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새벽에 아랫배가 부풀어오는 듯한 배뇨감에 별채에서 잠이 깨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맨발로 댓돌에 내렸다. 발바닥에 닿는 돌의 차가운 감촉이 온몸을 훑고 머리끝까지 맑게 전해졌다. 잠결까지 파고든 취기가 그제서야 눈을 떴다. 나와 떨어져 있는 듯한 술기운이 댓돌에 맨발을 내린 내 몸을 그제야 느끼는 듯했다. 간밤에 마신 술은 나를 넘어섰다. 술기운은 술기운대로 내 몸은 몸대로 저마다의 밤과 잠을 가졌다. 사방은 온통 안개가 뒤덮여 막혔다. 무엇하나 보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지독한 안개였다. 더듬으면 실체가 있어 재질감이 있을 것만 같은 두터운 안개였다. 너무 갑작스럽게 몰려온 안개는 몽환적이지 않고 오히려 현실적이다. 오히려 저 별채에 잠들어 있는 가채머리를 올린 여인이 오히려 더 몽환에 가까웠다.
지난밤 그녀는 내게 물었다. 처음 본 그녀는 진짜 사극에서 보던 기생의 매무새를 하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술은 나눴다. 그녀가 두 번 따르고 내가 한 번 따랐다. 그녀가 연거푸 세 번 술잔을 받고 내가 한 번 받았다. 또 그녀가 두 번 따르고 나 역시 두 번 번갈아 따르기도 했다.
낡은 카세트가 서쪽으로 난 쪽창 밑 나무 선반 위에서 소리를 냈다. 가야금산조 같았다.
“당신이 내가 그리던 정인이라면,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어느 분이십니까?”
무슨 소린지 몰랐다. 그녀의 표정은 온화한 듯 단정했다. 자정을 훌쩍 넘기면서 나는 취기를 서서히 느꼈고 그녀는 별로 흐트러지지 않았다. 묘한 건 그녀의 눈빛이었다. 눈동자의 초점이 있는 듯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엔 초점이 한없이 풀어져 아주 먼 시공간을 응시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이름은...? 내가 누구이기를 바라는 겁니까?”
“쇤내가 바란 대로 당신이 오신 것이야 알 수 있사옵니까?”
“...행색이 항상 그렇게 고풍스럽고 화려한 한복입니다.”
“어쩌면 손께서는 그토록 이채로운 풍모를 꾸미셨는지요?”
금빛 넥타이와 흰 와이셔츠에 상하의 양복차림의 나를 두고 이르는 말 같았다. 내가 보기엔 그녀가 더 이상했지만 그녀의 자분자분한 목소리는 오히려 나를 점잖게 꾸짖는 듯 보였다. 그녀는 정말 내가 백대붕이나 유희경 중의 한 사람으로
가채머리 장식에 청홍색이 어우러진 치마저고리에 칠보(七寶)장식이 들어간 노리개를 저고리 매듭에 찬 그녀는 영락없는 기녀(妓女)였다.
“나는, 백대붕도 아니고 유희경도 아닙니다. 그쪽에서 눈멀게 그리는 이가 아니어서 미안합니다.”
적어도 그녀가 아주 먼 우주의 시공간이라도 응시하는 듯한 눈빛일 때는 나를 백대붕이나 유희경으로 말해도 그대로 믿어줄 것 같았다.
“그렇게 농담을 하던 때도 있었지요. 촌은 선생께서 농담을 하시면 저는 주린 듯 웃고 울었습니다.”
그녀가 말한 촌은이란 단어는 아마도 옛사람들의 아호(雅號)인듯 듯했다.
“내게 촌은이나 백대붕을 묻는 그대는 누구신지요?”
여인의 이름을 묻는 내 말 뒤에 다시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었다. 둥굴넓적한 형상이지만 크지 않은 얼굴인지라 밉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응어리진 속내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자분자분한 목소리에는 정결함과 차가운 열정 같은 게 배었다. 때 묻지 않은 정리(情理)를 가져서 누군가에 의해서 쉽게 헤퍼질 수 없는 단아함도 들었다.
