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동란과 화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정부는 부득이 부산으로 후퇴하는 동안 인민군은 7월 23일 오전 11시경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에 침입하였다. 이날 정오 무렵에 광주는 완전히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동일 13시경 화순의 경찰병력이 후퇴하자 적은 아무런 저항없이 화순에 침입하여 왔다.
6.25가 발발한지 한달만에 전라남도는 완전히 적군에 점령당하고 이로부터 수복에 이르기까지 3개월여 동안 적치하에서 만행이 계속되었다. 9월 15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고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공격전을 개시하자 이에 퇴로를 차단 당하고 남하하였던 호남지구 일대의 패잔병력과 공비들은 심산준령 험산지대로 도피하면서 지방적색분자 좌익계열과 더불어 유격대를조직하고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지리산에 유격총본부를 설치하고 험준한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하여 각처에서 군경의 보급로차단, 식량약탈, 경찰지서 및 관공서습격, 차량기습, 통신방해와 살인, 방화 등을 자행하고 있었다.
10월 4일 화순경찰병력이 화순을 수복하였지만 지리적으로 산악이 많고 지리산으로 도피하는 길목이 된 화학산, 천운산, 모후산, 백아산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유격대가 준동하고 있어서 재산상의 피해도 막대하였고 양민학살과 방화사건도 빈번하였다.
10월 15일 국군 11사단 20연대가 이곳에 진주하여 적의 주력박멸작전을 전개하여 크게 타격을 주고 1951년 4월 15일에 제8사단에 호남지구 토벌작전의 임무를 인계하였다. 8사단은 예하부대 및 전투경찰대, 청년방위대 병력을 지휘하여 백아산지구, 장흥군 유치면 구사봉지구에서 준동하는 잔비소탕전을 성공리에 완수하였다.
6.25남침으로 7월 23일 광주와 화순에서 후퇴한 후 10월 4일 수복까지 73일간 공산치하에 있던 내막을 인민군도당과 함께 살펴 보도록 한다.
● 인민공화국 전라남도당
.도당위원장 : 박영발(이북출신, 박헌영 추천인물)
.인민유격대 사령관 : 김선우(장흥 웅치출신, 인천민청위원장, 경기도당선전부장 전남도당부위원장)
. 빨치산 전남도당 위원장 : 전인수
. 빨치산 지리산 유격대 사령관 : 김백수
. 유치지구 유격대 사령관 : 황점택
. 유치지구 민청년대 부대장 : 한일수(목포시민청련, 완도군 신지출신)
. 백운산지구 빨치산대장 : 남태준(여수 14연대 출신)
. 도당부서 : 도당부위원장(김인철), 조직부장(김홍배- 후에 김영우 〈나주금천출신, 목포시당위원장, 유치유격대 부대장 〉), 선전부장(선동기), 간부부장(정규석) 노동부장(오금기), 농림부장(이방휴- 후에 유치지구 유격대장)
● 인민위원회 화순군당
. 화순군당위원장 : 박갑출(화순탄광노조출신, 도당책 역임)
. 화순군당부위원장 : 이태학(이북출신, 인민군)
. 산하에 각면당, 민청련, 유격대를 둠
● 화순군 인민위원회
. 위원장 : 조정현(일본침탈기에 한천면서기, 빨치산으로 지리산입산, 6.25남침 즉시 화순에 와서 정세를 파악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함)
. 산하에 각면인위와 이동인민반, 민청, 부녀동맹, 사년단, 조보위, 수매원 등 부서가 있다.
● 화순내무서
. 내무서장 : 최구현(빨치산 출신, 27세)
. 연맹책 : 방기성(일명 방달 : 화순면 일심리 출신)
. 인민재판, 반동체포, 보도연맹으로 부터 정보입수, 양민의 수감 및 처형 함.
● 조국보위후원회
. 군인민위원회에 속하나 임무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조달, 의용군모병을 했다.
● 정치보위부
. 당성이 강한 이북출산자들이 맡아 군사정보 수집, 반동자 규제를 담당했다.
● 화순면
1950년 9월말경 화순에 진주한 인민군은 지하당(치안대)를 조직하여 경찰서를 내무서로 칭하고 관내 지역유지, 전.현직공무원, 사회지도층을 내무서에 감금, 취조하였다. 그중 주요인물 100여명은 모진 고문을 하고 광주형무소로 이송하였는데 한달여뒤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후퇴하기 전 광주형무소에 감금되었던 화순내무서에서 송치한 32명을 석방시켜 준다며 포승줄로 묶어 너릿재를 넘어 교리저수지로 끌고와 일렬로 세워놓고 잔혹하게 사살하였다.
