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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 및 세례인 요한의 예수 증거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적 개관
본장은 예수께서 본래 제 2위 성자 하나님으로서 절대 신성(神性)을 가지신 존재였으나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입증함으로써 결국 예수의 그리스도 직과 예수 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의 절대성을 확증하기 위하여 기록된 요한복음의 전반부에서 먼저 예수 공생애의 여러 사건 중에서도 이상의 사실을 잘 입증하는 여러 자료들 곧 예수의 관련자들의 증언들과 예수 자신이 행한 표적들과 자기 계시를 제시하는 1:19-12:50까지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1:19-12:50은 예수의 공생애 개시 기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시어 이제 곧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 전날 밤인 최후의 만찬 직전까지의 사건 중 이상의 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주요 기사들을 대략 연대순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전장에서 요한은 예수의 첫 표적인 가나 혼인 잔치의 이적과 최후의 표적인 십자가 수난과 부활에 대한 주님의 예언을 소개함으로써 예수의 행하신 모든 표적들이 후일 신약 성도들의 믿음의 확실한 근거가 됨을 보여 주었다. 이어 본장은 구속사적 진리의 핵심인 중생을 통한 참 구원의 길라 구원의 선행 요건인 성도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장으로서 그 개략적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반부 1-21절은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는 부분으로서, 처음에는 중생(重生)의 본질에 대해(1-8절) 논의되기 시작했으나 점차 성도가 중생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서 먼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그리스도께서도 구속 사역의 성취를 위해 십자가 수난을 받으셔야 하며, 또한 성도가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를 믿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9-15절)과 이를 믿는 자의 받을 영생의 축복과 믿지 않는 자가 받을 심판의 저주(16-21절)를 논하는 방식으로 점진적으로 중생, 중생의 선행 요건으로서의 성도의 믿음, 믿음의 결과에 관한 구속사적 진리를 하나하나씩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최종 성취로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the God)에 성도가 들어가기 위한 절대 조건으로서 물과 성령을 통한 거듭남, 곧 중생(重生)의 진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태초에 첫 인간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선악과 언약을 범하였을 때 그는 그 언약의 저주 조항대로 죽음의 심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 그가 경험한 죽음은 육적 죽음이 아닌 영적 죽음이었다. 이후 아담의 후손인 인류 전체는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출생하게 되었고(엡 2:1),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원죄(原류)와 스스로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는 자범죄(自犯罪)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엡 2:2. 3). 구약 선민인 이스라엘의 패역의 역사는 결국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도 행할 수 없는 전적 무능, 전적 부패의 상태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롬 3:10,11,23). 이에 아담 이래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겠다 하신 약속과 예언, 곧 구약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으로 일단 성취하시고 구속 역사의 최종 성취인 천국에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들이우기 위해 예수의 부활 승천과 재림의 중간 기간 동안 먼저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에 있는 자들의 영혼을 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본질상 영이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그 영혼이 산 자(Living Soul)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시고 그로 말미암은 영혼을 살리는 중생의 사역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후반부 22-36절은 요 1:19-34에 이어 다시 한 번 세례인 요한이 예수가 참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 사실(22-30절)과 보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참 메시야(Messiah)이시며 오직 그를 믿는 자에게만 영생이 주어짐을 기록한다(31-36절).
여기서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신 자, 곧 창조자이시며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주권자로 소개되고 있다(31절). 이는 요 1:1-3에서 이미 선언적으로 언급했던 바의 내용과 연관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곧 태초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의 창조 사역과 대칭되는 재창조 사역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천지 창조가 원창조(原創造)라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원창조 목적에서 이탈된 것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회복케 하시는 사역은 재창조(再創造) 사역인 것이다. 이 같은 재창조 사역은 일단 성부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 이후 곧 계획하셨던(창 3:15)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성취로 말미암아 그 확고한 근거가 세워지게 된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그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과를 계속해서 모든 피조물들과 인간에게 적용하심으로써 결국 구속사의 최종점인 천국의 도래와 함께 재창조 사역은 완성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구속 사역의 성취를 위해 초림하시기 전까지 인간과 함께 모든 피조물이다.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지배하에 탄식하며 고통 받았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초림과 구속 사역의 성취로 먼저 그를 주로 영접한 모든 성도들이 이 모든 고통에서 영적으로 되었으며 이제 구속의 최종 성취이자 재창조 사역의 최종 성취인 천국의 도래를 고대하며 그 날에는 영육 간의 완전한 해방과 함께 영원한 영광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소망과 기쁨 중에 있게 된 것이다(롬 8:18-25). 그리고 우리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는 고백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외울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
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 증거
22 〇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31 〇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 쳤느니라
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3:1-21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를 통한 영적 교훈
1. 중생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3절)
2. 중생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것임(3-17절)
3. 중생은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임(5-8절)
4.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누구든지 중생을 얻음(15절)
5. 중생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시인함으로써만 가능함(16절)
6.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사랑 때문임(16,17절)
7. 구원받은 자는 마지막 날 심판 때 결코 정죄당하지 않음(17절)
난제 해설-3:13,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구약성경을 보면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1-12)가 승천했다는 기록이 분명히 나오는데 본문은 이것과는 모순이 된다.
둘째, 예수께서는 아직 지상에서 공생애 중이신데 마치 이미 하늘에 올라간 것처럼 기록한 본문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이 같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본문은 잘못된 것인가? 이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인가? 만약 있다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문제 해결을 위한 제 견해들
이상의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학자들의 많은 시도가 있었다. 제 견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과거 시제인 '올라간'을 미래 시제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
즉 본문에서 '올라간'(헬, 아나베베켄)이 단순과거형으로 쓰였는데 그것을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한 확실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실상은 미래 시제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하늘에서 내려 왔다가 다시 하늘로 갈 자는 인자 이외에 아무도 없다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리는 있으나 '올라간'을 미래 시제로 해석해야 한다는 근거가 매우 빈약하다.
② 본문이 본서 저자의 주석적 첨가라는 견해:
즉 요한이 본서를 기록한 것은 예수 승천 훨씬 이후이다. 따라서 저자가 주석적으로 첨가 기록하였기 때문에 본문이 과거 시제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직접 화법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의 준거도 희박하다.
➂ 예수께서 자신의 초자연적 경험을 말씀하신 것이라는 견해 :
즉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중에도 수시로 성부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시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시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신비주의적 해석일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시기 전에는 영광을 받지 못하셨다는 성경의 기록과도 배치된다(7:39).
④ '올라간'을 '하늘에 계셨던'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
즉 본문은 미래에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하늘에 계셨던 자로서 헌재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있는 자는 인자 이외에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후 문맥의 상황으로 볼 때, 특히 12절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적절한 해석인 것으로 보인다. 즉 하늘에 속한 비밀들은 하늘에 계시다가 내려오신 이 곧 인자 이외에 아는 자가 없음을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견해는 '올라간'(헬, 아나베베켄)이 분명 올라가는 행위를 나타내는 용어이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난점이 있다. 그러나 많은 사본에서 '아나베베켄' 대신에 '~에 있었던'이라는 뜻의 '온'( ), 영어의 '워즈'(was)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 이 해석을 뒷받침 해주고 있다.
