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늘같이 넓고 바다같이 깊게(태을금화종지) 2/4
오래된 우화가 하나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네 명의 천사가 다가와 물었다고 한다. 첫 번째 천사는 어떻게 창조하느냐고 물었다. 두 번째 천사는 왜 창조하느냐고 물었다. 세 번째 천사는 언제 그 일이 끝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네 번째 천사는 뭐 도와 드릴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첫 번째 것은 과학자의 질문이었다. 두 번 째는 철학자, 세 번째는 정치가, 그리고 네 번째는 종교가의 질문이었다. 존재에 대한 과학적 탐구는 객관적 관찰에 의한 탐구이다. 과학자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객관적이기 위하여 그는 대상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 참여하는 순간 그 속에 포함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는 뛰어들 수 없다. 그래서 과학자가 알 수 있는 층은 존재와 생명의 겉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내부의 핵은 여전히 미지로 남는다. 방법 그 자체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철학자는 사색만 할 뿐 실험해 볼 줄은 모른다. 그는 극한에 이르기까지 (ad infinitum )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어떤 대답이 주어지든 간에 다시 '왜?'라는 질문이 던져지게 되어 있다. 철학을 통해서는 어떠한 결론도 기대할 수 없다. 철학은 언제까지나 결론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그것은 무의미한 행위이며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정치가는 단순히 세상을 장악하여 소유하고자 한다. 정치가는 폭력적이기 때문에 가장 위험하다. 삶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삶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에 있다. 그는 권력에 굶주리고 권력에 미쳐 있다. 그는 파괴적이고 광적이다. 그대가 무엇을 소유하는 순간 그것은 죽는다. 소유물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를 소유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나 여자를 소유해 보라. 죽음 밖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을 소유하게 되면 죽음만이 초래될 뿐이다. 죽음만이 무엇의 소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자유이다. 근본적으로 삶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것은 소유되는 것이 아니다. 은행에 집어 넣을 수도 없고 그 둘레에 선을 두를 수도 없다. "이것은 내 것이다." 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경멸적이고 이기적이다. 미친 짓이 되어 버린다. 삶이 오히려 우리를 소유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삶에게 점점 더 소유당해야 한다. 모든 것이 변해야 한다. 소유하려 들기 보다는 전체에 의해 소유당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가는 결코 삶의 진실과 조우할 수 없다.
종교가는 참여자다. 그는 삶과 함께 춤을 추며 존재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는 삶을 돕는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존재에 귀의해 있다. 그는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지식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존재와 조화를 이루는데 그의 모든 노력을 다하며 그것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그 궁극적 경험에 대한 동양의 언어가 사마디(Samadhi)인 것이다. 그것은 두 단어로부터 왔다. 삼(Sam), 그것은 '함께'를 의미한다. 똑같은 어근이 영어에도 있다. 동정(Sympathy)이나 심포니(Sympony)라는 말 속에 있다. 약간 변형되었지만 통합(Synthesis)이나 동시성(Synchronicity)이라는 말 속에도 있다. 이처럼 삼(Sam)은 '함께'를 의미한다. 아디(Adh,)는 주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어의 종교(religion)라는 말의 뜻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것은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분리되거나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체성 속에서만 사람은 알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경험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다. 종교란 하나의 위대한 실험, 진실로 가장 위대한 실험이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과학은 사물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 종교는 주체 그 자체를 실험한다. 모든 관심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을 알지 못하면 다른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내면 깊숙이 무지가 도사리고 있다면 나의 모든 지식은 한낱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것은 무지 위에 기초를 두고 있고 무지 속에 뿌리를 박고 있다. 먼저 나의 내면에서 빛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주위를 비출 수 있다. 그래야 주위의 경계가 생기는 그곳에까지라도 빛이 뻗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먼저 그 빛은 나의 내면에서 반짝여야 한다. 첫번째 불빛은 나의 주체성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나의 중심이 빛으로 가득할 때, 그때야 비로소 알려진 모든 것들이 실제로 알려진다. 그대가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아는 주체가 거기에 없다면 어떻게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그대 자신이 깊은 어둠 속에 있다면 그대가 바깥에 만든 모든 빛들은 기만과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인 질문이야말로 존재에 있어서의 가장 위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몇 가지 이해해야 할 일이 있다. 종교는 살금살금 걸을 수 없다. 춤을 추든지 아니면 죽든지 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종교는 춤을 추지 않는다. 그래서 죽어 있다. 종교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기어 다니고 있다. 그것들은 날으는 방법을 잊어 버렸다. 독단은 죽음에 불과하거늘 종교는 독단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하나의 시체이다.