1950년 10월 3일 인민군이 후퇴한 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잔비들과 교전을 벌였는에 한밤중에 인민군의 기습으로 군청, 경찰서, 우체국, 등기소, 금융조합, 전매서창고, 면사무소 등이 소각당했다.
1950년 11월경 공산잔비가 후퇴하지 못하고 무등산 및 관내 산속에 은거하면서 마을을 습격하여 주민을 살상하고 식량을 강탈해가자 한국청년단 및 경찰이 수만리 주민을 면내로 대피시키고 마을을 완전 소각시켰으며 동구리, 삼천리 3구, 다지리 2구도 주민을 대피시키고 잔비 토벌을 위해 마을을 소각하였다.
1951년 인민군 잔비들이 야간이면 마을에 내려와 습격을 하게 되자 아군은 교리, 향청리, 만연리, 신기리, 광덕리, 삼천리 등 6개리를 중심으로 대 울타리로 방어망을 설치하고 학교산, 남산, 알뫼산 등 3곳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1951년 11월 8일 잔비들의 야간기습으로 화순중학교 교사 3분의 2가 소실되었다.
너릿재 계곡과 교리 도축장, 이십곡리와 동구리 저수지에서도 인민군에 의해 피살된 양민이 다수 있었다.
● 한천면
1949년 한계리 2구 한천국민학교 앞에 지서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반란군의 습격으로 근무중이던 의경 3명이 생포되어 철사줄에 묶인채로 지서의 전소와 함께 산화되었다.
1950년 8월 아군이 공비들의 근거지를 없앨 목적으로 가암리 1구 마을의 가옥을 전소시켰다.
1950년 10월 잔비들의 습격으로 한천지서가 소각당하였고 산간마을이 전소되었다.
1950년 10월 25일 묘치 기습작전이 있던 이튿날 화순경찰서 기동대 1개소대는 한천관내 수색중 오곡마을 뒷산에서 공비를 발견하고 교전을 벌인 결과 공비 10여명을 사살하고 다발총등 무기 15정을 노획하였다. 여기서 경찰은 1명 전사, 2명 부상을 입었다.
패배로 입산한 화순군당은 1950년 10월 1일부터 11월 19까지 장기간에 걸쳐 동산촌에 자리를 잡고 각 블럭에 지령, 지서습격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1950년 11월 19일 육군 제11사단 20연대 소속 일부부대가 한천 야산지역을 무심코 수색중 동산촌에 은거한 공비를 발견, 보이는 데로 집중사격을 하니 화순군당 조정현은 많은 병력을 잃고 사기도 잃은채 군당 제3블럭인 말봉산으로 피신하여 천태산 잔비와 합쳤으나 계속된 군경토벌작전으로 결국 그는 전남도당 제3지구인 유치 화학산으로 들어갔다.
● 춘양면
1950년 10월 30일 잔비들이 용두리 진입로 앞 철로에서 열차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철로에 깔린 잡석을 제거하여 지나가던 열차가 1량만 남고 전복되어 타고 가던 군인과 민간인이 다수 사망하고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1951년 3월 25일 제68사단 소속부대가 청풍면 한지리 앞 하천변에 본부를 두고 잔비토벌 작전을 전개하던 중 천태산 개천사에 잔비들이 점거, 저항을 하자 아군이 개천사내에 있는 천불전을 비롯 칠성전등 부속건물 일체를 소각하였다.
춘양지서는 화순군당 제3블럭이 자리한 말봉산, 천태산이 인접하여 항상 주야를 막론하고 경비를 소홀히 할수 없었으며 경전선이 지나고 있는데 1950년 11월 22일 공비들이 야간을 이용, 일부는 지서피격에 투입하고, 일부는 지원병력에 대비하여 능주면 잠정리 오리정에 은거하고 있다가 공비출현을 보고받고 출동한 기동대 2개소대를 기습하여 기동대원 4명이 사살당했다.
