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발심
천태대사 지의(智顗)에 의하면 중생의 위에 보리심이 일어날 때, 그것은 반드시 '감응발심'이다. 즉 중생의 감(感)과 부처의 응(應)이 도교(道交)하는 곳에, 처음 발심이라는 행위가 있다고 하며 이 개념을 중심으로 하고, 지의의 발심론을 검토하려 한다.
지의의 만년의 저술인 <마하지관> 권1의 [발대심]의 단에서는 보리심을 4제, 4홍서원 및 6즉설에 기초로 하여 설하고 있다. 지의(智顗)는 같은 책 권5의 '기자비심(起慈悲心)'의 절과 <차제선문> 권1, <법계차제> 권하, 혹은 <유마경현소> 권1 등에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발심장의 기술이 가장 상세하고 체계적이다.
여기에서는 우선 주로 발심장에 근거하면서 지의에서 보리심의 기본적인 입장을 보겠다.
숭고한 보리심이 중생 위에 성립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보리심이 일어나는 기본적인 조건, 혹은 구조에 대해서 지의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에 의하면, 부처와 중생간에 감응도교를 시작으로 보리심이 성립한 것이라고 말한다. 중생 위에 보리심이 일어날 때, 그것은 양자 간에 감응도교를 전제조건으로 하고, 이것을 감응발심이라고 말한다.
<마하지관>의 발심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보여진다.
묻는다.
행자 자신이 발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의해 발심하는 것인가?
답한다.
자(自), 타(他), 공(共), 리(離), 모두 불가하다. 단 이 감응도교해서 발심을 논할 뿐, 아들이 수화(水化)에 떨어질 때, 부모는 소(騷) 해서 이것을 구하는 것이다.
<정명경>에서 말하길 그 아들이 병을 얻으면 부모도 또한 병을 얻는다고. 열반경[대경]에서 말하길, 부모는 병든 아들에 대해서 마음 즉 편해 있다고 하였다. 법성의 산을 움직이게 하고 생사의 바다에 든다. 그래서 병행(病行), 아행(兒行)이고, 이것을 감응발심이라 이름한다.
즉 이 문장에 의하면, 중생에서 발심이라는 행위가 성립할 때, 그것은 그가 스스로 혼자 힘으로 발심한 것도 아니지만, 또한 타인의 힘에 의해 발심시키게 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서로 다른 자타 양자의 협력에 의한 것도 아니고, 자타를 완전히 떠난 곳에 자연히 성립한 것도 아니다.
단 감응도교라는 사태에 즉해서 보리심을 일으켰다고 인용되어진 <유마경>과 <열반경>의 경문에는 '부처[부모]와 중생[子] 간에 감응도교(感應道交)의 바람직한 상태를 묘사한 것이고, 또한 법성의 산을 움직이게 하고 생사의 바다에 들어가게 한다.'라는 문장은 불(佛),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굳이 법성의 깨달음의 세계로부터 중생의 생사번뇌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는 모양을 설명한 것이다.
담연(湛然)은 이 문장에 대해서, '법성이 부동한 것은 산과 같고, 중생의 악(惡)의 깊이는 바다와 같다.'라고 하였고, 병행(病行), 아행(兒行)이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불(佛), 보살에 의한 중생구제의 행위를 말한다.
부처와 중생간의 감응도교의 성립근거에 대해서, 지의(智顗)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즉 감응발심의 근거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 것인가. <법화현의> 권6상의 감응묘의 단에서는 중생의 기(機)와 부처의 응(應)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문답이 보여진다.
묻는다.
중생의 기(機)와 성인의 응(應)은 하나인가 둘인가. 원래 하나라면, 즉 기응(機應)이 아니고, 만약 다르다면 어떻게 서로 교관해서 감응을 논하지 않는 것이다.
즉, 만약 기(機)[感]과 응(應)의 양자가 전부동일의 것이라고 하면, 기응[감응]을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또한 양자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면, 양자간의 기응(機應)이라는 교류가 성립되지 않는다.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물음이다.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답한다.
