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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고넬료가의 성령 강림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8-12장까지 이어지는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 일련기사는 초대 교회의 선교 사역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일단 유대와 사마리아 등 팔레스틴 전역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나아가 빌립의 에디오피아 내시 전도, 안디옥 교회의 설립 등이 이루어지고 특히 후에 이방 선교의 기수(旗手)로 가히 이방인의 사도라 할 수 있는 바울의 회심 사건 등이 발생하여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초대 교회의 선교 사역이 당시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전 로마제국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는 과정도 보여 준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먼저 성령께서 역동적으로 사역하석서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각기 환상을 보여주사(1-16절) 서로가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17-33절). 그리하여 지금껏 주로 유대인과 이미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만 복음(福音)을 전하는데 주력하였던 초대 교회의 대사도인 베드로가 직접 이방인 고넬료(Cornelius)에게 예수의 복음을 중거하게 하시고(34-43절) 또 이를 통하여 고넬료의 집에 모인 자들에게 성령 강림(聖靈降臨)이 이루어지게 하심으로써(44-48절) 이제 구원의 복음이 전이방인에게로 전해지기 시작하며 또 마땅히 전해걱야만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일련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본장은 비교적 긴 장이지만 그 내용은 고넬료가의 회심과 성령 강림에 관련된 내용으로 일관되어 비교적 단순 명료한 바 그 내용 전개에 대해서는 본장 문단강해를 보라. 그리고 평소 비륵 유대교를 통해서나마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히 생활하던 고넬료에게 마침내 확연한 구원의 복음과 성령강림이 주어진 사건에 담긴 세부 사항의 이해에 대해서는 본장 해당 주석을 보라.
한편 이제 마침내 예수의 복음이 본격적으로 이방인에게도 전달되기 시작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본장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이와 관련된 이 당시의 전반적인 구속사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초대 교회 시대는 구속사의 시대(時代)가 예수의 초림의 약속을 직간접으로 보여 주는 율법과 예언을 중심으로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서 진행된 구약시대에서 이제 구약의 성취로 초림하여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예수께서 새로이 준신 재림과 천국 구원의 새약속을 중심으로 전 세계 만민 중에 택한 성도 모두를 통해서 진행되는 신약 시대로 갓 이전된 일종의 과도기(過渡期)였다.
그리하여 이 당시는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며 성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연속성과 점진성을 가지고 진행되는 구속사의 섭리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미비된 결과 심지어 사도들조차도 구약 율법과 신약 복음 그리고 선민 이스라엘의 후손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바른 관계 등에 대하여 명확한 신학적 이해를 아직 갖고 있지 못했었다. 여기에다가 외적 체제로만 볼때에는 초대 교회 당시의 선민 이스라엘의 후손인 유대인들의 유일한 종교였던 유대교(the Judaism)가 초대 교회에 더욱 큰 흔란을 야기시키고 있기도 하였다.
즉 태초 아담의 때로부터 전해진 정통 신앙과 달리 바벨론 포수 이후에 생성되기 시작한 유대교는 점점 태초 아담 때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오직 그의 계시에 의지해서 믿는 신븐주의적 구약 정통신앙의 본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인 구약(舊約) 전체가 아니라 구약의 일부 내용만을 취찬 후 거기에 인본주의적이고도 민족주의적인 자신들 유대인의 전승(tradition)까지 가미하였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구약의 일부 내용에다 장로들의 유전까지 합하여 만든 소위 율법의 준수가 구원의 조건이며 어 느날 한 메시야(Messiah)가 와서 자신들 유대인을 위한 그리고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지상 왕국을 건설해 주는 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자신들 선민을 통해서 진행된 구약 시대의 구속사는 그것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니라 오직 구약의 모든 약속과 예언의 성취로 오신 우리 구주 예수와 그분이 세계 만민을 위해 주신 새 언약 곧 신약(新約)과 연결될 때에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이었음에도 이들은 이를 오해내지 부인하였다. 또한 그들이 선민(選民)이 된 것과 그로 인해 갖는 선민의 지위는 그들만 따로 구원을 주시려는 것이라거나 그 선민의 지위가 곧 구원의 보증인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을 통해서 예수 초림 이전의 구약 시대의 구속사가 진행되며 또한 구원의 계시인 구약 율법과 신약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지기 위한 과정과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출 19:3-6). 즉 자신들이 선민이 된 것은 그것이 무슨 최종적 목적이나 결과가 아니라 다만 자신들을 통하여 구약 시대의 구속사가 진행되고 또 구원에 관한 계시가 1차적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져서 마침내 신약 시대에 이르러 세계 만민을 향하여 구속사가 확장되게 하기 위한 과정과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착각하여 유대인이 된 것 자체가 영원한 구원의 특권과 보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상의 유대교적 오류에 라진 유대인들은 근본적으로는 이방인을 멸시하였으며 혈통적으로 이방인인 자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circumcision)나 기타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 법적으로라도 유대인이 필히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는 구속사가 이스라엘 중심으로 진행된 구약 시대에는 이방인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보이기 위한 방법으로 율법으로 규정된 필요한 절차였다(창 17:12-14,23-27; 34: 8-17). 그러나 구약 시대에도 그런 외적 절차보다 내적 믿음으로 영적 이스라엘인이 되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으며 특히 이제 주의 초림으로 신약이 도래한 후에는 구속사가 이스라엘 선민 중심에서 세계 만민으로 구성된 교회로 확장되었는 바 이제 신약 시대의 성도는 굳이 율법 의식을 통해서 유대인이 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더욱이 구원의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함에도 인본주의적 민족주의적 오류에 오염된 유대교 사상을 가진 유대주의자들은 사실은 구약은 물른 순수하게 구약 전체를 계승 확장한 신약, 즉 신 ․ 구약 전체에 의거하여 세계 만민의 구원을 가르치는 초대 교회의 기독교 복음을 가리켜 도리어 구약과 하나님 자체를 모독하는 것으로 매도하였다.
따라서 이런 상황하에서 예수가 구약에 약속된 그리스도이심은 예수 공생애와 부활 승천 등의 사건을 통해 목격하고 확신하였으나 아직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전반적 관계 그리고 유대교의 오류와 신 ․ 구약 전체를 온전히 믿는 기독교와의 차이점까지는 완전히 정립하지 못했던 이 당시의 초대 교회는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바른 관계에 대해서도 명철한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으므로 능동적으로 이방인 선교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이미 구약에서부터 선민 이스라엘은 물론 세계 만민 곧 모든 이방인의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이제 때가 이르매 초대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복음이 마침내 이방인에게도 이르게 하시고자 성령을 보내사 이방 선교 사억의 태동을 고넬료 사건을 통하여 주도하신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계획과 약속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오묘한 섭리로 인하여 필히 성취됨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외울 말씀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고넬료가 본 환상
본문 & 자료노트
보감-10:1-48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의 신앙
1. 경건함(2절)
2. 가족 모두 하나님을 경외케 함(2절)
3. 가난한 자들의 구제에 힘씀(2절)
4. 기도 생활에 항상 힘씀(2절)
5. 주님의 말씀에 잘 순종함(3-8절)
6.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음(22절)
7. 신앙을 권면하는 열정이 있음(24절)
8. 믿음의 선배에게 겸손함(25절)
9. 말씀 듣기를 뜨겁게 사모함(33절)
10. 이방인 최초의 세례자가 됨(45-48절)
지리배경-10:1-48, 가이사랴
본문에서 보는 바같이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이 위치한 곳이 바로 '가이사랴'이다. 이곳은 초대 교회 당시 사도 베드로, 전도자 빌립, 후에는 사도 바울까지 합세하여 복음을 전파했던 도시로서 초대 교회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므로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1 지리적 배경
이곳은 갈멜 산 남쪽 37km, 예루살렘 북서쪽 약 105km 지점에 위치한 팔레스틴의 지중해안의 한 항구 도시이다. 이 도시는 그 지리쩌인 특성상 예부터 두로와 인집트 사이를 이어주는 대상(際商)들의 여행 길목이 되었기 때문에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가장 발달한 항구 도시이며 또 내륙과 해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항구 북쪽과 남쪽에 매우 정교한 석조 방파제가 건설되어 있어 해상무역 도시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2. 역사적 배경
원래 이곳은 시돈 사람들이 살았던 작은 도시로서 '스트라토의 망대'(strato's tower)라고 불리웠었다. 그것은 가이사랴가 위치한 지역이 바위로 여러 충을 이룬 고지(高地)로서 마치 망대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B.C. 63년에 이곳은 로마에 의해 정복되었고, 후에 로마 황제가 헤롯 대왕(the Great Herod, B.C. 37-4)에게 넘겼다. 이에 헤롯은 이 작은 도시를 약 12년간에 걸쳐(A.D. 10-22) 웅장한 도시로 건설하였고, 그 이름도 자신을 후원했던 로마 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B.C.27-A.D.14)를 기념하여, '가이사랴'로 명명(命名)하였다. 이곳에는 헤롯 계열의 왕들과 로마의 지방총독들의 관저가 있었다. 빌라도가 유대 지방의 총독으로 있을 때 거주했던 곳도 이 곳 총독 관저였다.