● 청풍면
1950년 11월 15일 잔비의 만행으로 면사무소와 청풍국민학교가 소각되었다. 1951년 10월 잔비들이 한지리 수무골, 대비리 용동, 백운리 화계, 이만리 이목동, 세류동 마을을 전소시켰고 야경중이던 김근호외 21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
1951년12월 청용리에서 장흥, 유치 국사봉에 있는 인민군 박달부대와 혈투로 인민군 박달부대장 및 인민군 소탕과 유격대 및 전남도당위원장 최현을 포살했는데 이 전투로 상호간 피해가 막심하였다. 한편 아군 예비사단과 인민군의 전투가 봉미산에서 벌어졌는데 아군 1개 부대가 전멸하는 피해를 가져왔다.
1951년 4월 25일에 수복한 청풍지서는 유치와 화학산(유격대 사령부) 때문에 수복이 늦었다. 1951년 7월 7일 공비들이 야간에 지서를 습격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장우남 지서장과 차석 오성태는 차리고지와 신리고지에 가서 인원장비를 점검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공비들이 이만, 신석 계곡과 청용, 백운에서 내습해 오자 선제공격을 가하여 공비 상당수를 사살하고 다발총 등 무기 2정을 노획하였다.
1951년 8월 7일 화학산 공비들이 보복코자 심야에 기습하여 왔다. 차리고지에 있던 순경 신길우외 3명은 전사하고 초소마저 소각 당했고, 신리고지에 있던 순경 김매출 외 3명도 역시 전사하고 초소는 소각당하고 무기를 피탈당한 참사를 당했다. 이양지서에 주둔하고 있던 기동대 양윤종 소대가 와서 진압하였으나 기동대원 1명도 전사했다.
● 이양면
1950년 아군이 반란군을 토벌한 목적으로 묵곡1구 어시량마을 37호를 소각하였다.
1951년 10월 장흥 유치에 본거지를 둔 반란군이 화학산을 경유, 백아산으로 이동하면서 방화하여 장터에 있던 면사무소, 이양국민학교, 연초창고, 우체국, 금융조합, 지서가 소각되었다.
이양국민학교에 8사단이 주둔하여 인근지역에도 방어 배치하고 1개 중대가 학교림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중 말봉산에서 내려온 반란군이 중대를 습격하여 총격전과 육박전을 벌였는데 아군은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고 대패하였다.
말봉산과 두봉산을 타고 내려온 장흥 반란군과 도림주재소에 주둔한 경찰이 매정리1구 상매정마을에서 접전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사전에 대피하고 50여호를 소각시킨 후였다.
1950년 11월 7일 이양지서를 수복하였는데 이양은 서쪽으로 유치 화학산에 도당블럭이 위치하고, 서북쪽으로 말봉산에 제2군당 블럭이 있으며 본서와도 원거리로 작전상 취약성이 많은 곳이나 지서수복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른편이었다. 지서장 정래복과 석상벽등 1개소대와 민동식 면장은 지서수복 당일에 함께 있었는데 공비들은 청풍면 신리, 세청리, 품평리, 오류리 방면에서 지서를 목표로 내습해 왔다. 지서에서는 수복당일 사방에다 초소를 구축하고 경기관총까지 갖추는 등 대비를 해 놓았는데 공비들은 철로를 타고 이양역에 까지 진입, 2시간 동안 교전을 했다. 공비들은 기관총에 가까이 오지 못하다가 날이 새면서 퇴각해 갔는데 민간인 2명이 죽고 순경1명이 부상당했다.
● 능주면
능주면사무소로 사용하던 동헌(옛 능주군청)건물이 1950년 7월 27일 인민군 진주로 인해 인민위원회로 사용하던 중 동년 9월 29일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소각하였다. 이날 능주에 거주하던 애국청년단원 5명이 능주면 잠정리 안산(향교산) 아래에서 인민군에게 사살당했다.
1950년 10월 초 제일 먼저 수복한 곳이 능주지서였다. 1951년 1월 11일 공비들이 야간에 지서를 습격해 왔는데 아군이 공비들의 침입로인 능주향교 앞 골짜기를 차단하자 공비들의 공격으로 혈전이 전개되어 순경1명이 전사하고 공비3명을 사살했다.
