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9章 어떤 내기 방향(方向) 그윽한 여인의 규방(閨房)안에 혁사린과 병서시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혁사린은 한참 후에 서서히 입을 열었다. [낭자께 할 말이 있어 방문하였소.] [무슨 말씀이신지요?] 병서시는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 그녀 가슴엔 한 가닥 기대가 스며져 있었다. 괜히 가슴이 뛰었다. (혹시 나에게...) 이것이 여인의 마음인가! 혁사린은 서서히 입술을 떼었다. [낭자, 정사수호맹의 군사(軍師)가 되어 주시오.] [으음...] 병서시의 전신이 세차게 경련을 일으켰다. (결국 이런 말을 하기위해 나를 찾아오셨구나. 역시 나는 꿈만을 가졌을 뿐이야. 이루어지지 않는 꿈...환상...) 그녀의 눈가에 얼핏 눈물이 보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치매옹의 지모(智謀) 역시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소녀의 능력으로는 그같은 자리를 감당할 수가 없을 거예요.] 혁사린은 고개를 저었다. [겸손의 말씀이오. 사존 염화웅에게 낭자에 대해 이미 들었소.] (나에 대해 물었단 말인가?) 그 말에 그녀는 다시금 가슴이 뛰었다. 이 순간 혁사린은 말을 이었다. [또한 소생이 보기에 낭자의 지모는 세상을 뒤덮고도 남을 정도이오. 그러니 부탁을 들어주시오.] 병서시는 씁쓸하게 웃었다. [명령이시라면 받들어야지요.] 혁사린은 흠칫했다. 하나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낭자, 명령이 아니오. 이것은 내 개인적인 부탁이오. 즉,다시 말해 나의 개인적인 군사, 동조자가 되어 달라는 것이오.] 일순 병서시는 고개를 번쩍 쳐들어 혁사린을 응시했다. 그녀의 번뜩이는 눈동자엔 아픔이 있었다. (아니야...가까이 하면 더욱 괴로울 뿐이야.) 혁사린은 지극히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낭자, 나를 정사수호맹주라 생각하지 마시오. 다만 무림을 구하고자 하는 작은 하나의 인간으로 생각하시오.] [맹주의 뜻은?] 혁사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소생은 낭자와 더불어 개인으로 알고 싶소. 다시 말해서 정사수호맹주가 아닌 인간 혁사린과 병서시로서 말이오.] [매...맹주...] 병서시는 이 순간 한 가닥 신광이 자신을 향해 비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 혁사린은 돌연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그럼 승낙한 것으로 알겠소. 제갈군사, 그만 주무시구려.] 혁사린은 서서히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순간 병서시가 급히 불렀다. [맹주, 잠깐만...] [...?] 혁사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병서시는 자신의 손톱을 뜯으며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맹주께서는 소녀를 어떻게 생각 하시나요?] 이렇게 물은 그녀의 전신은 불에 데인 듯 화끈 달아올랐다.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제갈군사, 내 사존에게 낭자에 대해 자세히 들었소. 나는 그대가 몹시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생각하오. 천하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그리고...] 여기에서 잠시 말을 끊은 그는 조심스러우나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제갈군사의 연약한 몸을 회복시켜 주고 싶소.] 그리고는 이내 그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이 순간 병서시의 전신에서는 기쁨과 환희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었다. (아아...이것이 꿈이 아닐까? 그분이 분명 나에게...) 눈물인가?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동자에 이슬이 맺혔다. 문득 병서시는 창밖의 달을 응시했다. [아름답다. 저 넓은 공간...나는 나가보고 싶다. 그분과 함께 천하를 주유하고 싶다.] 달(月)은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게 빛을 뿌려주고 있었다. * * * -호천각(護天閣). 이곳은 혁사린, 즉 정사수호맹주의 거처이다. 지금 혁사린을 비롯한 혜원대선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혁사린은 서서히 입을 열었다. [아직 본맹의 세력으로는 마기를 제압할 수 없소. 때문에본 맹주는 새로운 힘을 구축할 것이오.] [새로운 힘?] 혁사린은 사존 염화웅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품속에서 조그만 양피지를 꺼내주었다 [사존께서는 이것을 전제자들에게 전수하시오.] [...?] 사존염화웅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았다. 그는 천천히 양피지를 살펴보았다. 찰나, 그의 입에서 경악의 외침이 터져나왔다. [이건...!] 혁사린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본 맹주가 어제 새로 창안한 보잘 것 없는 초식과 검진,도진, 그리고 기문진이오. 그것을 제자들이 갖춘다면 가히 무적이 될 수 있으리라 믿소.] (과연 맹주다.) 경악과 감탄의 물결이 소용돌이 치는 순간 혁사린은 다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빠른 시일 내에 익혀야 할 것이오.] 혜원대선사가 공손히 받으며 물었다. [무엇인지요?] 혁사린은 야릇하게 웃었다. [그대들은 사대천왕(四大天王)을 알고 있소?] [사대천왕!] 군웅들은 대경실색 했다. 그들이 어찌 팔백년 전 강호를 풍미했던 사대천왕을 모르랴? [그 양피지에는 사대천왕의 네 가지 무공을 한데 합쳐 이룩한 신공이 있소. 사대천왕의 장점들만 간추린 것이오. 여러분은 그것을 익혀야 하오.] [맹주...] 모두들 너무도 흥분하고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니오. 