한편 이 도시에는 신약 시대에 와서 대부분의 지중해 지역의 항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종족들, 즉 헬라인, 유대인, 로마인들이 섞여서 살았다. 따라서 자연히 그곳에 살고있는 유대인들과 다른 종족들 간에 충돌이 일어나곤 했는데, 이 만성적인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A.D. 66년에는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가아사랴는 A.D. 640년 경에 아랍의 침략으로 정복되었다가. 이후 A.D. 1265년 십자군에 의해 다시 탈환되어 기독교인의 도시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이스라엘의 영토로 되어 있다.
3. 관련 성경 기사
1) 바울이 유대인들을 피해 이 곳에서 다소로 내려감(행 9:30)
2)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이 곳에 거주함(힝 10:1)
3) 베드로의 전도로 고넬료가 회심하여 세례받음(행 10:34-48)
4) 헤롯 아그림바가 이곳에서 통치하다 충으로 죽음(행 12:19-24)
5) 바울이 제 2․3차 전도 여행에서 돌아을 때 들림(행 18:22-21:8)
6) 바울이 이곳에 있는 벨릭스 총독에게 심문받음(행 23:23-35)
7) 바울이 2년 동안 이 곳에서 옥중 생활을 함(행 24장)
8) 바울이 이곳에서 아그립바 왕에게 변론함(행 26:1-23)
보감-10:1-48 구원의 5요소
아담 이래로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므로 구원받을 필요성이 있고 또한 구원의 길도 열려 있다. 그러나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선행, 노력 등에 있지 않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가능하며 하나님을 떠난 기타 다른 수단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다음에 이런 하나님의 구원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5가지 요소를 살펴 보자.
1. 하나님의 은혜(엡 2:8)
2. 하나님의 말씀(벧전 1:23)
3. 하나님의 성령(요 16:13)
4. 하나님의 전도자(고전 1:21)
5. 듣는 이의 믿음(롬 3:28)
도표-10:1-7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방인들
1. 아비멜렉(창 20:3-7)
2. 애굽 왕 바로(창 41:1-28)
3. 발람(민 22장)
4. 바사 왕 고레스(스 1:1-4)
5.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단 4:1-18)
6. 바벨론 왕 벨사살(단 5:5,24-29)
7. 동방의 박사들(마 2:1-11)
8. 고넬료(행 10:1-7)
삽화-10:1 로마 시대 백부장
백부장은 100명의 보병대로 구성된 백인대(百人隊)의 지휘관으로 실전 경험이 가장 많은 장교였다.
보감-10:24-48 고넬료의 회심을 통한 영적 교훈
1. 하나님은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자를 구원시켜 높여주심(25,26절)
2.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생겨남(33절)
3.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심(34절)
4.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나라와 민족 및 신분의 경계를 초월함(35절)
5.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를 하나님이 받으심(35절)
6. 구원얻는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요청됨(43절)
7. 믿음은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할 때에 더욱 견고해 짐(44-46절)
원어연구-10:17,20 의심하다
17절의 '의심하다'에 쓰인 헬라어는 '디아포레오'로서, '아포레오'에 기초하여 만들어 진 말이다 '아포레오'는 '길', '수단', '통로'를 의미하는 '포로스'에 부정접두어 '아'가 결합 되어 '대책얼이 있다'. '머뭇거리다', '의심하며 당황해 하다'라는 뜻을 갗는다. 여기에 다시 전치사 '디아'가 접두되어 '매우 난처해 하다'라는 강조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본문에서 이 단어는 베드로가 유대인의 전통에 크게 어긋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서 심히 당황해 하는 상태를 묘사한다.
한편 20절의 '의심하다'는 위의 단어와 다른 어근에서 유래되어 서로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 여기에 쓰인 '디아크리노'는 '분리하다' 또는 '구별하다'라는 뜻의 '크리노'에 '디아'가 접두되어 그 의미를 강화하고 있는 형태로서 그 기본적인 의미는 '세세하게 구분하다 즉 '구별하다' 또는 '시험해 보다'이다.
또한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로서 '필요이상으로 구별하다'라는 뜻을 내포하여 '의심하다'(마 21:21) 또는 '힐난하다'(행 11:2)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즉 이것은 인위적인 지식의 남용에서 기인한 불신앙의 자세와 관련있다. 이처럼 우리도 때때로 하나님의 명령을 감히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으로 평가 판단하고 그 명령을 무시해 버리는 교만함을 범하고 있지 않은가?
도표-10:34-43 베드로의 8대 설교 비교
1. 제 1설교(2:14-36)
1) 계기: 오순절 성령강림
2) 대상: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3) 내용: 오순절 성령강림과 구원 선포
4) 구약인용: 시 16:8-11; 132:11; 욜 2:28-32
5) 반응: 모임 무리들의 마음이 찔림
2. 제 2설교(3:11-26)
1) 계기: 앉은뱅이 치유 사건
2) 대상: 솔로몬 행각에 모인 무리
3) 내용: 회개 촉구와 구원 선포
4) 구약인용: 신 18:19
5) 반응: 죄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됨
3. 제 3설교(4:5-12)
1) 계기: 사도들의 권세와 사역에 대한 변론
2) 대상: 산헤드린 공회원들
3) 내용: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변론
4) 구약인용: 사 28:16
5) 반응: 설고에 압도 당하여 당황함
4. 제 4설교(5:29-32 )
1) 계기: 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변론
2) 대상: 산헤드린 공회원들
3) 내용: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임을 변론
4) 구약인용: -
5) 반응: 사도들을 자신들의 권력으로 정죄함
제 5설교(10:34-43)
1) 계기: 이방인 전도 사역
2) 대상: 고넬료 가정의 사람들
3) 내용: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선포
4) 구약인용: 사 53:11; 57:19; 미 7:18
5) 반응: 성령충만 하여 믿음을 갖게 됨
제 6설교(11:4-18)
1) 계기: 이방인과의 교제에 대한 해명
2) 대상: 예루살렘의 할례자들
3) 내용: 이방인에 대한 복음 전파가 주의 뜻임을 증거
4) 구약인용: 사 44:3
5) 반응: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제 7설교(13:16-41)
1) 계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전도 사역
2) 대상: 안디옥의 회당에 모인 사람들
3) 내용: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증거
4) 구약인용: 시 2:7; 사 53:11; 55:3
5) 반응: 말씀에 감동을 받고 사도들을 많이 좇음
제 8설교(15:7-11)
1) 계기: 율법과 할례에 대한 논쟁
2) 대상: 예루살렘 공회원들
3) 내용: 구원은 오직 예수와 은혜로 받음을 선포
4) 구약인용: -
5) 반응: 이방인은 한 형제로 인정함
역사배경-10:1 로마의 군대 조직
행 23장 자료노트 참조
인물연구-10:1-48, 고넬료
본장 연구자료 참조
주요주제-10:47,48 세례의 이해
행 8장 연구자료 참조
10:1-8 고넬료가 본 환상
전장(행 9장)에서는 바울의 회심과 베드로의 순회 전도 사역을 언팝함으로써 이방 선교의 기초 작업이 다져졌음을 나타내었다. 이어 본장에서는 이방인이었던 고넬료 가정의 복음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디어 유대와 사마리아를 벗어나 이방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을 소개한다. 즉 주님께서는 사울의 회심과 베드로의 사역을 통하여 이방 선교에 대한 기초를 준비하시고, 이제 고넬료의 집에 임한 성령 강림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이방 선교의 포문을 여신 것이다. 이로써 예수의 지상 명령(행 1:8)은 보다 구체적인 실천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고넬료의 회심은 이방 선교를 위한 가교적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후로 바울을 통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지게 된다.
본문은 바로 그 고넬료의 회심을 언급하고 있는 본장의 서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고넬료가 환상을 보고(1-6절)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에 따라 을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기 위해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는(7,8절) 장면이 소개된다.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경건한 이방인이었다(1,2절). 이런 그의 경건과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고넬료는 복음을 영접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된다(4절). 한편 고넬료에게 보여준 초자연적인 환상의 이적은 인종, 계급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강조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상의 본문에서 우리는 구원은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지만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선한 삶은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수반한다는 것을 교훈받게 된다(고전 8:3: 갈 4:9).
10:1 가이사랴. - '가이사랴 빌립보'(마 16:13)와는 구별되는 곳이다. 행 8:40 주석 참조. 이곳은 이미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이 복음 전파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 그런데 이제 사도 베드로의 방문을 받게 된 것이다. 즉 베드로는 예루살렘과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든든하게 되자 순회 전도를 시작하였는데(행 9:31-32) 그 순회 전도지의 세번째 방문지가 바로 이 가이사랴이다. 첫번째 방문지 룻다와 두번째 방문지 욥바에서의 전도 활동은 매우 성공적이었다(행 9:35,42). 그렇지만 세번째 방문지에서의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은 순회 선교에 있어 보다 중차대하고도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왜냐하면 고넬료의 사건에서는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강림한다는 구원을 확증해 주는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행 11:15). 또한 베드로의 이 가이사랴 방문으로 이방 전도의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인 누가도 베드로의 가이사랴 선교 환동을 긴 지면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행 10:1-11:18). 실철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행 2:1-4)에 버금갈 정도로 일어났다(행 11:15). 따라서 본장에 언급된 베드로의 활동과 고넬료의 회심은 기독교가 유대인들을 넘어서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으니 곧 베드로조차 과감히 탈피하지 못한 유대주의적 구습이다(갈 2:11-14).
