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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미륵 『관촉사』 |
첫 탐방지의 관촉사의 으뜸은 단연 국내 최대 크기(18m)의 입상인 은진미륵이다.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로 유명하지만 사람들의 가슴에는 가정의 안녕과 행복을 염원하는 미륵불로 언제나 인자한 미소로 서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더 아름답고 편안하며 자비로움이 베어있다.
들판에 젖무덤 같이 소담하게 부푼 반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관촉사는 시내에서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 논산시에서 관촉사에 이르는 관촉로 주변으로 벚꽃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매년 4월경 꽃이 만개할 때면 벚꽃터널을 이루는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해 가족이나 연인들의 산책코스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관촉사에 가면 저렇게 낮고 조그만 산에 무슨 절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만 경내에 들어서는 순간 너른 마당에 서있는 거대한 미륵불의 인자한 미소를 보는 순간 놀라고 만다.
보물 제218호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은진미륵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높이가 18m로 석조불상으로는 동양 최대라고 한다. 이 보살 입상의 발 부분은 직접 암반위에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허리의 아래부분, 상체와 머리부분을 각각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연결하였다. 이 거대한 불상은 그 규모는 물론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도 단연 대표적인 작품으로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형상이 웅장하면서도 기이했다. "탑보다 큰 몸뚱이"의 웅장함에 탄성을 지르다가도 "몸뚱이 만큼 큰 얼굴"의 기이함에는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 사진은 전 동주대학 박물관장 출신의 여천 김도용교수님의 사천왕상에 대한 설명
관촉사에는 보물 제232호 관촉사 석등, 또 관촉사 배례석 등이 한껏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고, 가장 관심을 끄는 건 엄청난 크기의 보물 제218호 은진미륵(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었다. 사실 그 어느 누가 고려시대, 혜명대사와 동자승의 전설이 깃든 이 은진미륵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있으랴? 신비한 미소를 머금으며 관촉사 한 편에 우뚝 자리잡은 이 은진미륵은 사람을 심취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관촉사 기행은 그런 의미에서 은진미륵의 매력에 취한 답사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관촉사 앞에 길고 평평하게 늘어선 길을 걷는 느낌은 무척 좋았다. 평온함이랄까? 인적이 드문 길을 혼자 여유롭게 걷는 느낌이 자유스럽고 기분 좋게 다가오고 있었다. 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관촉사 입구에 당도하게 되었다. 입장료를 지불하고 역사학자 출신인 여천 김도용 교수님의 사천왕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나무들과 수풀은 때묻지 않은 관촉사의 자연을 느끼게 했다. 또 어디선가 들려오는 산비둘기의 "구구…구" 노랫소리가 관촉사의 신비감을 더하고 있었다.
관촉사 경내에 진입하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관촉사 배례석이었다. 이 배례석은 석탑 아래 자리잡은 연꽃무늬의 장방형의 대석이었다. 배례석의 용도는 불자들이 올라서서 합장 배례(머리 숙여 절을 함)하며 불심을 키우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관촉사 석등이었다 곽진성 고려시대 초기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배례석은 길이가 204cm, 폭이 103cm, 높이가 40cm의 장방형 대석으로 바닥에서 2단의 직각 괴임을 하고 그 위의 면석에는 안상을 조각하였으며 이 안상은 앞부분에 3개, 측면에 2개가 새겨져 있다. 그 옆으로 가면 관촉사 석등이 눈에 띈다. 관촉사 석등은 보물 제232호이며, 고려시대의 소탈하고 투박한 건축 양식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석등이다. 신라의 다보탑이나, 석가탑에 비해 예술적 가치는 부족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교의 지방색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석등이라는 점에서 관심 있게 지켜볼 만했다.
이 석등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석재는 화강암이며 높이가 5.45m이다. 하대석은 각면에 안상 3개씩 새긴 길이 2m의 정방형 석재를 놓고 그 위에 8엽의 복판 연화문을 조각하였다. (논산시 관광안내) 그리고 그 옆으로 가면, 드디어 고대하던 은진미륵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이라고도 불리는 18m의 거대한 은진미륵 입상이다.
신라시대의 석굴암처럼 세련되고 정밀한 맛은 없지만 유에서 무로 돌아가듯, 본연의 투박함으로 돌아간 듯한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큰 얼굴의 큰 눈" 에서 비치는 광채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입상이 살아있는 듯한 생기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은진미륵의 살아 숨쉬는 듯한 생기는 오랜 시간 염원을 담아 만든 정성이 깃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서기 968년(고려 광종 19년)에 해명대사가 조정의 명을 받아 공사를 시작하여 38년 뒤인 서기 1006년(목종 9년)에 완성했다는 기록만 보아도 얼마나 긴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
고려시대 논산 토착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은진미륵, 이 입상은 혜명대사와 동자승에 얽힌 전설로 그 웅장함에 신비함까지 더하고 있다. 고려 광종 시기, 큰바위가 땅 속에서 솟아오르면서 아기 울음소리를 낸 사건이 일어난다. 광종은 여러 신하들을 조정에 불러 의논을 했고, 곧 광종은 "이것은 필연코 불상을 만들어 세우라는 징조로 하늘이 보내신 것이니 혜명대사는 석불을 조성토록 하여라" 고 명을 내렸다고 한다.