2. 결론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상의 견해 가운데 ④의 견해가 옳다. 즉 본문은 예수께서는 성육신하여 세상에 내려오시기 이전에 하늘에 계셨던 자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12절의 말씀과 연관지어 볼 때 '중생'( )과 같은 천국의 비밀은 오직 하늘에 계시다가 성육신하여 세상에 내려오신 인자 이외에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인자가 하는 말을 듣고 하늘의 비밀을 믿으라는 권고의 말씀으로 본문을 의역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주의 말씀의 신적 근거를 증거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보감-3:3 성도의 7대 특징
1. 거듭난 자(요 3:3)
2. 죄에서 풀린 자(요 8:36)
3. 의롭게 된 자(롬 3:24)
4. 하나님의 양자된 자(롬 8:15)
5. 하나님과 화목된 자(고후 5:18)
6. 깨끗케 된 자(요일 1:7)
7. 천국에 들어갈 자(계 21:1-7)
원어연구 - 3:3, 거듭
이에 해당하늘 헬라어 원어는 '아노덴'으로서 이 단어는 '~위에'를 뜻하는 '아노'에서 유래 하였다. '아노덴'은 개역 성경에서 주로 '위로부터'(마 27:51; 약 3:15.17), '근원부터'(눅 1:3), '일찍부터'(행 26:5)라는 뜻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만 유독 '거듭'(again)으로 번역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역본들이나, 공동 번역 성경에서도 본절의 '아노덴'을 '다시'(again KJV, NIV, Living Bible)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 나타난 '거듭'의 정확한 의미는 '위로부터 다시', '근원적으로 처음부터'가 된다. 따라서 본절에서 '사람이 거듭난다'는 것은 니고데모가 중생의 도(道)를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게 질문한 것같이 사람이 모태(母胎)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죄로 인해 죽은 영혼을 하나님이 다시 새롭게 살리심으로 그 영혼이 다시 살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거듭남', 곧 '중생'(重生)이란 위로부터, 즉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에 의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고후 5:17),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주셨던 영적 생명을 다시 얻게 되는 것(엡 2:5)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3:5-8 성도에 대한 성령의 사역
본 도표는 성령께서 직접 성도들에 대해 행하시는 사역들만을 모아 놓은 것이다. 반면에 성도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사역, 즉 보혜사로서의 성령 사역에 대해서는 요 16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1 | 거듭나게 하심(요 3:3,5) |
2 | 그리스도를 증거하심(요 15:26) |
3 |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요 16:13) |
4 | 성령 세례를 주심(행 2:17-41) |
5 |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심(롬 5:5) |
6 | 죄와 사망의 법 에서 해방하심(롬 8:2) |
7 | 성도 안에 내주하심(고전 3:16) |
8 | 하나님 자녀임을 증거하심(롬 8:16) |
9 | 거룩케 하심(롬 15:16; 살후 2:13) |
10 | 하나님 은혜를 알게 하심(고전 2:12) |
11 | 은사를 주심(고전 12:3-11) |
12 | 성도를 연합케 하심(고전 12:13) |
13 | 인치심(고후 1:22) |
14 | 자유케 하심(고후 3:17) |
15 | 구원의 보증이 되심(고후 5:4,5) |
16 | 성령의 열매를 맺게하심(갈 5:22,23) |
17 | 성도 간에 서로 교제케하심(빌 2:1) |
3:1-21 예수와 니고데모의 대화
앞장에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 행하신 첫 번째 표적(요 2:1-11)과 또 성전을 숙정하신 일(요 2:12-25)을 통해 증거된 그의 신성(神性)과 사역의 성격에 관해 살펴보았다. 그에 이은 본문은 계속해서 예수의 초기 유대 사역 시(요 2:12-3:36)에 일어난 일로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공로 곧 율법의 준수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던 바리새파적 유대교를 대표하는 인물 니고데모에게 구원을 얻는 참 중생(重生)에 관해 가르치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즉, 정통 바리새인이었으며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가 제기한 질문(1,2,4.9절)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3:5-8,10-21절) 형식으로 서술되는 본문은 하나님 나라가 중생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중생'이란 니고데모가 생각한 것처럼 모태로 다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육체적이고 생물학적인 것(4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상실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에 있어서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영적인 것을 가리킨다(5절).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이 중생이며(고후 5:17), 바로 그와 같은 영적 체험을 한 자라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친히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온 자신,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라고 밝히 말씀하신다(13-16절). 즉 누구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구속 사역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롬 3:23-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 곧 혈통적으로 하나님의 선민(選民)임과(마 3:9) 그 정체성(identity) 확인의 요건인 율법 준수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였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선행이나 구제, 하나님을 위한 봉사 등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이를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마 19:16). 그러나 본문을 포함한 모든 성경은 예수 외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 . 12)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정수(精髓)인 구원의 진리에 관해 가르쳐 주고 있는 본문 역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거듭거듭 천명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요 1:19-12:50에서 사도 요한이 강조하고 있는 주제가 곧 '예수가 하나님 아들되심의 증거'이다.
3:1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대화가 11차례에 걸쳐 나타나는데(요 4: 5-26,31,38; 5:10-47; 6:25-65; 7:14-36; 8:12-59; 9:35-41; 10:22-39; 12:20-36; 13:1-16) 그 중에 첫째가 본문의 것이다(Bengel, Plummer). 그 가운데 본절은 이 대화의 상대자가 누구인가를 소개하고 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승리'(니케)와 '백성'(데모스)의 합성어로서 그 뜻은 '백성의 정복자'이다. 이 인물은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된 일이 없으나 본서에서는 3차례 나타난다(1절; 요 7:50, 19:39). 또한 이 사람은 요세푸스의 역사서에서 아리스토브라스가 로마의 장군 폼페이에게 보낸 사자로 나오는 니고데모, 그리고 탈무드에 등장하는 니고데모 벤고리온이란 인물과 동일인이 아닌가 추정되기도 한다. 혹자는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멸되던 당시 나퀴드몬(Naqidmon)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40년 전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와 동일인 일지도 모른 다고 보기도 하나 확인할 수는 없다(Moutefiore, Loewe). 여하튼 본서에 나타난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이었고. 유대의 관원, 즉 70인 공의회(Sanhedrin)의 회원이었고(요 7 : 40), 율법에 정통한 랍비였던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10절). 이처럼 많은 학식과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예수를 찾아 온 것은 성전 숙정 이후 예수를 경원시하던 유대 교권주의자들을 볼 때 경이적인 일이
라고 할 수 있다. 아마 니고데모는 메시야 왕국이란 국민적 소망을 갖고 사는 교양있고 사색 깊은 유대인 이었으므로 예수를 통해서 메시야 왕국의 시민될 자격을 알고 싶어서 찾아왔을 것이다(Westcott).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 니고데모가 왜 밤에 예수를 찾아왔는지에 대하여는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는 당시에 이미 예수에게는 세인(世人)의 이목(耳目)이 집중되어 있었고(요 2:23) 예수를 적대시하는 교권주의자들도 주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중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는 괜한 오해를 사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밤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때로는 같은 이유로 그를 비겁한 자라고 책망하기도 한다. 둘째는 예수께서 낮에는 여러 사람을 가르치시며 이적을 행하시는 등 너무 바쁘시기 때문에 진지한 대화를 차분히 나누기 위해 밤에 찾아왔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셋째는 당시 랍비들이 밤늦게까지 연구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로 보아 니고데모가 밤에 신학적 토론을 위해 예수를 찾아온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그가 '밤에' 찾아온 정확한 이유는 밝힐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니고데모가 예수를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밤 시간을 택해 찾아올 만큼 그의 마음이 예수에게 쏠려 있었다는 것이다.