단순히 복고풍의 기녀 의상을 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나의 행색을 보고 이채로운 풍모라고 한 것부터가 새삼스러웠다.
“쇤내의 이름이야 개똥이며 어떻고 개펄에 뛰어다니는 짱뚱어면 또 어떻습니까. 태어나 배움이 짧고 신분이 천하여 화류계에 들어섰지만, 그마저도 이렇듯 적조할 때가 있어, 처음에는 느릿느릿 한세상을 오래 보려한다 하여 두꺼비 섬(蟾)자를 넣어 섬초라 하였고, 계해년에 태어났다 하여 새끼기생일 때 양어머니가 계생이라고도 했지요. 더러는 주변에서 기생이지만 좋은 낭군 만나는 여염집 규수처럼 되라는 과분한 뜻에 계랑(癸嫏)이라고도 불렀죠.”
그쯤에서 그녀가 내 잔에 주전자를 기울였다. 아마 자정을 넘긴 새벽이었고 사방에서 안개를 쪄내는 대기의 움직임이 들판의 외딴집으로 몰려들었을 것이다. 꼭꼭 여민 여인네의 옷고름처럼 내가 여명이 드는 새벽 댓돌에 맨발을 내려서야 안개가 깊었다는 걸 안 것은 호롱불에 흔들리는 섬초의 가채머리 그림자가 드리운 여닫이문이 닫혀있기 때문이었다. 소리도 냄새도 맛도 없는 저 문밖의 안개가 무럭무럭 제 가볍고 가벼운 몸을 대기에 밀어넣는 동안, 천둥소리는 멀어졌고 마른번개는 바다 쪽으로 들판을 흘러내린 산 너머에 잠들었다.
“... 이름보다 아호를 여럿 거느려서 삶이 여러 겹 바뀐 듯 보이기도 했겠습니다.”
“... 일찍이 이승에 나와 누구든 그 이름을 얻었을 때, 그 이름의 뜻은 그 삶을 앞질러 있고 그 뜻이야 하늘과 땅의 조화로운 지경엔들 못 닿아 있겠습니까. 그 이름이 높다한들 그 삶이 현세에서 꼭 높을 수만은 없기에, 마지막 그 아호를 달처럼 높이 쳐다보는 내 사는 곳의 땅으로 내려놓았죠.”
“그 마지막 아호가...무엇이기에?”
“매화 나뭇가지 드리운 창을 하나 가지겠다고 했지요. 세상은 노류장화라 언제든 취할 수 있는 값을 치르는 꽃이라 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매창이라 스스로에게 얻어 붙였습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잦아든 번개가 다시 치고 가슴에는 때늦은 천둥소리가 몇 번씩 무겁게 굴러다녔다. 태평양 건너편에 있는 사촌 제임스 권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 찢어진 청바지에 군대 패션인 밀리터리룩을 즐겨 입은 제임스와 진짠지 가깐지 모르게 자신이 사백 년 전의 부안 기생이었던 매창이라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주워섬기고 있는 가채머리의 여자가 한데 겹쳐졌다. 그 둘의 모습이 한데 겹쳐져졌다가 흩어지고 다시 겹쳐졌다가 몽환의 얼굴로 이상하게 뭉개졌다. 취기가 몰려왔다. 안채에서 먹던 막걸리와 다르게 별채에서 먹는 이 맑은 술은 전에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이상한 취기를 불러왔다. 그녀가 어릿어릿하게 보이기도 했다가 이내 말짱한 얼굴로 약간은 홍조 띤 가채머리의 그녀로 보였다. 정신이 어릿어릿하면서도 그녀가 매창이라는 말에 정신이 닿으면 이상하게 흥분되고 아득해졌다. 마치 안개를 주성분으로 한 최음제라도 들어있는 듯 했다.
“당신이,... 당신이, 매창이라면, 나는 뭐요? 나는 이 양복을 입고 당신의 시대를 사는 겁니까?”