명을 받은 혜명대사는 석공 수백 명을 데리고 공사를 시작하지만, 연산에서 운반한 돌을 세울 도리가 없어 고심을 한다. 혜명대사는 이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몰라서 몹시 걱정을 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는 사제촌을 거닐었다. 그때 동자의 놀이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부처를 세우는 놀이를 하고있었다.
큰 돌 하나를 세우고 흙을 그 주위에 쌓아올린 후 몸뚱이를 굴려 그 위에 올리고 또 흙을 전과 같이 쌓아 올리고는 굴려서 맨 윗 부분을 올린 다음 그 주위의 흙을 파내니 돌부처만 남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혜명은 이 동자의 장난을 보고 비로소 미륵을 세울 수 있는 방법을 깨닫고 마침내 거대한 부처를 세웠다. 전설을 상상하며, 은진미륵의 자태에 한껏 빠져있다 보니 네다섯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아쉬움을 달래며 느릿느릿 관촉사를 내려왔다. 내려오며 보이는 논산의 정경은 인간세상의 평온하다. 초여름비가 지나간 풍경은 맑고 투명하고 평화로움 그 자체이다.
은진미륵 입상은 산 아래에서 보여지는 평화로움처럼, 고려시대 번영과 평화를 바랐던 광종과 혜명대사 그리고 논산 인들의 간절한 염원의 결정체는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덧붙이고 싶은 말은 “정열은 냇물의 흐름과 같다. 얕으면 소리를 내고 깊으면 소리가 없다.”
한옥의 과학 『윤증고택(명재고택)』 |
두 번째 답사지 명재고택은을 둘러보기 전에 그래도 기행의 백미중의 하나는 맛거리다. 오리구이에 후식으로 특이하게 수제비가 나왔다.
명재고택은 300년 역사를 간직한 조선 숙종때 대학자인 윤증의 고택으로 겉보기에는 소박하지만 ‘공간의 미학(美學)이 한껏 연출된 명품한옥이다.
하얀 창호지에 어른거리는 그림자. 사랑채가 드리운 그림자는 황토로 빚은 굴뚝을 오롯이 삼켰다. 그 고즈넉한 풍경에 홀려 명재고택 작은사랑방의 동창을 열어젖혔다. 어둠 속에서 도열하듯 서 있는 장독대의 검은 독들이 별빛을 토해내듯 반사한다. 300년 대(代)를 이은 종부의 손맛은 독 안에서 밤새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장독대 너머 낮은 구릉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든든하게 서 있다. 계룡산과 대둔산 사이 능선에 둥실 솟아 오른 보름달, 그 나무 가지 뒤에 숨어 고택을 기웃거린다.
한옥은 과학이다. 그러나 명재고택 만큼 품격 있는 과학도 드물다. 문이나 창을 여닫을 때마다 공간의 미학을 연출하는 충남 논산시 노성면의 명재고택. 조선 숙종 때 학자인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의 가옥이다. 소론의 거두인 명재는 임금이 무려 18번이나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그래서 ‘백의정승’으로 불렸다. 평생 초가에서 살아온 스승을 위해 후손과 후학들은 60칸짜리 한옥을 지었다. 하지만 명재는 살아생전 한번도 그리로 발걸음을 하지 않은 대쪽같은 선비였다.
노성산 옥녀봉을 병풍처럼 두른 명재고택은 솟을대문은 물론 담장도 없어 다른 사대부 집안의 가옥에 비해 겉모습은 소박한 편이다. 본래 솟을대문이 있었으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심하던 19세기 초에 소론 영수의 집안 동태를 살피기 위해 노론이 명재고택 옆으로 향교를 이전해오자 웃어른들이 모든 것을 보여주자며 솟을대문과 담장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덕분에 사랑채에 앉으면 소나무가 멋스런 둔덕을 비롯해 연못과 마을이 파노라마 그림처럼 펼쳐진다.
▲ 사진은 국악인이자 우리카페 회원이신 박봉엽님의 국악한마당(명재고택에서)
명재고택의 첫 번째 과학적 원리는 사랑채의 왼쪽으로 난 중문에 숨어있다. 문간에 내외벽을 설치해 방문객이 아녀자들의 공간인 내부를 볼 수 없도록 차단한 것이다. 그러나 안채 대청마루에 앉으면 내외벽 아래로 난 좁은 공간을 통해 방문자의 신발이 보인다. 종부는 신발이 가죽신이냐 짚신이냐에 따라 누가 손님을 응대할지를 결정했다고 한다.