고넬료. - 이 이름은 B.C. 1세기초, 1만명의 노예를 해방시킨 유명한 장군 퍼블리우스 코넬리우스 술라(Publius Cornelius Sulla)의 이름을 본딴 이름으로 당시 남자의 이름으로 흔했다. 븐문의 고넬료는 그때 해방 되었던 노예의 후손이거나, 술라 장군 가문의 후손일 것이다(Longeneker, Meyer). 고넬료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 -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당시 가이사랴에는 로마 총독의 관저를 경비하기 위하여 로마의 정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러한 파견 부대로는 이 달리 야대 (Italian Cohort) 외에도 아구사도대 (Augustan, Cohenel)가 있는데(행 27:1) 모두 황제의 직할 부대였던 것 같다. 이 로마의 군대는 한 개의 군단이 6천 명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한 군단을 600명씩 10대로 나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한 대는 다시 100명 정도로 나뉘어 그 100명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백부장이라고 하였다. 한편 당시 백부장은 오늘날의 군대 조직에 비교 하면 중대장 정도의 보직에 해당하는데 비록 그 휘하 군사 인원이 100명에 불과했다고는 하나 당시 인원 동원 능릭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의 중대장보다 월등한 지위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식민지역에서의 권한은 매우 막강한 것이었다. 고넬료는 바로 이러한 맥부장 중의 한 사람이었다. '백부장'(centurion)에 관해서는 마 8:5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10:2 경건하여. - 고넬료는 할례를 받지 않은(행 11:3) 사람으로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았으나 경건한 사람 이었다. '경건'이란 헬라어로 '유세베스'인데 이는 '신앙이 독실함'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비록 고넬료는 아직 유대교에 귀의하지는 않았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신앙은 독실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경건한 의인의 예로는 가버나움의 백부장을 들 수 있다(눅 7:1-10).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 고넬료는 자신 뿐만 아니라 온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즉 이 사람은 구약의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고 가족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주(Lord)로 섬겼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고넬료의 경건함이 진실하였다는 것은 그가 자기 가족을 돌아보아 함께 신앙 생활에 힘썼다는 데서도 증명된다.
많이 구제하고‥‥항상 기도하더니. - 이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사람의 외적인 증거이다. 사실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뢰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며, 구제는 사람을 사락하는 선한 마음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고넬료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올바로 섰으며 그리하여 사람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었다.
10:3 제 구 시. - 오늘날의 시각으로 오후 3시이다. 유대인은 하루 3회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따라서 제 구 시는 기도 시간에 해당하는데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도 이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행 2:15; 3:1 주석 참조.
환상 중에. - 헬라어로 '엔 호라마티'( )라는 이 낱말은 영어의 '비젼'(Vision)에 해당하는 말로 '의식 중에 어떤 광경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행 9:10주석 참조.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를 주는 한 방편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를 '이상'(하존)이라 일컫고 있다. 이 경험은 아나니아(행 9:10)도, 사울(행 9:12)도, 베드로(9절,17절)도 하였다. 하나님의 사자. 이는 주의 사자(행 5:19; 8:26)와 같은 말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천사'를 일컫는다. 행 5:19 주석 참조.
10:4 고넬료가‥‥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던 장면(삼상 3:4,6)과, 사울을 부르시던 장면(행 9:4,5)을 연상케 한다. 환상 중에 '천사'가 고넬료를 불렀고 고넬료는 그 초자연적인 부르심에 놀라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라고 여쭈었다. 이는 곧 환상이나 세밀한 음성 중에 하나님이 부르시고 부르심을 받은 자가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리는 마음으로 응답하는 전형적인 형태이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 '상달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바이노'는 '닿았다'는 의미로 고넬료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려지는 향으로 언급되고 있는데(계 8:3,4) 경건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 활동이 그처럼 하나님의 흠향(黙蠻)하신 바가 된 것이다. 이는 고넬료가 아직 초대 교회 성도들 간에서는 일원으로 용인 되지 않았으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저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사 택한 자녀로 삼고 계심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교회를 가견적(可見的) 교회와 불가견적 교회로 구분하는데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께서 세우신 조직을 가리킨다. 그리고 후자는 현재까지 구원받은 자들 뿐만 아니라 장차 구원받을 자들까지 포함한 피택자(被擇者)들로 구성된 교회를 가리킨다. 그랜드 종합 교리, '교회론' 참조.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 하나님께 기억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보웅하여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사람과 그의 행위를 잊지 아니하시며 반드시 그것을 보응하여 주신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이 땅에서 선악 간에 다 보응받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후 심판시에 그처럼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인과응보와 다르다. 한편 여기서 고넬료가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말은 그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10:5 욥바에 보내어. - 베드로는 고넬료가 주의 사자가 나타나신 환상을 보는 그때에 욥바에 있었다(행 9:43). 욥바(Joppa)에 관한 것은 행 9:36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이때 고넬료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행 11:14)는 말씀도 아울러 들었는 바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즉시' 사람들을 욥바로 보낸 듯하다.
10:6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 베드로는 욥바에서 다비다라는 경건한 성도를 죽음에서 일으키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가운데 시몬이라는 피장(皮匠)의 집에 유하였다(행 9:36-43). 천사는 고넬료에게 이처럼 베드로가 머물러 있는 위치를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가 피장의 집에 머문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로 여겨진다. 한편 피장의 집이 해변에 있다 하였는데, 피장이라는 직업은 유대인들로 부터 배척받는 직업이었으므로(행 9.43 주석 참조) 마을의 중심부에서 떨어진 해변에 위치했던 것 같다. 아니면 가죽을 가공하는 데 쓰이는 공업 용수를 쉽게 얻을 수 있고 또한 해상 수송이 편리한 이유로 해변에 위치했을 수도 있다.
10:7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 - '하인'은 헬라어로 '오이케톤'으로서 '종'을 지칭하는 '둘로스'와는 구별된다. 즉 '종'은 노예이나 '하인'은 종과는 달리 집안의 일을 맡아 하는 자유로운 신분의 일꾼이다. 다음으로 '종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트라티오테스'로서 '군사' 또는 '병졸'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본문의 '종졸'은 고넬료의 휘하에 있는 병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넬료는 이처럼 자기 집의 하인 두 사람과 자기 휘하에 있는 병사 한 사람을 보냈는데, 그것도 아무나 보내지 않고 '경건한' 사람을 골라 보냈다. 이는 작은 일 하나에도 신경을 쓰는 고넬료의 인간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고넬료의 종졸 중 경건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또한 고넬료가 자기 가족들 뿐만아니라(2절), 자신의 직장인 군대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자기 부하들에게 경건한 또습을 보임으로써 모범된 생활을 하였다는 증거이다. 이는 실로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고후 2:15)라는 말씀을 주지시켜 주는 모본이 아닐 수 없다.
10:8 이 일을 다 고하고. - 고넬료는 자기가 본 환상의 내용을 욥바에 보낼 자신의 하인과 경건한 부하에게 설명해 주었다. 이는 일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전언자에게 주지시켜 일이 실수 없도록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고넬료의 인간됨이 자기의 하속들에게조차 일의 전후 사정을 친근히 일러줄 정도로 권위주의적 자세에서 벗어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욥바로 보내니라. - 고넬료가 살고 있는 가이사랴에서 욥바는 약 50km 정도의 거리이다. 이는 성인(成人) 남자의 도보로 1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하인과 종졸이 베드로에게 도착한 시간이 제 6시이고(9절). 고넬료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시간이 전날 제 9시이므로(3절) 양 시간의 간격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오후 3시부터 그 다음날 정오까지. 즉 21시간이다. 따라서 고넬료가 주의 사자의 명령대로, 즉시(5절) 사람들을 보냈다면 욥바까지 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설령 그렇지 못해 보다 늦게 출발시켰다 하더라도 말을 태워 보냈다면 더욱 충분하게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다(Bruce).
10:9-16 베드로가 본 환상
지난 단락(1-8절)에서는 이방인으로서 경건하고 선한 삶을 살았던 고넬료의 선행이 하나님께 웅답되어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통해 환상을 보이시고 베드로를 초청하도록 하신 장면을 소개했다. 이어 본문은 고넬료의 초청 대상이었던 베드로에게 보인 환상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기도 중에 모두 세 번에 걸쳐 부정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각송 짐승(래 11장; 신 14:3-20)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만 모두 순종하기를 거절한다. 사실 율법에는 부정한 음식에 대한 차제 조항이 있지만(레 10:17) 그리스도 안에는 이런 규례에 대한 자유함이 있었다(막 7:19; 롬 14:2; 딤전 4 :4).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이런 자유의 진리에 대하여는 익숙하지 못한 율법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의식은 이방인에 대한 편견으로 그대로 나타났다. 이에 주님께서는 이방인에 대해 아직도 유대주의적 편견을 버리지 못한 베드로의 생각을 고치고 환상 직후에 있을 고넬료의 초청(17-23절)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환상을 보이신 것이다. 즉 주님께서는 이 환상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으며 누구나 복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본문은 복음의 보편성을 다시 한번 잘 보여 주고 있다 하겠다(롬 1:16,17).
