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언어와 시어는 다른가
우리가 시를 쓸 때 필요한 말을 시의 언어 또는 시어(詩語-poetic diction)라고 한다. 시의 언어는 시에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언어를 말한다. 어떤 특정한 언어만을 사용해야 시가 되는 이른바 ‘시적 언어’가 아니다. 우선 유치환의「幸福」의 일부를 보기로 하자.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그렇다. 우리 신문학 이후로 일상작인 구어(口語)로 자유시를 써왔다. 일상생활에서 나누는 구어, 그것이 시에 사용되는 언어이다. 그러나 그것을 한 단어씩 떼내어 본다면 아무 색채도 없는 그저 평범한 단어로 돌아가지만, 언어를 조합하거나 그 조합 자체가 각자의 사물에 대한 인식과 시 정신 또는 발상에 따라서 훌륭한 시의 언어가 된다. 그러나 시인은 단순히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동떨어진 무엇을 기본으로 하여 어떤 창조상의 세계를 언어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앞에서도 말한 이미지를 포괄한 언어,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들이다. 이런 언어들을 구사하여 착종(錯綜)시키면서 시인의 감동과 사유를 표현하게 되는데 이를 더욱 깊이 형용하거나 비유, 상징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그 복합적인 내용을 단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대체로 일상어는 다양한 개념과 통념을 지니고 있다. 가령 ‘꽃 같이 아름답다’는 언어는 아름다움에 대한 일차적인 개념뿐이라서 시인들은 이 때묻은 표현을 깨뜨리고 자신이 감동한 아름다움의 본질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의 언어는 다양하다. 부드러운 언어의 연결로 복잡하거나 난해한 부분도 시인의 언어 조합이 아니면 적절한 이미지를 살리지 못할 때도 있게 된다. 시인이 직면한 진실에 대해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시인의 시 정신의 엄격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시어는 ‘시적 언어’ 즉 시 창작에 사용되는 특별한 단어나 어구(語句)이다. 이렇게 본다면 시의 언어와는 달리 일상어와 구분되져야 할 것이다. 옛날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어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일상어도 시어가 된다는 견해이다. 현대 시인들은 대부분 구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대시에서는 이미 시어라는 개념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시학에서는 시어라는 개념보다는 비유를 시적 본질로 생각하고 이를 탐구하고 있는 경향이다. 어쨌거나 ‘시어는 언어를 초월한다’는 말을 새길 필요는 있다. 언어의 영역을 초월하는 데에 정제된 시어의 참맛이 있고 시의 진실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아무 단어나 시에 모두 도입할 수도 있지만, 시의 구성 조직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고 그 시어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미래를 지향하는 사물의 이미지를 부각시켜야 한다. 상실된 인간성 회복에 신선한 향기를 주고 만유(萬有)의 사물 본질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 심미안을 길러주어야 한다. 실제로 현대시는 시어의 선택에도 대담해졌다. 금기된 언어와 쌍말까지 등장하는가 하면, 너무 의미를 강조하다보니 난해시도 낳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직설언어든, 한자이든, 외래어이든 또는 추상 관념어이든 관계없이 시어가 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언어들이 시 전체의 앞뒤 문맥에 따라 어떤 자리에 놓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이미지로 바꿀 수 있는가하는 언어의 용법에 더 익숙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두고자 한다.
