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萬曆) 임진년(1592) 4월 30일 기미일 축시(丑時) 임금의 행차〔大駕〕가 돈화문(敦化門)을 나와 돈의문(敦義門)을 거쳐 벽제관(碧蹄館)에 잠시 머물렀다가, 동파관(東坡館)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날 큰비가 내려 궁계(宮㜎)들 가운데 혹 비를 맞고 걸으면서 흰 적삼을 머리에 쓰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당초 주상(主上)께서 도성을 떠나실 때 가는 길의 동네마다 곡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이때 약방(藥房)에 있다가 주상을 호종(扈從)하여 임진강에 이르렀다. 날이 저물자 바람과 물결이 매우 거세어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의관(醫官) 남응명(南應命)이 강나루 주막으로 인도하여 밤을 지냈다.
1592년 5월 1일(경신) 임진강에서 주상을 뒤따라 동파관으로 갔다. 이날 주상께서는 개성부(開城府)에 묵으셨다. ○사간원(司諫院)이 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를 논박하여, 주상께서 삭탈관작을 명하였다.
5월 2일(신유) 최흥원(崔興源)이 우상(右相)이 되었다. 주상께서 남성(南城)의 누각에 올라 부로(父老)들을 위로하였다. 주상께서 좌상(左相) 유성룡(柳成龍)의 파직을 명하셨다. 이에 앞서 이미 정철(鄭澈) 등 몇 사람들을 모두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5월 3일(임술) (개성부에) 머물렀다.
5월 4일(계해) 상께서 오시(午時)에 흥의관(興義館)에 머무르시다가 평산부(平山府)를 거쳐 보산관(寶山館)에서 잤다.
5월 5일(갑자) 상께서 낮에 용천(龍泉)에 머무르시다가 검수(劍水)를 지나, 봉산(鳳山)에서 잤다.
5월 6일(을축) 상께서 동선재〔銅仙峴〕를 넘어 황주(黃州)에서 잤다.
5월 7일(병인) 상께서 낮에 중화(中和)에 머무르시다가 평양에서 자고, 계속 머무르셨다.
5월 8일(정묘) 정언지(鄭彦智)ㆍ김우옹(金宇顒)ㆍ홍종록(洪宗祿) 등을 서용하라는 명을 내리셨다.
5월 9일(무인) 상께서 명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체직(遞職)시켰다. 최흥원(崔興源)을 영상으로 삼고, 윤두수(尹斗壽)를 좌상으로 삼았으며, 유홍(兪泓)을 우상으로 삼고, 이항복(李恒福)을 형조 판서로 삼았으며, 신잡(申磼)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나는 평양에서 처음에 서윤(庶尹)의 관사에 머물렀다가 이때에 이르러 융흥부(隆興府)의 동쪽에 사는 지인(知印) 김억룡(金億龍)의 집으로 옮겨 기거하였다. 이날 비바람이 쳤다.
5월 12일(신미) 큰비가 내렸다. 사시(巳時) 정삼각(正三刻)에 왕세자의 빈궁께서 해산을 하셨다. ○신종수(申從壽)가 영변(寧邊)에서 찾아와 만났는데, 모시로 만든 융의(戎衣 군복)와 받쳐 입는 옷 한 벌을 주었으며, 병사(兵使) 이윤덕(李潤德)이 하얀 모시 융의(戎衣) 한 벌을 부쳐왔다.
5월 13일(임신) 비가 왔다. 정곤수(鄭崑壽)가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5월 14일(계유) 영숭전(永崇殿)에 나아갔다. ○이성임(李聖任)이 순변부사(巡邊副使)로 군사들을 이끌고 임진(臨津)으로 향하였다. 가산 군수(嘉山郡守) 심신겸(沈信謙)이 삼색물품(三色物品)을 부쳐왔다.
5월 15일(갑술) 영숭전(永崇殿)에 나아갔다.
5월 16일(을해) 김억룡(金億龍)의 집에서 토관(土官) 이인수(李仁壽)의 집으로 옮겼다. 이날 정곤수(鄭崑壽 여인(汝仁)은 자임)와 포충사(褒忠祠)ㆍ표절사(表節祠)ㆍ이현당(二賢堂)을 알묘(謁廟)하였다.
5월 17일(병자) 서생(書生) 강인립(康仁立)이 찾아와 만났다. 상께서 이산해(李山海)를 중도부처(中道付處)하여 삼척(三陟)에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5월 18일(정축)
5월 19일(무인) 비가 내렸다. 유조인(柳祖訒)이 세자익위사 익위(世子翊衛司翊衛)가 되어 내의원의 약물 등 여러 가지를 감독하게 되었다.
1592년 6월 1일(기축)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다는 도순찰사(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장계가 올라와서 행재소의 경계가 삼엄해졌다. 전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을 다시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으로 서용하였다.
6월 2일(경인)
6월 3일(신묘) 비가 많이 내렸다. 역관 박인상(朴仁祥)이 중국 조정에서 나와 《초씨역림(焦氏易林)》 4책ㆍ《복서전서(卜筮全書)》 6책ㆍ《연원자평(淵源子平)》 5책을 주었다.
6월 4일(임진) 주상께서 대동관(大同館)의 문 밖에 납시어 부로(父老)들을 초유(招諭)하시고, 또 연광정(練光亭)으로 가서 시재(試才)하여 강변에 있던 사민(士民)들에게 곧장 전시(殿試)에 응하도록명하였다. ○노비 막동(莫同)이 정주(定州 평안북도)에서 돌아왔고 연복(連福) 역시 돌아왔다. 그런데 연복이 타던 말은 숙천(肅川 평안남도) 관아에 빼앗겼다고 말하였다.
6월 9일(정유) 대가(大駕)가 영변부(寧邊府)로 떠나려 하자, 본부(本府 평양부)의 군민(軍民)들이 무리를 이루어 길을 막으며 떠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청하여 끝내 대가가 떠나지 못했다.
6월 10일(무술) 승정원〔政院〕에 나아가 대가가 머무르시기를 청하며 아뢰었다.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들이 침범하여 와서 전하의 행차〔大駕〕가 서쪽으로 옮겨와 겨우 한 모퉁이를 보존하고 있으니, 신은 이루 통곡을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의 행차가 본부(本府)에 머무르시어 평양의 성과 해자를 굳게 지키며 회복을 도모하는 것은 실로 좋은 계책입니다. 그런데 조정의 의론이 일치하지 않아서 혹은 적의 칼날이 이미 바짝 다가와서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고 전하의 생각 역시 그러하다고 여기시어 비록 대신의 말이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며 오늘이라도 길을 떠나려 하시니, 신은 먹어도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서울을 지키지 못한 것은 이미 끝난 일이라 돌이킬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이곳은 성곽이 그럭저럭 완비되어 있고 인민(人民)들이 많으며, 창고의 식량도 아직은 공급할 수 있는 데다 또 대동강〔浿江〕의 물은 이른바 중국 장강(長江)과 같이 천혜의 참호입니다. 또 보건대 인민들이 성왕(聖王)의 길을 힘써 막으며 모두가 적개심을 품고, 평양성의 남녀노소 모두가 나아가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인심(人心)이 이와 같으니 이는 실로 크게 길한 징조입니다. 게다가 지금 이일(李鎰)이 이끄는 군사들이 이미 왔고, 명나라 군대 역시 장차 구원하러 올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깊이 들어온 적을 쳐부수고 중흥의 공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겠지만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대가(大駕)가 움직이자마자 본부(本府)의 군민(軍民)들은 일시에 허물어지고 흩어져 성이 함락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추적해 오는 흉적의 칼끝도 아마 막지 못하여 도중에 예측하지 못할 변고가 반드시 없다고 보장하지 못합니다. 어찌 마음이 서늘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주상께 어가를 옮기자고 청하는 자들은 아마 깊게 생각하지 못한 듯합니다. 엎드려 성상의 명철한 결단을 바라오니 반드시 대가의 행차를 멈추어야 합니다. 신은 더위에 토사곽란을 며칠 앓아서 지금에야 와서 아뢰옵니다. 황공하기 그지없나이다.”승정원에서 답하였다. “적의 예봉을 피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6월 11일(기해) 대가(大駕)가 출발하여 숙천부(肅川府 평안남도)에서 잤다.
6월 12일(경자) 주상께서 안주(安州 평안남도)에서 잤다. ○(숙천에 보낸) 연복(連福)이 찾아 왔다.
6월 13일(신축) 대가(大駕)가 영변(寧邊 평안북도)에 이르렀다. 이날 저녁 비가 내렸다.
6월 14일(임인) 상이 김응남(金應南)에게 기복(起復)을 명하였다. 대가(大駕)가 의주(義州)의 요로(了路)를 향해 나아가며, 왕세자에게 강계(江界)로 향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최흥원(崔興源), 형조 판서 이헌국(李憲國), 부제학 심충겸(沈忠謙), 형조 참판 윤자신(尹自新), 동지 유자신(柳自新), 병조 참의 정사위(鄭士偉), 승지 유희림(柳希霖)과 나는 주상의 명을 받들고 분조(分朝)하여 동궁을 호종하였다. 익위(翊衛) 유조인(柳祖訒)도 도착하였다. 이때부터 드디어 분사(分司)를 하였다. 이날 저녁 동궁께서는 운산군(雲山郡)에서 잤다.
6월 18일(병오) 동궁이 길을 떠났다. 이날 우의정 유홍(兪泓)이 와서 동궁을 호종(扈從)하였다. 유홍은 처음에 중전(中殿)을 모시고 함흥으로 가라고 명을 받았으나 가는 도중에 행차를 멈추라는 명을 받았고, 중전께서는 돌아가 대가를 따랐다. 유홍이 이때에 와서 장계를 올려 동궁의 일행을 따르겠다고 주청하며 왕명을 받았으니 마땅히 곧장 강계로 가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유홍의 의론을 받아들였는데, 편리한 지름길을 따라 빨리 가서 장동(長洞)에서 자고 다시 설한령(雪寒嶺)의 잘 아는 길로 가고자 한 것이다.
6월 19일(정미) 동궁이 길을 떠나 고개 아래의 인가(人家)에 잤다. 호종을 하던 신료들이 모두 노숙을 하였다. 이날 저녁 가랑비가 내렸다.
6월 20일(무신) 동궁께서 영원(寧遠) 땅의 인가에서 잤다. 이날 길을 떠나 천단현(天壇縣)에 이르러서 적의 많은 군사가 함경도로 곧장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론하는 자 가운데 강계 땅으로 돌아가 일체 대조(大朝)의 명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관동(關東)의 춘천(春川)ㆍ원주(原州) 등으로 나아가 인심을 수습하고 회복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분분한 의론들이 일치하지 않아 시간이 흘러도 결정하지 못하자 마침내 유홍(兪泓)의 의견을 따라 동로(東路)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당초 조정 의론의 요점이 강계로 가야 한다는 것은 편의를 보아 설한령(雪寒嶺)을 넘어 북쪽의 험난함에 기대어 웅거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나, 이미 적들이 관북(關北 함경도)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관북으로 가는 길을 멈추었는데, 진실로 강계를 보존하려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누군가 말하였기 때문에 이에 우의정 유홍의 의견을 따랐다.
7월 4일(신유) 동궁께서 길을 떠나 곡산(谷山)의 반암방(盤巖坊) 인가(人家)에서 잤다.
7월 5일(임술) (곡산에) 머물렀다. 비가 내렸다.
7월 6일(계해) (곡산에) 머물렀다. 비가 내렸다.
7월 7일(갑자) 동궁께서 길을 떠나 곡산(谷山)의 인가(人家)에서 잤다.
7월 8일(을축) 동궁께서 길을 떠나 수다령(水多嶺)을 넘어 곡산의 인가에서 잤다. 산길이 매우 험하여 열 걸음을 걸으면 아홉 번을 넘어져 일행 대소 관원 모두가 매우 고생하였다.
7월 9일(병인) 동궁께서 길을 떠나 또 재 하나를 넘어 이천(伊川) 땅 인가(人家)에서 잤다. 이천 현감(伊川縣監) 유대정(兪大禎)이 황해도와 강원도 경계에 나와 맞이하였다.
7월 10일(정묘) (이천에) 머물렀다. 비가 왔다.
7월 11일(무진) 동궁께서 길을 떠나 유동천(楡洞川)을 건너 밤에 비로소 이천현(伊川縣 이천현 현소)에 도착하였다. 이날 하삼도(下三道 충청, 전라, 경상) 감사(監司)들의 장계가 처음 올라왔다.