초례청으로 이용되던 안방 대청마루에는 바라지창이 달려있다. 바라지창의 송판은 나무 결이나 옹이구멍의 모양조차 대칭이 되도록 정성을 쏟아 만든다. 이 바라지창을 열면 장독대가 보이고 그 뒤로 담, 또 그 뒤로 소나무와 하늘이 이어진다. 여백의 미를 살리기 위한 것이리라. 장독대는 바라지창 왼쪽으로 치우쳐 있다. 무심코 보는 모든 것들이 치밀한 과학적 설계의 결과물인 것이다. 바라지창 옆에는 명재의 13세손인 윤완식(59)씨가 직접 한지에 붓으로 쓴 수제달력이 걸려 있다. 요즘 시대 보기 드문 운치를 자아낸다.
명재고택의 두 번째 과학적 원리는 안채와 곳간채 사이에 숨어있다. 유체의 속력이 증가하면 압력이 감소하는 ‘베르누이의 원리’를 적용해 두 건물을 나란히 두지 않고 북쪽으로 갈수록 좁아지게 배치했다. 여름에는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북쪽의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기 때문에 그 속도가 빨라져 주변이 서늘해진다. 겨울에는 반대로 바람이 남쪽의 넓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가 매서운 북풍을 피할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곳간채의 북쪽 끝 창고는 여름철에도 서늘해 냉장고 역할을 했다.
명재고택 안채 곳곳에는 아녀자들을 배려한 공간이 숨어있다. 안채 마루방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아녀자들이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수다방 역할을 했다. 수다방의 동쪽 문을 열면 낮은 담장 너머로 해가 뜨고 달이 뜨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조선시대 여인들에게 수다방의 동쪽 문은 전망대 역할을 한 셈이다.
조부부터 손자까지 3대가 함께 기거하던 사랑채에는 공간의 미학이 집중되어 있다. 사랑채는 조부가 기거하는 큰사랑방을 중심으로 우측에 대청이 있고 좌측에는 정자를 사랑채 속으로 들여놓은 특이한 형태의 누마루가 있다. 또 그 뒤로 작은사랑방과 안사랑방이 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안사랑방에 앉아 작은사랑방 동창을 통해 보는 바깥 풍경은 명재고택 종손이 자랑하는 최고의 풍경화이다. 하얀 연기를 내뿜는 작은 굴뚝과 키 낮은 담장을 비롯해 사랑채 처마가 근경을 이루고, 600여 개의 장독과 수령 400년인 세 그루의 느티나무와 한 그루의 느릅나무 고목이 중경을 연출한다. 여기에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해와 달, 그리고 별은 원경을 자처한다. 사방이 트인 큰사랑방에서 보는 풍경도 운치 있다. 동쪽 문을 열면 고졸한 느낌의 대청마루 창 밖으로 270년 묵은 씨간장을 보존한 장독들이 종가의 역사를 상징한다.
명재고택의 세 번째 과학적 원리는 큰사랑방과 작은사랑방을 연결하는 문에 숨어있다. 이 문은 네 짝의 미닫이지만 가운데 두 짝을 좌우로 밀면 여닫이가 되는 ‘안고지기’이다. 큰사랑방을 확장해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한 도편수의 지혜가 담겨있다고나 할까. 이 안고지기를 떼어 큰사랑방 중간에 설치하면 방이 두 개로 나눠지는 파티션 역할도 해 명재고택에 적용된 아이디어들이 놀랍기만 하다.
명재고택의 품격은 사랑채 누마루에서 완성된다. ‘도원인가(桃源人家)’와 ‘이은시사(離隱時舍)’ 편액이 걸려있는 누마루는 아늑한 공간이지만 문이나 창을 열면 사방이 열린 공간으로 단박에 변신한다. 오른쪽 창을 열면 장방형의 연못이 누마루 안으로 불쑥 들어오고, 정면의 분합문을 들어올리면 둔덕의 솔숲과 정원의 배롱나무가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한다. 누마루 아래 댓돌 위에 작은 돌로 금강산을 형상화한 석가산(石假山)과 해시계 보는 자리인 일영표준(日影標準)도 눈길을 끈다.
300년 세월의 무게가 오롯한 명재고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아온 명재 윤증의 품격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명품한옥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이 2008년에 명재고택을 찾아 향나무를 심은 까닭도 명재고택이 러시아까지 알려진 명문가이기 때문이다.