살아 흐르고 날기 위하여 종교는 하나의 경험이 되어야 한다. 이론이나 신학이 아닌 하나의 명상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학, 철학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어야 한다. 그리고 완전하게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계속해서 무언가에 대해 알 수는 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을 알 수는 없다. 무엇에 대하여 아는 것은 그것의 핵심을 꿰뚫지 못하고 계속해서 주위를 맴도는 것에 불과하다.
종교는 기어다닐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종교들은 기어 다니고 있다.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그들은 모두 기어 다니고 있다. 모두 변명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모두 과학의 발달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들은 과학과 싸워왔다. 과학의 발달을 막기 위하여 갖은 수를 다 써 보았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이제 그들은 과학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하여 나서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부차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과학의 지지하에서만 그들은 존재할 수 있다. 과학적 논쟁이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만 그들은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생이다. 종교는 더 이상 자신의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과학으로부터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남에게 빌려온 삶, 기생적인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시대는 지나가 버린 것이다.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종교가 일단 독단이 되어 버리고 더 이상 체험이기를 거부할 때, 그것은 자동적으로 죽는다. 그리고 죽은 몸은 스스로 설 수 없어 누군가가 거들어 주어야 한다. 모든 교회와 사원들은 거들어지고 있다. 스스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는 스스로 선다. 그리스도, 구세주는 스스로 선다.
종교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그때 그것은 살아 있으며, 꽃이 만발하고 아름다운 향기가 가득하게 된다. 종교를 다시 꽃피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내가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이다. 어떤 지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종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진실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지지를 얻기 위하여 과학에 눈을 돌려야 하겠지만 진실한 종교는 그렇지가 않다. 만약 종교가 춤추고 살아나기 시작한다면 과학은 오히려 종교의 지지를 필요로 할 것이다. 과학은 그 지지기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나날이 볼품 없어져가고 있다. 그것은 나날이 반생명적(life-negative)이 되어가고 있다. 나날이 정치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발견한 것이면 무엇이든 간에 정치가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모든 과학적 성과들이 죽음을 획책하는데 쓰여지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생명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과학적 노력의 90%가 전쟁을 위한 것들이다. 과학은 그의 면목을 잃고 있다. 만약 종교가 춤추지 않는다면 과학도 더 이상의 장래를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과학은 그 지지를 얻기 위하여 종교로부터의 약간의 힘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종교가 다시 되살아난다면 과학은 종교의 일부분 내지는 그림자가 될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과학은 정치가들의 미친 짓들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인간은 점점 지구의 대파멸이라고 하는 종착역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종교적인 힘만이 그것을 막을 수 있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실험들이 매우 미약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란 무한하다. 인류의 미래는 이 한 가지에 달려 있다. 종교가 인간을 이끌어야 하고, 인간에게 대하여 주도적인 영향을 행사해야 하며, 인간의 꿈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명심하라. 그것은 아주 어려운, 거의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꿈처럼 여겨지게 마련이다. 인간은 용기를 잃어 버린 지 오래다. 이제 그들의 꿈은 하잘 것 없고 아주 세속적이다. 더 이상 초월을 꿈꾸지 않는다. 그리고 기억하라. 그대가 만약 초월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대는 무의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초월과 접했을 때만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다.
위대한 전체의 부분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대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대보다 높은 것, 그대보다 큰 것의 부분이 되었을 때 말이다. 인간이 자기를 극복하려고 할 때 거기에 종교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종교의 춤' 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 다른 어떤 동물도 그것을 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소수만이 자신을 뛰어 넘어 피안에 다다른다.
