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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심판과 보좌에 앉으신 성부와 성자에 대한 24장로와 네 생물들의 찬양
구속사적 개관
계시록은 지금까지는 당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형식적 수신자로 하여 일단 그들 각각에게 보내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통하여 당시의 모든 교회는 물론 오고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를 향하여 주의 승천 이후 세상 끝날까지의 구속사의 도정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상 신앙 공동체로서 가져야 할 원형(原形)을 제시하여 왔었다.
한편 이제 본장서부터 계시록은 계시록의 거의 전체를 차지하는 본론으로서 넓게는4:1-22:5에 이르는 현 우주와 역사의 결정적 종말 직전의 말세의 대환난 및 일련의 대종말 사건 자체의 기사를, 좁게는 4:1-18:24에 이르는 미구에 역사의 종말이 최종 도래하기 직전에 있을 말세의 대환난에 대한 기사를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계시록은 예수의 승천 이후 예수의 재림까지의 구속사의 도정에서 이 땅에 예수 신앙 공동체로 존속할 교회가 교회의 참 모습을 이 세상에서 역동적으로 유지할 원동력이 될 전구속사의 지평에 대한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시도한다. 즉 구속사의 궁극적 종점인 대종말에 대한 놀라운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만세대의 성도들이 당장 닥쳐오는 세상의 핍박과 미혹을 극복할 수 있는 원초적인 힘과 용기를 전해 주고자 시도한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말세의 대환난을 경유한 현 역사의 종말과 심판의 도래 과정에 대한 묵시 기록의 서론으로서, 심판의 궁극적 주체로서 심판 보좌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1-3절)과 하나님이 앉으신 심판 보좌 주위에 구약 12지파의 대표와 신약 12사도를 상징하여 결국 신 ․ 구약 선민 모두를 대표한 24장로 및 우주의 전 피조물을 대표하는 네 생물이 앉거나 서서 심판을 집행하시는 하나님께 절대 순복과 찬양을 돌리는 환상(4-11절)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향후 전개될 역사의 종말과 심판의 전과정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의해서, 성도의 구원을 위하여 진행될 것임을 강력히 암시하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본장이 갖는 구속사적 의의는 성부 하나님(God, the Father)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의 의의들과 성도(the Saint)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의 의의들로 크게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죄로 오염된 현 역사에 종말을 도래시키시고 또한 심판하시는 이는 자존하시는 초월자로서 현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시고 또 주관하시기도 하시던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이는 현 역사의 종말과 심판이 절대 실현될 것이며 또한 절대 정당한 것임을 미리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24장로와 네 생물 등이 심판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배석하고 또 찬양한 사실에서 엄정한 역사의 종말과 심판이 분명 도래하지만 그것은 결국은 단순한 파멸과 저주가 아니라 택한 성도의 최종 구원과 새 세상의 도래를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종말에 관하여 성도에게 요구되는 근본 자세는 절대 순복과 절대 회망에서 우러나온 찬양임을 깨닫게 된다.
이런 본장을 종합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지금 진행되는 역사는 그 자체로서 완전하거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 죄로 오염된 불완전한 것으로서 필히 그 종말과 심판이 도래할 것임을 엄숙히 각성하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역사의 진행도, 그리고 현 역사의 종말도 결국은 성도의 구원과 새 세상의 도래를 위한 것인 바 이 역사는 성도의 구원을 위해 도도히 흐르는 구원 역사의 대하 곧 구속사(救贖史)임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역사의 실체를 바로 깨달아 구속사적 비전을 가지고 현재 내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먼저 자족하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진력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며 전진하는 역동적 삶을 살 것을 새로이 결단하게 된다(골 3:2).
