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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장 같은 날 오전
석단 안.
기묘한 장치였다.
소구자는 경사진 통로를 정신없이 굴러 떨어지면서도 그런 생
각을 했다.
그는 금관의 복면인이 광장 안의 싸움에 정신을 파는 틈을 타
서 태사의 아래에 난 동굴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도중이었다.
역시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 굴에서도
살아 나올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사부 할아범의 가르침도 헛되지 않았다.
무슨 귀영(鬼影) 어쩌고 하는 장문인이라고 헛소리를 할 때는
늙은이가 횐소리도 잘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위기에
처했을 때는 가르쳐 준 말들이 도움이 되는 일이 많은 것이다.
지금도 태사의가 비밀통로의 입구인 줄 몰라봤더라면 탈출이
란 생각도 못할 일인 것이다.
쿵!
기울어진 통로는 끝나고, 소구자의 몸은 돌바닥에 떨어졌다.
소구자는 그대로 바닥에 딩굴어 충격을 완화시켰다.
빠른 눈썰미와 겁을 모르는 부푼 간덩이, 그리고 생쥐처럼 재
빠른 동작은 귀영문에 딱 어울리는 재질이라고 예전에 사부 할
아범이 그랬었다.
제자 어쩌고 하며 가르치려고 하는 통에 도망쳐 나오긴 했지
만 생각해 보면 사부 할아범에게 배운 몇 가지 손재주와 발재주
도 적은 재산은 아니었다.
소구자는 그래서 오 장이 넘는 급경사를 내려와 바닥에 굴러
떨어졌어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처음 보는 기묘한 장치를 구경하느라고 그런 것이었다.
삼 장여 위의 돌천장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도 없는
구멍이 뚫려져 있고, 그 아래에는 여러 개의 쟁반이 받쳐져 있
었다. 그 쟁반이 대단히 기묘했다.
유리로 만들어진 듯 투명한 아흡 개의 쟁반이 층층이 쌓여 있
,는데, 저마다가 다른 색깔을 띠고 있는 것이다. 쟁반과 쟁반의
사이에는 가는 막대 같은 것으로 다리가 놓여져 서로 닿지는 않
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쟁반과 쟁반 사이는 붉은 줄 같은
것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위는 굵고 아래는 가는 붉은 줄!
소구자는 그것이 사실은 윗쟁반에 고인 붉은 액체가 쟁반의
밑바닥을 통과해서 아래의 쟁반에 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도 의문스러운 것이 여러 가지 떠올랐다.
유리 같은 쟁반이 액체를 통과시킨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석단 위의 웅덩이에 묻은 자국으로 보면, 그리고 그의 경우로
보면 거기 피가 뿌려진 것은 적어도 어제일 텐데 그 피가 아직
도 응고되지 않고 저렇게 홀러내려올 수가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렇게 거른--그것은 마치 기름을 거르는 과정처
럼 보였던 것이다.--피를 어디에 쓰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을 연구해 볼 만큼 한가한 때가 아니
라는 생각이 소구자의 머리를 쳤다.
몰래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 그 좁은 석단 위에서 그가 없어진
것을 눈치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허용하는 동안 더 멀리 도망가야 했다.
소구자는 벌떡 일어나 한쪽에 보이는 동굴로 달려가려 하다가
멈춰 섰다.
가장 아래쪽 쟁반 아래에 작은 옥병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속에는 붉은 액체가 반쫌 차 있
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 피를 받아야 저만큼이 만들어지
는 것일까?
소구자는 자신이 그 중 하나일 뻔했다는 생각을 하곤 옥병을
집어 들어 바닥에 던져 버리려다가 멈추었다.
어디에 쓰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저렇게 거른 피를 모아 둔 것
이라면 뭔가 쓸모가 있을 것이다. 흑시 쓸모가 없더라도 그를
고생시킨 것을 생각하면……!
"소구자가 왔다가 그냥 가면 손해 아닌가 말이다!"
소구자는 옥병 옆에 놓여 있던 마개를 들어 옥병을 막고 품에
넣었다. 그는 동굴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멈추었다.
동굴은 두 개였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잠시 갸웃거리고는 한쪽 신발을 벗어 오른쪽 동
굴의 가운데에 살며시 놓아두고 왼쪽 동굴로 들어갔다.
왼쪽 동굴에 몇 걸음 걸어 들어가자 옆으로 크게 꺾어지는 모
퉁이가 있었다. 소구자는 그곳에 일부러 몸을 부딪쳤다. 그리고
는 한참을 더 가 이번에는 다른 쪽 신발을 아무렇게나 홀려 두
었다.
소구자는 그러고 나서야 돌아서서 나와 오른쪽 동굴로 달렸
다. 그는 곧 동굴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같은 장소.
소구자가 사라지고 침묵만이 남은 지하에 그림자 하나가 다시
나타났다. 횃불에 비쳐 번뜩이는 금관이 그의 신분을 짐작하게
했,다.
소위 천사교의 대제사장이라는 복면인이었다.
그도 사다리를 이용하지 않고 낙엽이 떨어지듯 바닥에 내려앉
더니 쟁반의 아래부터 살펴보았다.
역시 없었다.
그는 한 순간 정신이 아득한 둣 머리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오늘 같은 제사만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일천 회(一千回)를 거듭
했던 그였다.
준비 기간까지 합하면 근 십 년에 가까운 노력이 한 순간 수
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이빨을 갈았다.
"그 쥐새끼 같은 꼬마 자식이…!"
