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4장 21-27절. 하갈의 자녀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
이 부분에는 두 가지 비유가 대조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유대적 교회와 기독 교회( Jewish Church. Christian Church.)
여종인 하갈과 자유여인 사라( The bondwoman, Hagar. The freewoman, Sarah.)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과 자유여인의 아들 이삭( Son of the bondwoman, Ishmael. Son of the freewoman, Isaac.)
육의 사람과 영적인 사람(Natural birth the flesh. Supernatural birth the promise.
시내산과 시온산( Mount Sinai. Mount Zion.)
율법과 약속( The Law. The Promise.)
지상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 The earthly Jerusalem. The heavenly Jerusalem.)
종됨과 자유( Enslaved. Free.)
쫓겨남과 상속받음(Expulsion. Inheritance)
21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ell me, you who want to be under law, do you not listen to the law?
내게 말하라
Λέγετέ μοι,
Tell me,
‘말하라’(Λέγετέ)는 현재 명령형으로서(Tell me) 지금 말하라는 뜻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οἱ ὑπὸ νόμον θέλοντες εἶναι,
those under law wishing to be
‘있고자 하는’(θέλοντες εἶναι)에서 앞의 동사(θέλο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wishing) 계속 원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고, 뒤의 동사(εἶν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로서(to be) 계속 있고자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τὸν νόμον οὐκ ἀκούετε;
the law not you do listen to?
‘듣지 못하였느냐’에서 동사(ἀκούετε)는 현재형으로서(you listen) 현재 듣고 있지 못하느냐는 뜻입니다.
1.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이란 갈라디아 교인들중에 예루살렘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고, 율법을 지켜서 할례를 받고, 유대교의 절기를 지키고, 유대인의 성결법 규정들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참된 구원과 죄에서의 해방을 체험한 성도들이었지만, 중간에 예루살렘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통해서 구원받은 갈라디아 지방 성도들이 자신과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자, 무척 화가 나고, 의분에 사로잡혔습니다.
마치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복음으로서 죄와 마귀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시켜 참 자유인이 되게 해주었는데, 다시 유대교 율법주의로 돌아가서 죄와 마귀의 종노릇 하는 데로 되돌아려고 하자, 바울은 참으로 의분을 느끼고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는 원문에 현재형으로서(τὸν νόμον οὐκ ἀκούετε; the law not you do listen to ) 율법이 정죄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고, 온갖 불행에 빠지게 하는 것임을 현재도 듣고 있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즉 바울 당시의 갈라디아 지방에는 많은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는데, 그 회당에서는 매 안식일마다 율법사들이 율법 설교를 하면서, 얼마나 사람을 정죄하고, 절망하게 하고, 억압하고, 불행감에 빠지게 하고 있는지 그 현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을 통해서 구원과 해방의 복음 신앙을 갖게 된 갈라디아 교인들이 예루살렘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서, 다시 유대인 회당에서 하는 율법 설교와 예루살렘 율법주의자들의 정죄하는 설교를 듣고 있다는 뼈아픈 책망인 것입니다.
3. 율법주의자들(legalists)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은 완전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예수 믿은 다음에는 율법을 지켜서 살아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유대교인들처럼 할례받고, 절기들이나 성결법 규정이나 율법을 지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성령님을 따라 주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성도들은 참된 자유와 아들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They enjoy a freedom and sonship)
성령으로 거듭한 성도들은 초자연적으로 태어난 이삭처럼(extra-ordinarily-born Isaac) 새로운 신적인 인종(the new theocratic race)입니다. Jamieson-Fausset-Brown
22절.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t is written that Abraham had two sons, one by the bondwoman and one by the free woman.
기록된 바
γέγραπται γὰρ
It has been written for
직역하면 ‘왜냐하면 이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기록된’(γέγραπται)은 완료수동태로서(It has been written) 이미 기록된 것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ὅτι Ἀβραὰμ δύο υἱοὺς ἔσχεν,
that Abraham two sons had
직역하면 ‘아브라함이 두 아들들을 가졌다고’란 뜻입니다.
‘가졌다’(ἔσχεν)는 부정과거로서(had) 역사적으로 과거에 가진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ἕνα ἐκ τῆς παιδίσκης, καὶ ἕνα ἐκ τῆς ἐλευθέρας.
one from the slave woman, and one from the free woman
1. ‘기록된 바’란 창세기 16장 1-16절에서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과, 창세기 21장 2절에서 아브라함이 여주인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은 성경 기록을 가리킵니다.
