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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을 준비하면서(3)>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라
2024년 5월 5일 / 딤전 4:6-10
딤전 4:6-10 /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해야 한다(7).
본문은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으로 양육하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6절a). 이처럼 예수님을 닮는 경건훈련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경건’은 ‘잘하다’와 ‘경의를 표하다’에서 유래한 말이다. 즉 경건은 하나님을 존중하고 경외하는 표현을 잘하는 것을 말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존중하고 높여드리는 것이 기본이다. 하나님께 경의를 잘 표현하는 사람이 성숙한 성도다. 경건을 위해 자신을 연단해야 한다. 예수님을 모델 또는 기준으로 삼고 연습해야 한다. 여기서 ‘연단하다’는 ‘훈련하다’ 또는 ‘옷을 벗고 운동하다’라는 뜻이다.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악한 풍조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면 철저한 자기훈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자신을 쳐서 복종하게 만들기 위해 철저하게 훈련한다고 하였다(고전 9:27).
참고로 지나치게 외적인 경건을 강조하다보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교회 안에서 엄숙한 것을 경건함으로만 착각하고 예배 시간에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것을 경건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외적으로도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 하고, 덕스럽지 않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하고, 심지어는 먹는 일에도 덕을 세워야 한다.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는 안된다.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어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킨 일도 사실은 제자들로서는 조심하였으면 한다. 그만큼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귀하지만 힘든 일이다.
마 23:25-26 / 화가 있으라.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아, 이 위선자들아,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은 방탕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으라. 그래야 잔 안팎이 다 깨끗해질 것이다.
2. 경건은 단순히 이야기 거리가 아니다(7절),
어느 목사님이 신학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신학도들을 향해 절규하셨던 어떤 노 목사님의 외침이 있었다. ‘목사이기 전에 사람이 되어라!,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사람이 되어라!’ 그 무엇보다 사람되는 게 먼저라는 것이다. 위에서도 강조했지만 매사에 내적 외적으로라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늘 조심해야 할 예의가 있다.
눅 14:7-11 / 예수께서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식탁의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눈여겨 보시고 나서 그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8) `너희가 결혼 잔치에 초대받아 가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라. 만일 너희보다 더 귀한 손님이 오면 9) 주인이 그를 데리고 너희가 앉은 자리에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주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창피를 당하면서 제일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10) 그러므로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 그러면 주인이 너희를 보고 `친구여, 윗자리가 당신을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너희는 모든 손님들 앞에서 높아지는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높이면 낮아질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경건은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다. 경건은 실천하는 행동이다. 바울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망령되고’는 ‘속된’이고, ‘허탄한’은 ‘늙은 여자가 하듯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신화’는 ‘이야기’다. 즉 쓸데없는 이야기로 소일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경건을 이야기 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또한 바울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라고 경계했다(딤전 1:4).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 변론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경건은 이야기나 교리적 논쟁이 아니다. 경건은 실천적인 것이므로 예수님을 닮기 위한 구체적인 연단이 필요하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약 1:27). 즉 참된 경건은 하나님 편에 서서 속된 것은 거부하고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3. 모든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라(10절).
경건은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다. 그러므로 경건훈련을 잘하려면 모든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세속에 소망을 두면 기복신앙에 빠지게 된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경건하고 신령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 이탈리아의 유명한 화가이며, 조각가이고, 건축가이자 시인이었던 미켈란젤로는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의 한사람이다. 바티칸에 있는 시스틴 채플(sistine chapel)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장벽화는 온통 건물 전체가 다 그림이다. 미켈란젤로가 14살 때 보톨도 지오바니라는 선생님을 만났다. 그 보톨도 선생님은 미켈란젤로에게 놀라운 재능이 있음을 알아채고는 이렇게 물었다. ‘너는 훌륭한 조각가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톨도 선생님은 다시 말했다. ‘아니야. 그보다 너는 네 기술을 무엇을 위해 쓸 것인지부터 먼저 명확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라며 미켈란젤로에게 두 가지를 보여주었다. 먼저 술집 앞에 조각이 돼 있는 조각품을 보여주었다. 다음에는 거대한 교회의 입구에 조각돼 있는 조각품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어떤 조각가가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생각지 못한 질문을 받은 미켈란젤로가 결정을 못하고 망설이자 보톨도 선생님은 계속해서 물었다. ‘너의 재능으로 무엇을 만들고 싶으냐?’, ‘너의 조각 능력을 어디에 쓰고 싶으냐?’, ‘술집 앞에 놓일 것을 만들 것이냐? 교회 앞에 놓일 것을 만들 것이냐?’ ‘너를 위한 조각품을 만들 것이냐? 하나님을 위한 것을 만들 것이냐?’, ‘기술과 능력을 키우는 것보다 무엇을 할 것이냐가 더 중요하다!’ ‘너는 너의 능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스승의 반복된 질문을 받은 미켈란젤로가 대답했다. ‘저의 모든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쓰고 싶습니다.’ 어린 미켈란젤로의 대답을 들은 보톨도 지오바니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미켈란젤로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제자가 된 어린 미켈란젤로는 스승을 뛰어넘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어서 역사적인 신앙 작품들을 남겼다.