“우리는 서로 옳아요, 누가 누굴 간섭하지 않아도 서로 온당하다고 여겨요. 저를 부정하지만 않으시면요.”
그녀의, 아니 매창의 눈빛은 이제 감당하지 못할 아주 먼 시공간을 응시하지 않았다. 뭐냐면 그것은 이제 두 개의 시대가 하나의 시절처럼 어색하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 이해할 수가 없어요. 뭔가 다른 시대가 이 작은 별채에만 있다는 게.”
매창은, 아니 그녀는 다시 술을 따랐고 나는 받았다. 깊어지려는 취기가 그녀를 보는 순간 다시 담담해졌다.
“지금의 나는 어찌 보이오?”
“그 이채로운 풍모의 옷들을 벗으시면, 그러시면 내가 그리는 이가 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그녀는, 매창은 옷고름에 매달린 노리개를 풀어 카세트가 올려져 있는 작은 나무선반 위에 놓았다. 다음으로 그녀의 눈빛은 내게 말했다.
‘이 가채머리를 좀 내려주세요. 내 머리가 아니거든요.’
무엇에 이끌리듯 나는 술상을 한쪽으로 밀고 그녀의 가채머리를 가만히 내려주었다. 그럴 때 그녀의 손길은 내 넥타이와 와이셔츠 단추를 자연스레 풀었다. 가슴가리개에 동여진 그녀의 봉긋한 두 젖가슴이 드러났다. 검붉은 유두가 철쭉 꽃잎 같은 젖꽃판 위에서 수줍은 듯 도드라졌다. 혀끝에 닿은 그녀의 젖꼭지는 가만히 떨렸다. 여러 겹의 돛폭처럼 부푼 치마를 헤치는 내 손을 떨리면서 거칠었다. 청색의 비단치마를 걷어내자 백옥처럼 새하얀 속치마가 탄성처럼 물결쳤다.
"... 이, 것, 이, ......사백 여 년 전 매창의 몸이란 말이오......?"
" 몸이 아니라... 맘이겠지요. 어찌 몸이 먼저 앞섰겠습니까, 나으리."
나으리, 란 말이 순간 각성제처럼 내 의식을 일깨웠다. 이 여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파초잎에 닿는 밤비 소리가 문밖에서 소란스러워졌다.
적막은 그럴 때 제 몸이 어디까지인가 슬며시 뒷태를 드러낼 것만 같다. 그러나 잦아드는 호롱불 곁에서 저를 매창이라 부른 여인의 속살은 아프도록 깊고 희었다. 어떤 세월의 힘, 혹은 그 세월의 무관심에 의해 사백 여 년의 시간이 비켜간 몸이 여기서 이렇게 다시 늦은 시간의 몸을 기다렸노라 신음 섞인 탄성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의 몸이라면, 그 다른 몸이 놀랍도록 자신의 몸과 닮아서 죽겠는지도 모르겠다. 사무쳤다. 여인의 몸은 그 살과 뼛속까지 스며든 어떤 간절함으로 사무쳤다. 무엇엔가 모를 사무친 맘과 몸이 하나로 나를 휘어 감았다. 여인의 몸에서는 문밖의 너른 펀더기 끝에 와 닿는 바다 그 높은 파도의 격랑과 휴식이 그대로 전해졌다. 칠흑 같은 새벽어둠의 모래사장에 부서지는 새하얀 파도의 몸뚱이였다. 열락(悅樂)과 적멸(寂滅)은 삼각파도가 있는 난바다와 해안선을 따라 띠를 이룬 백사장처럼 겹을 이뤘다.
