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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안식일 논쟁과 열두 제자의 임명 및 예수의 각종 치유 사역과 평지수훈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4:14-9:50까지 이어지는 전 3차에 걸친 예수의 갈릴리 사역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각의 구속사적 개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반부 1-11절은 각각 주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시장하여 밀 이삭을 먹은 사건(1-5절)과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친 사건(6-11절) 등으로 야기된 안식일 논쟁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안식일 규례의 본질은 무시하고 그 규례의 형식만 고집하는 형식 주의의 오류(誤證)를 지적하심은 물론 이와 관련하여 자신이 제 2위 하나님인 성자요. 메시야(Me-ssiah)라는 사실도 암시하셨다. 즉 자신은 구약 율법의 일부인 안식일(the Sabba◎)은 물론 모든 율법의 입법자로서 그것을 초월한 분인 동시에 이제 구속사(救贖史)의 새 시대를 맞이하여 안식일의 의미를 확장 계승(繼承)하는 새 규정을 세을 것을 강력히 암시하면서 형식주의에 빠진 바리새인들의 편협한 안식일관에 대해서는 물론 그런 모든 안식일 규례의 입법자이신 자신을 몰라보고 오히려 주님께 그런 안식일 규례의 형식적 준수를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범한 것을 책망하였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에 성경의 규례(規例)는 모두다 구속사(救讀喪)의 각 단계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攝理)와 사역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다. 따라서 어떤 규례든지 그 형식보다 거기에 담긴 목적과 원리가 더욱 중요한 것이므로 그 제정 목적과 원리를 생각하며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성경의 모든 규례는 이 땅위에서 구속사가 진행되는 동안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할 성도의 일생에 참 유익을 줄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과 교회의 규례를 형식적으로 아는 데 그치지 말고 그 참 의미를 살펴서 이를 실천하여야 하겠다.
다음 중반부 12-16절은 대략 공생애 개시 후 일년 뒤에 있었던 열두 제자의 선택 사건과 그들의 명단에 대한 기록이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여러 제자 중에서 12명을 특볕히 일반 제자와 달리 사도(使徒)로 임명한 사건과 그 명단의 기록이다. 열두 제자는 다름아니라 후에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마치시고 부찰 승천하신 후에 지상에 남아 주님의 구속사역의 참뜻 곧 거기 담긴 복음을 증언하며 세상 끝 날까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중심 역할을 할 교회(the Church)의 설립자가 되기 위하여 예수에 의하여 직접 부름 받고 훈련받은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피택(被澤)은 전 구속사적 섭리와 연관되어 있는 바 이에 대해서는 마 제 10장의 구속사적 개관을 참조하라, 본장 후반부 17-49절은 유명한 소위 평지수훈(平地垂訓)이다. 평지수훈은 그 배경과 내용 구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나 그 근본 목적이나 그 전반적인 구속사적 의의는 마태복음 제5-7장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 그 맥을 같이한다. 즉 평지수훈도 이제 당신이 전하는 천국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당신이 행한 구속사역의 은혜를 입어 이미 천국 시민권을 확보하였으나 세상 종말로 천국이 영육 간에 온전히 임하지는 알은 구속사적 중간기인 현재의 신약시대에 성도들이 가져야할 마땅한 삶의 자세 및 기준에 대하여 예수께서 새 법(法)으로 주신 교훈의 기록이다. 이에 본평지수훈이 산상수훈과 함께 갖는 근본적인 구속사적 의의 및 산상수훈과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마 제 5장의 연구자료 및 본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기로 하고 다만 본 개관에서는 그 내용 구성에 대한 분석만 제시하기로 한다.
산상수훈과 비교할 때 짧은 내용으로 구성된 평지수훈은 먼저 17-19절이 평지수훈이 시작된 배경을, 20-26절이 평지수훈의 서론이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복(福)있는 자와 화(禍)있을 자에 대한 대조를, 27-42절이 성도들이 주로 이웃과의 생활에서 가져야할 자세에 대한 구체적 실례들을, 그리고 43-49절은 지식으로 주의 교훈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알고 또한 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한 나무와 열매의 비유(43-45) 및 이제 평지수훈으로 주어지는 주의 새 법은 지켜도 그만 안지켜도 그만인 세상 도덕이 아니라 이로 인해 세상 끝날 영생과 영벌이 판가름 날 그야말로 진리(Truth)와 생명(Life)의 법임을 강조한 두 집의 비유(46-49절)를 통하여 주의 교훈의 실천의 중요성을 교훈 및 경고하는 결론부이다.
실로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자이나,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이 심판의 날에 안전할 것이다.
외울 말씀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오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 6:35)
안식일에 밀이삭을 먹은 제자들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
6 ○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열두 사도의 임명
12 ○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16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예수께 나아온 무리들
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복 있는 자와 화 있을 자
20 ○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천국 백성과 이웃 사랑
27 ○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천국 시민과 비판
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9 ○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복음의 실천을 추구하는 두 비유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본문 & 자료 노트
주요주제 - 6:1-11 바리새인과 예수의 안식일 논쟁
마 12장 자료노트 참조
신학용어 6:1-9, 안식일신 5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 - 6:5, 인자의 이해눅 12장 자료노트 참조
역사배경 - 6:6, 회당의 이해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문화적 배경' 참조.
도표 6:12,13 예수님이 기도하신 때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 나가시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덧입기 위하여 수많은 기도를 하셨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계속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야 할 것을 교훈한다. 성경에는 대략 40회에 걸쳐 예수께서 기도하신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바 그 주요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후(눅 3: 21,22)
2. 열두 사도를 택하시기 전에 (눅 6:12)
3.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실 때(마 6:5-15)
4. 하루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새벽 미명에(막 1:35)
5. 하루의 사역을 마치신 후 해질 무렵에(마 14:23)
6. 변화 산에서 변형되실 때(9:28,29)
7. 여러 이적을 수행하실 때에(요 11:41,42)
8. 십자가 수난을 하루 앞둔 때에(마 26:39-44)
9. 십자가 수난을 위해 체포되시기 직전에(요 17:1-26)
10. 십자가 상에서 고난 당하실 때 세 번(마 27:46; 눅 23:34,46)
주요주제-6:20-49 산상 수훈과 평지 수훈의 비교
1. 산상 수훈과 평지 수훈의 정의
본문과 마 5-7장은 다 같이 예수께서 제 1차 갈릴리 사역 기간(A.D. 27-28년경) 중에 갈릴리 지역에서 행하신 일련의 설교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께서 이 설교를 행하신 장소를 '산 위'(마 5:1)로 소개하고 있고, 누가는 '평지'(17절)로 소개하고 있다. 이에 학자들은 편의상 마태의 기록과 누가의 기록을 구별하기 위해 마태의 것은 '산상 수훈'(山上垂訓), 본문에 기록된 누가의 것은 '평지 수훈'(平地垂訓)이라고 일컫는다.
한편 누가의 평지 수훈은 원래는 본문에 기록된 내용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편의상 눅 11-16장에 흩어 기록된 주의 교훈 중 마태의 산상 수훈과 병행하는 내용들까지도 포함하여 설명하도록 하겠다. 단 평지 수훈 자체의 구조 분석은 본장 구속사적 개관을 참조하라.
2. 산상 수훈과 평지 수훈의 차이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과 누가 복음의 평지 수훈은 대부분 병행을 이루고 있으나 내용의 배열순서나 용어및 내용상 다소 차이가 있다. 특히 마태는 산상수훈의 내용을 한 곳에 모아 둔 반면에 누가는 일부 핵심 내용만 본문에 집중 기록하고, 기타 평지 수훈의 많은 내용들을 눅 11-16장 사이에 흩어 기록하고 있다. 또 그나마 흩어져 있는 내용들을 다 모아도 누가가 기록한 양은 마태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학자들은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 집회 같은 대 설교 집회를 몇 차례 가지셨으며, 산상 수훈에 기록된 여러 교훈들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각 경우에 맞추어 거듭 강조하셨다고 본다. 그런데 마태는 이를 산상 수훈으로 한 곳에 모아 집중 기록한 반면 누가는 그 핵심 내용들을 그것이 따로 따로 주어졌던 때나 각 문맥에 따라 분산 배치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누가가 흩어서 기록한 내용 가운데 그 교훈이 위치한 문맥의 흐름에 따라 마태가 제시한 것과는 다른 의미들을 가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본문의 주석과 강해를 참조토록 하라.
3.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의 병행 기사
산상 수훈 전반에 관한 설명은 마 5장 연구 자료를 참조토록 하고, 여기서는 산상 수훈의 내용과 병행 기록하고 있는 누가의 기록을 도표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내용 평지수훈 산상수훈
1. 팔복 6:20-23 5:2-12
2. 원수 사랑 6:27-36 5:38-44
3. 비판 금지 6:37 7:1,2
4. 황금률 6:38 7:12
5. 비판자의 오류 6:41,42 7:3-5
6. 열매와 나무 6:43-45 7:15-20
7. 지혜로운 건축자 6:46-49 7:24-27
8. 주기도문 11:2-4 6:9-13
9. 기도 원리, 결과 11:9-13 7:7-11
10. 세상의 빛 11:33 5:14,15
11. 눈은 몸의 등불 11:34-36 6:22,23
12. 세상 염려 금지 12:22-31 6:25-33
13. 성도의 재물관 12:33,34 6:19-21
14. 송사에 대해 12:58,59 5:25,26
15. 좁은 문 13:24 7:13,14
16. 불법을 행하는 자 13:26-27 7:22,23
17. 세상의 소금 14:34,35 5:13
18. 하나님과 재물 16:13 6:24
19. 율법의 완성자 16:17 5:18,19
20. 이혼과 간음 16:18 5:31,32
4.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의 단독 기사
① 평지 수훈:
마태의 산상 수훈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누가의 평지 수훈에는 나타나는 내용에는 다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상에서 부요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자들에게는 화가 임하리라는 내용이다(6:24~26). 이는 누가가 팔복 중 첫째 복을 기록할 때 마태와는 달리 '심령'이라는 단어를 빼고 단순히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한 사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교훈이다. 이로 볼 때 누가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으며, 제자가 스승만큼 온전케 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의 기사이다(6:39,40). 마태는 이 내용을 산상 수훈이 아닌 다른 곳에서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의미도 조금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마 10:24,25; 15:14).