그는 소구자가 떨어졌던 바닥의 혼적 잠깐 살피더니 동굴
앞으로 갔다.
오른쪽 동굴에 떨어져 있는 신발은 곧 발견되었다. 그는 그
동굴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급히 도망가느라 떨어뜨린 신발이 이렇게 반듯이 놓여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중얼거리며 왼쪽 동굴로 가 보았다.
과연 거기 모퉁이에는 달리다가 부딪혀 생긴 홈집이 있었다,
이것은 방금의 신발과는 달리 극히 자연스러운 흔적인 것이다.
금관의 복면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나머지 신발 한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득의해서 중얼거렸다.
"꼬마놈이 이런 상황에도 제법 머리를 썼다만 역시 어쩔 수
없군!"
그는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왼쪽 동굴로 달려나갔다.
* * *
같은 장소.
우두두! 쿵!
이번에 떨어져 내린 자는 방금의 둘과는 달리 전혀 조심하지
않고 뛰어내렸다.
건장한 체구의 외팔이 사내, 맹룡이었다.
그는 쟁반들을 잠깐 보더니 바로 바닥의 흔적을 살폈다. 흔적
은 둘이었지만 그가 쫓는 것은 하나였다. 그 흔적은 곧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왼쪽 동굴로 쏘아져 갔다_
* * *
같은 장소.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 이번에는 여러 사람이 그 장소에
나타났다. 제사옥주와 적의인들이었다.
제사옥주는 맹룡과는 달리 바닥의 흔적을 꼼꼼히 살폈다. 그
리고 그 흔적만으로 대부분의 전개를 짐작해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왼쪽 동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머리는 장식품으로나 달고 다니는 것이……!"
어쨌든 맹룡을 모른 척할 수는 없는 그녀였다.
그녀는 수하들에게 몇 가지를 지시하고 오른쪽 동굴로 달렸
다.
살아 남은 적의인들 중 둘은 왼쪽 동굴로, 나머지는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지하에는 이제야 비로소 정적이 찾아 들었다.
* * *
장강수로십팔타, 총타.
번강룡은 잔뜩 못마땅한 빛으로 야광충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
확히 말하면 야광충이 식사하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
그는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어 물었다.
"음식이 맛이 없나?"
식탁 저 건너편에 앉아 있는 야광충이 그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인데도 창문마다 두꺼운 휘장을 쳐서 방안에는 초를 켜
야 했다. 그 불빛 아래에서 야광충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맛있군!"
번강룡은 다시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럼 왜 안 먹고 있나. 내가 독(毒)이라도 탄 줄 아나?"
번강룡은 식도락가는 아니지만 먹는 것은 즐겁게, 그리고 통쾌
하게 먹고 마셔야 남자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야광
중은 그가 생각하는 좋은 식사 방법과는 정반대로 먹고 있었다.
깨작거린다고나 해야 할까?
산팔진(山八珍), 수팔진(水八珍)은 아니더라도 거의 그와 버
금가게 차려 놓은 음식상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야광충은 아까 전부터 먹는다는 것이 생선 한 토막, 그리
고 고기로 치지도 않지만 구색 때문에 올려 놓은 양고기 한 조각에
불과했다. 대접하는 주인의 입장에서 영 체면이 서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술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 이야기를 해놓고 보니 정말 그것 때문에 안 먹는가 싶어서
그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당늙은이에게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성질이 더
럽다면 꽤 더러운 놈이야."
야광충이 심상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이왕 독을 썼다고 의심을 받을 바에야 진짜로 독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이지. 하지도 않고 의심을 받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테니까!"
야광충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촛불 그림자가 그
의 창백한 얼굴에 음영(陰影)을 드리웠다. 번강룡은 그 묘한 분
위기에 잠시 말을 잊었다. 방금까지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한
판 붙어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사그라 들고 있었다.
야광충이 천천히 말했다.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고
있다. 내가 먹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이야. 이 양고기
는 오랫동안 먹어 오던 것이라 익숙한 음식이라서, 그리고 이
생선은……!"
그는 생선을 가리켰다.
"반대로 거의 먹어 보지 못하던 것이라 대단히 맛이 있군."
번강룡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창백한 얼굴에 묘한 분위기의 녀석은 정말로 생선을 신기해
하고 있는 둣한 느낌이 풍겼다.
"그건 풍어(風魚)라는 것일세. 비늘도 제거하지 않고 내장만
뻐 생선을 종이에 싸서 말려 두었다가 반만 구워 내놓는…….
원한다면 평생 먹도록 때마다 보내 줄 수도 있지. 동정호에서
잡히는 생선은 다른 곳과는 맛이 다르니까."
"고맙군! 그러나 그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군. 내겐 할 일이
많거든."
번강룡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주전자를 잡아갔다.
"술은 한잔 정도 해서 내 체면을 살려 줄 수 있겠지? 이것마
저 거절하면 나는 정말 화를 낼 걸세. 어떤 술을 좋아하나?"
야광충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전에 한번 마셔 본 적이 있었는데……, 뭔가 냄새가 강한……!"
냄새가 강한 것은 술에서는 하품(下品)으로 치는 것인데? 죽
엽청(竹葉淸)? 황미주(黃米酒)? 애주(艾酒)?"
"그거! 애주!"
번강룡은 정말 인상을 찌푸렸다.
"자네 정말 술 마실 줄 모르는군! 그건 워낙 향기가 강해서
약으로나 먹는 것인데……?"