랍비여. - 당시 니고데모는 존경받는 랍비였으나 예수는 30세쯤의 젊은이였고 랍비가 되기 위한 정규적인 과정을 마치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니고데모와 같이 정식 랍비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동안 율법 교육을 받아야만 했으며 나이도 40세 이상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도 정식 랍비이며 연장자였던 니고데모는 예수께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로 보아 그는 높은 인품과 세련된 교양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 니고데모가 '내가․․․․'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가~'라고 말한 것은 그가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더불어 예수를 방문했다고 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의 전반부는 예수와 니고데모 간의 대화이나 후반부(11-21절)는 예수의 일방적인 가르침이며 그곳에서 '너'가 아니라 '너희'란 복수형을 사용한 점에서도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와 '너희'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예수님의 표적을 목격했던 여러 사람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 랍비에는 '람', '랍비', '랍반'이란 3가지 계층이 있었다. '랍'보다는 '랍비'가, '랍비'보다는 '랍반'이 더 높다. 그러나 가장 높은 자는 이러한 칭호로 불려지지 않는 자인 것으로 전해진다. 즉 율법 교육을 받은 랍비 계층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선지자가 더 권위 있다란 의미이다. 이런 맥락에서 니고네모는 예수를 단순한 선생 이상의 존재인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인정하는 말은 아니고, 구약의 '참 선지자'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 니고데모가 예수를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으로 믿은 까닭은 유월절 기간 중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표적을 목격하였기 때문이다(요 2:23). 그리고 이와 더불어 산헤드린 공회원이란 특수 신분을 이용하여 과거에 세례인 요한에 대한 조사 위원회 보고서(요 1:19-27)를 보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Westcott) .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 니고데모는 예수의 신분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반면(2절) 예수는 그에게 중생을 통한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심으로 관심의 방향을 바꾸신다. 그리고 이러한 교훈의 중요성과 신뢰성을 강조하기 위해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을 거듭 밝힌다(1:51주석 참조).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 '거듭난다'에서 '거듭'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덴'( )은 ① '꼭대기에서'(마 27:51; 막 15:38; 요 19:23) ② '위에서부터' 곧 '하나님께로부터'(31절; 요 19:11; 약 1:17) ③ '처음부터', '완전히', '철저히'(눅 1:3; 행 26:5) ④ '다시', '두 번째의'(갈 4:9) 등의 용례로 사용된다(Vincent). 결국 '아노덴'은 '하나님께로서 새롭게'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의도가 이와 같이 육적인 시도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남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자격으로 밝힌 반면, 니고네모는 당황했던 것(4절)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이 단어를 '다시'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사람이 모태로부터 다시 나는 두 번째 출생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단지 법적인 절차에 의해 유대교로 개종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의 노력이나 각성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자아(自我)가 하나님 은혜와 능력으로 새롭게 변하는 사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는 필수적 요청이다(Calvin).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하나님 나라'는 본서의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말은 아니다. 단지 본절과 5절에서만 볼 수 있으며 요 18:36에는 이를 '내 나라'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단순히 객관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기 보다는 이것이 바로 그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임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이는 눅 서론 특별자료 '하나님 나라의 이해'를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이돈'( )은 '경험하다', '참여하다', 또는 '인식하다'는 뜻도 지닌다. 따라서 본 구절의 의미는 단순히 하나님 나라는 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눅 9:27). 만일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거나, 참여하거나 소유하고 누릴 수 없는 것이다(눅 2:26; 9:27; 요 8:51; 행 2:27; 계 18:7).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 예수의 천상의 지혜를 담은 대답에 대하여 니고데모는 영적 통찰력이 없음으로 인하여 너무나 어리석은 오해를 하고 있다(Bernard). 한편 본절에 나타난 니고데모의 질문을 예수님의 말씀이 상식에 맞지 않음에 대한 조소(嘲笑)로 보는 견해(Dods)도 있다. 그러나 어떤 관점을 취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기서 그는 중생의 도리를 육적으로 이해하려는 어리석음을 보였다는 것이다. 비록 그는 율법에 박식한 바리새인이었으나 영적 통찰력에 있어서는 구원 도리의 초보적 단계를 이해치 못할 정도로 나약했던 것이다.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인 '거듭난다'고 하는 것에(3절)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따라서 구원의 조건에 대한 이 중대한 발언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즉 '성령으로 난다'란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비교적 분명 하나 문제의 핵심은 '물'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다. 여기에 대해 칼빈(Calvin)은 '물과 성령'은 동일한 하나의 행동 즉, 성령에 의한 정화작업을 뜻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결과적으로 '성령과 성령으로'가 되어 부자연스러운 중복을 보인다. 반면 아이론 사이드(Iron Side)는 이 물을 '성경 말씀'으로 본다. 그러나 물을 성경과 관련시킨 경우가 없으므로 이 주장도 성경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 다음 비교적 자연스런 설명 중 하나는 이를 세례로 보는 것이다(Augustine, Chrysostom, Westcott, Godet, Plummier). 이 주장의 경우 다른 많은 성구와도 조화가 된다(겔 36:25; 막 16:16; 행 2:38; 딛 3:5,6). 또한 이는 성경에서 물의 용도와도 관계된다. 즉 속죄를 위해 드려지는 유대인의 희생 제사에 있어서도 물은 깨끗게 하는 상징으로 필수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 유대인의 한 분파였던 엣세네파(Essenes)에서도 개종자를 받아들일 때 물세례를 꼭 행하였다. 그러므로 '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죄를 회개함으로 씻음 받고, 그 다음에 성령에 의해 내적이며 영적인 것으로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물은 성결을 상징하고, 성령은 살리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둘은 동위적(同位的)이며, 상보적(相補的)이다. 그러므로 '물'이 무엇을 상징하든 간에 본절의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다. 결국 강조점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신비스러운 연합은 성령에 의한 세례로써 성취되나, 외부적으로 체험하는 물세례는 이 사실에 대한 상징적 의식인 동시에 자신과 타인에 대한 선포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물세례와 성령세례'에 관하여는 행 8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 '육'(사릌스)과 '성령'(프뉴마)이 첨예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요한의 글(요 8:15; 요일 2:16)과 바울의 글(롬 8:3-9)에 종종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사릌스'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있는 인생의 부패한 본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사릌스'는 단지 육체적 기원을 갖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구원 영역에서는 어떠한 능력도, 우선권도 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중생은 오로지 '성령'의 역사에 의해 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으로 만드신 것과(창 2:7) 꼭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령에 의하여 사람들을 영적 생명을 가진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신다.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 '기이히 여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다우마조'는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미치지 못함으로 인해 야기되는 놀라움'을 뜻한다(Bemard). 한편 본문에서 '네'는 실제로는 '너희'(휘마스)로서 직접 예수와 대화를 나누는 니고데모 뿐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모든 인류를 말한다. 또한 '거듭남'(아노덴)은 수동태로 쓰임으로써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즉 인간의 관점에서는 수동적으로 구원이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따라서 율법 행위, 즉 행위에 의한 구원 관념에 익숙해 있던 니고데모는 구원은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받아야 하며.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에 상당히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를 자연 현상인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마도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밤늦은 시간인 그 때 높은 산지에 위치한 예루살렘에는 밤바람이 불었을 것이다(Tholuck). 이에 예수께서는 성령의 역사의 신비를 '바람'에 연결해 설명하신다. 이는 친근한 자연 현상을 영적 진리를 깨우치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점에서 큰 효과를 지닐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바람과 관련시키는 것은 구약의 전통과도 관련을 갖는다. 즉 '성령'을 의미하는 헬라어 '프뉴마'는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와 함께 둘 다 '바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뉴마'는 신약 성경에 약 370회 가량 등장하는데 대부분 '영'(靈) 또는 '성령'으로 사용되고, 본문과 시편 104:4을 인용한 히 1:7에서만 '바람'으로 사용된다. 여하튼 헬라어 용법과 히브리적 사고에 익숙하던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이와 같이 성령과 바람을 관련시켜 설명하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에서 '바람'이 '성령'에 비유된 이유는 첫째, 바람이 어디서 시작되어서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듯이, 성령의 역사도 그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바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 현상의 결과는 보이듯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그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바람이 인간의 힘으로 주관할 수 없고 자기 맘대로 불듯이, 성령의 역사도 인간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예수께서는 바람으로 성령을 설명하신 것이다.
