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러
제7기갑여단에는 'Home-Grown Commander'라는 전통이 있는데 초급장교 시절부터 이 여단에서 경력을 쌓아온 장교가 나중에 여단장으로 ‘금의환향’ 하는 독특한 전통이다. 그 다음해에는 18세의 소년이 제82전차대대에 입대하는데, 그가 바로 아비가도르 카할라니였다. 그는 병역 의무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오지 않고 군에 ‘말뚝을 박기’로 결심하고는 장교후보생 학교에 입학하고 과정을 마친 다음, 기갑학교를 수료하고 전차소대장로서 1963년 제82전차대대로 돌아왔다. 훗날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의 아버지 모셰는 군 입대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내일에 가급적 간섭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는 꼭 부탁하는데, 전차병은 절대로 안 된다.”
그 이유는 수에즈 전쟁 당시 모셰는 공병대의 운전병이었는데, 파괴된 전차에서 검게 불탄 전차병의 시신을 꺼낸 적이 있었고,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제7기갑여단장은 헤르츨 샤피르 Herzl Shapir 대령, 제82전차대대장은 칼만 마겐 Kalman Magen 중령이었다. 두 사람 모두 주목할 만한 인물로 성장한다. 특히 카할라니는 마겐의 명령이라면 죽음을 무릎 쓰고 돌격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존경했다. 1965년 1월에는 하가나 출신의 슬로모 라하트 Shlomo Lahat 가 여단장에 취임했는데, 군 경력보다는 20년 동안이나 텔 아비브 시장으로 재임한 사실로 더 유명하다.
이스라엘 군의 기갑과 기계화보병여단은 6일 전쟁의 해인 1967년에는 11개까지 늘어났고, 전차도 800대까지 증강되어 1956년에 비하면 2배 이상의 규모에 이르렀다. 전차중대 역시 전례를 반영하여 기존의 14대에서 11대로 축소되었다. 이런 소프트웨어 뿐 아니라 하드웨어 면에서도 기갑부대는 놀랍게 발전했다. 이스라엘의 셔먼과 AMX-13은 시나이 전투에서 훌륭하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었지만 소련이 이집트와 시리아에 100mm주포를 장비한 최신예 T54/55를 공급하면서 새로운 전차가 반드시 필요해졌다. 그래서 미국에 M48 패튼 Patton 전차의 공급을 요청했지만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했다.
셔먼의 개량도 다시 한 번 진행되었다. 1960년대 초반 프랑스는 성형작약을 넣어 관통능력을 향상시킨 HEAT탄을 초속 1000m로 발사할 수 있는 6m 길이의 105mm 전차포를 개발했고, 여기에 주목한 이스라엘군은 이 포의 길이를 1.5m 정도, 초속을 800m 정도로 다운그레이드한 44구경 D1전차포를 만들어, 셔먼 전차에 장착했다. 아무래도 75mm 급의 전차포에 낮춰 설계된 셔먼의 포탑에 55구경 105mm전차포를 그대로 장착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동력도 460마력의 디젤 엔진로 바꾸고, 현가장치도 바꾸었다. 이 전차에는 M51이라고 정식 번호를 붙어었지만, 보통 이스라엘의 이니셜을 딴 I-셔먼이라고 불렀다. I-셔먼 다음 주자인 센츄리온의 개량 그리고 멀리는 자국산 주력전차의 개발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욤 키푸르 전쟁까지 맹활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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