한편 이 환상으로 인하여 베드로는 지금까지 유대인들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도를 해 왔으나 이제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당위성과 그 사명을 깨닫게 된다.
10:9 이튿날. - 고넬료가 환상을 본 다음날이다. 고넬료의 하인 둘과 종졸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 뒤 즉시 출발한 듯하다(5-7절). 그들은 출발하여 밤늦게까지 길을 간 뒤 도중에 하룻밤을 지샌 후 아침에 다시 출발하여 베드로가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간 시각인 제 육시, 즉 정오에 도착한 것으로 이해된다.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제 육시더라. - 제 육시는 하루 세 번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제 3시(오전 9시), 제 6시(정오), 제 9시(오후 3시)에 속한다. 3절 주석 참조. 비록 베드로는 유대교와 인연을 끊었지만 하나님의 율례마저 버린 것은 아니다. 베드로가 끊은 것은 바리새적인. 즉 형식적인 율법주의였지 하나님의 계명 그 자체가 아니였다. 한편 베드로는 기도하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갔는데. 팔레스틴 지역의 집들은 지붕이 평평하여 거기에 올라가 쉬거나 기도할 수 있었다(신 22:8; 왕하 23:12; 렘 19:13; 습 1:5; 눅 5:19). 막 2장 연구자료, '신약 시대 팔레스틴의 가옥 구조' 참조. 이때 베드로가 올라간 지붕은 아마도 피장이 시몬의 집 지붕이었을 것이다(행 9:43).
10:10 시장하여. - 여러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대개 하루에 두끼의 식사를 한다고 한다. 즉 이는 아침에 일을 하다가 오전 9시나 10시경에 아침겸 점심 식사를 하고 일과가 끝난 후 오후 6시 이후에 저녁 식사를 한다고 한다(Jeremias, Morris). 요 21:12 주석 참조. 그렇다면 베드로는 미처 아침 식사를 못했거나 아니면 오랜 시간 기도한 탓에 시장기를 느꼈던 것 같다.
비몽 사몽 간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게네토 엑스타시스'이다. 이 용어는 본서에서 네 번(행 3:10; 10:10; 11:5; 22:17). 누가복음(눅 5:26)과 그 외의 복음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고넬료가 본 '환상'(3절)인 '호라마'( )와는 뉘앙스가 약간 다른 낱말이다. 후자가 '객관적인 의식 속에서 무엇을 보는 것'을 가리킴에 비해 전자는 주관적인 체험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장에 언급되고 있는 베드로의 체험이 단적으로 베드로가 시장함으로 느낀 망상(妄想)이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배고픔을 이용해서 베드로에게 중대한 의미를 일깨우시려 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빠진 황홀경이 단순한 망상이 아니라는 것은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는 데에서 화실시 된다(16절). 이와 관련해선 삼상 19장 자료노트, '황홀경'을 참조하라.
10:11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 배고픔 중에 베드로가 본 것은 하늘로부터 네 귀퉁이가 매인 보자기가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 보자기는 그릇처럼 보였다. 그릇처럼 보였다는 것은 그 환상을 볼 때 베드로가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는 것과 그 안에 음식물이 들어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 그릇처림 생긴 것은 보자기였는데 네 귀퉁이가 매여, 땅에 드리워져 있었다. 많은 권위 있는 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이 보자기의 네 귀퉁이가 매여 땅에 드리워진 것은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따라서 복음이 유대인들을 넘어서 모든 사방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어야 함을 의미한다고 한다(Augustine, Bengel, Lange). 즉 그 보자기에는 정결한 짐승, 부정한 짐승을 막론하고 온갖 짐승이 들어 있었는데(12절), 이 역시 유대인과 이방인을 불문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는 주장이다. 사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9)고 하셨으며 또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하셨던 것같이 본문의 환상 내용은 유대를 포함한 전세계에까지 전파되어야 할 구원의 복된 소식, 곧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관계된 것이다(28,29,44-48절).
10:12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갖 짐승들이 나열되고 있다. 이 중에는 유대인들이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들도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이 먹을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레 11장과 신 14:3-20에 언급되어 있으니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본문에 물고기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왜 물고기가 언급되어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보자기에 물이 담겨 있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물고기는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Knowling). 그러나 이같은 사항이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계시의 참된 의미를 약화시키거나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10:13 일어나 잡아 먹으라. - 베드로는 이때 배가 고파 있었다(10절). 따라서 짐승들을 잡아 먹으라는 말은 베드로에게 큰 유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9절 주석 참조) 율법이 금하는 부정한 짐숭들을 보고 그같은 명령을 거절한다
(14절).
10:14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 아무리 배가 고파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해도 베드로는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 만큼은 거절하고 있다. 베드로는 새로운 그리스도의 도를 좆는 무리의 머리가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유대인으로서 전통적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가 율법의 규정을 준수하는 것은 아직도 진리의 자유(요 8:32) 안에서 준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관습을 좇고 있었다. 그는 율법이 금하는 식물들을 먹지 않았으나(레 11장, 신 14:3-20), 율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 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롬 14:20), 즉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환상과 명령을 통해(11-13절) 하나님 안에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분없이 모두가 다 한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가 되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이러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10:15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 이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의 뿌리 자체를 흔드는 충격적인 말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유대교는 생명이며, 유대교의 핵심은 모세의 율법이다. 그 모세의 율법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금하는 것을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 자체를 부정하는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하게 베드로에게 이같은 말씀을 선언하셨다. 분명히 베드로에게도 유대인적 배타성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께서 본절을 통해 베드로를 책망하는 데서 그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제 율법의 시대는 갔다(롬 3:21). 그리고 만인을 위한 복음의 시대가 왔다. 물론 율법의 정신은 더욱더 승화되어 계속해서 성도들의 도덕 규범이 되고 있으나 더 이상 문자적 구속력은 효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마 5:17; 히 8:7,13). 그렇지만 베드로는 이러한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베드로 뿐만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행 11:1-18), 그들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셨으나 아직도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 편견이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는 것의 큰 반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위에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다'하는 것을 '아니다'라고 할 존재는 이 우주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10:16 세 번 있은 후‥‥하늘로 을리워가니라. - '이런 일'에 해당하는 것은 11-15절에 언급된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세 번 반복된 이유는 베드로가 계속 부인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베드로가 그 세 번의 반복 속에서도 그 의미를 몰라 고민하고 있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17절). 그러나 이와 더불어 세 번은 사실의 중요성이라는 관점에서도 이해되어야 한다. 즉 이 일이 세 번 반복된 것은 베드로가 본 환상이 단지 그가 배가 고팠기 때문에 헛 것을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10절 주석 찹조.
10:17-23 고넬료가 보낸 하속들의 욥바 도착
앞부분(1-16절)에서는 고넬료와 베드로가 각기 환상을 통해 주의 계시를 받음으로써 두 사람의 만남의 분위기가 조성된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욥바의 피장 시몬의 집에 도착하여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한 사실을 알리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은 베드로가 환상을 본 직후 그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을 때 도착했다(17,18절). 이는 이방 선교의 신호탄이 된 고넬료의 회심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셨는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철저한 준비하심은 고넬료와 베드로가 환상을 보게 된 시간에서도 잘 나타난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시각은 제 9시(오후 3시)였고 베드로가 환상을 본 시각은 이튿날 제 6시(정오)였다. 따라서 두 사람이 환상을 본 시간적 간격은 21시간이다. 그런데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는 약 50km로 약 하룻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은 베드로가 환상을 본 때와 거의 일치된 시기에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피장 시몬의 집에 당도하게 된 것이다. 실로 철저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된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베드로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영접하게 하셨는데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구원을 위하여 한편의 드라마의 각본과 같이 치밀하게 계획하신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이방 구원 계획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의 드라마를 훌륭하게 연출하기 위해서는 연출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출연자들의 각본에 따른 충실한 연기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문에 나타나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하속들은 완벽한 연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베드로는 그의 이방인에 대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지시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낮선 이방인들을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으며(19-21,23절). 고넬료의 하속들은 주인 고넬료의 의도를 전혀 손상됨이 없이 베드로에게 전달함은 물론 이번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기필코 성사될 수 있도륵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22절).
이상의 사실은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준비하시며 그 일이 성취될 수 있도록 준비하시지만 그와 더불어 인간의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 요청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10:17 의심하더니. - 베드로는 비몽 사몽 간에 환상을 보았고(10절) 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해 곤혹해 하고 있었다. 여기서 '의심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에포레이'는 '통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디아'와 '나갈 길이 없다'는 뜻의 동사 '아포레오'의 합성어로 '통하여 나갈 길이 없다'는 뜻이다. 즉 이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를 몰라 어리둥절해 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한 것이다.