서로의 몸에서 솟은 땀이 뒤섞였다. 서로의 내장을 꺼내 뒤섞을 수는 없지만, 진땀은 서로의 내장 속에서 나온 대리물처럼 투명하고 끈끈하게 혼합됐다. 들창에 비친 번개 불빛에 그녀의 허리 곡선과 탐스런 젖가슴과 조붓한 어깨가 순간순간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녀의, 아니 매창의 신음소리는 저 마음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울음처럼 간절했으나 한순간 그 슬픔을 벼려낸 웃음처럼 또 한끝 간드러졌다. 울음인가 하면 웃음이었고 웃음인가 하며 울음으로 돌아선 채 별채의 어둠을 뱀의 갈라진 혀처럼 핥았다.
"... 내가, 내가 온 줄 알았소?"
나의 말투도 짐짓 옛스러워졌다. 내가 마치 유희경이나 백대붕인 것처럼 물었다.
"... 기약을 어찌 두었겠습니까. 그러니 온 시간이 다 기약이고 이별이었겠지오."
매창의 두 젖가슴은 쳐지지 않고 봉긋했다. 그녀의 아랫도리가 절정에 다다른 것처럼 자주 요분질을 쳤다. 별채에 드리운 어둠이 그녀의 젖가슴을 어르고 핥고 빨아대고 싶어 안달이었으나 어둠은 그만한 몸을 채 갖추지 못했다. 그녀가 다시 내 아래 누웠을 때 그녀는 머리맡에 벗어둔 가채머리를 자신의 엉덩이 밑에 받쳤다. 그녀는 기쁘게 울었고, 아프게 웃었다. 가채머리에서 채 뽑아내지 못한 꽃잠(簪)이 허벅지를 아프지 않게 건드렸다. 꽃다지 모양의 떨잠(簪)이 그녀와 내 아랫도리 사이에서 바르르 떨었다. 열락을 따라 자맥질치는 한 덩어리의 두 몸이 풀렸을 때, 혼곤한 잠이 문밖의 잠처럼 몰려왔다.
"... 곤하시겠지만, 소녀가 깨기 전에 이 별채를 꼭 뜨셔야 할 겁니다."
뒤란의 가죽나무 등걸에 오줌을 뿌리며 문득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어느 혼몽한 시간에 머리를 두었길래 저토록 시대와 다른 사람인가. 안개가 맺혀 이슬처럼 목덜미에 차게 드리웠다.
별채로 향하려던 발길은 염 사장이 잠든 안채로 향했다. 안개 속에서 별채는 떠도는 행궁(行宮)처럼 아득했다. 지척의 거리가 아니라 아득한 섬의 거리였다.
안개 속에서 그녀의 별채는 동떨어진 시간으로 묵묵했다. 무언가 다른 시대를 살아야 하는 몸이 저기 매창, 이라는 이름에 몸을 빌려주고 있었다. 매창 말고 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었으나, 그녀는 젖가슴이 내 입을 수없이 숨 가쁘게 틀어막았다. 그녀가 있고 싶어 하는 시대를 지금의 시간 속에 녹여내 살고 있다는 생각만이 돌올했다. 그래도 석연치 않은 마음은 숙취 속에서 울울(鬱鬱)했다. 완벽한 연기거나 정신착란, 그러한 일체의 착종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태연스럽고 절절하게 자신의 속내를 보여줄 수가 있을까. 자고 있는 그녀를 다시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잠들기 전에 말한 금기가 나의 발길을 붙잡았다.
나는 아쉬운 발길을 안채 쪽으로 옮겼다.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미혹(迷惑)이 이와 같을까. 눈에 보이는 것은 이미 내 얼굴 이마나 콧등에 닿아서야 겨우 제 존재를 드러냈다. 있으면서도 가려진 것들의 저 의뭉스러움이 새삼스럽게 두려움으로 다가섰다. 촉각과 시각이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종종 이어졌다.
짙은 안개의 농도가 미음자 함석집 전체를 송두리째 어디론가 빼돌린 것만 같다. 어쩌면 남옥이 매창에게 나를 인도한 순간부터 내가 가졌던 도시의 시간들이 빼돌려지는 시발점인지도 몰랐다.