3: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 원래 랍비였던 니고데모가 전과는 달리 이제 배우는 자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비유를 통한 예수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의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종교지도자이면서도 구원에 이르는 길의 초보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의 고정관념(固定觀念)이 참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의 전통적 사고대로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창 17:1-8)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행. 서론 특별자료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참조하라, 이로 보건대 참된 진리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비워야 함을 알 수 있다.
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 '선생'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다스칼로스' 앞에 정관사 '호'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스라엘의 저명한, 혹은 권위 있는 선생일 것으로 추정된다. 혹자는 여기에 사용된 관사를 니고데모가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현자(賢者)로 인정받았던 차캄(Chakam)과 같은 직책에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Schotthen Lucke). 또 다른 이는 이 관사는 그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백성의 공적인 교사였음을 표시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Westcott). 여하튼 여기서 사용된 정관사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일 뿐 아니라 그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으로서 당연히 구원에 관한 진리를 좀 더 잘 알고 있어야만 했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Farrar).
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 예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우리'와 '너희'라는 복수형을 사용하신다. 먼저 여기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첫 번째 히브리인들이 비록 단수이나 복수형을 사용하여 대상을 높이는 표현 방법인 '권위의 복수'로서 예수 자신만을 말하는 것이다. 즉, 권위 있게 말씀하시기 위해 복수형을 사용하셨다는 주장이다(Lutoke, Meyer, Plummer). 둘째는 예수 자신과 동시대에 살았으며 예수와 동일한 교훈을 전했던 세례인 요한을 가리키므로 복수형을 사용하였다는 견해이다(Luthardt, Weiss). 셋째는 '삼위일체' 개념에 있어서의 '삼위' 모두를 가리키기 위해 복수형을 사용했다는 견해이다(Stier, Bengel). 넷째는 선지자들 전체를 가리키기 위해 복수형을 사용했다는 견해이다(Luther, Tholuck). 다섯째는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이야기를 나누실 때 예수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는데, '우리'란 바로 그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Hengsenberg, Godet, Westcott, Meulton). 이러한 여러 견해 중에 당시 예수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제자들과 동행하여 예루살렘에 올라왔으므로 제자들까지 말하는 주체에 포함시켜 표현했을 것이라는 다섯 번째 견해가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너희'가 가리키는 자들은 비교적 분명한데, 니고데모를 포함하여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면서도 예수를 믿지 못하여 구원에 이르는 참 신앙에 속하지 못하는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또한 니고데모와 더불어 그 자리를 함께 한 다른 사람들도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 도다. - 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많은 선지자를 보내어 구원의 도리와 메시야의 출현을 예언케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까지도 구원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메시야를 구원의 주로 영접 하지도 않았음을 보여 준다.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 여기서 예수께서는 다시 복수형이 아닌 단수형으로 이야기하심으로써 진리의 선포자로서 자신을 부각시키신다. 한편 여기서 '땅의 일'을 지구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자연적인 현상들로 보고, '하늘 일'을 '구원 사건'과 같은 초월적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Hunter). 또 어떤 이들은 '땅의 일'과 '하늘 일'을 앞부분에서 언급된 바람 비유와 그 해석을 가리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웨스트콧(Westcott)은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중생의 경험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보하는 것이 '땅의 일'이요, '하늘 일'은 하나님의 단독 사역으로서 예컨대 성삼위의 속죄의 계획, 성육신의 작정, 성령의 사역에 의한 궁극적 구원의 성취 등을 의미한다고 본다. 따라서 마지막 견해를 취할 경우 결국 '땅의 일'은 세상에서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구원의 착수를 의미하고, '하늘 일'은 그 구원의 궁극적 완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니고데모는 '구원사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중생'(重生), 즉 거듭남의 진리에 관해서도 모르니 '구원'의 진정한 실체라 할 수 있는 '하늘 일'도 모를 것이라는 책망조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 이 본문을 단순히 예수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해석하면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구약에는 에녹(창 5:24)과 엘리야(왕하 2:9-11)가 승천했다는 기록이 있고, 앞으로 신자(信者)들도 모두 부활하여 천국 생활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난제는 본문의 동사의 시제를 살펴볼 때 해결될 수 있다. 즉 '올라간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베베켄'( )은 현재완료형으로 현재 및 과거를 말하고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를 의역하면 '하늘에 계신 자'(ben in heaven)로 이해할 수 있다(Vincent). 즉 본절은 12절에 나와 있는 '하늘 일'을 말할 수 있는 분은, 하늘에 계셨기에 모든 것을 보고, 체험하시고, 알고 계시며 지금은 하늘에서 내려 온 상태, 즉 성육신하신 인자뿐이라는 뜻이다(본장 자료노트 참조).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 13절에서 자신 외에는 구원의 진리에 관해서 완전히 알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이제 민 21:4-9의 내용을 들어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구속 사역의 핵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과거 역사를 들어 설명하신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여호와를 원망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가 만든 놋뱀을 장대 끝에 달아 놓고 그것을 우러러 본 사람들은 모두 나음을 받았다. 이 사건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에 대한 가장 좋은 예표이다. 여기서 불뱀은 사탄이라고 불리는 '옛뱀'(계 20:2)을, 물려 죽음의 위기에 몰린 사람들은 마귀의 꾐에 빠져 범죄함으로 죽게 될 죄인을 상징한다. 장대에 달려 이를 쳐다 본 사람들에게 구원을 준 구리뱀은 세상의 죄를 짊으로써 생명을 구한 예수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를 우러러 존경하며 믿을 때 비로소 구원받게 됨을 보여 준다. 물론 늘 그러하듯 여기서도 모형이 원형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턴(Pattern)만을 제시한다. 즉 민수기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함으로써 육체적 죽음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인류가 죄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노출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뱀은 스스로에게는 고치는 능력이 없으나, 그리스도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러나 이것이 죽음에서의 구원이란 측면에서는 동일한 패턴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휩소데나이' 는 요한복음에서는 항상 십자가와 관련되어 사용된다(요 8:28; 12:32,34).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승천과 같이 높아지심을 가리키는 말씀으로도 사용된다(행 2:33; 빌 2:9). 따라서 본문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데 대해 파울루스(Paulus)는 예수께서 자기 자신이 최종적으로 영광스럽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궁극적으로 십자가는 바로 예수께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의 디딤돌이므로 여기서는 일차적으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Bleek, Lechler, Godet). 그러나 결국 이 단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능력과 영광의 보좌로 높이 올라갈 것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 예수의 모형인 구리뱀을 쳐다봄으로써 이스라엘이 나음을 입었듯이, 구리뱀이 예표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 이스라엘로 부름 받은 신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여기서 '믿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은 현재분사형으로서 '믿음'이란 일회적인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행위임을 알려준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 이는 믿는 자에게 임할 결과이며 동시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시는 목적이기도 하다. 한편 '영생'은 본서는 물론 그의 저작물 전체에 걸쳐 요한이 가장 의미 있게 다루는 주제이다(16,36절; 요 5:24; 6:40,47,54; 요일 3:13; 5:12). 여기서 '영생'이란 단순히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는 삶이란 양적 의미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란 질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영생이란 미래와 관된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적 선물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한편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15절로 끝난 것으로 보인다(Erasmuss, Tholuck, Lucke, Westcott). 그리고 16절에서 21절까지는 계속 과거시제이므로 예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요한의 해석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러울 듯하다(Robertson).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와 같은 해석학적 논평을 자주 사용한다(16-18절; 요 12:37-41) .