하나이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불일불이(不一不異)]. 이(理)를 가지고 논하면 즉 같은 것이 되며, 이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사(事)를 가지고 논하면, 기응(機應)이고, 이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 비유하면 부자의 천성이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과 같이, 골육유체(骨肉遺體)가 다르게 되면 즉 불가하다. 만약 같다고 하면 아버지가 바로 아들이고 아들이 바로 아버지가 된다.
그러므로 같은 것도 또한 불가하다. 단지 불일불이라고 해서 부자를 논하게 되고, 중생의 이성(理性)은 부처와 다르지 않다. 이 때문에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중생은 드러나지 않지만 여래는 현현한다. 이 때문에 하나도 아니다. 불일불이하여 이(異)도 감응을 논하게 된다.
지의의 법계관에 의하면, 중생의 일념심에 3천의 실상이 본래 구족되어져 있다. 단지 이 도리는 부처에 의해서 현성되어지는 것이지만, 중생에게서는 가능태(可能態)로서 은재할 뿐이다. 그런 까닭으로 본래성에서 말하면, 부처와 중생은 동일[不異]이지만 중생의 현실적인 차별의 측면에서 세우면 양자는 다는 것[不一]이다. 이 불일불이라는 양자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처음으로 감응의 활동이 성립한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을 담연(湛然)은 <10불이문>에서,
물(物)(=중생)의 기(機)는 무량하지만, 3천을 벗어나지 않고, 능응(能應)은 많다하더라도 10계(界)를 벗어나지 않는다. …중략… 중생은 이구(理具)의 3천에 관계하기 때문에 잘 감(感)하고 제불은 3천의 이(理)를 만족시키기 때문에 잘 응한다.
라고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무릇 <법화경>에서는 부처와 중생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 많다. 지의에 의하면, 이 경은 중생에서 불성[3인불성]이 불멸이고, 중생은 본래 부처와 동일[不異]인 불자인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이 경의 문(文)에 의하면 다음처럼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중생은 이성(理性)에서부터 보면, 본래, 부처와 불이(不異)인 불자이다. <법화경>의 [화성유품]에 설해진 것처럼,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의 아래에 존재하는 <법화경>의 복강을 받았던 3천진점겁(三千塵点劫)의 구원의 옛날에 대승의 불자를 맺은 관계이다. 그런데도 현실에는 중생은 그러한 관계를 잊고, 불성을 견실(見失)하고 생사의 세계에 유랑하고 있다.
그러한 중생에 대해서 부처는 방편력을 가지고 다시 결연을 짓고, 각각 기근(機根)에 응해서 교(敎)를 설해주고 기근을 성숙시키고, 마침내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이, <법화경>의 '장자, 궁자의 비유'와 '양의(良醫)의 비유(非有)'의 이야기를 말하고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단 중생은 이(理)를 가지고 논하자면 모두 아들이지만 타(他)의 독약을 맛보고 마음을 잃은 자, 불실심(不失心)의 자이고,…중략…실심(失心)의 자는 양약(良藥)을 주더라도 수긍하여 복종하지 않고, 생사에 유량하고 타국에 도서(逃逝)한다.
즉 방편을 일으키어 혹은 삼장(敎)의 결연을 지어 생멸의 법을 설하고 혹은 통교(通敎)의 결연을 지어 무생(無生)의 법을 설하고 …중략… 결연 이후, 25삼매를 그리고 25유의 위에 3제(諦)를 설하고 이것을 성숙한다. 혹은 중간에서 득도하기도 하고 혹은 지금까지도 득도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 문장에서 보여지는 '실심자'라는 것은, <법화경> [수량품]의 '양의의 비유'에 나오는 말이다. 독을 마시고 고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기가 깊이 들어가 마음이 전도했기 때문에, 부친이 권하는 양약을 감히 복용하려고 해하지 않는 아들을 말한다. 이것을 담연(湛然)은 '다른 독약을 마시고 본심을 잃은 본(本)이라는 것을 받은 바를 잃지 않고, 그리고 실심(失心)과 왈(曰)'라고 해석한다.