더듬거리듯 안채 앞의 마당에 돌아들었을 때, 백발마녀처럼 남옥이 파초 곁에 서있다. 안개가 그녀를 좀 더 신비스러운 인물로 만들었다. 이상하게 그녀는 파초를 등지고 있거나 파초를 가리며 비켜서 있거나 했다. 파초 잎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무언가를 굽어보듯 드리웠다.
“... 한 번 별채를 나서면 다시 들어오지 말라 했습니까?”
“도대체 잠은 주무시는 겁니까?”
남옥의 물음에 나는 우연 짜증이 배인 물음으로 되물었다.
“닭이 곧 울 겁니다. 새벽닭의 눈꺼풀이 움쭉거릴 때 제 잠도 같이 깬 것뿐입니다.”
순간 몰려온 안개가 그녀의 얼굴을 지웠다 되돌려놓았다. 안개는 이제 제가 몸이 없다는 말에 저항이라도 하듯 집안 구석구석을 더듬고 가리고 휘감았다 풀어놓았다. 그리고 남옥의 말처럼 새벽닭이 길게 목청을 뽑았다. 이 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들판의 외딴집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으니 이상하게도 처절했다. 안개 속에서 듣는 새벽닭의 목청은 아무도 잘 살지 않는 궁벽한 시간을 어떻게든 인기척과 사람의 기운이 맴도는 시간으로 되돌리는 신호처럼 들렸다.
“... 누굽니까?”
남옥은 적이 당황하는 듯 했으나, 그녀의 튼실한 몸매만큼이나 이내 흔들림을 가라앉히는 듯 했다.
“매창입니다.”
“화신(化身)인가요?”
“현신(現身)입니다.”
잎 끝이 층층이 갈라져 마치 갈기처럼 드리운 파초 잎 끝에 물방울들이 맺혀 떨어졌다. 남옥의 머리에는 자잘한 이슬방울들이 소복이 내려 마치 하얀 털모자를 쓴 것만 같다.
“그렇다면 나의 시간이 아니 나의 시대가 틀린 겁니까?”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또 다른 시대를 살고 싶은 분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별채는 아직도 기생이란 거군요.”
“별채는 여전히 기생인 겁니다.”
도대체 왜 나를 지난밤 저 별채에 소개했느냐 물으려다가 말았다. 남옥의 말대로 여전히 기생인 그녀에게 아직도 유희경이나 백대붕 같은 인물이 살아있는 건 당연했다. 비록 백대붕도 아니고 유희경도 아닌 내가 별채를 상대했다는 것을 짐짓 알아차리지 못했을 따름이다. 아니 내가 백대붕이 아니고 유희경도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온몸으로 알았을지 모른다. 별채가 완전한 매창이 아닌 이상 그것은 더욱 그렇다.
“...안개가 걷힐 때까지 안채에서 더 주무십시오. 아마 안개가 완전하게 걷히려면 한낮 가까이 될 겁니다. 안개가 걷히면 아마 이번 방문으로 하실 일들이 생기게 될 겁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안개 속에서 잠시 뒤돌아섰다. 눈가를 훔치는 남옥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파초 잎 끝에 맺힌 안개의 물방울이 눈에라도 들어갔는가. 그럼에도 커다란 그녀의 어깨가 조금은 흔들렸다.
“혹시, 우시는 겁니까?”
짙은 안개를 이리저리 휩쓸고 다니는 새벽바람에 파초가 흔들렸다.
“...아마, 선생님은 정오가 가까워지면 뵐 수가 있을 겁니다.”
아침에는 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순간적으로 옅어진 안개 속에서 남옥의 눈자위가 붉었다. 붉은 눈의 남옥은 기괴하고 또 이유를 알 수 없이 슬펐다.
“조금 눈을 부치면 눈의 피로가 풀릴 겁니다.”
남옥의 붉은 눈을 바라보는 나의 눈길에 그녀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의 마음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대로 얼마 남지 않은 새벽잠을 자러 안채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내가 남옥이 행랑채로 건너가는 것을 배웅했다. 안채의 마루에도 안개는 오지랖 넓게 넘실댔다. 성정이 괄괄한 안방마님처럼 안개는 모든 것을 참견하고 섭렵하겠다는 듯이 새벽의 고요를 넘나들었다.