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본절은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을 포함한 전체 성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담고 있기 때문에 루터(Luther) 이래 '작은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 혹은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위로의 말씀'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성공회 예배문). 한편 여기서 '세상'(코스몬)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함한 전 인류로서 과거 현재 ․ 미래에 살았고 살게 될 모든 인간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사랑은 흔히 유대인의 전통적 사고방식대로 이스라엘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롬 5:8; 고후 5:19). 하나님은 진실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 2:4). 또한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가페센'은 흔히 이야기하는 자기 희생적인 신적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의 동사형으로서, 복음서에서 사랑의 가장 숭고한 형태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독생자마저 내어놓으신 사랑과 계속적으로 인간의 언약함과 죄 성을 끝없이 참으시는 자기 희생적인 무한한 사랑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를 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또한 '이처럼'(후토스 가르)도 '그처럼 무한하게', 또는 '그처럼 헤아릴 수 없이 영광스런'이라는 뜻으로 우리를 사랑하사 영원 전부터 보여 주시고 십자가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 그처럼 큰 사랑이라는 의미이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 '독생자'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요 1:14의 주석을 참고하라, 여기서 '독생자'(모노게네)라는 표현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 사이의 특수한 관계를 드러낸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아들로서 동일한 신적 속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서 '주셨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도켄'은 '보냈다'(send)의 의미보다는 '주셨다'(give)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간접적으로 '대가를 받고 넘겨주다'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아브라함이 독생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듯이 온전히 드린다는 의미를 지닌다(Westcott). 즉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인류에게 주셔서 제물로 바치는 기회를 제공하셨던 것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하나님은 인류의 멸망을 방치(放置)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목적은 그를 영접함으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한편 '멸망'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폴뤼미'는 저자 요한이 자주 사용하는(10번) 단어로서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정죄로써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을 말한다. 또한 영생은 멸망과 반대되는 의미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완전한 영원한 삶을 가리킨다. 이러한 영생은 본문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독생자로 오신 '오직 그리스도'(solus Xristus)에 대한 '오직 믿음'(Sola Fide)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 이는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구호이기도 했다.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 본절은 놀라운 구원의 복음이라 할 수 있는 16절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이를 보다 보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초림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대인들이 생각하여 오던 바와는 많이 다른데, 그들은 메시야께서 오셔서 이방인들을 정죄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즉 메시야가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만을 구하며 그들을 적대하는 이방은 심판하시기 위해 오실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본문은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으며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성육신하셨음을 명백히 밝히는 것이다.
한편 '심판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노'는 '분별하다', '분리하다' 그리고 '정죄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며 광범위하게 쓰이는데 본절에서는 정죄를 받아 하나님의 구원에서부터 분리되어 형벌 가운데 처해진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와 극으로 대조되는 의미의 '구원'(소테리아)은 멸망의 위기 가운데 빠진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어 멸망 가운데 처한 자들에게 다시 살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함을 가리킨다.
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온 인류에게 있어서 멸망은 자연스런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죄를 이어 받았음은 물론 스스로 범한 자범죄로 인하여 죄인이 되었기 때문이다(롬 3:23; 히 9:27).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심판을 받고 정죄에 처해질 운명이다. 그런데 그들이 유일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을 위해서 오신 예수를 믿는 것이다(롬 8: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원래 정해진 심판을 받게 된다. 한편 여기서 '심판을 받은'(케크리타이)은 완료시제로 쓰여졌다. 이는 죄에 대한 심판은 이미 과거로부터 있어 왔고 그 판결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효함을 나타낸다. 즉 본절의 의미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비로소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대표인 아담의 범죄시로부터 벌써 심판이 선고되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용서의 기회요 방법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조차 거부함으로써, 그 심판이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 저자는 이제까지 설명해 왔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종합해서 확증하고 있다. 여기서 '정죄'로 번역된 단어 '크리시스'(심판)는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결정, 또는 언도(言渡)를 의미한다. 이 구절의 독특한 형식, '하우테 데 에스틴 헤 크리시스 호티'라는 것은 요한의 특유한 문장으로서 그가 쓴 다른 글에서도 많이 발견된다(요 15:12; 17:3; 요일 1:5; 5:11,14; 요이 1:6).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 - '빛'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스'(는 원래 발광체를 대표하는 '태양빛'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본서에서 이 말은 주로 어두움을 밝혀 스스로 드러내는 참 빛(요 1:9)이신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 반면 '어둠'에 해당하는 단어 '스코토스'는 단순히 어두운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빛과 차단된 완전한 어두움을 나타낸다(Westcott). 그러나 성경에서는 주로 도덕적이고 영적인 어둠을 나타내는 뜻으로 널리 쓰이는 단어이다(살전 5:5). 즉 성경에서 묘사되는바 이러한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이다(요 8:12; 12:35,46; 요일 1:6; 2:8,9,11). 그리고 '더'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혹자는 '더'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론'이라는 단어가 개역 성경 본문에서와 같이 '더 많이'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주님께서는 당시 영적 무지의 상태에 있었던 유대인일지라도 빛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랑을 시인하였다고 말했다(Lücke). 그러나 유사한 구문의 다른 구절들을 보면 이 단어는 부정의 뜻으로(오히려, 또는 도리어) 사용되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마 10:6; 막 15:11; 요 12:43; 딤후 3:4). 결국 본절은 당시 사람들이 참 빛 되신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것보다 오히려 영적 어두움에 머물러 있기를 좋아함으로 하나님께 정죄를 당한 것임을 보여 준다.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 20,21절은 신자와 불신자를 비교해 주며, 내재된 인격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행위와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해 준다. 한편 '악'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울라'( )는 '가치 없는', '사악한'의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신약 성경에서는 주로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다(Robertson). 세상에서 빛을 미워하고 오히려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멀리 하는 인간의 악한 성향은 그들의 존재가 '악한 자'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빛과 대비되어 자신의 악한 행위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3: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 20절과는 반대로 진리를 좇는 자를 설명해 주며, 이러한 자의 전형적인 행동이 빛으로 나아옴을 통하여 빛과 진리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을 사랑하며 빛으로 오고, 역으로 빛은 그들의 행한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이와 더불어 사람이 빛 되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자기 존재의 근원인 창조의 주체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Charlesworuth).
3:22-36 예수에 대한 세례인 요한의 재 증거
앞에서는 이미 세례인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증언한 사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요 1:19-34). 본문은 이에 이어 세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Herod Antipas B.C. 4-A.D. 39)에 의해 투옥당하기 직전(24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재증거한 바를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는 예수의 초기 유대 사역(요 2:12-3:36)과 관계된 마지막 기사(記事)이며 이어지는 다음 장에서는 지리적 배경이 바뀌어져 예수의 사마리아 사역과 관련된 기사가 소개된다.
