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 발표자료)
밭치리 신화와 마을제의의 무형문화로서의 가치
이학주(강원대학교 교양교육원,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
1. 서론
2. 밭치리 마을제의 신화의 무형문화 가치
3. 밭치리 마을제의와 문화콘텐츠 확산의 무형문화 가치
4. 결론
1. 서론
필자는 춘천시에도 전통무형문화재를 하나 이상 가진 진정한 문화도시가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이 글을 쓴다.
밭치리 또는 전치곡리(田雉谷里)라 부르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는 춘천을 대표할 서낭제와 거리제를 지냈다. 거리제는 장승과 솟대와 돌탑이 있고, 그 중심은 장승이었다. 길게 터널을 빠지듯 소나무숲을 이룬 곳에는 오래된 장승들이 세월을 먹은 채 나란히 서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곳을 장승숲이라 일컬었다. 길 양쪽으로 길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 있는 장승은 그곳을 갈 때마다 색다른 풍광을 보여주었다. 이 장승숲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고, 거리제를 지낼 때는 춘천시내 사람들도 참여했고, 기자들이 취재를 해서 신문과 방송에 매년 보도되었다. 이 마을이 더 각광을 받은 것은 서낭제와 장승제(거리제)를 행하면서 전통을 이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장승춤을 비롯한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개발하고, 강원도민속경연대회 등에도 참여하는 듯 다양한 전승을 이어갔다는 사실이다. 춘천에서는 전통을 잘 계승한 최고의 민속이었고, 그 역사마저 오래되어 가치가 대단했다. 무엇보다 신화(神話)를 간직한 제의였다. 이야기가 있는 500년 전통의 제의는 우리가 사실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마을은 2009년 당시 춘천시 관계자의 무지(無知)와 잘못된 생각[전통문화에 대한 무시]에 의해서 사라졌다. 그 마을은 골프장으로 변했고, 마을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의를 주관하던 사람들이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갔다. 이 과정에서 역시 외세 종교의 힘도 작용했다. 참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 필자는 춘천시에도 찾아갔고, 골프장을 만드는 춘천시개발공사인 엘엘개발에도 찾아 갔다. 그때 필자는 장승숲만이라도 보전해달라고 했고, 관계자는 그러겠다고 필자에게 분명히 말했다. 그런데 사실 확인을 위해 찾아갔던 날 필자는 눈물을 흘리며, 파쇄기에서 나뭇조각으로 부서져 나오는 장승을 보아야 했다. 파쇄기의 큰 소리는 필자의 눈물마저 삼켰으며, 장승숲은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장승은 옆 마을 봉명리로 옮겨져 아주 작은 공간에 장승공원이라 하여 세워졌으나 관리 부실로 폐허가 되었다. 마을제사를 주관하던 마을사람이 없고 제의가 없는 장승공원은 사실 아무 소용이 없는 허무한 공원이었다. 공원의 장승도 썩었고, 아무도 찾지 않는 유령공원이 되었다. 풀이 무성해서 썩은 장승을 덮었고, 그곳에 지어졌던 정자마저 지붕이 떨어져 나갔다. 인근의 주유소 사장이 심심풀이로 그곳에 있는 작은 연못에 물고기를 풀었고, 그 물고기는 도둑고양이와 들쥐들의 먹잇감으로 죽어나갔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도 밭치리 서낭제와 거리제, 그리고 장승에 대한 중요성은 필자가 계속 주장해왔다. 강연를 하면서, 논문을 통해서, 밭치리마을의 중요성을 일부러 기회를 내서, 계속 이야기 하였다. 그런 필자의 주장이 들렸던지, 2018년인가 2019년인가 춘천문화원에서 문의가 있었다. 새로 조양리 마을에 없어졌던 서낭당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료를 요구해서 필자가 쓴 논문의 출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필자가 찍어두었던 사진 자료도 주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신문에 조양리 서낭당을 새로 세웠다는 기사가 났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춘천시에서는 왜 밭치리 마을제사가 중요한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단순히 서낭당 하나 다시 지은 것으로 끝이었다.