야광충의 창백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홍조가 스치는 듯했다. 워
낙 순간적이라 착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곧 뒤를 따른 야광
충의 변명 섞인 말이 그 말이 착각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양유주(羊乳酒)는 이것보다도 더 냄새가 강하지. 난 그것밖
에는 마셔 본 적이 없어."
"양유주……? 그럼 자네 그곳에서……!"
야광충의 안색이 다시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대막!"
번강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고기가 주식, 생선은 거의 먹어 본 적이 없고, 게다가 양
유주라……! 그렇군! 대막이 아니면 그럴 곳이 없지. 어떻게 그
런 곳에 가게 되었지? 내가 보기엔 몽고족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을 하던 번강룡은 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관둬. 그런 건 말할 필요가 없지. 차라리 모르는 것이
좋겠군!"
"한간(漢奸;매국노)!"
야광충은 또박또박 말했다.
"한간의 제자야. 그래서 대막에 있었지."
"다행이군!"
번강룡은 크게 안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몽고놈이 아니라 다행일세. 난 몽고놈은 싫거든. 원왕조 때
크게 당했었지."
그는 호탕스럽게 웃더니 손에 든 술을 권했다.
"양유주 냄새 나는 그런 술보단 이 산서분주(山西汾酒)가 훨씬
나을 걸세! 냄새는 없지만 양유주만큼 독하다는 걸 내가 보장하
지! 남자다운 술이야! 모름지기 혹도인은 이런 술을 마셔야 돼!"
그는 잔에 술을 가득 따르더니 야광충에게 던졌다. 이 장여는
될 듯한 식탁 위 허공을 가로질러 술잔이 날아갔다.
야광층이 그 술잔을 잡고 단숨에 들이켰다.
번강룡이 헤벌쭉 웃었다.
"좋아, 그래야 사내답지! 주인의 도리로 난 세 잔을 마시겠네!"
번강룡이 막 두 잔째 술을 비우는데 바깥에서 소리가 났다.
그는 김샌 빛으로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밖으로부터 조심스러운 대답이 들려 왔다.
"금노인(金老人)이 왔습니다. 손님께서 주문하신 일로……!
기다리게 할까요?"
번강룡이 야광충을 힐끔 보더니 대답했다.
"손님 오늘 가시는데 언제 기다려? 일이 있으면 들어오라고
그래!"
문이 열리고 주름투성이, 그보다는 화상으로 인한 흉터투성이
의 노인이 들어왔다. 장강수로십팔타의 무기제련(武器製鍊)을
책임지고 있는 대장장이, 금노인이었다.
당금 천하에 몇 안 가는 장인(匠人)이라는 소문을 들은 야광
충이 한 가지 일을 맡겼던 것이다.
"무슨 일인데? 해왔겠지?"
버강룡의 성급한 채근에 금노인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
었다.
"손님께서 주문하신 일이 워낙 까다로워서 아직……!"
"못한단 말인가?"
금노인이 다급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번강룡이 가장 싫어
하는 말이 '못한다'라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절대 그
런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그와 같은 장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번
강룡은 일단 때려죽여 놓고 나서 후회할 인물인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주문을 다시 확인하고 말미를 얻을까
해서 왔습지요.'"
"뭘 시켰길래 그러나?"
번강룡이 그제야 야광충을 향해 물었다. 야광충이 대답했다.
"검 두 자루를 만들어 달라고 했지."
"검 두 자루? 그게 어려워? 그리고 우리 수채에 보검도 많은
데 그 중 두 자루를 고르면 될 것 아닌가?"
"길이는 두 자 세 치(二尺八寸), 무게는 무거워도 좋고 가벼
워도 좋지만 두 자루가 정확히 똑같은 무게, 똑같은 길이에 같
은 모양이라야 해. 내가 준 재료를 사용해서."
"그게 어렵단 말씀입니다."
금노인이 들고 온 보퉁이를 풀어헤쳤다. 거기에는 연형칠장
의 세 가지, 척혈구절대와 귀왕인, 염왕자가 있었다.
야광충은 그 세 가지를 녹억서 두 자루의 검으로 만들어 달라
고 주문했던 것이다.
금노인은 그것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세 가지는 한 종류의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적어
도 열여섯 종류의 금속을 섞어서 만든 것입니다. 대단한 작품들
이죠."
그는 진정 감탄하는 듯 혀를 찼다.
"이것들을 녹이는 것은 어렵고 시간이 걸립니다만 불가능하지
는 않지요. 그러나 다시 모양을 만드는 데에는 이것만으로는 부
족합니다."
야광충이 물었다.
"양이 적단 말인가? 그렇다면 한 가지가 더 있지."
그는 양 팔목에 찬 주작비를 풀려고 했다. 금노인이 손을 저
었다.
"검의 몸이 되는 재료라면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제가 말쏨
드리는 것은 중화(中和)를 시킬 물건입니다."
그는 귀왕인을 들고 말했다.
"아까도 말쏨드렸습니다만 이것은 제가 아는 것만으로도 열
여섯 가지의 금속을 섞어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종류의
금속만으로 이룰 수 없는 단단함과 예리함을 성취했지요. 하지
만 그냥 불로 녹인다고 이것들이 녹았다가 다시 똑같은 질의 것
으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화시킬 물건이 필요한 것
이지요."
번강룡이 철에 관한 것을 알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금
노인이 말하는 동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금노인은 계속 말챘다.
"아마도 이것을 처음 만드신 분도 뭔가 중화시킬 물건을 사용
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물건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게 뭔가?"
"저도 모릅니다."
