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매월 마지막 목요일은 봉사가 약속된 날이라 송학리 모새 골 도서관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어 서둘러 올라가니 혜경씨와 권 선생이 먼저 와 있었다. 은퇴 후 미국에 계시는 M목사님이 사역 중에 모아 놓은 소장본과 교인들을 위하여 만든 서가에 일렬번호 색인을 다시 붙이는 일을 1년 내내 해오고 있는 중이다. 처음 이 도서관을 방문 했을 때 족히 만 권이 넘는 장서들을 보면서
"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만 명의 학자들을 만나고 있는 중입니다."
라고 말하니 혜경씨 와 권선생이 깜짝 놀랐다.
" 아~ 정말 그렇군요.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지성이니 만 권의 책이라면 만 명의 지성과 한 자리에 있는 것이군요."
그렇게 시작하는 여자들의 웃음이 소프라노 F 보다 높았다.
컴퓨터로 색인 부를 찍어서 알파벳 순서로 분류를 한다. 신학, 철학, 문학, 에세이 순서로 고유 번호를 붙이고 다시 스카치테이프로 마감을 한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이 이외로 재미가 있다. 대학에서 문서 정보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평생을 도서관에서 옛 사람의 문자를 가지고 놀겠구나 싶었다. 간간히 차를 마시면서 쌓아 놓은 책의 표지들을 보다가
『신데렐라와 그 자매들』 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이어서 「인간의 시기심」이라는 부제가 더 마음에 끌린다. 미국인 앤. 베리, 율라노프 공저인 이 책은 유니온 신학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부부의 공저이다. 언듯 공리주의자 죤 스트어트 밀의 『자유론』을 떠올리며 이 책은 나의 아내 하리엘 테일러와 공동 연구 토론에서 얻은 결과로 그녀와 공저가 마땅하다는 서문이 떠오른다. 부부가 학문적 동지가 되어 서로 존중하고 연구하며 이론을 정립해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이었을까. 다시 앤, 베리. 율라노프 부부의 「인간의 시기심』 을 펼치며 사람들에게 가장 힘들고 괴로운 것이 인간의 시기심 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 심리 기저를 숨기기 위한 간교함과 오만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겠다 싶었다.
건너편 테이블에 있던 권 선생이 찾아든 책의 제목은 『고통의 창조성』 인데 저자는 제네바에 사는 비에르 렌체니크 이다.
역시 부제인 「세상을 주도한 사람은 모두 고아였다」 는 사실에 공감을 하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 줄리어스 시저. 촬스 5세. 리셀리의 추기경. 루이14세. 로베스 피에르. 조지 와싱턴. 나폴레옹. 빅토리아 여왕. 골다 메이어. 히틀러. 레닌. 스탈린. 에바페론. 피델 카스트로. 우푸에 부와니에. 등 300여명의 역사상 위인들이 모두 고아였다고 한다. 단 두 사람만 예외로서 비스마르크 수상과 드골 장군만 부모님이 있었다.
엠마누엘 무니에의 『제4월 법칙』 이나 성경에 나오는 종교 지도자 모세도 바구니에 담겨 떠내려 온 고아였다고 한다. 더불어 서울에 유명한 교회 목사님의 딸이 미국 유학 중에 만난 사윗감이 파양된 고아였다고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목사님은 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 한 달 동안 작정 기도를 했는데
"그 아이도 내 사랑하는 자녀다"
라는 말씀이 떠올라 결혼을 허락하기로 했다는 해피엔딩이다.
"아빠 그 애는 처음 한국의 부모님께 버림을 받았고, 둘째로 미국인 양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는데, 지금 나까지 그 애을 버리면 세 번째 버림을 받는 거야."
그녀는 목사인 아버지보다 더 큰 사랑을 실천한 딸이었다..
한 때 여성학 강의를 들으면서 여성에게 나타나는 '모성' 은 왜 이렇게 맹목적인가? 를 생각 한 적이 있었다.
질서 없이 혼란하고 부조리한 세상에 자신의 유전자를 두고 가야 하는 불안이 맹목적인 보호 본능이 된 것일까?. 그러므로 태어날 때부터 내편이 없는 고아는 이 무자비 하고 부조리한 세상과 싸우며 역경을 넘어왔을 것이다. 지지자 없는 환경에서 무엇이든 혼자 결정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찻잔을 든 채로. 잔디가 보이는 창가에서 살구꽃 나무를 본다. 작년 여름 내내 익어가던 복숭아와 붉은 보리수 열매를 생각하며 우리 세 사람의 인생도 만권의 서고에서 익어가는 책처럼 느껴진다.