이제 춘천문화원에서는 새롭게 밭치리마을제사를 조명하여 무형문화재로 삼고자 한다. 늦었지만 바람직한 일이다. 비록 제의를 지내던 마을은 사라졌으나 장승숲이 있던 장소는 골프장에 편입되지 않고 남아 있다. 그리고 장소는 달라도 조양2리에 새롭게 서낭당도 지어 놨다. 물론 서낭당은 예전의 모습은 아니다. 서낭당 앞 공터가 협소해서 제의는 예전의 품위를 잃었다. 그래도 괜찮다. 옛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으니, 다시 장승숲은 조성하면 된다. 축문도 있고,마을제사를 지내던 구성원도 일부 남아있다. 춘천시에서 조금만 보조를 해주면 장승춤도 복원할 수 있다. 그때 장승춤을 개발했던 김영주 단장이 내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당극도 다시 하면 된다. 뭐든 마음을 먹으면 이뤄질 수 있다. 사실 강릉단오제도 새롭게 연구하고 복구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된 것이다. 그러면서 원형하고는 다른 면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춘천시에서 춘천의 전통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원해 줄 것을 촉구하면서, 밭치리의 신화와 마을제사가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재청에서 규정한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형문화재를 규정하는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의 목적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제1조(목적)을 보면 “이 법은 무형문화재의 보전과 진흥을 통하여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고 인류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춘천 밭치리신화와 마을제사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충분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지정은 어떻게 할까?
제3장 국가무형문화재의 가치 지정 등
제12조(국가무형문화재의 지정)
① 문화재청장은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무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다.
② 국가무형문화재의 지정 기준 및 절차 등에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제6장 시․도무형문화재
제31조(시․도무형문화재위원회의 설치)
4. 전문위원의 위촉과 활용에 관한 사항
③ 시·도지사가 그 관할구역에 있는 시·도무형문화재의 국가무형문화재로의 지정을 문화재청장에게 신청하려면 시·도무형문화재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거쳐야 한다.
제32조(시·도무형문화재 등의 지정 등)
① 시·도지사는 그 관할구역 안에 있는 무형문화재로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무형문화재 중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시·도무형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할 수 있다. 다만, 시·도무형문화재로 지정하려는 무형문화재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문화재청장과의 사전 협의를 거쳐야 한다.
이 규정에 의하면 지역의 무형문화재가 제대로 지정되어 보호 보전되지 못하는 것은 지역의 무형문화재위원의 관심과 행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의 문화재위원은 심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의 위원은 문화재를 발굴하고 심의하고 지정하여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막중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춘천 밭치리의 서낭제와 거리제를 지정하지 않고 버린 것은 그동안 강원도무형문화재와 유형문화재위원들의 의무 소홀에 둘 수 있다. 사실 문화재 위원이 아니면 문화재의 가치와 관련법을 알지 못한다. 사람은 필요에 의해서 지식을 습득하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은 오로지 전통을 지킨다는 자체만 생각할 따름이다. 담당 공무원도 매번 부서가 바뀌기 때문에 누군가 가치를 일깨워 주지 않으면, 그야말로 복지부동(伏地不動)이다. 땅에 몸을 바짝 대고 움직이지 않는다. 귀찮기 때문이다. 이에 지역의 문화재위원은 지역의 구성원이 신청을 하도록 그 가치를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러면 왜 밭치리마을제사가 무형문화재로서 가치를 가지는 지 알아보자. 이를 신화와 마을제사로 나누어 그 문화콘텐츠 확산까지 거론하도록 한다.