마침‥‥집을 찾아. - 그렇게 환상을 해독하지 못해 난처해 하는 베드로에게 때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7,8절)이 찾아왔다. 여기서 '마침'이라는 말은 '바로 그때에 때맞춰'라는 의미가 강하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고넬료의 하인과 종졸은(1-8절) 배드로가 환상을 막 보고나서 그 환상의 의미를 헤아리고 있던 바로 그때에 찾아 왔다. 실로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문밖에 서서. - 여기서 '문'을 가리키는 헬라어 '퓔로나'는 '대문'을 뜻하는 말이다. 고넬료의 하속들은 대문 밖에서 베드로를 찾았고 베드로는 옥상에서 그들이 자기를 찾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10:18 불러 묻되. - 고넬료의 하속들은 문밖에서 집안 사람들을 불러내어 자신들의 방문 목적을 밝혔을 것이다. 이는 생면 부지(生面不知)의 집을 방문하여 처음 보는 사람을 찾는 자연스러운 풍경이다. 더욱이 고넬료의 하속들은 이방인들이었으며 함부로 유대인의 집에 선뜻 들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 우거하느냐. - 여기서 '우거하느냐'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제타이'는 '살고 있느냐'라기 보다는 '머물고 있느냐'라는 뜻이다. 따라서 고넬료의 하속들이 베드로가 피장이 시몬의 집에 잠시 유하고 있는 사실(행 9:43)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가 의문시된다. 그러나 이는 아마도 고넬료가 자신의 하속들을 욥바로 보낼 때 알려주었거나(8절)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본서의 저자 누가가 이처럼 묘사한 탓일 것이다.
10:19 생각할 때에. - 17절의 '의심하더니'와 연결되는 말이다. 고넬료의 하속들이 방문하여 베드로를 찾고 있을 때에도 이처럼 베드로는 여전히 자신이 본 환상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 베드로는 분명히 지붕 위에 있었으므로 문밖에서 어떤 사람들이 주인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의 내용에 빠져 있던 베드로는 그들의 방문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환상에 대한 생각에만 몰두했던 것 같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 빠져 있는 베드로에게 이제 성령께서는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베드로의 행할 바를 일러주시고자 하신다(20절).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 본문은 바티칸 사본(B)을 따라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시내 사본(X), 알렉산드리아 사본(A), 에브라임 사본(C), 바질 사본(E)에는 '세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베자 사본(D)에는 아예 숫자가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7절의 내용에 따르면 고넬료는 집안 하인 둘과 종졸 중 경건한 사람 하나를 욥바로 보냈으므로 고넬료가 보낸 하속은 모두 세 사람이다. 따라서 본절의 '두 사람'은 '세 사람'으로 읽는 것이 바르다.
10:20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 공동 번역은 '의심치 말고'를 '주저하지 말고'로 번역하고 있다. 사실 베드로는 낯선 방문객들의 방문 목적을 알고 있지 못했었다. 그런데도 성령께서는 단호하게 베드로에게 이유를 달지 말고 찾아온 방문객들을 따라 함께 가라고 강권하신 것이다. 원문에는 본절에 '그러나'에 해당하는 '알라'라는 접속사가 있어 베드로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성령님의 명령이 행해지고 있음을 잘 나타내 준다.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 본절에 의하면 앞서 고넬료에게 나타나신 분이 하나님이시요(3절), 그에게 사람을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보내라고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5절)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또 베드로를 욥바의 피장이 시몬의 집에서 묵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심이 분명하다. 6절 주석 참조. 사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역사를 일일이 섭리하시고 주관하신다. 그리하여 정하신 때에 정하신 사람들을 사용하시고 계신다. 그같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는 조금도 실수가 없으시니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광활한 우주가 각기 조화를 이루며 운행되고 있는 것이다(시 104:926).
10:21 내려가…보고. - 지금까지 지붕 위에 있던 베드로는(9절) 성령께서 명령하심에 따라 지붕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 온 가이사랴의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났다.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 고넬료의 하인과 종졸을 접견한 베드로는 성령께서 '의심지 말고 함께 가라'고 하셨음에도 이처럼 이들의 방문 목적을 묻고 있다. 이로 보아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과 때마침 자신을 찾아 온 사람들(17절)이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해서 그들에게 방문 목적을 듣고자 한 듯하다.
10:22 고넬료는 의인이요. - 2절에 의하면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본래 유대인의 개념에 의하면 '의인'이란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비록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었지만(행 11:3), 고넬료는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생활을 했던 것 같다. 게다가 본문의 내용은 고넬료의 하속들이 하는 말이다. 따라서 고넬료는 자신의 하속들에게도 의인이라 불리울 만큼 경건하고 어진 상전이었음이 분명하다.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 고넬료는 비단 자신의 가족과 하속들에게만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하여 배타적이기로 소문난 유대인들에게서도 이처럼 칭찬을 들었다. 비록 본문의 내용에 고넬료의 하속들이 베드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들의 상전을 좋게 말하기 위한 무엇이 가미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들도 경건한 사람들이었으므로(7절) 없는 것을 만들어 장황하게 늘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을 업신여기고 이방인들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들은 고넬료는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고넬료에 관한 인물됨을 직접 가서 본 베드로의 말에 의해 더욱 확증을 얻을 수 있다(34,35절).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 고넬료의 하속들은 자신들이 욥바의 베드로에게까지 오게된 원인이 자신들이나 자신들의 상전인 고넬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천사'앞에 '거룩한' 형용사를 덧붙이고 있어 틀림없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지시를 받고 왔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 고넬료의 하속들이 베드로를 방문한 목적의 핵심이다. 베드로의 '무슨 일로 왔느냐'(21절)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들은 베드로를 자신들의 상전인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초청하여 그의 말을 듣고자 해서 가이사랴로부터 욥바까지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은 베드로 개인의 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타'는 특별한 말씀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의 '말'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 증가되는 하나님의 생동력 있는 '말씀'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고넬료와 고넬료의 경건한 하속들은 이러한 이유에서 베드로를 초청하고 있는 것이다.
10:23 유숙하게 하니라. - 고넬료의 하속들의 설명을 들은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이 지니는 의미를 어렴풋이라도 깨달은 것처럼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주저없이 낯선 이방인들을 자신이 묵고 있는 집안으로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유대인들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같이 여겨 상종을 꺼려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같은 편협한 사고를 깨고서 할례를 받지 아니한 '속된 이방인'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외에도 지금 막 먼길을 달려온 자들이 다시금 길을 떠나려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였으니 베드로는 그러한 배려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욥바 두어 형제. - 우리말로 '두어'란 '둘 가량'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말에 의하면 베드로와 함께 간 사람은 여섯 명이었다(행 11:12). 만일 베드로가 말한 여섯 명이 모두 욥바의 형제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숫자상의 모순이 생긴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하인 두 사람과 종졸 한 사람(7절)을 포함시켜서 말했다면 큰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욥바의 두어 형제의 고넬료의 하속 세 사람을 합쳐 여섯 명이 되기 때문이다. 행 11:12 주석 참조. 한편 베드로가 무엇 때문에 욥바의 형제들을 데리고 고넬료의 집으로 갔는지는 그 이유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사도들이 전도 여행을 떠날 때는 동역자나 수행인들을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있었는데(행 15:3; 고전 16:11), 베드로도 그러한 관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10:24-33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
지난 단락(17-23절)에서는 고넬료가 보낸 사자들의 베드로 방문 기사를 통해 이방인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철저하고 완벽한 계획과 준비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인간적인 측면에서 요구되는 순종의 자세 등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드디어 베드로와 고넬료 두 사람이 만나는 역사적인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보면 베드로의 일행이 고넬료의 사자가 베드로를 방문한 이튿날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함으로써 베드로와 고넬료의 역사적 만남은 이루어진다. 이때 고넬료는 온 가족을 불러모아 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베드로가 도착하자 매우 극진하게 환영한다(24-26절). 이어 베드로와 고넬료 두 사람은 그들 두 사람의 만남이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에 있음을 피차에 밝힌다(27-33절). 특별히 이상의 본문에서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이 매우 부각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첫째, 고넬료와 베드로의 겸손이다(24-26절). 즉 고넬료는 베드로를 주의 사역자로 인정하여 그 앞에 엎드리어 절하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준다. 세상적인 위치에서는 백부장의 계급을 가지고 있던 고넬료가 높은 지위였지만 고넬료는 베드로를 주님께서 보내신 권위있는 자로 인정하고 그 앞에 엎드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던 고넬료의 믿음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베드로도 고넬료의 모습을 보고 신적 권위를 사양하며 동등한 사람임을 겸손하게 고백한다. 이것은 베드로가 그 자신이 능력 있는 사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함을 바로 인식한 매우 신앙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베드로와 고넬료가 자신들의 만남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인정한 사실이다(27-33절). 베드로는 아직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가 유대인의 전통에 어긋나는 파격적 행위임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고넬료도 성령 강림을 위한 주의 뜻을 알지는 못했지만, 복음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초청하였음을 고백한다. 따라서 이러한 순종의 모습들은 주의 은혜를 촉진시켰고 이방인의 가정에 성령이 강림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받게 된다.