여름이 오기 전 까지는 도서관의 수작업을 끝내야 할 것이다. 아니 가을이 오고 눈이 내리는 겨울일지라도 이 도서관의 정리 시간은 포근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잠잠한 손동작이 진행된 후 한 권 두 권 서가에 꽂히는 책들이 부러울 만큼 존중 받는 것을 느낀다.
책의 제목과 저자의 이름. 출판 당시에 나라와 도시까지 표시되는 고유 번호를 부여 받는 것 자체가 존중을 받는 것이다. 한 권 두 권 저자들의 이름을 보면서 그들이 생각하고 주장한 정신을 남길 수 있었던 옛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밀려온다. 그래서 시인이나 철학자의 사색과 기록을 보관하는 일 역시 소중한 것이다. 백년 혹은 천 년의 전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다가 갔는지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과 사실은 소중하다. 미국의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는 1920년대부터 단테 연구가 시작 되었고 그 연구자들의 주장과 토론 기록물이 보관 되어 있다고 한다.
다시 일렬 번호를 찾아 붙이기를 계속 한다. 오랜 외국생활을 했던 권 선생이 식물 도감에 꽃이나 나무 이름이 라틴어로 표기된 이유를 전해 준다. 현재 쓰고 있는 언어는 계속 진화를 하고 있어 50년 100년 전에 쓰던 언어라도 지금 쓰지 않는 말은 버리게 된다. 하지만 문법에 안 맞는 조어라도 여러 사람에게 통용된다면 새로운 가치로 사전에 올라간다. 라틴어는 죽은 언어로 진화를 멈추었고 그 변하지 않음 때문에 도감에 사용되는 거라고 한다.
유태인 아버지가 남긴 엄청난 유산으로 전 세계에서 출간된 고가의 미술책만 모아 도서관을 운영하던 그리스 청년이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배를 구하여 그 책들을 싣고 영국으로 망명을 했다. 그리고 그 청년은 세상을 떠났지만 당시의 책들은 영국의 보물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듯 인류의 문화와 예술은 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정책과 보존 기술로 유지되고 있다. 아버지의 유산을 가치 있게 쓸 수 있었던 그리스 청년 덕분에 영국은 전 세계의 미술 전공자들이 앞을 다투며 찾아 가는 나라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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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한학자가 자신이 소장한 책을 모두 없애고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를 찾아 쓴다고 해서 놀랐다. 눈부신 문명의 발달로 종이 책의 기능이 줄어들었지만 기계를 어떻게 믿고 손 때 묻은 전공서적을 모두 다 버렸을까. 앞으로 도서관 열람 안내나 서고 정리도 알파고가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의 사유나 감정, 사랑의 마음까지 알파고와 소통하는 세상이 오는 것일까? 시간이 흐르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무너진 다음 알파고 주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긴다면 세상의 모든 책들과 도서관의 기능은 어떻게 변화 될까. 지금도 누렇게 변색된 1970년대 문학지를 버리지 못하는 나는 바보가 되어 있을까?
이러저런 생각을 하면서 창밖에 봄빛을 본다. 경사진 모새골 골짜기마다 꽃들이 피고 숲속에 나뭇잎들은 푸른색을 더 해 갈 것이다. 서울시 건축 상을 받은 채플동 건물의 노출 콩크리트 외벽이 유클리트 기하학 도면처럼 휘어져 보인다. 푸른 빛이 감도는 녹회색 건물 위치가 백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줄 바위처럼 든든하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보이는 식당 건물과 티 룸에는 향기로운 홍차가 준비 되어 있다. 언제든 시간이 닿을 때마다 보고 싶은 책 몇 권을 꺼내 들고 종일 머물다 갈 수 있는 이곳에 평생 이용자가 되었음이 감사하다.
주차장에서 서울까지 돌아가야 할 권선생과 혜경씨와 인사를 한다. 시동을 걸고 좁은 외길을 따라 나오며 지금은 비어 있는 M목사님 사택에 회색 지붕을 본다. 만평의 대지 위에 아홉 동의 건물이 조화롭게 불을 켜는 작은 골짜기. 팔순의 나이에도 정신노동을 계속하는 목사님은 기적을 만드는 분이 아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한 의지가 하늘에 닿아 그 이루어짐의 결과는 놀랍다. 세상 어느 어두운 곳에서라도 비단실을 품고 자는 누에의 첫 잠 같이 깨끗하다. 계속해서 둘째 셋째 잠을 자고 있는 누에의 비단 실로 세상을 허물을 다 덮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 아닐까?
소설가 신혜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