금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옛적에는 머리카락, 숯, 피에 심지어는 사람의 몸까지 사용
했지요. 이름난 명검에는 그런 이야기가 따라다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굴 죽여서 화로에 섞으란 얘기냐? 네가 들어갈래?"
번강룡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화를 버럭 내
었다.
금노인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고개만 내저었다. 그가 이
런 모습을 보일 때는 번강룡의 억지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경
우였다.
안되는 일은 안되는 것이다.
야광충은 침묵하고 있었다, 기문환사라 불리던 엽장청이 만든
것이니 뭔가 달라도 다르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사실 두 자루 검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것을 가지고 싶었다. 그 두 자루 검으로 혈염수와 함께 그 동안
그가 남몰래 준비해 오던 것을 펼쳐 보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호접몽 이었다. 천산검성 여문량이 보여 준 검의
새로운 경지를 그의 손으로 현실화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포기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뭔가가 생각났다.
그는 앞의 세 가지 외의 연형칠장을 하나씩 보여 주었다.
인명권, 주작비, 묵린수, 그리고 유리환검……!
"이것 중에 없는가?"
엽장청이 만든 것이니 그 중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이다.
그 주즉이 맞았다.
금노인은 그가 내민 물건들을 하나씩 감탄 어린 눈으로 살펴
보더니 유리환검을 보자 눈을 빛내었다.
"바로 이겁니다. 쇄금옥정(碎金玉精)! 이걸 섞으면 만들 수
있지요! 도대체 이걸 어디서 구하셨죠? 천산(天山)의 오지에서
나 나온다는 극히 희귀한 것인데……!"
"천산에서."
"그렇겠군요. 노필부가 당연한 얘길 물었군요."
금노인은 흥분한 빛으로 뇌까리더니 다시 인상을 썼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저도 짐작을 못하습니다. 이런 금
속은 만져 보는 게 처음이거든요. 그리고……, 두번째 문제입니
다만 두 자루 검의 무게가 어느 정도까지 같기를 원하십니까?"
"가능한 만큼!"
"기장히 애매한 대답이시군요. 하나 사람이 무게를 느낄 수 있
는 감각이라는 것에도 한계는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금노인은 품속에서 두 덩이의 철괴(鐵塊;쇳덩이)를 꺼내었다.
"저울로 재면 이 두 개는 서로 무게가 다릅니다만 그 차이라
는 것이 극히 미세해서 사람의 손으로는 알 수가 없지요. 그렇
다면 쓰는 데에도 역시 지장이 없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죠."
야광충이 금노인이 꺼내 든 철괴를 달라고 해서 양손에 들었
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든 것을 들어 보이면서 생각해 보는 기
색도 없이 바로 말했다.
"이쪽이 반 수(半銖;수(銖)는 384분의 1근(斤)이고 1근은
50그램, 1수는 그래서 1.3그램 정도), 무겁군!"
금노인의 입이 딱 벌어졌다. 비교를 하느라고 일부러 무게를
달아 온 것이 아니라면 그도 손에 들어 보는 것만으로 그토록
정확하게 무게의 차이를 알아내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해볼 만한 일 아넌가!'
검은 쓰는 사람에 의해서 가치가 매겨진다. 일천 냥짜리 보검
이 어울리는 자가 있고, 동전 열 문짜리 파쇠덩어리를 들어야
되는 자도 있는 것이다.
무게 차이를 구분하지도 못할 것이 똑같은 무게 어쩌고 한다
면 시건방을 떠는 것이겠지만 그런 엄밀(嚴密)함을 필요로 하는
자라면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또한 장인의 보람 아닌가!
"한 가지만 여쭈어 본다면……!"
그는 야광충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 검으로 뭘 하려고 하십니까?"
야광충이 대답했다.
"검무(劍舞)를 추려 하네!"
금노인은 더 이상 우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보퉁
이를 챙겼다.
"알습니다. 검은 나중에 보내드리겠습니다."
야광충은 이날 낮에 배를 타고 동정호를 떠나 양주로 향했다.
* * *
통천방 총단.
쾌락에 젖은 여인의 모습은 얼마나 다채로운 변화를 보이는
것인지!
젖꼭지가 단단해지고, 가슴이 부풀어오르고, 근육은 긴장되어
퇘처럼 구부러진다. 심장 박동이 빨라져 소리가 들려 오고, 호
흡은 비명 소리처럼 거칠어지고,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여인의 온몸이 긴장되고, 얼굴은 고통
스러운 것처럼 일그러지고, 남자의 몸에 더욱 힘껏 매달리며 아
랫도리를 바짝 붙여 온다.
지금 가괴자의 가슴에 매달리는 여인이 그랬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끊임없이 무어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묘한 진동이 여인의 몸으로부터 전해 오면 그도 그 진
동에 맞추어 몸을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가괴자는 혈부용을 안은 그 자세 그대로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육십 평생 적지 않은 여인을 접해 보았고, 그 중에는 절색이
라 할 여인도 적지 딴았다. 그러나 이렇게 그를 끌어당기고 매
흑시키는 여인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가괴자였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진정으로 쾌락을 즐기고, 그러므로써 남
자를 그녀 스스로가 느끼는 것과 같은 쾌락의 경지에 빠져 들게
하는 탓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내로 하여금 여인을 기쁘게 했다는 만족스런 충족감에 빠져
들게 만드는 그것은 다른 어떤 재능에도 비교할 바가 안되는 탁
월한 재능일 수도 있는 것이다.