3.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
마 7:21-23 / [너희를 알지 못한다;눅13:25-27] 종교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라 해서 다 믿음이 깊은 사람은 아니다. 그들이 내게 `주님'이라 부른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22) 심판 때에 많은 사람이 ‘주님 ,주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였습니다’라고 말하더라도 23)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람이 아니다. 물러가라, 이 악한 자들아!'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으면 기복신앙에 빠진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보고 높여야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연합하는 높은 차원의 신앙생활이 된다. 하나님을 모시고 다니며 섬겨야 할 대상이지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이용한다거나 알라딘의 램프처럼 자기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도 안 된다. 필요할 때나 찾는 수단이 아니다.
4. 왜 영성을 회복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성경에 영성이라는 단어는 없다. 영성과 가까운 단어를 굳이 찾으라고 한다면 경건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다. 영성은 훈련한다고 말하고 경건은 연습한다고 표현한다. 본문에 ‘경건을 연습하라’는 말이 있다. 연습하라는 말을 ‘김나조’라고 한다. 이 말은 체육관과 운동장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강한 힘이 미덕이던 바울 당시의 중요한 과목은 체육이었다. 고대헬라 청소년들이 김나지움에서 달리기와 레슬링으로 몸을 단련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성도들은 체육하듯이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성이란 하나님 쓰시기에 몸과 생각과 영혼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가장 완벽한 상태로 준비하는 삶을 말한다. 기독교 영성은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느끼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영광스런 단계를 말한다. 영성은 신앙인이 가지는 최고의 목표이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경건한 사람, 영적인 사람’이다. 이 단계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삶을 영성훈련이라고 한다. 영성훈련은 고된 훈련이거나 지루한 여행만은 아니다. 에녹이나 요셉처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다.
♬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 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영성은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고 은혜 받은 소중한 감격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게 된다. 영성은 비전을 향하여 나아갈 때 넘어지면 일어나도록 힘을 공급해 준다. 영성은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과 다른 섬김과 순종의 삶이 가능하도록 도와준다. 영성은 하나님의 자녀다움(품위)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준다.
영성이 분명한 교회, 영성이 건강한 교회는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성장하며 부흥한다. 영성이 살아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며 영성이 건강한 교인이 좋은 교인이다. 세상은 자기네와는 다른 고품격의 교회, 고품질의 신앙인을 기대하고 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지 못하듯이 세상 사람들은 경건한 신자들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경건한 신자는 더욱 경건을 추구하게 된다. 특별히 교회 지도자들에게는 건전한 영성이 있어야 교회가 교회다워지는데 필요한 역할을 다하게 된다. 교회 직분이 무거울수록 중직이 되면 될수록 경건의 훈련을 게을리하여 영성이 빨리 쇠약해진다. 만약 자기 점검을 게을리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속물이 되어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다. 경건의 훈련은 무엇보다 우선되어야할 과제이다.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가 그런 경우이다.
계 2:1-5 /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보내라. ‘이는 교회를 순회하며 오른손으로 그 교회의 지도자들을 붙들어 주시는 분의 말씀이다. 2) 나는 네가 선한 일을 많이 한 것을 알고 있다. 나를 위해서 수고하고 인내해 온 것도 보았다. 또 네가 믿음의 형제인 척하며 죄짓는 자들을 눈감아 주지 않고, 사도라고 스스로 떠들어대는 자들을 주의 깊게 살펴 그들이 가짜인 것을 가려낸 사실도 알고 있다. 3) 너는 나를 위해 고난을 견디었으며 낙심하지 않았다. 4) 그러나 너를 나무랄 일이 하나 있다. 네가 나를 처음만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 네가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던 그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래서 그렇게 달라진 이유를 찾아 깊이 뉘우치고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그전처럼 힘써 노력하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릴 것이다.’
5. 늘 말씀의 거울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남의 얼굴은 볼 수 있어도 자신의 얼굴은 볼 수 없다. 그래서 자신을 보기위해 거울을 사용한다. 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진정 내 자신의 모습인지 한 번도 거울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거울을 들고 다니면서 자신은 보지 않고 남들만 비춘다고 한다면 참 우스운 광경이 연출될 것이다.
야고보서를 보면, 성경을 ‘자유케하는 율법’으로서 거울이라고 하였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성경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모습은 보지 않고, 남에게만 보라고 강요하고, 정죄하며, 심지어는 거울에 비친 다른 사람의 모습을 자신의 편견과 잣대로 몰아부치기에 급급해왔던 것 같다.