무림을 위해서...전해주는 것 뿐이오.여러분이 강해지는 그 자체가 무림의 안녕이니까 말이오.] 혁사린은 덧붙였다. [이제 본 맹주는 남해의 환상도(幻想島)를 흡수해야 하오.아울러 북해를 다시 탈환할 것이오.] [북해와 남해?]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혁사린의 입가에 신비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후후훗...그리고 정사이십성숙! 그들을 부를 것이오. 그들은 정사수호맹의 결사대(決死隊)로 변할 것이오.] [...?] 군웅들의 눈썹이 경련을 일으켰다. 혜원대선사의 두 눈에 빛이 일렁였다. (제마신협! 모든 것이 신비롭구나. 그가 황금대야의 손자이며 가공할 무공과 하늘조차 가리는 지혜를 지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일 하나하나가 상상을 초월하지 않은가?) 그와 동시 사존 염화웅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사실 정사수호맹의 결성은 황금대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금력(金力)은 백도의 거목인 소림사를 움직이게 했고 아울러 나를 이곳까지 끌고 왔다. 그의 막대한 군자금이 있었기 때문에 정사무림은 마세에 대항할 힘을 준비할 수 있었다. 정녕...금력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인가?) 그렇다! -금력(金力)! 황금벌의 엄청난 금력이 있었기에 정사수호맹은 탄생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금대야의 금력이 기반이 되어 이 자리에 정사수호맹을 세울 수 있었다. 아무리 의기(義氣)가 하늘을 찌르고, 중원을 지켜야한다는 결의(決意)가 바다조차 엎는다 해도 수많은 조직과 인원들이 움직이는 것은 마음 하나로 전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정사 양도의 정예들은 오직 무공연마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것은 황금대야가 황금벌의 금력을 무한대로 풀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어쨋든 정사수호맹은 이제 제 궤도에 들어섰다. 밤이 새도록 호천각의 불빛은 꺼질 줄 몰랐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혁사린은 정사수호맹을 떠났다. 그가 어디로 떠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그 자신만이 알 뿐이었다. * * * 범호(范湖)- 호수가 많기로 유명한 강서성(江西省)의 세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호수 범호는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안개에 가려진 호수는 정녕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한데, 언제부터인지 호수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그는 일신에는 평범한 촌부의 삼베옷을 입고 있었다. 허연 백발은 그의 풍진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어디로 보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태공(太公)으로 보일 뿐이었다. 백발노인은 물끄러미 낚싯대의 찌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순, 낚싯대의 찌가 가볍게 움직였다. [걸렸군!] 백발노인은 재빨리 낚싯대를 낚아챘다. 푸드드득 꼬리로수면을 차며 팔뚝만한 잉어가 물려 올라왔다. 백발노인은 잉어를 응시하며 빙그레 웃었다. [어리석은 녀석...배가 고팠더냐? 어찌하여 이 늙은이의 낚싯대에 걸렸더냐?] 백발노인은 다시 중얼거렸다. [기회는 한번 뿐인게야.] 그는 잠시 잉어를 응시하다가 길게 탄식을 내쉬었다. [불쌍하구나. 네가 인간이었다면 노부는 너를 죽였을게야.] 그리고는 잉어를 다시 풀어주는 것이 아닌가? 잉어는 꼬리를 치며 물 속 깊이 사라졌다. 백발노인은 문득 기이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훗...오십 년 동안 노부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아보지 못했군. 잡히는 녀석마다 모두 불쌍하게 보이니...] 오십 년 세월동안 잡은 고기를 모조리 놓아주었다면 무엇 때문에 낚시를 한단 말인가? [갈까?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하나?] 백발노인은 낚시대를 어깨에 둘러메고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백발노인은 좌측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석 위에 한 서생이 앉아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백발노인은 서생에게 마주 미소를 보낸 뒤 걸음을 옮겼다. [노태공! 이대로 떠나시렵니까?] 서생의 입에서 가벼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백발노인은 서서히 걸음을 멈추며 서생을 응시했다. [자네는 노부에게 볼일이 있나?] 서생은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소생은 노태공의 행동에 존경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백발노인은 힐끗 낚시대를 응시하며 말했다. [노망들은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지. 그러니까 오십 년 동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 서생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것이 사해어옹(四海魚翁)의 매력이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흠칫 놀라며 백발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반보 가량 뒤로 물러섰다. 사해어옹(四海魚翁)- 그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고수였다. 