② 산상 수훈:
유대인들을 독자로 하는 마태는 산상 수훈에서 모세 율법 가운데 5개 율법과 바리새인들의 종교 규례에 관한 가르침을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대조하여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구약 율법의 완성자이시며, 그의 가르침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가르침보다 훨씬 우월함을 증거하고 있다(5:17,19-24,27-28,31,33-39,41,43; 6:1-8,16-18).
그러므로 이방인들을 독자로 하는 누가가 유대적인 색채가 짙은 이러한 내용들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겠다. 즉 누가는 구약적인 배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구약 율법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기 보다는 이방인들의 삶과 직접적인연관이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과 교훈을 집중적으로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5. 결론
이상의 산상 수훈과 평지 수훈의 비교를 통해 우리는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기록의 특징들을 비교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복음서 기자가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하되 기계적이고 획일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독자의 특성과 상황을 잘 반영하여 기록한 사실도 발견한다. 따라서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성경 저자들의 관점과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여야만 성경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주요주제- 6:7,11 유대인의 예수 배척
막 12장 연구자료 참조
도표-6:13-16 12사도의 행적
행 서론 특별 자료 참조
도표- 6:20 천국에 대한 성경의 지침
1. 심령이 가난한 자의 처소(마 5:3)
2. 의를 위해 핍박받은 자의 곳(마 5:10)
3. 의인들의 아버지의 나라(마 13:43)
4. 하나님의 나라(눅 6:20)
5. 하늘(눅 18:22)
6. 거듭난 자의 처소(요 3:3)
7. 성도를 위해 예비된 곳(요 14:2)
8. 그리스도가 계신 곳(행 7:55,56)
9.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고후 5:1)
10.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히 12:22)
11. 성도에게 약속하신 나라(약 2:5)
12.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계 21:2-7)
원어연구-6:22, 멀리하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아포리조'이다. 이것은 전치사 '아포'와 동사 '호리조' 의 합성어이다.
먼저 전치사 '아포'는 '~로부터 멀리 떨어져'(away from)라는 뜻을 지니며, '호리조'는 한 지역의 경계를 나타내는 '지경'(마 2:16; 행 13:50) 또는 '지방'(마 8:34)을 의미하는 명사 '호리온'에서 유래한 동사이다. 따라서 '호리조'의 의미는 경계나 한 지역의 지경을 표시하다'(appoint)는 뜻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호리조'는 지역적인 분할 표시에서 한걸음 나아가 어떤 일을 '작정하다'(행 11:29) 또는 어떤 사람을 인정하다'(롬 1:4)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이와 같은 '호리조'의 확장된 의미와 전치사 '아포'가 결합된 '아포리조'는 어떤 일을 따로 구분해서 규정하거나 한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 가운데 일부를 특정한 부류로 인정해서 분리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같은 맥락에서 본절의 이 부분에 대한 공동번역의 번역은 '내어 쫓기고'로 나타나고 있으며, 영역 본 가운데 NIV는 '축출하다'(excludde)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멀리 하고'의 의미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인해 가족 공동체나 이웃, 나아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성도가 필연코 속할 수밖에 없는 사회단체, 혹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더 이상 그들과 교제를 못하도록 소외당하거나 축출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는 이 세상에 살고 있긴 하나 결코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천국에 속한 자들이기에(요 17:14)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 사단의 휘하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소외와 핍박의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말 것은 그러한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은 곧 내가 이 악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영원한 천국 시민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15:19).
도표-6:20-23, 팔복
마 5장 자료노트 참조
주요주제-6:20-23 성경적 복의 개념
신 28장 자료노트 참조
도표-6:27-36 예수를 닮아가는 성도의 사랑의 모습
본장의 평지 수훈은 천국 시민이면 마땅히 삶의 원리와 기준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다. 이에 평지 수훈 중 본문에 나타난 바 사랑의 실천에 관한 교훈을 살펴봄으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가야 하는 성도들의 삶의 지침으로 삼고자 한다.
1. 자신을 저주하는 자를 위해서도 축복을 빌어줌(28절)
2. 자신을 모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해 줌(28절)
3. 남의 대접을 받기 전에 먼저 남을 대접함(31절)
4.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도 사랑함(32절)
5. 자신을 선대하지 않는 자도 선대함(33절)
6. 사람들에게 받기를 바라지 않고 빌려줌(34절)
7. 원수라도 사랑하고 선대하며 바라지 말고 빌려줌(35절)
8. 하나님의 자비하심처럼 자비하고 주기에 힘씀(36,38절)
9. 비판하지 말고, 남을 정죄하지 말며 용서함(37절)
주요주제-6:39-49 예수의 비유의 이해
마 13장 연구자료 참조
원어연구-6:42 외식하는 자
마 6장 자료노트 참조
신학용어-6:46, 주(Lord)
요 13장 자료노트 참조
보감 - 6:36 자비를 베푸는 성도의 바른 자세
1. 주께 감사하는 마음으로(대상 29:13)
2. 지체하지 않고 즉시(잠 3:28)
3. 보상받으려는 마음이 없이(마 6:1)
4. 외식하지 않고 겸손하게(마 6:2-4)
5. 그리스도께 하듯이(마 10:42)
6. 주께 진 빚을 갚듯이(마 18:21-35).
7. 원수도 사랑하는 마음으로(눅 6:35)
8. 마음에서 우러나와 기꺼이(고후 9:7)
9. 서로 짐을 나누어지듯이(갈 6:2)
10. 물욕을 버리고 관대하게(딤전 6:18)
6:1-11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전장(눅 5장)에서는 예수님의 1차 갈릴리 사역 중간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과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사역,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금식 논쟁을 소개했다. 이제 본장은 안식일에 대한 논쟁, 12사도 선택, 평지 수훈 등을 통해 1차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짓고 있다. 그 가운데 본문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논쟁하는 장면으로, 마태(마 12:1-14)나 마가(막 2:23-3:6)도 공통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이미 중풍병자의 죄 사함(눅 5:17-26)과 레위를 제자 삼으신 문제(눅 5:27-32), 그리고 금식의 문제(눅 5:33-39)에서 대두되었던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종교적 갈등이 안식일 논쟁을 기회로 표면적으로 대두되어 나타난다. 이와 같은 갈등은 본서 전체에 걸쳐서 더욱 심화되어 일관되게 나타나다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십계명에 규정된(출 20:11) 날로 그들의 생활을 좌우하는 중요한 성일(聖日)이었다. 그런데 원래 안식일은 ①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감사하고 기억하는 날로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새롭게 창조할 것을 예표하며(창 2:1-3), ②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출애굽의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로(신 5:15)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표해 준다. ③ 또한 안식일은 인간의 휴식을 위한 것으로(출 20:10)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누릴 안식을 예표해 준다(히 4:3; 계 14:13). 따라서 안식과 구원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여 주고 완성시킨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전장에서 본 바와 같이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를 왜곡시키고 형식과 외식에 치우쳐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함으로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과 논쟁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는 안식일과 관련하여 두 가지 논쟁이 벌어지는데 첫 번째 논쟁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을 본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안식일에 노동한 것이라고 문제 제기하면서 일어났다(1-5절). 그러나 이런 비난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전통에 의거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예(삼상 21:1-6)를 들어서 이런 주장을 일축하시고 율법의 근본정신이 문자적인 법조항에 있지 아니하고 사랑에 기초된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5절)이라고 증거하심을 통해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창조자이며 입법자임을 보여 주는데, 그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는 성부와 함께 안식하셨으며 이제 죄로 타락한 이 세상에 영원한 안식을 주러 오신 것이다(히 4:1-11). 결국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사랑을 실현하는 날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유익을 위한 규정임을 알 수 있다(막 2:27).
두 번째 논쟁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치신 것에 대하여 바리새인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일어났다(6-11절). 가버나움 사역(4:31-44)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날이 비록 안식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손 마른 자를 고치신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은 인자로 오셔서 안식일의 근본 목적인 인간 사랑을 성취하신 것일 뿐만 아니라 안식일 준수의 바른 의미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별의 소극적인 면을 확대 해석하여 인간의 선한 행위마저 제한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강조하여 적극적 선을 행할 것을 요구하신다. 즉 안식일에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주의 영광과 형제의 유익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 날인 것이다.
한편 누가가 안식일에 대한 사례를 들어 율법의 한계성을 규정한 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 있었던 유대주의자들의 율법준수 요구에 대해 해명하며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로 하여금 형식적인 율법보다 사랑의 복음에 더욱 충실할 것을 교훈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잊어버린 율법주의자가 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여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진실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롬 13:10; 고전 13:13).
