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박진원 목사님
‘교회 개척과 건축을 사명으로 45년간 충청도 농촌 목회’
‘부흥사로서 농촌교회 부흥회를 꾸준히 인도’
박기연 목사(충북연회 진천지방 사석교회 담임)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박진원 목사님은 1940년 9월 23일 충남 서산시 운산면 소중리에서 부모님의 7남매(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동네에 조그마한 기도처로 시작된 소중교회에 출석하면서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시골 마을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시던 할아버지 덕택에 아버지는 어려움 없이 서산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서산중학교 동기생들 가운데 최청수 목사(장위교회), 심현익 목사(충주서부교회), 안상도 목사(대전목동교회), 안해승 목사(진천교회) 등 감리교회의 유력한 목사님들이 배출 됐습니다. 서산중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계통학교인 공주영명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당시에 불신자였던 큰할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로 학업을 포기하고 돌아와 서산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62년 군대 입영 영장을 받고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신체검사를 받다가 늑막염에 폐질환이 발견되어 병역을 면제받고 귀향했습니다. 고향집에서 건강을 회복하며 동생들과 함께 열심히 소중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산지방 감리사 김연호 목사님(서산제일교회)께서 개척을 시작했지만 마땅한 목회자가 없었던 명지교회에 서리전도사로 파송해 주셨습니다. 명지교회에서의 첫 목회는 대산 대로리, 삼길포 바닷가 어촌 마을에 사는 교인들과 주민들을 돌아보며 목회 초년생으로서 열심히 개척 목회를 배우는 기간이었습니다.
1965년 천안지방 감리사 이강산 목사님이 성남면 개척교회에 전도사로 파송해 주셨습니다. 성남면 석곡리 하천변에 군용 천막을 치고 시작된 성남교회를 개척하면서 이강산 목사님의 주례로 명지교회 청년이었던 어머니 김순환 사모와 결혼하였습니다. 생면부지에다 연고자가 전혀 없는 성남교회에서의 개척 목회는 날마다 금식을 밥 먹듯이 하면서 신혼부부 목회자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난과 가난을 깊이 체험했습니다.
1966년 서산지방 감리사 윤춘병 목사님이 서산지방 지곡면에 신성교회를 개척하면서 초대 담임자로 파송해 주셨습니다. 신성교회는 지곡면 화천리에 이제 막 개척을 시작하는 교회였고 지곡지서장 부인 권사님과 마을의 여자 청년 몇 명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아주 미약한 농촌교회였습니다. 지난 4년간 명지교회와 성남교회에서의 혹독한 개척목회 경험은 서산 신성교회 개척에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개척을 시작하자마자 신성교회는 지곡지서 뒤편 야산 중턱에 교회 부지를 마련하고 교회 건축을 서둘렀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곧바로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면서 결혼 한지 겨우 1년 만에 결혼반지를 팔아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고향 본가의 일부 전답을 팔아서 아주 힘겹게 신성교회 건축을 마무리 할 수 있었습니다. 지곡면 소재지에 신성교회가 개척 건축되자 불과 1년 만에 교인이 50여명으로 부흥하며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에는 서산지방 해미 삼송교회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개척하여 예배당을 건축한 신성교회를 뒤로하고 지방 감리사님이 파송해 주시는 교회로 임지를 옮겨야 하는 것이 당시 신학을 미필한 서리전도사들의 숙명이기도 했습니다. 지난 5년간 여러 번 개척교회에 파송을 받았지만 신학공부를 하지 못한 신학 미필 서리전도사의 신분으로는 목회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해미 삼송교회에 파송을 받아 목회하면서 대전 감리교신학교(목원대학)에 입학하여 늦깎이로 신학을 공부하셨습니다. 월요일이면 홍성역으로 나가서 기차를 타고 대전감리교신학교에 등교하고 토요일이면 기차를 타고 홍성역에 내려서 해미 삼송교회로 돌아와 주일예배 인도하셨습니다.
방학 때가 되면 김천 용문산 기도원(나운몽 장로)에 들어가서 기도하며 성령체험을 하였고, 당시 동기 신학생으로 충서지방 인흥교회에서 목회하시던 이승호 목사님(자교교회)과 함께 농촌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부흥사로도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1970년에는 서산지방 신성교회로 재차 파송되어 목회하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이 때 서산중학교 동기생인 이상윤 장로(한남대학교 총장)와 함께 지곡면 웨슬리구락부를 조직하여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지역 청소년들을 불러 모아 야학으로 가르쳤는데 후에 고등공민학교로 발전하고 지곡중고등학교로 승격되었습니다.
