 언제나 끓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가을날의 호수처럼 잔잔하기만 했다.
그러나 일단 그 어떤 것이라도 열극천담에 닿으면 그대로 녹아버리고 만다.
그야말로 무서운 성질을 지닌 절세신담이었다.
천후, 절벽 밑으로 뛰어내린 그는 급속도로 아래로 하강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전신 피부가 모두 갈라지는 듯한 세찬 마찰을 느껴야만 했다.
또한 내상은 더욱 심하게 도져 검붉은 피를 마구 토해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의식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러던 한순간, 그는 무엇인가에 깊숙이 빠지고 말았다.
첨 벙!
그 순간, 그는 몸이 완전히 부서지는 충격과 전신을 태우는 뜨거운 열기로 인해
미친 듯 비명을 내질렀다.
"아…악!"
그리고 끝이었다.
한가닥 남아있던 의식마저 그는 완전히 잃은 것이다.
하나의 연못, 반경 약 오 장 가량 될까?
그곳의 주위는 완전히 황폐해 있었다.
모든 것이 새까맣게 타버려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심지어는 단단한 암석까지도 한 줌의 재로 화해 있었다.
그곳 연못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하나의 암굴,
그곳에서는 스무 쌍의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오오…그것은 정녕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시퍼런 독과 한(恨)이 맺힌 그들의 눈, 대체 그 눈의 주인공들은 누구란 말인가?
사람인가? 아니면…?
그때, 그들로부터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봤나?"
"봤다! 분명히 사람이었어."
"크크크! 반갑군. 백 년만에 처음 대하는 사람이다!"
누군가 음침한 괴소를 흘려낸다.
"흐흐흐! 그렇지,
십 년 전 마곡의 마지막 인물이 참지못해
열극천담에 스스로 빠져 죽은 이후 처음이다."
"아! 그때 상황은 참 보기가 좋았지!
그놈이 미친 듯이 열극천담으로 들어가자마자 머리부터 녹아들었지."
그러자 누군가가 그의 말에 부정을 나타냈다.
"아니야! 그놈은 발부터 녹았어."
"무슨 소리…? 빠지자마자 통째로 녹았다니까!"
"이런! 모르면 가만히 있어.
그놈은 가기도 전에 벌써 열기에 의해 온몸이 새까맣게 타버렸어!"
그들은 서로서로 자신들의 말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때, 지극히 냉막한 음성이 그들의 말을 막아 버렸다.
"시끄럽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문 채 잠잠해졌다.
그들은 그렇게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저놈도 물론 죽었겠지?"
"말이라고 하나? 더구나 저놈은 천길벼랑에서 떨어졌는데."
"에이! 괜히 저놈은 떨어져서 남의 속만 뒤집어 놓는군."
"글쎄 말이야…!"
호기심이 가득어린 스무 쌍의 눈동자,
그들은 기묘한 광채를 발하며 연못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천후는 슬며시 두 눈을 떴다.
비로소 그는 정신을 차린 것이다.
문득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유달리 가볍게 일으켜지는 그의 몸, 천후는 그만 흠칫 놀라고 만다.
'아니? 여… 여긴? 물속이 아닌가?'
오오…그렇다. 지금 천후가 서 있는 곳, 그곳은 바로 맑디맑은 물속이었다.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이 어찌 물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있을 수 있는가?
더구나, 물속의 가장 밑바닥에 누워 있을 수가?
사람은 원래 물속에 빠지면 뜨게 되어 있다.
죽지 않은 이상은 반드시 물의 부력에 의해 뜨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후는 지금 엄연히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바닥에 서 있었다.
또한 호흡에도 별로 지장이 없었다.
'기이한 물이다…!'
천후는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뇌리로 흐릿하게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렇다. 떨어질 때 충격과 함께 뜨거운 열기를 느꼈었는 데…
한순간, 그의 두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호…혹시…이…이곳이…? 바로 열극천담이 아닐까?'
오오…열극천담, 그렇다! 그는 지금 열극천담에 떨어진 것이다.
그곳이 바로 열극천담이라는 것은 괴인들이 나눈 대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천후가 뜨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가 바로 천지교태지신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천후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주위사방을 살펴보았다.