6: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 본장부터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을 의도적으로 표면화시키시는데, 이는 전장에서 살펴본 중풍병자의 치유(눅 5:17-26) 때의 태도와는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 하여튼 저자 누가의 신학적 입장이 반영된 자료 배열의 결과이긴 하겠지만, 누가는 본장에서 안식일과 관련된 두 사건(1-11절)과 산상 설교와 동일한 자료라 여겨지는 평지 설교(12-49절)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바리새인들의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즉 예수께서는 안식일 논쟁을 통해서 예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안식일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 하셔서, 은연 중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person)을 가지셨음을 계시하셨다. 또한 평지 설교를 통해서 바리새인들의 최고의 권위였던 모세보다 자신이 더 탁월한 율법의 최종적인 권위자이심을 나타내셨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적극적인 자기 계시 (self-revealation)는 곧바로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일으켰고, 그 결과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살해할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본 단락(1-5절)의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은 각각 '안식일'과 '밀밭'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두 시·공간성은 그 자체에 이미 논쟁을 불러 일으킬만한 충분한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이라는 시간에는 '일'을 금지하고 있는 반면, 밀밭이라는 장소는 '추수'라는 일을 기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절묘한 시·공간적 결합이 주는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겠지만, 아무튼 본 단락의 사건은 일련의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때 제자들이 매우 시장했다는 사실은(마 12:1), 본 사건의 발생 당위성을 더욱더 배가시켜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 제자들의 이 같은 행위는 율법에서도 허용된 일이었다. 즉 이웃의 포도원에 가서 그릇에 담아 가지고 오지 않는 한 마음대로 먹는 일과,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않는 한 이삭을 따는 정도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로 이해되었던 것이다(신 23:24,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행위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들이 이웃의 밀밭에서 밀을 도둑질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안식일에 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제자들의 행위는 바리새인들에 의해 일종의 축소된 추수(잘라)와 탈곡(비비어) 행위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6:2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제자들의 행위는 명백한 범법인 것이 분명했다(Mishnah). 이에 예수를 음해할 근거를 구하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안식일을 범한 죄인으로 비난하고 있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직접 비난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의 잘못을 예수께 추궁한 것으로 나타난다(마 12:2). 그러나 이러한 바리새인의 행위는 제자들이 밀을 잘라 먹은 데 대한 책임을 예수께 추궁함으로써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의도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직접 비난한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예수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적의를 보다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바리새인과 예수의 안식일 논쟁에 대해서는 마 12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6:3 다윗이 시장할 때에 한 일. - 삼상 21:1-6의 사실을 가리킨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위를 변호하고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교훈하시기 위해,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을 피해 몇몇의 부하들과 놉 땅으로 피했을 때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달라 하여 먹은 사실을 인용하신 것이다. 다윗의 행위는 율법의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마치 제사장이 성전에서 안식일에 직무상 일을 해도 의식법에서 면제받은 것처럼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었어도 의식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상기시켜 다윗보다 더 크고 안식일의 참 주인이시며, 성전보다 더 크신 자신과 함께 있으면서 직무상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고 손으로 비벼 먹은 제자들의 행위는 정당함을 변호하신 것이다.
6:4 하나님의 전. - 여기서 '전'으로 번역된 '오이코스'는 '집', '성소', '성전' 등의 의미를 지니는데, 본절에서는 구약의 '회막'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 - '진설병'은 이스라엘 12지파 수대로 성소 안의 떡상 위에 여섯 개씩 두 줄로 항상 진열해 두었던 떡을 말한다. 이것은 누룩 없이 만들었으며 매 안식일 아침에 새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 묵은 떡은 제사장이 먹었다(레 24:5-9). 한편 삼상 21:6에 의하면 다윗이 도착한 그 날에 뜨거운 떡이 진열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자신과 제자들을 변호하는 데에 보다 적절한 배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6:5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 예수의 이 말씀은 예수 자신이 안식일의 입법자로, 안식일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통제하며 주관할 권세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결국 이 말은 당시 바리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안식일에 관한 규정을 가지고도 안식일의 참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한하고 규제할 수 없으며, 아울러 그와 함께한 제자들 또한 비난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Barbieri).
6: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한 기사의 시간적 배경 역시 안식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른'에 해당하는 '헤테로'는 종종 '두 번째'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의 안식일은 예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었더던 안식일 다음 안식일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본절의 안식일을 반드시 그 다음 안식일로 볼 필요는 없다. 하여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치유 사건의 시간적 배경이 안식일에 해당함으로써 또 다른 긴장감이 돌고,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일 것이다. 더구나 그 장소가 회당이고 보면, 이 날의 손 마른 사람에 대한 치유로 인해 바리새인의 분노는 훨씬 더 증폭되었을 것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11절).
오른손 마른 사람. - 여기서 ‘마른'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라'는 혈액 순환이 원할치 못하거나 어떤 다른 요인으로 인해 손의 기능이 쇠퇴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이 사람의 오른손이 마비되었음을 나타낸다(Booth). 한편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한편 손 마른 사람'(마 12:10), '손 마른 사람'(막 3:3)이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오른손 마른 사람'이라고 표현하여 의사로서의 그의 세심한 필치를 보여 주고 있다. 하여튼 외경 '히브리인의 복음서'에 의하면 이 손 마른 사람은 본래 석공으로, 빌어먹는 거지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 예수께 치유를 간청했다고 한다(Jerome).
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 이 구절의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이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오른손 마른 자를 치유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마치 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게끔 시간과 장소적인 여건을 마련한 듯 하며, 특히 그 장소가 공개적인 회당이라는 사실은 절대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불리하게 작동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특히 의사인 누가는 바리새인들의 행동을 '엿보니'(파레테룬토)라는 세심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곁에서'(파라)와 '지켜보다'(테레오)의 합성어로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면밀하게 주시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이들이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로 삼고자 하는 것은 안식일을 고의적으로 깨뜨렸다는 것인데, 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임에 주목해야 한다(Sanh 7:4).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회당에서도 안식일을 범한 예수님을 효과적으로 고소할 수 없어서, 그 분풀이로 예수님을 처치하려고 했다는 11절의 보도 이전에 이미 그럴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6: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아무리 주도면밀하게 고소할 증거를 찾고자 했을지라도, 전지하신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간악한 의도를 파악하고 계셨다. 때문에 비록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예수님을 고소할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고 믿는 조건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음모는 도리어 예수께서 당신을 안식일의 진정한 주인으로 계시할 수 있는 호기로 삼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회중 가운데 앉아 있는 오른손 마른 자를 기립시켜 한가운데 서게 함으로써 바리새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치유하는 의도를 보이셨다.
6: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 이 구절 역시예수님의 지혜를 확인시켜 주는데, 이는 자신을 올무에 빠뜨리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음모에 정면 승부를 거신데서 알 수 있다. 항상 대적들의 공격에 여기서처럼 정면 돌파를 하신 것은 아니지만(눅 4:30), 이 상황에서는 이 방법이 유효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님께서 이처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통해서 그들의 입을 함구시키지 않고서 치유를 하셨더라면, 그 이후 벌떼처럼 달려드는
그들의 파상(波狀)적인 공격을 감당하기가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 사이에 숨어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은밀히 감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공개적으로 질문하셔서, 이미 그들의 저의를 간파하고 있음을 고지하셨던 것이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 당시 유대 랍비들 간에 이견이 있었지만 대체로 안식일에는 사람의 생명이 위급한 경우 그를 치유하는 일을 제외한 어떤 종류의 일도 금지되어 있었다. 이런 당시 상황을 미루어볼 때 예수님의 질문은 별로 난해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것은 허용된 일이고, 악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멸하는 것은 응당 금지된 일이었다. 후자의 경우는 안식일에만 금지된 것이 아니라 6일 동안에도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은 명약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율법의 선생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이 이 질문을 한 것은 그들에게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실제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데, 이는 그들 역시 예수님의 질문을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의도로 이 질문을 하셨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1절 바리새인들이 분노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하는데, 그 해답은 다음과 같다. 이 질문에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안식일에 대한 원래 의미를 회복하시는 데 있었다. 그런데 현재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정은 안식일 본래의 의미를 희석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왜곡시키는 주범이 되었다고 예수님은 진단하신 것이다. 즉 바리새인의 안식일 규정은 악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멸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으로서, 더 이상 어떠한 가치도 부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반면 예수님의 안식일 준수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등 원래의 의미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지금 오른손 마른 자를 치유하는 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안식일 범한자로 고소한다면 그들은 그야말로 생명을 멸하고, 악을 행하는 자의 대표적인 표본이 됨을 스스로 만천하에 고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로써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고소 기도를 철저히 봉쇄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셔야만 했던 까닭을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상당히 유익하리라고 본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던지신 질문에는 약간의 억측이 엿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시는 것이 옳은 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과연 오른손 마른 자가 촌각을 다툴 만큼 생명이 위독한 경우였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즉 적어도 이 병자의 경우에는 안식일이 아닌 내일 치유한다고 해서 안 된다는 극박성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예수님 자신의 치유 행위를 생명을 구한다는 명분에 일치시켜 가면서까지, 치유하실 필요성과 당위성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는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의 까다로운 규정은 악을 행하고, 생명을 죽이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진단이다. 원래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구속주되심을 고백하면서, 타락으로 왜곡된 피조계를 회복시켜 메시야의 도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염원하도록 하는 역할과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적 행위였고,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사업에 인간이 할 일이 없다는 철저한 자기 겸허의 발로였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적극적인 신앙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안식일 규정을 매우 세분화시켜서, 안식일의 개념을 소극적인 무노동으로만 이해한 바리새인들에게는 적극적인 신앙 고백이 소홀히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하나님의 창조주와 구속주되심에 부합되는 적극적인 선행을 발달시키지 못했고, 반대로 소극적인 무노동의 정의만 자세히 개발했던 것이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병자들을 볼 때 하나님께서 품으시는 사랑은 고사하고, 오히려 공동체의 일원에서 제외시켜 버리는 손쉬운 방법들을 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병자의 입장에서는 그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우선 병이 치유되는 것이 급선무였다는 사실을 두고 볼 때, 그에게는 치유가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런 병자들의 비원(悲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예수님을 고소할 미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안식일이 지나도 치유해 줄 능력도, 마음도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그들은 악행을 적극적으로 행했고 또한 그들의 태도는 생명을 멸하는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하겠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5절)으로서, 안식일의 인위적인 규례를 폐기하고, 더 적극적인 해석을 내릴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 주신 바 있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고대하는바 구원을 성취하는 분으로서, 병든 자에게 생명을 주는 의원이 되심을 보여 주고 계시다(눅 5:31,32). 따라서 자신의 행위를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으로 설명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대중의 오해와 무지로 인해 굴절이 되었다손 치더라도, 매우 정확하고, 적합한 계시가 아닐 수 없다.