7월 12일(기사) (이천현에) 머물렀다. 오후에 비가 내렸다. ○강계(江界)로 가지 못한 일 때문에 사유를 갖추어 행재소에 장계를 올렸다. ○6월 27일 장계를 가지고 간 사람이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교지가 있어서 공손히 받든 이후로, 대가(大駕)가 머물러 있는 곳에 대한 소식을 더 이상 듣지 못하여 밤이나 낮이나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망극해하였습니다. 동궁의 행차를 모시고 온 인원은 본래부터 그 수가 적은데다 늙고 병든 사람이 많아서 낙오된 자도 있습니다. 골짜기를 달리고 고개를 넘으면서 사람과 말이 지치고, 역참의 길 또한 끊기고 도로가 막혀서 행재소에 문안을 올리기가 절로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행재소로 간 세 사람 역시 모두가 돌아오지 않아 더욱 민망하여 눈물이 나옵니다. 강계(江界)와 함흥(咸興)으로 가기 어려웠던 사정은 이미 장계를 올려 아뢰었습니다. 그래서 평안도와 황해도 가운데 머무를 만한 형편을 가진 곳을 택하여서 대가(大駕)의 소식을 자주 들으려고 하였으나, 이 두 도(道)는 적병이 가득 차 있어서 잠시도 발을 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며 간신히 빠져 나와서 지금 이천(伊川)에 도착하여 관동(關東)의 편리한 곳을 찾으려 하나, 전해 들으니 서울의 적이 철원(鐵原)으로 가는 길을 거쳐 김화(金化) 등지로 향하고, 수안(遂安)과 곡산(谷山) 등 여러 곳에도 적이 있다고 합니다. 다시금 정탐을 하여 나아갈 곳을 정하려고 잠시 본현(本縣 이천현)에 머무르며 군량미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건대, 인재를 뽑는 일은 오직 벼슬과 상을 내리는 데 달려 있는데,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당하여서 한 자의 베나 한 되의 곡식도 내려줄 것이 없고, 벼슬을 제수하는 일에 이르러서도 비록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동궁께서 매우 미안하다고 생각하시어 배행(陪行)하는 미관(微官)의 승진과 보임 일 외에는 일체 감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처럼 겸양함만 고집한다면 인심을 안정시키기 어려워서 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외로워져 더 이상 국가 회복의 희망이 없어집니다. 하나하나 대조(大朝)에 아뢰려 한다면 길이 막히고 멀어서 오고 가는 데만 걸핏하면 몇 개월이 걸려 앉아서 일의 기회를 놓치게 되니 황공하고 민망하기 그지없습니다. 부득이 제때 보충해야 할 관원들은 임시로 임명하여 한편으로는 일을 맡기며 한편으로는 대조에 아뢰겠습니다. 비록 혼란한 와중에 있더라도 강학관(講學官)의 인원은 비워둘 수 없으므로 본도(本道)의 소모어사(召募御使) 허성(許筬)과 겸문학 전 현감(兼文學前縣監) 황신(黃愼)을 사서(司書)로 차출하였으며, 전 승지(前承旨) 강신(姜紳) 역시 상중에 있으나 관직에 임하는 기복의 관례에 따라 관직을 부여하여 등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각 도의 수령 가운데 지금 살아 있으면서 숨어 피한 자와 죽거나 전장에서 사망한 사람 역시 아직 충원이 되지 않아 그 도(道)의 일을 수습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보고 들어서 오래 비어 있는 고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관직에 제수하려 하였으나, 일이 중대하여 감히 편의대로 행하지 못하니, 이 역시 참으로 민망합니다. 각 도의 장계가 이곳을 지나게 되면 급히 전선(戰線)의 소식을 알고자 하여 동궁께 아뢰고 열어본 후 다시 봉하여 올린 것은 매우 송구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각 항목의 일은 미안한 바가 있으나, 길이 멀고 일이 급하여 일에 따라 즉시 아뢰지 못한 것이 지극히 황공합니다.
7월 13일(경오) 비가 내렸다. 이날 (이천현에) 머물렀다. 평강 현감(平康縣監) 남즙(南楫)이 와서 동궁을 배알하였다.
7월 14일(신미) 비가 내렸다. (이천현에) 머물렀다. 순찰사(巡察使) 이일(李鎰)이 와서 동궁을 배알하였다.
7월 15일(임신) 아침에 흐리고 비가 내렸다. 왕세자께서 장사(將士)들을 모아 놓고 직접 국가 회복의 뜻을 말씀하셨다. ○장흥고(長興庫) 첨정(僉正) 정숙도(鄭淑度)의 계집종 언개(彦介)가 이곳 현리(縣吏)의 집으로 시집을 와 문안을 하고서, 때마다 밥상을 차리는 데 매우 정갈하고, 옷을 빠는 등의 일을 하는 데 퍽 부지런하였다.
7월 16일(계유) 초무관(招撫官) 이귀(李貴)가 병력을 모으는 일 때문에 출행을 고하고 길을 떠났다. 밤에 비가 내렸다.
7월 17일(갑술) 아침에 비가 내렸고 저녁에 개였다. 이날 빈청에서 여러 재신(宰臣)들과 다시 장계 한 통을 봉하여 행재소에 올렸다. ○그저께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한응례(韓應禮)가 돌아가는 길에 장계를 맡겨 보냈으나, 도로가 막히고 멀어 소식이 오랫 동안 뜸하여서 대가(大駕)의 평안 소식을 알지 못하니 밤낮으로 민망하여 눈물이 흐릅니다. 동궁의 행차가 험한 산악과 협곡을 지나면서 따르던 관료들이 흩어지고 뒤쳐져서 온갖 어려움을 겪고서야 이천(伊川)에서 가까운 고을에 이르렀습니다. 피란 갔던 조사(朝士)들이 차츰차츰 와 모여서 동지(同知) 정윤복(丁胤福), 이조 참의(吏曹參議) 홍혼(洪渾), 전 주서(前注書) 박문서(朴文敍), 전 대교(前待敎) 황극중(黃克中), 직장(直長) 최준(崔浚), 봉사 구곤원(具坤源), 전 군수 김은휘(金殷輝) 등과 종실(宗室)의 원천군(原川君) 이휘(李徽), 서흥 도정(西興都正) 등이 잇달아 왔습니다. 호조 판서 한준(韓準)은 영변에서부터 뒤따라 왔고 정언(正言) 윤형(尹泂) 역시 왔습니다. 인사(人士)들이 조금씩 모여서 겨우 체모(體貌)를 이루었습니다. 대저 평양을 지키지 못한 이후부터 온 나라의 인민(人民)이 대가(大駕)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크게 우러러 전하를 사모하고 슬퍼하고 있다가 동궁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인심(人心)이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도망쳐 숨었던 수령들도 점차 관직으로 돌아오고 호령 역시 행하여지니 회복의 기회가 조금씩 가망이 있습니다. 이일(李鎰)이 군사를 모집하여 지금 토산(兔山)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바, 처음에는 곧장 평양 근처로 진군하여 도원수(都元帥)와 기각지세를 이루어 적의 예봉을 견제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임시로 모인 취약한 군대가 대적(大敵)을 공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동궁의 행차가 사방으로 에워싸인 적의 포위 안에 있으면서도 한 부대의 병졸도 없는 것이 매우 민망하고 염려스러운 까닭에 이일의 군대를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그 뒤 이귀(李貴) 및 명성 도정(明城都正)이 모은 병사의 수가 백여 명이고 아울러 본도(本道)의 병사들과 합쳐 천여 명이나 되니 군세(軍勢)가 이전에 비해 조금 진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고을들이 모두 전쟁으로 황폐하여 관아에 한 되의 곡식도 없어 일행의 지공(支供)과 수많은 군량 마련에 온갖 계책을 다 써도 대책이 없으니 장차 스스로 무너질 우려가 있습니다. 형세가 부득이하여 가까운 고을의 보병들의 가포(價布)를 절반으로 낮추고 그것을 쌀로 바꾸어 세금으로 바치게 하였으며, 올해의 논밭 결세로 바칠 무명 역시 쌀로 환산하여 조금 가볍게 봉납(捧納)하라는 뜻으로 이미 공문으로 내려 보내었습니다. 군사들이 번을 서는 것에 대해서도 이전에 비록 잠시 멈추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마는 지금은 병사를 모으기가 극히 어려운 데다 또 생각건대 전란을 거치면서 무지한 백성들이 국가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여, 점차 흩어져서 통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이 역시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인근 도(道)에서 병화(兵禍)를 입지 않은 곳은 법례에 의거하여 번을 서도록 하였습니다. 황해도는 관서(關西 평안도)와 가까워서 행재소로 보낼 것을 아울러 알렸습니다. 이일(李鎰)의 전사들은 여러 번의 전투를 치렀을 뿐만 아니라, 도망가거나 흩어지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그런데 더러 이미 상직(賞職)을 받았으나 아직 고신(告身)의 직첩(職牒)도 받지 못한 자도 있고, 더러는 군공(軍功)을 장계로 아뢰었으나 행재소로 가던 길에 누락된 자도 있습니다. 호소사(呼召使) 황정욱(黃廷彧)이 군사를 모집할 때 평민들은 금군(禁軍)에 제수하고, 공사천(公私賤)은 면역(免役)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하며 향을 피워 맹세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믿음을 잃는다면 군정(軍情)이 무너져서 장차 흩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포상을 조금 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조는 시위(侍衛)하는 일이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모집한 군사가 점차 많아질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위임해서는 안 됩니다. 박종남(朴宗男)과 강신(姜紳)을 참지(參知)로 임시 임명〔權差〕하고 정희현(鄭希賢)은 일찍이 군공(軍功)을 세워 부정(副正)에 제수하였으나, 아직 관교(官敎 관직을 제수하는 교서)가 없습니다. 박종남ㆍ강신ㆍ정희현 세 사람의 관교를 작성하여 보내심이 어떠하겠습니까? 김화(金化)와 금성(金城)의 두 고을 수령은 변고가 난 처음부터 멀리 숨었고, 평강 현감(平康縣監) 역시 달아나 숨었으며, 마전 군수(麻田郡守)는 간 곳을 알 수 없고, 곡산 군수(谷山郡守)는 행차가 지나가는 때에도 아예 나와 모시지도 않아 이미 대간의 탄핵을 받았습니다. 영흥(永興)과 덕원(德原)은 전투에서 사망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회양 부사(淮陽府使) 역시 적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밖의 충주(忠州)ㆍ안동(安東) 등과 같은 큰 도회지 역시 오래 비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군과 읍들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어서 이를 수습할 사람이 없으니 매우 심려됩니다. 그리고 행차가 머무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군현 외에는 차출하기가 미안하여 아직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개 적의 침략을 당한 각 읍(邑)의 수령들은 소문만 듣고도 도망가지 않는 이가 없으나, 토산 현감(兔山縣監) 이희원(李希愿)과 철원 부사(鐵原府使) 김협(金俠)은 온 마음을 다해 관아의 일을 하며 민병(民兵)들을 모으고 의연히 굳게 지키는 계책을 써서 온 고을의 사람이 이를 믿고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이천 현감(伊川縣監) 유대정(兪大禎)은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함에 있어 처리하는 재간이 매우 있어서 지공(支供)과 궤향(饋餉)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으니 모두가 참으로 가상히 여길 만합니다. 남병(南兵)이 위로 올라온 이후 연이어 승첩을 얻으므로 적의 세력이 꺾여서 성중에 머무르는 왜적이 아주 적다고 하였으나, 떠도는 말들이 정말인지 알지 못하여 방금 정탐을 한 바, 황해도〔海西〕의 적들이 각 고을에 진을 치고 마음대로 노략질을 하고 있다니, 그 세력이 매우 커서 행차가 머무는 곳도 편안하지 못하게 될까 매우 걱정이 됩니다. 우선 이곳에 머물며 멀리 멀리 정탐하여 먼저 적세가 강한지 약한지를 본 다음 거취를 정할 생각입니다.
7월 18일(을해) 맑았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호원(浩源)의 편지가 우의정에게 왔다. ○이때 적의 세력이 더욱 확장되어 흉악해졌는데, 삼면(三面)이 모두 그렇게 되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행차가 다시 머물러 지체하니 대소 신료들은 당초에 건의한 사람들에게 잘못을 돌렸다. ○이날, 흠재(欽哉) 이헌국(李憲國)에게 쌀풀 한 되를 얻어 노비 막동(莫同)에게 주어 옷에 밴 때를 빨도록 하였다.
7월 19일(병자) 비가 내렸다. 이날 왜적이 이번 달 17일 이미 곡산(谷山)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유인지(柳訒之)가 찾아왔다. 이날 저녁, 총부(摠府 비변사)에 입직하였다.
7월 21일(무인) 왕세자께서 비변사 당상관들을 인견(引見)하였다.
7월 22일(기묘) 비가 내렸다. 강신(姜紳)을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삼고, 박종남(朴宗男)을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삼았다.