가괴자는 문득 혈부용의 하얀 목에 감겨 있는 넓은 금목걸이를
쓰다듬으며 옷은 거의 입을 틈이 없이 지내면서 이것은 왜 목에
서 떼어 놓지 않는지 궁금해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를 안 몇 달
전부터 단 한번도 그것을 떼어 놓은 경우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 물어 보려 입을 벌리는데 혈부용이 먼저 물었다
"흑수당 문제는 어떻게……?"
가괴자는 계집이 별것에 다 관심을 두는구나 싶어 피식 웃었다.
"알아서 하도록 해놓았지. 거기 관심이 있느냐?"
혈부용은 그의 질문에는 대답 않고 다시 물었다.
"알아서 어떻게 하도록?"
"내 말을 무시하면 어떻게 되는가는 이미 정해진 선례가 있느
니라. 바로 멸망이지!"
"누가 그렇게 하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분방(分幇)에서 처리하게 되어 있지.
이번 경우는 남경(南京) 분방에서 하겠구나. 그곳 방주로 있는
무지권자(拇指圈子) 포귀재(鮑貴財)는 그런 방면에는 꽤 조예가
있는 녀석이니 잘 처리할 게다."
"직접 나가 보진 않아요?"
"너 지금 내가 그런 사소한 일에 직접 나가 봐야 한다고 말하
는 거냐?"
"사실은 양주 구경도 하고 싶고……!"
가괴자는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머리채를 휘어잡고 당겼
다. 혈부용의 몸이 비스듬히 일으켜졌다.
그는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교활한 계집이……! 솔직히 말해 봐라. 달리 꾸미는 것이 있
지? 죽여야 할 사람이라도 거기 있는 거냐? 아니면 누가 보석을
주면서 그렇게 해달라고 하더냐?"
베갯머리 송사라는 것은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법
아니던가!
가괴자는 혈부용이 이상하게 흑수당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분명
그런 일이 연루되어 있다고 여긴 것이다.
"나쁜 일은 아니지. 진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그들 통천방의 양
주 지부를 건드렸으니 어차피 흑수당은 그냥 둘 수 없는 것이야."
가괴자는 혈부용의 소청을 들어주는 것처럼 하면서 그런 일을
처리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몇 달째 이곳 총단에서 떠나 보지도 않았군 "
가괴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혈부용은 신음하듯 말했다.
"죽여야 할 사람? 있어요. 거기 있지요."
그 모습이 마치 넋을 잃은 것처럼도 보여 가괴자는 눈살을 찌
푸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묘한 느낌을 받는 것은 왜일까?
아랫배로부터 열기가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다.
그는 혈부용의 묻어 나올 듯 뽀얀 육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
다가 덥석 팔을 내밀어 안았다. 반쫌 몸을 일으키고 있던 혈부
용이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뒤로 쓰러졌다.
무슨 향기일까?
홑날리는 그녀의 머릿결을 따라 묘한 향기가 풍겨져 가괴자의
정신을 한 순간 아득하게 했다. 가괴자는 혈부용의 가슴에 파묻
히면서 걸잡을 수 없는 욕정에 몸을 떨어야 했다.
혈부용의 가는 팔이 그의 목을 안고 당겼다.
여인의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한 그 손길에 가괴
자는 혈부용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어야 했다. 그것은 사실 그가
바랬던 일인지도 몰랐다.
'나 이러다가 색마(色魔)가 되는 건 아닌지 몰라……?"
가괴자는 혈부용의 몸 속으로 잠겨 들면서 히죽 미소를 지었
다.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은 상상이었다.
침상의 붉은 휘장은 묘한 신음 소리로 다시 흔들렸다.
* * *
양주 단자가.
양주성외 성문을 통과하는 마차 안에서 이야기 소리가 홀러나
오고 있었다.
"정말 그를 초대할 거야?"
"응!"
"흑도인인데?
"그러면 어때?"
"어떻다니. 그날은 백도의 명숙들도 꽤 올 텐데……!"
"할아버님 허락도 이미 떨어진 일이야!"
"너……, 혹시 그가 마음에 들어서?"
상관청조는 놀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마상란은 의외로 쉽게,
화도 내지 않고 그 말을 긍정했다.
"맞아!"
상관청조가 오히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떠 버렸다.
"너……, 너……. 설마 진짜……?"
마상란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어때서?"
흑백이 분명한 눈, 그 까만 눈동자 한가운데에는 별빛이 반짝
이고 있었다.
상관청조는 그 눈이 지금 전혀 장난기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더욱 충격이었다.
상대가 그러니 그녀도 이젠 농담 섞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
녀는 낯빛을 고쳐 엄숙하게 하고 말했다.
"흑도의 사내를 지아비로 맞이하겠다는 말이니?"
"그러면 안돼?"
"안돼."
"왜?"
"그는 흑도고 너는 백도니까."
"단지 그 이유로?"
"그 이유만으로도 넘칠 만큼 충분하지."
"아닌 것 같은데?"
마상란은 장난치듯 짧게짧게 대답하면서 상관청조의 엄숙한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었다.
상관청조는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릴 적부터의 친구가 불행해지는 것을 그냥
내버려둘 수만은 없었다.
"흑도와 백도는 단지 편의상 붙여 준 이름이 아니야. 단순하
게 말하자면 흑도는 밤이고, 백도는 낮이야. 밤이 오면 낮은 없
고, 낮이 오면 그때는 이미 밤이 아니야. 밤낮이 동시에 있는
경우란 없어."
"하지만 하루는 밤낮이 교차하며 만들어지지."