① 주의 사역자는 자신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항상 겸손한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② 성도들은 주의 종이 하나님의 사자임을 주지하여 항상 존경과 섬김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③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비록 어긋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다면 전적인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 하며 그러한 순종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0: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 베드로와 그 일행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것은 욥바에서 출발한(23절) 다음 날이었다. 고넬료의 하속들이 가이사랴에서 출발하여(8절) 그 다음 날 욥바에 도착하였으므로(9절) 시간상으로 일치하고 있다. 한편 베드로가 이 날 도착한 시간은 30절에서 고넬료가 '이맘 때'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시각인 제 9시, 즉 오후 3시경으로 추정된다(3절).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 고넬료는 이미 하나님의 사자가 하신 말씀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베드로가 자신과 자신의 온 집에 구원을 주는 말씀을 주리라고 하셨다(행 11:14). 그러므로 그 말씀을 믿고 고넬료는 자기 가족을 불러모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친구들과도 함께 나누기 위해 친구들도 불러 모은 것이다. 이는 사심(私心)과 이기심이 없는 고넬료의 인간미를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10:25 마침. - 이 말은 고넬료가 자신이 보낸 하속들이 베드로를 데리고 올 시간을 계산하여 자신의 일가와 친구들을 불러 모았는데(24절), 그 시각이 일치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니까 고넬료가 베드로를 영접할 시간을 맞추어 준비하였는데 그것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베드로가 들어올 때. - 베자 사본(D)에는 베드로가 가이사랴 성읍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다른 사본, 즉 시내 사본(א),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B), 에브라임 사본(C)들에는 그러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이 상황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의 대문을 들어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넬료가 일가와 친구들을 불러 모은 가운데 성문에서 베드로를 기다렸다기보다는 집에서 기다렸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 발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은 아주 높은 사람을 대하는 경외심의 자세이다. 고넬료는 겸손한 사람이었는 바 사도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나타낸 것이다. 더욱이 고넬료는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었기 (5절) 때문에 더욱 그에 대한 다함없는 존경을 표한 것이다.
10:26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 마치 황제나 신을 대하듯이 자신에게 절하는 고넬료의 영접을 베드로는 겸손히 사양하였다. 베드로는 하나님만이 그러한 경배를 받아 마땅하며, 그외의 피조물은 그러한 경배를 받는다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이 비록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 중 한사람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평신도와 다를 것 없는 동등한 인간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겸손한 마음으로 고넬료의 영접을 사양한 것이다. 한편 이와 유사한 상황이 예수님께도 있었지만(막 5:22) 근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경배를 받으셨고 또 받으실 자격이 있으셨다. 그런즉 본절은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라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배는 받을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10: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 여기서 '들어가다'는 말은 마당에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 듯하다. 한편 이미 베드로는 욥바에서 고넬료의 하속들에게서 고넬료의 인간됨과 왜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듣고 이해한 바 있다(22절). 그리고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 고넬료가 극진하게 환영함을 보고(25절) 마음의 경계심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생전 처음 만나는 베드로와 고넬료 두 사람은 마치 평소에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처럼 담소하며 집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본문의 장면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도, 낯선 사람들끼리의 경계감도 넘어선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의 관계를 보여 주는 실로 흐뭇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10:28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 안에 들어가서 전혀 예상밖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24절)을 보게 되었다(27절). 이에 베드로는 먼저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입장을 밝히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러 사람들에게 유대인과 이방인들 간에 구별되는 기본적인 사회적 상황을 미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하나님의 계명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가나안 정복 후 그곳에 거주하던 가나안 원주민들과 언약을 해서도 아니되며 혼인을 해서도 아니되고 사돈을 맺어서도 아니되었다(신 7:2,3). 그런데 훗날 유대인들은 이 율법을 보다 확대 해석하여 가나안 원주민들 외의 이방인들에게도 적용하였다. 곧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언약 뿐 아니라 가까이 교제를 해서도 안된다고 규정을 한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같이 있지도 않았고, 길에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으며(요 4:9), 더 나아가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음식을 같이 먹지도 않았다(행 11:3). 그리고 이방인들이 만든 물건도 사용하지 않았다(Josephus).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이러한 유대의 율례를 지켜야 할 입장에 있었으며, 따라서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유대의 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지금 베드로는 그러한 자신의 입장을 고넬료의 가솔과 친구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막 7장 연구자료, '장로들의 유전' 참조.
하나님께서…하시기로. - 이상과 같은 유대인들의 율례에 관해 설명한 베드로는 이제 그럼에도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이방인의 집에 들어와 이방인들과 함께 하는 이유를 밝힌다. 그것은 유대의 율법보다 더 높고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께서 이제 이방인들을 깨끗하다고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을 볼 때 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본 환상(10-16절)의 의미를 확실히 깨닫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23절 주석 참조.
10: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 자신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속된 것으로 여겼으나(14절),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깨끗하다 하시고(15절)자신을 고넬료에게 가라고 명하셨기에 19,20절) 그 명령에 거역하지 못하고 왔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양치 아니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난티르레토스'는 '거절하는 말을 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거절하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자신의 유대적 전통을 버리고 그 부르심에 순종한 것이다. 이처럼 사도 베드로의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 주권 중심적 신앙이었다. 그 어떤 자신의 신념과 사상,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적 배경과 관습도 그의 하나님 중심, 하나님 주권 사상에 기초하는 신앙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아직은 몸에 젖은 유대주의적 전통을 철저히 떨쳐 버린 것은 아니었으니 훗날 그는 사도 바울에 의해 그같은 일로 인해 책망받았다(갈 2:11-14).
10:30 나흘 전 이맘 때까지. - 고넬료는 베드로가 도착한 날을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날로부터 나흘이라고 진술하고 있다. 사실 고넬료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고(3절), 자신의 하속을 보내(8절) 그들이 베드로에게 도착하기까지 날수로 이틀이 걸렸다(9,17절). 그리고 그날 욥바에서 유하여 다시 하루가 지나고(23절), 그 이튿날 베드로의 일행과 더불어 가이사랴에 도착했으므로(24절) 날수로 나흘이 지난 것이다. 즉 시간상으로는 만 사흘이지만 날수로는 분명히 나흘 째되는 것이다.
빛난 옷을 입고. - 3절에는 하나님의 사자로 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빛난 옷을 입은 한 사람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자는 일반적으로 '천사'를 지칭하는데(3절 주석 참조), 성경에서 천사는 이처럼 흰 옷 또는 빛나는 옷을 입은 것으로 종종 묘사된다(마 28:3; 16:5; 24:48; 20:12; 행 1:10).
10:31,32 본전 내용은 3-6절에 언급된 사실을 고넬료가 다시 베드로에게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런즉 자세한 내용은 그곳 주석을 참조하라.
10:33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 베드로의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하는 물음에(29절) 고넬료는 먼저 자신이 베드로를 청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나서(30-32절) 이제 그 목적을 말하고 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한 목적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하실 구원의 말씀을 듣고자 함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고넬료는 베드로의 말을 듣고자 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2절) 사람을 경외하지 않았다. 그는 연륜과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리 위대한 사도 베드로라 할지라도 베드로 자신의 위대함은 베드로에게서 기인하지 않고, 그 이면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심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는 베드로 자신이 과한 접대를 받을 때에 취한 겸손한 태도, 즉 하나님 주권 중심의 신앙과 일치한다. 26절 주석 참조. 한편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은 단지 10-16절까지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주님을 만난 때부터 들어왔던 주님의 가르침에 관계된 모든 내용, 즉 생명의 복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넬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베드로가 들려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행 11:14). 따라서 '주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신 모든 것'은 '구원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 권위 있는 시내 사본(א),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B), 에브라임 사본(C), 바질 사본(E)은 본절대로 '하나님 앞에'로 되어 있으나 베자 사본(D)이나 벌게이트 역본(Vulgate), 수리아역(Syriac), 콥틱역(Coptic) 등에는 이 부분이 '당신들 앞에'로 되어 있어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이 중 시내 사본(א) 등을 따르면 하나님의 권위가 강조되나 베자 사본(D) 등을 따르면 베드로의 권위가 강조된다. 그러나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라는 말은 문맥상 '하나님 앞에'가 옳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본다면 고넬료는 베드로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의 대언자로 보고 있으며, 또 그 대언자 앞에 선 것이 곧 하나님 앞에 선 것과 같다는 경외심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로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지만 그 어느 유대인 보다도 겸손하고 진실된 신앙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이 고넬료야 말로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옥토(沃土)에 해당하는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 해당될 것이다(마 13:18-23).
10:34-48 고넬료의 회심과 그의 가정에의 성령 강림
지난 단락(24-33절)에서는 베드로와 고넬료의 역사적 만남 장면을 살펴보았다. 이어 본문은 베드로가 고넬료의집에서 복음을 전하는 도중에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장면을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베드로의설교이다(34-43절). 베드로는 고넬료의 말(30-33절)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가 본 환상의 의미가 비록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임을 깨달았다(34,35절). 그래서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는데, 다른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파하고 있다. 즉 화평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치유와 생명의 주님이 되신다는 것과,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자기 제자들에게 선교 지상 대명을 주신 분이시라는 것, 그리고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고넬료는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믿음을 가졌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복음을 듣고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둘째는 성령의 강림이다(44-48절). 즉 베드로가 설교를하는 도중에 경청하고 있던 고넬료와 그의 권속(眷屬)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것이다. 이 사건은 '가이사랴의 오순절'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중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① 대상이 이방인이라는 점이다.즉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와 다름없이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이 철폐되고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남게 된 것이다. 베드로와 같이 온 사람들도이들에게 임한 성령 강림을 보고 크게 놀랐는데(45절), 이는구원의 보편성을 유대인들에게 확실히 깨닫게 해준 사건이되었다.