7월 23일(경진) 아침에 비가 왔다. 이날,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근래 줄곧 행재소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 밤낮으로 민망해하며 울고 있습니다. 동궁의 행차는 여전히 이천(伊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본현(本縣)의 사면, 이를테면 곡산(谷山), 우봉(牛峯), 김화(金化), 마전(麻田)에 모두 적이 침입하였다는 소문이 있으나, 다만 비가 연이어 내려 강과 내가 넘실거리는 데 힘입어 방어의 대책으로 믿고 있습니다. 만약 강의 여울이 점차 줄어든다면 매우 염려스러워서 적세(賊勢)의 긴급함과 느슨함을 살펴보아 편의대로 옮겨 피할 생각이옵니다. 근래에 각 도(道)의 형세를 보건대 여러 고을의 수령이 혹은 전쟁으로 사망하고, 혹은 고을을 버리고, 혹은 몸이 죽어서 수령이 없는 고을 아닌 곳이 없어서 백성이 모두 흩어지고 살인과 노략질을 일삼으며 으르고 협박하니 지금의 급선무는 각 읍의 수령들이 비는 대로 즉시 전보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을의 업무를 보며 민병을 모집케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재소가 멀어서 소식이 잘 통하지 않아 동궁이 행차하며 근방의 수령을 임명하는 것 이외에 다른 여러 고을에는 감히 관리를 임명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비어 있는 고을이 매우 많아 적을 토벌하는 데 두서가 없으니, 진실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춘천(春川)은 영서(嶺西) 지역의 대읍(大邑)으로, 오랫동안 병화를 입지 않았으므로, 본도의 관찰사가 이에 의거하여 방비를 조치하였습니다. 만약 춘천의 방어가 실패한다면 가평(加平)과 양근(楊根) 등의 지역 역시 지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관방(關防)의 가장 요충지임에도 경기 감사 권징(權徵)의 치보(馳報)에 따르면 부사(府使) 조인후(趙仁後)는 몸에 중병이 있다며 여러 차례 숨고 피하여 본읍(本邑)이 버려진 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박종남(朴宗男)을 부사로 권차(權差 임시로 임명함)하여 이 고을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원호(元豪)는 적들과 접전을 펼치다 적에 의해 상해를 입었는데, 본읍(本邑)은 돌아오는 적의 요충지가 되기 때문에 하루라도 주군(主軍)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경기 감사의 치보를 받아본 바, 전 승지(承旨) 성영(成泳)이 천여 명을 모병하여 본주(本州)에 있다고 하므로, 그를 목사로 권차하였습니다. 전 부사 김천일(金千鎰)은 대의를 내세워 의병을 일으켜 호남(湖南)에서부터 근기(近畿)까지 왔으니 충의(忠義)가 가상합니다. 그런데 아직 직명(職名)이 없어 부하를 호령할 수 없습니다. 또한 경상도와 전라도〔兩南〕에서 창의(倡義)한 사람들이 서로 연달아 일어나고 있으니,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김천일을 중추부사(中樞府事)로 승차시켰으나, 지극히 미안합니다. 춘천 부사 박종남과 여주 목사 성영의 관교(官敎)를 아울러 작성하여 보내심이 어떠하겠습니까? 광주(廣州)에서 모은 병사들이 많게는 수천 명에까지 이르러서 변언수(邊彦琇)가 병사를 거느리고 주둔하였는데, 갑자기 들이닥치는 적을 만나자 변언수가 진(陣)을 펼칠 수가 없어서 적을 보지도 않은 채 먼저 도망갔다고 합니다. 경기 감사의 장계에서 그의 죄를 청하여 백의종사(白衣從事)를 시키게 하여 훗날 공을 세우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남병(南兵)은 인천(仁川)과 안산(安山)에 와서 주둔하고 있다고 하는데, 병사들의 수가 많은지 적은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승첩을 거뒀다는 말도 혹 들려오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서울에 있는 적을 다시 정탐해 보니 그 수가 이전에 비해 매우 적습니다. 명나라 군대가 이미 압록강을 건넜다고 하는데, 전해 들었을 뿐이라서 어느 곳까지 왔는지 알지 못하여서, 지극히 민망하고 염려됩니다.
7월 26일(계미) 중숙자(仲叔子) 김명남(金命男)이 삭녕(朔寧) 땅에 피난 왔다가 찾아왔다.
7월 27일(갑신) 김명남(金命男)이 삭녕(朔寧)으로 돌아간다고 고하였다. ○강원 감사 유영길(柳永吉)이 와서 동궁을 배알하였다. ○이날 저녁, 김세홍(金世弘)의 집에서 최진구(崔晉昫)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날, 다시 장계 두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신 등(臣等)은 양사(兩司 사간원과 사헌부)가 신 등이 왕세자를 호종하면서 강계(江界)를 버리고 위험한 곳으로 들어간 것이 잘못이므로 이를 처음 주창한 신료를 적발하여 삭탈관직(削奪官職)하자고 한다는 말을 듣고 신들은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상(宰相) 일행의 동정은 신들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신들은 마땅히 처음 주창한 죄를 안고 있으나, 적들이 나라에 가득 차 있으니 모두가 위험한 땅입니다. 처음 동궁을 모시고 떠날 때에 사람들의 의견을 널리 구한 결과, 혹 자신의 짐작으로 안전한 계획이라 하여 처음 제창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나, 처음 주창한 죄는 모두가 신들에게 있습니다. 이에 황공하여 숨을 죽이고 석고대죄하고 있으니, 진실로 그 사이에는 한 마디 변명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위급한 때 상례에 따라 침묵만 한다면 국가의 형세가 갈수록 위태로워져서 회복의 희망이 기약 없을 것이기에 감히 자초지종을 다 진술하여 그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당초 세자께 강계로 들어가라는 명을 하셨을 때, 주상께서는 종묘사직의 신주를 세자께 맡기신 것은, 성상의 뜻이 국토 회복의 책무를 세자께서 하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강계는 한쪽 구석에 있어 조정의 명이 사방으로 통하지 않아서, 사방의 사람들도 조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온 나라의 인민(人民)들이 반드시 모두 적의 수중에 잇달아 들어갈 터인데, 누구와 더불어 회복하겠습니까? 게다가 희천(煕川)에 있을 때 일찍이 이러한 뜻을 장계로 아뢰어 이미 상황을 감안하여 나아가고 물러나라는 전지를 받든 데이겠습니까. 사방을 둘러보아도 적의 칼날이 없는 곳이 없어서 생각이 오직 형세를 관찰하여 머무를 곳을 택하는 데에만 있었으니, 위기를 피하고 안전한 곳으로 나아가서, 백성들에게 희망의 대상이 있게 하고 호령이 시행될 곳이 있게 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효과를 이루게 된다면 이는 바로 종사의 경사이자 신민들의 행운입니다. 이것이 신들이 자신의 몸을 잊게 된 이유이자 세자께서 신들의 계략을 따르신 것이니 자고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이라면 누가 위태로운 연후에 편안하지 않았겠습니까. 오직 천하의 계략을 다하고 국가의 책무를 완성하는 데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북도(北道 함경도)는 바로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신들의 잘못된 계획으로는 북방을 먼저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북의 병사들을 선발하여 철령(鐵嶺)의 험준함에 기대어 이곳을 지키며 강원(江原)과 경상(慶尙)을 호령하는 한편 경기(京畿)ㆍ충청(忠淸)ㆍ전라(全羅)와 통한다면 거의 공효를 거두었을 것이나, 불행히도 적병들이 이미 철령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득이 여러 사람들의 심정에 따라 옛 영변(寧邊)으로 왔으니, 여러 사람들의 심정을 따르는 것은 바로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샛길로 잠행(潛行)하여 지금 이천(伊川)에 이르렀으나, 마침 큰비를 만나 삼면(三面)이 장강(長江)에 막혔고, 뒤의 일면에 역시 큰 내가 있어서 이를 믿고 머무르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자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하지 않는 이가 없어 심지어는 눈물을 떨구는 자도 있으며, 기전(畿甸)의 의병(義兵)들이 곳곳에서 봉기하여 서로 앞다투어 적을 잡아서, 적세가 조금 꺾이고 있습니다. 우리 병사들의 기세가 크게 진작되기를 기다려서 전진하여 기세를 잡고 잔적들을 모조리 추포한 다음 남병(南兵)과 서로 통할 생각입니다마는, 그러나 신들이 이러한 중죄를 짊어져서 삼군(三軍)을 지휘함에 있어 일의 체통에 방해가 되니 지극히 송구스럽습니다. 황공하여 죄를 기다립니다. ○신들이 대가(大駕)에서 분리된 이후부터 동궁을 모시고 영원(寧遠)ㆍ맹산(孟山)ㆍ양덕(陽德) 등 궁벽하고 험난한 곳에 오래 머무르다보니 인졸(人卒)은 흩어지고 호종하던 관료와 나인(內人)들은 어떤 때에는 도보로 걸어야 했으며, 심지어 동궁의 말을 끄는 사람조차 간혹 갖추어지지 못하였고, 사람과 말이 야위고 병들어 넘어지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대가에 문안하는 일 역시 제때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이천(伊川)에 이르러서 인사(人士)들이 조금 모인 까닭에 연이어 대가에 사람을 보냈으나 모두 회신을 받지 못하여 막 민망하여 울던 차에 선전관(宣傳官) 나수근(羅守謹)ㆍ주부(主簿) 방사호(方士豪)가 연이어 와서 삼가 성체(聖體 임금)의 강녕함을 살피게 되니 감읍(感泣)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동궁께서 행차하실 때 이천에 머무르면서 적의 상황을 자세히 탐색하고 군졸들을 수합하여 조금이라도 편안한 곳으로 가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전라도 의병장 관하에서 전해진 곡절은 매우 상세합니다. 김천일(金千鎰)의 의병과 병사(兵使) 최원(崔遠)이 이끄는 군대가 지금 강화(江華)에 있으나 접전할 날짜는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다고 하고, 전 부사(前府使) 고경명(高敬命)과 전 제독(前提督) 조헌(趙憲) 역시 의병을 이끌고 올라와 먼저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적들을 공격하였으나, 기한 안에 서울까지 가지는 못하겠다고 합니다. 김천일의 군중(軍中)에 왕세자께서 친필 유시(諭示)를 내리자 여러 군사들이 감격하여,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습니다. 개성(開城)과 경성(京城)을 연이어 정탐하여 본 바, 적세가 이전보다 조금 감소했다고 하나, 오고간 말들이 정확한지 정확하지 않은지 알지 못합니다. 이빈(李薲)이 평양의 방어에 실패한 후 경기(京畿)와 적성(積城)에서 군사들을 모았기 때문에 왕세자의 행차에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나 황해도 백성들의 사정을 살펴 들으니 오랜 기간 적중(賊中)에 함락되어 있어서 살육과 학살을 견디다 못해 모두 떨치고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있으나, 귀의할만한 장수가 없어서 밤낮으로 장수가 오기를 바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빈을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곡산(谷山)ㆍ수안(遂安) 등지로 가서 진무(鎭撫)하고 한편으로는 황해도 일대를 수습하고 한편으로 서경(西京 개성)의 성원에 응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빈의 수하에는 지금 군졸이 없어 흩어진 군사들은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정언(正言) 윤형(尹泂)이 인책을 받아 체직(遞職)되었는데, 간관(諫官)은 오래 비워둘 수 없으므로, 황신(黃愼)을 임시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덕 현감(陽德縣監)이 보내 온 김귀영(金貴榮)과 황정욱(黃廷彧)의 서장(書狀) 및 다른 도에서 온 서장 19장은 정원(政院)으로 올려 보냈습니다. 차서를 갖추어 잘 아뢸 것입니다.