태조왕건의 숨결이 느껴지는 『개태사』 |
논산에는 모두(冒頭)에서 설명한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다 아는 유명한 은진미륵의 관촉사가 있지만, 개태사는 이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된 역사와 함께 창건 주인공이 다름 아닌 고려 태조 왕건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개태사는 아쉽게도 고려말은 허구헌날 왜구가 침입해 노략질과 약탈과 방화가 계속되어 견디다 못한 나머지 결국 폐사가 됐다. 그 후 1934년 김광영이라는 여승이 개태사지에 매몰되어있던 삼존석불을 찾아내 세우면서 오늘날의 개태사가 다시 서게 된 것. 관촉사가 968년(광종19년)에 창건을 했지만 개태사는 태조 왕건이 그의 재위 19년(936년)에 지었으니 32년을 먼저 세운 것이다.
개태사는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의 서쪽 기슭에 있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물리치고 신검왕의 항복을 받아 후삼국을 통일한 기념으로 왕명을 내려 창건한 호국사찰이다. 태조 왕건은 직접 발원문을 써서 부처님께 바치고, 제불제천(諸佛諸天)의 가호로 나라의 국운 융성과 함께 만세태평과 만민의 행복을 기원했다고 한다.
산의 이름이 천호산인데 이 천호(天護)라는 산 이름과 함께 지은 절의 이름 개태사의 개태(開泰) 역시 왕건이 하늘(天)의 보호(護)가 있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해 당시 황산을 <天護山>으로 개칭한 후 천호산 언저리에 호국사찰로 개태사를 세운 것이다. 개태사를 세운 후 태조 왕건의 영정이 봉안되어 진전(眞殿)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그의 유품 등을 모셨는데 왜구의 침입이나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마다 충신들이 모여 국태민안을 비는 호국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개태사 바로 근처가 백제의 한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땅, 황산벌이다. 지금이야 별거 아닌 위치지만 당시에 이곳 일대는 교통과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당시 이곳 주변으로 6km에 이르는 길다란 토성이 있었고 승병도 주둔했었다고 한다.
▲ 스님들이 국을 끓여 먹었다는 거대한 솥단지인 철확과 그를 보호하고 있는 우주정.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
현재는 전각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촐한 절이며 절의 본전은 극락대보전이다. 1992년에 준공된 건축물로서 창건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미타삼존석불을 모시기 위해 고려양식으로 지어졌다. 고려시대 건물인 부석사의 무량수전을 모방해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 가 보신분들은 알겠지만 개태사는 다른 여늬 절들처럼 크고 웅장하거나, 혹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절은 아니다. 역사에 비해 한동안 명맥이 끊긴 탓이 가장 크겠고, 근세에 들어서 복원 했으니 많이 알려지지도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편, 태조 왕건은 자신이 세운 이 절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쳤다 한다. 이미 1000여년이 넘게 흐른 오늘날,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우리에게 뭔가 말하려는 듯한 약간의 쓸쓸함도 감도는 곳이 바로 개태사다.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다가올 가을철 낙엽 뒹구는 날 한번 들러 보시면 나름의 운치를 느끼실수 있을 것 같다.
▲ 사진은 개태사 답사를 마치고 돼지머리 눌린 수육에 뒷풀이
맺으면서... |
이번 기행은 지난 26차례 역사문화탐방을 주관해온 파랑새문화회 회장 황동웅님의 이임과 새로이 회장으로 추대되신 혜강 심윤정님의 취임을 겸한 매우 의미있는 제 27차 역사문화탐방이었다. 어떠한 조직이든 오래되면 현실에 안주하고 고인물이 되기 십상이다. 매년 4회 개최되는 역사문화탐방의 새로운 집행부가 의욕을 갖고 시작했으니 사뭇 기대가 된다.
답사의 사전적 의미는 일반적으로 답사는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대한 현상을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거나 조사하면서 행하는 학습 방법으로 답사를 실시함으로써 사고력이 신장되고, 연구심이 배양되며, 자연적인 호기심을 통한 학습 의욕을 높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교수는 6권의 부제를 ‘인생도처유상수’라 하였는데 이는 세상 곳곳에 이름없는 고수들, 문화유신을 지키며 가꾸며 깨달음을 얻은 상수들에 대한 경이로움을 표시한 것이라 했다. 기행이니, 답사니, 여행이니 어느 하나 명쾌하게 정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필자의 지나친 편견일까? 나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쉄없는 만남이라 정의하고 싶다’
한편, 금년에도 6월에 충남공주기행, 9월에 전남구례기행, 11월에 경남통영기행이 예정돼 있다. 많은 님들께서 참석해 광범위한 인문적소양의 체득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追憶)을 쌓기를 기대해 본다.
▲ 사진은 부산에 도착하여 희망자에 한해 카페사랑방 계림에서 마지막 뒷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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