우리가 시는 언어 예술이라고 강조하면서 시인이 자긍심을 갖는 연유도 순수한 우리말인 토착어를 발굴하는 것이나 언어에 함유된 민족의 풍습, 역사 등을 이해는 등 우리말을 갈고 닦아야하는 책무 같은 것도 시인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미감의 언어로 잘 짜여진 비단폭 같은 시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시를 읽다보면 국어사전에도 없는 생소한 단어를 대하는 수가 간혹 있으며 어떤 시는 우리 맞춤법에서 정한 띄어쓰기나 문장법 등을 무시한 채 표현된 예를 볼 수 있다. 이를 들어 ‘시인은 언어의 무법자’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이는 아마도 시인이 직접 적절한 언어를 새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과 때로는 개인의 취향 또는 호흡 조절을 위해서 붙여쓰는 것을 용납할 수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는 아직 신조어(新造語)에 대해서는 그렇게 익숙하지가 않다. 그것은 억지로 만든 단어가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리도 없고 그 의미의 이해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목월의「靑노루」에서 보는 것처럼 ‘청노루’, ‘청운사’. ‘자하산’ 등이 모두 상상속의 사물이다. 하도 많이 읽어서 그런지 낮설지는 않아 보인다. 박목월은 ‘靑石 돌담’이니 ‘남도 삼백리’, ‘보랏빛 石山’, ‘水晶그늘’. ‘砂礫質’ 같은 상상의 신조어를 많이 구사하고 있어서 특이하다.
김춘수의「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내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는 것처럼 한 사물에 시인이 적절하고 아름다운 명명과 의미를 부여했을 때 비로소 그 사물은 시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조어이든 일상어이든 그 작품에서 가장 적절한 언어의 조합이냐, 그 조합 자체가 시인이 사물에 대한 인식과 시정신의 발상에 효과적이라면 모두 시의 언어로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시인은 단순한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말하며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약간 동떨어진 것을 기본으로 하여 어떤 창조상의 세계를 작품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시인의 고충이기도 할 것이다. 의미를 나타내는 언어, 이미지를나타내는 언어, 그것들을 구사하고 서로 섞여져서 조합하면서 시인의 감동과 사유(思惟)를 더욱 깊이 형용하거나 비유, 상징 등의 방법으로 복잡한 내용을 단적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서의 언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요즘 현대시에서도 간혹 대할 수 있는데 특히 이상 시인은 띄어쓰기를 무시하는 것은 그의 작품 전부가 그러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시의 목적과 시정신적 측면에서 보면 언어의 횡포가 되기 싶다. 간혹 맞춤법에 정한 문장부호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예는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밖에도 ‘때묻은 언어’ 또는 ‘죽은 언어-사어(死語 : obsolete word)'가 있다. 일상어는 다양한 개념과 통념을 지니고 있다. 가령 ’꽃과 같이 아름답다‘라는 형용은 아름답다는 말 그대로 한번의 개념만 줄뿐이지 자기가 느낀 아름다움의 본질은 표현되지 않고 있다. 시인은 과감하게 이 때묻은 표현을 깨뜨려야 한다. 이처럼 시의 언어(곧 시어)도 시대적 변화에 따라 역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무나 많이 사용하여 식상하거나 시대에 역행하는 언어들은 자제하는 것이 시의 위의나 시인의 위상에도 품위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 언어는 시 속에서 우리에게 존재를 보여주는 등불이 된다. 존재의 영역은 존재가 언어를 통해서 나타나는 범위에 국한하는데 가령 캄캄한 밤에 성냥을 켯을 때 성냥불이 비춰주는 그 범위만 환하게 눈에 보일 것이다. 이것은 암흑(또는 無) 속에 나타나는 존재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의 언어는 일상생활에서 단순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논리적인 기능보다는 정서적인 기능을 중시하는데 모든 사물과 관념의 시적 대상물에 대한 아름다움과 진실을 지적으로 판별하는 것은 물론, 언어가 지닌 음향, 즉 음악적인 미묘한 요소가 결합하고 있어서 신비하고 오묘한 맛이 조화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일상적인 담론에서도 말하는 주체(화자)가 있고 말하려는 화제가 있으며, 그것을 듣는 청자(聽者)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처럼 시에서도 화자(話者)의 표정과 상황, 그리고 담론(언어)에 따라서 독자(청자)에게 전달되는 시적 메시지가 어떠할까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시에서는 이런 화자와 그 어조를 통해서 반어법, 풍자, 역설법 등 다양한 표현기법으로 그 의미적 요소를 이해하려 하지만, 작품 전체를 이야기로 전개하여 주제를 적시하는 경향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시인이 어떤 사물에 관한 스토리를 전개하여 작품 전체에 포괄되는 의미를 추적하는 작법이다. 이것을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이라고 하는데 소설에서의 주된 기법이지만, 시에서도 많이 적용하고 있음에 유의하게 된다.