염 사장은 여전히 곤한 잠에 빠져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술을 나누고 골동품에 대한 정보를 나누던 그 헌책방 주인 같지 않았다. 염 사장이 문득 잠에서 깨어, 자기가 백대붕이나 유희경이라고 자처한다면 어떨까.
그러면 나는 또 뭐란 말인가. 구립(區立)도서관의 계약직 사서가 아니라 붕당(朋黨)의 영수 사대부 가문에 막내아들로 태어난 위인이라면 어떤가.
염 사장의 코 고는 소리와 안개바람에 파초 잎 흔들리는 소리가 기묘하게 어울렸다. 별채의 벌거벗은 몸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양반 사대부가의 아들로 매창을 자처하는 여인과 만났다면 이 시대는 조금 덜 불편하지 않았을까. 시대를 선택할 수가 없어서 어쩌면 별채는 저렇게 혼자 그 시대를 은애(隱愛)하고 있는지 모른다.
문밖에 뚝, 하고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마 마른 파초 가지 하나가 바람에 꺾였을 것이다.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잠은 내 곁에 누워 등을 지고 모로 누웠다.
파초 옆에서 붉은 눈으로 날 바라보던 남옥이 떠올랐다. 그녀는 또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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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걷힌 것은 오전 10시가 훨씬 지난 무렵이다. 안개가 걷히기 한참 전에 염 사장은 먼저 깨었다. 먼저 깬 그가 어렵게 새벽잠에 든 나를 깨웠다. 행랑채는 잠잠했다. 붉은 눈이 맑아질 때까지 잠은 깊어야 할 것이다.
“ 배가 안 고파?”
염 사장은 아랫배를 손으로 문지르며 머리맡의 자리끼를 들이켰다. 내가 말이 없자, 그는 안개가 빠져나가는 문밖 마당 쪽으로 헛기침을 해댔다.
“...정말 배가 안 고파? 어제 그 뭐냐 술안주로 나온 가죽나뭇잎 절임 그거 말야, 혀에 쌉사름하게 감돌면서도 뒷맛이 은근히 단 게 흰밥에 얹어먹으면 그만이겠어.”
하긴 지난 저녁에 우리는 밥을 먹지 않고 술과 안주로 끼니를 대신했다. 그가 새삼 방안을 두리번거리고 헛기침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마침 남옥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손에는 작은 두레밥상이 들려있다.
“아이고 이거 밥 때가 늦는가 싶었는데 배꼽시계가 틀린 건 아니었구만.”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염 사장은 얼른 밥상을 건네받았다. 남옥의 눈은 여전히 붉었다. 잠은 잤는가. 내 눈길은 물었고 그녀의 눈은 여전히 붉게 울었다고만 말했다.
“바닷가에 좀 다녀오시지요. 늦었지만 모래사장 한켠에 아직 해당화가 몇 남았을 겁니다.”
남옥의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았다.
“그럴까? 해당화보다 뭐 좋은 횟감이나 좀 건지면 좋겠는데...”
염 사장의 바람대로 간장에 절인 가죽나뭇잎이 접시에 담겼다. 늦은 아침은 뭔가 모를 곤궁한 마음이 든 채로 배불렀다. 그런데 정말 남옥은 한숨도 자지 않은 것일까. 웬만한 장정보다 건장한 체구지만 그녀의 붉은 눈은 뭔가 다른 사연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들판을 한참 걸어 내려와 바닷가에 닿았다. 염 사장은 어떡하면 병풍을 도로 가져갈 수 있을까 진심으로 걱정했고 나는 남옥의 붉은 눈이 내 등에 박힌 것처럼 자꾸 떠올랐다. 별채에 잠든 매창도 지금쯤은 깨어 지난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그 간밤의 일들이 모두 사실인지 가늠할 수 없다. 사실이 아니라면 나는 그 별채의 일을 남옥에게 묻고 싶었다.