그리고 내가 말할 때, 그것은 피안으로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빌어온 지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나에게 이미 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으며 그대에게도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대의 내면이 빛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대의 내면에 어둠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면 그때 그대는 종교적이 된다. 거의 불가능한 그 꿈이 처음에는 불합리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일지라도 만약 그것이 충분히 강해진다면 그대를 변형시킬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언덕 중턱에 세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바람에 흔들릴 때면 그들은 무엇이 될 것인가를 꿈꾸곤 했다.
"어느날엔가 베어져 나는 어린 아이의 요람이 될 거야." 첫번째 나무가 말했다.
"나는 보물과 매우 값진 보석을 나르는 커다란 배가 될 거야." 두번째 나무가 말했다.
"나는 언덕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리켜 주어야지." 세번째 나무가 말했다.
어느날 벌목꾼들이 와서 첫번째 나무를 베며 말했다. "이것으로 말구유를 만들자."
"나는 말구유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어린애의 요람이 되고 싶단 말예요" 나무는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나무로 말구유를 만들었고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그를 눕힐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 속에 그를 눕혔다. 그러자 나무는 말했다. "이건 정말 내가 꿈꾸던 것보다 훨씬 나은 걸."
벌목꾼들은 두 번째 나무에게 말했다. "이것으로는 고기잡이배를 만들자."
그러자 나무가 말했다. "안돼요, 나는 고기잡이배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보물과 귀한 보석을 나르는 커다란 배가 되고 싶단 말예요" 그러나 그들은 그 나무로 고기잡이배를 만들어 호숫가에 놓아두었다. 그리하여 시몬 베드로라고 불리는 사람이 그 배를 샀고 예수는 그 배에 타고 항해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러자 그 나무가 말했다. "이건 정말 내가 꿈꾸던 것보다 훨씬 이상인걸."
그리고 세 번째 나무에 대해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으로는 십자가를 만들자."
그러나 나무가 말했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그런 수치스런 십자가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언덕 위에 서서 사람들에게 천국을 가리켜 주고 싶단 말예요." 그러나 그들은 그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었고 예수는 그 위에서 못 박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사람들은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고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뜻하게 되었다.
나무조차도 무언가를 꿈꿀수 있으며 그것이 될 수 있다. 하물며 사람임에야! 인간은 이 지구상의 존재 가운데서 가장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대가 만약 무언가가 부족하다면 그것은 자신을 능가하는 커다란 꿈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는 세속에 만족해 버렸다. 그대는 땅 위를 기어 다니며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대는 위를 바라보지 않는다. 거기에는 그대를 부르는 커다란 저 너머의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그대에게 다가오는 커다란 초월의 존재이다. 그리고 초월적인 것을 받아 들이는 사람만이 진정한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름과 형태만 사람일 뿐이지 진정한 사람이 못된다. 사람이 되어라. 미지와 초월로부터의 도전을 받아 들여라. 그것이 그대의 존재 가운데서 커다란 꿈이 되게 하라. 드러나 보이는 것은 단지 씨앗에 불과하다. 그 씨는 땅에 떨어져 죽고 나무가 되어 꽃을 피워 올려야 한다. 씨를 쪼개 보아도 거기에 나무는 없다. 그곳이 바로 과학이 모든 것을 놓쳐 버리는 곳이다.
과학은 계속해서 씨앗을 쪼개며 말한다. "이 씨앗이 훌륭한 꽃을 피울 거라고? 그럼 우리는 씨앗을 쪼개 살펴 볼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씨앗을 자르고 쪼갠다. 그들은 씨앗을 쪼개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꽃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꽃은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신도 영혼도 초월적인 것도 없으며 삶이란 우연에 불과하며 거기에 어떠한 운명 따위도 없다고 말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선사 이큐( Ikyu )의 유명한 말이 있다. "벚꽃나무를 쪼갠다고 해서 어디에 꽃이 있겠느냐마는 봄이 되면 그들은 피나니."