2. 밭치리 마을제의 신화의 무형문화 가치
신화(神話)는 모든 축제의 중심에 놓여 있다. 축제는 신을 강림시켜서 즐겁게 대접을 하고 송신을 한 후 마을, 또는 국가에 복락(福樂)과 제액(除厄) 등을 내려주기를 기원하는 공동체 행사이다. 그 때문에 축제를 행할 때는 반드시 천제(天祭), 서낭제, 산신제, 용왕제 등의 제의를 행한다. 그런 제의를 행할 때 제사를 이끌어 행하는 사제는 보통 무당인데, 무당은 축제를 행할 때 신의 말을 이어간다. 이 말은 제의(祭儀)의 구술상관물(口述相關物)로 무당의 입을 통해 전하는 신의 언어행위이다. 이를 한 마디로 말하면 신화(神話)가 된다. 가령, <바리데기>는 무당이 굿을 하면서 읊은 무당의 기원을 말한 무속신화(巫俗神話)이다. 그렇다면 밭치리의 신화도 밭치리에서 서낭제와 거리제라는 축제를 행하면서 나온 신화이다. 밭치리 마을제사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서낭당이라는 당을 중심으로 나왔기 때문에 이런 유형의 신화를 당신화(堂神話)라 일컫는다. 그러니 서낭당신화인 것이다. 제의를 행할 때 당신화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엄청 크다. 신화는 믿음을 유발하는 경전(經典)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전승하는 내용이 짧지만 신성성을 드러내고, 주민들의 믿음을 이끌어내는 데는 전혀 손색이 없다.
이 때문에 신화는 축제를 행할 때 언제나 그 중심에 놓여있다. 그래서 신화는 축제를 무형문화로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는 강릉단오제를 보면 알 수 있다.
강릉단오제는 신화가 중심에 놓여 있다. 신화를 중심으로 굿판(제의, 연극), 놀이판(추천 등), 경기판(축구 등), 싸움판(씨름판 등), 난장판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정윤수, 단오의 판구조 참조) 신화가 주축이 되기 때문에 신화를 중심으로 강릉단오제는 행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강릉단오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화의 내용과 신화를 따라 움직이는 국사성황신행차 및 신화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한 관노가면극 등을 알아봐야 한다.
강릉단오제가 축제로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은 인용문에서 보듯 신화에서 출발했다. 강릉단오제의 중심에 <범일국사>신화가 있고, 그 신화를 중심으로 각종 행사가 행해진다.
이런 구조는 밭치리마을제사의 신화도 같은 맥락이다. 이 신화는 서낭제와 장승제의 기원을 말하면서 전치곡리의 지명까지 일컫고 있다. <춘주지>에 실려 있는 신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田雉谷(전치곡)>
아득한 옛날 춘성군 동산면 조양2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곳은 첩첩 산중에 골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면 조그마한 외진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사이에 둔 아담한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용씨(龍氏)네가 많이 살아 왔는데 그 중에는 마음씨가 착하고 용모가 단정한 청춘과부 김씨(金氏)가 용씨 문중에서 자식도 없이 외롭게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김씨부인은 늘 혼자 생각에 가난은 참을 수 있으나 자식 하나 없이 홀로 살아가는 것이 더 쓸쓸하고 외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웬 일인지 비가 오면서 뇌성벽력을 치더니 난데없는 장수가 투구와 철갑 옷을 두르고 김씨부인 앞에 와서 공손히 인사를 하면서 하는 말이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아 부인을 찾아왔으니 기꺼이 여기소서.”하면서 품에 안기려 하여 부인이 깜짝 놀라 방을 뛰쳐나와 보니 전에 없던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푸른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구슬이 있어 입에 물으니 향기가 나면서 스르르 녹아 없어지지 않는가? 김씨부인은 그 이후부터 태기가 있어 열 달이 되던 어느 날 대낮에 무지개가 떠오르고 오색 채운이 집을 둘러싸고 해산기운이 돌기 시작하여 옥동자를 분만했다는 것이다. 