여기에서도 누가(화자) 어떤 목소리(어조)로 이야기(주제)를 들려주느냐하는 문제는 현대시와 언어의 불가분적 관계와 그 중요성을 우리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하물며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 언어 속에 존재의 거창한 문제가 깃들어 있어서 시인의 지적사유에는 낡아 버린 관념어(美辭麗句처럼 非詩的 언어)의 사용을 자제하고 자신의 언어계발에 몰입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시인들의 숙명적 과제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자리에 놓일 가장 적합한 언어 하나를 찾기 위해 날밤을 새우는 고충도 감수해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문학강연)
시와 인생은 함수관계인가
--자전적 에세이
시란 무엇인가라는 낡은 질문이 새로운 것은 무슨 연유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답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시의 정의를 요즘 와서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한생을 시 창작에 매달리다 보니 나의 좁은 뇌리에서 사유하는 방향이 시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확신을 증명이라도 하는 양 일상생활 자체가 모두 시로 귀결되는 듯하다.
어찌 보면 다양화, 경쟁화된 현실 사회에서 고매한 사유만 지향하면서 살아가려는 시인의 자존심이 심히 갈등을 동반하는 예는 많다. 그만큼 시적인 삶이 퇴색되고 산문적인 삶이 현재를 충만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의 인격체가 허약해질 수밖에 없는 무서운 현실에 시인은 고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5년째 맡고 있는 KBS 방송문화센터 시창작반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에 의하면 아직도 시와 시인의 기대는 새롭고 예지적이며 영원하다. 처음 시를 대하는 사람에게는 시 그 차체에 대한 신비감이며 시인에 대한 최상의 동경이다. 대개 연만하신 분들이 시창작반을 찾는 이유가 이런 양상으로 일치되는 것을 보면 아무리 삭막한 물질우위의 문명세계에 살아가고 있지만 지혜로운 영양분의 고갈을 느끼는 측면이 있음에 다행스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소녀, 청년시절을 진통하고 이제 중년을 넘어서 가정적으로 안정을 이룬 후에 다시 문학의 고행을 시작하는 계층이 많아졌음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남은 여생이라도 정신적인 면 그러니까 영혼의 위대한 진실이 무엇인가 나름대로의 인생관이 가미된 노래를 부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시는 최상의 마음의 가장 훌륭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 편의 시에서 그것이 영원한 진리로 표현된 인생의 의미라고 한다면 이를 만년에사 거두어 보려는 보람 있는 삶의 지표가 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시인에 대한 동경이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강한 집념이 팽배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시인은 신선과 같다는 옛 비유도 그러하려니와 인생에 있어서 숭엄한 존재가치로서의 표본으로 설정하려는 일종의 충족 욕구 같은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사실 시인은 소설가, 수필가, 평론가와 달리 사람 인(人)자를 붙여서 문학의 다른 장르인 집 가(家)와 구태여 구분 짓는 연유가 잘 반영된 듯도 하지만 이 인(人)이 상당한 고뇌를 요구하고 있는 점은 깊이 새겨보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요즈음 인쇄매체의 발달과 함께 문학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겨나서 시인으로 등단하는 문이 넓어져서 그 꿈을 이루는 기회가 비교적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 시인의 길을 너무나 안이하게 대처하는 경향도 있고 보면 어떻게 이를 이해해야할 지 약간은 부정적인 견해도 있는 것 같다.
시인의 길은 인생과 함수관계가 있다.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좋지만 시인이 되기까지는 먼저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할 중요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시인은 사물이나 인생을 관찰하는 동안 보통 사람들보다 예민한 감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가져야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현실 생활이나 그 생활을 통해서 얻은 경험을 소재로 한 것이 곧 시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시인이 존재할 필요가 없이 기록으로 남겨도 좋을 것이다.