이러한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단락으로 구분이 된다. 먼저 전반부는 세례인 요한이 예수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구자로서의 자신의 역할(22-30절)과 관련하여 예수의 그리스도되심을 증거하는 최후 증언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생겨난 데이어(요 1:35-39) 이제 유대 군중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추종하는 자들이 생기자 여전히 세례인 요한을 추종하던 자들 중의 몇 사람은 예수의 세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며 불평을 터뜨렸다(26절). 이들은 세례인 요한의 우선권을 내세워 세례에 대한 정통성을 논하고자 했다. 하지만 세례인 요한은 저들의 불평을 일축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사역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상에 대해 도리어 마땅히 여기고 또한 기뻐하였다(27-30절).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세례를 준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며(요 4:2), 이 세례는 세례인 요한의 세례와 같은 성격으로 회개와 메시야의 오심. 즉 새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는 의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태도인데, 그는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의 자기의 임무를 직시하고 예수와 경쟁 관계가 아닌 겸손한 순종의 자세로 일관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례인 요한의 태도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모든 성도와 복음 사역자들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일깨워 준다. 만약 성도나 복음 사역자가 자신의 공로와 업적에 대해 자랑하며 스스로 영광을 취한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실패한 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스스로를 우상화시키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롬 1:21-23).
한편 본문의 후반부(31-36절)는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이 아니라, 본서의 기록자인 사도 요한의 신학적 해설이라는 견해가 있다. 즉, 전반부에서는 세례인 요한이 자기의 임무를 중심으로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한 것이고, 여기서는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이를 해설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성 여부는 아직껏 규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 부분과 관련하여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영생과 영벌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36절).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주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구원(엡 2:8)을 차지함은 물론 항상 예수가 세상의 구주이심을 전파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의 본분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빌 1:20).
3: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 니고데모와의 대화가 있었던 유월절 기간이 지난 후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 지방으로 오셨다. 여기서 '유대 땅'이란 수도 예루살렘이 아닌 시골 지역 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세례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여리고 근처의 요단 강 나루터 가까운 지역일 것이다(Hendriksen). 예수께서는 당신에게 냉담하게 대하는 예루살렘을 떠나 새로운 선교지였던 촌락으로 물러가셨던 것이다(요 4:43). 그리고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세례를 주셨다고 되어 있으나 요 4:2의 설명에 의하면 실제로 세례를 베푼 사람은 예수의 제자들이었다. 또한 이 세례는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세워진 교회에서 시행된 그리스도인의 세례가 아니었고 오직 그 그림자였다(Westcott). 결국 여기서 시행된 이 의식은 회개의 의미가 강조된 세례인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과 승리의 부활에 참여한다는 기독교적 세례와의 과도기적 양식으로 간주할 수 있겠다.
3: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 당시 세례인 요한의 활동 거점이었던 두 지명(地名) 모두 현재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분명히 알기 힘들다. 단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추측이 있을 뿐이다. 유세비우스(Eusebius)와 제롬(Jerome)은 이곳의 위치를 베다니 서남방 수마일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마리아와 베레아의 교차지점 가까이, 즉 스기노폴리스(Scythopolls) 남방 8마일 지점쯤 된다고 주장한다. 바클레이(Barclay)는 예루살렘 동북방 5마일 지점에 있는 외딴 계곡, 와디파라(Wady Farah)에 애논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혹자는 여기에 나오는 두 명칭을 실제로 존재하는 지명으로 보지 않고 상징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 즉 '살렘'(Salim)은 '평화'라는 뜻이고, '애논'(Aenon)은 '샘'이랴는 아람어란 점에 착안하여 이 지명들은 요한의 세례는 '평화'에 가까이 있지만 완전한 '평화'를 주지 못하는 반면에 예수의 세례는 평화(살렘)의 샘(애논)이 솟아오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Kriger, Bultmann).
3: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 마 4:11,12을 보면 예수께서 시험 받으신 후 즉시 세례인 요한이 옥에 갇힌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언제 이렇게 세례 주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는가 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본서의 저자는 이러한 독자들에게 있을지 모를 의문과 혼동을 예상하고 미리 해답을 주고 있다. 즉 마태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마 4:11과 12 사이에, 즉 그리스도의 시험과 세례 요한의 구금(拘禁) 사이에 예수와 요한이 병행된 사역에 종사하고 있었던 기간이 왜 길었다는 점을 본서의 저자는 보여 준다. 본서의 독자들은 이미 마태복음을 읽었고, 요한의 투옥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자는 이러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의 '옥'이 정관사가 붙은 '그 옥'(텐 퓔라켄)으로 나와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3: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 이 때 '변론'의 내용이 유대인의 일상생활 가운데 실시되던 정결예식 자체에 대한 논쟁인지, 세례인 요한과 예수의 세례에 관한 것인지 명확치 않다. 그러나 계속되는 내용(26절)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세례인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에 관한 변론이었고, 아마도 더 많은 사람이 예수께 가는 사실을 들어 요한의 세례가 못한 것으로 단정함으로 요한의 제자들이 흥분되어 야기된 변론인 것 같다. '결례'(카다리스모스)는 '세례'(밥티스마)와 동의어로서 죄나 어려움에서 씻어 정결케 되는 것을 표시한다. 한편 본문에 나오는 '변론'(제테시스)이라는 단어는 행 15:2에 나타난 안디옥에서의 논쟁과 더불어 바울의 교훈 가운데서 위험하고 쓸데없는 분노에 찬 논쟁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단어이다(딤전 6:4; 딤후 2:23; 딛 3:9). 이로 보건대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대단히 격분해 있음으로 너무나 명확하여 분쟁거리가 되지 않았던 문제에 집착해 있었던 것 같다.
3: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는 '랍비'라는 존칭을 사용하여 부르나 예수에게는 그 이름조차 부르지 않고 있다. '랍비'는 유대인 세계에 있어서 어떤 다른 정치적, 군사적 계급보다도 민중들로부터 더 뛰어난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이들이 요한에는 이와 같이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면서도 예수에 대해서는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던 것은 예수를 은근히 무시하는 심중(心中)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한편 '선생님과 함께 있던 자'라는 것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으므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당신의 권위를 인정해 주던 그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라는 말에서 세례 요한은 줄곧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러한 증거에 대해서도 아주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세례인 요한에게 큰 도움을 받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요한이 예수를 증거했고(요 1:19-28), 또한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으니(마 3:13)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런 생각도 있음직하다.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 원문에는 이 문장 앞에 '보소서'(이데)라는 감탄사가 있어서 예수께 대해 가졌던 당시 그들의 감정을 보여 줄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이 '다' 예수께로 간다는 과장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어투로 보아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의 세례에 대하여 상당히 분노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점점 확산되어져 가는 그의 인기(막 1:45; 3:7)에 대해서도 불안해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당신을 능가하여 당신의 빛을 가리우고 있습니다. 그는 당신의 위치를 빼앗으려고 하는 듯이 보입니다.'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인간적인 감정으로 초조하게 묻는 제자들에게 요한은 예수의 선구자다운 자세를 견지(堅持)하고 있다. 여기서 '하늘에서'란 '하나님께로부터'란 의미이며, 더 널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한편 본절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목하여 준 교훈인지에 대하여 주석가들은 세 그룹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요한에게 국한시키는 사람들로서 본문을 '나는 단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았을 뿐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Calvin, Bengel, Hengestenberg).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에게서 허락받은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다(Golet, Meyer). 즉 이 견해는 제자들의 불평에 대해서 세례인 요한은 예수가 세례를 베푸는 그 권위가 신적 기원을 가졌음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셋째는 '요한과 예수' 그리고 역사상 그러한 일을 행하도록 허락된 많은 선지자와 예수의 제자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Lange, Lücke, Moulton, Westcott). 이 가운데 두 번째 내지는 세 번째 견해가 가장 적절하면서 합리적인 해석이다. 요한은 예수의 인기에 대하여 제자들과 같이 시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마음 속 깊이 믿었던 것이다.