2.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란 아브라함이 여종 하갈을 통해서 낳은 이스마엘과 여주인 사람을 통해서 낳은 이삭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실제로 아브라함은 이 두 아들만 낳은 것이 아니고, 후처 그두라를 통해서 여섯 아들들을 더 낳았습니다. (창 25:2)
그렇지만, 바울은 유대인 정통 랍비들의 비유적 해석을 원용해서 이 두 아들을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 랍비들의 해석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교적인 성도들에게도 익숙한 해석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이 역사적인 사건을 유대 정통 랍비들의 비유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원용해서 설명함으로써, 율법주의자들과 율법주의에 물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잘 납득되도록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3.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낳다’는 것은 이스마엘이 여종 하갈에게서 난 것과 이삭이 자유하는 여주인 사라에게서 난 것을 가리킵니다.
사라의 여종 하갈은 유대민족이 율법에 종살이 하는 것을 의미하는 구약 유대교를 가리키고, 여주인 사라는 복음으로 자유하게 된 신약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종과 그 아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는데(창 21:30),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유대교와 율법주의가 추방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이 비유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교회에서 율법주의 유대주의자들을 쫓아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3절.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the son by the bondwoman was born according to the flesh, and the son by the free woman through the promise.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ἀλλ’ ὁ μὲν ἐκ τῆς παιδίσκης, κατὰ σάρκα γεγέννηται,
but the (one) indeed from the slave woman, according to flesh has been born
직역하면 ‘그러나 여종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났고’(γεγέννηται)는 완료 수동태로서(has been born) 과거에 이미 태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ὁ δὲ ἐκ τῆς ἐλευθέρας, διὰ τῆς ἐπαγγελίας.
the (one) but from the free woman, through the promise
직역하면 ‘그러나 자유한 여인에게서 (난) 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다’는 뜻입니다.
1.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에서 여종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가리키고, 육체를 따라 났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하갈이 육체적인 성관계를 통해서 났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 4-6절에서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으나,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의 권유로 여종과 육체관계를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그 후로 아브라함은 성적 기능이 약화되어서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백 세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성기능을 회복하여,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갈과 육체관계를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일생에 통한히 여길 불신앙의 열매였다는 것입니다.
2.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낳았다’는 것은 이삭을 낳은 것이 아브라람의 자연적인 힘이 아니고, 성기가 죽은 것 같았으나(롬 4:19)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의 결과이고(the result of a miraculous intervention), 창조적인 능력으로(creative power) 아브라함이 성기능을 회복하여, 기적적으로 이삭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삭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직접적인 동인이 되어서(the direct agency of the promise)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3. 여기서 육체의 열매인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자연적인 자손인 유대인들과 유대교를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것이고(typical of the Jews, the natural descendants of Abraham), 약속의 자손 이삭은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으로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약속의 자손인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 the spiritual seed of Abraham, whether Jews or Gentiles, the children of the promise, who are born again of the will, power, and grace of God)
24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is is allegorically speaking, for these women are two covenants: one proceeding from Mount Sinai bearing children who are to be slaves; she is Hagar.
이것은 비유니
ἅτινά ἐστιν ἀλληγορούμενα·
which is being allegorized
직역하면 ‘이것들은 비유로 된 것들이다’는 뜻입니다.
‘비유로된’(ἀλληγορούμενα)은 현재분사 수동태로서(being allegorized) 현재 비유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다’(ἐστιν)는 현재형입니다(is).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αὗται γάρ εἰσιν δύο διαθῆκαι,
these women for are two covenants
직역하면 ‘왜냐하면 이 여자들은 두 언약들이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동사(εἰσιν)는 현재형입니다(are).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μία μὲν ἀπὸ ὄρους Σινᾶ,
one indeed from mount Sinai
종을 낳은 자니
εἰς δουλείαν γεννῶσα,
into slavery begetting
‘낳은’(γεννῶσα)은 현재분사로서(begetting) 현재 계속 낳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곧 하갈이라
ἥτις ἐστὶν Ἄγαρ,
which is Hagar
동사(ἐστὶν)는 현재형입니다(is).
1. ‘이것은 비유니’에서 비유(ἀλληγορούμενα)란 ‘다르게’(ἄλλος) ‘말한다’(ἀγορεύω)의 합성어로서,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비유(παραβολή)와는 다르고, 모형(τύπος)과도 다릅니다.
이 비유적 해석법(allegorical interpretation)은 알렉산드리아 학파 필로와 클레멘트, 오리겐과 어거스틴이 발전시킨 것입니다.
반면에 문자적 해석법(literal interpretation)은 수리아 학파에서 발전시킨 것으로서 크리소스톰과 루터와 칼빈 등 개혁자들이 따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힐렐의 제자로서 비유적 해석법에 친숙하지만, 이 비유는 모형론(typology)과 같은 해석법입니다.