1951년 2월9일 공비들이 재차 지서 습격을 감행, 경찰과 시가전을 벌였는데 순경 1명이 전사하고 공비5명을 사살하였다. 1951년 8월 30일 밤 공비들도 또 다시 야간에 기습하여 지서뒤 포태를 집중 사격하면서 수류탄을 투척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최복기 순경과 김만기 순경이 전사하였다. 정문초소에 있던 박병준외 2명이 곧바고 뒷편 포태로 이동하여 사격과 수류탄 수발을 투척하며 반격한 결과 공비들이 물러났는데 그후 서로 공포만 쏘다가 본서 기동대가 도착하는 차소리를 듣고 도주하였다.
● 도곡면
1950년 10월경 효산리 745-1번지에 있던 면사무소와 722-2번지에 있던 지서가 잔비들의 후퇴와 함께 소각당하였다. 1951년 1~2월 경 지서에 주둔한 군경합동반은 대곡리 3구 외대곡마을에서 입산한자의 가옥 6개를 소각하고, 효산리 2구 모산마을에서 입산한자의 가옥 6동을 소각하였다. 한편 도암면으로 진주키 위해 군. 경합동반은 쌍옥리 2구 쌍정마을 입구에서 잔비들의 기습을 받아 2명이 피살되었는데 아군은 이곳을 공비주둔지라 하여 78가구 중 75가구를 전소시켰다.
● 도암면
1950년 10월 우치리, 호암리, 왕정리, 행산리 마을이 전소되었으며 양민을 죽창으로 잔인하게 살상하였다. 1950년 12월 5일 도암지서를 수복하였는데 본서와 원거리이고 천태산, 말봉산 등이 있는 취약지역으로 다른지역에 비해 늦게 수복하였다. 지서장 박태근은 박병만 면장과 합의하여 천태국민학교 위 고지에 지서와 면사무소를 두고 초소와 진지를 구축, 습격에 대비하였다. 12월 10일 공비들이 습격해 왔으나 지형상 접근하지 못하고 마을에 침입하여 원천리에서 G2 군속1명이 발각되자 현장에서 사살하였고 박병태(이서지서근무, 도암출신)가 휴가차 와서 문원식(천태리거주, 제대군인)과 형남도(도장리거주)과 함께있다가 총소리를 듣고 박병태는 뒷집으로 피신했으나 나머지 둘은 공비들에게 붙잡혀 형남도은 뒷산에서 총살당했고 문원식은 산으로 끌려간 뒤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면내 피해상황은 인명피해 남216명, 여65명, 계281명이며 건물피해는 민가354호, 공공건물 3동등이다.
● 이서면
1950년 11월 10일 도석리에서 잔비들이 면사무소, 이서국민학교, 지서에 방화하였는데 지서만 전소되고 면사무소와 학교는 일부만 소각되었다.
동일 도석리에 거주하던 김내섭외 5명을 싸리골에서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1950년 11월 15일 이서지서는 당시 월산리에 위치하고 있을 때 공비들이 내습하였다. 당일 방석보(도석리)방향에서 몰려온 공비 200여명(추산)이 총성을 내면서 지서에 접근해 오자 지서장 박희연(38대출신)은 정문초소에 우재호, 유제두, 고기석, 양원식, 김영근을 후문초소에 공영출, 노장원, 강홍문, 한남수, 박병태를 배치하고 지서장외 6명은 이동사격조로 편성 사방을 응사하면서 간혹 수류탄을 투척함으로써 공비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나 물염마을에 거주하던 이동실과 면서기등 2명이 숨졌다.
● 북면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후 북면에도 좌익사상을 가진자가 있었으며 백아산을 중심으로 공비들이 출몰, 민가로부터 식량등을 약탈해 갔다. 1949년 10월 공비소탕을 목적으로 국군 15연대 3대대가 주둔하여 원리 주재소앞과 아산국민학교 교정에 면민을 집합시켜 입산자 가족을 색출하여 아산국민학교에서만 약50여명을 처형했다.
이후 북면의 외딴마을 10여곳을 소각시키고 주민들은 인근마을로 대피시켜 마을주변에 대나무나 소나무로 울타리를 막고 출입문에 보초를 세워 출입자를 통제하였다.
본면 학천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15연대 3대대 1중대 병력이 공비들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였다.
1950년 6.25이후 양민들은 국군주둔지로 피난하였는데 하다, 와천, 외애, 길성, 수리마을은 이서면 보산리 난산마을로(11중대 주둔), 옥리 , 서유, 맹리마을은 담양군 창평면 대덕, 고서면으로, 원리, 남치, 송단, 방리마을은 곡성군 오산면, 입면으로 피난하였는데 전체면민 2,000세대의 70%인 1,400여세대가 이동하였다. 미처 피난하지 못한 주민은 공비를 따라 낮에는 산으로, 밤에는 마을로 이동하며 생명을 이어갔다.
