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 금-토 고치령에서 죽령까지 다녀온 대간산행 감상문입니다. 이번에는 링크하지 않고 그냥 텍스트만 올려봅니다. (그래서 사진은 없습니다)(저의 블로그에는 사진과 함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에필로그에 담았습니다. 함께하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의 행복을 빕니다.
천년샘물 올림 ---------
백두대간마루걷기 서른두번째 고치령에서 죽령까지 : 자유, 평화, 사랑을 위한 행진 ♡ 언 제: 2009 12. 11~12 ♡ 누구랑: 산죽회 대간2기팀 ♡ 어디로: 고치령 출발(03:15) ~ 마당치(04:12) ~ 늦은맥이(06:41) ~ 상월봉 능선(07:26)~아침식사 (07:41~08:18) ~ 국망봉(08:28) ~ 어의곡삼거리(09:35) ~ 비로봉(09:46) ~ 제1연화봉(10:32) ~ 연화봉(11:10) ~ 제2연화봉(11:45) ~ 죽령(12:50) ♡ 얼마나: 9시간 35분 산행거리:24.8km (1) 12월 희망으로 시작한 한해가 저녁노을처럼 저무는 마지막 달. 인위적인 구분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평범한 우리네가 느끼는 감정은 평소와는 확연히 다르다.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에는 그렇고,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는 없고-- 그동안 한 일들을 마무리는 해야 하는데 여의치 못하고-- 나의 12월은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많았고, 마무리 할 것도 있고-- 연초 야심차게 시작했던 대간산행은 사실상 끝이 났다. 설악산 구간 2군데를 남겨두고 있지만 고의로, 아니면 개인적 사정상에 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자연조건, 더하여 인위적인 장벽 탓에 더 이상 진행하기 어려운 사정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나의 대간행은 오늘이 그 마지막 구간이다. 때문에 스스로 축하도 할 겸 해서 술한병이나마 준비하려고 했건만 퇴근 후 아이 일까지 챙겨주다 보니 기본적인 짐 챙기기에 급급해야 했다. 벌써 1년. 처음 대간행을 시작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고스란히 되새기며 나는 오늘도 산행에 나섰다. 그동안의 이야기는 모든 산행이 다 끝난 후 정리할 기회가 있을 터. 오늘은 사실상 마지막 대간행인 고치령에서 죽령까지 걸으면서 느낀 감상들을 적어보기로 한다. (2) 좌석리의 밤은 평온하다. 작은 소공원에서 홀로 밤을 밝히고 있던 주황색 가로등이 일행을 반긴다. 그렇게 차갑지 않은 바람. 하늘은 별들이 숨어 있다. 그 영롱한 빛을 자랑하고 싶겠지만 구름이라는 놈이 이곳 소백의 산아래 마을까지 눈길을 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나보다. 졸음에 겨운 몸짓으로 간단히 에너지 보충을 하고 이것저것 채비를 갖춘다. 이어 들머리인 고치령으로 일행을 데려다 줄 트럭이 선다. 저분, 이제 대간꾼들 사이엔 유명인사 다 된 듯하다. 지난여름, 혼자 다른 일행들 틈에 섞이어 오늘처럼 이렇게 고치령으로 향했었다. 지금은 겨울. 불과 4개월의 차이건만 모든 것은 극과 극의 상황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귓가에 와 닿는 공기의 느낌, 숲과 나무들의 모습 등등 그동안 숨 가쁜 산행 일정이 이어졌다. 그 틈에 가장으로써 아이들과 내자의 이런 저런 요구에도 따라야 했고-- 오직 금년 안에 모든 대간일정을 끝내고 내년에는 내년에는---- 마음 편하게 가고 싶은 곳을 가겠다는 그런 생각 때문에--- 고치령 마루는 조용하다. 4개월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그땐 저 고갯마루에 외로이 자리한 산신각을 밝히는 촛불하나는 있었다. 