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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인 정영자 신라대 교수의 <김일엽 소설 연구> 내용을 옮겨 놓았습니다
김일엽 소설 연구
Ⅰ. 머리말
한국현대여성문학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가운데 1920년대의 여성문학은 여성문인들의
제 1기에 해당되는 활동시기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여성문인들은 여성문인으로서 이름만
가졌지 제대로 문학활동을 안한 것으로 현대문학사는 정리해 두고 있다. 이와 같이 잘못 조
명된 여성문학의 문학사적 가치와 그 의의는 최근에 오면서 여성연구가들에 의하여 해명되
고 연구되어 지고 있는 가운데 김일엽에 관한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다.
격변하는 새로운 시대의 개화물결을 타고 전통적 보수체제가 새로운 사조와 새로운 각성에
의하여 그 뿌리채 흔들리는 모험을 당하고 있을 때 이 땅의 선구적 여성임을 본인 스스로가
자각하고 나섰던 1920년대의 여성문인들은 자신들의 지나친 사명감과 오도된 자유주의, 그
리고 전통보수체계의 질서에 젖었던 주변상황에 시대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여성작가라는 용어자체만 하더라도 예술가는 곧 남성이라고 하는 사회의 기본관념을 명백히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이 문귀에서 우리가 위안을 얻는다는 것은 곧 여성이
그나마 창작자로서는 약간의 인정이라도 받는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예술가들은 항상 역
사적으로 여성들의 것이라고 여겨져 왔던 몇 가지 자질들(감수성, 표현력, 관능성)을 가진
존재라고 인정받아 왔기 때문에 가부장문화는 마지못해서나마 여성예술가를 용인하는 법을
익혀 왔다.
서양의 가부장제도에서도 이와 같은 양상이 전개되었으며 조선시대 오백년의 유교적 관습
속에서의 여성문화는 더욱 그 발전의 싹을 막았던 것이다.
특히 김일엽은 남성편력의 와중 속에 실연의 동기를 가지고 삭발하여 수덕사에 들어가 여승
이 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에피소드적인 충격과 화제를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때문에 1920년대의 폭탄적인 선구적 구호와 그 열정은 외면된 채 그의 사생활 중심으로 비
화된 얘기만 독자들의 관심 속에서 있어 왔다.
뜨겁게, 그러나 강렬하게 살다간 여성자각과 여성해방의 한 획을 그었던 김일엽은 그의 문
학적 성과와 영향을 정리해야 될 시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김일엽의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그의 여성해방과 불교에 귀의한 구원적 의지가 어떻게 승화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김일엽의 시문학은 감상적 낭만주의로써 인간적인 님을 찾고 부르는 열정에 이르지만 그의
소설을 위시한 산문은 당대에 가장 뛰어나고 용감하게 발언했던 그의 여성해방에 대한 사상
이 그 주제가 된다. 따라서 문인이라는 이름에만 안주하고 그 작품활동은 미비했다는 잘못
된 문학사를 올바르게 체계 세우고자 하는 것이 본고의 의도이다.
Ⅱ. 좌절과 극복― 그 삶의 편력
김일엽은 김명순과 함께 그 문학적 평가보다 개인적인 청춘의 스캔들을 중심으로 불교에 귀
의하게 된 에피소드적이고 전기적인 삶에 조명하고 최근에 오면서 비로서 그의 문학세계가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파란과 희생 그리고 영광으로 점철된 시련의 일생과 여성의 지위향상과 여권 신장을 위해
과감하게 기수의 역할을 한 여걸, 시인이라기 보다는 여류명사, 많은 선구자가 운명의 비참
에서 스스로를 건져내지 못한 데 비하여 능히 그것을 극복한 여인, 작품의 창작활동보다도
여성해방론을 누구보다도 부르짖었고, 여성문학에 있어 로만티시즘을 정확하게 걸어간 사람
도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1907년 그녀가 동생을 잃었을 때 <동생의 죽음>이란 시를 12세의 어린 나이로 지었는
데 육당 최남선이 지은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보다 1년 앞서 쓰여진 국문 자유
시라는 점에서 그것은 문학사의 새로운 평가로 주목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가 입적한 뒤에 발간된 그의 문집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상, 하 전
2권, 인물연구소, 1974)에 수록된 시(시조포함) 58편 (이 중 35편은 입산 전, 23편은 입산 후
의 것), 소설 16편(모두 입산 전의 것), 논설 기타 감상문 등이 많아 양적으로 많은 것을 남
겼다.