7월 28일(을유) 왕세자께서 이천을 출발하여 강나루에 이르렀다. 날이 서서히 밝자 강을 건넜다. 민가(民家)에서 잠시 머물러 있다가 밤에 풍벽 고개〔風壁峴〕를 넘어 드디어 민가에 들어갔다. ○이날, 배동(陪童) 최신기(崔愼己)가 병술을 가져와 대접하였다. ○이날, 다시 장계 두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경상 우도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보낸 군관이 장계를 가지고 와서 들렀는데, 변방의 소식을 급히 알고자 하여 동궁께 아뢰고 열어 보았으니 지극히 황공하옵니다. 근래 황해도와 강원도의 적이 서울의 적과 서로 왕래하면서 군현(郡縣)이 모두 비어 있어서 제멋대로 가고 머무르면서 관사(官舍)와 촌점(村店)을 가득 메우며, 우리 백성들이 적에게 학살을 당하여 날마다 관군이 오기만을 바라고 있다고 하니, 중론이 다 같이 비어 있는 고을에 먼저 수령을 뽑아 그로 하여금 고을을 지키게 한 연후에야 일에 계통이 있을 것이라 하기 때문에 고양 군수(高陽郡守) 이각(李慤)ㆍ적성 현령(積城縣令) 이온(李蘊)ㆍ교하 현감(交河縣監) 성영우(成永遇)ㆍ양구 현감(楊口縣監) 신응사(申應泗) 등을 임시로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경기 수사(京畿水使) 성응길(成應吉)은 아직 간 곳을 모르겠는데, 어떤 이는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에 수사의 자리가 오래 비면 방비가 허술해지게 되어 관계가 매우 중대하니 행재소가 멀리 떨어져 있고 일의 형편이 긴박하여 부득이 권차(權差)하였으나, 참으로 미안한 일입니다.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근왕(勤王)에 뒤늦었다는 이유로 전라도 유생들로부터 논핵의 소(疏)를 받아서 호령을 전폐한 채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으며, 경상 좌도 감사 김수(金晬)는 인심을 계속 잃어서 호령이 행해지지 않아 한 사람의 군졸도 없이 혼자서 앉아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근왕병(勤王兵)은 가망이 없는 것 같아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얼마 전 심대(沈岱)를 통하여 삼가 옥체가 조금 불편하시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과 염려를 견디지 못하였는데, 지금 성상의 옥체는 어떠하신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동궁의 행차를 성천(成川)으로 옮기는 까닭은 이미 장계를 올려 아뢰었습니다. 행차가 이천(伊川)에 머물고 있을 때 경기도의 백성들이 기뻐하며 스스로 와서 따랐습니다. 이에 조정의 기맥(氣脈)이 여러 도(道)에 두루 통하였고 적의 수급을 나날이 바쳐 왔으며,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치보(馳報 보고서)도 연이어 올라와서 수복의 희망이 퍽 컸습니다. 그러나 이천에서 일식(一息) 거리인 옥동역(玉洞驛)에 적병들이 나타나 야음을 타고 포를 쏘니 적의 기세가 많은지 적은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부득이 성천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근방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시언(李時言)이 적 백여 명을 신계(新溪)에서 만나 단지 지친 병사 30여 명만을 이끌고 적진을 돌파하여 선봉장의 목을 베었는데 아군은 한 사람도 부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 위명(威名)이 크게 드러나, 민정(民情)이 모두 그를 장수로 삼아 한 지역 백성들의 목숨을 구원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시언을 황해 방어사(黃海防禦使)로 삼고, 심우정(沈友正)을 순안사(巡按使)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군량미를 조달하고 황해도의 적을 쓸어 없애 백성들의 바람에 위로하고 답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전에 이천(李薦)을 황해 방어사로 파견한 일을 장계로 올렸으나, 이미 파견한 후 옥동(玉洞)에 적이 있다는 경보를 듣고 이천으로 하여금 가서 지키게 하였으나 이천이 지킬 병사가 없다는 이유로 그만두고 돌아와서는 또 우선 동궁을 와 뵙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시언을 대신하여 보냈습니다. 행차가 머물 곳인 성천은 비록 평양과 가깝지만 평양의 적들도 기세가 꺾여 움츠리고 있고, 게다가 앞에는 강으로 방어할 곳이 있어 잠시 성천부에 머물면서 형세를 보아 나아가거나 물러나거나 할 계획입니다.
7월 29일(병술) 길을 떠나 곡산(谷山) 땅 역리(驛吏)의 집에서 잤다.
7월 30일(정해) 비가 내렸다. 길을 떠나 문암(文巖)에서 잤다.
1592년 8월 1일(무자) 길을 떠나 곡산(谷山)에서 잤다. ○이날, 다시 장계 두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전라도 관찰사의 계본(啓本)이 지나가는 길에 들러서 급히 변경의 위급한 소식을 알고자 하여 동궁께 아뢰고 열어 본 다음 다시 봉하여 올려보내어서 지극히 황송하나이다. 호성감(湖城監) 이주(李柱)와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양원(李陽元)이 올린 비밀 첩정(牒呈)에서 언급한 서몽린(徐夢麟)의 반역 도모 사건은 일이 중대하기 때문에 함께 봉하여 올립니다. 내의원 의관 남응명(南應命)이 말하기를 “개천(价川) 땅에 이르러 말이 없어 뒤쳐졌다가 동행인 조영선(趙英璿) 및 내의원 고지기와 서로 헤어져서 저만 홀로 탕약기(湯藥器)인 은솥〔銀鼎〕 하나, 천자은탕관(天字銀湯罐) 하나, 황자은평초아(黃字銀平招兒) 하나, 은쇄초아(銀鎖招兒) 하나를 가지고 와 행재소에 올리려 했다.” 하는 것을 들여보내려고 하다가, 군적(群賊)들이 사방에 가득한 이 시기에 행여 적을 만나 이를 잃을까 염려되어 남응명에게 돌려주고 우선 보관하여 두라고 하였습니다. 상서 부직장(尙瑞副直長) 성오(成澳)가 부험(符驗)을 가지고 와서 동궁을 뵙기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한응례(韓應禮)와 함께 일시에 들여보내었는데 무사히 도착했는지 여부를 알지 못하여 매우 답답하고 염려스럽습니다. ○삼가 겸사복(兼司僕) 이희정(李希貞)이 지닌 문서를 살펴보니 김우고(金友皐)를 함경 방어사(咸鏡防禦使)로 임명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궁의 행차를 따르며 배행한 장관 이시언(李時言)은 이전에 본도(本道)의 민심 때문에 황해도 방어사(黃海道防禦使)로 파견하였고, 이일(李鎰)이 이끄는 부하 장수들은 평양의 적들을 협공하려 전달 4일에 이미 떠났으며, 정희현(鄭希賢)은 근자에 강동(江東)의 여울물이 점차 얕아져 적의 진로가 염려스럽다고 하여 그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방어하라고 하였으며 또한 사태를 주시하며 나아가거나 물러나라고 영을 내렸습니다. 행차를 호위하는 장수로 다만 김우고 한 사람에게만 의지하고 있는데, 지금 만약 그를 함경도로 보낸다면 행차가 외롭고 위태로워 매우 염려가 됩니다. 이천(李薦)이 이천(伊川) 땅에서 뒤쳐져서 오지 못한 이유는 이미 장계를 올려 아뢰었으나, 요전에 함경도 순찰사(咸鏡道巡察使) 송언신(宋言愼)을 만나본 바 이천의 아들 이희성(李希聖)으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를 재촉하여 곧장 영흥부(永興府)에 부임하라고 하였다고 하나 도로가 막히고 멀어서 위급할 때 조처하는 일을 하나하나 계품하지 못하여 이와 같은 착오를 일으켜 지극히 황공스럽습니다. 이천을 황해 방어사(黃海防禦使)로 임명한다는 교지는 우선 여기에 보관하고 있다가 조정의 조처를 기다리겠습니다. 다른 문서는 황해도 감사(黃海道監司)가 있는 곳으로 바로 보내어 그로 하여금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8월 2일(기축) 길을 떠나 곡산(谷山) 땅의 민가에서 묵었다.
8월 3일(경인) 길을 떠나 곡산(谷山) 땅 구인성(蚯蚓城)의 민가에서 유숙하였다. ○이날 정무 인사(人事)가 있었는데, 정윤복(丁胤福)이 병조 참지(兵曹參知)가 되었고, 강신(姜紳)이 강원 감사(江原監司)가 되었다.
8월 4일(신묘) 길을 떠나 성천(成川)에 이르렀다. ○이날, 희천(煕川)에서 온 최언명(崔彦明)의 편지를 받아 보았다. 정홍원(鄭弘遠)의 부음이 맹산현(孟山縣)에서 왔다. ○김수천(金守天)의 집에 기거하였다.
8월 5일(임진)
8월 6일(계사) 강원 감사(江原監司) 강신(姜紳)이 순찰사(巡察使)를 겸하였다.
8월 7일(갑오) 강신(姜紳)이 배사(拜辭)하였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병사를 거느리고 강동(江東)으로 향하였다. 밤에 비가 내렸다.
8월 8일(을미) 저녁에 이조 좌랑(吏曹佐郞) 허성(許筬)이 찾아 왔다.
8월 9일(병신) 순녕군(順寧君)이 방문하였다. ○이날,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유영길(柳永吉)이 근래 본도(本道)에 적의 기세가 확장됨에 따라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어서 책응(策應)에 뜻이 없는가 하면, 행차가 강원도 내에 머물러 있는데도 길이 막혀 있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배알하지 않아서 이미 대간(臺諫)들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습니다. 때문에 병조 참의(兵曹參議) 강신(姜紳)을 이전 성상(聖上)의 유지(諭旨)에 따라 순찰사(巡察使)로 임명하였고, 그로 하여금 관찰사의 직무를 임시로 맡게 하였습니다. 강신에 대한 관교(官敎)와 유교서(諭敎書)를 작성하여 보내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병조가 동궁을 호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므로 당상(堂上)이 한 사람이라도 없어서는 안 되기에 정윤복(丁胤福)을 참판으로 제수하였으며, 박종남(朴宗男)은 일찍이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이미 차송(差送)하였습니다. 행차에 시위할 사람이 없어 김우고(金友皐)를 계속 시위로 남겨 놓았습니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부하 여러 장수와 황해도ㆍ평안도 병력 400명을 이끌고 평양으로 나아가 이빈(李薲)과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어 양쪽에서 협공하여 적을 잡도록 하였습니다. 군공(軍功)에 대한 여타의 사항은 모두 시행하였으나, 그 가운데 의성 도정(宜城都正) 이옥윤(李玉潤), 월곶 첨사(月串僉使) 이빈(李蘋), 강화 부사(江華府使) 윤담(尹湛), 정포 만호(井浦萬戶) 안광국(安匡國), 전 선전관(前宣傳官) 전인룡(田仁龍), 선전관(宣傳官) 이현(李賢) 등은 응당 승급의 포상이 있어야 하나, 행차에서 마음대로 처결하기가 미안합니다. 고양(高陽)의 사노(私奴) 명복(明福)과 명회(明會) 형제가 자신의 부형이 해를 입은 것에 분노하여 적 70여 명을 쏘아 죽이고 16급을 참수하여서, 일찍이 이미 허통(許通)하여 우림위(羽林衛)에 제수하였습니다마는 이와 같이 특별한 공로에 대한 논상(論賞)은 여기에서 그쳐서는 아니 될 듯합니다. 경기 수사(京畿水使)는 죽은 지 이미 오래되어 최몽성(崔夢星)을 파견하겠다는 뜻을 전에 이미 장계로 아뢰었습니다마는 그 후 행재소의 조보(朝報)를 본 바, 변언수(邊彦琇)를 여기에 임명하셨습니다. 변언수가 이전 패전의 죄를 지고 백의종군하였던 일은 이미 아뢰었습니다. 대저 군공의 논상에 있어 잡다한 임명까지 만약 하나하나 행재소에 품신하여 재가를 받는다면 왕래하는 사이에 걸핏하면 시월(時月)이 지나서, 상이 때를 넘겨서는 안 된다는 뜻에 어긋나므로, 낱낱이 관직을 제수하였습니다. 그 나머지 제수는 거행하기가 어렵기는 하나, 적병들의 기세가 치열한 곳에서는 혹은 관아를 버리거나 혹은 죽었는데도 오랫동안 수령을 파견하지 못하여, 한 고을의 인민(人民)이 적의 수중에 맡겨진 채 수복할 기약이 없어서 부득이 전하여 들리는 말에 따라 관리를 차출하여 그 이름을 기록하여 올립니다.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권징(權徵)의 장계에 조경(趙儆)과 변응성(邊應星)이 패군(敗軍)한 죄를 군율에 따라 치죄(治罪)하기를 청하였으나, 지금 적들의 변란이 한창 극성한 이때에는 한 사람의 장수도 전쟁의 승패와 관련되므로 우선 관대한 볍령을 따라, 이의(李艤)ㆍ최몽성(崔夢星)ㆍ박기백(朴己百)은 모두 군령에 따라 곤장을 치라는 뜻으로 회답하였습니다. 이시언(李時言)은 이미 방어사(防禦使)로 제수되었고, 인천 부사(仁川府使)는 오랫동안 비어 있어 도총경력(都摠經歷) 윤건(尹健)을 임시로 파견하여 보내었습니다.