외울 말씀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
보좌 위에 앉으신 성부 하나님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24장로와 네 생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 4:5 계시록에 나타난 '7'
1. 일곱 교회(1:4)
2. 일곱 영(1:4)
3. 일곱 금촛대(1:12)
4. 일곱 별(1:16,20)
5. 일곱 사자(1:20)
6. 일곱 등불(4:5)
7. 일곱 봉인(5:1)
8. 어린 양의 일곱 뿔(5:6)
9. 어린 양의 일곱 눈(5:6)
10. 일곱 나팔(8:2)
11. 일곱 우뢰(10:4)
12. 붉은 용의 일곱 머리(12:3)
13. 붉은 용의 일곱 면류관(12:3)
14. 일곱 재앙(15:1)
15. 일곱 대접(16:1)
16. 일곱 천사(17:1)
17. 짐승의 일곱 머리(17:3)
18. 일곱 산(17:9)
19. 일곱 왕(17:10)
도표-4:6-11 하늘 보좌 앞 네 생물에 대한 묘사
1. 앞과 뒤,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함:
예리한 통찰력으로 하나님을 보좌함을 나타냄(4:6,8)
2.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와 유사함:
각각 왕권과 용맹, 희생과 힘, 지혜, 높음과 이름을 나타냄(4:7)
3. 여섯 날개를 가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함을 나타냄(4:8)
4. 거문고를 들고 있음:
하나님을 항상 찬양함을 나타냄(5:8)
5. 소리가 우뢰와 같음: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는 역할을 함을 나타냄(6:1)
신학용어-4:8 하나님의 거룩
출 18장 자료노트 참조
원어연구-4:10, 경배하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로스퀴네오'( )이다. 이 단어는 '~에게로'( ), '가까이 에'( )라는 뜻으로 어떤 사물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가리키는 전치사 '프로스'( )와 인사하기 위해 입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퀴네오'( )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인 의미는 '가까이에 다가가 입맞추다'이다.
이 말은 본래 자신의 상전 혹은 왕의 손에 입맞춤으로서 그에게 대한 자신의 '존경' 또는 '경외'를 나타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는 그 의미가 보다 확대되어 무릎끓고 엎드려서 자신의 존경심을 나타낸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마 2:2,8; 4:10).
한편 '경배하다'라는 뜻에 해당하는 또다른 헬라어 '세보'( )는 주로 외적인 면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습을 주로 가리켜 사용된다(마 15:9). 반면에 본문의 '프로스퀴네오'는 외적 행위와 함께 마음 속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나타낸다는 뜻을 가진다. 즉 본문의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구원자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깨 진정한 존경과 감사로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4:1-11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
본장의 도입부인 제 1장에서는 삼중 서론을 통해 본서의 전달 과정, 명칭과 성격, 송․수신자, 원저자(原著者), 원저자이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속성과 권능, 그리고 기록 배경을 설명함으로써 본서가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되어져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질 하나님의 묵시의 말씀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그 다음으로 본서의 본론 제 1부인 2:1-3:22에서는 형식상 아시아 주(州)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오고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그들이 심판의 주로 오실 재림주를 기다리면서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대처해야 하는가를 알려주었다. 이제 저자는 드디어 실제적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들, 즉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최종 도래할 현 우주와 역사의 대중말 직전에 이 세상에 있을 소위 말세의 대환난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는 본서의 본론 제 2부인 4:1-18:24에 들어가고자 한다.
한편 본론 재 2부 4:1-18:24을 크게 나누면 ① 심판의 보좌와 심판자(4:1-4: 11), ② 인봉된 책과 어린양(5:1-14), ③ 일곱인 재앙(6:1-8:5). ④ 일곱 나팔 재앙(8:6-11:19), ⑤ 성도들이 당할 핍박과 최후의 구원 예고(12:1-14 20), ⑥ 일곱 대접 재앙(15:1-16:21). ⑦ 음녀 바벨론의 멸망(17:1-18:24)이라는 일곱 부분으로 나누인 다.