똑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함께 체험한 일이라 할지라도 시인은 이것을 시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과 상상력이 있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냥 자기의 지나간 체험으로 끝난다는 마음의 자세가 다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시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인생과 어떤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정리해 나가야 할 것인가. 먼저 나의 인생에 있어서 나는 죽을 때까지 시를 사랑할 수 있으며 죽는 순간까지 시를 쓸 수 있겠는가가 문제이다. 시를 향한 투철한 정신, 인생의 마음밭에 깔려있는 충만한 시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시는 바로 나의 인생이다 라는 확고한 삶의 지표가 세워져야 한다.
옛말에 시자인심지감어물이성성자야(詩者人心之感於物而成聲者也)라는 것이 있다. 시는 성정(性情)에서 발생되어 사물에서 느낀 바를 운어(韻語)로 나타낸 것으로서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 논어에서는 공자의 제자 중에는 진항(陳亢)이란 사람이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와 함께 공부를 하면서 스승이 아버지인 백어에게 서당 이외에 집에서 따로 무엇을 배운게 있느냐고 물었다. 백어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일찍이 아버님께서 뜰에 홀로 계시거늘 내가 뜰을 지날 때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시경(詩經)을 읽었느냐 묻기에 아직 읽지 못하였다 한즉 시를 읽지 않으면 남과 더불어 말할 수 없다하여 시를 배웠노라’고 했다. 진항이 감복하고 그도 즉시 시를 공부하여 백어를 따라갔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불학시 무이언(不學詩 無以言)이라는 유명한 말이다.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앞에서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아주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또한 이어서 불학례 무이입(不學禮 無以立)라 하여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서 있을(살아 갈) 자격이 없다하여 시와 예를 중시했던 것이다.
이처럼 시나 예는 한 인생을 영위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이며 이를 잘 다듬고 이해하는 것은 특히 시인으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은 시와 인생과의 일치된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이 확실하게 정립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신석정 시인도 그의 <나는 시를 이렇게 생각한다>는 글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생에 대한 불타오르는 시인의 창조적 정신에서 결실되는 것이니 대상하는 인생을 보다 더 아름답게 영위하려고 의욕하고 그것을 추구, 갈망하는 데에서 제작된다면 그 시인의 한 분신이 아닐 수 없다고 했으니 시는 곧 인생의 수양이며 시인은 한 인격의 결집이다.
시인은 올바른 인생관과 정립된 가치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시는 그 사람의 마음(其詩其人心)이고 그 글은 곧 그 사람 자체이며 그 사람은 그 글이어야 한다. 진실이다. 그 사람의 됨됨이가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우리는 사무사(事無邪)라는 휘호를 많이 접한다. 이것도 논어에서 ‘시경의 시 삼백 편의 내용은 한 마디로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詩三百一言而蔽之曰 思無邪)’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얼마만큼의 인간에 대한 진실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의 진실이 곧 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실은 정의하기가 너무 광범위하지만 시적인 진실은 어디까지나 사랑의 실천이어야 한다. 순수하고 진솔한 삶의 진실도 내가 남을 사랑하면 남도 나를 사랑한다(愛人者卽愛之)는 신념이 무르녹아서 그 진액이 진실로 형상화되어야 한다.
이제 가을 기운이 완연하다. 그 많은 시인들은 저마다 시 한 편을 창작하기 위해서 또 고뇌에 쌓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내가 필요하리라. 시인은 지독한 고독과 갈등과 번민을 참아내는 인내심이 요구된다. 시가 돈이 되지 않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 고통을 극복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리라.
지금 와서 내 인생에서 진정한 시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두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도 내가 택한 시인의 길이 내 인생의 역정과 어떤 괴리는 없었는가하는, 존재가치의 배타적인 결함은 없었는가하는 자성의 기회로 삼고자 한다. 시인의 자긍심에 대한 조그마한 손상도 있어서는 안 될 터이기 때문이리라. ( 『생각과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