8월 10일(정유) 다시 장계 두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문안드리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행재소가 평안하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기쁨을 이루 견딜 수 없습니다. 동궁의 행차는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평양의 적세(賊勢)는 연이어 정탐하여 본 바, 어떤 이가 말하기를 “중화(中和)로 물러나와 있으나, 평양성에 남아있는 적들이 성의 안팎으로 무수히 방화를 하여, 강동(江東) 근처의 민가가 연이어 불타고 있으니, 적의 무리들이 하도 교활하여 나아가고 머무는 것을 예측하기 힘들다.”라고 하였습니다.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병력을 이끌고 강동의 길을 거쳐 곧장 평양으로 가 이빈(李薲)과 협공을 하려 하였으나, 행여 강동의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해야 할 것 같아서 우선 이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근래의 적세를 보아서 나아갈 바를 정할 생각입니다. 안변(安邊) 유생 김경정(金景禎)과 덕원(德原) 유생 박기령(朴期齡) 등이 멀리서 걸어와 북적(北賊)의 소식을 자세히 말하였고 아울러 적병의 수급을 바쳤습니다. 또 말하기를 “강원도의 백성들과 사대부 등이 단결하여 적들을 공격하려 하나 여러 고을들이 대다수 비어 있고 이끌만한 장령(將領)이 없으니, 오래 비어 있는 관아의 수령을 차출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덕원 부사(德原府使)와 영흥 판관(永興判官)을 겨우 차출하게 되었습니다. 이 밖에 안변과 문천(文川) 역시 매우 급박하나 참으로 합당한 사람이 없고, 멀리에 있는 사람은 길이 막혀서 부임하기가 매우 어려워 아직 차출하지 못하였습니다. 고양(高陽)에서 피란(避亂)하여 온 진사(進士) 이로(李櫓)는 변란 초기부터 의기를 떨쳐 적들을 죽이고 여러 차례 수급을 바쳤습니다. 지금 또한 자신의 동지(同志)인 이봉춘(李逢春), 장응남(張應男), 안륵(安玏) 등을 이끌고 와서 경기도 적들의 형세와 경위를 모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 이미 공을 따져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이봉춘과 장응남은 이일(李鎰 당시 순변사)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함께 평양의 적들을 공격하게 하였으며, 이로(李櫓)와 안륵(安玏)은 본읍(本邑)으로 돌려보내 적들을 잡을 수 있도록 수령을 제수하였습니다. 신들이 진실로 미안(未安)함을 알고 있으나, 일의 형편이 매우 급하고 행재소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품신하여 결재를 받지 못하고 먼저 임시로 임명하였습니다. 나중에 행재소의 정목(政目 인사에 관련된 사항)과 서로 중첩되거나 만약 아직 부임하지 못한 관원은 행재소의 절목(節目)에 따라 시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춘천 부사(春川府使) 박종남(朴宗男)은 춘천부가 장차 함락되게 되어서 서둘러 임명하여 보내어서 부임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성영(成泳)은 본읍의 경내에서 군사들을 모았기 때문에 그대로 목사로 제수하였는데, 생각건대 이미 부임하였겠으나, 다만 성영은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지 못할 듯한 데다, 또 본주(本州)의 민원 때문에 박기백(朴己百)을 조방장으로 삼아 협력하여 적을 무찌르게 하였습니다. 마전(麻田)과 연천(連川)은 전 감사(前監司) 권징(權徵)이 두 고을이 오래 비어 있는 것을 염려하여 이형남(李亨男)과 김류(金騮)를 가수(假守)로 삼았는데, 이들이 왜적을 막은 공이 퍽 컸기 때문에 그대로 권차(權差)한 바, 이제 막 임무를 살피고 있습니다. 덕원 부사(德原府使)는 덕원부의 유생들이 멀리서 와서 수령을 차출해 줄 것을 간청하였기 때문에, 행차의 부하(部下) 신경리(申景褵)를 권차(權差)하였는데, 지금 이미 출발하였습니다. 인천 부사(仁川府使) 윤건(尹健)은 경기 감사(京畿監司) 심대(沈岱)가 인천부를 오래 비워둘 수 없다고 강력히 말하며, 또 윤건을 합당한 인물이라 추천하므로 곧장 임명하여 파견하였습니다. 황해 방어사(黃海防禦使) 이시언(李時言)을 부득이 임명하여 파견한 경위에 대해서는 이전에 이미 장계를 올렸습니다. 신들의 외람된 생각으로는 이렇게 나라 형세가 위급한 때 일수록 비어 있는 고을의 수령을 채우는 것이 하루가 급하다고 여겨서, 그 중에서 가장 급한 곳을 택하여 여러 명을 임시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행재소와 중첩되게 제수한 일에 있어서는 지극히 황공하여 근자에 부득이하게 제수한 사람들을 따로 기록하여 행재소에 올립니다. 이조 참의(吏曹參議) 이순인(李純仁)이 이달 10일에 사망하여 종묘사직의 신주를 배행하는 일이 긴급한 나머지 이관(李瓘)을 임시로 차정하였습니다. ○경기 도순찰사(京畿都巡察使) 권징(權徵)의 장계와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박진(朴晉)의 장계가 이곳에 들러서 경기와 영남의 적의 형세를 알고자 동궁께 아뢰고 장계를 열어 본 뒤 다시 봉함하여 올립니다. 그런데 경기도는 적의 기세가 치열한데다 이를 무찌를 장관(將官) 또한 의지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조경(趙儆)과 변응성(邊應星)이 일찍이 가평(可平)에서 패전한 죄는 가볍게 감처(勘處)하여 장을 친 뒤에 장계로 아뢰었습니다. 대개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이처럼 사변(事變)이 극심한 시기에 만약 한결같이 군율만 따른다면 온전하게 남아 있을 사람이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가벼운 쪽으로 죄를 논하여 뒷날 공을 세우게 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기 수사(京畿水使) 성응길(成應吉)의 후임에 최몽성(崔夢星)을 차출(差出)한 이유를 갖추어 장계에 아뢰었고, 부임을 재촉한다는 뜻을 경기 감사(京畿監司) 권징에게 관문(關文)으로 보내었으나, 이 장계의 내용을 보니 아마도 아직 그렇게 된 것을 몰라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이에 최몽성의 부임 여부를 급히 회보하라는 뜻으로 이미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있는 곳으로 행문이첩(行文移牒)하였습니다.
8월 12일(기해)
8월 13일(경자)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이달 12일,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유대건(兪大健)이 행재소에서 돌아와, 성상(聖上)의 기체가 강녕함을 알게 되어 기뻐 축하하는 마음을 이루 견디지 못합니다. 동궁께서는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경상좌도 관찰사(慶尙左道觀察使) 김수(金晬)와 우도 관찰사(右道觀察使)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를 지닌 사람이 이곳에 들려서 영남의 적세를 알고자 동궁께 아뢰고서 열어 본 뒤 다시 봉함하여 올려 보냅니다. 송구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8월 14일(신축)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금 평양의 적은 과반수가 황해도 일로(一路)로 올라가고 남아서 주둔하고 있는 적병의 수 역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기도의 적병의 수는 이전에 양주 목사(楊州牧使) 고언백(高彦伯)의 보고서를 본 바, 다수가 모여 주둔하고 있으며 사방으로 진을 연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호남의 병세(兵勢)는 곧장 경성(京城)을 공격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연안(延安)과 배천(白川)의 길을 통하여 먼저 황해도의 적을 무찌르고 곧장 중화(中和)로 나아간다면 평양의 적을 소탕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풍덕 군수(豐德郡守) 변응진(邊應軫)으로 하여금 전라 병사(全羅兵使) 최원(崔遠)과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鎰)에게 알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동궁을 모시는 장사(將士)가 매우 적다 보니 활시위를 당길 군졸이 시위(侍衛)가 취약하여 전혀 의지할 만한 형세가 없습니다. 백성들을 모아 병사들을 찾아보아도 한 사람도 응하는 사람이 없고, 비록 한두 사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모두 잔약(殘弱)한 무리들이고 정예병들을 모으는 데 모든 방도를 동원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무사(武士)들을 기꺼이 달려가게 하는 데에는 과거(科擧)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선발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어서 형편상 거행하기 어려워도 만약 머무르시는 근방 고을에 공문을 보내 알리고 규정을 정하여 전하께서 직접 참관하는 활쏘기 시험을 보인 다음, 가장 잘 쏜 사람은 전시(殿試)에 바로 응시하도록 하고 그다음으로 잘 쏜 자는 회시(會試)에 바로 응시하도록 하며, 또한 그다음으로 잘 쏜 자는 금군(禁軍)으로 제수하신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다투어 모이는 병사가 또한 많을 것입니다. 진실로 합당할 것 같아서 망녕된 생각을 감히 아뢰옵니다. 그리고 긴요하고 중요한 지역에 수령을 전차(塡差)한 곳과 거기에 파견한 관료들 역시 따로 기록하여 올립니다.
8월 15일(임인) 다시 장계 두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최근에 삼가 살피건대, 성상의 기체(氣體)는 어떠한지요? 민망하고 염려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정희현(鄭希賢)을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제수하는 관교(官敎)가 이르렀습니다마는, 그 사람은 강동(江東)의 여울이 얕아지는 것을 보고 방어하러 갔다는 사연을 이미 장계로 아뢰었습니다. 평산 부사의 경우 병력을 뽑아 적을 잡는 데 급급하여 윤사헌(尹士憲)을 권차(權差)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동궁의 행차를 시위하는 장사들은 따로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고 다만 정희현ㆍ김우고(金友皐) 두 사람밖에 없어서, 형편상 수령으로 바꾸어 보내기 어려워 우선 이곳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포(司圃) 한호(韓濩)가 이달 14일에 이곳에 왔으나, 문서를 작성해야 할 일이 긴급하여서 곧바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있습니다. 평양에 있는 적의 수를 비록 상세하게 알지는 못하오나 많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런데 이번 달 6일 적과 교전한 이후 지금까지 거의 10여 일이 지났는데도 더 이상 거사(擧事)하는 것이 없으나, 적들은 더욱 거침없이 흩어져 나와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며 온 들판의 곡식들을 거의 다 베어 갔습니다. 그리고 전해 들은 바, 서울에 있는 적들이 송경(松京 개성)을 오가고 있으며, 관북(關北)의 각 고을에 머물며 주둔하는 적들이 곳곳에 가득하다고 하니, 혹시 평양의 적들과 서로 합세를 한다면 앞으로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적들을 소탕하여 없애는 일은 하루가 급한데도, 점점 지연되고 있으니 매우 민망하고 염려스럽습니다. 근처의 각 고을에서 공납(貢納)한 세목(細木 가늘고 고운 무명)을 동궁을 모시고 따른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은 일찍이 성상의 교지가 있었기에 받들어 올리는 바, 면포(綿布 무명천)가 본도(本道)에는 원래 없어서, 강동(江東)ㆍ삼등(三登)ㆍ성천(成川)에서 공납한 명주〔紬 비단〕를 내수사(內需司)가 공납 받은 2740필과 합쳐 그 수량 내에서 배시(陪侍)한 종실(宗室)ㆍ백관(百官)ㆍ장사(將士)는 물론 그 이외에 동궁의 수레를 호종하였던 군인 및 종정(從征)한 군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직까지 본도에 토착하여 사는 다른 도에서 멀리 온 사람들이 적들의 분탕질을 겪으면서 부모와 처자를 다 잃고, 이렇게 날씨가 차가운 때에 맨몸을 드러내고 추위에 울부짖는 것이 지극히 안타깝습니다. 이일(李鎰)과 정희현(鄭希賢)의 군중(軍中)에도 조금씩 나누어 보내어 특히 옷이 얇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서도 남아 있는 명주는 아직 10동(同)이나 됩니다. 사변으로 극심한 이러한 때를 당할수록 각 관아에 비축되어 있는 것들이 산실(散失)이 염려스러운 만큼, 속히 명을 내려 조처하심이 합당한 줄 아옵니다. 근일 때에 맞춰 공을 따져 상으로 관직을 준 것과 부득이하게 관리를 임시 임명한 인사 기록〔政目〕을 개록(開錄)하여 올려 보냅니다. 이곳에는 이조 당상(吏曹堂上)과 낭청(郞廳)이 없어서 조정의 유시를 아직 만들어 보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능하면 빨리 만들어 보내시기를 감히 아뢰옵니다. 인의(引儀) 고응잠(高應潛)과 이응길(李應吉) 등이 찾아왔으나, 듣자 하니 중국 사람을 접대하라는 기별을 들은 듯하여 두 사람을 보냅니다.
8월 16일(계묘) 왕세자께서 대문 밖으로 나가셔서 장사(將士)들을 위로하였다.