갓난아기는 기골이 장대하고 눈썹은 용의 수염같이 길고 눈은 샛별같이 빛나는 사내아이였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사흘을 두고 계속 울기만 하더니 나흘째 되던 날 ‘엄마’하고 부르는지라 깜짝 놀란 김씨부인은 혹시 관가에서 알지나 않을까 두려워 아기를 죽이고 자기도 목숨을 끊기로 작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생각하던 이레(7일)되던 날 어린애가 온데 간데 없어 찾아보니 보리밭 한 가운데 서 있는 커다란 밤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를 본 어머니 김씨는 깜짝 놀라 이리 내려오라고 이르니 그 갓난아기는 나무 위에서 하는 말이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저는 아버님을 찾아 하늘나라로 갑니다. 제가 떠난 후 어머님이 병환을 얻으시면 가장 위독하실 때에 이 밤나무 아래 꿩 한 쌍이 졸고 있을 것이니 그 꿩을 잡아다가 고아 잡수시면 그 병환이 나으실 겁니다. 먼 훗날 어머님의 무덤이라도 찾으려면 지명이라도 알아야지”하며 “밭전(田) 꿩치(雉) 골곡(谷) 전치곡”이라 두세 번 외치더니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 부락을 전치곡리 또는 밭치리라고 전하여 왔다. 이곳에서는 그 이후부터 매년 3월에 좋은 일진을 택하여 남녀노소 집집마다 안과태평(安過太平)과 우마(牛馬)의 번식까지 비는(祈願) 성황제를 올리고 부락의 수호신으로 이정표 구실을 하는 장승 세우는 거리제가 전승되고 있다.
이 신화는 아기장수이야기의 변이형태를 띠고 있는데, 아기장수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을의 신으로 좌정했다. 이 신화를 <학바위와 범일국사>신화와 비교했을 때 신화담과 신화소가 전혀 손색이 없었다. 물론 두 이야기는 상황이 다르지만 신화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많은 부분에서 같은 양상이었다. 다만 지역이 <학바위와 범일국사>는 강릉시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전치곡>은 밭치리가 대상이 된다는 차이이다. 밭치리라는 지역을 확대하면 얼마든지 춘천시를 아우르는 제의가 될 수 있다.
필자는 두 신화를 비교하면서 전승이 이어지고 끊긴 사연을 구비문학의 공동작 특질에 두었다. 범일국사신화는 시대에 맞게 매체를 확대해 갔는데, 밭치리신화는 매체를 확대해 가다가 지자체장의 잘못된 생각에 따라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구비문학의 특질인 공동작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전통문화계승에는 시대성(時代性)도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서 다양한 매체로 이어줘야 한다. 이런 구비문학이 계승되기 위해서는 발전적인 공동작이 이뤄져야 한다. 그것도 매체를 넘나들어야 하고, 상관물의 다양성을 발굴하고 현장에서 행해져야 한다. 본고에서 거론하는 강릉단오제의 근원신화인 <범일국사>이야기가 살아남았던 원인이기도 하다. 정선아라리가 살아남아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되고 현장에서 계승되는 원인도 시대를 앞서가지는 못해도 최소한 따라 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작의 개념을 이해하고 공동작을 해야 한다. 결국 강릉단오제가 현재 세계인의 축제로 계승되어 향유되는 사실은 시대에 맞는 공동작을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강릉시민 전체가 공유하는 단오제의 구술상관물로 발전하고, 한국인 전체가 참여하는 축제가 되고, 이어서 세계인이 향유하는 무형문화유산으로 발전해 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밭치리의 신화는 공동작이 이어져야 했고, 그것은 시대의 매체를 따라야 했다. 신화도 변해야 산다는 원리가 적용된 것이다.
어떻든 <전치곡>과 <학바위와 범일국사>는 둘 다 신화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원형으로서 기능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치곡>신화는 밭치리 서낭제와 거리제의 전형(典型)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무형문화재법에 의하면 이들 전형은 “해당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했다. 그 규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개정 2016.12.20, 2018.12.24, 2020.6.9, 2022.1.18] [[시행일 2022.7.19]]
1. "무형문화재"란 「문화재보호법」 제2조제1항제2호에 해당하는 것을 말한다.