필자가 직접 찾아 본 시, 시조, 소설, 감상문, 논설문 등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신문 잡지
에 실려 있다.
1896년 4월 28일 평남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목사 김용겸씨와 이말대여사의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김원주(본명이며 일엽은 춘원이 필명으로 지어주었다고 함)는 어린시절부터
무척 어렵게 자라났다. 가난한 살림 탓에 어머니마저 벌이를 나가고 나면 철도 들지 않은
어린 몸으로 갓난 동생들을 달래가며 저녁밥까지 지어야 했었다.
그러나 일찍이 개화한 어머니 덕분에 학교에 다녔으며 배우고 싶은 남다른 열의로 9세 때
구세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11세엔 진남포 삼숭보통여학교에 입학하여 정식교육을 받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심으로 살던 아버지의 엄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12세때 어린 동생이
죽게 되자 슬픔을 맛보았고, 연이어 세 동생과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잃어 17세 때에는
완전히 천애고아의 몸이 되고 말았다. 70이 넘은 외할머니의 뒷바라지로 1913년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문학활동을 시작하였고, 1918년 3월 20일 이화전문을 졸업했다.
1918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연희전문 교수로 있는 40대의 돈 많은 독신남자인 이노익과 결
혼했으나 의족을 단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파경이 나서 남편은 미국으로, 일엽은 동경으로
갔으나 처자가 고향에 있었던 시인 임장화와 동거생활을 하였다. 1920년 귀국하여 <<신여
성>>을 창간하여 여성운동을 제창하여 여성 선구자의 이미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아일보에 글을 쓰던 것이 인연이 되어 그 곳의 중진인 정치부의 국기열 기자와 사랑에 빠
져 동거생활을 하다가 보성고보에 재직하던 하윤실과도 2년간 동거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러나 그에게 진실한 사랑을 승화시켜준 구원의 남성은 백성욱박사이었다. 일엽이 속세를 떠
나 입산하게 된 것은 당시 독일 부르크스부르크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백성
욱과의 만남이었다. 백성욱은 종교에의 귀의를 위한 영적인 지도만을 일삼았기에 순수한 사
랑에 눈 뜬 일엽의 구애를 받아들일 수가 없어 1930년 금강산에 입산 승복을 입고 말았다.
백성욱을 통하여 불교에 관심을 가진 일엽은 승려로 있다가 환속한 하윤실과 결혼함으로써
불교적 삶을 갖고자 노력했다. 1923년 9월에 충남 예산 수덕사에 가서 만공법사의 법문을
듣고 크게 발심하여 불교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20년 7월 <<폐허>>지가 창
간될 때부터 나헤석과 더불어 다른 남성 문인 열 사람과 같이 <<폐허>>의 동인이 되었다.
그러나 동인이면서도 한 편의 작품도 실리지 않고 단지 <먼저 현상을 타파하라>(1921. 1.
폐허 제 2호)는 여성의 지위인식과 해방을 논하는 논설 시론만을 발표하였다. 1927년 권상
노스님이 발행한 월간 <<불교사>>에서 한용운과 함께 관여할 때 가장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일엽은 1928년 33세의 나이에 송만공 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머리를 깎고 승적에 이름을 올
리고 깨우침의 길로 나가 1971년 1월 28일 입산한 지 43년만에 76세의 인생을 마쳤다.
많은 시, 시조 작품 외에 수필집으로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 <<청춘을 불사르고
>>(1962),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1964), 유고집으로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
>>(1974) 2권과 <<청춘을 불사른 뒤>>(1974),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
>>(1975), <<수덕사의 노을>>(1977), <<꽃이 지면 눈이 시려라>>(1985) 등이 있다.