여인의 살결 같은 모래사장 한켠에 늦가을인데도 피어있는 해당화는 분명 철을 잃었다. 아니 잊었다. 철을 잊어서야 제가 원하는 때에 필 수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매창도 그런 여인이 아닐까.
“이거 미쳤구만. 해당화도 옛 그림에 들어야 값이 나기지 원. 여긴 우째 변변한 횟집 하나 안 보이네, 제기랄.”
염 사장은 어렵사리 피어있는 해당화를 손등으로 툭툭 쳤다. 그 서슬에 붉은 꽃잎이 흰 모래사장에 몇 낱 떨어졌다. 마치 고분고분하지 않은 창기(娼妓)의 뺨을 젊은 파락호 양반이 손등으로 슬쩍슬쩍 때리는 모양이다.
"...여기는 옛날 아니오. 늦둥이 같구만, 그 해당화 웃음이라니..."
"뭐라구요?"
"아, 아닙니다. 내가 잠시 옛날을 가졌습니다."
다시 없었던 정신이라도 돌아온 듯 나는 얼버무렸다.
"옛날이나마나 저 병풍을 이참에 못 가져가면 아무래도 허탕이오, 헛걸음이란 말입니다. 저 늙은이 겉으론 아무런 대가도 필요없는 언사지만, 워낙에 노회한 치라서 아예 목돈을 콱 박아놓고 뺏어가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럼 옛날 방법을 써보시지 그러우."
모래밭에 스러지는 파도의 흰 거품이 몇 송이 붉은 꽃을 붙들고 있는 해당화 발목까지 와 스러졌다.
" 옛날 방법?"
"잔치를 한번 벌리는 겁니다. 그 열폭 병풍을 제법 근사하게 떠나보낼 수 있게 잔치 비슷한 걸 해서 노인께서 스스로 품에서 그걸 내놓을 수 있게 마음을 풀어드리라는 거지요."
"옛날 잔치라... 헌데, 그것만 가지고 병풍을 떠나보내는 잔치라는 게 명목이 서겠소?"
염 사장은 내 말에 어딘가 끌리면서도 조금은 미심쩍은 눈치였다.
"뭐 잔치라는 게 별 겁니까. 음식과 술 차리고 동네사람들 북적거리고 염 사장이 읍내의 아가씨들 좀 불러다 한복 입혀서 큰 절 올리게 하면 그게 잔치지 별거겠습니까."
"하기사, 밥상에 탁배기 올리고 몇 사람 더 부르면 시골서야 잔치지, 암 잔치가 되겠어."
염 사장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대설군오도(大雪群烏圖)를 어떻게든 다시 가져가야지만 다음 번 노인의 호출에도 어느 정도 여유 있게 대응할 수 있겠다는 속셈인 그였다. 몇 남지 않은 해당화가 그의 손사래에 거의 다 털려갔다. 나는 그의 손등을 툭 쳤다. 그만 좀 괴롭히라는 거였다. 염 사장의 발치에 늦가을의 해당화 꽃잎이 분분하다. 해당화 꽃잎이 든 모래밭은 일견 화색이 돈 듯 붉은 빛이 번졌다. 붉은 기운이 감도는 모래를 밟고 우리는 하릴없이 갯바위에 모래를 흩뿌리며 놀았다. 놀아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못해 아득한 중년의 어른 둘이 속으로 참 낯설고 어색한 느낌을 지우며 놀았다.
해가 중천을 바로 넘어서거든 그때 바닷가를 버리고 오세요. 남옥의 말이었다. 그렇다면 세 시간 쯤은 바닷가 모래밭에서 해당화를 가지고 논 셈이다. 횟감이 없다고 투덜거렸지만, 염 사장도 간만에 호젓한 정취를 누렸다.
다시 파도소리를 등지며 우리는 다시 야트막한 산자락 펀더기를 걸어 올라갔다. 억새들이 하얗게 머리를 풀고 흔들렸다. 어디선가 피리소리가 들렸다. 피리소리가 아닌 듯도 했다. 단 며칠만 들판에 내려앉아 울기로 작정한 새들의 울음소리가 있다면 바로 저러 했으리라 여겼다.