6:10 무리를 둘러보시고. - 마가의 병행 구절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질문에 일언반구의 대답도 못한 채 잠잠한 것으로 나타난다(막 3:4). 또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무리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매우 근심하며 노하셨던 것으로 나타난다(막 3:5).
네 손을 내밀라. - 예수님의 역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일언반구도 할 수 없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오른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예수께서 오른손 마른 사람을 고치기 위해 그에게 손을 대거나 또는 '깨끗케 되라'는 말씀을 전혀 하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손 마른 자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을 뿐인 것이다. 이는 손 마른자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이었다. 즉 '손을 내밀라'는 예수의 말씀 속에는 이미 '깨끗케 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손 마른 자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는 즉시 치유의 은총을 입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우리의 원하는 바를 이미 주셨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얻고, 못 얻고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하매…회복된지라. - 손을 내밀라는 예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오른손을 내민 손 마른 사람은 오른손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 여기서 '그리하매'라는 말은 손 마른 사람의 전적인 순종을 한 마디로 묘사한 말이다. 한편 여기서 '회복된지라'(아페 카테스타데)는 어떤 비정상적인 것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 본래의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거나 확립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이는 손 마른 사람의 손이 정상으로 돌아왔음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창조의 능력을 지니신 신적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6: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 예수님을 고소할 증거를 포착하려고 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심리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원문에는 본 구절이 시작되는 부분이 '아우토이 데'(그러나 저희는)란 강조형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이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행위에 전혀 동의를 하고 있지 않음을 짐작케 해준다. 여기에서 '분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이아스'( )는 부정 접두어 '아'와 '정신'을 의미하는 '누스'의 합성어로 '자기 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를 말할 때 사용된다. 따라서 본절은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나타내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서로 의논하니라. - 예수로부터 처절한 패배감을 느낀 바리새인들은 드디어 예수를 죽일 음모를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본절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마가복음에는 죽일 음모를 의논한 것으로 나타난다(막 3:6).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전통을 중시하고 외세를 배격하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반면, 헤롯 당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헤롯 왕가와 로마에 충성을 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평소 두 집단은 서로 원수관계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마음의 일치를 보고 연합 전선을 구축했는데, 이는 예수가 헤롯당과 바리새인 모두에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까닭이다. 하여튼 이러한 사실은 평소에는 원수 같은 사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서 만큼은 일치된 마음을 가진 악한 자들의 속성을 잘 보여 준다.
6:12-16 열 두 사도의 선택
앞 단락(1-11절) 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논쟁을 통해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님의 종교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어 가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예수 음해 음모가 진행되어 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은 그러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하나로 예수께서 12제자를 세우신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께서 12제자를 사도로 임명하신 것은 예수를 좇던 많은 무리 가운데서 취사선택(取舍選擇)하여 특별히 12명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의 사역 초기에 12제자를 부르셨었다. 따라서 본문은 이미 선택된 12제자를 공식적으로 사도로 임명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12사도 임명 내용은 마가(막 3:13-19)와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는 단지 12제자의 명단만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누가는 본문 초두에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사도로 임명하기에 앞서 밤새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는데 (12절), 이는 아마도 사도를 세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12제자는 예수님께서 남기신 유일한 조직체로 공생애 동안에 이들을 훈련시키시고 초대 교회의 기둥이 되도록 하신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12사도만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복음만을 전파할 복음의 헌신된 봉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기시키는데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영적 이스라엘의 초석을 마련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누가는 교회가 사도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으며 이것은 본서의 후편으로 볼 수 있는 사도행전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아무튼 12제자는 보잘 것 없고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복음 사업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12제자에 대해서는 행 서론 특별 자료, '12사도의 행적'을 참조하라.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은 외모가 아닌 그 마음 중심이며, 세상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닌 이 세상에서 미련하고, 약하고, 천한 자들을 택하여 세상의 지혜자, 부자, 권력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12사도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의 직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직분을 바르게 감당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많은 교인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모습으로 서 있는지, 또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자신을 내세우며 자랑하고 있는지 아니면 겸손히 오직 하나님만을 드러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 여기서 누가가 제시한 시간적 배경인 '이 때에(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타우타이스)는 평소 누가의 기록 습관처럼, 어떤 정확한 시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눅 1:5,24,39; 2:1:32; 4:1,16,31; 5:1,12,17,27; 6:6). 이런 의미에서 '이 때에'라는 말은 1-11절의 안식일 논쟁과의 시간적 연대를 결속시켜주기 보다는 12-19절의 '12사도의 선택'에 대한 의미를 부각하기 위한 도입적인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오차 없이 수행해 나갈 12사도를 선택할 때에 먼저 기도하러 가셨다는 사실을 연결시키기 위한 시간 설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산'은 팔복을 말씀하신 핫틴 산(Hattin)으로 추정되지만(Farrar), 분명치는 않다. 다만 원문에 본절의 '산'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이 '산'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매우 친숙한 산이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하여튼 예수께서, 12제자를 세우시기 전에 기도하셨다는 사실은 본서에만 나타난 기록으로 '기도' 강조하는 누가의 저작 특징이 다시 한 번 부각되고 있다.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 '밤이 맟도록'(엔 디아뉘크테류온)이란 표현은 신약 성경에서는 본절에 유일하게 사용된 단어로 본래는 밤을 세워 병 간호한 사실을 가리킬 때 사용하던 의학용어이다(Vincent, Robertson). 결국 본절은 '온 밤을 지새워 하나님께 기도하시고'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본절은 앞뒤 문장과 연결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중에 새벽을 맞이하셨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은 한글 개역 성경으로서는 느낄 수 없는 어감을 제공한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의 기도 시간을 미리 새벽 샐 때까지 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는 도중에 새벽을 맞이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예수님의 기도가 매우 깊은 집중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 온 밤을 지새워 하나님 께 기도하신 예수께서는 날이 밝자 12사도를 공식적으로 임명하셨다. 이 구절에서는 누가가 '제자'와 '사도'라는 단어를 세밀하게 구분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고 있다. 즉 누가는 예수님께서 많은 제자(마테다스)들 가운데에서 열두 사도(아포스톨루스)를 선정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처럼 제자와 사도를 구분한 이유는 '사도'직에 대한 특별한 배려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신약에서 약 200회 등장하는 '제자'라는 단어는 대부분 예수의 용의의 제자들뿐 아니라 모세나 세례 요한 같은 선지자들의 제자들까지 포함시키기도 한다(막 2:18; 눅 10:1; 요 9:28). 그러나 '사도'라는 단어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전 생애를 헌신한 12사도들과 바울 등에게 특별히 한정시켜 적용되고 있다(막 6:30; 눅 9:10; 11:49; 17:5; 22:14; 24:10; 행 1:2,26). 따라서 본 구절에서 언급된 '제자들'은 12제자들 뿐 아니라 평소 예수님의 교훈과 권능을 보고 따라 다녔던 많은 추종자들까지 언급한 것이며, 이들 중에서 예수님께서는 12명을 사도로 엄선하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12사도의 직분과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하여튼 '사도' 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예수께서 12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마 10:2). '사도'의 의미와 범위에 대해서는 마 10:2-4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사도의 수가 12명인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12지파로 구성된 사실과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12사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스라엘로 갱신될 것을 암시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 10:1과 막 3:14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6:14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 - 본 구절부터 16절까지는 새로 임명된 12사도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명단은 마태에서 사도행전에 걸쳐 네 차례 언급되고 있다(마 10:2-4; 막 3:16-19; 눅 6:14-16; 행 1:13, 26). 그러나 그 순서나 기록 방법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마 10:2-4 주석과 도표를 보다 참조하라. 또한 12사도의 특징 및 행적에 대해선 행 서론 특별 자료, '12사도의 행적'을 참조하라. 한편 '베드로'는 예수의 수제자로, '반석'이란 의미가 있으며 예수께서 친히 지어주신 이름이다. '시몬'은 '들음'이라는 의미의 헬라명으로 베드로의 본명이다. 베드로에 대해선 벧전 2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안드레. - '남자' 라는 뜻의 헬라어 이름이다. 베드로와 형제이며, 본래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를 만난 후 그의 제자가 되었다(요 1:40). 안드레에 대해서는 요 1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야고보와 요한. - 세베대의 아들들로서(마 10:2), 성격이 매우 급했던 까닭에 '우뢰의 아들들' 이란 별명을 얻었다(막 3:17). 이들 형제 중 '야고보'는 12사도 중 첫 순교자가 되었고(행 12:2), 요한은 12사도 중 맨 마지막까지 유배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야고보에 대해서는 막 10장 연구 자료를, 요한에 대해서는 요일 2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빌립. - 그의 이름은 '말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으로서, 베드로, 안드레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요 1:44). 빌립은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 때 잠깐 언급되는데, 그는 여기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의 식사를 마련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진언을 할 만큼 계산에 빨랐던 사람이었다(요 6:5,7). 빌립에 대해서는 요 6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바돌로매. -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요 1:46의 '나다나엘'과 동일인으로 본다. 바돌로매에 대해서는 요 1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6:15 마태. - 그는 본래 세리로서 '레위'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세리'는 창녀와 같은 부류의 죄인으로 취급되었고 또한 매국노라는 오명까지 받았던 터인지라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방거리가 되기도 했다(눅 5:30). 그는 마태복음의 저자이기도 하다. 마태에 대해서는 마 9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도마. - '쌍둥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그는 흔히 '의심 많은 제자'로 알려지는데, 이것은 부활의 주님을 더디 믿은 데서 비롯되었다(요 20:24-28). 도마에 대해서는 요 21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흔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서 '작은 야고보'라고 부른다. 그의 어머니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실 때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며,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들과 함께 있었다(마 27:56; 막 15:40).
