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고종의 비. 성은 민씨(閔氏). 본관은 여흥(驪興). 경기도 여주 출생.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이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다. 몇 년 뒤부터 왕실정치에 관여하여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봉 문제로 대원군과 정치적 대립이 시작되었다. 1873년(고종 10) 대원군의 반대파와 결탁하여 최익현(崔益鉉)의 탄핵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의 친정(親政)을 선포하였다.
대원군 실각 후 민씨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 고종을 움직여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개화정책을 시행했다. 1882년(고종 19)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민씨척족의 군제개편 및 홀대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대와 결탁하여 임오군란을 일으키자,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閔應植)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고 대원군을 납치하게 하였다.
이 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로 흐르게 되어 개화파가 불만을 품고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곧 청나라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1885년 거문도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통해 영국과 협상하면서 한편으로 러시아와도 접촉하였다. 이에 일본과 청나라는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대원군을 입국시켜 명성황후 세력과 정권싸움을 벌이도록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 정계에 압력을 가해오자 명성황후는 친러시아적인 태도를 보이며 일본에 대항했다.
1895년(고종 32) 10월 8일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일본의 한반도침략에 저항하는 명성황후와 그 세력을 없애고자 일부 친일정치인과 결탁, 일본의 군대와 정치낭인(깡패)으로 하여금 궁궐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궁궐 밖에서 시체가 불살라지는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곧이어 친일정권이 폐비시켰으나 곧 복위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자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895년에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 숙릉(肅陵)에 묻혔다가, 1897년 청량리 홍릉(洪陵)으로 이장되었다. 1919년 고종이 죽은 뒤 다시 지금의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으로 이장되었다.
조선 말기 학자·언론인. 자는 화명(和明)·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숭양산인(嵩陽山人). 본관은 인동(仁同).
장석봉(張錫鳳)의 문인이다. 1894년(고종 31) 진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성황후(明聖皇后)가 시해되자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지어 각처에 보냈다. 1898년 《황성신문》기자, 만민공동회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광문사(光文社)를 설립,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발간하였다. 1901년 《황성신문》 사장직을 맡아 민중계몽운동과 자립정신의 고취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으로 을사조약이 국권피탈의 조약임을 알리는 동시에 을사5적신을 규탄하는 사설을 실어 전국에 배포하였다. 이 일로 《황성신문》은 압수 및 정간처분을 받았고 그는 투옥되었다. 1906년 윤효정(尹孝定)·심의성(沈宜性)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본격적인 구국운동을 벌여나갔지만 이듬해 강제해산되었다.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 《해조신문》 주필이 되었으나 경영난으로 신문이 폐간되자 상하이[上海(상해)]·난징[南京(남경)] 등을 유랑하였다. 이듬해 《경남일보》 주필이 되었고,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선비들이 연이어 자결하자 황현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하였다. 이 일로 신문이 폐간당하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위암유고》 《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 《대한신지지(大韓新地志)》 《농정전서(農政全書)》 《숭산기(嵩山記)》 《대동시선(大東詩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