특히 그는 동정기협 (洞庭奇俠) 어우동(漁雨東)의 사제이기도 했다. 천하를 유랑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고 사(邪)를 무척이나 미워하는 정인(正人)이다. 사해어옹은 물끄러미 서생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누구인가?] 서생의 입가에 한가닥 기이한 미소가 흘렀다. [칠십이철혈마동(七十二鐵血魔童) 중 여덟 번 째!] [칠십이철혈마...] 사해어옹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서생의 일신에서 무서운 광채가 폭사되었다. 파파팟! [으아악!] 사해어옹은 미쳐 피하거나 공세를 막기 위해 공력을 끌어올릴 겨를도 없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풍덩! 그의 시신은 조용한 범호 호수 속에 빠져버렸다. 피가 수면에 물감처럼 번졌다. 스스로 지옥갱 칠십이철혈마동의 여덟 번째라 밝힌 서생은 핏물 번지는 호수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싱겁군...] 칠십이철혈마동(七十二鐵血魔童)! 드디어 이 땅에 다시 지옥갱의 존재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 * * 반검살혼(半劒殺魂) 진의표(陣懿表)는 반혼검으로 천하에그 명성을 떨친 인물이다. 그의 침실 안에서 기이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헉헉...] 그 소리는 침실 한쪽에 있는 침상 위에서 나는 소리로 지금 두 남녀가 알몸인 채로 서로를 탐닉하고 있었다. 진의표의 몸이 위아래로 율동할 때마다 밑에 깔려 있는 여체는 교성을 연신 흘려냈다. 두 남녀의 사랑 행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돌연 등 뒤에서 지옥의 사자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크흐흐흐...진의표! 호흡이 너무 거칠군.] 진의표는 대경실색을 했다. [누...누구냐?] 그는 빙그르르 신형을 그대로 붕 떠올라 벽에 걸린 애검인 반혼검을 잡으려 했다. 파츠츠츠--- 돌연 반혼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며 도리어 반검살혼 진의표의 심장을 찔러가는 것이 아닌가? [크아악!] 반검살혼 진의표는 반대편 벽까지 날아가 그대로 박혀버렸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형식의 죽음은 반혼검이 그의 심장을 꿰뚫고 그 여세로 벽에까지 박혀버린 것이었다. 주르르 그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가 검신을 타고 방바닥으로 떨어졌자. 그런 진의표의 시신을 주시하는 한 인영은 창백한 얼굴에 냉막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청년이었다. [크흐흐...진의표! 나는 혈무연(血霧淵)에서 왔다.] 부들부들 떠는 여인에게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은 다음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 * * -무적신풍(無敵神風) 예필성(芮筆成). 정인의협으로 강호 절정고수였다. 그에게는 이미 십여 년 전부터 고질을 앓아온 부인이 있었다. 무적신풍 예필성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상에는 수척하기 이룰 데 없는 부인이 누워있었다. [부인...좀 어떠시오?] 예부인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요.] 무적신풍 예필성은 길게 탄식을 토해냈다. [부인...정말 면목이 없구료. 내가 못난 탓에...] 예부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아니예요. 당신은 그동안 소첩을 위해...이제 당신은 다른 부인을 맞이해야 해요.] [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오. 그것은 아니될 말이오. 설사 부인이 명을 달리한다 해도 나는 결코...아니 부인과 함께 죽음을 택할 것이오.] [여...보...] 두 사람은 서로를 뜨겁게 부둥켜 안았다. 이것이 부부애(夫婦愛)인가? 한데, 어느 한순간 예부인의 두 눈에서 형언할 수 없는 살기가 폭사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고 있던 무적신풍 예필성은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헉...부인!] 그의 입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뭉클뭉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암습(暗襲)이었고, 그의 심장엔 여인네들이 지니고 다니는 은장도가 자루까지 깊이 박혀 있었다. 그 은장도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부인의 것이었다. [호호호...부인? 웃기지마라. 네놈의 부인은 이미 저승으로 갔다.] [네...년은 누구냐...?] [호호호...보아라.] 예부인은 얼굴을 쓱 문질렀다. 그러자 전혀 다른 중년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크으윽...무엇 때문에...] [호호호...백마도! 본녀 제이십육도주 미령도주(美令島主)는 무림에 일대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배...백마도...크윽...] 무적신풍 예필성은 침상 아래로 미끄러지며 숨을 거두었다. 미령도주는 저주스러운 교소를 토해내며 꺄르르 웃었다. [호호호...] * * * 동정호(洞庭湖)- 교교히 내리비치는 달빛은 물결 위에 부숴지며 아름다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혁사린은 부서지는 달빛을 응시하며 언제까지나 서 있었다. (아름답다. 인간의 마음이 저렇게 깨끗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무의 미소가 스치듯 지나갔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맞은편에 보이는 동정루(洞庭樓)로 향했다. 막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의 시야에 한 인물이 보였다. 