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들-19
김병권 수필가
김 송 배
김병권(金秉權) 선생은 현재(2009) 한국문인협회 수석부이사장에 재임 중이다. 그와는 문협 일로 자주 만나게 되는데 어느 날 회의가 끝나고 ‘오랜만에 식사 한번 하자’고 제의해 왔다. 그와는 전에도 몇 차례 동행한 적이 있는 미8군 경내 어떤 클럽 식당에서 적포도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하면서 살아가는 많은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다.
그는 지난 5월에 내가 과로에 의한 심장 부정맥의 악화(방치하면 뇌경색으로 바뀐다고 함)로 잠시 입원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문병을 오지 못했다는 일종의 위로의 자리였다. 너무 고맙고 존경스런 해후였다.
그는 내가 문협 회원이 되면서 문협 세미나 등의 행사에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게 되었고 내가 예총 『예술세계』편집부장을 할 때 신인상 수필부문 심사위원으로 위촉하면서 더욱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더구나 조경희 선생님이 예총회장에 재임할 당시에는 그가 예총을 자주 방문하여 사회와 문단의 선배로서 많은 조언을 주었었다.
1987년 가을, 내가 최초로 유럽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김병권 선생도 동행하게 되어 기뻤다. 당시 오학영 예총 사무총장이 이끄는 문화예술 탐방으로 스위스,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 네델란드 5개국을 15일간 돌아보았다.
그 당시 나와 가깝게 지내던 이동진 시인이 네델란드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어서 전화를 했더니 밤에 찾아왔다. 이때 김병권 선생도 함께 그를 만나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면서 담소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1931년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1949년에는 평창군 미탄초등학교에서 교사를 지내기도 했다. 6. 25 전란으로 피난을 가던 중 대구에서 군에 입대하여 육군 참모총장 공보관과 주월 한국군 대변인 등을 거쳐 육군 대령으로 1973년 예편했다.
김병권 1931~ 수필가. 단국대학 졸업. 육군에 근무하면서 전진(戰塵) 속의 우정이라든가 민족상잔의 비극성에 관한 에세이 등을 발표하기 시작, 이후 인간관계 및 고전을 통한 새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수필을 많이 쓰고 있다. 작품집으로『속아주는 멋』등이 있다.
이렇게 그의 간단한 소개를『한국문예사전』(어문각 발행)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그 이후로『물구나무 인생』『생각하는 눈』『앉아서 꿈꾸는 산』『오월의 나비』외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작년에 수필선집『걸림돌과 디딤돌』을 간행하여 우리 수필문학의 정수(精髓)를 확립하는데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1971년 『월간문학』에 「남국의 향수」가 당선한지 근 40여년간 창작에 몰두하면서 문단에서도 한국문협 수필분과회장,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한국펜 고문등을 역임하고 숙명여대 겸임교수, KBS방송문화센터 수필창작 강사, 용산문화원 수필창작교실 강사 등을 맡거나 지금도 강의 중에 있다.
또한 그는 한국문학상, 한국수필문학상, 노산문학상, 한국수필문학대상, 신곡문학상, 순수문학대상, 한국전쟁문학상과 단국문학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으며 지금도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이제 고희를 지나 망팔(望八)의 시점’임을 강조하면서도 우리 문학, 그 중에서도 수필문학에 대한 애정이 흘러넘치고 있다. 그의 글을 잠시 읽어보면 그의 심중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시든 수필이든, 아니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모든 이에게는 세속적인 탐욕이나 쾌락 따위가 자리 잡을 수 없다. <시인의 나라에는 도둑놈이 없습니다>라고 노래하는 그 시인에게서 그 어떤 욕심을 엿볼 수 있으며 하루의 행복을, ‘한 잔의 커피와 한 갑의 담배로 만족해하는’ 시인에게서 그 무슨 다른 욕심 따위를 찾을 수 있겠는가.
--작품「문학 지향의 사회」중에서
수필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무엇인가 불꽃같은 내면세계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강렬한 욕망과 열정이 남아 있기에 오늘도 나는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포효 같은 울음으로, 때로는 가냘픈 풀벌레 같은 흐느낌으로, 때로는 이슬 머금은 꽃잎 같은 웃음으로 인생을 보고 느끼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
--작품「나의 문학인생」중에서
그는 ‘수필은 진실과 신의와 인격의 목소리가 미적감동으로 승화되는 문학이기 때문에 어떤 장르의 글보다 수필을 사랑한다.’라는 신념으로 수필문학이 간직한 진정한 의미를 들려주고 있다.
그는 강직한 군인정신과 더불어 수필가로서의 안온한 정감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서 대인관계, 특히 문단의 선후배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벌써 20여년이 지난 유럽여행팀(오학영 희곡작가(작고), 오찬식 소설가(작고), 지연희 수필가, 정인조 부산 수필가, 이희자 시인, 김선주 소설가, 곽의진 소설가)이 다시 모여서 그때의 의리를 확인하는 초대를 가끔 거론하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신의를 항상 중시하는 것 같다.
또한 그의 국가관에 대해서는 더욱 투철하게 다가온다. ‘그동안 저들이 휴전협정을 위반한 건수는 하도 많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핵 확산 금지를 위한 국제협약>마저 자의적으로 짓밟아버린 저들의 만행은 국제사회의 응징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다 테러, 마약, 위조지폐 등 온갖 망나니짓은 골라서 하고 있으니 저들을 어찌 평화와 번영을 지향하는 국제사회의 동반자로 대접할 수 있겠는가(수필「유월의 심화(心火)」중에서)’라는 말처럼 국가관에서는 언제나 지난 10년간 좌파정부(?)에 대한 공통된 울분이 분출되고 있었다.
특히 그는 <국군포로나 납북어부>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 북쪽에 돈과 노력을 쏟아 붓는 데에는 더욱 어조를 높이고 있다. 동족간의 문제를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가면서 김정일은 국면전환의 흉계를 자행하고 있음을 통탄하고 있는 것이다.
김 선생님, 요즘도 편안하시지요. 안부 전화를 했다. 언제 한번 또 우리 그곳에서 식사나 합시다. 전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망팔의 노익장답게 지금도 카랑카랑하다.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민족의 비극 6. 26 전란이나 월남참전 등에서 그의 국가관으로 정립된 충정(忠正)은 바로 우리가 공동으로 지켜나가야 할 숙명임에 틀림없다. 건강을 기원한다.*
*2009.12월호 [문학공간]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