목회와 학업을 병행하면서 어렵게 신학 공부를 마치고 1971년 충서지방 결성교회로 파송을 받으셨습니다. 결성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면서 목원대학교 교역대학원 석사과정을 계속해서 공부하셨고 1974년에는 교역대학원을 졸업하셨습니다. 목회를 시작한지 13년 만에 1975년 3월 남부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셨습니다. 당시 결성교회는 옛날 조선기와집 예배당에 교인들은 주로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 권사님들과 그 며느리 되시는 여자 권사님들이 주로 출석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남자 성도들은 역촌에서 김은석 권사, 성남에서 김영태 청년, 김선태 청년, 윤병세 청년 등이 교회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이 많으신 할머니 권사님들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교회에서 하얀 꽃상여를 마련하고 천국가시는 길을 찬송가를 부르면서 전 교우들이 환송하던 장례식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 해 1976년 교회 목사관 부지와 인접한 이옥렬 권사님의 밭 일부 대지 위에 터를 닦고 연건평 120평의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교인들이 덤프 트럭으로 교항리 와룡천에서 직접 모래를 실어왔습니다. 교회 기초공사로 콘크리트 타설 시공을 할 때에는 여자 권사님들이 건축 자재와 모래를 실어 날랐고, 리어커에 드럼통을 싣고 교촌 저수지까지 가서 물을 길어 왔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결성 의용소방대원들과 읍내리 좌우촌 새마을 지도자 등 마을 주민들이 함께 참여해서 예배당 기초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날마다 공사 현장에서 라면과 국수를 같이 한 솥에 넣고 끓여서 새참으로 공사하는 인부들에게 제공하였고 가끔씩 자장면도 함께 나누어 먹었는데 그 꿀맛 같던 라면국수와 자장면 새참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건축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 교회 외벽을 쌓아 올리고서는 갑자기 건축이 중단됐습니다. 공사 인부들이 찾아와서 밀린 건축대금 지급을 요구하며 거세게 항의 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조용히 한얼산 기도원에 들어가셔서 무작정 기도를 드렸습니다. 40일간의 기도를 마치고 한얼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서울에 잠시 들러 주봉택 목사님(인천동수교회)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지원을 부탁드렸는데 그 자리에서 종로지방 궁정교회 장로님들을 연결해 주셔서 부족한 건축비를 지원받아 가지고 내려와 우선 밀린 공사대금을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시 중단되었던 지붕공사와 전기공사를 마무리하여 교회 건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예배당 건축을 완공한 결성교회는 자립하는 교회가 되었고 비약적으로 부흥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결성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두 동생 박진호 목사(결성교회), 박진석 목사(수향교회)가 아버지의 인도로 목원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남부연회 3형제 목사가 되었습니다.
1979년 당진지방 북창교회로 부임하셨습니다. 북창교회는 예당평야 지대에 위치한 농촌교회로 쌀농사와 구릉지 야산에서 사과 과수원을 경작하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주일날이면 아주 넓은 예배당 마루 바닥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교인들이 많이 나오는 교회였습니다. 추수감사주일에는 현물로 벼 80kg 수백 가마니를 드리고, 사과 과수원을 경작하시는 교인들은 부사 사과 15kg 상자를 현물로 수십 상자씩 봉헌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이면 연례행사로 교회 마당에는 마치 추곡 수매하는 창고 마당 같이 볏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교회 앞 정미소에서는 4.5톤 트럭으로 연신 볏가마니를 실어 나르는 광경은 장관이었습니다.
예당평야 드넓은 들녘에서 교회까지 4-5km 거리를 걸어서 나오는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북창교회는 낡고 비좁은 교회를 건축하기에 앞서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걸어 나오는 교인들을 수송하기 위해 25인승 선교버스를 구입하여 운행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창교회 주변의 각 마을마다 교회가 개척되기 시작하였고 북창교회로 출석하던 수많은 교인들이 빠져나갔습니다. 급기야 북창교회에서 불과 2Km 떨어진 신평면 상오리에 감리교회가 분리 개척되자 신평면 상오리, 순성면 아찬리에서 나오던 교인들마저도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결국 북창교회에 남아있던 교인들은 교회 건축을 시작하기도 전에 건축의 동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 시기에 북창교회 청년회와 학생회에서 여럿이 신학대학에 진학하여 다수의 감리교 목사가 배출됐습니다. 당시 청년부 교사였던 이민태 목사(금곡교회)는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산지방으로 목회를 나갔고, 큰 아들 박기연 목사(사석교회)는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동부연회 홍천지방으로, 이원주 목사(미얀마선교사)는 목원대학교를 졸업하고 동부연회 영월지방으로, 고대원 목사(향린교회)는 목원대학교를 졸업하고 남부연회 태안지방으로 목회를 나가게 되었고 모두 감리교회의 목사가 됐습니다.