이층 창가에 지극히 준수한 자의서생(紫衣書生)이 앉아 동정호 수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흠잡을 데 없이 준수한 서생이었다. 이때 자의서생이 시선이 혁사린에게로 고정되었다. 지금 혁사린의 모습은 원래의 진면목은 아니지만 비교적 준수한 상태였다. 자의서생은 다시 시선을 수면으로 이동시켰다. 혁사린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묵묵히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서서히 자의서생쪽으로 향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예를 했다. [노형, 동석해도 좋겠소?] 자의서생은 다른 곳의 빈자리를 힐끗 쳐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앉으시오.] [고맙소. 소생은 종무인(宗武人)이라 하오.] [동방운(東方雲)!] 자의서생은 간단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혁사린은 술과 요리를 주문한 뒤 입을 열었다. [동방형께서는 유람을 즐기는 중이오?] 동방운은 혁사린을 힐끗 응시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는 혁사린의 아래 위를 훑아보았다. [종형은 무림인인 것 같구료?] 혁사린은 내심 경악했다. (무서운 안력이다! 나의 모습은 평범하며 내공이 겉으로 나타나지 않거늘...그렇다면 동방운은...) 동방운은 빙그레 웃었다. [어지러운 천하요! 무림이 이토록 위태로운 지경은 처음인 것 같소.] 혁사린은 다시금 경악했다. 동방운 스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문제요. 지옥갱, 백마도, 혈무연은 더욱 기승을 부리니...]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저지할 능력이 무림에는 없소.] 동방운은 야릇하게 웃었다. [후후후...있소. 한 여인은 능히 세력을 확보할 능력을 지니고 있소.] [한 여인...] 동방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항아선희(姮娥仙嬉), 그녀는 능히 거대한 세력을 하루 아침에 구축할 수 있으니 말이오.] 혁사린의 두 눈에 야릇한 빛이 어렸다. 항아선희(姮娥善嬉) 주진희(朱珍稀)-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가 있음에 천하의 모든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녀가 있음에 모든 아름다움이 빛을 잃는다고도 했다. 진정 놀라운 것은 그녀가 황궁(皇宮)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인 공주라는 신분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 몇 잔을 주고 받았다. 이어 동방운은 서서히 말했다. [항아선희를 강호에 끌어낼 수 있다면 무림은 커다란 힘을 얻게 되오.]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느릿하게 일어났다. [즐거웠소.] 말없이 사라지는 동방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혁사린의 두 눈에서 일순 짙은 의혹의 빛이 물결쳤다. (어찌하여 남장을 했으며 왜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것일까?) 동방운이 여인이란 말인가? 그렇다! 동방운은 남장여인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뛰어나게 변장했다 해도 제마신협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혁사린은 서서히 수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항아선희...언젠가 그녀의 옷을 벗기겠다고 한 적이 있었지? 후후후...한 번 해볼까?) 야릇한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천하제일미이며 대명 황실의 공주인 항아선희의 옷을 벗기는 일은 과연 쉬울까? * * * 월화궁(月花宮)은 황궁에서도 가장 화려하며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이 바로 항아선희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단아한 방 안 일신에 고아한 궁장을 한 소녀가 팔방형의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용모는 정녕 꽃이 시들고 달빛조차 사그라질 정도였다. 모든 아름다움이 그녀에 의해 빛을 잃는 듯했다. 섬세한 몸매, 그리고 완연한 미, 이것이 바로 아름다움! 그 자체인 것이다. 가볍게 나부끼는 머리카락 한 올마저 아름답다. 아니, 간혹 미소 짓는 그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그런데 어찌 보니 슬픈 듯 영롱한 그녀의 두 눈동자가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아니 그녀의 모든 것이 아름다울 뿐이었다. 항아선희 주진희! 그녀가 아니면 절대 지닐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는 한없이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은 언제나 아름답구나. 그러나 이내 마음은 왜 우울할까?] 그녀의 옥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돌연 등 뒤에서 청아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공주께서 시름이 잠기다니...정녕 놀라운 일이구료.] 항아선희는 놀랍게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입가에 기이한 미소까지 떠올리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탁자에는 한 청년이 탁자에 두 손을 놀려놓은 채 항아선희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아름다움을 감상이라도 하듯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대범하게 항아선희가 마시다 남은 향그러운 차를 주저없이 마시고 있지 않는가? 