무속인의 차량인 듯 한 승합차 한 대도 주차해 있었지. 그러나 지금은 겨울. 슬픈, 아니 단종과 금성대군의 애달픈 이야기를 간직한 사당은 그렇게 혼자 이 추운 고갯마루를 안고 있다. 이전 세월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슬픈 영혼들이 떠돌고 있을 고개를 이제는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산꾼들이 그저 밤공기를 헤치며 서성댄다. 트럭에서 내려 간단히 몸을 푼 후 들머리로 진입한 시간은 3시 20분. 이제 근 10시간에 이르는 긴 산행을 이어가야 한다. 조금은 다른 기분. 금년의 마지막 대간산행, 그리고 정들었던 이들과의 마지막 공식 대간행 이라서 그런 것인가. 짧게는 한달에 두 번, 길게는 한달에 한 번씩 만나는 일행들이었지만 이제는 닉네임도 얼굴도 알만한데 대간길에서 만나는 경우는 다소 드물게 될 것 같다. 산을 찾는 마음이라서 그런가. 언제나 밝고 친절하고 다정했던 일행들. 언제나 대간을 생각할 때면 그들 얼굴들이 그려지리라. 그 땐 혼자서 미소를 지어 보겠지. (3) 길은 촉촉이 젖어 있다. 저녁 무렵 비가 온 것인가? 좁은 산길의 낙엽도 잎을 모두 떨어뜨려낸 작은 나무들도 수정 같은 빗방울들을 담고 있다. 바람도 거의 없다. 빗물이 얼지 않은 것으로 보아 비록 산일지언정 영상의 날씨를 보이고 있으리라. 우선은 n2s 짚업티에 버프로 목을 감싸고 만약을 대비해 이어밴드를 둘렀다. 어차피 움직이면 이내 땀으로 범벅이 될 터. 약간은 추운 듯한 기분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선두에서 대장뒤에 바싹 붙었다. 단출한 일행이기에 선두와 후미의 구분도 없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대장 뒤에 서게 된 것이다. 산은 커다란 높낮이도 없다. 가벼운 걸음으로 몸을 풀기에는 아주 적당한 산길. 그런 산길이 이어졌다. 밤. 달도 별도 없는 어두운 밤. 걷기 좋은 산길이라 그런지 뒤이어 오는 일행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밤공기를 타고 들려온다. 저렇게 산을 즐기시는 분들이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1년 동안 대간길을 걸어온 나. 진정으로 산을 사랑했는가? 산을 즐겼는가? 이쯤에서 되돌아본다. 아니다. 산을 사랑하는 척 했지만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못한 것 같다. 산을 즐기기 보다는 제 몸 하나 이기기 버거워 억지로, 오직 오기 하나만으로 버텨온 것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아홉 정맥은 마치지 않아도 대간 하나 끝낸 것만으로 나는 산을 사랑하는 자세를 충분히 배우고도 남으로라. 더불어 이제는 산을 즐길 수 있게 될 것 같다. 한걸음 내딛고 여유롭게 한걸음 쉬면서도 시간에 큰 구애 없이 걸을 수 있게 될 때 나는 산을 즐길 수 있으리라. 그땐 요란한 장비가 아니더라도 나의 애기(愛機)를 목에 걸고 눈으로만 담던 자연을 기계의 눈에 차곡차곡 담아 보리라. 아름다운 이 자연의 혼까지 담아내 보리라. 물기를 머금은 길은 때론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의지와는 다르게 미끄럼을 타게 하고, 산길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쓴다. 3살 꼬마가 주먹으로 어른을 위협하듯이 그렇게 산꾼을 위협하려 든다. 에이 귀여 운 것~~ 지난 1년. 30여 차례가 넘는 산행. 거리로 따져도 무려 600km가 넘는 산행을 나는 한 켤레 신발로 버텨왔다. 눈이 오고 비가와도 늘 나의 몸의 일부가 되어준 국산 업체의 신발. 어느 새 바닥을 닳아 있고 옆구리 고무는 한 몸이 되어있던 가죽과 이별하여 틈을 벌리고 있다. 