8월 17일(갑진) ○이날,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설번(薛藩)이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주문(奏文)과 허의후(許儀後)의 조목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부기한다.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의 소직(小職)인 저 설번(薛藩)은 왜적들의 심성이 하도 교활하여서 참으로 우려할 만하다 여기옵니다. 병사들을 징발하여 왜적을 징벌하는 것이 급하기에 한두 가지 합당한 일을 아울러 개진하여 성명(聖明)의 채택에 대비코자 하옵니다. 이전에 우리 명나라 병부가 왜적들이 반란을 일으켜 서로 분쟁하고 있을 때 왜적들의 정황을 예측하기 어려워서 성명(聖明)께 간절히 빌어, 문무 대신(文武大臣)을 급히 파견하여 왜적의 토벌을 경략하여 그들의 미친 기도를 정벌하여 급한 후환을 해결하라는 성지(聖旨)를 받든 바 “조선이 왜적에게 침략을 당하여 함몰할 지경에 이르러서 조선 국왕이 매우 급하게 병력을 요청하고 있다. 이미 여러 관료들의 회의를 거쳤고 그대들 병부 또한 정탐을 하여 실태 파악을 하였을 것이니, 곧장 출정할 사의(事宜)를 참작하여 속히 가서 조선을 구원하되, 달리 병력 지원이 늦어져 제때 미치지 못하는 일로 뒷날 우리나라 변경이 해를 입을 우려를 나에게 끼치지 말라. 관직을 설치하고 장수를 보내는 일은 모두 선유(宣諭)한 대로 알아서 하도록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병부의 자문(咨文)을 예부(禮部)에 송부한 바, 소직(小職) 설번을 제청하여 관직을 주어서 파견하며 칙서를 가지고 가서 조선의 국왕을 선유(宣諭)하게 하였습니다. 소직은 이를 공손히 받들어 시행하여 곧장 조선으로 달려와서 칙서(勅書)를 개봉하여 선유한 바, 조선의 군왕과 신하 모두가 감격하여 목메어 울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다 같이 말하기를 “‘황은(皇恩)이 조선을 불쌍히 여기시니 참으로 하늘이 모든 것을 덮고 땅이 모든 것을 싣고 있는 인자함과 같습니다.’ 하면서 목을 길게 뽑아 왕사(王師)를 기다리는 것이 또한 큰 가뭄에 비가 올 징조를 지닌 구름을 바라보는 것과 같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의 군신들이 슬피 부르짖는 절박한 말에 근거하고 또 백성들의 곤궁함과 유랑하는 상황을 직접 눈으로 보니, 진실로 조선의 존망은 호흡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사세(事勢)의 절박함이 조선에만 있지 않고 우리나라 변경에도 있으니, 어리석은 소직(小職)이 깊이 우려하는 것은 변경만이 아니라 내지(內地)가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병사를 조발하여 토벌하는 일을 잠시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반드시 닥쳐올 일의 형세를 감안하여 미리 첨병(添兵)하여 지방(地方)을 지켜야 한다는 사의(事宜)를 황상(皇上)께 진달하여 올립니다. 요진(遼鎭)은 경사(京師 북경)의 왼팔이며, 조선은 요진의 울타리입니다. 영평(永平)은 기보(畿輔 북경 근지)의 중요한 땅이며, 천진(天津)은 또한 경사(京師)의 문정(門庭)입니다. 200여 년 동안 복건성(福建省)과 절강성(浙江省)은 항상 왜적의 침략을 받았으나, 요양과 천진에는 왜구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조선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입니다. 압록강(鴨綠江)에는 비록 세 길이 있으나 서쪽과 가까운 두 길은 물이 얕고 강폭이 좁아 말을 타고 뛰어서 건널 수 있고, 그 가운데 하나의 길은 동서의 거리가 (적이 오면) 화살을 두 번 먹일 수도 없는 거리입니다. 어찌 이에 의지하여 방어를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왜적들이 조선을 차지하여 웅거한다면 요양의 백성들은 하룻밤도 편안히 베개를 베고 누울 수 없을 것입니다. 바람이 세차게 한 번 불어서 돛을 올려 서쪽으로 온다면 영평과 천진이 제일 먼저 화를 입을 것이니, 경사의 백성들이 깜짝 놀라지 않겠습니까? 소직(小職)은 그 우려와 잘못된 계책을 견디지 못해 발걸음이 닿는 곳곳마다 자세히 물어보았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차출하여 곧장 평양 지역으로 보내어 정탐한 바, 그들이 돌아와 보고한 것에 따르면 모두 “왜구들이 각자 인가와 부녀자를 차지하여 짝을 이루어 살림을 꾸리고 집을 수리하여 많은 식량을 쌓으며 오랫동안 주둔할 계책을 세우는가 하면, 병기를 더 만들고 민가에 있는 활과 화살을 모아서 전쟁에 사용합니다.”라고 말하니, 이는 왜적의 뜻이 작은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臣)이 도착하던 날, 들으니 왜적이 서쪽으로 압록강에 와서 군대를 열병하겠다고 큰소리치자 조선의 신민(臣民)들이 갈팡질팡하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다행히 유격(游擊) 심유경(沈惟敬)이 힘을 다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홀로 말을 타고 적진에 들어가 담판을 지어서 50일 동안 교전하지 않기로 약조를 하여 왜적들의 침범을 늦추고 아군의 도착을 기다리게 하였으나, 우리가 이 술책으로 저들을 속였는데, 저들 역시 이 술책으로 우리를 속인 것이 아닌지 누가 알겠습니까? 왜적들은 간사하고 교활하여 평양을 함락시킬 때에는 “길을 빌려 원수를 갚고자 한다.”고 말하더니 지금은 “길을 빌려 조공을 하고자 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바야흐로 중국과 대적할 수 없음을 천고의 한(恨)으로 여기더니, 또 심유경을 만나고서는 조공을 통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갑자기 무시하는 말을 하다가 돌연 공손한 말을 하니, 여기에 그들은 간사하여 믿기 어렵다는 것을 대충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왜는 10년에 한 번씩 조공을 바치는 기한이 원래 정해져 있고, 영파부(寧波府)로 조공을 바치는 장소 역시 원래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조선을 끼고서 우리에게 맹약을 요구하니, 어리석은 생각에 중간(조선)을 거쳐 조공을 바치는 것〔來王 來朝〕은 이 제도만 못할 듯합니다. 여전히 그냥 놓아두고 문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臣)이 왜적의 계략을 헤아려 보건대 조공을 허락받아 간사하게 죄를 용서받고서는 우리 병력의 출정을 늦추려는 기도에 불과합니다. 혹 강이 얼기를 기다렸다가 요양(遼陽)을 침범하거나, 혹은 봄을 기다려 바닷길로 천진(天津)을 침범할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제때에 속히 대군(大軍)을 파견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침범하여 이르는 곳마다 ‘누가 감히 우리를 어찌할 것인가?’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선뜻 순순히 배의 키를 돌리리라고 저는 믿지 않습니다. 지금 조선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러서, 위기가 아침저녁에 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말씀〔綸音 칙서〕이 한 번 반포되면서 조선 백성들이 충의로운 마음이 고무되고 적개(敵愾)하는 의기(義氣)가 진작되어, 모두가 국가 회복의 염원을 지니지 않는 이가 없어 왜적들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으니 이러한 인심(人心)을 타고 정예의 병력을 더해주어 그들과 함께 협공한다면 왜적들을 반드시 섬멸하게 될 것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차히 시일을 기다린다면 왜적들이 가난한 자들을 불러 모으고 흩어져 유랑하는 사람들을 어루만져 위로하여 조선 사람들이 전쟁을 싫어하고 새로운 군주를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100만의 병사가 있기로서니 구제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군사를 일으켜 토벌을 나가는 것은 다만 왜적의 침범을 재촉할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 소직(小職)은 토벌하여도 침범할 것이고 토벌하지 않아도 침범할 것이라면, 왜적을 토벌하여 평양의 동쪽으로 끌어낸다면 왜적의 침범에 늦어져서 재난도 적을 것이나 토벌하지 않는다면 평양의 바깥에서 마음대로 날뛰어 왜적의 침범이 빨라져서 재난도 클 것이며, 또 빨리 토벌하면 우리는 조선의 힘을 빌려 왜적을 잡을 수 있으나 더디 토벌하면 왜적이 조선 사람들을 거느리고 우리를 대적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臣)은 진실로 병사를 징발하여 왜를 토벌하는 일은 잠시도 늦출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 올리는 것입니다. 설령 대군(大軍)을 한꺼번에 모을 수는 없을지라도 마땅히 연이어 군사를 징발하여 보내어 조선 군사의 성세를 부추겨주어야 합니다. 아마 만에 하나 개나 양과 같은 왜적들의 혼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군대를 일으키는 데 드는 비용이 군량미 보다 더 드는 것은 없습니다. 소직(小職)이 물어본 바, 조선이 현재 비축하고 있는 군량미는 겨우 7~8천의 군사를 한 달 먹일 수 있는 양밖에 없다고 하며 부족한 양은 우리 측의 지원을 받아서 이어대려고 하며, 조선국 군왕과 신하들이 또 사람과 말을 징발하여 압록강 강변에서 이를 인수 받아 수송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평양을 평정한 후에는 조선국 군신들 역시 우리 명나라 군사들이 자신들의 부모 형제를 위해 복수해 주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기꺼이 군량미를 바칠 것이니, 자연스레 가는 곳마다 군량을 이어 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왜적들에게 이를 갈고 있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이를테면 관전(寬奠)ㆍ대전(大奠)ㆍ애양(靉陽) 등의 지방에 있어서는 서북쪽으로는 달로(㺚虜)와 인접해 있고 동남쪽은 압록강에 기대어 있어 5백여 리나 뻗쳐 있는데도, 원래 정원의 관병 그 숫자가 이미 매우 적은 데다 지금 각 군영에서 징발해 간 선봉(選鋒 정예 돌격대)ㆍ초마(哨馬 초계를 하는 기병) 및 절년(節年 퇴직병)ㆍ도망병과 사망병을 제외하면 관전보(寬奠堡)에 실재하는 군사는 단지 1300여 명에 그치고 애양보(靉陽堡)에 실존하는 군사는 7500여 명에 그치며, 대전보(大奠堡)에 실존하는 군사는 330여 명에 그칩니다. 이미 왜적을 막으면서 또 북쪽 오랑캐〔虜〕를 방어하려 한다면 보(堡)를 지키는 병사가 없을 수 없고 적의 길을 막는 데 사람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가령 왜적들이 정말 침범해 온다면 어떻게 막겠습니까? 소직이 생각건대, 관전보 등의 관병을 속히 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방의 사람(하북과 요동인)은 북쪽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 뛰어나고, 남방의 사람(복건과 절강인)은 왜적을 막는 데 뛰어납니다. 만약 왜적과 전투를 함에 있어 남병(南兵) 2만을 얻지 않으면 어찌 왜적들의 예봉(銳鋒)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남병을 빨리 징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장기는 말을 몰며 활을 쏘는 데 있고, 왜적의 장기는 조총에 있습니다. 화살이 미치는 곳은 갑옷〔盔甲〕으로 피할 수 있으나 조총을 쏘는 것은 병사들과 말이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등 방패〔藤牌〕가 있으면 몸도 은폐할 수 있고 말〔馬〕도 가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등 방패와 조총을 모두 속히 만들어야 합니다. 신이 말한 것은 진실로 여러 신하들이 모두 먼저 말하였을 줄로 압니다. 어찌 신의 진부한 번독을 기다리겠습니까? 돌이켜 생각건대 하루라도 빨리하면 조선이 하루에 멸망하는 근심을 면하게 되고, 하루라도 늦추면 우리 강역에 하루의 우환을 끼치게 됩니다. 간절히 빌건대, 성황(聖皇)의 명철한 판단으로 해부(該部 병부 및 해당 관부)에 조칙을 내려 논의를 거쳐서 시행케 하되 일을 맡은 신하들에게는 병마(兵馬)를 재촉하여 나오게 하신다면 강역에 다행이고, 종묘사직에도 다행이겠습니다. 소직(小職)은 기우(杞憂)를 견디지 못하여 곧장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나왔다가 도중에 병이 나서 빨리 달려 나갈 수가 없으나, 돌이켜 보건대 일념의 정성스런 충성이 지연되어 일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 이 주본(奏本)을 갖추어 써서 먼저 집안 사람 설지(薛志)를 시켜 받들어 봉송하게 하오니 삼가 아뢰옵니다. ○이날, 또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근자에 성상의 옥체가 어떠하신지 지극히 염려되옵니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광주 향교(廣州鄕校)의 생도 이운룡(李雲龍) 등이 이달 17일 이곳에 와서 말하기를 “동쪽 잠실(蠶室) 근처의 사노비 두리(頭里)와 불세(佛世)가 6월 보름께 선릉(宣陵 성종의 묘) 위의 잔디와 흙이 왜적들에 의해 파헤쳐져 있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전해 들은 말이 사실인지 알지 못하나, 그 말을 듣고 경악과 통탄을 이루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동궁께서 곧장 오산 도정(烏山都正) 이현(李鉉)과 선전관(宣傳官) 이응인(李應仁)을 보내신 바, 사수 군인(射手軍人) 다섯 명을 이끌고 급히 봉심(奉審)하러 당일 출발하였습니다. 그들이 돌아온 후 다시 아뢰어야 할 것이나, 일이 너무나도 경악스럽고도 슬퍼 먼저 아뢰옵니다. 봉심(奉審)하는 신하는 마땅히 벼슬이 높은 조정의 관리를 보내어야 하나, 왜적의 무리들이 지금 그곳에 진(陣)을 치고 있어 봉심의 목적을 달성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오산 도정 이현은 나이는 젊지만 무재(武才)가 있어서 이에 차출하여 보낸 것입니다.
8월 18일(을사) 왕세자께서 여러 도(道)에 교서를 내려 피란한 사대부들을 방문하고 편의에 따라 구제하도록 하였다.