Ⅲ. 체험의 법문과 여성해방― 감상문·논설문
1920년대의 인간적인 사랑과 그 욕망에 불타던 분위기에 '님'에 대한 사랑을 극복하고 1930
년대에 들어 영원한 정신적 고향인 불교적 삶의 이상세계를 노래함으로써 선시적인 시조를
보였던 김일엽은 1924년부터 1935년까지 잡지 및 신문에 감상문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수필
집인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 <<청춘을 불사르고>>(1962), <<행복과 불행의 갈피
에서>>(1964)를 발간하였으며, 유고집으로 <<미래세가 다하고 남도록>> 전2권(1974)과
<<청춘을 불사른 뒤>>(1974),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되었삽기에>>(1975), <<수덕사의
노을>>(1977), <<꽃이 지면 눈이 시려라>>(1985)가 있다.
이들 수필집은 작가 자신의 유년시절의 고독과 슬픔, 그리고 일찍 개화한 어머니가 작가를
아들 못지않게 키우고 싶었던 이상 등이 회상형식과 자전적 고백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젊은 날의 여러 남성편력을 거치는 동안의 김일엽의 사상과 철학이 나타나고, 불교에
입문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있게 해준 보은의 구원적인 남성으로 B씨에게 보내는 편지형식
의 글이 장문으로 실려있다.
아아 ! 한 생각 돌리게 한 당신에게 나는 어떻게 보은(報恩)을 해야 하오리까.
무념(無念)에 들게 한 은혜는 사랑의 배신과 상쇄되고도 멀리 남는 진리를 몰랐던 지난 날
을 이 순간 남김없이 청산하였나이다.
이제 나는 보은할만한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남을 모두 구제하기 위하여, 미래세가 다
하고 남도록 정진과 노력의 쌍수적 길, 곧 인생의 정로(正路)로 정로로만 매진할 것이외다.
그리하여 구경(究竟)은 갈 길과 가는 사람이 하나로 화하고, 받고 주는 상(相)이 끊어져야
유위 의 생활, 곧 현실에서 무위락을 얻은 대자유인이 될 것이 아니오이까.
―― <청춘을 불사르고> 에서
<<청춘을 불사르고>>에는 ―B씨에게 第一信一이라는 부제를 단 <청춘을 불사르고>와 ―
B씨에게 第二信一이라는 부제의 <영원히 사는 길>이 실려 B씨 즉 구원의 남성인 백성욱에
게 보내는 정신적인 사랑이 애절하고, 결삭은 깨달음의 세계로 묘사되고 있다.
지금 서울 장안에서는 시나 소설 한 권 발행해 보지 못한 나를 여류문사라고 떠들고 내 기
술껏 모양을 내어 남이 예쁘게 보아주기를 바라는 내 소원대로 풍염한 미인이라고 칭찬해주
는 이도 있나이다. 그래 그런지 내 주위에는 여러 사람이 모여들어서 열렬한 사랑에 좋은
조건을 바쳐 서 나의 환심을 사려 드나이다.
그러나 당신 외에 한 사람도 용납할 마음의 자리가 남지 않았나이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육체 적 정조를 지키려 해서 그런 것도 아니외다. 나는 더러운 것을 막주무르던 손이나 티
끌 하나 만져보지 않은 손이나 손은 손일 뿐이지 정부정은 손에 묻지 않는 것 같이, 여자의
육체가 남 성을 접하고 안 접한 것은 문제될 것이 없고 오직 그 여자의 정신문제 뿐이라.
정신적으로 청 산이 되어 새 사랑을 상대자에게 온전히 바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처녀로
자처할 수 있어 그 양해를 하는 남자와 그렇게 될 수 있는 여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는 신정조관을 가진 여자인 까닭이외다.
―― <청춘을 불사르고>에서
통회와 실연의 아픔 속에 그것을 감추지 아니하고 옛 사연을 남김없이 묘사할 수 있었던 김
일엽은 이미 깨달음의 세계 속에서 빈껍데기의 안주를 팽게치고 자신이 가졌던 세계관, 인
생관, 여성관을 재정립, 재평가하였던 것이다. 이미 라고 하여 <<불교>> 60호(1929. 6)에
발표한 글은 'K生'이라는 익명을 사용했지만 그 내용은 <<청춘을 불사르고>>의 B에게 第
一信의 내용과 비슷하다. 따라서 백성욱이 떠난 직후 그의 아픈 마음을 정리한 글이 인 것
이다.
불교에 귀의하기 전의 수필들은 대부분이 문학의 교시적 기능에 철저하게 여성의 자각과 남
성과 집안 살림에의 해방을 주장하고, 그러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감상문의 대부분이 소극적인 자신의 사상을 묘사했다면 논설문은 강하게 그리고 철저하고도
논리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밝히고 있다.