그는 눈쌀을 찌푸리게할 정도로 못생겼다. 곰보투성이에다 두 눈은 사팔뜨기였으며 코는 하늘을 비웃듯 휑하니 위로 뚫려 있었다. 조물주가 내팽개친 얼굴이었다. 항아선희는 서서히 청년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례한 침입자로군요.] 그녀 역시 대범했다. 강호의 협녀라 해도 이 상황에서는 당황할텐데 말이다. 못생긴 청년, 즉, 혁사린은 차를 한모금 마시며 말했다. [공주의 입김이 닿아 더욱 향기롭구료.] 항아선희는 살포시 웃었다. [그대는 이곳에 침입한 것이 두렵지 않나요?] [두렵소. 그러나 천하제일의 미인을 보는데 죽음인들 두렵겠소?] 그의 능청에 항아선희는 야릇한 눈웃음을 지었다. [만약 본 공주가 시위(侍衛)를 부른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혁사린!] 항아선희는 일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는 생글 웃으며 혁사린의 못생긴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맑은 눈을 응시했다. [혁공자께서는 본 공주의 침소에 침입한 것으로 보아 놀라운 무공을 지녔겠군요?] 혁사린은 씨익 웃었다. [조금은...] 이어 그는 항아선희의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듯 두 눈을 빛내며 직시했다. [공주께서는 소생의 용모가 보기에 역겹다고 생각지 않으시오?] 항아선희는 방실 웃었다. [그것을 묻기 위해 침입했나요?] (대단한 화술을 지녔군.) 혁사린은 내심 쓴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아니오.] [그렇다면...] 혁사린은 야릇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떠올렸다. [공주, 세상의 남자들은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어떤 생각을 갖는지 아시오?] [...] 항아선희가 말이 없자 혁사린은 말을 이었다. [계속해도 되겠소?] 항아선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번째...그 아름다움을 꺾고 싶어하오.] 항아선희의 전신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의 안색이 최초로 약간 변했다. 한데, 그녀의 수양은 몹시 깊은 듯 이내 천천히 말했다. [재미있군요. 두번째는 뭔가요?] 혁사린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두번째...그 아름다움을 자체 그대로 보는 즐거움이오.] [자체 그대로?] [그렇소. 솔직히 말하자면 나신을 보는 것을 말하오.] [으음...] 항아선희의 입에서 비로소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어 그녀는 다소 화가난 듯한 어조로 망했다. [경박해다고 해야 할까요.아니면 무례하다고 해야 할까요?] [후후훗...사실 그대로 말씀 드렸을 뿐이오.]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혁사린은 히죽 웃었다. [말하리다. 공주의 옷을 벗기기 위해서요.] [으윽...] 항아선희의 신형이 두어 차례 휘청거렸다. 두 눈에서 세상을 말살할 듯한 가공할 살광이 뻗쳐나왔다. (과연 생각한대로 공주는 무서운 무공을 지니고 있구나!) 그녀는 일순 교소를 토했다. [호호호...공자, 그대는 그럴 자신이 있나요?] 혁사린은 느릿하게 말했다. [자신이 없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오.] [대단하군요.] 서릿발같은 음성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좋아요.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요? 무공...아니면...] 혁사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 아름다운 공주에게 무력을 쓰겠소. 공주 스스로가 벗도록 할 것이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천만에...자신 있소.] [공자...그대는 알 수 없는 사람이군요. 스스로 죽음을 택하니 말이예요.] [죽음? 공주, 소생은 천성적으로 못생겼소. 이 기회에 공주의 나신을 본다면 죽는 들 무슨 한이 있겠소?] 매우 경박스런 어투였다. 항아선희 역시 정녕 무서울 정도로 침착하며 대범했다. [공자, 방법을 시작해 보지 않겠어요?]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방법은 없소.] 항아선희는 고개를 갸웃거리자 혁사린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공주께서 벗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작정이오?] 항아선희의 반달같은 눈썹이 성큼 위로 올라갔다. [치졸하다고 생각지 않나요?] 혁사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전혀...] 문득, 그의시선이 침상 옆에 있는 조그만 옥함에 머물렀다. [공주, 봐도 되겠소?] 이어 그녀가 승낙하기도 전에 성큼 걸어가 옥함을 가지고 왔다. 뿐인가! 침상을 응시하며 야릇하게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한 번 누우면 꿈 속을 헤매는 느낌이겠군. 흠...향기가 그윽하군. 누구의 향인가?] 완전히 망나니의 행동 그대로였다. 이 순간 항아선희는 그러는 그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용모는 추악하지만 정녕 무서운 기풍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시위들을 부르지 않는 것일까? 그의 경박함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또 뭐지? 공연히 그가 경박스럽게 하는 말을 듣고 싶으니...) 그러다가 그녀는 화들짝 자신에게 놀랐다. (어멋! 내가 무슨 생각을...나는 일국의 공주가 아닌가?) 그러나, 혁사린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은 일개 평범한 아낙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으니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혁사린은 천천히 옥함을 열어 보았다. [응?]