즉, '실심자'라는 것은 구원의 옛날에 결연을 잃고, 자신이 불자인 것을 생각해 내지 않고, 드디어 아버지인 부처와 '불일(不一)'이 되고 중생의 것이다. 부처와 '실심자'인 중생의 25유(有)의 기(機)를 통찰하고, 방편을 가지고 제형(諸形)을 나타내고, 혹은 제교(諸敎)를 설하고 중생의 기(機)를 응부(應赴)한다. 양자의 감응의 진전하는 곳, 중생의 기(機)가 성숙하여, 마침내는 도탈을 얻기에 이른다라고 되어 있다.
최후에는 <법화경>의 [신해품]에 설해진 [장자, 궁자의 비유]에 대한 지의의 해석은 아버지[長者]와 '실심자'인 아들[窮子]의 이야기이다.
이 장자궁자의 이야기를 지의(智顗)는 부처[장자]와 중생[궁자] 사이의 감응이 나아가는 모양을 그린 것이다. 결국, 범부의 마음에서 소승의 마음으로, 소승의 마음에서 대승의 보리심으로, 그리고 다시 대승구경(大乘究竟)의 보리심으로 이동을 行하는 보리심의 깊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감응발심의 진전을 그렸던 이야기라고 말한다.
지의에 의하면 부처와 중생 사이의 감응도교(感應道交)라는 교류를 통한 시작으로 중생의 위에 보리심이 성립하고 있고 감응발심이라고 칭한다. 중생은 이(理)[가능태]에 대해서 말하면, 부처와 동일(不異)이지만, 사(事)[현실태]에 대해서 말하면 부처와 다른 것[不一]이다. 이 불일불이(不一不異)라는 존재방식인 특징되어져 부처와 중생의 관계성, 혹은 중생의 본질이 감응도교가 성립한 근거인 결국 발심[감응발심]이 실현되어진 근거라고 설명된다.
대승구경의 진실의 보리심을 발기하기 위해서는 중생 측의 기(機)의 성숙이 불가결하다. 기(機)는 이미 무르익어 법화원교(法華圓敎)의 행자는 명자즉위(名字卽位)에 있고, <마하지관> [발심장]에 설명된 진실의 보리심을 이해하고 발기한다.
그 발심은 불일불이(不一不異)에 대해 믿음과 지혜를 뒷받침했던 것이고, 관행즉위(觀行卽位)에서 이강(以降)의 수도의 과정은 이미 발기되어졌던 진실의 보리심을 자기의 위에 확인하고, 실현해가는 접근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이근(利根)의 중생에 대해서는, 감응발심의 과정을 통해서, 방편의 보리심으로부터 진실의 보리심으로 보리심의 내용이 변화되어 심화되어지고 있다. <법화경> [신해품]에는 4대성문(四大聲聞)의 영해(領解)로서 말해진 '장자궁자의 비유'는 그러한 감응발심의 진전을 묘사한 이야기라고 해석되어진다.
이러한 지의의 감응론의 특징은 감응도교의 진전, 혹은 중생의 기(機)의 깊어짐이 영원의 시간을 통해 논하지는 점이다. 즉 중생은 자각의 유무에 관계없이, 영원의 시간에 걸쳐서 끊임없이 부처에의 작용 즉, 응(應)을 받고 있다라고 하여, 중생의 기(機)의 발현, 진전, 향상의 접근이 영원의 상(相)의 아래에 논해진다.
중생의 기(機)는 삼세에 걸쳐서, 종(種)[하종], 숙(熟)[성숙], 도(度)[도탈]의 세 가지 형태에 따라 심화한다. 부처와 중생의 최초의 결연이 하종에 있고, 이 이후, 기(機)는 부처의 정교한 교도(交道)에 의해서 성숙해서 드디어 해탈에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도생의 기, 감응설에 관한 연구/ 홍재미 동국대 대학원 불교학과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