김일엽의 문학활동의 초기 단계에는 논설부문에 역점을 두어 글을 썼고 강연에도 자주 나가
자신의 견해를 펴나갔다. <여자교육의 필요> (동아일보, 1920. 4. 6), <여자의 자각>(신여
성, 1920, 3호), <우리 신여자의 요구와 주장>(신여성, 1920. 2호), <먼저 현상을 타파하라>
(폐허2호, 1921. 1)등에서 공통적으로 여성의 자각과 해방을 위한 계몽적 의도가 뚜렷하여
문인의 의식에서보다 여성운동가로서 인권운동적 차원을 그 주제로 하고 있다. 논설문 10편
이 모두 강하게 여성의 자각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감상주의적 연민에서가 아니라 이성적이며 혁신적 개조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래의 세속과 습관에 그 정신이 마비되어 남자의 전제를 무반성으로 긍정하여 어떻게 하면
남 자의 마음에 들까 하는 비열한 노예성으로 우리 여자의 운동을 개시한다 하면 이것은 우
리 여자 의 철저한 자각을 방해할 뿐 아니라 남자의 전제를 영속하는 결과가 되고 말지니
그렇지 아니하 여도 인형과 같은 모순을 여자에게 요구하는 조선의 사회는 조금이라도 연습
에 위반되는 언론을 감히 하는 여자가 있으면 고만 냉혹한 조매중에 치명적인 타격을 줍니
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에 남자의 전횡을 면하겠습니까 만일 우리 여자가 사람으로 살랴
고 아니하고 노예로 존재코저 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 또한 자기의 환경부터
현상을 타파한시에 완전한 인격자 로 개조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 여자는 세운의 급변함
과 함께한 자각과 개조를 행치 아니치 못할 시기를 만났습니다. 그런 즉 여자는 스스로 그
유상미몽 즉 현상을 깨뜨리는 것이 당면의 급무라 할 것이오.
―― <먼저 현상을 타파하라>에서
위의 글은 남성에게 공개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글로 여성의 노예근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여자도 남자와 동등한 인격적 대우를 받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새 여자로 개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여성의 자기 개조론'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개벽, 1922. 5)보다 앞서 발표되어
사회와 가정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할 여자를 교육시켜야만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회, 행
복한 국가, 민족으로 개조될 수 있다는 신념을 확고히 가졌다.
1922년에는 동아일보에 <사나히로 태어났으면>을 발표하여 개성의 완전한 이해자가 되어
아내를 해방하기에 노력하겠다고 하였다.
1923년에는 <학창을 떠나는 여성에게-다섯 가지 산 교훈을 제공한다>(신여성, 3)는 글을
써서 하나부터 열까지 알아야 하겠다는 열성과 습관을 길러야 한다. 조선을 알자. 우리들의
생활 정도, 조선인의 경제상태를 알아야 한다. 결혼을 직업화 말자. 나를 아는 인간이 되자
는 다섯가지를 주장하였다. 특히 '결혼을 직업화하지 말라'는 부분에 특히 관심을 보이고 있
다.
고대광실 놉흔집에서 피아노치고 남편에게 귀염밧고 남편이 버러다주는 돈으로 향락함이 녀
성 의 타고난 불가피의 생활현상으로 아는 녀성이 아즉도 우리 조선에는 만히 잇슴을 봅니
다. 이것 은 우리 여성이 한 남자의 노리개로써 팔니는 것에서 지나지안는 크다란 모욕적
인식착오인 동 시에 우리 녀성은 이러한 시대적 관렴의 잘못을 오늘부터 맑게 청산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착오는 녀성을 한 개 무능한 인형을 만드러 놋는 동시에 우리 압
헤 찬연히 빗날 녀성역사를 말살식히는 무뢰한에서 지내지안는 것이니 우리는 결혼 후로 남
자와 동등한 경제권을 가지는 동 시에 가정에 잇서서나 사회에 잇서서나 온전한 인격자로써
활동해야 하겠다는 각오를 길읍시다.