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옥으로 깎아 만든 패였다. 그것은 손바닥 반만 했으며 모두 사십 개였다. 패의 앞면에는 갖가지 꽃들이 새겨져 있었으며 뒷면은 밋밋했다. (화전패(花箭牌)...!) 화전패(花箭牌)- 주로 궁정에서 행해지는 놀이의 일종이었다. 각각 다섯 개의 패를 가져 동일한 꽃이 많이 나오는 편이 이기는 것이었다. 화중왕(花中王)인 모란(牧丹)이 으뜸, 화중신선(花中神仙)인 해당화(海棠花)가 다음, 화중군자(花中君子)인 연꽃이 다음 순위였다. 혁사린은 화전패를 응시하며 항아선희에게 말했다. [공주의 화전패 기예는 어느 정도이오?] 항아선희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를 능가할 만큼...] [오...!] 혁사린은 탄성을 발했다. 문득 혁사린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공주...한 번 하시지 않으시겠어요?] 항아선희 역시 괴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요. 그러나 그냥 하면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내기?] 혁사린은 그를 응시했다. 볼수록 눈이 부신 용모였다. 항아선희는 천천히 말했다. [만약 본 공주가 이긴다면 공자의 진면목을 보여주세요.] (진면목? 그렇다면 내가 변장한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혁사린은 대경실색 했다. 천환역골공은 완벽하여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데 항아선희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천안을 지녔단 말인가?) 항아선희는 살포시 웃었다. [의아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잠시 후면 본 공주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자연히 알게 될테니까요.] 그녀는 갈수록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혁사린은 생각을 지우며 서서히 말했다. [만약...소생이 이긴다면?] 항아선희는 대범하게 입을 열었다. [공자의 뜻에 따르겠어요.] [뜻...?] [그래요. 공자의 본래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거예요.]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후후훗...만약 소생이 이긴다면...] 여기에서 말을 끊은 그는 슬쩍 침상을 응시했다. 이어, 그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애초의 목적을 변경할지도 모르오.] 항아선희는 입술을 악물었다. 무슨 뜻인지 모를 그녀가 아니었다. 얼마 후, 그녀는 혼쾌히 응낙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본 공주 역시 한 가지를 덧붙여야 공평하지 않을까요?] [좋소.] 혁사린은 통쾌하게 대답했다. 항아선희는 혁사린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서서히 앵두같은 입술을 떼었다. [만약...본 공주가 이긴다면 그대는 나의 호위가 되어야 해요.] [호위...언제까지?] 항아선희는 기이하기 이룰 데 없는 미소를 지었다. [평생!] 혁사린은 쩍 입을 벌리고 말았다.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필시 항아선희는 화전패의 달인일 것이었다. 물론 자신 역시 도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말이다. (모르겠다. 이왕 벌어진 일...) 촤르르륵... 혁사린은 화전패를 탁자 위에 쏟았다. [공주, 몇 판으로 승부를 내면 좋겠소?] 항아선희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입술을 열었다. [세 번을 해서 먼저 이승을 하면 승리하는 것으로 해요.어떤가요?] 혁사린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항아선희는 여유있게 말했다. [공자께서 먼저 패를 섞도록 하세요.] 혁사린은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촤르르륵... 혁사린은 패를 골고루 섞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짙은 침묵이 휩싸이고 있었다. 이윽고 혁사린은 서서히 손을 거두었다. 두 사람은 지극히 느리게 자신의 패를 집어갔다. 그들 앞에는 각기 다섯 개씩의 화전패가 놓였다. 혁사린은 빙그레 웃으며 서서히 자신의 화전패를 뒤집었다. 다섯개 중 두 개는 모란이었으며 나머지 세 개는 해당화였다. 항아선희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번졌다. [공자께서 양보하셨군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녀는 가볍게 탁자를 쳤다. 그러자 다섯 개의 화전패가 똑같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내려오는 순간 화전패가 뒤집어 지며 탁자에 떨어졌다. -蓮,蓮,蓮,蓮,蓮. 다섯 개 모두 화중군자인 연꽃이 나타났다. 혁사린은 싱겁게 웃었다. [공주의 화전패 솜씨가 정녕 신의 경지에 이르렀구료.] [재수가 좋았을 뿐이예요.] 혁사린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 공주께서 패를 섞을 차례요.] [알았어요.] 항아선희는 가볍게 손바닥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사십 개의 화전패가 무형의 잠력에 의해 뒤섞이는 것이 아닌가? 휘리리릭... 혁사린은 여유있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행동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전패는 회전을 그치며 서서히 정지했다. [공자께서 먼저 가져가세요.] 혁사린은 싱긋 웃었다. [어찌 남자가 먼저 가져갈 수 있겠소? 공주께서 먼저...] 항아선희의 두 눈에 기이한 광채가 번뜩였다. [예의가 갑자기 밝아졌군요.] 그녀는 간단하게 말한 뒤 다섯 개의 화전패를 골랐다. 혁사린은 한동안 화전패를 응시하다가 느릿하게 골랐다. 