본문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모두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본론 제 2부의 첫번째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단락으로서 본서 본론 제 2부의 개시 부분이다. 저자는 이와 같이 소위 말세의 대환난기에 있을 재앙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본서 본론 제 2부의 개시 부분인 본문에서 본격적인 재앙의 묵시에 들어가기에 앞서 앞으로 지상(地上)에서 전개될 일들 및 종말에 관한 모든 일들을 총지휘하는 핵심부이며 근원지인 하나님의 보좌(寶座)의 경광(景光)을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상태에서 계시자(啓示者)의 명령에 따라 묘사해 놓는다(1,2절). 저자가 묘사한 하늘 핵심부의 경광은 다음과 같다. ① 찬란한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위에 심판자가 앉으셨으며(3절). ② 보좌를 중심하여 黙장로들이 둘러 앉아 있고(4절), ③ 보좌로부터 성령이 나오사 보좌 앞에 계시며(5절), ④ 보좌 앞에는 정결하고 넓은 투명 광장이 있고(6a절), ⑤ 보좌 가운데와 주위에는 겔 1장에서 보여지는 네 생물이 포진해 있으며(6b-8a절), ⑥ 그 네 생물이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8b,9절), ⑦ 24장로들도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을 찬미한다(10,11절).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은 참으로 온 우주를 지배하실 뿐 아니라 높고 높온 보좌에 앉으겨서 영원히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실 능력과 자격을 갖추신 분이시며, 모든 존재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창조주시요 주권자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챙 17:24-3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우상도 섬기지 말며, 두려워 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 만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를 믿어 그의 심판으로부터 건짐을 받아 구원에 이르도록 하자.
4: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 일 후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 타우타'( )는 본서에 여러 번 나타나는 용어이다. 이것은 시간상의 전후 관계를 나타내 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본서에서는 하나의 환상에서 다른 환상으로 전환할 때 이를 나타내 주는 일종의 관용구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7:1,9; 15:5; 18:1; 19:1). 여기서는 지금까지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어진 편지의 내용(1-3장)이 끝나고 이제 본장에서부터는 내용이 전환되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후해서 일어날 소위 말세의 대환난 및 최종적인 대종말 사건에 관한 일들이 언급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말이 사용되었다(Plummer).
하늘에 열린 문. - 신구약 성경에서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고(시 80:4; 사 66:1; 마 18:10) 그의 천사들이 있는 곳이며(마 24:36) 종말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19:1).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하늘을 삼층천(三層天)으로 이해하였다. 먼저 우리 머리 위의 구름이 떠있는 곳을 첫째 하늘로 보았으며, 그 위에는 금속판이 땅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반원형으로 둘러 있는데 그 금속판을 둘째 하늘로 생각했으며 이 둘째 하늘에는 창문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머지 셋째 하늘은 둘째 하늘 위의 공간으로 그곳에는 천사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으로 생각했다. 창 1장 자료노트, '히브리인의 하늘 개념' 참조.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은 둘째 하늘의 창문이 열리면 셋째 하늘의 광경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본절은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에 기초하여 천상의 비밀이 본서 저자인 요한 자신에게 계시되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Ladd).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 - 1:10의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지칭한다. 이 말의 의미에 관해서는 그곳의 주석을 참조하라.
이리로 올라오라‥‥보이리라. - 이 말만 보면 요한은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붙들리어 땅에서 천계(天界)로 들리움 받은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2절에서 요한이 단순히 자신이 성령에 감동하였다고만 말한 것으로 보아 그는 황홀경 상태에서 몸은 땅에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하늘의 광경을 본 것임을 알 수 있다(Rist). 즉 이 말은 요한의 육신이 실제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환상 중에서 이동하였다는 의미이다.