―― <학창을 떠나는 여성에게> 에서
한 남자의 노리개로서 팔리는 모욕적인 착오에서 깨어나야 하고, 무능한 인형에서 탈피하여
남녀 동등한 경제권을 가지는 동시에 인격자로서의 대우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특히 1927년 1월 8일 조선일보에 <나의 정조관>을 발표하여 사회적으로 큰 파문을 던지며
비난과 환영을 동시에 받기도 하였다.
재래의 정조관으로 말하자면, 정조를 물질시하여 일단 과거를 가진 여자의 사랑은 신선한
맛이 없는 진부한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정조를 잃은 것으로 마치 어떤 보옥으로 만든
그릇이 깨어져서 못쓰게 되는 것같이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조란 그런 고정체가 아닌
것입니다. 정조는 어디까지나 사랑이 있는 동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 <나의 정조관> 에서
혁명적인 정조관은 그의 뒷날 수필에서도 그대로 보여진다.
여자의 육체가 남성을 접하고 안 접한 것은 문제 될 것이 없고 오직 그 여자의 정신문제로
써 정신적으로 정적 청산이 되어 새 사랑을 상대적으로 온전히 바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처
녀로 자처할 수 있어 그 양해를 하는 남자와 그렇게 될 수 있는 여자라야 새 생활을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철두철미하게 남자의 예속에서 벗어나 완전한 인간적 자유와 해방을 주장하고 선각
자적 교훈의 논리를 전개해 나갔다. 또한 춘원이 광범위하게 민족전체의 자각, 계몽을 부르
짖었다면 김일엽은 민족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의 여자의 자각을 먼저 부르짖었던 것이다.
Ⅳ. 관습·제도로부터의 해방 ― 소설
문학의 기능은 교시적 기능, 쾌락적 기능, 그리고 철학적 기능, 종교적 기능 등을 수용한다.
김일엽은 춘원 이광수와 같이 민족개조라는 커다란 뜻을 가지고 교시적 기능으로서의 소설
적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15편이 전하여지고 있으나 그 내용은 한결같이 새로운 시대의 새 여성이 가져
야 할 좌표설정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일체의 옛 사상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서는 실력을 가지고 여성 자신이 자각하고, 다시 갱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김일엽의 주장은 첫째, 남성으로부터의 해방, 둘째, 부모로부터의 해방, 셋째, 기
존가정 윤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그의 소설 속에 반영된다.
<어느 소녀의 死>는 전통적인 결혼관례에 반기를 들고 자살로써 자유결혼관을 보여주는 소
설이다. 주인공 명숙(18세)이는 11세 때 부모가 정혼해 준 신랑감의 집이 패가했다는 이유
때문에 돈 많은 집의 부실로 결혼해 갈 것을 강권하는 부모들의 의사에 불응하고 자살로써
자신의 결혼관을 확고하게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도전은 소극적이어서 그릇된 생각을 고
쳐달라는 부모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면서 사회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고 있다.
<혜원>은 물질주의의 유혹 때문에 사랑을 배반해 버린 남자 때문에 여주인공 혜원은 정신
이상까지 되지만 결국 사랑을 단념하고 예술세계에 몰입하며 여성의 인격되찾기가 그 주제
이다. 특히 노예적 생활을 하며 호의호식하는 것은 도리어 자유천지에서 거지노릇하는 것만
도 못하며 사람인 이상 여자도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여성의 자각성을 주장하고, <사랑>
은 남성전제의 예속에서 해방된 여자의 정조론을 그 내용으로 당시대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
던 소설이다. "서로 사랑하면 그 뿐이다. 암만의 남자, 혹은 암만의 여자와 관계를 했건 과
거가 무슨 소용이냐? 현재 사랑하면 만족하며 또 충분하다"는 소설내용은 육체론적 정조론
에 대한 정신적 정조론의 대두인 것이다.
<자각>은 남편과 결혼생활에 안주하던 한 여인이 남편의 버림을 받고 자신의 살길을 찾아
굳은 결심으로 신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따라서 정신적인 이해와 애정이
없는 삶이란 노예의 생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맹목적으로 구시대의 여인처럼 가정에
복귀하지 않는 것이다. 남자의 전제에서 벗어나고, 자식과의 맺어진 정에서도 벗어나 완전히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문장은 여성적인 섬세한 관찰과 감
상적인 낭만주의를 잃지 않고 있다.