당진 북창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교회가 5-6개의 개척교회로 분리되면서 교인들이 이탈하는 아픔을 겪으시다가 1984년 태안지방 소망교회로 부임하셨습니다. 태안제일교회에서 분리 개척된 소망교회는 젊은 부부 교인들이 주로 나오는 교회였고, 태안 기상관측 측후소에 다니는 엘리트 공무원(공학박사) 부부들이 다수 출석하는 읍소재지에 위치한 도시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개척 된지 10년 만에 소망교회는 태안지방에서 가장 빠르게 부흥하는 교회가 됐습니다. 교회가 부흥할수록 비좁은 예배당의 건축을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소망교회는 교회 건축을 준비하면서 태안시내 중심지인 버스터미널 근처의 공터 500평 부지를 매입 확보하였습니다. 그러나 매입한 교회 부지는 도시개발제한 구역에 위치해 있었고, 막대한 교회 부지 매입 대출금을 상환하면서 교회 건축은 기약 없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소망교회는 교회를 건축하기에 앞서 우선 급한 대로 예배당과 교육관을 증개축하여 사용하기로 하고 교회 건축을 뒤로 미뤘습니다. 1987-8년 태안지방 감리사로 선출되셨고 그때 태안지방에 학암포교회, 연포교회, 문도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1989년 논산지방 은진교회로 청빙을 받아 부임하셨습니다. 은진교회는 낡고 오래된 예배당을 철거하고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하려는 열의가 가득한 교회였습니다. 박윤 장로님을 비롯한 다섯 분의 장로님들과 은진교회 출신으로 유명한 교회 건축업자인 서울 구로중앙교회 최 장로님의 도움으로 은진교회의 예배당 건축을 위한 제반 여건이 거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은진교회에 부임 하자마자 곧바로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였고 3개월 만에 구예배당을 철거하고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교회 건축을 위한 모든 여건이 준비된 상태에서 은진교회 건축은 일사천리로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교회건축을 시작한지 9개월 만에 마침내 웅장하고 아름다운 예배당이 완공되었습니다. 은진교회는 1989년에 건축 봉헌한 예배당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 건축이 완공되면 모든 공로와 영광을 성도들과 하나님께 돌리고 목사로서의 사명을 다했다고 여기시고는 과감하게 떠나셨습니다. 지곡 신성교회에서도, 결성교회에서도, 논산 은진교회에서도 예배당 건축을 마치고 봉헌하자 곧바로 다음 목회지를 찾아 떠나셨습니다.
1990년 온양서지방 신창교회로 부임하셨습니다. 장항선 철도가 지나가는 신창역 맞은편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세워진 신창교회는 전형적인 농촌교회였습니다. 신창교회에서 목회하면서 1991년 남부연회 온양서지방 감리사와 남부연회 부흥단장을 역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1년 6월 중순 남부연회 교역자 산상성회를 앞두고 대전에서 학교 다니던 자녀들 자취방에 들리셨다가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이 때 사고로 어머니는 머리를 심하게 다치셔서 47일 동안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가 구사일생으로 회복되셨지만 그 후로도 6개월간 병원생활을 지속해야만 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는 5년 동안 대전 충남대학병원에 통원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목회에 전념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45년간 목회하시면서 이 때가 목사로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1994년 온양서지방 염티교회로 부임하셨습니다. 염치읍 소재지에 위치한 염티교회는 아산시 변두리에 위치한 한적한 농촌교회로 교회부흥이 더디고 변화가 거의 없는 지역이었고 주변 마을에는 가까운 온양시내의 큰 교회로 나가는 교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염티교회에서 목회하는 동안 어머니의 건강과 체력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아버지의 목회도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염티교회 이상호 장로, 이미석 장로 등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면서 10년간 교회 부지를 추가 매입하여 확장하고 차근차근 교회 건축을 준비하였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산시 변두리 지역으로 도시화가 급속하게 확장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아버지는 은퇴하기 전 마지막 교회 건축을 시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논산 은진교회의 건축과는 달리 교회의 형편이나 재정, 건축에 대한 교인들의 열의가 부족했기에 2003년 시작된 연건평 400평의 염티교회 예배당 건축은 일생에 가장 힘겨운 교회 건축이 되었습니다. 염티교회를 건축하면서 2003-4년까지 충청연회 온양서지방 감리사를 재차 역임하셨습니다. 염티교회 건축을 모두 마쳤지만 그 이후로도 5년 동안 건축 뒷마무리를 위해 애쓰시다가 아주 어렵게 봉헌식을 드리고 목회 일선에서 은퇴하셨습니다.
교회 개척과 건축을 사명으로 여기시고 45년간 충청도 농촌지역에서 목회하셨습니다. 명지교회, 성남교회, 신성교회 등 세 교회를 개척하셨고, 신성교회, 결성교회, 태안소망교회, 은진교회, 염티교회 등 다섯 교회 예배당을 건축하셨습니다. 그리고 남부연회 태안지방과 충청연회 온양서지방에서 3회 감리사를 역임하셨고, 부흥사로서 농촌교회 부흥회를 꾸준히 인도하시며 남부연회와 충청연회의 부흥단장을 2회 역임하셨습니다. 목회 말년에는 충청연회 목원대학교 동문회장으로 활동하시다가 2007년 충청연회에서 은퇴하셨습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셨는데 큰 아들은 감리교 목사로, 작은 딸은 감리교 목사 사모로, 큰 딸과 작은 아들은 성남대원교회와 안양제일교회에서 권사로 열심히 감리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지금은 큰 아들이 목회하는 지근거리의 청주에서 건강하게 노년 삶을 지내고 계십니다.(2020년 12월 25일 결성교회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