물속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시각 장애도 느끼지 않았다.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던 천후, 한순간 그는 내심 탄성을 발했다.
'오오… 맞다. 이곳이 바로 열극천담이다!'
천후의 두 눈, 그것은 지금 한곳에 못박혀 있었다.
물속의 한쪽 벽, 그곳에는 입구 비슷한 것이 있었다.
한데 그 위에는 글이 쓰여 있는 것이 아닌가?
태양천부(太陽天府).
오오… 태양천부!
천외천의 전설이 숨쉬는 태양천부, 바로 그곳인 것이다.
드디어 천후는 이렇게 태양천부까지 온 것이다.
그때, 천후는 서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구의 문고리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드 르 릉!
순간, 그 문은 기괘한 음향을 발하며 너무도 쉽게 열렸다.
더구나, 물속에서 문이 열림에도 불구하고
물은 단 한 방울도 그곳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천후는 안으로 들어섰다.
태양천부, 바로 그곳으로…
석실 안, 뜻밖에도 그곳은 하나의 석실밖에 없었다.
석실은 사방 십 장 반경가량이나 될까?
그 이외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단지, 석실의 중앙에 석대 하나가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검이 하나 놓여 있었다.
또한 그 옆으로는 붉은 옥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천후는 급히 석대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먼저 검을 집어들었다. 붉은색이 감도는 넉 자 길이의 장검이었다.
'이… 이것은 바로 태양검…?'
천후는 크게 놀라고 만다.
그렇다. 검집에는 선명하게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양검(太陽劍).
천후는 격동되는 마음을 짓누르며 조심스레 검을 뽑아들었다.
챙
검은 맑은 음향을 발하며 뽑혀져 나왔다.
섬뜩한 빛을 발하는 검신, 그것은 피처럼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또한 그 검으로부터는 은은한 열기가 발해진다.
'오오…태양검이다! 전설의 태양검이다.'
천후의 놀라움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옥갑을 열어보았다.
옥갑 안, 그곳에는 하나의 서신과 한 권의 책자가 들어 있었다.
천후는 먼저 서신부터 펼쳐 보았다.
태양의 후예여! 노부는 제천우사라는 사람이다.
오…제천우사라면…?
바로 삼천지전설의 주인공이 아닌가?
바로 삼마와 싸운 인물로서 그는 신(神)이지, 결코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
천후는 내심 격동을 억누르고 다시 서신을 읽어내려 갔다.
후인이여! 노부는 결코 인간이 아니다
. 원래 옥황상제를 모시는 우장군(右將軍) 천강성(天 星)이노라.
그러나 지옥백팔악귀(地獄百八惡鬼) 등
세 악귀가 무저갱을 탈출하여 인세에 내려와 인간의 탈을 쓰고 숨어 있기에
그들을 찾기 위해 인세에 내려왔노라…
천후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제천우사가 신이라는 사실은 전설만이 아니지 않는가?
호기심이 또다시 그의 시선을 서신으로 옮겨가게 했다.
그 결과, 세 악귀는 처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부가 염려하는 것은 바로 후일이다.
그들 세 악귀는 이미 인간에게 사(邪), 마(魔), 요(妖)를 모두 심어주었기 때문이노라.
후인이여, 그래서 노부는 하늘로 다시 올라가기 전에 인세에 안배를 해놓겠다.
그것은 바로 천지만물의 응집체인 한극천담과 열극천담을 만들고
그곳에 노부의 무학을 전하겠노라.
그 중 이곳은 바로 열극천담이노라.
이곳에 태양검과 태양검보를 남긴다.
원래 노부는 천향이라는 심법을 인세에 남겨둔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삼마의 저주를 막기 위한 안배였다.
그러나 사실은 열극천담과 한극천담에 남겨진
태양검보와 태음검보의 무학이 노부의 진정한 무학이노라.
음과 양은 천하만물의 근원이 되는 것,
그러므로 그것이 합쳐져야만 진정한 하늘의 무학이 되느니라!
태양검보와 태음검보는 그 하나로는 제 위력을 발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노부가 천기를 살펴보니 후일 인세에 두 명의 기재가 탄생함을 알았노라.