셀롯이라 하는 시몬. - 시몬은 흔히 가나안 사람으로 알려졌는데(마 10:4; 막 3:18) '셀롯'이 '열광자'라는 뜻이므로, 그는 당시 로마 통치에 극단적으로 반발했던 열심당원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6: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 본절과 요 14:22에만 언급되는 이름으로 가룟 유다와 구분하기 위해 그 이름 앞에 부친의 이름이 삽입되었다. 그는 뒤에 '다대오'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듯하다(마 10:3; 막 3:18).
가롯 유다. - 예수님을 배반한 자로,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한 사람으로 소개된다(마 26:24). '가룟'은 유대의 그리욧(Kerioth) 지방을 뜻하는데, 보통 이름 앞에 출신 지방을 붙이는 것은 당시 관습에 따른 것이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마 26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6:I7-19 평지 수훈(平地垂訓) 서두
앞 단락(12-16절)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선봉이 될 12제자를 세우신 예수께서는 이제 20절 이하에서는 하나님 나라 시민의 도를 가친치고 계신다. 이 20절에서 49절까지의 말씀은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5-7장)과 평행을 이루는 말씀으로 이 말씀은 본문 17절의 '평지에 서시니'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일명 '평지 수훈'(Sermon on the plain)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장소는 저지대의 평지라기보다는 산중턱의 평지로 생각되므로 산상 수훈이나 평지 수훈이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내용을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마 5:1 주석 참조).
물론 두 저자의 관점 및 기록상의 차이로 인해 그 내용이나 길이에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마태는 무려 세 장이나 할애하여 집중적으로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는 길이도 짧고 본서 전체에 걸쳐 산상 수훈의 핵심적인 내용을 조금씩 언급한다. 그리고 마태는 이를 기록할 때 율법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는데 치중했고, 누가는 윤리적 측면을 강조한다. 특히 누가는 그 내용 가운데 종교적,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계층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소외되고 비천한 자를 위해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내용 구성에 있어서는 통일성을 보여 준다. 즉 두 복음서 다 서론의 복 있는 자로 시작하여 결론에서 건축자의 비유로 맺고 있는 것이다. 산상 수훈과 평지 수훈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산상 수훈과 평지 수훈의 비교'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본문은 평지 수훈을 전하기 전에 일어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전능을 나타냄으로 해서 뒤이어 나올 복음의 교훈도 역시 권위 있는 것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메시야이시지만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교훈보다 이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7절). 그러나 예수님의 이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권위 있는 수단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무리가 아닌 표면적으로 드러난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 이면에 있는 영적 생명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6:17 예수께서‥‥평지에 서시니. - 이 구절에 나타난 '평지'(페디누)라는 말로 인해 20절 이하의 말씀을 보통 '평지 설교', 또는 '평지 수훈'이라 부른다. 이러한 평지 수훈은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따라서 산상 수훈과 평지 수훈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특별히 마태복음의 '산'(오로스)과 항상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 구약의 '하르'( )는 '산' 뿐 아니라 산 위의 넓고 평평한 지역도 의미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두 복음서의 기술은 서로 보완 관계에 있다 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산 위에 올랐다가 내려오시면서 산 중턱의 평평한 지역에서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Bengel, Plummer, Bruce). 한편, 산상 수훈과 평지 수훈의 비교는 본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 - 이 부분은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출신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매우 광범위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여기서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 지방에 위치한 도시로서 이 두 지역은 한때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 사역을 하시던 중 가신 적이 있었고(마 15:21-29), 바울 역시 이곳을 선교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행 21:3-7).
6: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 예수의 사역에서 축사(逐邪) 이적은 이 땅에 도래한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의 증거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마 12:28). 왜냐하면 바리새인들과 벌인 바알세불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축사 이적을 도래된 하나님 나라의 증거로 제시하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막 9장 자료노트 '축사의 이해' 부분을 보다 참조하라.
6:19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 이미 예수의 이적 기사를 체험했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과의 신체적인 접촉만으로도 병을 치유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듯하다. 실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나음을 입었다(눅 8:46).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앞 다투어 만지려고 했던 것은 일단 예수님을 통한 치유에의 소망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20-26 두 종류의 사람들
평지 수훈의 첫 교훈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사람들을 대조시키고 있다. 한 종류의 사람들은 복 있는 사람들로 이들은 세상에서 천대받고 멸시받는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핍박받는 자'들이다(20-27절). 이들은 비록 세상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불쌍하고 슬픈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그들이 갈망하고 원하는 바가 충족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게 된다. 물론 여기에 언급된 네 유형의 사람들은 단지 외형적으로 불쌍하고 슬픈 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영혼이 가난함을 느낀 겸손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함을 느낀 자이다. 또한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자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 받는 자들인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일시적인 영광과 부귀보다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기쁨과 영광으로 보상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고후 4:16-18).
다른 한 종류의 사람들은 화있는 사람들로, 이들은 복 있는 자와 대조되어 이 세상에서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자'이다(24-26절). 이들은 현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아니하고 자기의 만족과 행복만을 위해 살아온 자들로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가 모든 것을 잃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 이렇게 주님의 가치 기준은 이 세상 사람들과 극명히 다르며, 이 세상을 자기의 영원한 천국으로 삼는 자들은 필연코 영원한 멸망의 심판에 임하게 된다.
한편 마태의 산상 수훈에서도 같은 내용의 복 있는 자가 소개되는데 모두 팔복(마 5:1-12)으로 구성되어 있고 화 있는 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누가는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를 네 가지로 극명하게 대조시켜 축복된 삶과 저주받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누가는 세상에서 불쌍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축복받는 자라는 역설적 표현을 통하여 사회에서 소외받고 천대받는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 준다. 사실 세상과 벗된자는 하나님과 원수된 자이고(약 4:4) 세상의 일시적인 것들에 만족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된다(약 4:9).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언제나 현실적 행복에 만족하여 순간의 기쁨으로 끝나는 삶을 살아가냐,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사느냐의 선택이 있게 된다. 비록 이 세상에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산다는 것이 언제나 고난의 길일 수밖에 없지만 영원한 영광을 소망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마 19:29; 요 16:73; 히 2:18). 왜냐하면 예수님이 제시한 인생에서의 복은 결코 물질적인 만족과 안락한 생활 영위가 아닌 영적인 하나님의 축복과 내면의 풍요로운 삶을 통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6:20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 여기서부터 본장의 마지막 절인 49절까지는 흔히 평지 수훈이라 불리는데 이는 마태가 기술한 산상 수훈과(마 5장-7장) 상당 부분 중복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인 중복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차이점들이 함께 발견된다. 특히 평지 수훈은 산상 수훈에 비해 길이가 축소되어 있고, 또한 그 내용이나 어감에 있어서 매우 대조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이런 차이점에 대해서 제각기 다음과 같은 다양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즉 첫째, 산상 수훈과 평지 수훈은 같은 날에 말씀하신 두 편의 설교라는 견해(Augustine, Lange) 둘째,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주신 다른 설교를 따로 수집했다는 견해(Auger. Greswell) 셋째, 누가의 기록이 역사적이고 마태는 여러 경우의 설교를 한 곳에 편집했다는 견해(Calvin, Bleek. Godet, Holtzmann) 넷째. 양쪽의 중요 부분이 일치하는 것으로 미루어 동일한 한 편의 설교였다는 견해(Chrysostom. Luther, Grotius. Tholuck, Meyer, Bengel, De Wette. Ewald, Ellicott. Farrar) 등 이 있다. 이 견해들 중에서 대체로 지지를 받는 견해는 네 번째의 견해이며 세 번째 견해도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사실 예수께서 유사한 설교를 여러 번 하셨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며 이를 누가는 역사적으로 기술하고 마태는 주제에 따라 사건을 기술하는 그의 기록 방법(마 서론 특별 자료, '마태복음의 2대 편집 원칙' 참조)에 따라 한 곳에 모아 기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보다 타당한 설명은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을 한 곳에 서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설교를 종종 여러 곳에서 행하셨는데, 이를 마태와 누가가 그들의 저술 목적에 맞게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다. 산상 수훈 전반에 대해서는 마 5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표현하고 있으나 누가는 단순히 '가난한 자' 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누가의 의도가 반영된 까닭이다. 그러나 누가의 '가난한 자'라는 말 안에도 마태가 말하는 영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믿음을 떠난 가난 자체로는 어떠한 구원도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 - 이 표현은 마태의 '천국'과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동일한 실체의 두 가지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는데,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주체를(하나님). 마태는 하나님 나라의 위치를(하늘) 각각 강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서론 특별 자료,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보다 참조하라.