남옥의 말을 지키려고 나는 서둘러 들판을 가로질러 올라갔다.
“... 병풍만 다시 가져갈 수 있으면 돼. 그러면 더 이상 저 노친네와 다시 마주보지 않을 거야.”
갑자기 뭐에라도 심술이 난 사람처럼 염 사장은 전의를 불태웠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서 허옇게 억새꽃 무리가 흔들렸다. 그래서인가 그의 얼굴은 마치 부라퀴처럼 어딘가 일그러져 보였다. 병풍과 관련해서 염 사장이 노인어른과 두 번 보기로 약속한 것이 그에게는 적잖은 불안으로 작용한 모양이다.
“...애초부터 가지고 내려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빼앗은 것도 아닌데...”
“그래 빼앗은 것은 아니지, 그랬다면 아예 이렇게 내려올 마음도 생기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한번 더 용기를 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뭔가 의미있는 결말을 위해서도 말이야.”
“퇘, 똥은 쌌는데 밑도 안 닦고 바지를 올리지 말란 얘기지?”
마른 풀잎 같은 것을 잘근잘근 씹다 침을 뱉듯 염 사장은 그걸 뱉었다.
“그래, 선뜻 물건을 내준 노인네 속내도 좀 더 알아보고, 이곳 경치도 만만찮으니 구경도 삼고."
문득 별채가 떠올랐다. 그 공간이 이 순간 어디에도 없을 것만 같다. 매창의 몸과 뜨거운 숨결로 사무쳤다는 새벽이 아득하여 나는 자꾸 들판을 두리번거렸다. 저만치 억새들에 파묻히듯 둘러싸인 고인돌이 보였다. 족히 몇 톤의 무게는 될 고인돌 아래 묻힌 사람은 지금쯤 뼈라도 온전히 남아있을까.
아까부터 따라다니던 피리소리는 남옥이 기다리고 있을 집에 다가갈수록 이상한 흐느낌으로 들렸다.
대문에 이상한 불빛이 어른거린다. 저게 뭐야. 염 사장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집안에는 처음 찾을 때와 다르게 이상한 수런거림이 들어찼다. 사람들이 꽤나 있는 술렁임이기도 했다. 누가 저 안에서 목청이 가는 향피리를 불렀을까. 그건 목청이 가는 어느 여자의 호곡소리다. 대문에 매단 조등(弔燈) 밑에는 못 보던 개가 배를 깔고 앉아 마치 사람처럼 쳐다본다. ‘저 개는 뭐지?’
나는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든다. 미처 못 봤을 수도 있는 저 개가 지난 밤만 빼고 밤마다 별채로 숨어들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남옥이 상복을 입고 서 있다. 못 보던 동네 사람들이 부산하게 장사치를 준비로 부산하다. 어제 집을 가리켜 준 노인도 마루 끝에 앉아 무슨 말 끝에 껄껄 웃는다. 안채 방 한가운데엔 염 사장이 가져온 병풍이 안채 한가운데 활짝 펼쳐져 있다.
“대야에다 막쏘주 몇 병 부어가지고 오게.”
염장이로 보이는 반백의 노인이 마루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전에 노인은 세상을 등졌다.
이상한 발작을 하는
몸은 그녀를 품고 기억했으나, 내 머리는 어떤 말로도 그녀를 형용할 수가 없었다.
몸은 그녀를 품고 기억했으나, 내 머리는 어떤 말로도 그녀를 형용할 수가 없었다.
매창의 빙의에 걸렸다는 여자...======== --- 역사속으로 사실
아니면 그 병풍과 또 다른 짝이 있다. 그건 다름아닌 시간도 그 둘이 만나면 함께 태어달라...
교산이 만났던 이정의 광설시초도와
해안스님이 만났던 시간도, 이징의 嫉猜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