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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방/李順子 스크랩 `추석`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이쁜이 추천 0 조회 2 07.09.24 20: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추석'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우리집은 '종가'여서 추석이나 명절이 되면 거의 잔치날 수준이었다.

최소한 이틀전에는 가까이 또는 멀리 계시던 작은어머니들께서 우리집으로 총출동 하고 부엌으로 부터 뒷뜰까지 온통 음식들 장만하는 풍경이 연출된다.

명절이 되기도 전에 술을 담그기 위한 항아리는 아랫목을 차지한 채 꼼짝도 하지 않았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놓기도 전에 전 앞으로 손을 쑥 내민다.

 

"...안돼!...버르장머리 없이..."

 

어머님은 배고플 때가 지난 우리형제들에게 따끔한 일침을 가한다.

"...이 음식들은 제사상에 올라 갈 음식들인데...늬들이 먼저 손대면 안돼!..."하고 가르쳐 주었어도

보이지 않은 틈을 타서 훔쳐(?) 먹었을 판인데 정성 가득한 이 음식들의 성격을 안 것은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후 였다.

 

어머님이 아무리 야단을 쳐도 우리들 손에는 각종 부침개들이 쥐어져 있었고

그 음식들은 우리를 너무도 좋아하신 할머니가 엄마몰래(?) 우리손에 쥐어 준 것들이었다.

우리는 추석이나 명절이 되면 으례히 똑같은 짓을 반복하게 되었고 이제 그것은 '관습'이 되어 명절이면 무조건 좋았다.

그렇게 추석 당일이 되기도 전에 기름진 음식들을 먹고 또 당일에는 또 얼마나 먹어댓는지

추석이 지나기도 전에 나나 동생들은 은빛 환한 달빛으로 이슬먹음은 풀들이 반짝거리는 뒷뜰의 화장실에서 물같은 응가를 하고 있었다.

 

뒷뜰에 있는 화장실은 재래식 화장실 보다 조금더 못한 시설로 발을 잘못 디디기라도 한다면 똥통에 빠져서 허우적 거려야 될 만큼 위험하여서

주무시는 할머니를 깨워야 했지만 할머니는 우리들의 배탈을 용케도(?) 잘 알고 계시며 달빛아래에서 쾌변을 도우고 계셨다. 

 

추석날 아침에는 평소 못보던 사촌들과 작은아버지가 시간에 맞추어 속속들이 도착했고

종가집안 서열(?) 3위였던 나는 祭主인 아버지로 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제주를 중심으로 작은아버지 두분이 계셨고 종형과 백형들이 순서를 잇고 차남 3남 순으로 제사상으로 부터 멀어졌는데

나는 늘 형들의 엉덩이를 보며 머리를 조아렸고 아버님의 헛기침 소리를 놓치기 일쑤여서 수시로 눈을 뜨고 사방을 살폈다.

그곳에는 밥과 물을 교대로 가져 오시는 숙모님들의 숙연한 모습들이 늘 눈에 띄였고

나와 동년배인 사촌들과는 알 수 없는 웃음으로 얼굴을 마주하며 키득거렸다.

 

이런 서열은 좀체로 바뀌지 않았고 서울로 올라 온 후로도 한동안 바뀌지 않았는데

어느날 서열이 바뀌었다고 생각한 빈자리에는 종형이 자리를 물려받았고 늘 보던 할머님과 어머님 그리고 아버님 마저도 보이시지 않았다.

나는 장조카와 더불어 서열의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뭔가 허전하였고 어느새 내가 아이들의 애비가 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며 또 직장을 다니고 해외로 나가서 객지생활이 계속되는 동안에

나는 그 흔한 기억들을 까맣게 잊고 살며 또 그리워 하고 있었지만 형제들의 표정들은 냉랭했다.

 

"...그렇게 시간이 없나?..."

 

"...네...제 성의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종형의 물음에 나는 할말이 없었고 죄인도 그만한 죄인이 없었다.

 

"...오빠!...그래도 너무하다!..."

 

"...대름요(도련님)...혼자 잘 살라고 하는거 아이제(아니지요?)?..."

 

 

솔직히 나는 먹고 살기 바빴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고 가는 길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내게 할당된 시간과 여유들은 '집안행사'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좀 더 잘되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더 잘 모실줄 알았다.

내가 처음으로 최신형'스텔라' 자동차를 몰고 고향땅을 찾았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은 祭主의 근엄하고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고

희꿋한 머리카락은 고사하고 우리들을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정도로 늙어 가고 있었다.

 

나의 사정을 헤아려 주시는 분은 늘 어머님과 아버님이었다.

 

"...그래...兒들은 잘 크고있지?...열심히 살아라!...돈...그까짓거 없어도 된다. 건강만하면 된다!..."

 

"...그래...가(아이)들은...많이 컷지?..."

 

"...에구...많이도 컷네...이뿐것들..."

 

"...고생했제(며느리한테)...가(나)...고집이 있어서..."

 

나는 돈 때문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소리는 목구멍속에서 차마 나오지 못하며 신음으로 가라 앉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고향땅을 자주 찾지 못햇던 이유는 생활과 관계가 있었고 그건 '돈'과 상관이 있었다.

작은 선물 하나를 마련하고 또 모처럼 맞이하는 고향땅의 얼굴들을 생각하니 몰라라 할 수 있는 얼굴들이 없었다.

 

그 형제자매들은 나의 보이지 않는 후원자였고 겉으로 나를 나무라지만 그 또한 자주 얼굴을 봤으면 하는 바램이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이들 애미는 그렇지 못하다. 당신의 사정을 몰라주는 올케와 동서들이 야속하기만 하여

차례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면 투정을 부렸고 마침내 냉전(?)이 생기는 일이 반복되었다.

 

"...아...그건...그런뜻이 아니고..."

나는 궁색한 변명으로 종가집 풍경에 낮선 아내를 달래고 있었다.

 

어머니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동구밖까지 따라 나섰다.

형제들 보다 잘 나지도 못한 나는 또 서울에 거주한다는 이유하나로 늘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고 손님처럼 배웅을 받았는데

어머니는 돌아서는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시며

 

"...제발 잘 살거라!..." 하시며 눈시울을 적셨다.

 

"...네...어머님...건강하셔야 돼요!..." 나의 목소리가 떨리며 더듬 거리고 있었고

 내 눈에 뜨거운 액체가 고이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나는 등을 돌리며 뒤를 돌아다 보지 않았다.

차마 어머니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그토록이나 사랑하셨던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아이들은 다 자랐고 이제 먹고 살만해 지니까 어머니와 아버지는  제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어릴 때 몰라서 효도하지 못했고 커서는 바빠서...효도가 무엇인지 알만할 때 쯤 그분들은 이 땅에 계시지 않았다.

나는 추석만 되면 형제들과 먼 하늘에 계실 부모님께 죄스러워 작아지는 나를 발견하는데

이 죄는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가시지 않고 증폭되고 있다.

 

세상에 무슨 중요한 일들이 그렇게 많이 있을까?...나는 지금도 버르장머리 없던 시절을 그리워 하고 있다.

이번 추석에는 만사를 제쳐두고 고향으로 가 보시길 강추하며...!

 

 명절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

        

 베스트블로거기자Boramirang 드림 

      

 

 

 

 

tistory를 오픈하고 Bloger가 만드는 SensitiveMedia를 꿈꾸며 출항을 위한 닻을 올리다. 

http://boramirang.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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