항아선희는 싱긋 웃었다. [이번에는 본 공주가 먼저 펴겠어요.] 그녀는 서서히 제일 좌측의 화전패를 뒤집었다. ---牡丹,牡丹,牡丹,蓮,蓮. 지극히 높은 점수가 나왔다. 혁사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공주께서 수고스럽지만 소생 것을 좀 펼쳐 주시겠소?] 항아선희는 잠시 주저하다가 천천히 패를 뒤집었다. 첫번째 두번째를 넘기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를 넘기는 순간 그녀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세 번째까지 모두 모란이었던 것이다. 현재는 동점! 항아선희는 점차 긴장을 했다. 그리고 네 번째 화전패를 서서히 뒤집었다. 찰나 그녀의 입가에 또 다시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호호호...그러면 그렇지. 감히 내 기예를 능가할 수 있을라고...) 蓮- 가장 낮은 점수였다. 항아선희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 판 중 두 판을 먼저 이기는 사람이 승리자. 당연히 공자께선 패하신 거예요.] 마지막 것은 볼 것도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혁사린은 손으로 마지막 화전패를 가리켰다. [공주, 마지막 것을 봐야 하지 않겠소?] [호호호...보나마나예요. 마지막 것은 해당화이니까요.] [어떻게 아시오?] 항아선희는 일순 주춤했다. 사실, 그녀는 마지막 패가 해당화라는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예는 이미 뒤집어져 있는 패를 읽을 수가 있을 정도였다. 항아선희는 이내 빙그레 웃었다. [공자님께서 굳이 원하신다면...] 그녀는 서서히 패를 뒤집었다. 항아선희는 뒤집어진 패를 보는 순간 전신을 파를 떨었다. [아앗! 이럴 수가?] 마지막 화전패는 놀랍게도 모란이 나타났다. 네 개의 모란과 한 개의 연은 공주의 것보다 높은 줌수인지라 이번 판 승리자는 혁사린이 되었다. [다...당신 언제 바꿔치기를...] 혁사린은 어깨를 추스렸다. [바꿔치기라니...무슨 말씀이시오? 공주께서는 바꿔치기 하는 것을 보시기라도 했소?] 사실 그는 귀신도 모르게 패를 바꿔버린 것이다. 항아선희는 앵두같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좋아요. 엉터리로 일승일패(一勝一敗)가 되었군요. 마지막 한 판이 남았어요.] 공주의 입에서 더할 나위없는 차가운 음성이 나오자 혁사린은 히죽 웃었다. [속임수라고 생각하시니 어이가 없수료. 좋소. 그렇다면 마지막 판은 공주께서 직접 섞은 뒤에 소생에게 패를 주시오.] 항아선희는 눈까풀을 파르르 떨었다. [좋아요.] 동시에 그녀는 소매를 가볍게 흔들었다. 화전패가 허공에서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휘리리링... 시선을 올려다 보면 어떤 패가 모란이며 해당화라는 것을 똑똑히 확인할 수가 있었다. 항아선희는 무엇 때문에 이같은 기예를 택한 것일까? 어느 한순간 항아선희의 양손이 빠르게 허공을 휘저었다. 파파팟! 그러자 화전패가 허공에서 부딪치며 곧장 두 방향으로 나누어졌다. 항아선희는 이내 다시 한번 손을 놀렸다. 그러자 양 방향에 퍼져있던 화전패 중 다석 개 씩이 정확하게 탁자에 내려섰다. 극한의 내공과 독특한 환전패의 기예였다. 혁사린은 묵묵히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화전패를 응시했다. 그는 다섯 개의 패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이 순간 항아선희의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가 어려있었다. [공자, 본 공주가 먼저 펼쳐보겠어요.] 혁사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항아선희는 첫번째 화전패를 손에 쥐었다. [보세요!] 손에 올려진 화전패가 빙글 회전하며 발딱 뒤집혀졌다. ---牡丹. 그녀는 득의의 표정을 지으며 혁사린을 응시했다. 한데,그녀는 혁사린의 입가에 머금어진 야릇한 미소에 흠칫했다. -공주, 나는 이미 그 패가 모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소.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항아선희는 잠시 후에 두 번째 화전패를 향해 손짓을 했다. 화전패는 기이한 흔들림을 보이며 천천히 부상했다. 화전패는 이내 천정에 박혀버렸다. ---牡丹. 두 번째 역시 모란이었다. 혁사린은 여전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저 그가하는 행동은 수중의 화전패를 만지작거리는 것 뿐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역시 한결같이 모란이었다. (호호홋...나의 패는 최고 점수인 전부 모란이다. 설혹 저자가 자신의 패를 바꿔치기 했다 해도 동점...) 승리는 맡아논 것이나 다름없다. 혁사린은 빙그레 웃으며 마지막 다섯 번 째 화전패를 가리켰다. [공주, 어서 펴보시오.] 항아선희는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예요. 공자께서 직접 뒤지어 보세요.] 혁사린은 전혀 사양하지 않은 채 천천히 화전패를 잡았다. 동시에 항아선희를 향해 히죽 웃었다. (저...웃음!) 항아선희는 그 순간 아차 싶었다. 그와 동시에 혁사린은 서서히 패를 뒤집었다. [아아...또!] 항아선희의 입에서 약간 분노섞인 탄성이 터져나왔다. 마지막 패는 어처구니 없게도 모란이 아닌 해당화가 아닌가?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공주, 실수를 하였구료?] 항아선희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아니예요. 그대가 패를 바꾼 거예요. 분명히 본 공주는 전부 모란을...] 여기까지 말하던 그녀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혁사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전부 모란이라니? 그렇다면 공주는 패를 골라서 가졌단 말씀이오?] [다...당신은 정말...] 항아선희는 화가 나기도 하고 창피도 하여 발만 동동 굴렀다. 혁사린은 시치미를 뚝 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겠지요? 