3: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 요 1:20,23에서 요한의 정체를 묻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해 밝혔던 사실을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 있다. 즉 요한은 자신의 사명을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비하는 하나의 목소리로서 산을 낮추고 골짜기를 메꾸어 그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께서 오셔서 환영을 받고 자신이 잊혀지는 것은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만을 좇는 자가 1세기 중엽까지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행 18:24-26에 기록되어 있는 요한의 세례만을 인정하는 아볼로의 경우이다.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 세례인 요한은 자신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보다 분명히 설명하기 위해 유대의 혼인 관습과 관련된 비유를 들고 있다. 여기서 신부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의미하고, 신랑은 그리스도, 신랑의 친구는 세례인 요한 자신을 가리킨다. 이러한 비유는 구약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것으로서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신부로 비유했던 것이다(사 54:5; 렘 3:20; 호 2:7; 말 2:11).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으로 초청된 성 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되었다(엡 5:32; 계 19:7; 21:9; 22:17).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유대의 결혼 풍습에 있어서 신랑의 친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혼례 전에 그들은 중매자로 활동하고, 신부를 신랑에게 안전하게 데려다 주며 결혼식에서는 신랑의 들러리가 되고, 또한 실제적으로 결혼 잔치를 주관하는 역할도 치루었다(Vincent).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가나의 혼인 잔치에 나타나는 연회장(요 2:9)의 신분도 신랑의 친구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요한은 이러한 비유를 들어 자기 자신은 신랑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지 신랑을 수종 드는 신랑의 친구에 불과하다고 선언하였다. 이 말은 곧 신랑의 친구가 마치 종과 같은 태도로 혼인 예식을 돕고 있듯이 세례 요한도 신랑되신 예수님을 철저하게 섬김으로 참된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일 즉, 메시야 사역을 준비하는 일을 완성 하였으며 또한 그토록 열망했던 메시야를 친히 목격하고 증거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다(Hunter).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 이 구절은 본서에서 볼 수 있는 세례인 요한의 마지막 진술이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서는 감옥에 있으면서 예수가 참 메시야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질문을 하는 것이 요한의 마지막 말로 기록되어 있다(마 11:2; 눅 7:19). 그러나 본문에 이러한 사실이 생략되어 있는 것은 저자의 기록 의도가 주로 예수의 하나님 아들되심에 치중되어 있어 다른 것은 간단히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흥하다'(아욱사노)는 수나 양이 '증가한다'는 뜻이고, '쇠하다'(엘라토오)는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완전히 반대되는 이 두 말을 통해 그는 자신과 예수의 구속사적 역할을 정면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이것은 태양이 떠오르면 밤을 밝히던 뭇 별들은 자취를 감추듯이, 참 구주가 오셨을 때 지금까지 어둠을 밝히던 선지자들은 그 구주 뒤에 숨겨져야 한다는 말로 예수의 오심을 예비하였던 그의 선지자적 위대성을 드러낸 것이다. 또한 '하겠고'(데이)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통해 그는 쇠하여야 하는 자신의 운명이 한낱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임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로 세례인 요한은 그 후 감옥 생활을 계속했으며, 불안해했고, 순교당한 반면(막 1:14; 눅 3:18-20). 예수님은 어두움의 세력을 제압하며 천국 복음을 선포하는 등 하나님 나라 확장의 주역의 역할을 수행하셨다. 따라서 세례인 요한의 이 마지막 말은 '종교적 희생정신으로 충만해 있으며, 그의 임무를 적절하게 마치는 말이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Westcott).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 예수와 세례인 요한의 대조가 계속되고 있다. 예수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이시다. 이는 예수의 천상적 기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창조주로서 만물보다 높으신 까닭이 된다(엡 1:20-22). 그러므로 그는 땅의 기원과 성격(마 11:11)을 가지고 있는 요한보다 높으신 것이다. 물론 요한도 하나님이 보내신 자였고(요 1:6), 주의 사역자였으며(마 21:25),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이지만(눅 7:28) '땅에서 난 이'라는 절대적 한계 때문에 신적 존재인 예수와 감히 상대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와 세례인 요한의 비교는 상대적인 우열의 비교가 아니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그 기원의 차이이다. 그러하기에 이후에 기록된 그들의 사역의 내용에도 큰 차이가 있게 된다.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 저자 요한은 요 1:46이나 요일 4:5에서와 같이 어떤 존재의 근원이나 성격을 나타낼 때 '~로부터'(from)란 뜻을 지닌 전치사 '엑크'를 즐겨 사용한다. 따라서 여기서 '땅에 속한 것'은 땅에 기원을 두고 땅의 성격을 띤 것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여기서 '땅'(게스)을 하나님이 계시고 다스리시는 '하늘'과의 반대 개념으로서 '악한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다. 단지 창조주와 구별되는 피조물로서의 존재를 지칭한다. 따라서 '땅에 속한 것'도 더럽고 추한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본질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닌, 그것에로 인도하는 방편적 성격을 지니는 낮은 수준에 있는 그 무엇을 말한다.
