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선인들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통치 스타일을 기억하자
풀뿌리민주주의 6․1 지방 선거가 막을 내리고 각 시·도 도지사, 교육감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깜깜이로 진행된 교육감 선거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언론은 선거 결과에 현미경을 들이대지만 풀뿌리가 훼손되고 있는 현장을 망원경으로 대충 훑어볼 뿐이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다. 이제는 말에서 내려 오염된 정치생태계를 살펴볼 때가 되었다.
먼저 지방정부를 당선인가 함께 이끌어 갈 인사 문제에 있어서 최소한 보수·좌파라는 양 진영의 논리를 떠나 변화된 모습으로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 정부와 모든 면에서 비교하는 억지 논리나 내로남불식 인사부터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 어떤 때보다도 정치권이 혼탁하고 오염된 이 시점에 정화하지 않으면 우리 정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화와 법치주의 실현도 요원할 것이다. 마음이 무겁다. 정치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러한 시점에서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인사 문제와 통치 스타일을 한 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漢)의 제위를 찬탈하고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의 개혁정치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사회경제가 피폐해지자 각지에서 왕망 정권에 반대하는 반란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양 출신 호족으로 한 왕조의 핏줄인 유연(劉縯)과 유수(劉秀) 형제들도 한 왕조의 부흥을 내걸고 군사를 일으켰다. 유수는 최종적으로 군웅할거의 시대를 마감하고 후한(後漢)을 세워 황제가 되었는데, 이이가 바로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光武帝)이다.
광무제 역시 오랜 전쟁으로 피로해진 군대를 잠시 쉬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이 두 사람을 우선 그냥 놔두기로 했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관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황제는 피로가 쌓인 군대를 쉬게 하고, 외효의 아들로 황제를 시봉(侍奉)하게 했다. 공손술은 멀리 변방을 할거하고 있었으므로 장군들에게 말했다. “이 두 사람을 잠시 내버려 둡시다.”(六年, 關東悉平. 帝積苦兵閒, 以囂子內侍, 公孫述遠據邊陲, 乃謂諸將曰, 且當置此兩子於度外耳). 유수는 ‘고조의 업적을 부흥[(복고조지업(復高祖之業)]’하여 실천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상 ‘광무중흥(光武中興)’이라는 시대를 창출해냈다. 그것은 사람을 잘 쓰고 상과 벌에 분명하였으며 간언을 잘 받아들인 결과이다. 유수는 사람의 됨됨이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지녔으며 사람을 쓰는 능력이 탁월했다.
왕망이 황제가 되자 그는 병을 핑계 삼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유수는 즉위 직후 가장 먼저 사람을 보내서 탁무를 방문토록 하였다. 그는 이미 고희가 넘었지만 유수는 이에 개의치 않고 조서를 내렸다.
“탁무의 명성은 천하의 으뜸이니, 당연히 천하의 중상을 받아야 한다. 지금 탁무를 태부(太傅)로 삼고 포덕후(褒德侯)로 봉하노라.”
유수가 탁무를 군신의 수장으로 삼은 것은 그가 현명한 인재로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절박한 심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는 사람을 쓰는 문제에서 “다스림에 있어 평소의 덕행을 숭상하고 일에 있어서 능력에 따라 상을 내린다”는 정치적인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동한의 통치기반을 확대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명망 있는 사람을 회유하여 관리로 삼는 데 힘을 쏟았다. 광무제 유수와 동문수학한 엄광은 황제 유수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지냈던 인물이다.
회계(會稽) 여요(余姚) 사람인 엄광은 유수와 동문수학한 친구 같은 사이였는데, 유수가 황제를 칭한 후에 성과 이름을 감추고 의도적으로 피하여 만나지 않았다. 유수는 그의 초상화를 그려 각지에 사람을 보내 찾게 했는데, 마침내 그를 경성(京城)에서 찾아냈다. 유수는 엄광에게 자신을 보좌하여 천하를 다스리자고 제의했지만 엄광은 강경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요 임금이 자신의 덕을 천하에 드러내려 하자 소보가 귀를 씻었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각기 뜻이 있으니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핍박하십니까? 나로 하여금 관리가 되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뒤에 유수는 엄광을 궁 안으로 청하여 편하게 일을 의논하고 상대하는 날이 많았다. 유수가 엄광에게 물었다. “당신이 느끼기에 지금의 짐은 이전과 뭐가 달라진 것 같소?” 엄광이 말했다. “폐하는 이전에 비하여 크게 진보하신 것 같습니다.” 당연한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자 곁에서 듣고 있는 자들이 모두 웃었다.
밤이 되자 광무제는 아주 친숙하게 엄광과 함께 한 침상에서 잠을 잤다. 엄광은 고의로 그의 다리를 유수의 배에 올려놓고 짐짓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골았다. 유수는 그를 마음대로 자게 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태사가 급하게 와서 이렇게 아뢰었다. “어젯밤에 별을 관찰해보니 객성(客星, 손님별)이 어좌성(御座星, 임금 별자리)을 침범했는데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유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짐의 친구와 짐이 한 침상에 잠을 잤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수는 어진 사람을 생각하는 것을 마치 목이 마른 듯 갈구했고, 어진 이를 예의와 겸손으로 대했다. 인재에 대한 유수의 우대책은 초기 동한 왕조를 안정시키는 데 적지 않은 작용을 했다.
모두가 부정선거를 외치면서 우리 안에서 일어난 부정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용인하는 일을 결코 없어야 한다. 정부 요직이나 지방정부에서 일하고자 하는 각료의 하자(瑕疵)는 청문이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물러서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들의 현재와 미래,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광무제가 찾은 염광과 같은 숨은 인재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풀뿌리민주주의의 뿌리가 썩고 있다. 양당의 담합과 뒤틀린 선거 제도에 가슴을 치는 후보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무도한 정치판이 더럽다며 떠나지 마시라. 언젠가, 아니 머잖아 바람보다 먼저 풀들이 일어날 테니까(김용수, 2022년 06월 29일, 강원일보,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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