"흑도인은 단지 혹도 방파에 속해 있대서 흑도인이 아니야.
그들은 뱃속부터 그대로 흑도인인 거야. 흑도인답게 생각하고,
흑도인답게 행동하고, 꿈도 흑도인답게 꾸지. 그들이 늘 생각하
는 것은 어쩨게 이득을 볼까, 어쩨게 즐길까 하는 것뿐이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백도인 중에는? 백도인은 이득
을 생각 않고 오로지 선행과 협의만을 생각한다는 거야?"
상관청조는 마상란이 무어라고 반론을 하든 상관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을 했다.
"너도 그날 밤 거기 쌓여 있던 시체를 봤지? 사람을 죽이는
그 흔들림없는 손과 시체들을 보던 차가운 눈을 봤지? 그걸 보
고 '아, 저 사람은 참 고수구나',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았겠
지? 어떻게 그렇게 흔들림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마음속
에서부터 뱀처럼 차가운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그렇게는 못할
거야. 어느 백도인도 그렇게 냉정한 살인은 할 수가 없는 것이
지. 그들은 양심을 알기 때문이야."
"체면 때문일 수도 있겠지. 백도인이라는 허명(虛名) 때문에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못하는 것일 수도……!"
이쯤 되는 말을 듣고서는 상관청조도 더 이상 냉정을 지키지
는 못했다. 그녀는 표독스럽게 눈을 치켜 뜨고 마상란을 쏘아보
았.
"나는 백도의 정종(正宗), 아미파의 제자야. 내 앞에서 그렇
게 말하지 마. 그리고 너는 백도인 아니니? 그렇게 말할 수 있
어? 너 정말 넋이 나갔구나!"
"화났어?"
마상란은 미안한 듯 그녀의 손을 슬쩍 잡았다.
상관청조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마상란의 손에서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상관청조는
안색이 변해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상란은 그녀의 손에 손가락을 가볍게 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거미줄에라도 걸린 것처럼 손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아, 미안!"
마상란은 얼른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제야 상관청조는 손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얘의 무공이……!'
상관청조는 못 보는 동안 마상란의 무공이 엄청나게 발전했다
는 것을 그 한 수로 알 수가 있었다. 양주쌍교 중 무장원의 명
성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상란이 말했다.
"네 말꼬투리를 잡아서 미안해. 사실은 나도 잘하는 짓이라고.
는 생각지 않아.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기울어서 그런 식으로
라도 변명을 해보고 싶었던 거야 이해하지?"
상관청조는 그녀의 얼굴에 스치는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 마상란
이 정말 고민중인 것을 알았다. 그녀는 화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이해는 해. 하지만 생각해 봐. 여인의 일생은 어떤 지아비를
만나느냐에 걸려 있는 거야. 그건 우리 같은 무림인에게도 예승
는 아니야. 네가 과연 성장 배경이나 바라는 것이 전혀 다른 흑
도인과 혼인해서 잘 살 수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난 아니라고 봐. 물론 난 누군가를 보고 한눈에 반한 적은
없기 때문에 네 지금 마음을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래, 그
럴 수도 있겠지.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처음 보았을 때 마음을 사로잡았던
매력이 날이 갈수록 시들해지고, 애정마저 식어 버리면……. 그
땐 사람이야. 사람이 얼마나 괜찮은가로 사는 것이지. 익숙하지
않은 생각, 익숙하지 않은 생활 태도를 가진 사람보다는 네가
여태 태어나 자란 성장 배경과 유사한 성장 배경에서 산 사람이
나은 거야. 생각해 봐. 그때 가서 한가지 한가지가 다 다른 사
람과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마상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
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재미있을 수도 있지.'
어쨌든 상관청조의 신경을 더 건드려서 좋을 일은 없었다. 꽉
막히거나 어쨌거나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라고는 그녀
외에는 없는 것이다.
상관청조도 자신의 말이 어느 정도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더
말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마차가 멈추고, 어자석(御子席)과 통하는 작은 창
문이 열렸다. 피진장의 마부인 마노인(馬老人)이 창문으로 얼굴
을 보였다.
"이상하게 거리가 막히는데요? 이제 마차론 더 못 가겠습니
다요."
마차에서 내리자 마노인의 말은 곧 이해가 되었다. 단자가 거
리가 온통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사람의 통행이 많은 곳이긴 하지만 이렇게까지는 아니었
었다.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고, 거리 양편 가게들의 창문과 심지
어는 지붕에까지 사람들이 올라가 사람들이 둘러선 그 중심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들려 오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구경거리라도 있나?"
마상란과 상관청조는 어디 파고들어갈 틈이 없나 둘러보았다.
그러나 마차 다섯 대가 나란히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단
자가의 거리를 양쪽으로 막고 선 구경꾼들을 도저히 파고들 수
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그녀들은 규중 심처(閨中深處)의 요조
숙녀(窈窕淑女)들 아닌가!
문득 마상갈이 상관청조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상관청조가 마
상란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녀들은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가 있었다.
구경꾼들 안쪽에는 공터가 있고. 다시 한 꺼풀 사람들의 막이
쳐져 있었다.
상관청조가 중얼거렸다.
"무림인?"
두번째 막을 이루고 있는 자들은 두 패거리였다. 그리고 하나같
이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럼인들이었던 것이다.
마상갈이 그녀의 의문에 답해 주었다.
"통천방의 표지(標識)를 달고 있어.
"이렇게 백주대낮에 거리를 막고 야료를 부리고 있다니!"
상관청조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상란은 별일 아니라는 둣 심상하게 대꾸했다.