약 1:19-26 /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말은 적게 하고 듣기를 즐겨하며 화는 잘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20) 분노는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사람이 되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21) 그러므로 더러운 것이나 악한 것은 모두 다 제거하여 버리고, 우리가 받아들인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십시오.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2) 또 듣기만 하고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23) 만일 누가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그 사람은 거울 앞에서 떠나면 곧 자기 모습을 볼 수가 없고 또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립니다. 25) 그러나 인간을 죄에서 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율법을 계속 착실하게 지켜 나가는 사람은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대로 실천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큰 복을 내리십니다. 26) 만일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내세우면서 함부로 말을 지껄이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그런 신앙생활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야고보서 1:19-26은 내가 먼저 지켜야 할 말씀이지 설교할 말씀만은 아니다. 거울인 성경을 통해 내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나의 추하고 악하며 때론 거짓되고 위선된 모습을 고칠 수 있을 턴데 …. 성경을 통해 자신을 살펴보지 못한 죄가 얼마나 타인을 정죄하면서 불화하며 원수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성경거울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바로잡지 않은 죄의 결과는 얼마나 큰 것인가!
성경을 해석해서 설교하는 자신들부터 성경의 거울로 먼저 자신의 탐욕적이고 추한 모습을 들여다본 후에 성도들 앞에서 겸손히 설교한다면, 한국교회는 새로운 부흥의 불길이 타오를 것이다. 성경의 거울을 신자 각자 스스로가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선생으로서 목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 참고로 한 마디 / 중국 선교의 선구자인 허드슨 테일러는 스물 다섯의 젊은 나이에 중국 땅을 밟아 평생동안 중국 선교에 헌신했다. ‘당신은 어떻게 평생을 선교사로 보낼 수 있었습니까? 당신이 진정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그건 어리석은 일 아닙니까?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 뜻에 내 생각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내 인생은 늘 보람되고 행복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다. 바이올린이 피아노 소리를 듣고 조율하듯 우리 영혼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 음성을 듣고 조율할 때, 우리는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6. 경건이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의 마음이다.
존 스타트는 경건에 이른다는 것은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다윗은 시편 16:8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여호와를 항상 자신 앞에 모셨다고 했다. 이것이 경건에 이른 자의 고백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정절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경건에 한걸음씩 다가가게 된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동행하신 이유(창 39:1-3) / 요셉이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복형제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기와 질투, 왕따의 설움을 겪으면서 살았고, 형들에 의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누명으로 감옥에까지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감옥에서 왕의 떡 맡은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었지만 술 맡은 관원장 또한 요셉을 잊어버렸다. 그러다 바로의 꿈을 해몽하고 애굽의 총리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형들에게 팔리울 때 나이가 17세 → 노예시장 → 보디발의 총무 → 감옥 → 창 41:41(총리,30세) = 13년의 세월동안, 그 고난의 순간, 순간에도 요셉은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얼마든지 상처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인데도 상처를 받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요셉은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하나님만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힘들 때 하나님을 찾고 바라보는 것은 쉽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요셉은 어려울 때나 총리가 되어서나 한결같았다.
7. 협동하는 훈련을
출애굽기 17장에는 이스라엘과 아말렉과의 전쟁이 나온다. 모세는 언덕 위에 올라가 바위에 앉아 손을 들고 기도하고, 여호수아는 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칼을 휘두르고 피를 흘리는 여호수아가 피곤했다는 얘기는 없고, 정작 모세는 피곤하고 지쳤다고 했다. 그래서 모세 옆에는 왼팔 오른팔을 붙들어 주는 아론과 훌이 있었다.
영성적인 사람일수록, 영적인 사역을 크게 감당하는 사람일수록 탈진할 수 있고 사탄의 활에 맞아 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성도들도 작은 눈빛이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지도자가 받는 상처는 그보다 훨씬 깊다. 그래서 교회에서 지도자일수록 영성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은혜 받는 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 세 마리의 소 / 이솝우화에 보면 얼룩 소, 검은 소, 붉은 소 세 마리는 언제나 함께 다녔다. 사자는 그 소들을 잡아먹고 싶어서 매일같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세 마리의 소는 언제나 같이 다니면서 사자가 덤벼들면 셋이 한꺼번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잡아먹을 수가 없었다. 어떤 때는 서로 떨어져서 풀을 뜯고 있어서 한 마리에게 달려들면 다른 두 마리의 소가 달려와서 제 동무 소를 위해 덤비기 때문에, 사자는 싸우다가 지쳐서 돌아가곤 하였다. 하루는 풀밭에 얼룩소가 따로 떨어져 있으므로 사자는 가까이 다가가서 은근한 목소리로 ‘세 마리의 소 중에서 가장 힘센 것은 자기라고 붉은 소가 뽐내더라’고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얼룩소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여태까지 셋이 똑같이 힘을 합해 적과 대항해 싸워왔고 무슨 일이든지 함께 도와 왔는데 붉은 소가 모두 제 힘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을 했다하니 건방진 소리가 아닌가 싶었다. 사자는 얼룩소에게 거짓말을 해 놓고는 붉은 소와 검은 소 있는 데로 가서는 또 그런 얘기를 했다. ‘세 마리 가운데서 얼룩소가 제일 기운이 세고 다른 짐승에게 지지 않는 것도 얼룩소 때문이라고 하니 그게 참말이냐?’라고 두 마리 소에게 물었다. 두 마리의 소는 얼룩소의 말이 건방진 소리라고 생각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붉은 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얼룩소에게 덤벼들었다. 얼룩소도 붉은 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던 터이라 있는 힘을 다해 덤볐다. 검은 소가 말렸지만 두 마리의 소는 뿔이 빠지도록 싸웠다. 그러나 두 마리 중 어느 편이 정말 센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날부터 세 마리의 소는 같이 놀지를 않았다. 사자는 기뻐하며 소들을 차례로 잡아먹었다.