② 성령 강림의 방법이 그의 적합하신 뜻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네 번의 성령 강림이 본서에 나타나는데 오순절 성령 강림은 기도할 때에(행 2:1-4), 사마리아(행 8:17)와 에베소(행 19:6)에서는 안수할 때에, 본문에서는 말씀을 들을 때에 임하였다.
③ 본문은 세례 받기 전에 성령이 강림한 유일한 경우로 세례의 외적인 의식은 성령 강림이란 내적 사실이 없이는 무의미함을 보여 준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에게 주저없이 세례를 베풀도록 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지체임을 인정하였다. 한편 이 사건은 베드로에게 이방인 전도의 확신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후에 사도들 앞에서 이방인의 구원을 확신 있게 증거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므로 고넬료와 그의 권속에게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은 어떤 한 개인의 편견이나 선입관에 의하여 복음이 제한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결코 안될 것을 교훈해 준다. 사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롬 1:16; 갈 3:28).
10: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 이 '입을 열어'라는 표현은 중요한 말씀이 다음에 언급될 때 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산상 수훈을 말씀하실 때(마 5:2)와, 빌립 집사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말씀을 풀어 가르칠 때에도(행 8:35) 본문과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 유대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모세의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판단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모세의 율법은 세월이 지나면서 그 근본 정신은 망각된 채 종교적인 의식과 형식의 틀에 얽매여 제 모습을 상실한 것이었다(요 5:37,38).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같은 율법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라고 선언함 정도였다(롬 2:28). 본점 역시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구약에서도 자주 언급된 말씀이다(레 19:15; 신 10:17; 대하 19:7; 말 2:9).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기독교도들도(행 11:1-3) 심지어 가장 지도적 위치에있는 사도 베드로조차도 조금 전까지 이같은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10-17절). 그러나 고넬료가 보낸 하속들과 고넬료를 접한 베드로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롬 2:28,29)는 사실을 이처럼 확실히 깨달은 것이다.
10:35 각 나라 중. - 유대인들은 유대 나라와 그 백성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았으며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유대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나라, 모든 민족에게 개방되어 있다(마 28:19). 그리고 이 개방성은 신약시대에 새로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미 구약 시대에도 이 개방성의 법칙은 적용되고 있었다. 즉 이방인들도 개종하여 선민(選民)의 반열에 들 수 있게끔 하나님께서는 '할례'란 통과 의례를 마련해 놓으셨던 것이다(창 17:12).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의 대열에 가나안 여인 라합과 모압 여인 룻 등이 포함된 사실(마 1:5)도 이방인에 대한 개방성을 확증해 준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고집한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곡해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신앙의 수직 관계를 말하며, 의를 행하는 것은 신앙의 수평 관계를 말한다. 전자는 십계명(출 20:1-17)의 제 4계명까지를, 그리고 후자는 제 6에서 10계명까지를 지키되 형식적으로 아니하고 진정으로 행한다면 온전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마 22:37-40). 그런데 고넬료는 2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즉 그는 비록 유대인들의 십계명은 몰랐을지라도 무엇이 마땅한 참신앙의 자세인지는 기본적으로 알고 이를 힘껏 행했던 것이다.
10: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 '만유의 주'는 유대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던 칭호이다. 그 칭호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시키고 있다. 이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본래의 권세를 회복하사만유, 즉 모든 피조물들에 대하여 왕노릇 하고 계심을 나타내어 준다(빌 2:6-11). 사도 바울도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고 말하였거니와(롬 10:12)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창조주로서(요 1:3) 만유, 즉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피조물의 주이신 것이다.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 '화평의 복음'이란 죄인된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가져다 주는 복음을 말하는 것으로(5:1), 나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물고 인간간에 화평을 주는 복음을 일컫는다(엡 2:14-15). 인간들은 아담이 범죄한 후 그 원죄를 지니고 모두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이 되시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회해의 다리를 놓으심으로 다시금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롬 5:10-11; 요일 2:2; 4:10). 그리고 그 결과 인간들은 민족과 종족, 성별과 연령, 빈부와 귀천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로서의 사랑과 화평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파된 화평의 복음, 즉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전파된 예수님의 가르침(37절)을 가리킨다.
10:37 요한이…반포한 후에. -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선포하고(요 1:29), 그 길을 예비한 자이다(마 3:3). 즉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은 많은 사람들에게 물 세례를 베푸는 가운데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였다(마 3:7-17; 요 1:19-28).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세례 요한의 사역을 관련지어 언급한 것이다.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 이는 예수께서 유년 시절및 청년기를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서 생활하신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는 예수의 공생애 초기 사역이 대체적으로 갈릴리에서 행해졌음을 지적하고 있는 말이다. 사실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크게 이분하자면 전반기의 갈릴리 사역과 후반기의 유대 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서 14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사복음서 대조표'를 참조하라.
전파된 그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게노메논 레마'는 '알려진 말씀'이란 뜻으로 36절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과 동격이다. 왜냐하면 원문을 살펴보면 본절 앞에 '곧'이라는 동격 접속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파된 그것'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화평의 복음'을 의미한다. 36절 주석 참조.
10:38 나사렛 예수에게. -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란 동리에서 자라셨기 때문에(마 2:22,23), '나사렛 출신'이라고 불리웠다(요 1:45,46). 베드로가 이러한 예수님의 출신지를 그분의 이름 앞에 덧붙인 것은 그분의 역사적 실존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전파한 말씀이 허구의 말씀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실제로 있었던 말씀이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 세례 요한은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예수께 임하신 것을 보았다(요1:32). 즉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의 충만함과 모든 하늘의 권세를 주신 것이다(눅 10:22). 베드로는 그같은 사실을 하나님께서 예수께 '기름부으신'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구약 시대 당시,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을 세울 때 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성별된 자입을 나타내는 표시로 기름보던 관습을 염두에 둔 것이다(출 30:30; 삼상 10:1; 왕상 19:16).
착한 일을 행하시고. - 이는 아마도 각양 병사들을 고쳐 주시고 영생의 진리에 관해 설파하신 주님의 해석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시작하시자마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백성들의 모든 병을 고치시며 모든 약한 것들을 감싸주셨다(마4:23). 그리고 종국에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代) 제물로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다.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 이는 단순히 인간이 병 걸린 것을 마귀의 소행으로 보고 예수께서 병고쳐 주신 것을 이처럼 표현한 것이 아니다. 대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혀 죄의 종노릇하던 자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음에 비추어 예수의 공생애 모든 사역이 이같은 것이었음을 뜻하는 말이다(마 9:1-13).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예수를 이 땅에 파송하신 성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었음을 뜻하는 말이다(요 10:25,38; 12:28). 이는 또한 예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이 하나님과 동행동사(同行同事)한 구원 사역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요 17:6-26).
10:39 우리는…증인이라. -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행적을 본 모든 제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예수께서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과 그분으로 말미암는 영생의 길에 관해 온 세상에 증거할 사명을 부여받은 자들이다(행 1:8,22).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 여기서 '저희'는 유대인들을 지칭한다. 또한 '나무에 달아 죽였다'는 것은 신 21:22의 반영으로 예수께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친히 달려 그 몸으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신 것을 의미한다(벧전 2:24). 즉 유대인들은 예수를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몰아 십자가에 매달았지만(요 19:6,7) 실상 예수께선 저주받아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온 인류를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 '저주의 형틀'을 감내하신 것이다.
10:40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 베드로는 말씀을 증거할 때 언제 어디서나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증거하였다(행 2:32; 3:15; 4:10; 5:30) 실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요, 선교의 중심 내용이다. 만일 이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헛된 것으로 돌아가고 말기 때문이다. 바울도 이에 대해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 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라고 말하고 있다(고전 15:13-15). 이처럼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요 11장 자료노트, '죽은 자의 부활에 있어서 성자 그리스도의 역할'을 참조하라.