"통천방이 하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어?"
"정파는?"
"너희 아미파 같으면 통천방과 원한을 맺고 싶겠니?"
상관청조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목하 통천방은 강호 최대의 방파였다. 직접적인 원한이 아니
라면 아미파가 아무리 명문대파라 한들 그들과 다투고 싶을 리
가 없었다.
사실은 그런 원한이 있더라도 어지간하면 덮어 버리고 넘어가
고 싶을 정도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정면으로 싸워
서 통천방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큰 세력은 소림이나 무당 외
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관부는 뭐하고 있는 거야?"
관부는 나라를 등에 업고 있으니 참견할 만도 하지 않은가!
"지부대인이 뭘 먹었겠지!"
마상란이 역시 아무 놀라운 일도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아마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일단락되면 그제서야 어슬렁어
슬렁 나타날 거야. 그리곤 죄없는 구경꾼들이나 몇몇 족치겠지."
상관청조는 말도 못하고 고개만 설레설레 젓고 있다가 문득
중얼거렸다.
"그래서 흑도란 것들은……!"
마상란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들과 용기있게 싸우는 자들도 바로 그 흑도인 것 같은데?"
통천방의 인원들과 상대하는 다른 한편의 인원들은 제각기 다
른 복장들을 하고 있었지만 역시 흑도의 인물들이었다. 그녀들
은 모르지만 바로 흑수당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원 안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자는 방각
과 한 괴인이었다.
사람 키만한 길이의 청룡도(靑龍刀)를 휘둘러 방각의 도끼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괴인. 그는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추하게 생긴 자였다.
반쫌 벗겨진 대머리에 뒷머리는 또 길어서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는 노인.
결정적으로 괴이한 것은 목에 건 목걸이였다. 그는 검붉은 나
무토막 같은 것들을 금사슬로 엮은 목걸이를 하고 있는데 자세
히 보니 놀랍게도 사람의 손가락들을 잘라 목에 걸고 다니는 것
이었다.
강호에 그런 사람은 단 하나밖에 없다.
마상란은 얼굴이 굳어서 중얼거렸다.
"무지권자 포귀재!"
무지권자(拇指圈子)!
이름 그대로 자기가 죽인 사람들의 엄지손가락을 잘라 목걸이
를 만들어 하고 다니는 자였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그 목걸이에
손가락을 바칠 자격도 없고, 이름이 쟁쟁한 사람들의 손가락만
취급한다고도 했다.
얼핏 세어 봐도 서른 개는 넘으니 그의 손에 죽은 고수들만
서른이 넘는다는 이야기 아닌가!
마상란의 설명을 들은 상관청조가 질렸다는 표정을 하다가 문
득 물었다.
"그런 자와 싸우는 저 노인은 그럼 누구야?"
방각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금빛 방패와 도끼로 무지권자를
상대하면서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한쪽 눈을 가로지른 긴 칼자국과 얼굴에 가득한 흉터들은 둘
째치고 라도 이곳저곳 일그러지고 상처가 난 방패가 그의 화려
한 싸움 경력을 말해 주고 있었다.
흑도 십대고수에 꼽히는 무지권자와 싸워서도 밀리지 않을 정
도의 고수, 게다가 저런 특이한 무공에 특이한 용모……!
그런데도 마상란은 그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그녀의 의문은 다른 사람이 풀어 주었다.
"독목야차 방각! 도끼를 사용하는 천하 오대고수 중 하나다."
상관청조는 의아한 라으로 마차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반색을
했다. 거기에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는 큰 키다리 사내가
하나 서 있었다.
"오소야(五少爺;다섯째 아저씨)! 언제 오셨어요?"
상관청조의 다섯째 아저씨, 옥정산장의 다섯 마리 용 중 하나
인 오소야 상관홍(上官鴻)이었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의 키다리
사내.
그는 싸움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가볍게 대답했다.
"한참 되었다."
"방각이라면 그 금팔괘순(金八卦盾)과 비마월(飛磨鉞)을 쓴다
는 그 사람이요?"
"음!"
상관청조도 배우지는 않았지만 유성쌍인부로 유명한 옥정산장
의 후손이다. 방각이라는 이름 정도는 그녀도 들어 알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안 보인다더니 어떻게 여기 있을까요?"
"낸들 알느냐? 나도 처음 본다만 저런 모습으로 싸우는 사
람은 그 하나밖에 없지. 그런데……, 강하다 강하다 소문만 들
었는데 정말 강하구나! 무지권자와 저 정도로 맞서 싸우다니!
도끼와 방패가 가진 특성을 정말 최고도로 발휘하고 있구나!"
그가 연신 감탄하면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무지권자가 청룡도
를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방각! 네가 여기 양주 구석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군! 금도
강에서 들으면 좋아하겠구나!"
금도강은 대막에 가기 전 방각이 소속되어 있던 방파, 한때는
그들에게 쫓겨 다녔지만 이제는 그저 군소 문파로 몰락해 가는
중이었다.
방각이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네 일이나 해라. 포귀재!"
"내 일이라? 좋아 그러지!"
무지권자는 돌바닥에 쇳덩이를 가는 둣 흉흉한 목소리로 위협
했다.
"오늘은 인사차 들른 것이다만 내일은 다를 것이다. 운 좋게
내일 버틴다면 모레가 또 있겠지! 너희 혹수당 무리가 끝까지
진운을 비호하고 내놓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자는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방각이 도끼를 들어 그를 가리켰다.