8월 19일(병오) 빈청에 나아가 고경명(高敬命)의 토적격서(討賊檄書)를 보았다. ○이날,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이달 18일 문안하러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삼가 성체(聖體)의 안강(安康)하심을 알게 되어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 견딜 수 없었습니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고 있습니다. 신들이 비변사의 통관(通關 관문(關文), 즉 공문서)을 받아본 바, 김우고를 함경도 방어사(咸鏡道防禦使)로 차정(差定)하여 곧바로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양의 적들이 아직 소탕되지 않아서 동궁의 행차가 성천에 오시던 다음 날, 곧장 이일(李鎰)을 보내어 이빈(李薲)과 적을 협공하도록 한 결과 이번 달 13일과 16일 이어 접전을 벌여서, 비록 통쾌한 승리는 아닐지라도 살상한 적이 매우 많았습니다. 지금 막 다시 전투를 벌이며 적을 완전히 없애기를 작정하고 있어서 일의 기회를 놓칠 것이 두려우니 이일을 소환해서는 안 되고, 이곳을 시위하는 장수는 단지 김우고 한 사람뿐이니 그를 보내기도 미안합니다. 그리고 북방의 일 역시 긴급하므로 부득이 정희현(鄭希賢)을 보냈으나, 근래 강여울에 물이 빠졌기 때문에 곳곳마다 건너갈 수 있고, 평양의 적들은 성 밖을 나와 마구 날뛰고 있으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정희현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길을 차단하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러한 대비를 철회하게 된다면 이곳에 머무르는 것 또한 매우 외롭고 위태하게 되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보내심이 합당할 듯합니다. 경기 순찰사(京畿巡察使) 권징(權徵)의 장계가 이곳을 지나가기에 급히 경기의 적세(賊勢)를 알고자 하는 마음에 동궁께 아뢰고 먼저 열어 본 뒤 다시 봉하여 올리오니, 매우 미안합니다.
8월 20일(정미)
8월 21일(무신)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근일 성상의 옥체가 어떠하신지 밤낮으로 걱정됩니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전 이조 참의(前吏曹參議) 이정암(李廷馣)이 의병을 많이 모아 연안(延安)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전에 그에게 초토사(招討使)의 칭호를 주고 적을 토벌케 한 연유는 이미 장계를 올려 아뢰었습니다. 듣자 하니, 강음 현감(江陰縣監) 최영휘(崔永徽)가 도망가 숨은 지 이미 오래라고 하니 적로의 요충지가 완전히 적들의 소굴이 될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이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권징(權徵)이 군관 유연(兪淵)을 권차(權差)하였고, 본도(本道)에 공문을 보내어 부임하기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8월 22일(기유) 병조 참의(兵曹參議) 홍인상(洪麟祥)이 대조(大朝)에서 돌아왔다.
8월 23일(경술)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이달 22일, 소모사(召募使) 박동언(朴東彦)이 이곳을 지나가는 길에 성왕의 기체가 강녕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을 이루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고 있습니다. 요사이 평양의 적들이 도망가려는 뜻이 없는 듯합니다. 날마다 흩어져 나와 벼를 베고 집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모란봉〔牧丹峯〕 위에 성을 축조하고 군막을 조성하니 너무도 통탄스럽습니다. 이빈(李薲)과 이일(李鎰) 등의 군사가 여러 차례 접전을 펼쳐 비록 통쾌한 승리를 얻지는 못했으나 쏘아 죽인 적이 역시 많습니다. 이일은 매번 정예병을 선발하여 적들이 오는 길목에 분산 매복하였는데, 이번 달 22일에는 적을 만나 대오를 나누어 여러 곳으로 출격하여 적을 무수히 쏘아 맞히므로 적들이 허겁지겁 도망쳐 들어가서 그들의 예봉을 꺾어 놓았으니 조금은 위로가 되고 다행입니다. 이곳에는 각 지방에서 피란한 용사들이 연이어 와서 이들을 차례대로 보내어 전투를 돕게 하고 적을 섬멸할 날을 밤낮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의 장계 내용을 본 바, 이일이 공문을 받아 시행하는 과정에서 착오로 실수한 일이 많이 있다고 하였으니 말을 만드는 사이에 나무라거나 원망하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일이 비록 실수가 없지는 않으나, 그의 뜻은 오로지 적을 토벌하기에 급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렇게 국가가 위급한 간두에서 두 장수가 세력을 규합하여 적을 섬멸할 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데 만약 이것을 이유로 견책을 받아 직임을 지킬 수 없게 된다면 이일 수하의 부장(副將)과 정예병 및 거느리고 있는 1000여 명의 병사들이 일시에 무너지고 흩어져서 다시는 병사를 모으기가 어렵고 각 지방의 장사(將士)들 역시 이것 때문에 맥이 빠질까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이일이 군사들을 거느린 이후 비록 여러 차례 패배의 분을 삼켰으나 근래의 그의 말투를 보면 강개하여 국가를 위해 적을 토벌하겠다는 의지가 꽤 있으니, 군사를 잃고 도망가 숨은 자들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늙어서나마 전쟁의 공을 거두도록 돕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것 같습니다. 이전에 이빈과 이일 두 장군이 불협화음이 있다고 듣고 동궁께서 병조 참의 홍인상(洪麟祥)을 보내어 그 실상을 살펴본 바 두 장수가 그리 큰 잘못을 한 것도 없고, 다툼의 발단도 다만 언제 군사들을 모을 것인지의 시기를 약속하는 것에 있었다고 합니다. 시강(侍講)하는 관원 가운데 빠진 인원이 매우 많은 데다 빈객(賓客)의 경우 한 사람도 여기에 없어서 미안할 듯합니다. 한준(韓準)이 빈객의 직을 띠고 있었으니, 행재소에 만약 긴요하게 맡아야 직분이 없다면 그를 이리로 보내어 권강(勸講)의 임무를 돕게 하는 것도 편리할 것입니다.
8월 24일(신해)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선전관(宣傳官) 이계명(李繼命)이 와서 성상의 옥체가 강녕하심을 삼가 알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평양의 적들은 처음에는 그 수가 많지 않아서 머지않아 소탕할 수 있다고 여겼으나, 아직 통쾌한 승첩은 없고 저들은 흉악한 칼끝을 더욱 휘두르며 사방으로 퍼져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합니다. 본부(本府 성천부)는 평양과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서 동궁의 시위(侍衛)를 취약하게 하거나 허술하게 해서는 안 되지만, 각 고을의 군사가 모두 이미 전장에 나아가서 더 이상 초출(抄出)할 병사가 없습니다. 본부의 7, 8월 관방(關防)에서 퇴립할 군사와 9, 10월에 번을 서야 할 군사를 국경 방어에서 면제하고 여기에 남아 호위를 하도록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하나, 감히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감히 아룁니다.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박진(朴晉)이 왜적을 잡은 사실을 보고하는 장계가 이곳을 지나가기에, 영남의 적세를 알고자 하여 동궁께 아뢰고 열어 본 뒤 봉함하여 올립니다. 북도(北道)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여 답답하고 염려되던 차에 지금 덕원 부사(德原府使) 신경리(申景褵)의 첩보(牒報)를 보니 각 고을에 왜적이 혹은 3, 4백 혹은 2, 3백 명씩 머물러 있어서, 군인을 초발(抄發)하여 여러 곳에 복병을 매설하여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8월 25일(임자)
8월 26일(계축) 다시 장계를 행재소에 올렸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 방어사(防禦使) 이천(李薦)이 평강(平康)과 철원(鐵原) 등 지역에서 군병을 모집하다가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제수되었다는 기별을 듣고 양덕(陽德)까지 갔다가 이미 체직(遞職)당한 것을 알고 이번 26일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동궁의 행하를 호위하는 장수인 이일(李鎰)ㆍ이시언(李時彦)ㆍ김우고(金友皐)ㆍ정희현(鄭希賢)은 모두가 차출되어 나가서 한 사람도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을까 지극히 민망하고 염려됩니다. 그러므로 이천을 우선 호위하기 위하여 이곳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황해도 관찰사이자 방어사(防禦使)인 이시언(李時彦)과 서흥 부사(瑞興府使) 남억(南嶷) 등의 문보(文報)가 연이어 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달 23일 왜적이 용천(龍川)에서 봉산(鳳山)으로 왔는데, 혹은 그 수가 만여 명이라고 말하고 혹은 3000여 명이라고 말하니, 그 수가 같지 않으나, 적세가 매우 큰 것 같습니다. 이에 문보(文報) 세 장을 올립니다. 왜적이 만약 평양에 군사를 증강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충돌한다면, 동궁의 행차가 계속 여기에 머무를 경우 적과의 거리가 멀지 않아 매우 염려스러우나, 비록 옮겨 피하려 해도 달리 왜적이 침략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만약 적들이 가까이 다가오는 형세가 있다면 안주(安州 평안남도 북쪽) 등지의 대군(大軍) 뒤로 옮겨갔다가, 형세를 보아가며 대처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막중한 일을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감히 이처럼 아룁니다. 박경신(朴慶新)은 오래도록 이일(李鎰)의 휘하에 있어 군사적 상황을 잘 알 뿐만 아니라 진취하는 데도 예리하여 주장(主將)의 힘을 퍽 발휘하고 있었는데, 예기치 못하게 체직(遞職)을 당하니, 군중(軍中)에 술렁이는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로 하여금 그대로 임무를 맡게 하심이 편리할 듯합니다.
8월 27일(갑인)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서쪽 변방이 일찍 추울 터인데, 성상의 옥체가 어떠하신지요. 답답하고 염려되는 마음 견딜 수 없습니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평양의 적이 병력을 증강한 흔적이 보이나 오랫동안 거사를 하지 않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본부(本府 성천부)는 평양성과 멀지 않아서, 강동(江東)의 얕은 여울물에 장수를 지정하여 방비하여야 하나, 여울이 많고 군사가 적어서 만전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대군(大軍)의 뒤로 옮겨가서 형세를 보아가며 나아가고 물러나겠다는 뜻을 전에 이미 장계로 아뢰었습니다마는, 그러나 동궁의 행차가 적과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어서 호위하는 장졸이 취약해서는 안 되는데, 본도(本道)의 장졸은 초발(抄發)한 나머지 모두가 지치고 허약하여 한갓 군량만 소비할 뿐 실제로 쓸모가 없습니다. 모름지기 활을 잘 다루는 정예의 병사를 얻어야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할 수 있으나, 모을 방법이 없습니다. 격려하고 권장할 수단으로는 단지 과거(科擧)라는 하나의 일에 달려 있으나 과거와 같은 중대한 일을 가벼이 논할 수 없어서 이전에 활쏘기를 시험하여 직부(直赴)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품계 한만큼 그에 대한 전하의 비답을 기다려서 확정하고자 합니다. 홍인상(洪麟祥)이 처음 행재소로 가려고 동궁을 배알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동궁을 모시는 여러 신하들이 대개가 늙고 병들어 일을 맡을 사람이 없어서 그를 병조 참의(兵曹參議)로 권차(權差)하였습니다.
8월 28일(을묘)
8월 29일(병진)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이 부름을 받고 의주로 향했다. ○방어사(防禦使)의 첩서(捷書 승리 보고서)가 평양에서 왔다. ○이날, 다시 장계 한 통을 행재소에 올렸다. ○삼가 전하의 옥체가 어떠하신지 살피지 못하여 지극히 염려스럽습니다. 신들은 동궁을 모시고 지금 성천(成川)에 머물러 있습니다. 도감(都監)의 관자 내에 응교(應敎) 이상의(李尙毅)를 영접 낭청(迎接郞廳)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마는, 동궁의 시강(侍講) 관원인 겸필선(兼弼善) 이유중(李有中)은 병이 위중하여 체직을 당하고, 필선(弼善) 심우정(沈友正)과 사서(司書) 윤형(尹泂)도 사신으로 나아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날마다 경연 강의를 하고 있으나 강의하는 관리가 모자라서 장차 폐강하게 될 상황이라, 지극히 미안합니다. 이상의를 계속 머물도록 하여주시기를 감히 아룁니다.