공주의 말씀대로라면 전부 모란이라고 했는데 어찌 한 개가 해당화겠소? 그것으로 공주께서는 정직하게 패를 나누었을 것이오.] 교묘한 둘러침에 항아선희는 혁사린이 바꿔치기 했다고 하자니 자신이 패를 골라서 하는 격이 되어 그만 꿀먹은 벙러지가 되고 말았다. (여우같은 사람...나에게만 지기만 해봐라. 흥흥!) 그녀는 공주이기에 앞서 소녀였다. 항아선희의 서슬이 시퍼렇게 변했다. 혁사린은 내심 찔끔했다. 항아선희는 가시 돋힌 음성으로 말했다. [어서 공자의 패를 보여 주세요.] 혁사린은 코를 문지르며 괴이하게 말했다. [혹시...공주께서는 소생에게 엉터리 패를 준 것이 아니오?] 항아선희는 내심 뜨끔했다. 그러나, 자신의 내심을 어지간해서는 드러내지 않는 그녀인지라 침착하게 대답했다. [본 공주를 그대와 비교하지 마세요. 그대처럼 엉터리는 아니니까요?] [엉터리? 호오! 엉터리라...!] 혁사린은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그녀를 응시했다. [좋소. 진다고 해봐야 아름다운 공주와 더불어 지내는 것이니 오히려 그 편이 좋겠구료.] [무뢰한...] 항아선희의 말은 도중에서 끊겨버렸다. 팽! 하나의 화전패가 혁사린의 손바닥을 벗어난 것이다. 헌데 화전패는 놀랍게도 벽에 걸린 항아선희의 초상화 왼쪽 가슴 부근에 정확하게 박히는 것이 아닌가? [어멋!] 항아선희는 전신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초상화에 박힌 화전패는 모란을 나타내고 있었다. 혁사린은 중얼거렸다. [빌어먹을...벽에 박아야 하는데 방향이 틀렸군. 이번에는제대로 박자!] 또 다시 화전패가 날았다. 팍! [어어...또 빗나갔군.] 화전패는 초상화 오른쪽 젖가슴에 박혀버렸다. 항아선희는 아예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파팍! 네 개의 화전패는 항아선희 초상화의 두 젖가슴, 그리고 단전, 입술에 박혀있었다. 항아선희는 지금 두 가지의 놀라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혁사린의 무공과 자신의 초상화에 대한 모욕(侮辱). 그것은 자신을 능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더듬는 것과 진배없었다. 또 한 가지는 네 개의 화전패 모두 모란을 나타내고 있었다. (아니야. 거짓이야. 저럴리가 없어. 나는 분명 세 개의 모란과 두 개의 해당화를 주었는데...) 혁사린은 그는 경악에 물든 항아선희를 힐끗 응시한 뒤 마지막 하나의 화전패를 날렸다. 팍! [으...음...] 그 순간 항아선희는 자신도 모르게 하체에 두 손이 갔다.화전패가 박힌 곳은 여인의 가장 은밀한 곳이었다. 牡丹- 마지막 것 역시 모란이었다. [사기꾼!] 항아선희는 악을 썼다. 공주의 입에서 이같은 말이 튀어나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당신 엉터리예요. 그리고...나를...나를 모독했어요.] 수치와 분노가 극에 이르면 슬픔만 나타나는 법! 지금 항아선희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러나 혁사린은 여유있게 웃었다. [공주, 이제 패배를 시인하시오?] [닥치세요! 엉터리예요!] 그녀의 앙칼진 외침에 혁사린은 두 눈을 동그렇게 떴다. [엉터리라니?] [당신은 패를 바꿔치기 했어요. 그것이 엉터리가 아닌가요?] [그렇다면 피차 엉터리가 아니오? 엉터리 싸움에서 소생이 이겼으니 당연히 조건에 수락을...] 항아선희의 전신이 무섭도록 세차게 경련을 일으켰다. 일개 공주가 어떻게 외간 남자에게 나신을 보일 수가 있단 말인가? [좋아요. 그 대신...똑똑히 보아야 해요. 그렇지 않는다면그대를 기필코 죽이겠어요.] 얼음가루가 풀풀 날릴 정도로 차가운 음성이 항아선희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르르륵... 돌연, 그녀는 겉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이런!) 혁사린은 크게 경악했다. 이제는 재미가 아니라 큰일이 벌어질판이었다. 사실 혁사린은 내기를 하여 자신에게 도움을 달라고 하려했다. 한데 항아선희는 그 여유도 없이 옷을 벗는 것이 아닌가? 어느새 항아선희의 몸엔 속옷만이 남았다. 혁사린은 급히 몸을 돌려 외면했다. [고...공주, 어서...옷을 입으시오.] [흥! 용기가 없나요? 지금의 나는 공주가 아니예요. 한 여인이고 패배자일 뿐이예요.] 과연 여걸다운 소녀였다. [나의 알몸을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의(信義)예요. 그러나 부탁이 있어요.] [부탁?] [그래요. 본 공주를 대신해 한 사람에게 사과해 주세요.] [한 사람...사과?] 항아선희는 탄식어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요. 본 공주는 한 사람을 사모해 왔어요. 그렇다고 그분은 황궁의 사람이 아니예요. 무림인 일 뿐이예요. 바로본 공주가 일생을 바치기로 한 분...] 혁사린은 크게 경악했다. (무림인...그는 누구인지 행복하겠구나. 천하제일의 미인을 얻게 되었으니...) 항아선희는 슬프게 말을 이었다. [그분의 얼굴도 몰라요. 이름도 몰라요. 그러나 내 마음 속의 낭군이라 할지라도 이미 본 공주는 그분의 소유예요.물론 그분은 본 공주의 마음을 모르지만 말이예요.] 그럼 공주의 일방적인 사랑이란 말인가? [그분만이 본 공주의 짝이 될 수 있어요. 그분에게 전해 주세요. 나의 멀어져 가는 마음을...] 혁사린은 급히 말했다. [공주, 소생의 조건을 파기하면 되지 않소?] [신의를 잃는 것이 생명을 잃느니만 못할 거예요.] 사르르륵... 마침내 천하에서 가장 완벽한 미의 여인이 알몸이 되었다. 그녀의 나신은 아름다움에 앞서 여인의 가장 신비스러운 점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었다. 뒷모습만 보여도 정녕 황홀했다. 뇌가 파열된 듯한 극치의 나신이었다. 뽀햐 둔부의 선은 가장 완벽한 곡선을 이루었다. 서서히 몸을 돌리는 항아선희의 정면은 환상의 나래련가? 쿠명할 정도로 빛나는 탄력있는 젖가슴, 약간 솟아오른 극치의 단전, 그리고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끈한 허벅지의 선, 여인의 혼을 대변해 주는 너무도 무성한 비림(秘林), 그 속에 숨어 수줍은 숨결을 새근새근 토하는 정열의 분신이여! 두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나신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