2. ‘두 여자는 언약들이라’는 것은 하갈과 사라가 구약과 신약을 상징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갈’은 모세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는 ‘유대교’를 가리키고, ‘사라’는 이삭과 같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 은혜와 자유를 누리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종이었던 것처럼, 시내산 모세의 율법은 인간을 속박하고 종 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모세 율법을 종 만드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율법을 절대시하는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에게는 혁명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3.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났으므로, 다시는 율법에 종노릇하지 말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서,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천 년을 넘어선 요즘에도 다시 구원받은 성도들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신율법주의(neonomianism)가 신학계에서 주장되고 있는 것은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악한 마귀의 주장입니다.
25절.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w this Hagar is Mount Sinai in Arabia and corresponds to the present Jerusalem, for she is in slavery with her children.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τὸ δὲ Ἄγαρ Σινᾶ ὄρος ἐστὶν ἐν τῇ Ἀραβίᾳ·
the now Hagar Sinai mount is in the Arabia
직역하면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이다’는 뜻입니다.
‘이다’(ἐστὶν)는 현재형이니다(is).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συνστοιχεῖ δὲ τῇ νῦν Ἱερουσαλήμ,
she corresponds now to the present Jerusalem
직역하면 ‘그 여자(하갈)는 현재 예루살렘에 해당한다’는 뜻입니다.
‘해당한다’(συνστοιχεῖ)는 현재형이고(she corresponds) 원형(συστοιχέω)은 ‘함께’(σύν)라는 접두어와 ‘나란히 걷다’(στοιχέω)는 단어의 합성입니다.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
δουλεύει γὰρ μετὰ τῶν τέκνων αὐτῆς.
she is in slavery for with the children of her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 여자(하갈)는 그녀의 자녀와 함께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종노릇하다’(δουλεύει)는 현재형으로서(she is in slavery) 현재 종노릇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다’란 말씀은 여종 하갈을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내산에 비유하고, 율법주의자들의 온상이 되어 있는 예루살렘 비유한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하갈, 시내산, 예루살렘-는 모두 율법 아래서 종노릇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그가(하갈)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 한다’는 것은 하갈이 그 자녀 이스마엘과 함께 종노릇 한 것과 같이 예루살렘(의인화한 말)이 그 자녀인 율법주의자들과 함께 종노릇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3. ‘이 하갈이 시내산이다’(For this Agar is Mount Sinai)고 한 것은 ‘하갈이 율법이 선포된 시내산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This Hagar well represents the Law given on Mount Sinai)
’아라비아에 있는‘(In Arabia)이란 말은 ’시내산이 아라비아의 돌산 페트라에 있다는 뜻입니다. (Mount Sinai is situated in Arabia Petraea, or the Rocky).
4. ‘지금의 예루살렘이 시내산과 같은 곳이다’( Jerusalem as it is now that is, in the days of Paul, is like Mount Sinai)는 말씀은 그것이 율법과 의식들과 관습에 매어 있고, 종살이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처럼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기에는 자유가 없고, 복음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아무런 자유가 없습니다. (It is subject to laws, and rites, and customs; bound by a state of servitude, and fear, and trembling, such as existed when the Law was given on Mount Sinai.)
여종 하갈이 종인 것처럼,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사람을 종노릇 하게 하고,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은 의식들과 여러 규정들로써 사람을 비참한 종의 생활을 하게 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Which now is)이란 바울 당시에 예루살렘 율법주의자들이 의식들과 여러 가지 율법 규정들로써 사람을 종노릇시키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a slave to rites and forms, as it was in fact in the time of Paul.)
‘종노릇하고’(And is in bondage)란 율법 규정들과 관습법들로써 고된 종살이를 시키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To laws and customs. She was under hard and oppressive rites, like slavery)
‘자녀들과 더불어’(With her children)란 예루살렘의 거주자들을 가리키는데(Her inhabitants) 예루살렘의 거주자들인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은 하갈의 아들과 같이 종노릇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She is represented as a mother, and her inhabitants, the Jews, are in the condition of the son of Hagar) Barnes' Notes on the Bible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the Jerusalem above is free; she is our mother.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ἡ δὲ ἄνω Ἱερουσαλὴμ ἐλευθέρα ἐστίν,
the but above Jerusalem free is
직역하면 ‘그러나 위의 예루살렘은 자유자이다’는 뜻입니다.
동사(ἐστίν)는 현재형입니다(is).
곧 우리 어머니라
ἥτις ἐστὶν μήτηρ ἡμῶν·
who is mother of us
동사(ἐστὶν)는 현재형입니다(is)
1.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아래에 있는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늘의 예루살렘(heavenly Jerusalem)을 가리키며, 계시록 21장 2절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하늘의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는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지상의 교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곳이고(Messianic theocracy),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통치하는 곳입니다(earthly theocracy).
마이어[Meyer]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메시야의 신정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이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는 교회로 나타나고, 재림 후에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Here "the Messianic theocracy, which before Christ's second appearing is the Church, and after it, Christ's kingdom of glory")
2. ‘자유자니’란 하갈이 종이란 것과 대조되어 사라가 자유인이란 뜻입니다.