3: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 3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과 세례인 요한의 기원을 비교하였던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복음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보다'(헤오라켄)는 현재 완료형이고, '듣다'(에쿠센)는 부정과거로서 시제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해석상 난점을 제공한다. 이에 대해 웨스트홋(Westfott)은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 ․ 현재 ․ 미래를 망라한 영원하신 존재성과 관련시키고, 후자를 단회적인 공생애 기간의 그의 선교(mission)와 관련된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시제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거가 세례 요한을 포함한 다른 선지자들과는 다르게 직접 경험에 의한 것임을 전해주고 있다는데 보다 큰 중요성이 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 신자에게는 영생이 주어지고 불신자 곧 어두움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있다는 그의 증거는 모두 사실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그의 선재(先在)의 사실은 그의 선포의 내용이 온전한 것임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진리를 믿지 못하는 것은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 신적 기원과 권능을 지니신 예수의 선포의 확실성에 비해 너무나 대조가 되는 대중의 반응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배어있는 말씀이다. 이 구절은 일견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로 간다'는 세례인 요한의 제자들의 말(26절)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다'는 세례 요한의 말(30절)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같으나 이는 오히려 당시의 현실을 잘 전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왔으나, 실제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대속주로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요 1:11; 2:24). 그리고 당시에 예수를 따르는 것같이 보였던 사람들의 믿음도피상적인 것이었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3:33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 '인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프라기조'는 '보증을 위해 도장을 찍다'(마 27:66), '감추다'(계 10:4), '증명하다'(33절; 요 6:27) 등의 뜻으로 사용되며 주로 문서 같은데 도장을 찍어 그 진실성과 권위를 확인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진실하고 신뢰할 만한 것으로 재가되고, 확증된다는 것이다(롬 4:11; 15:28; 고전 9:2; 고후 1:22).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상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에 관해 증거하였으므로,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는다는 것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증거(요 14:24)를 받는 것이 되며, 결국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이 진실되다는 사실을 인침으로 믿는 것과 같다. 반면 요일 5:10에서는 같은 내용이 부정적으로 진술되었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물론 창조주 하나님의 참됨은 피조물 인간의 인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인침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서 아주 중요하다.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보내신 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본서 저자의 특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풍부하고도 완전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 따라서 누구나 그리스도의 증거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그분이 보고 들은 것을 말씀하기 때문만이 아니며(32절), 자기에 대한 그의 증거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와 일치하기 때문만이 아니라(33절) 그가 하나님의 보내신 이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이 구절은 대개 예수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때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세례인 요한에게 성령을 충딴히 부어주심을 나타내는 문장으로 보기도 한다(Lenski). 이러한 추정은 '주심이니라'에 해당한 헬라어 '디노신'이 계속적인 수여를 뜻하는 현재시제이므로 예수에게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개의 주석가들은 이 문장이 하나님이 예수께 성령을 한없이 계속 부어주셨음을 뜻한다고 설명한다(Augustine, Calvin, Lucke, Alford). 그리고 문맥으로 볼 때도 이 견해가 가장 무난하다. 이와 같이 무제한으로 성령을 주신 사실은 예수가 가지신 메시야성을 확증하는 것이기도 하다(Westcutt).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 이 구절은 하나님과 아들의 사랑을 잘 드러내 줌과 동시에 그 결과를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사랑한다'(아가파)는 동사는 신적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간의 사랑에 사용하는 것이 저자 요한의 특징이다(Bernard). 한편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주셨다는 표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고전 15:27; 계 1:18)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결국 예수께서는 만물을 받으셨기에 그분은 만물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지시게 됨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는 만물의 머리시며(엡 1:22), 만유의 주시며(행 10:36), 만민의 심판자이시다(요 5:27).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 저자는 30,31절에서 사용하였던 대조법을 다시 한 번 사용하고 있다. 또한 본절에서의 대조는 우리에게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즉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을 것인지, 아니면 순종치 않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인지, 한편 '영생'은 믿는 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이며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대조되어 쓰이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를 보고 벌하시는 신적 심판으로서 영생과 반대되는 영원한 형벌을 가리킨다. 그런데 본절에는 영생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전제로서 순종의 여부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즉 본절에서는 '믿음'과 '순종'이 서로 구별 없이 사용된 것이며, 참된 믿음은 반드시 순종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따라서 영생은 단지 예수를 이적 행하는 자로 믿는 자들(요 2:23)이나 입술로만 고백하는 자들(마 7:21)에게 주어지지 않고, 아들에 대해 영속적인 신앙과 신뢰를 보내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다. 영생에 대하여는 본문의 15절 주석을 참조하라.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불신앙은 영생을 누리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진리를 분별치 못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한다. 한편 본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헤 오르게 투 데우)는 하나님의 심판을 표시하는 관용어구로 사용되고 있다. 즉 이러한 표현은 구약에서는 물론(출 22:24; 32:11; 신 13:17; 스 10:14), 신약에서도 범죄한 자에 대한 형벌로서 너무나 많이 발견된다(마 3:7; 롬 1:18; 2:5; 3:5; 4:15; 계 6:16; 11:18). 한편 '진노'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두 가지인데, '뒤모스'는 일시적이며 가끔 성내는 것을 의미하나 본절에 쓰인 바와 같은 '오르게'( )는 '뒤모스'보다 크고 영구적인 노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는 불신자에게 내려지는데 그것은 새롭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머물러 있다'란 동사(메네이)가 암시하듯이 원래 있었던 진노가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첫 번째 타락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고(창 3:24) 하나님의 진노는 인류에게 언도되었다. 이처럼 범죄로 인한 저주 상태에 있는 인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이러한 저주에서 벗어나 원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그를 믿고 순종하는 삶을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악의 세력과 고통 속에 그대로 두심으로 인하여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고 마는 것이다.
연구자료
니고데모-구원과 세상 복락을 함께 추구한 소심한 지식인
1. 인적 사항
① 니고데모는 '백성의 정복자'라는 뜻.
② 바리새인이며 이스라엘의 교사임(요 3:1,10).
③ 유대인의 관원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임(요 3:1; 7:50), 부자였음(요 19:39).
2. 시대적 배경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행하시던 A.D. 27-30년경 유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 활동한 인물, 한편 본 인물 연구의 중요한 시대적 배경이 되는 산헤드린에 관해서는 본서 14권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3. 성품
① 주위의 눈을 의식하여 밤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으로 보아 신중하면서도 일면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요 3:2).
②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자신보다 어린 예수에게서 무엇을 배운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찾아온 것으로 보아 종교 탐구에 열성적인 의욕을 가진 자(요 3:2).
③ 제사장과 바리새인 앞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를 변호하지 못하고, 예수 믿는 것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한 것으로 보아 자신의 지위와 부와 대중의 지지에 대한 집착이 강한 자(요 7:48-52).
④ 자신의 재산을 들여 예수의 시신에 쓸 향료를 백근이나 준비한 것으로 보아 예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지극한 자(요 19:39).
4. 주요 생애
예수 대면 이전 | ||
출생 | ||
산헤드린 공회원이 됨 | 요 3:1 | |
밤에 예수님을 찾아옴 | A.D. 27년 | 요 3:2 |
예수 대면 이후 | ||
예수로부터 중생에 대해 배움 | A.D. 27년 | 요 1:1-10 |
바리새인 앞에서 예수를 변호함 | A.D. 29년 | 요 7:50-52 |
예수의 장례를 위해 향료를 준비함 | A.D. 30년 | 요 19:39 |
예수를 장사지냄 | 요 19:40 | |
죽음 |
5. 구속사적 지위
① 구약에 정통한 율법학자로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은 자.
② 예수를 장사지냄으로 그의 죽음이 확실함을 증거하는 자.
6. 주요 업적
① 바리새인이며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예수님을 믿음(요 3:2).
②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를 장사지냄(요 19 : 38-42).
7. 주요 실수
① 주위의 눈을 의식하며 예수 믿는 것을 당당히 드러내지 못함(요 3:2; 7:45-52).
8. 평가 및 교훈
① 처음 니고데모는 소심하게도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예수를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 배웠으며, 또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며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과의 대화 후 크게 감화를 받아(요 7:51; 19:38-42) 예수 사후 담대하고도 헌신적으로 자기 신앙을 표했다. 이처럼 참다운 신앙를 소유한 가는 반드시 그 생활이 변화되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는 변화된 자로서 주를 위해 어떠한 봉사와 헌신을 행하고 있는가?
② 유대인의 관원이며, 이스라엘의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를 통해 우리는 제 아무리 높은 학식과 명예와 부를 누린 자라도 인생의 궁극적 목적, 즉 중생이나 구원에 관하여는 무지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요 3:1-10). 실로 인간이 아무리 세상 지식이 많고 성숙했다 할지라도 천상의 비밀에 속하는 구원의 진리를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무지한 우리에게 십자가의 도를 가르쳐 주사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토록 하자.
③ 니고데모는 구원을 갈망하여 예수님을 찾아왔다(요 3:1-10). 비록 자기 신분상 주변 사람들의 동정에 신경을 쓴 결과 밤에 예수를 찾아왔지만, 그의 영혼이 구원을 갈망하고 열성적인 종교 탐구 의욕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찾았고, 결국 예수 사후의 담대한 헌신자로 변화될 수 있었다. 이렇듯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갈망하고 예수님을 소원하게 될 때 우리 역시 예수님을 찾게 되며
그를 만날 수 있다. 구원에 대한 갈망, 진리에 대한 갈망 등이 항상 우리의 삶 속에 넘쳐흐르는가?
9. 핵심 성구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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