마땅히 될 일. - '마땅히'라는 말은 확실성 뿐 아니라 당위성까지도 나타내 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실 모든 일이 정의로운 일이며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4:2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 요한은 1장에서 환상을 보기 시작할 때부터 성령에 이미 감동되어 있었다(1:10). 그러나 새로운 환상이 다시 시작되면서 그는 보다 깊은 계시에의 통찰력을 위하여(Plummer, Weiss, De Wette) 더욱더 성령에 충만하게 감동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요한은 새로운 환상으로 전환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본 사실들을 기록한 책인 본서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본문은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를 내포한 구절이다.
하늘에 보좌론 베풀었고. - '하늘 보좌'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한편 본절의 '베풀었다'는 하늘 보좌를 새로이 놓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보좌가 이미 놓여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공동번역도 본절을 '하늘에는 한 옥좌가 있고'로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그것들을 다스리고 주관하는 통치권을 행사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 보좌는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미리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 - 이 보좌에 앉으신 이가 성부 하나님만을 지칭하는지(Charles) 삼위 하나님을 다 지칭하는지(Plummer)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5절에서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불리우는 성령이 언급되고 5장에서 성자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본절에 묘사되고 있는 분은 성부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Lenski). 한편
이 땅에 내려질 말세의 재앙들 및 최종적인 일련의 대종말사건들이 실행되기 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이처럼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은 그가 이제 종말의 재앙과 최후의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은 말세의 재앙들과 최종적인 일련의 대중말 사건들을 친히 주재하시기 위해 만유를 다스리시는 통치자의 보좌에 앉은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모양이‥‥같고. - '모양'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라시스'( )는 '모양'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환상'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神)이시사 형체가 없으신 분이시다(약 1:17). 따라서 본문은 실제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만 그처럼 보인 가견적(可見的)인 환상을 뜻하는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Plummer). 9:17에서는 같은 단어가 '이상한 가운데'(엔 테 호라세이)로 번역되어 있음을 참조하라.
벽옥과 흥보석. - '벽옥'(jasper)은 석영의 변종이나 푸른 빛이 나는 고운 옥을 가리킨다. 그리고 '홍보석'(carnelian)은 '홍옥'(紅玉)이라고도 하는 루비를 가리킨다. 몇몇 학자들은 본절에서 '푸르름'으로 특징 지워지는 '벽옥'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정결함을, '붉음'으로 특징지워지는 '홍보석'은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Plummer). 그러나 본서 저자인 요한의 마음 속에 이러한 개념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편 이 보석들은 대제사장의 총패에 부착되어 있던 보석들이기도 하며(출 28:17,20) 하늘로부터 내려을 때 예루살렘 성의 기초석들로 언급되어 있기도 하다(21:19,20). 따라서 이것이 분명히 어떤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어떤 속성들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사실 만은 분명하다.
무지개‥‥녹보석. - 성경에서 '무지개'(이리스)는 하나님께서 노아를 대표로 하여 모든 인류와 맺으신 언약을 상징하는 것으로(창 9:12,13), 하나님께서 다시는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겠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보중물이다. 그러므로 무지개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긍흘과 자비, 은총과 보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녹보석'은 에메랄드(emerald)를 지칭하는데 이 보석 역시 대제사장의 흉패에 부착된 보석 중 하나였으며(출 28:20) 또한 새 예루살렘 성의 네 번째 기초석으로(21:19) 언급되어 있다. 혹자는 '녹보석'을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Lenski, Plummer) 이 해석 역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이십사 장로들. - 이들이 누구를 지칭하는가에 대해 많은 견해들과 논쟁들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견해들을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구약의 12족장과 신약의 12사도를 지칭한다(21:12-14, Alford, Victorius, Plummer, Vincent, Weiss). ② 대선지자들과 소선지자들을 지칭한다(Hippolytus). ③ 단순히 천사들을 지칭한다(Rinck, Hoemann). ④ 보다 높은 천사들인 천사장들을 지칭한다(Ewald, Spitta). ⑤ 우주적 교회의 대표들을 지칭한다(Walvoord). ⑥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의 각 대표들을 지칭한다(Bleek, De Wette, Swete, Barday). ⑦ 출 24:11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지칭한다(Clarke, Rist). ⑧ 유대 교회를 지칭한다(Wordworth). ⑨ 성경에 나오는 신앙 인물 중 가장 뛰어난 24명의 사람들을 지칭한다(Bengel). ⑩ 구체적인 의미가 없는 단순한 상징 적 환상이다(Greiidanus). 