그들은 남과 여로서 각각 천양극일과 천음극월을 타고나리라.
후인이여! 그대는 바로 천양극일지체이려니와
그대는 이미 천음극월지체와 화합하여 천지교태지신이 되었을 것이다…
순간, 천후는 그만 대경실색하고 만다.
'앗…? 어…어떻게 그것까지 이렇게 미리 알고 있다니…?'
제천우사, 그는 이미 그 모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지 않은가?
정녕, 그는 사람이 아닌 신이 분명했다.
그는 계속 다음 글을 읽어나갔다.
후인이여! 그런 연고로 그대가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노부는 이곳에 단 삼초의 검법과 태양검을 남기노라.
후일 그대는 천음극월의 여아와 함께 태양검과 태음검을 합쳐
다시금 또 하나의 검을 만들거라.
그리고 그 검을 용봉검(龍鳳劍)이라 칭하라.
두 개의 검이 합쳐지는 순간, 검신에서는 또다시 삼초의 합벽검법이 나오리라.
그 검법은 용봉합무(龍鳳合舞)라 칭하라.
이상의 내용은 천향심법에도 기록이 되어 있거니와
후인은 부디 이 모든 것을 취하여 부디 천하창생에 힘쓰기를 바라노라!
나가는 출구는 좌측 벽에 있느니라.
그리고 열극천담의 모든 화의 기운은 그대가 흡수 하였기에
이미 보통의 물[水]로 화해 있느니라
. 후인이여!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부디 억조창생을 위해 힘쓰라!
제천우사
그것이 끝이었다.
천후는 잠시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너무도 놀라운 사실에 그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는 다시금 태양검보를 펼쳐들었다.
태양검보.
그곳에는 모두 삼초의 검법이 실려 있었다.
태양창조(太陽創造).
태양생성(太陽生成).
태양소멸(太陽消滅).
삼초의 검법, 그것은 한결같이 가공할 검법들이었다.
제천우사, 그가 창안해냈기 때문인가?
그것들은 모두가 인간의 무학이 결코 아니었다.
즉, 검법을 태양의 정기로써 창조해내고 생성시킨 후
다시금 태양의 정기로써 소멸시키는 것이었으니…
어찌 그것을 인간의 무학이라고 하겠는가?
인간 이상!
그것은 이미 신(神)의 절대적 차원에 의한 것이었다.
천후, 그는 한동안 태양검보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모든 사고와 지혜, 그리고 이성까지 총동원하여
삼초의 검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時間)!
물처럼 유유롭게 흐르는 시간,
그것은 이 순간에도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스무 개의 눈동자.
그것은 여전히 괴이한 광망을 번뜩이며 연못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누군가 먼저 입을 떼었다.
"그놈이 저곳에 들어간 지가 벌써 삼 일째지…?"
"그런 것 같군."
"이제는 정말로 완전히 죽었겠지? 아마도 뼛가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을 게야!"
그러자, 기괴한 괴소를 흘리며 또 다른 음성이 묻는다.
"크크크! 혈마! 너는 왜 그렇게 신경을 쓰지?
너는 저곳이 바로 열극천담이라는 것을 모르느냐?"
"알지. 놈이 저곳에 빠진 이후로는 왠지 자꾸만 허무한 생각이 들어서…"
그는 우울한 듯 말끝을 흐린다.
그러자 예의 음성이 그를 비웃는다.
"흐흐흐! 천하의 혈마도 이제는 갔구나, 갔어! 그 따위에 애수에 잠기다니!"
그러나 혈마라 불리운 인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의 비웃음에 긍정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대답할 기분조차 아니기 때문인지…?
한데, 바로 그때였다.
"앗!"
"아니?"
"엇! 저…저것을 봐라!"
스무 개의 눈동자는 일제히 대경하고 만다.
그들의 시선이 못박혀 있는 연못,
즉 열극천담, 바로 그곳 수면 위로 무엇인가가 솟구친 것이 아닌가?
가을호수처럼 잔잔한 수면이 그 순간 거칠게 파동을 일으켰다.
솟아나온 물체,
그것은 바로 천후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