6:21 주린 자. - 이는 마태의 산상 수훈의 팔복 가운데 네 번째 복에 해당하는데, 거기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나타난다(마 5:6). 이 해석 또한 가난한 자의 경우처럼 육체적인 기갈이 아닌 영적인 기갈 즉 영적인 갈급을 말한다. 이 현상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중 자신의 죄인됨을 통곡하는 세리에게서 잘 보여진다(눅 18:13), 우는 자. - 이 경우는 마태의 두 번째 복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즉 마태의 '애통하는 자'는 여기서 '우는 자'에 해당하고,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라는 구절은 역시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에 대응하고 있다. 한편 '우는 자'의 슬픔의 이유는 '죄'로 인한 것인데(Carson, Lenski), 여기에는 개인적인 죄와 단체의 죄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슬퍼했던 경우는 성경에 허다한데(시 51:4; 겔 9:4; 합 1:4; 딤후 3:12; 유 1:5),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다니엘의 기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단 9:1-19).
6:22 너희를 미워하며‥‥너희 이름을 악하다. - 산상 수훈 중 여덟 번째 복에 해당하는데, 마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라는 문구로 간결하게 기록한 반면 (마 5:10,11) 누가는 신자에게 임할 세상의 박해를 구체적으로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특히 누가의 네 번째 복에 나타난 환난은 예수님 승천 이후 제자들이 겪어야 할 환난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라는 점에서 예언적 성격이 강하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에서 거부당하고, 경멸을 감수해야만
했던 것이다(요 16:2; 행 21:28; 24:5; 28:22).
6:23 그 날에. - 이 날은 제자들과 성도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에서 배척받고 핍박받는 그때를 가르킨다.
기뻐하고 뛰놀라. - 원어 문법상 명령법에 해당하는 구절로 마태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묘사한 반면 누가는 '기뻐하고 뛰놀라'고 묘사함으로써 핍박을 보다 적극적인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촉구하고 있다. 또한 이는 역설적으로 핍박을 받는 것이 하늘에서 얼마나 큰 상급이 되는가를 암시하고 있다.
6:24 화 있을진저. - 이 구절부터 26절까지는 네 가지 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앞선 네 가지 복과 개별적으로 대조되고 있다. 즉 본절에서 '부요한 자에게 임할 화'는 '가난한 자에게 임할 복'과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언급된 '화'를 단지 '동정적인 측은함'을 드러내는 탄식조의 성격으로 규정하는 해석이 있는데, 이는 천부당 만부당하다. 왜냐하면 앞선 네 가지 복이 성도들에게 임할 실제적인 선언임을 믿는다면 '화'도 회개하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임할 저주의 선언임을 당연히 믿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화에 대한 선언은 단순한 소원의 묘사가 아니라 이미 행해지고 있는 주의 심판의 묘사인 것이다(Lenski).
부요한 자. - 여기서 부요한 자는 일단 부자들을 포함하지만, 굳이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 복과 관련해서 가난한 자가 물질적으로 빈궁한 사람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였듯이, 여기서 부요한 자도 '심령이 부요한 자'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누가가 거두절미하고 '부요한 자' 즉 부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 부자들은 대개 '부를 가장 신뢰할 만한 보장책'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지위와 맞바꾸었기 때문이다.
6:25 이제 배부른 자. - 이것은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둘째 복과 대조되고 있다. 현세에서 물질의 풍요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면서 일생을 보낸 자 또는 자신 스스로 부러울 것이 없다고 자만한 자들은 막상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의 절망적인 가난함을 통렬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의'에 주린 자들이 배부름을 얻는 반면 '의'를 경멸하며 풍요에 배부른 자들은 반대로 주린 자가 될 것이다.
웃는 자여 너희가‥‥울리로다. - 이것은 세 번째 복인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와 대조된다. 여기서 웃음은 세상에서 가진 부로인해 생기는 삶의 여유를 나타내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슬픔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한편 이 세상의 웃음은 일시적이고 육적인 것인 반면 하나님 앞에서 악인들이 보응으로 받게 될 슬픔은 이 세상에서의 웃음을 기억지도 못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영원한 것이다.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 이것은 네 번째 복과 대조되는데, 이는 특별히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다. 제자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면, 세상은 그들을 핍박하고 경멸하지만, 만약 그들이 세상의 원리에 편승하여 세상과 야합해 버릴 때,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모든 세상 사람들이 제자들을 칭찬하게 되는 경우는 그들이 스스로 제자됨의 도리를 상실했다는 말이 된다. 이는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야고보 사도의 경고를 상기시켜 준다(약 4:4).
6:27-36 하나님 나라 시민의 법
앞 단락(20-26절)에서는 평지 수훈의 첫 교훈인 복 있는 자와 화 있는 자.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한 비교를 통해 현실적인 삶에 만족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본 평지 수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특히 본문의 내용은 마태복음에 수록된 산상 수훈의 내용(마 5:38-48)과 동일한 것이지만 약간의 차이도 보인다. 즉 마태의 산상 수훈에서는 구약의 율법과 비교하여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을 강조하여 교훈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삶의 올바른 자세로서의 사랑과 자비를 교훈하고 있다.
하여튼 여기서 원수들은(35절) 특별히 제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이미 앞 단락(20-26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로 인하여 핍박받는 상황(22절) 가운데서 제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를 구체적으로 교훈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때에 필연적으로 핍박을 받게 될 터인데 그러할 때에 그 핍박하는 자를 같이 미워하며 저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선대하며 그들을 축복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랑의 모습을 보일 것을 교훈하는 것이다(27,28절). 본문에는 이런 원수 사랑의 간단한 예가 두 가지로 제시되는데 복수하는 일을 삼갈 것(29절)과 빼앗으려는 자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너 많이 주라는 것(30절)이다.
이런 사랑은 조건 없는 아가페적 사랑으로 그 대상에 있어 제한이 없고 그 양에 있어서도 무한하다. 물론 이 사랑은 마치 패배 의식에 젖거나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면서도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보여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10). 예수님께서는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과 지위를 버리고 한없이 낮아지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희생하시므로 사랑의 모형이 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고 포기할 준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31절)는 '황금률'로 요약되어 있다. 즉 이것은 적극적으로 먼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교훈은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요구이다. 그러나 또한 인간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은 이런 사랑의 법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죄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므로 우리 역시 사랑으로 원수와 복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것만 베푸는 이기적인 사랑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보고 세상의 기준을 초월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행하심을 기준으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진정한 주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마 18:35; 엡 4:32).
6:27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 본 구절부터 36절까지 는 시종일관 '사랑'에 관한 교훈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네 가지 화의 직접적인 대상이었던 부자에 대한 경고에서 돌이켜 일반 청중을 상대하신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Meyer, Luther).
둘째, 예수님께서 대화의 상대를 바꾸었다기보다는 다만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Bengel. Plummier). 이 중에서 두 번째 견해가 지지를 받는데 이는 평지 수훈의 주요 청취자가 제자들이었음을(20절) 감안할 때, 갑자기 청취자가 바꿔다는 첫 번째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 이 구절은 이후 전개될 사랑의 구체적인 적용들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주제가 되고 있다. 즉 이후의 구절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충격적인 선언에 대한 설명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빰을 돌려대는 것과 속옷까지 주는 것 등의 일련의 행위들은 원수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적용들인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은 이웃만 사랑하고, 네 원수는 응당 미워하라고 가르친 서기관들의 그것과 질적인 차이가 나며(마 5:43),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는 율법의 가르침(레 19:18)보다 더 진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의 교훈은 당시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상당한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율법의 진정한 정신이 복수가 아닌 사랑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폐쇄적인 율법의 껍질을 부수고 사랑의 복음에로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선언은 그 분좌 교훈의 극치(極致)요, 극명(克刻)이 아닐 수 없다.
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 - 이것은 산상 수훈 중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과 일맥상통한 경우이며 (마 5:44) 본장의 네 가지 복 가운데서,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고 하는 상황(22절)과 깊은 연관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기한 사랑의 한계는 자신을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하며, 자신을 모욕하는 자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요구들은 인간의 일반적인 정서와 안일한 신앙으로서는 넘지 못할 장벽임에 틀림이 없지만, 실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스스로 이를 실천해 보이심으로써(눅 23:34) 당신의 교훈의 당위성과 가능성을 제시하셨다.
6:29 네 이 뺨을 치는 자. -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진술을 하는데, 이 구절의 '이 뺨'은 '오른 뺨'에 해당하고. 다시 돌려댄 '저 뺨'은 '왼 뺨'인 것을 알 수 있다(마 5: 39). 유대 사회에서 뺨을 때리는 것은 가장 큰 모욕을 주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런데 여기서 오른손으로 오른편 뺨을 친다는 것은 곧 손등으로 치는 것을 의미하는데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이 행위는 최고의 수치로 여겨져 두 배의 벌을 주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뺨을 때리는 자에게 저 뺨까지 돌려대라는 명령은 철저한 무저항주의를 가르치신 것으로 이는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의 범상(凡常)치 않은 준엄성과 엄숙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 구절의 의미를 굳이 문자적으로 한정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은 예수님과(요 18:22,23) 바울의 태도(행 23:2,3)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자기를 불합리하고, 부당하게 취급하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사랑의 마음과 행위를 보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감소시키는 실례가 되지 못하며, 오히려 계명 준수가 진리를 손상시키는 우둔함에 이르러서는 안 될 것임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 여기서 '겉옷을 빼앗는 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의적으로 징벌권을 행사한 로마 군인을 가리킨다. 그런데 로마 군인의 징벌권 발동으로 인해 겉옷을 빼앗긴 당사자는 복수심과 적개심으로 불타올랐으며, 극단적인 경우 폭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경우까지도 복수의 감정을 억누르며 속옷까지도 자발적으로 주는 사랑을 요구하고 계신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요구는 어떠한 불합리한 상황에서도 굴절됨 없이 적용되어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병행구절인 마 5:40에는 속옷이 겉옷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마태가 타인의 겉옷을 취 할 수 없도록 규정 한 율법 (출 22:26; 신 24:13)에 익숙한 유대인 독자들을 상대로 그의 책을 썼기 때문이다.