이 가운데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견해는 ⑤이다. 왜냐하면 과거 제사장의 반열이 24반열이었듯이(대상 24:1-19)는 대표의 숫자이니 여기서 24장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전시대(全時代)의 모든 성도들의 대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Walvoord), 또한 24는 12+12에 해당하는 숫자이니 앞의 12는 이스라엘 12지파로 대표되는 구약 교회를, 뒤의 12는 예수의 12사도로 대표되는 신약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24장로는 신구약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Lenski, Hendriksen).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 '흰 옷'에 대해서는 계 3:4의 주석을 참조하라. 다음으로 '금 면류관'은 왕권을 상징하는 것으로(Moffatt, Trench)이십 사 장로들이 하나님 곁에 둘러앉아 금 면류관을 깼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였음을 상징한다. 한편 이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成肉身)하셔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신 후 다시금 하늘에 오르사 본래의 신적 영광을 회복하셨듯이(빌 2:5-11) 예수를 믿는 성도들 역시 끝까지 믿음의 승리를 거둘 때에 주의 영광의 통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2:26; 3:21; 롬 8:17,18).
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 과거에 모세 당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임재하실 때 우뢰와 번개, 나팔 소리 가운데 임재하신 장면을 연상시켜 주는 구절이다(출 19:16). 성경에서 번개와 큰 소리, 뇌성 등은 종종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상징하고 있는데 본절에서 역시 마찬가지이다(욥 37:4; 시 29:4), 한편 이밖에도 본절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4절과 함께 헬라어 동사의 시제가 전부 어떤 일의 계속적인 진행을 나타내 주는 현재형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 주권과 능력과 위엄이 끊임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Plummer).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일곱 영. - '하나님의 일곱 영'이 성령을 가리킨다는 것은 이미 계 1:4 주석에서 살펴본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성령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켜져 있는 일곱 등불로 모사된 것은 구약 시대 당시의 성막(tabernacle)과 성전(temple)안의 광경을 연상시켜 준다. 왜냐하면 성전 안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인 법궤가 놓여 있었으며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 앞 왼쪽에는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등대가 놓여 있어 불을 밝혔기 때문이다(출 25:31-40; 27:21). 이처럼 등대는 항상 불을 밝혀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밝혀 주었듯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전면(前面)을 환히 비추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본문은 나타낸다.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 본문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호스 달랏사 휘알리네 호모이아 크뤼스탈로'( )로서 이를 직역하면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 같고'이다. 여기서 '유리 같다'는 것은 깨끗함을 나타내 주며, 또 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수정 같다는 것은 깨끗하면서도 고결한 것임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러한 바다(sea)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은 부정한 것이 도무지 접근하지 못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의미하는 것을 나타내 준다. 한편 이와 같은 바다는 과거 구약 시대에 솔로몬 성전 안에 놓여 있었던 놋바다를 연상시켜 준다(왕상 7:23-26). 그것은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몸을 성결케 하는 데 사용되는 물을 담아두던 용기이다. 본문의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는 이러한 구약적 개념을 바탕으로 언급된 표현이다. 따라서 본문의 묘사에 의하면 하나님께는 더러운 자가 접근할 수 없고, 만일 더러운 자가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정결하게 된 후에야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 보좌 중앙에는 하나님이 앉아 계셨으므로(2절) 보좌 가운데란 보좌의 한 가운데를 지칭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표현은 보좌를 중심하여 그 주변을 사각형으로 나누어 그 사각의 각 중앙에 다시금 네 생물이 앉은 보좌가 하나씩 있었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De Wette, Charles). 즉 네 생물은 하나님의 보좌를 사방에서 둘러싼 형태를 이룬 것이다(Hendriksen).