10: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 이는 전설 40절 후반의 '나타내시되'와 연결되는 구절이다. 즉 하나님은 사흘 만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고 사람들에게 나타내셨는데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하시고 몇몇 사람들에게만 나타내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이처럼 말하는 것은 부활의 증인이 어찌하여 소수 뿐이었는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듯하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소수에게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셨다 함으로써 그것을 본 '택함을 입은 증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즉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 증인들을 '미리 택하신 증인'이라고 함으로써 그들이 예수의 부활에 관해 증거할 자들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세움받은 자들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일어나신 후…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함께(눅 24:30), 11제자와 함께(눅 24:42), 디베랴 바닷가에서 몇몇 제자들과 함께(요 21:13) 식사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11제자, 즉 사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10:42 우리를 명하사…증거하게 하셨고. - 베드로가 행한 설교(34-43절)의 마지막 결론이다. 베드로는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해 언급한 후 이제 사도된 자들이 그 모든 것에 관해 증거하도록 명령받았다는 사실로 자신의 말을 맺고 있다. 그럼으로써 사도들의 복음 전파 사역의 정당성과 권위를 다시 한번 더 확정하고 있다. 실제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러한 명령을 받은 자들이다(마 28:18-20; 막 16-15,16; 행 1:8).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곧 이 사람. -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成肉身)하신 것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러나 저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니 이는 이미 심판의 성격을 지닌다(요 3:16-18). 더욱이 예수께서는 장차 재림하시어 산 자와 이미 죽은 자를 막론하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것이다(계 20:11-15). 그러므로 예수의 증인들은 바로 이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분명히 증거할 사명을 지닌 것이다.
10:43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죄 사함을 받는다. - 복음의 핵심이 제시되고 있는 구절이다. 즉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자마다 죄 사함을 얻는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고넬료에게 들려주고자 하신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이었다(33절; 행 11:14). 그런데 이 구원의 말씀은 오래 전부터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사 33:24; 53:5; 렘 31:31-34; 욜 2:32)으로 이미 유대인들에게 알려진 것인데 이제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명백히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베드로가 이 구원의 말씀이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에서도 이미 예시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전혀 새롭거나 허황된 가르침이 아니라 구약적 전통과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키려는 의도에서이다.
10:44 이 말 할 때에. - '베드로가 생명의 말씀을 하는 도중에'라는 의미이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때가 아닌 도중에 조용히 그러면서도 강하게 임재하신 것이다.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 성령께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임재하셨다. 이는 앞 부분에서 보았듯이 먼저 들은 말씀에 대한 시인과 고백이 있고, 그리고나서 안수를 받은 뒤에 성령께서 임재하신 것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행 8:14-17). 즉 이번 경우는 사도의 안수가 없이 단지 말씀을 듣기만 한때에도 성령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인간의 행위를 매개하지 않고서도 하고자 하시는 바를 친히 이루시는 분이시다. 한편 본문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들이었다(24,45절). 이로써 하나님의 복음과 은혜는 이방인들에게도 완전하게 개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성령이 그들과도 함께 하셨다는 것은 그들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요 3:5).
10:45 할례받은 신자들이…놀라니. - 베드로가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징표인 성령이 임하시자 유대적 편견의 장벽 속에 있던 할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할례받은 신자들'은 아마도 욥바에서부터 베드로와 동행한 '두어 형제'(23절), 즉 정통 유대교도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 놀라고 만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된 민족이라는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새로운 예수의 도도 자신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행 11: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편견을 깨시고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의 도를 허락하셨다.
10:46 방언을 말하며. - 성령이 임하시자 사람들이 방언을 말한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의 현상(행 2:4)을 연상케 한다. 이것이 오순절의 성령 강림 현상과 비슷했다는 것은 베드로의 증언에서도 드러나고 있다(행 11:15). 한편 방언에 대해서는 고전 14장 연구자료를 참조하라.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 이로 보아 고넬료의 일가와 친구들(24절)은 성령 부음을 받고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그들은 말씀에 은혜를 받고 또한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천지의 주재자되심, 그리고 자신들의 구원자되심을 찬양했을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사람들은 사도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하였는데(행2:13), 본문의 성령 강림이 베드로의 증언대로 그때와 같았다면(행 11:15) 그들 역시 술에 취한 것처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여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다.
10:47 우리와 같이. - 초대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 베드로가 이제 이방인들도 '우리와 같다'고 선언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이 실제적으로 무너졌다. 즉 구원이 할례받았음의 유무에 있지 않고(롬 2:28,29) 오직 믿음에 있음을(롬 1:17), 그리스도의 부어 주시는 영에 있음을(롬 8:9,10) 베드로는 깨달았으며(34,35절) 그것을 이제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누가‥‥금하리요. -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전의 죄를 씻고 그리스도가 연합되었음을 공표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행 8장 연구자료, '세례의 이해' 참조. 베드로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령다' 하신 것을 '아니다'하지 않고(15절 주석 참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성령받은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자 하였다. 한편 성령의 임하심을 보고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물 세례를 준 것에서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으면 물 세례와 같은 형식은 필요없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른 내용이 없는 형식은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나 형식 없는 내용 또한 보호막이 없는 내용물처럼 위험한 것이다. 더욱이 의식적인 세례를 주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기도 하다(마 28:19).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강조하셨다(요 3:5).
10:48 명하여 ‥‥주라 하니라. - 대체적으로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치중하였고(행 6:4), 구제하는 일이나 그밖의 일은 집사나 다른 신실한 성도들에게 맡겼다. 본문에서도 사도인 베드로는 물 세례를 직접 주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명하여 하게 하였는데, 명함을 받은 사람들은 욥바에서부터 동행해 온(23절), 할례받은 신자들이었을 것이다(45절).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고넬료와 그 일가 및 친구들은 베드로를 보다 대접하고 싶고, 또한 더욱 주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여 베드로에게 며칠 더 묵을 것을 권유하였다. 이로써 베드로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자며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이는 실로 이방 전도의 서곡의 한 장이 열리고 있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연구 자료
고넬료-이방인으로서 최초로 세례받은 자
1. 인적 사항
① 고넬료는 '딸', '창', '능력'이라는 뜻,
② 가이사랴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행 10:1).
③ 로마 혈통의 이태리인(행 10:1).
2. 시대적 배경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마리아와 팔레스틴 전지역으로 확산되던 시기인 A.D. 37-46년경의 인물, 당시 로마 황제는 칼리굴라(caligula, A.D. 37-41년)었으며 유대 총독은 마를루스(marullus, A.D. 38-41년)였다. 고넬료는 바로 이 마를루스 수하의 이달리야 군대 백부장으로서 당시 로마 총독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 수비를 책임맡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 시기는 이제 사도 바울에 의한 이방인 전도 사역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직전이었다. 이러한 때에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구약 선민 이스라엘 중심에서 세계 만민에게로 확장되었음을 예루살렘 공회로 하여금 공식적으로 인식케 하는 사건이었다.
3. 성품
① 식민 통치하의 유대 백성들에게 자비와 선행을 베푼 것으로 보아 사랑과 인정이 많은 선량한 자(행 10:2).
② 로마 장교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화목하게 지낸 것으로 보아 의롭고 진실한 자(행 10:2).
③ 이방인이면서도 온 가족과 함헤 하나텀을 경외하고 기도에 힘쓴 것으로 보아 경건한 믿음을 소유한 자(행 10:2).
④ 사자의 지시 대로 베드로를 청하고 일가 친척을 모아 말씀 듣기를 구한 것으로 보아 순종적이고 진리 탐구에 열심을 품은 자(행 10:23-33).
⑤ 베드로를 초청하였을 때 베드로가 자기 집안에 들어오자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할만큼 겸손한 자(행 10:24).
4. 주요 생애
1) 베드로 초청 이전
① 출생 - -
②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됨 - -
③ 가이사랴에 주둔 AD. 40년경 행 10:1
④ 기도 중에 환상을 봄 - 행 10:3
⑤ 사도 베드로를 청함 - 행 10:25
2) 베드로 초청 이후
① 베드로의 설교 들음 - 행 10:34-43
② 성령을 받아 방언함 - 행 10:46
③ 베드로 일행으로부터 세례 받음 - 행 10:48
④ 죽음 - -
5. 구속사적 지위
①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와 구제 생활에 힘쓴 자(행 10:2).
②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자이며. 이방인의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하는 이방인 전도 사역이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직전 하나님의 구속 섭리의 역사가 구약 선민 이스라엘 중심에서 세계 만민에게로 확대되었음을 입증한 실례자(행 10:47,48).
③ 온 가족과 함께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한 모범적인 신앙인(행 10:2),
6. 평가 및 교훈
① 이방인이 었지만 신실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은 고넬료를 통해 우리는 복음을 듣고 구원 얻는 일에는 결코 민족이나 혈통적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행 10:1-48). 실로 하나님께서는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백성으로서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이에 우리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될 것을 명하셨다(행 1:8).
② 고넬료는 우상 국가인 로마의 군장교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함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하의 유대 백성들에게 구제와 선행을 베풀었다(행 10:1,2). 이는 오늘날 자칫 자신의 처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신앙이 약해지고 시험들 수 있는 성도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된다.
③ 고넬료는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에 상달될 만큼 항상 기도 생활을 하였다. 또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열심히 기도할 때에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었다(행 10:1-8). 이렇듯 믿는 자에게 있어서 기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교제의 시간인 동시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된다. 진정 우리도 기도를 통해 신앙 생활의 활력을 이뤄야 하겠다(요 15:7).
④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를 받은 고넬료는 곧 사람을 불러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였다(행 10:1-8). 이처럼 신속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은 오늘날 성경을 통해 주의 뜻을 명확히 알면서도 그 뜻대로 행하기를 머뭇거리는 성도들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7. 핵심 성구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볼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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