6:30 네게 구하는 자. - '구하는 자'란 대체로 가난과 궁핍한 까닭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는 자를 가리킨다(신 15:7,8; 시 37:26; 잠 19:17). 이러한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는 하나님의 백성의 당연한 도리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었다.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일치되지 않으며.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첫째 '네 것을 가져가는 자'를 '네게 구하는 자'와 동일 인물로 보는 해석인데, 그 의미는 응당 가난한 자에게 필요에 따라 쓸 것을 공급하되, 그 보답이나 채무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해석은 평지 수훈의 전체적인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채택되기 힘든 점이 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 준수는 당시 서기관들의 가르침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경한 것으로서, 상당히 충격적이었다(마 7:28). 그런데 첫 번째 해석은 전혀 예수의 교훈의 탁월함을 발견할 수 없는 일반적 율법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신 15:7,8). 따라서 예수님께서 평지 수훈에서 단지 율법을 지키도록 말씀하셨다는 정도에서 머물게 하는 해석을 지지하기란 어렵다. 둘째, '네 것을 가져가는 자'를 가난한 자가 아닌 허락 없이 물건을 훔쳐가는 도둑이나 강도로 보는 해석이다. 이 견해를 따를 때 본절 전체의 의미는 '비록 다른 사람이 네 소유를 훔쳐가더라도 세상의 법정에 호소하지 말고 허용하라'는 뜻이 된다. 이 견해는 오른편 뺨을 칠 때 반대 편 뺨까지 돌려대고,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도 벗어주라는 본장의 정신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교훈하는 바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6: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남을 대접하라. - 일명 '황금률'(The Golden Role)이라 불리는 말씀으로, 기독교 윤리의 핵심이자 천국 시민의 가장 지고한 행동 규범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이다. 이와 유사한 가르침은 당시 유대인 랍비인 힐렐(Millet)에게서도 발견되는데, 그는 '너희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율법의 계명들을 잘 반영해 주는 문구로서,'~하지 말라'로 끝맺는 부정적인 율법적 표현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예수께서는 '~하라'는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이는 황금률 준수치 적극적인 당위성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율법은 사람이 소극적으로 하지 않음으로써 만족할 수 있었겠지만, 황금률은 적극적으로 행함으로 성취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본절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마 7:12 강해 '황금률'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6:32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죄인들도‥‥사랑하느니라. - 이 구절은 다음 절의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라는 것과 같은 의미의 표현이다. 사람이 자신의 이해관계의 정도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규정하는 것은 특별할 것이 없는 도덕적 수준에 불과하다. 한편 성경에서 죄인은 구체적으로는 종종 창기나 세리 그리고 이방인들을 가리키며 넓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시 1:1,5). 여기서는 두 경우가 다 포함이 되겠지만, 대체로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즉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정도의 사랑은 굳이 율법을 경멸하는 사람들까지도 할 수 있는 수준임으로, 율법을 맡은 유대인들이 이 정도의 사랑의 행위를 베푼다고 해서 하등 자랑스러울 것이 없다는 뜻이 다.
6:33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이렇게 하느니라. - 32절의 반복으로, 32절이 원리에 대한 설명이라면 본절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된 것에 대한 설명이다.
6:34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 이 구절은 당시 만연했던 고리 대금 풍토를 염두에 둔 말이다. 즉 가난한 자들이 돈을 꾸고자 할 때 부자들은 항상 그의 갚을 만한 능력 여부를 확인한 연후에 대부를 허락했다. 또한 그에게 채무량에 비례하는 담보물을 취해서, 만약의 경우까지 대비했다(신 24:6). 그러나 이는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지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도리어 남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이해 타산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게는
마땅히 극복되어야 할 죄인들의 도덕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6:35 원수를 사랑하고‥‥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 이 구절은 27-34절까지의 교훈을 요약한 것이다.
너희 상이 클 것이요. - 예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면서 살면 상급이 클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상'은 세상의 상급과 같이 물질적인 것은 아니며, 오직 영광의 하나님을 깊이 아는 데서 오는 충만한 은혜로 보아야 한다(마 16:27; 25:46).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이'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가리키는 누가의 관용어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서는 본서 7권 대상 29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결국 그 분의 영광과 거룩한 경륜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의미이다.
6:36 아버지의 자비하심. -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범위는 구체적으로 전절의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세상과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은 전부 그들의 죄로 인해 멸망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존의 섭리로 심판을 미루고 계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비로움은 당신의 자녀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너희도 자비하라. - 하나님의 무제한적 자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베풀어야 할 자비의 분량을 제시해 주고 있다.
6:37-42 비판하지 말라
앞 단락(27-3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타인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을 교훈하신 후에 이제 본문에서는 이러한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걸림돌이 될 타인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교훈하신다. 타인을 비판하지 말 것에 대한 본문의 교훈은 마태의 기록(마 7:1-5)과 일치하고 있다. 이 비판은 단순히 윤리적으로 나쁜 사람을 비난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듯 종교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가리킨다. 하여튼 여기서 예수께서는 '곡식 매매의 비유' (38절), '소경의 비유' (39절), 제자와 선생의 비유'(40절), '티와 들보의 비유'(41,42절)를 통해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므로 언제나 동일한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남을 비판하는 자는 외식하는 신앙임을 말해 준다.
이 비유들은 아마도 당시 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던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누구나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하지만 심판이나 정죄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권위일 뿐이다(롬 2:1,2; 고전 4:3,4). 따라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서 이런 자는 똑같이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된다(롬 14:17).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참된 제자라면 남의 행위를 살피고 비난하기보다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먼저 살피며 반성하고 돌이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와 허물을 찾고 비난하기보다 정죄하는 마음을 버리고 허물을 덮어주며 용서해 주는 사랑의 성품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마 7:1; 눅 6:37).
6:37 비판치 말라. - 이것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 채, 형제의 눈의 티에만 관심을 집중시키는 자들의 경향에 대한 책망이다. 이는 선악의 분별을 넘어선 악의에 찬 판단으로서, 자기 교만의 가장 흔한 형태라 하겠다. 사실은 자신도 동일한 죄인이면서 남을 판단하고 자기는 의인인 양 외식하는 것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대한 월권행위요 교만한 죄악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롬 2:3; 14:10; 고후 5:10).
정죄하지 말라. - 이는 개인적인 비판의 정도를 넘어서 스스로 선악을 결정짓는 재판관의 위치에 앉지 말라는 말씀이다. '정죄'(카타디카제테)는 '어떤 자에 대해 심판을 내리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처럼 심판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권세이다(롬 2:1,13; 14:10; 고전 4:3-5; 약 2:13). 따라서 스스로 남을 정죄하는 것은 스스로를 신격화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하는 대쾨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용서하라. - 용서는 성도의 최대의 미덕이자 준수해야 할 마땅한 도리라 하겠다. 비판과 정죄가 악한 자들의 특징이라면, 용서는 성도들의 표식이 되어야 한다.
6:38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 본 구절은 곡물 시장에서의 매매 장면에서 따온 것인데, 이를 후히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에 비유하고 있다. 즉 일반 곡물 시장에서는 되를 깍거나, 눈금을 속이면서, 분량을 줄이는 것이 시장의 상거래 관습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마치 되에 곡물을 듬뿍 담고, 그것을 꼭꼭 다져서, 좋은 말(斗)로 주듯이(Vincent. Gilmour),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면서 사는 자녀들에게 후한 상급을 주실 것이라는 말이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것이니라. - 이것은 하늘의 상급은 사람들의 지상에서의 사랑의 계명 준수 여부와 정도에 따라 정해질 것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한 대로 값으신다는 말이다.
6:39 비유로. - 본절에서 45절까지에는 4개의 비유가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남을 비판하지 말 것에 관한 이전의 교훈을 더욱 분명하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여기서 '비유'(파라볼랜)는 히브리어 '마솰'( )에 상응하는 단어인데, 여기서는 성격상 '격언'이나 '금언'에 가깝다. 한편 예수의 비유의 이해에 대하여는 마 13장 연구 자료를 참고하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 여기서 전자의 소경은 진리를 분변치 못하는 영적 소경이면서도 스스로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자처했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유대 좋고 지도자를 뜻하고, 후자의 소경은 그들에게 인도를 받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리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서 종종 '소경된 인도자'라고 하는 책을 자주 받았는데(마 23:16,19). 이는 그들이 스스로 율법의 해석자라 자처하면서도 율법에 내재된 근본 경신은 분별하지 못하고 형식과 외식에 치우치는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요 세상을 비추는 빛이신 그리스도가 세상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등 영적인 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들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갈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백성들까지 멸망으로 인도하는 사악한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본절은 비판이나 정죄를 일삼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구덩이. - 구덩이는 들짐승을 잡기 위해 파놓은 웅덩이와 같은 함정을 나타내는 말로서, 여기서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아 떨어질 지옥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6: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 이 두 번 비유는 당시 널리 통용된 격언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여러 번 인용하셨다(마 10:24,25; 눅 22:27; 요 13:16; 15:20). 이 구절은 전절의 소경된 인도자에 관한 부연 설명으로, 바리새인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는 그가 아무리 훌륭하게 되어도, 그의 스승의 도덕적, 신앙적 수준밖에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구절의 의미는 바리새인의 제자들 역시 결국 지옥의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Gode).