네 생물. - 흠정역(KJV)에는 네 짐승(four beasts)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11:7에 나오는 짐승(데리온)과 다른 것이다. 이 생물들은 사 6:2과 겔 1:5에 나오는 생물들로 하나님을 보필하여 그분을 찬미하고(11절), 어린양의 심판을 보좌하는 역할을 한다(6:1 ; 15:7). 한편 본절에서의 이 네 생물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① 사복음을 지칭한다는 견해(Augustine, Jerome, Vincent)와 ② 피조물의 대표를 상징한다는 견해(De Wette, Weiss, Alford, Greijdannus, Plummer)이다. 이상의 두 견해 가운데 초대 교회 이래 근세기까지에는 4생물을 4복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지나치게 추상적인 것을 하나님을 보좌하는 존재로 보았다고 해서 근대 이후에는 네 생물을 '살아있는 생명체 또는 존재'로 보고 모든 피조물을 대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후자의 견해가 인정을 받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하여 하나님의 수종자인 네 생물이 있고 그 주위에 24장로들이 앉아(4절) 모두들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8-11절)은 온 천하 만물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을 잘 묘사해 준다.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 이 내용은 겔 1:18을 배경으로 한 내용이다. 한편 '눈'은 통찰력을 상징 하는 것으로 네 생물이 예리한 통찰력으로 하나님을 보좌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Lenski).
4:7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독수리 같은데. - 이 네 생물들에 대한 묘사는 겔 1:10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에스겔서에 나오는 그룹은 한 그룹 안에 사람, 사자, 송아지, 독수리 이 네 얼굴을 다 지니고 있는데 반해서 본절의 네 생물은 각각 단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한편 여기서 '사자'는 백수(百獸)의 왕으로 왕권과 용맹을, '송아지'는 온순한 동물의 대표로 희생과 힘을, '사람'은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지혜를, '독수리'는 새들의 왕으로 높음과 빠름을 각각 상징한다.
4:8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여섯 날개가 있고‥‥눈이 가득하더라. - 사 6:2에 나오는 그룹들도 각기 여섯 날개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여섯 날개 중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았다. 여기서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두려움과 겸손을 나타내며, 발을 가렸다는 것은 순종 또는 존귀를 나타낸다. 그리고 날았다는 것은 쉬지 않는 활동을 말하며, 날개에 눈이 가득했다는 것은 7절에서와 같이 완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 네 생물들의 전 삶이 오직 하나님을 찬미하는 데 집중해 있음을 나타내 주는 구절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장차 모든 성도들은 더 이상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 아픈 것이 없는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동거하는 중에 그분만을 찬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을 준비하는 우리들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도 천국의 삶을 앞당기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록하다. - '거룩하다'를 세 번 반복한 것은 최상급의 찬미를 의미한다. 유대인의 사고에 의하면 두 번 반복하면 강조를, 세 번 반복하면 최상급을 뜻하였다. 그러므로 네 생물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거룩성을 찬미하는 것이다(사 6:3). 혹자는 삼위(三位)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서 세 번 '거룩하다'고 노래한 것으로도 추측하는데(Lenski)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전능하신 이. - 여기서 '전능하신 이'는 '판토크라토르'( )로서 이 낱말은 '모든 능력을 가지신 이'라는 뜻의 '판토뒤나모스'( )와는 달리 전능자가 아니라 만물의 '통치자'라는 의미에 가깝다. 네 생물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참된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서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 모두 15번 나온다. 이러한 찬양을 드린 찬양자와 내용에 대해서는 계 7장 자료노트에서 다루었으니 그곳을 참조하라.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 - 계 1:4,8과 같은 내용이니 그곳의 주석을 참조하라.