▣ 서로의 체온으로 / 선다 싱은 네팔지방의 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날따라 눈보라 심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멀리서 여행자 한 사람이 다가왔다. 방향이 같음을 확인한 그들은 동행자가 됐다. 살을 에는 추위와 거친 눈보라를 맞으며 인가를 찾기위해 계속 발길을 움직였지만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쯤 걷다 보니 왠 노인 한 사람이 눈 위에 쓰러져 있었다. 선다싱은 동행자에게 ‘우리 이 사람을 같이 데리고 갑시다. 그냥 두면 죽고 말겁니다.’하고 제의했다. 그러자 동행자는 버럭 화를 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도 죽을지 모르는 판국에 저런 노인네까지 끌고 가다가는 우리 모두 다 죽게 되거요.’ 사실 그렇긴 했지만 선다 싱은 불쌍한 노인을 그냥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노인을 업고 눈보라속을 한걸음 한걸음씩 걷기 시작했다. 앞서서 가버린 동행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노인을 등에 업은 선다 싱은 갈수록 힘이 들었다. 하지만 끝까지 참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선다 싱의 몸은 땀으로 젖었다. 선다 싱의 몸에서 더운 기운이 확확 발산되어서인지 차츰 등에 업힌 노인이 의식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으로 조금도 춥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마을에 이르렀다. 선다 싱의 눈에는 마을 입구에 한 사내가 꽁꽁 언 채로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시체를 살펴본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라 바로 자기 혼자 살겠다고 앞서가던 그 동행자였기 때문이다.
■ 공멸의 싸움 / 독일 베벤하우젠 근처의 오래된 수도원에 가면 서로 엉켜 있는 두 개의 사슴 뿔이 전시되어 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묻는다. 그럴 때 원장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이 뿔은 여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입니다. 두 개의 뿔이 엉켜 있다는 것은 두 마리의 사슴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상대방의 뿔 속에 자신의 뿔을 쑤셔 넣음으로써 그만 떨어질 수가 없게 되었고 버둥대다가 끝내 둘다 굶어 죽게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 강풍을 이겨낸 비결 / 미국의 서부 고지대에 있는 세코이아공원은 항상 강풍이 몰아친다. 그런데 이곳에서 자라는 세코이아나무는 아무리 바람이 거세게 불어도 끄떡하지 않는다. 다른 나무들은 강풍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뿌리채 뽑히는 일이 허다했다.식물학자들이 이 나무를 연구했다. 나무들은 의외로 땅에 얕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무의 뿌리들끼리 흙속에서 뒤엉켜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또한 울창한 숲을 만들어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세코이아나무가 고지대의 강풍을 이겨낸 비결이다.
■ 협력하면 모두 산다 / 어느 도시에 대형 화재가 났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사거리에 두 장애인이 있었다. 한 명은 앞을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이고 다른 한 명은 앉은뱅이였다. 뜨거운 불길이 그들 가까이 오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급히 피해야 한다. 하지만 앉은뱅이는 번져오는 불길을 보면서 두려워 떨기만 할 뿐 피할 수가 없었다. 시각장애인은 어디로 피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둘 다 자기 힘으로는 살 길이 없었다. 그래서 둘 다 사는 지혜를 발휘했다. 눈이 밝아 어디로 피해야 할지를 알게 된 앉은뱅이가 시각장애인에게 자기를 업게 했다. 시각장애인은 자기 등에 업힌 앉은뱅이가 보고 말해 준 방향으로 피하여 둘 다 살게 되었다. 하나님은 혼자 사는 인간을 만들지 않으셨다. 서로 돕고 사는 인간으로 지으셨다. 이것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서로 사랑으로 협력하면 모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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