봄을 기다리라. 보고자 원한다면 봄을 기다리라. 그러면 그대는 인간이 아닌 붓다를, 사람이 아닌 예수를, 사람이 아닌 크리슈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씨앗이 아닌 꽃을 보게 될 것이다. 씨앗은 사라졌다. 그 의무가 끝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한히 가치있는 무언가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청사진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필요가 없어졌다. 토양이 발견되었고 봄이 왔으며 씨앗도 죽음을 무릅쓸 용기를 갖추었다.
인간의 에고(ego )는 씨앗에 불과하다. 그것은 매우 방어적이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묻는다. 만약 에고가 그렇게 하나님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면 왜 첫 번째 자리에 그것이 존재하느냐고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장벽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마음이 존재하느냐고, 그것은 마치 씨앗의 딱딱한 껍질이 알맹이를 보호하듯 그대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알맹이는 매우 부드럽다. 만약 딱딱한 껍질이 둘레에 없다면 그것은 상해버릴 것이다.
딱딱한 껍질은 적이 아니다. 그 껍질은 봄이 오고 토양도 발견되어 씨앗이 죽음을 거부할 때만 적이 될 것이다. 만약 그 껍질이 봄이 와도 계속해서 너를 보호할 것이라든가 토양이 있어도 너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문제는 생긴다. 에고 그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어린애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없다면 어린애는 보호받지 못할 것이다. 이 투쟁의 세계에서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그렇게 많은 위험들로부터 어떻게 자신을 보호해야 할지를 모를 것이다. 그는 너무 연약하고 부드러워서 붓다가 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를 에고가 도와주게 된다. 에고는 일종의 갑옷이다. 마음도 그렇다. 그것이 그를 보호해 주는 것이다.
에고는 적이 아니다. 그것은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그대가 명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방해가 된다. 그대는 스승을 발견했고 방법을 알았으며 준비 또한 되었다. 그러나 마음은 속삭인다. "아니야. 난 죽을 수 없어, 내가 그대 위에 부어 준 모든 축복들을 생각해 봐. 내가 가져다 준 그 모든 이익들을 생각해 봐. 내가 해 준 모든 것들을 생각해 봐. 그러니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를 파괴하려 들지 마."
그때 문제가 생긴다. 그때 보호자는 파괴적이 된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마음과 싸워야 하고 자신의 에고와 싸워야 하며 자신의 갑옷과 싸워야 한다. 갑옷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봄이 왔고 이제는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고는 봄이 왔을 때만 문제가 된다. 그렇지 않을 때는 문제가 안된다. 도움이 될 뿐이다. 도움은 방해가 될 때가 온다는 사실, 그러므로 때가 오면 그것은 물러가야 하는 것이다.
불가능을 꿈꾸라. 초월을 꿈꾸라. 열반을 꿈꾸고 해탈을 꿈꾸며 천국을 꿈꾸라. 그래야만 그것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야만 그 꿈과 함께 그대의 발길에 춤이 어리게 된다. 꿈이 없다면 그대는 우둔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빌빌거리는 이유이다. 어떻게 그들이 춤출 수 있겠는가? 무엇을 위해서?
매일 같이 사무실에 나가서 일하고는 돌아와 아내와 다투고는 아이들의 그 모든 불평들을 듣기 위해서? 그리고 다음날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해가 가고 오지만 춤출거리라곤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사람이 어떻게 매일매일 살아갈 수 있는지, 왜 자살을 하지 않는지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과연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가 바라고 기대할 만한 것도 아무것도 없다. 하늘에는 별 하나도 없고 칠흑같은 어둠 뿐이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 어떻게 그럭저럭 꾸려 나가는지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자살하는 사람이 보다 논리적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비참하고 지긋지긋하게 질질 끌려 다니면서도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언가를 보여준다. 딱 한 가지, 그대 내면의 존재는 가능성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대가 깨어나 잠재력과 가능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그 꿈이 그대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때는 거기에 의미가 생기기 시작하고 춤이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