6:41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 - 이 부분은 다음절의 '네 눈 속에 있는 들보'와 내용상 대조를 이루는데, 이것은 소경된 인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왜곡된 비판 습관을 뚜렷히 부각시키고 있다. 즉 티는 크기에 있어서 들보에 비할 바가 못 되고, 더구나 들보가 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된 과장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마 7:4,5).
6: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 -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남의 죄를 지적하는 부분이 티끌이라면, 자신들이 시정해야 할 죄악은 들보에 해당할 만큼 크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판의 화살을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외식하는 자. - 이것은 바리새인의 별칭이라 할 만큼 자주 사용(눅 12:56; 13:15)된 말로, '외식하는 자'(휘포크리테스)는 본래 '연극 배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기서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6:43-49 믿음의 실천
앞 단락(37-42절)에서는 우리 마음대로 타인을 종교적으로 정죄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은 평지 수훈의 마지막 교훈으로 나무와 열매, 집과 주초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어떠한 모습인지를 가르쳐 준다. 첫 번째 비유는 나무와 열매의 비유(43 -45절)로, 이 비유는 좋은 나무를 좋은 열매로 아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그의 행위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산상 수훈의 마 7:16-18과 병행을 이루는데 어구의 순서만 조금 바뀌어졌다. 하여튼 이 비유는 사람의 선한 행위가 선한 마음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으로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롭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두 번째 비유는 집과 주초의 비유(46-49절)로 참된 제자의 모습은 외형적인 모습이나 종교적 형식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교훈과 가르침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만족에만 매달려 참된 결실을 맺지 못하는 외형적 신자들을 경계하는 교훈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이런 자들은 결국 주님의 날에 영원히 심판받는 자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마 7:23). 사실 예수님의 교훈과 말씀이 많은 이들에게 권위가 있는 것도 바로 자신이 선포하신 교훈을 직접 몸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몇 년을 더 믿었고 주님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믿고 아는 바를 얼마나 신실한 생활로 실천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마 12:50).
6: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 이 구절의 '격언'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한국 속담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열매'는 각 사람의 '언행'을 가리키는데, 이것으로 사람의 속마음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사 8:20; 딛 1:9-12; 히 13:9; 요일 4:1-3; 요이 1:9-11).
6: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 전절의 의미를 부연 설명해 주는 구절이다. 즉 나무의 좋고, 나쁨은 오직 열매로만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나무가 잎이 무성하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합당한 과실을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는 쓸모없는 나무로 판명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 마 7:16에는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그 의미에 있어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또는 열매를 통해 나무를 알 듯 사람의 행실을 통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6:45 선한 사람은…선을 내고. - 이것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경우를 뜻한다.
악한 자는…악을 내나니. - 못된 나무가 못된 열매를 내는 경우이다.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 나무가 각각 그에 걸 맞는 열매를 맺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와 같이 사람도 평소 마음에 축적된 것이 언행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외식하는 자들이 아무리 위선적인 언행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려 든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그가 맺는 열매, 즉 악한 소행으로 인해 폭로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6:46 주여 주여 하면서도. - 본절부터 마지막 49절까지는 평지 수훈의 결론에 해당하는데, 이 부분은 흔히 '두 건축자에 대한 비유'로 불리운다(마 7:21,24-27). 특히 본 비유는 43-45절에서 기록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을 재차 강조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주' (퀴리오스)라는 호칭은 구약의 '여호와'와 같이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는 의미로 불리워진 말로 사용되어졌다.
어찌하여 … 행치 아니하느냐. -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주'(Lord)로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실패했던 것 같다. 예수님의 반문은 이를 증명해 주는데, 사람들의 이런 이율배반적인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6: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 - 예수님께서 진정 원하는 사람은 본절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사람이다. 즉 먼저 예수님께 나와야 되고 다음은 예수님의 교훈을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그 교훈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참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겠다. 특별히 여기서 사용된 단어 '듣고'(아쿠온), '행하는'(포이온)은 모두 현재 분사형으로 계속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즉 믿음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6:48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 - 이는 전절의 사람을 건축자를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병행 구절을 보면 반석과 모래라는 천연의 두 기초에 비유하였으나 누가는 같은 땅위에 하나는 파고 또 깊이 들어가 반석까지 내려가 짓는 것과, 또 하나는 그냥 땅 위에 짓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이는 유대인의 집짓는 풍습과 이방의 집짓는 풍습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 듯하다. 어쨌든 전자의 경우는 인간의 노력면이 더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실천을 집의 기초에 비유한 것은 양자가 공통적이다. 결국 반석 위에 주초를 놓았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신앙의 터를 굳게 한 자의 경건한 신앙을 묘사한 것이다.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요동케 못하였거니와. -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주초를 놓으면, 비록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난다해도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이렇듯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롬 9:33; 고전 3:11;10:4; 벧전 2:6) 기초를 놓은 사람은 심판의 때가 닥쳐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후의 심판 날에 심판관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여 말씀대로 실천한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은총을 베풀 것이기 때문이다(살전 2:19,20; 3:13 ; 살후 1:10; 딤후 4:8; 딛 2:13,14; 계 11:15-18; 17:14; 19:6-8).
6: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 - 여기서 사용된 단어의 시제는 전부 동작의 일회성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인데, 이는 47절의 단어가 계속적인 동작을 보여 주는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된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이들이 예수님의 교훈을 듣되 깊이 신뢰하지 않고, 건성으로 여기는 사람들임을 보여 준다.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 -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들이 기초 없이 맨 땅에 집을 짓는 건축자에 비유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건축된 집은 평소에는 반석을 주초로 지은 집과 하등의 차이가 없이 보일런지 모르지만, 심판의 탁류가 급류가 되어 부딪히게 될 날에는 기초가 없음으로 인하여 그 황폐함이 매우 심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연구 자료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예수 논쟁
예수의 공생애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우리 주 예수의 강림을 기점으로 구약이 신약으로 성취 확장되는 구속사의 실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다. 오히려 구약 전체가 아니라 그 일부 내용만을 유대 민족의 입장에서 그리고 인본주의적으로 곡해한 유대교의 오류에 집착함은 물론 진리와 정의를 부르짖는 예수의 사역이 자신들의 당장의 정치, 종교적 이익에 위배되자 무조건 그를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의 공생애 내내 예수의 행적과 말씀에 대하여 계속 논쟁을 제기하였다. 또 때로는 주께서 그들의 무지를 들어내시고자 논쟁의 형식으로 교훈을 주시기도 하셨다. 이에 예수의 공생애 중에 있었던 여러 논쟁들은 주의 복음 자체와 이의 구약 및 유대교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바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종교 지도자들의 논지 | 예수의 논지 | 핵심 교훈 | 관련성구 | |
안식일 논쟁 |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는 일, 병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 형식적인 율법 준수보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좇아 행함이 더 중요함 | 마 12:1-3 막 2:23-3:6 눅 6:1-11; 13:10-21 14:1-6 |
표적 논쟁 |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라 |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 완악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표적을 구하기보다 믿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가 중요함 | 마 16:1-4 막 8:10-12 |
예수의 자기 증거 논쟁 | 네가 너를 위해 하는 증거는 참되지 않다. | 나와 내 아버지가 함께 나를 증거하느니라 | 성부, 성자의 동시 증거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진정성을 입증함 | 요 8:12-20 |
수전절 논쟁 |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시요 |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이들이 나를 증거하느니라 | 예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이 그가 그리스도임을 입증함 | 요 10:22-39 |
유전 논쟁 |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 하여 장로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 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형식적인 율법 중부보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중요함 | 마 15:1-20 막 7:1-23 |
바알세불 논쟁 |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느니라. | 예수께서 귀신을 쫓으신 것은 사단의 나라가 폐하여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한 증거 | 눅 11:14-26 |
예수의 권위 논쟁 | 네가 무슨 권세로 성전 숙정과 가르치는 일을 하느뇨 |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 편견과 완고함을 버리고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려야 함 | 마 21:23-27 막 11:27-33 눅 20:1-8 |
세금 논쟁 |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 가이사의 것은 가시아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성도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시민으로서의 의무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됨 | 마 22:15-22 막 12:13-17 눅 20:27-40 |
부활 논쟁 | 죽은 자의 부활이 있습니까? | 너희가 성경도, 한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도다 | 하나님을 믿는 다면 그분의 약속과 능력을 모두 믿어야 함 | 마 22:23-33 막 12:18-27 눅 20:27-40 |
제 1계명 논쟁 | 율법 중의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행하는 것은 율법 전체를 준수하는 것임 | 마 22:34-40 막 12:28-34 |
그리스도의 신분 논쟁 | 그리스도는 단지 다윗의 후손일 뿐이다. |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 예수는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으나 그의 신분은 다윗의 주가 되는 제 2위 성자 하나님이심 | 마 22:41-46 막 12:35-37 눅 20:41-44 |
금식 논쟁 |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과는 달리 당신의 제자들이 금식 않는 이유는? | 신랑과 함께 있으므로, 신랑을 빼앗길 날에 금식할 것이니라 | 신랑된 그리스 안에서 성도의 생활을 구약 시대 성도들의 생활과 질적으로 다름 | 마 9:14-17 막 2:18-22 눅 5:3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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