4:9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영광과 존귀와 감사. - '영광'과 '존귀'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인간의 언어로서는 이 이상으로 하나님의 높으신 속성을 표현할 낱말이 없다. 한편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스스로 영광되며 존귀한 분이시다. 또 천하 만물을 창조한 창조자이시기 때문에(출 3:14) 모든 피조물 앞에서 영광되고 존귀한 분이시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주께서 자기 피조물들을 섭리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분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이다. 한편 요한은 본절을 기록하면서 당시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받던 로마 황제를 생각했을 수 있다. 즉 당시 전 세계를 통치하던 로마 황제는 뭇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지만 그도 역시 유한한 인간으로서 영원토록 존귀와 영광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그에 반해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살아계셔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시니 무한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좌에 않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 - '세세토록 사신다'는 것은 영원히 사시는 것을 의미한다(1:18).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만국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주권자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2절 주석 참조.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이십사 장로들. - 4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엎드려‥‥경배하고. - 다른 사람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최대의 복종과 존경심을 표현하는 행동이다. 행 10:25주석 참조.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입어 영원한 사망 가운데서 구원받은 신구약 성도를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들이 이처럼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것은 또한 네 생물이 하나님을 친미한 것에 대한 온 성도들의 화답(和答)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미하는 대합창이 온 우주에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장엄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 이것은 고대 한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굴복당했을 때 완전한 항복과 복종의 표시로써 자신의 왕관을 벗어 승자의 발 앞에 던지던 관습을 배경삼고 있는 장면이다. 왕중의 왕이시며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쓴 면류관은 비록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일지라도 초라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의 영광과 존귀를 찬양하며 그를 경배하는 인간이 자신의 면류관을 그분 앞에 벗어 던지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다. 사실 온 우주를 통털어 만유와 만국을 다스리시는 진짜 주권자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그에 합당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분 또한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 및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복종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성도들이 구원을 얻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니 그로 인해 받은 영광의 면류관을 다시금 하나님께 되돌리는 것은 성도가 마땅히 취해야 할 행동이 아닐 수 없다(Walvoord).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우리 주 하나님이여. - '주'(主)란 소유권자를 뜻한다. 신구약 성도들의 대표자들인 이십사 장로들은 자신들의 주인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면서 그분을 찬미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이 세상의 어떠한 권력자나 이교의 신도 인간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오직 영원한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만이 만유의 주인이 되시며 또한 자신들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도 요한은 이와 관련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주'로 불리우던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 81-96)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 진정한 만유의 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썼을 것이다. 영광과 존귀. - 9절의 주석을 참조하라.
능력. - 앞에서 네 생물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 감사를 돌렸다(9절). 그러나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미하는 본절에서 이십사 장로들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 위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마저도 찬미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그 자체가 그분의 권능을 드려낸 것이므로 그 능력을 장로들은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만물을 지으신지라. - 헬라어 성경에는 이 문장 앞에 '왜냐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티'( )가 삽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문은 하나님이 능력자로 칭송받는 것이 합당한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즉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계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지칭하며 그것들은 하나도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요 1:3)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은 찬미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주의 뜻대로 있었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토 델레마 수'( )를 직역하면 '그의 뜻을 통하여'이다(Plummer). 이는 만물의 기원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의 뜻이 없었으면 만물이 창조될 리 없었으므로 모든 피조물은 그에게 마땅히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9절). 그리고 만물의 창조는 하나님의 뜻에 한치도 어긋남이 없게 창조되었으므로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 하나님은 창조의 능동자이시며 만물은 창조의 피동자이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그 피동성을 충분히 알고 있으므로 그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이 자신의 이러한 피동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모든 인간이 자신의 피동성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피조물됨과 유한함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되어야 올바른 출발 선상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불과하다고 하거나, 자연은 우연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모든 생물은 진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모든 인본주의적인 사상을 경계하고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는 겸손과 순종의 태도를 가지도록 하자(히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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