지상의 복음 교회에는 율법으로 인한 종노릇이 없고, 죄와 사탄으로부터의 자유, 율법 의식들과 관습들로부터의 자유,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가 있는 곳이고, 이 자유는 성령님의 주장하심과 인도 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3. ‘곧 우리 어머니라’는 말씀은 성도들이 교회의 보호와 영양공급과 사랑을 통해서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양육하고 보호하시고, 성령님이 교회 안에서 우리를 기르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거스틴을 ‘어머니로서의 교회’(Ecclesia mater)를 주장했습니다.
27절.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Berean Study Bible: For it is written: “Rejoice, O barren woman, who bears no children; break forth and cry aloud, you who have never travailed; because more are the children of the desolate woman than of her who has a husband.”
기록된 바,
γέγραπται γάρ
It has been written for
직역하면 ‘왜냐하면--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기록된 바’(γέγραπται)는 완료 수동태로서(It has been written) 이미 과거에 기록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Εὐφράνθητι, στεῖρα, ἡ οὐ τίκτουσα,
be rejoiced, O barren woman, the (one) not bearing,
직역하면 ‘즐거워하라, 잉태하지 못하고 있는 자, 불임녀여’란 뜻입니다.
‘즐거워하라’(Εὐφράνθητι)는 부정과거 명령형 수동태로서(be rejoiced) ‘크게 즐거워하게 되어라’는 뜻입니다.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ῥῆξον καὶ βόησον, ἡ οὐκ ὠδίνουσα
break forth and call aloud, the (one) not travailing
‘산고를 모르는’(ὠδίνουσα)는 현재분사로서(travailing) 현재 산고를 겪고 있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소리 질러’(ῥῆξον)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break forth) ‘크게 소리지르라’는 것입니다.
‘외치라’(βόησον)도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call aloud) ‘크게 소리질러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많음이라 하였으니
ὅτι πολλὰ τὰ τέκνα τῆς ἐρήμου μᾶλλον
because many the children of the desolate woman more
직역하면 ‘이는 홀로 사는 여인의 자녀가 더 많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ἢ τῆς ἐχούσης τὸν ἄνδρα.
than of her having the husband
직역하면 ‘그녀의 남편을 가지고 있는 (자녀들)보다’란 뜻입니다.
‘가지고 있는’(ἐχούσης)는 현재분사로서(having) 현재 가지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기록된 바’란 이사야 54장 1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되었을 때 예루살렘이 거주민이 적게 오랫동안 황폐한 가운데서 지냈으나, 장차 포로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예루살렘이 거주민으로 가득 찰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때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스룹바벨 아래서 신정정치가 회복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메시아의 신정정치의 예표가 됩니다. (The revived theocracy under Zerubbabel is naturally taken as a type of the final theocratic reign of the Messiah)
2.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는 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거주민이 많게 된 예루살렘에 적용되는 말이지만, 멸시받고 박해를 받고 있던 초대교회에 적용된 말씀입니다. (Here it is applied to the despised and persecuted condition of the early Church.)
3. ‘산고를 모르는 자, 잉태하지 못하는 자’는 원래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예루살렘이 이전 다윗이나 솔로몬 때와는 달리 거주민이 적은 상태를 가리키고, 사라가 오랫동안 불임 상태로 있던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여종 하갈이 많은 자녀를 낳은 것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 기독교회가 처음에 적은 수로 시작된 것이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수가 번성하고, 물질적으로 풍성한 것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4. ‘즐거워하라, 소리 질러 외치라’는 것은 즐겁게 찬양하며, 즐겁게 소리 지르고, 즐거워서 외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Break forth into songs of praise, joyful cry or shout, cry—shout for joy)
이처럼 즐겁게 소리질러 찬양하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큰 소리로 감사 찬양하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베드로의 설교로 한 번에 3천 명이 회심했고, 후에는 5천 명이 회심했고, 나중에는 심지어 제사장의 허다한 무리조차 회심하게 되어서 모두 감격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이방인들에게 가서 전도할 때,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께로 돌아와서 많은 하나님의 교회들이 설립되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구원의 기쁨과 감격으로 찬양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Gill's Exposition)
5. ‘홀로 사는 자’는 직접적으로는 사라를 가리키며, 비유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남편 있는 자’는 직접적으로는 하갈을 가리키고, 비유적으로는 유대인과 유대교를 가리킵니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는 것은 기독교회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어서 유대 나라의 유대교보다 훨씬 더 확장된 것을 가리킵니다.
6. 여기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으로 인한 복음 교회가 율법으로 인한 유대교보다 훨씬 더 위대하므로, 바울을 통해서 믿음과 복음 신앙을 버리고, 종살이시키는 유대인의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말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