2. "전형(典型)"이란 해당 무형문화재의 가치를 구성하는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 규정에 의하면 밭치리의 신화는 밭치리 서낭제와 거리제의 전형인데, 이런 전형을 가지고 있음은 강릉단오제처럼 무형문화로 지정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논리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밭치리신화는 시대에 따른 매체확산이 이뤄지지 않아서 공동작이라는 신화 본연의 특성을 이행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그러면 신화가 제의와 결합하여 매체확산을 했을 때 가치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도록 한다.
3. 밭치리 마을제의와 문화콘텐츠 확산의 무형문화 가치
무형문화는 근본적으로 전통문화의 원형(原型), 곧 전형(典型)이 기본적으로 전승돼야 한다. 그런데 이 원형이 전승되기 위해서는 매체확산이 이뤄져야 한다. 매체확산(媒體擴散)은 다양한 전승매개(傳承媒介)를 활용해야 한다. 전승매개를 활용해서 그 원형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는 원형의 본질을 그 매체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 이 작업은 내용의 본질은 바뀌지 않지만 매체에 따라 표현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요즘 말하면 문화콘텐츠(Culture Contents)이다. 문화콘텐츠는 글, 그림, 영화, 문화재 등 문화적 성격을 가진 내용물을 멀티미디어 기술을 통하여 산업적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이다. 이에 따라 전형(典型)은 전형(轉形)이 되는데, 무형문화재보호법에도 이를 권장하고 있다.
제1조(목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 법은 무형문화재의 보전과 진흥을 통하여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민의 문화적 향상을 도모하고 인류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무형문화재보호법에서 언급된 내용은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이는 문화콘텐츠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는 사실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전통문화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활용하라는 사실은 전형은 살리되 전형(轉形)을 하라는 의미이다.
이런 조항은 원형을 보전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이다. 마치 궁중제례악이 제례에서만 쓰이고 일반에 공연될 수 없다면 어떨까. 강릉단오제가 제사의식만 행한다면 어떨까. 정말 재미없는 제의에 그쳤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강릉단오제 구경을 갈 이유가 없다. 아마도 강릉단오제는 강릉에서 무당들이 행하는 단순한 제례행사에 그쳤을 것이고, 그러다가 아마도 사라졌을 것이다. 우리의 궁중제례악과 강릉단오제가 과연 인류가 보전할 가치가 있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지 못했을 것은 당연하다. 이런 문화콘텐츠 확산은 전통적인 원형을 전승해 갈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이런 원리에 따른다면 밭치리의 제의는 전형(典型)을 갖추고 전형(轉形)으로 이행하는 정말 훌륭한 우리의 무형문화유산이었다. 그럼 어떻게 이행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이미 논의가 되었던 내용이다. 이를 다시 인용해 본다.
<밭치리 마을제사의 축제성>이란 논문에서는 밭치리 마을제사를 축제와 관련 7개의 사항으로 논의했다. 첫째, 제의에서 신께 먼저 제물을 올리고 음복을 하면서 축제는 시작된다. 둘째, 마을사람과 손님들까지 모여 국밥을 나눠먹고 농악을 울리면서 한바탕 논다. 셋째, 마을길을 청소하고 손질하면서 가래질소리라는 노래를 한다. 넷째, 장승춤(집단무용)을 개발하여 추었다. 다섯째, 민속경연대회에 놀이로 출품을 하였다. 여섯째, 장승제를 주축으로 하여 마을행사를 하였다. 일곱째, 이러한 행위의 목적은 모두 안녕과 풍요와 벽사와 건강에 있다.