[주D-001]벽제관(碧蹄館) : 오늘날 경기도 고양시 벽제에 있는 역관(驛館)이다. [주D-002]동파관(東坡館) : 고양에서 임진강 건너 지역인 동파에 있는 역관이다. [주D-003]궁계(宮㜎) : 왕비 이하의 모든 궁녀를 지칭하는 말이다. [주D-004]약방(藥房) : 당시 정탁은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를 맡고 있었다. [주D-005]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선조와 몇몇 신하만이 건넌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날 정탁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D-006]삭탈관작을 명하였다 : 《선조실록》에는 5월 2일과 3일자 기사에 이산해의 삭탈관직에 관한 일이 자세히 실려 있다. [주D-007]평산부(平山府) : 개성과 북쪽으로 접한 곳으로 현재 황해도에 속해 있다. [주D-008]중화(中和) : 중화는 오늘날 평양에 속하는 곳인데, 평양의 바로 남쪽에 있다. 태종 13년인 1413년 평안도에 속해 있었다가 1592년 선조 때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주D-009]지인(知印) : 공문의 수발과 날인에 관한 일을 맡았던 통인(通引)이다. [주D-010]영숭전(永崇殿) : 평양에 있는 곳으로, 태조의 영정이 봉안된 곳이다. [주D-011]존호(尊號)를 없애도록 명하셨다 : 《선조실록》 25년 5월 10일 기사에 이 일이 기록되어 있다. [주D-012]신할(申硈)의 …… 전사하였다 : 신할과 유극량 모두 임진강 방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주D-013]윤목(允穆) : 약포 정탁의 셋째 아들 정윤목(鄭允穆)으로, 호가 청풍자(淸風子)이다. [주D-014]시재(試才) : 이는 활쏘기 시험이었다. [주D-015]곧장 전시(殿試)에 응하도록 : 이 말은 직부전시(直赴殿試)를 번역한 것인데, 예비 시험인 초시와 본 시험인 복시를 면제하고 곧장 순위만 결정하는 최종 시험에 응하게 하는 것이다. [주D-016]주상께서 …… 명하였다 : 이 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일 다섯 번째 기사에 보인다. [주D-017]주상께서 …… 맞이하였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5일 두 번째 기사에서 보인다. [주D-018]내전(內殿)이 …… 배행(陪行)하였다 : 내전은 중전과 왕세자빈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10일 첫 번째 기사와 6월 11일 세 번째 기사에 보인다. [주D-019]기복(起復) : 어버이의 상중에 벼슬을 하지 않는 관례를 깨고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것이다. [주D-020]왕세자 : 당시의 왕세자는 광해군(光海君)이다. [주D-021]강계(江界) : 강계는 오늘날 북한 자강도에 속하지만, 1800년대에는 평안북도에 속하였다. 그 이전에 강계는 북방의 군사요충지로 1413년 강계도호부가 되었다. 지금도 강계는 자강도의 도 소재지이다. [주D-022]운산군(雲山郡) : 운산군은 평안북도의 동북부에 있으며, 영변에서도 북쪽에 있다. 운산은 광해가 선조와 분조(分朝) 이후 처음으로 간 곳이다. 그리고 이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중 분조가 된 것은 1592년 6월 14일이다. [주D-023]개평원(開平院) : 개평은 운산의 서쪽과 접한 지역이다. 개평은 평안북도 향산군의 한 고을이다. 원(院)이란 숙박 시설을 갖춘 역원(驛院)을 말한다. [주D-024]희천군(煕川郡) : 희천군은 오늘날의 자강도 희천시이다. 왕세자는 선조와 분조를 한 이후, 이날까지 운천, 개평, 희천을 거쳐 강계로 가고 있었다. [주D-025]최황(崔滉)이 …… 되었다 : 최황이 함흥으로 가지 못한 이유는 적들이 이미 함흥으로 향했다는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선조는 중전도 의주로 모시라고 다시 명한다. [주D-026]장동(長洞) : 오늘날 맹산군 장동리인 것 같다. [주D-027]설한령(雪寒嶺) : 지금의 함흥에서 강계로 가는 중심길인데, 함경도 장진군과 자강도 용림군을 잇는 고개이다. 길을 살펴보면 영변에서 선조는 서쪽 의주로 가고 있고, 왕세자는 북쪽 강계로 가야 하나 서남쪽으로 난 길을 택하고 있다. [주D-028]박종남(朴宗男)을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제수하였다 : 박종남을 병조 참지로 다시 제수한 것은 《선조실록》 선조 25년 7월 2일 기사에 나온다. [주D-029]맹산현(孟山縣) : 맹산현은 지금의 맹산군이며, 평안남도 북동부에 소재하고 있다. [주D-030]양덕현(陽德縣) : 양덕현은 지금의 양덕군인데, 평안남도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왕세자는 희천에서부터 계속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하고 있다. [주D-031]동궁께서 …… 잤다 : 《선조실록》 선조 25년 7월 2일과 3일 기사에 “왕세자가 맹산에 있다.”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때 왕세자는 맹산이 아니라 더 남쪽인 양덕 주위를 순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탁의 〈피난행록〉과 《선조실록》의 왕세자 관련 기사들을 비교해 보면 날짜의 차이가 생기는데, 정탁의 기록이 더 정확할 것이다. [주D-032]곡산(谷山) : 곡산은 황해도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원도와 접해 있다. 이날 동궁이 상당히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며, 이때 왜적은 북쪽인 함경도까지 진출하였다. 여기에서 강원도 이천이 상당히 가깝다. [주D-033]이천(伊川) : 이천은 강원도 이천으로 지금의 철원 북쪽에 접해 있는 곳이다. [주D-034]토산(兔山) : 황해북도 남동쪽에 끝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당시 왕세자가 있던 이천 및 개성과 모두 접하고 있다. [주D-035]가포(價布) : 군역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이 그 대신 군포에 준하여 바치던 베이다. [주D-036]그를 …… 들었다 : 이는 왕세자를 강계로 모시지 않고 다른 곳으로 모신 최흥원ㆍ유홍 등 신료에 대한 논핵이다. 정탁 등은 이달 27일 장계를 올려 이에 대해 변을 하고 있다. [주D-037]재상(宰相) 일행 : 왕세자를 호위한 영의정 최흥원(崔興源)과 우의정 유홍(兪泓)을 가리킨다. [주D-038]철령(鐵嶺) : 임란 당시 강원도와 함경도를 잇는 고개였지만, 지금은 강원도 회양군과 고산군을 연결하고 있다. 철령을 기준으로 북쪽을 관북이라 하고 동쪽을 관동이라 한다. [주D-039]적성(積城) : 지금은 황해북도에 속하지만 개성의 북쪽과 사리원의 남쪽에 자리하여 경기와 지리적으로 가깝다. [주D-040]성천(成川) : 평안남도 남쪽에 있으며, 평양과의 거리가 가깝다. [주D-041]신계(新溪) : 지금의 황해북도 신계군이다. 왕세자가 있던 강원도 이천군과 행정 구역이 접해 있으나, 신계군과 북쪽으로 행정 구역이 접해 있는 곡산군에도 신계라는 지명이 있어 오늘날의 신계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선조실록》 25년 7월 28일 기사에 이날 “왕세자는 신계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록은 그 후 거의 한 달간 왕세자가 어디 있는지 기록하지 못했는데, 29일 기록부터 며칠간은 왕세자가 있는 곳이 결자(缺字)로 처리되어 있다. 다만 《선조실록》 25년 8월 1일 기사에 왕세자가 이천에서 성천으로 옮겨 갔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 25년 9월 기사에는 왕세자가 강동(평양 인근)에 갔다가 성천으로 갔다고 하였다. 정탁의 〈난중행록〉에서는 이 시기에 왕세자가 계속 곡산 부근을 행차한 것으로 나와 있다. [주D-042]탕약기(湯藥器)인 …… 하나 : 초아(招兒)는 죽을 끓이거나 약을 걸쭉히 데워 달이는 넓은 솥 종류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내의원에서 관리하는 기물이므로 독을 검출할 수 있도록 은으로 만든 것이다. 천자(天字)니 황자(黃字)니 하는 것은 솥의 크기이고, 평(平) 또는 쇄(鎖)는 솥 고리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주D-043]부험(符驗) : 이와 관련된 내용이 《선조실록》 25년 7월 25일 기사에 보인다. [주D-044]강동(江東) : 지금의 평양시 강동군으로, 당시 평양의 서쪽에 있었다. [주D-045]길을 …… 이르렀다 : 정탁의 이 기록에 따르면 1592년 7월 28일 강원도 이천을 출발하여 8월 4일 성천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사이 왕세자는 대부분 곡산 지역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날은 하루 만에 곡산을 넘어 성천으로 간 것이다. 성천과 곡산은 하루 만에 갈 수 있지만 거리가 꽤 멀다. [주D-046]허통(許通) : 노비가 면천되어 관직에 나가는 것을 말한다. [주D-047]조보(朝報) : 조보는 승정원에서 재결 사항을 기록하여 반포하였던 관보이다. [주D-048]안변(安邊) : 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면이다. 군청 소재지이며 경원선과 동해 북부선이 나뉜다. [주D-049]덕원(德原) : 원산 북쪽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천군(文川郡)에 속해 있다. [주D-050]문천(文川) : 원산 북쪽의 문천군으로, 문천군을 넘으면 바로 함경도이다. [주D-051]피란(避亂) : 정탁은 책의 제목에서부터 대부분 ‘피난(避難)’이라 하였지 ‘피란(避亂)’이라 한 경우는 드물다. 피난(避難)은 재난ㆍ재앙을 피하는 경우이고, 피란(避亂)은 전쟁을 피해 옮기는 경우이다. 이는 임진왜란을 전쟁이라 여기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도적들의 침탈이라 본 것이다. [주D-052]관문(關文) : 관문이란 동등한 관부의 상호간 또는 상급 기관에서 하급 기관으로 보내는 공문서이다. [주D-053]이 장계 : 권징과 박진의 장계를 가리킨다. [주D-054]행문이첩(行文移牒) : 관청에서 공문서를 발송하여 사건이나 일에 대해 알리거나 알려주도록 하는 것이다. [주D-055]연안(延安)과 배천(白川) : 지금의 황해남도 연안군과 배천군이다. 이 지역은 경기도의 바로 위쪽 지역이면서, 지금의 개성과 해주를 동서로 연결하는 위치에 있다. 중화는 바로 평양의 남쪽 지역이다. [주D-056]삼등(三登) : 대동강 상류에 있는 지명인데, 현재는 평양시 강동군 삼등리이다. [주D-057]종정(從征) : 원래 정벌을 나서는 것인데, 여기서는 동궁의 행차에서 온갖 잡일과 노역을 한 것을 말한다. [주D-058]개록(開錄) : 개록이란 상급 기관에 문서를 보낼 때, 문서의 후반에 이름이나 의견을 적어 보내는 일을 말한다. [주D-059]인의(引儀) : 통례원에 속하며, 의식에서 식순에 따라 구령을 외치는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 문관 벼슬이다. [주D-060]허의후(許儀後) :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사람으로 명나라 조정에 “조선이 왜에게 나귀를 바치고 왜와 함께 명나라를 범(犯)하려 한다.”라고 몰래 보고한 자이다. 《宣祖實錄》 [주D-061]부기한다 : 아래의 글은 설번이 명나라 조정에 올린 글을 부기한 것이다. 이 글은 정탁의 〈피난행록(避難行錄)〉 이외에도 《난중잡록(亂中雜錄)》에 거의 모든 부분이 실려 있다. 그런데 《선조실록》에는 설번이 사신으로 온 기록이 1592년 8월 28일 기사에, 명 황제가 조선에 보낸 칙서의 내용이 9월 2일 기사에 실려 있고, 《선조수정실록》에도 9월 기사에 나온다. 약포 정탁의 기록과는 시기적으로 약간 차이가 있다. [주D-062]관전(寬奠)ㆍ대전(大奠)ㆍ애양(靉陽) : 이곳은 모두 중국에 있는 지명으로 군사 시설이 설치된 곳이며, 동시에 여진족에 대한 방어 기지이다. 일반적으로는 이 명칭 뒤에 보(堡)라고 함께 이름한다. [주D-063]달로(㺚虜) : 만주족 또는 여진족을 가리키는데, 특히 압록강 서북부와 중국 심양의 북쪽에 사는 여진족, 즉 건주 여진을 가리키는 말이다.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가 조선을 돕겠다고 한 이야기가 《선조실록》 1592년 9월 17일 기사에 나온다. 건주 여진은 후에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심양에 수도를 세워 금나라라 하였으며, 북경으로 수도를 옮겨 청나라라고 하였다. [주D-064]갑옷〔盔甲〕으로 …… 등 방패〔藤牌〕 : 회갑(盔甲)은 전투용 복장 즉 철 조각을 이어 붙이거나 가죽으로 만든 것이지만, 등패(藤牌)는 전투 기구로, 등나무나 단단한 금속을 넣어 만든 방패이다. [주D-065]봉심(奉審) : 왕명으로 선왕(先王)의 능 또는 묘를 살피는 일이다. [주D-066]연안(延安) : 현재 황해남도에 속해 있는데, 개성과 해주의 사이에 있다. [주D-067]패배의 분 : 이일은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 순변사가 되어 왜적과 싸웠으나, 상주와 충주 등에서 잇달아 패하고 평안도까지 후퇴하였다. [주D-068]빈객(賓客) :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2품 벼슬이다. 세자시강원에는 좌빈객(左賓客)ㆍ우빈객(右賓客)ㆍ좌부빈객(左副賓客)ㆍ우부빈객(右副賓客)이 있다. [주D-069]권강(勸講) : 임금이나 세자를 모시고 경전의 강의하는 일이나 그 일을 맡은 사람을 지칭한다. [주D-070]관방(關防) : 국경 수비를 말한다. 지역마다 당번을 정하고 일정한 시기를 정하여 국경 수비를 한다. [주D-071]첩보(牒報) : 서면으로 상부에게 보고하는 일이나 그 보고서를 말한다. [주D-072]용천(龍川)에서 봉산(鳳山) : 용천은 황해남도이고, 봉산은 황해북도인데 그 거리는 서로 가깝다. 이 두 곳은 모두가 평양 남쪽이다. 즉 평양에 왜적이 증원된다는 것이다. [주D-073]직부(直赴) : 왕이나 세자가 직접 활쏘기 시험을 하여 절차 없이 곧장 무과의 전시(殿試)를 보러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주D-074]겸필선(兼弼善) : 필선(弼善)과 함께 세자시강원 정4품의 벼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