김영덕교수는 김일엽의 소설이 묘사성에 뛰어나고 확고한 테마를 가지고 소설을 구성해 나
갔기 때문에, 진지하고도 성실한 인상을 주는 지적인 작품으로 윤리성과 사상성을 내포한다
고 지적한 바 있다.
따라서 선구적 여성작가로서 여성자각과 기존의 전통적인 제도와 인습과 윤리로부터의 온전
한 해방을 갈구하여 여권의 신장이 아닌 민권의 복귀를 그 주제로 한 소설이다.
1920년대의 봉건적 사회를 향하여 신문지상을 통하여 정신적 정조관의 우위를 공개적으로
설파했던 그는 다시 소설을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더욱 구체화시키며 인물들을 통하여 그것
을 실천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작가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정신적 정조의 고귀함을 그대로
실행해 나가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제의 강렬함이라는 시대적 사명의식과 문학적 형상화는 별개 문제이다. 대
체로 소설 구성이 평면적으로 되어 있으며 일인칭 소설의 자전적 고백체의 형식을 갖는다.
특히 자신이 거창하고 커다란 주제를 그 소설 내용으로 수렴하였지만 여성을 보는 작가의
시선은 항상 긍정적이며 오히려 남성을 보는 면이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즉 개방적이고 자각이 있는 용기있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다면 그 상대적인 남자는 대담하
지 못하고 책임감이 없는 심약한 남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정상적인 애정관계보다 비정상
적인 애정관계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과도기적인 시대조류를 그대로 반영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문학사적 위치
김일엽은 남편 이노익과 이화학당의 삘링스 부인의 재정 후원으로 1920년 3월 최초의 여성
종합지인 <<신여자>>를 발간하고 최초의 여성주간이 되었다. 잡지 <<신여자>>는 5호를
마지막으로 짧은 기간 안에 사라졌지만 김일엽의 진취적인 여성관이 그대로 나타난 잡지이
기도 하였다.
김명순이 시와 소설에 뛰어난 반면 김일엽은 시조와 수필에 그 문학성이 있으며 그의 남다
른 사상은 소설과 논설문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김일엽은 여성의식을 글로 주장하였으며 그것을 실천해 간 최초의 여성 작가였으며 선구적
사명을 실천해 나가는데 시대조류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불교적 신앙으로 극복하여 인생의
관조와 부처에 대한 넓은 의미를 사랑으로 노래하였다. 그의 소설과 논설문이 시대에 대한
반란과 그 반역적 각성을 보였다면 수필과 그의 시는 자전적 요소가 짙게 나타났으며 초기
감상적 낭만주의가, 후기에는 불교의 신앙적인 것으로 변모하고 있다. 문학사적 조명으로는
육당 최남선의 신체시에 앞서 자유시를 발표했으나 자신이 밝힌 그 자료 하나만으로 여태까
지의 통설을 뒤엎을 수는 없는 것이다.
1920년대의 여성문인들이 문인이라는 이름만 있고 작품이 없었다는 오류은 말끔히 씻어져야
할 것이다.
Ⅵ. 맺는말
(1) 김일엽은 소설 15편, 논설문 10편, 수필집 3권과 유고집으로 나온 6권의 수필집이 있으
나 생존시에 나온 내용과 상당히 중복되어 있다.
특히 소설을 통하여 자신이 가진 여성자각과 여성해방을 주장하였고, 과감한 내용의 논설문
을 발표함으로써 당대 사회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2) 한국 최초의 여성종합지인 <<신여자>>의 최초의 여성주간이 되어 본격적인 여성활동
과 편집일을 맡았다.
(3) 1920년대 여성 문인들 가운데 가장 많이 수필을 써서 자신의 삶을 깨달음의 세계인식
속에 밝히고 인생의 관조와 불심에 귀의하게 된 동기를 밝힘으로써 글을 통한 독자 대중의
법문에 그 일익을 담당하였다.
(4) 자신의 사상은 소설과 논설문을 통하여 구체화시키고 여성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긍정
적인데 반하여 남성을 보는 시각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5) 문학적인 성과는 시조를 통하여 형식미와 내용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고 후기에는 불
교의 선적인 내용을 시화하였다.
(6) 인간적 고독과 번뇌, 그리고 무상무념의 세계를 노래하는 후기 자유시의 변모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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