"그게 다냐? 더 있으면 일단 네 입을 쪼개 놓고 듣기로 하지."
"흥!"
무지권자는 거세게 코웃음을 치더니 돌아서서 사라졌다. 그의
뒤를 통천방 인원들이 따랐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혹수당의 사람들도 골목 속으로 사라져
갔다.
"방노대협!"
방각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멈추어 섰다. 아름다운 여인 두
명과 키다리 사내가 골목까지 그를 따라와 있었다.
"날 부른 것인가?"
검은 장갑을 낀 여인이 앞으로 한걸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소녀 피진장의 여식입니다. 귀(貴) 당주를 뵐 수 있을까요?"
"피진장……, 철권 마종의 대협의……?"
"바로 소녀의 조부이십니다."
"피진장의 자손이 왜 우리 당주님을 찾으시는가?"
방각의 안색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마상란은 공손하게 응대했다. 그녀는 소매 속에서 붉
은 첩지(帖紙) 한 장을 꺼내어 보였다.
"내달 보름에 저회 장원에서 열릴 중추지연(中秋之宴)에 초대
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러……!"
방각은 잠시 얼떨떨하게 서 있더니 불쑥 물었다.
"누가?"
초대하는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소녀가 일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
안면은 그녀가 있으니 당연히 초대하는 사람도 그녀일 것이다.
방각이 성큼 다가갔다.
키다리 오소야 상관홍이 옆으로 한걸음 비켜섰다. 그의 양손
이 허리춤에 가 닿았다. 방각의 행동에 경계심을 드러낸 것이다.
방각은 그를 힐끔 보고 물었다.
"유성쌍인부로군! 옥정산장?"
상관홍의 허리춤에 매달린 두 개의 양날도끼를 본 것이다.
"다섯째인 상관홍이오."
"선친을 뵌 적이 있지!"
방각은 그렇게만 응수하고 마상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실지는 보장할 수 없네."
마상갈은 그에게 붉은 첩지, 초칭장을 넘겨주지 않고 머뭇거
렸다.
"직접 전해 드릴 수는 없을까요?"
"미안하네만 그럴 수 없네!"
그녀는 잠시 아쉬운 빛을 보이더니 초청장을 방각의 손에 넘
겨주었다.
"언제 뵐 수는?"
"아마도 없을 걸세!"
방각은 돌아섰다.
마상란이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꼭 오시도록 말씀을……!"
방각은 이미 골목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 * *
통천방 총단.
허탁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대전 가운데에 서 있었다.
뭐 그다지 기분 나쁠 일은 없었지만 도대체가 여기로 불려와
서 좋을 일이란 것도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변덕을 부리려나?'
그는 문득 전날 흑수당이 장강수로십팔타를 방수로 만들었다
는 헛소문을 그대로 전한 것이 들통났나 불안해졌다.
그러려고 한다는 정보는 들었지만, 그리고 상당히 믿을 만한
정보통에게서 들은 것이지만 아직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을 이미
그렇게 된 것처럼 전한 것이 또한 사실 아닌가!
혹수당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끌어 들인 말이기는 했
지만 말해 놓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자신도 참 터무니없는 말
을 했다고 후회하던 중이었다.
혹수당 따위가 어떻게 장강수로십팔타를 복속시킬 수 있단 말
인가!
'그럼 그 어르신은 왜 흑수당을 그렇게 중요시하는 걸까?'
어르신, 그의 주인은 분명 흑수당이 장강수로십팔타를 복속시
킬 것이라고, 그것도 곧 그렇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여튼 좋은 일로 부르지 않은 것은 분명해.'
허탁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괴자를 기다렸다.
좋은 예감은 거의 맞는 법이 없지만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정확
하게 맞는 모양이었다.
가괴자가 나와서 그를 향해 던진 첫마디가 그의 안색을 탈색
시켜 버렸다.
"양주로 가겠다."
허탁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차리고 되물었다.
"어, 언제……?"
"오늘!"
과연 예감대로였다.
허탁은 그래도 가괴자가 다시 대전을 나갈 때까지는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곤 그 옷자락이 사라지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
았다.
가괴자가 움직이면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현 무림 최대
방파의 방주다운 행차가 준비되어야 하고, 수행이 따라붙어야
한다.
게다가 지금 분쟁 중인 곳이니 그에 따르는 준비가 또 선행되
어야 하는 것이다. 대통천방의 방주가 직접 나섰는데 아무런 일
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창피인가!
게다가 애첩들도 데리고 가려 할 것이고…….
그러려면 마차들에 수행원들이 늘어나고, 중도에 묵을 곳들도
섭외가 되어야 한다.
연도의 군소 방파들에서 선물이라도 들고 나오지 않으면 평생
에 입지 못할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펄펄 뛸 텐데 그들에게
준비할 시간이라도 줘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을 준비할 시간이라곤 이제 반나절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오늘밤 안에 당장 출발하게 되지 않으면 저 성질 급한 돼지가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것이다.
허탁은 생각하면 할수록 태산 같은 부담감을 느끼고 신음했다.
'차라리 지금 도주해 버려?'
그 일을 다 하느니 차라리 야반도주를 해버리는 것이 나을지
도 몰랐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어디 간들 여기보다 대접을
덜 받을 것인가?
그때 대전 문으로 가괴자의 비대한 머리가 들이밀어졌다. 그
는 아직 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가서 준비 안해?"
"합니다, 해요!"
허탁은 순간적으로 대전에서 사라졌다.
통천방 총단은 근래 보기 드문 북새통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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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