1950년 11월~ 1951년 4월에 아군은 작전상 불리하다는 이유로 면사무소, 지서, 아산국민학교, 서국민학교 등 공공건물과 민가 약 4,000여동을 소각하였다. 1951년 봄 이서면 주둔 국군일부가 하다 앞산 고지와 와천 앞산 고지에 주둔하였다.
1952년 3월경 임시 면사무소를 와천리에 두고 면민구호와 행정사무만을 이어갔다.
1952년 6월경 경찰병력이 길성고지(군부등), 서유리(잿등)에 주둔하였다.
1952년 10월 ~1951년 4월까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는데 밤에는 공비들이, 낮에는 아군이 주민들이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을 쌍방에서 학살하였다(1,000여명 희생추정)
백아산은 해발 810m 고지로 정상에는 마당바위가 있고 주변에는 수많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어 빨치산 사단병력이 은폐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이다. 이 백아산에 1950년 9월 25일 전라남도당 유격대 사령관 김선우는 도당 유격대를 설치하여 자리를 잡고 그 곳에 노치, 동화계곡 등에 진지를 구축해 놓았다. 김선우는 위로 지리산에 있는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현상의 명을 받아 광양의 백운산, 화순의 화학산, 영광의 불갑산, 담양의 추월산 블럭으로 지령을 내린 사령부였다.
1950년 11월 중순경 광주군경합동작전지휘부에서는 1차로 항공편으로 전단을 살포하였고, 작전구역에 들어간 마을의 주민을 대피시켰다. 백아산 총사령부(빨치산 유격대사령부)는 노치리 놀치 뒷산 해발 약 700m고지에 있었다.
1951년 7월 20일경 안개낀 날씨를 이용, 화순 김호용 경찰서장의 작전지휘아래 화순 기동대 박춘식, 우재호등 2개 소대와 광산경찰서 오동열 중대병력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진격한 끝에 고지를 탈환하였다. 김호용 화순서장은 탈환한 고지를 지키기 위하여 타서에서 동원되어온 목포, 무안, 해남, 강진의 경찰, 노무원 등 480명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다음날 수많은 빨치산들이 이들을 완전포위 진격하여 오니 480명 전부 전사 당하여 총중고골로 되어버렸다.
백아산토벌작적이 장기화 됨에 따라 군경합동연합본부는 광주 미고문단과 협조,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미군 전폭기를 요청, 공격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와 함께 전폭기 조종사에게 화학산까지 폭격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로써 백아산은 광주 20연대, 전남경찰국 김동진 대대, 화순경찰부대를 비롯, 담양, 곡성경찰대 연합으로 전폭기를 앞세워 일대공격을 화학산에 이르기 까지 수회반복, 폭격을 가하여 대다수를 섬멸하였다. 이때 전폭기 1대가 저항하는 유격대에 의해 백아산에 추락할 정도로 유격대의 화력이 강했었다.
유격대 사령관 김선우는 전폭기의 피습을 받아 다수의 병력을 잃게 되자 잔비 일부를 이끌고 1951년 11월 백아산으로 도주했고, 일부 잔비는 지리산으로 도주하였다.
나머지 잔비는 얼마 되지 않았으나 북면지서, 원리고지, 수리고지에 수회 내습하여 아군과 접전, 피아 사상자가 많았다. 백아산토벌작전은 3년의 세월을 소모했고, 물자와 인명의 피해가 극심했던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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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광주 지역을 비롯한 화순지역의 6.25 당시 군경과 빨치산들의 교전 상황을 소상히 알려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6.25 사변 60주년에 즈음하여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광주와 온 호남인들에게 소상히 알려져서
자유 민주주의 대한 민국을 위해 정성을 다해 애국하는 국민 정서가 형성되기를 소원해 봅니다.
어쩌자고 언제까지 빨치산의 편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애도하며 그 정신과 추억에 사로잡혀 있을 수야 없는 일이 아니겠는지요
호남인들의 정신교육 자료로 귀하게 사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광주에 몸담고 있는 사람중 한사람으로서 이러한 비극이 있었던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고 자유민주주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신 선열님들에게 머리숙여 애도하며 추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