제의가 제의자체에만 초점을 두면 문화콘텐츠로 확산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밭치리마을제사를 제의 자체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다양하게 가꾸어 가고자 애썼다. 이를 단절하지 않고 이어갔다면 정말 훌륭한 전통문화로 남을 수 있었다. 그나마 이제 다시 논의가 된다는 자체가 상당히 바람직하다. 정말 고무적(鼓舞的)으로 응원하고 싶다. 위의 일곱 가지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춘천 밭치리 마을제사의 축제성」과 「구비문학의 공동작 특질에 따른 무형문화로서의 가치: <범일국사>와 <밭치리>당신화의 비교를 중심으로」를 참고하기 바란다. 아래에 축제 관련 논문을 첨부하여 이해를 돕는다.
왜,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확산해 가야하는지는 가까운 이웃의 강릉단오제를 보면 알 수 있다. 강릉단오제가 범일국사이야기를 원형으로 두고, 정 씨 처녀 이야기를 비롯해서, 신주미 거두기와 신주만들기, 신을 모셔오기[영신행열], 신 보내기[송신의식], 관노가면극, 무당들의 연행으로 신을 즐겁게 해주기, 난장으로 주민들이 함께 어울리기, 강릉사투리대회, 욕대회, 그네, 시장, 체험 등 참 많은 내용들이 전재된다. 그리고 현대적 콘텐츠로 만화, 영상, 애니메이션, 박물관 등으로 이어졌다. 이를 또 무형문화재로 등극하고, 세계유산으로 남게 했다. 상당한 노력이 강릉시 차원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시장이 외래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조전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통문화를 우습게보거나 말살하려 들지 않았다. 전통문화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종교적 차원을 뛰어넘는 큰 틀에서 행했다. 강릉단오제를 통해서 강릉사람들이 발전적으로 단합하고, 관광자 또는 여행자인 방문객들을 모아 강릉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강릉에 살던 선조들의 유습을 잇는다는 아름다운 정신을 높이 샀다.
여기에 더하여, 제의를 동반한 무형문화(재)는 장소가 있어야 전승이 가능하다. 강릉단오제는 범일국사가 기거하고 있는 대관령국사서낭당과 김유신산신각, 구산서낭당, 학산서낭당, 여서낭당, 강릉남대천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렇듯 밭치리마을제의도 분명하게 좋은 장소를 선택하여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옛 장승숲 장소가 있으니, 장승숲을 살리거나 아니면 조양2리나 대룡산 언저리 등에 좋은 장소를 물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봉명리 장승공원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
4. 결론
본고는 춘천 밭치리 마을제의의 신화와 제의 관련 콘텐츠가 무화문화재가 되어서 전승되기를 바라면서 기술해 보았다. 필자의 개인 사정으로 급히 쓰다 보니, 상당히 거칠다. 제현의 양해를 구한다.
본고는 2009년 밭치리 장승제가 골프장 건설로 사라질 때부터 현재까지의 과정을 먼저 기술했다. 이 과정에 필자가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다시 장승숲도 만들고 제의도 행하기를 기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형문화재위원들의 책임도 거론했다. 주민과 공무원들은 사실 문화재의 가치와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밭치리마을제의는 신화가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신화는 기원을 말하고 있으므로 신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 기반이 된다. 아울러 전형(典型)도 확실하게 갖출 수 있기에 신화의 중요성을 말했다. 그 중요성은 강릉단오제에서 알 수 있다. 이를 가꾸기 위해서는 현대 매체에 맞추어서 다양하게 구비문학은 공동작이라는 신화 본연의 특질을 잘 살려야 한다. 밭치리마을제의의 신화는 좋은 문화콘텐츠로 확산은 진행되었지만, 강릉단오제처럼 시대에 따른 확산을 가져오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전통의 무형문화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 법규처럼 전형(典型)을 변화시키는 전형(轉形)이 이뤄져야 한다. 원형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매체확산이 다양하게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강릉단오제가 세계유산이 된 것도 이런 매체확산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지자체의 관계자 의식도 상당히 중요하다. 아울러 제의를 동반한 무형문화는 장소가 상당히 중요함을 말했다.
이번 학술회의를 계기로 춘천에도 전통무형문화재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진정한 문화도시가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