묶음 끈도 이제는 작은 고리 속을 뚫고 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낡아있고--. 창갈이라도 한 번 하려 했지만 바쁜 산행일정 속에 그 기회마저도 갖질 못했다. 오늘, 일행과의 금년 마지막 산행일인 오늘. 나는 그동안 나의 일부였던 그 신발을 벗어두고 몇 해 전 12월 추운 어느 날, 몰래 숨겨둔 비상금을 탈탈 털어 내자 모르게 나로서는 굉장한 거금(?)을 들여 산 신발을 신고 왔다. 무엇보다 그동안 고생한 나의 신발에게 잠시 휴식할 시간도 주고, 이번 구간은 암릉이 거의 없는 이른바 육산구간이기에 오랫동안 쉬고 있던 이 아무아무 신발에게도 주인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주기 위해 기꺼이 그 신발을 신고 온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대가는 가혹했다. 물 건너온 신발이라서 그런지 나의 발에는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래서 그런지 폭이 넓은 나의 발이 마음껏 숨 쉬고 활동하기엔 비좁은지 자꾸만 발의 안쪽을 눌러오는 것이었다. 이런--괜히 이 신발 신고 왔나? 초반전에 이런데 오늘 하루 산행을 어쩌지? 걱정, 불안감--. 아무튼 내색할 수 없는 발의 고통이 나를 괴롭혔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려나? 그러나 이 신발로 지리 종주와 더불어 천왕봉을 남북으로 횡단한 적이 있는 지라 우선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무슨 도리가 있으랴. 마당치까지 이어지는 길은 겨울답지 않았다. 촉촉한 가을비에 젖은 숲길 같은 곳. 그러나 고도를 높여갈수록 길은 상황이 달랐다. 우선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달려있던 물방울들이 점차 얼어가고 있었다. 이런 정도라면 산길을 오를수록 상고대가 피어있을 것은 뻔한 것. 오늘 소백의 능선도 우리 일행에게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얀 분단장을 하고 있을 터. 열아홉 신부가 눈부시게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다소 곳이 앉아 입장순서를 기다리듯 그렇게 일행을 기다릴 지도 모른다.
산길이 높기를 더해감과 더불어 점차 걷기가 어려운 상황으로 변해갔다. 언제적 내린 눈인지 모를 눈들이 하필이면 등산로를 따라 군데군데 쌓여있어 이놈들을 피해 가기가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바람이란 놈이 여기저기 내린 눈들을 길 쪽으로 사정없이 몰라 놓았고, 빛이 거의 들지 않은 음지녘은 녹지도 않아 산꾼들의 발을 푹푹 빠지게 해 놓은 것이다. 이놈들을 피해가려면 잡목들이 자리 한 언저리로 지나쳐야 했고,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잡목가지들은 심술을 부려 이 귀하디 귀한 산꾼들의 얼굴을 간간이 때리기도 한다. 고연놈 들-- 녹지 않은 눈은 그렇다고 꽁꽁 얼지도 않아 여지없이 산꾼들의 신발을 금방 젖어들게 만들고 있다. 아직 초반인데 이렇게 신발이 다 젖었으니-- 앞서가는 대장을 따라가랴, 요리조리 눈 피하랴, 뒷사람이 멀어진 것 같으면 가끔씩 돌아보랴-- 아무튼 여유보다는 적절한 긴장감이 피로조차 잊게 한다. 조금은 쉬어감직도 하다만 어둠에, 능선을 지난 차가운 바람에, 쉬는 것도 여의치 못한 탓인지 그저 걷기만 한다. 드디어 ‘대장님~~쉬어갑시다~~’는 산들레님의 외침이 들리고 바람이 조금은 숨죽인 듯 한 능선 언저리에서 일행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뒤에서 건네는 배한조각을 입에 넣으니 한결 낫다. 늘 이렇게 베푸는 사람이 있어 단체산행은 즐겁다. 이제 어둠 속에서 과일 한조각이라도 나눠먹은 즐거움은 당분간 없을 듯싶다. 대간산행이 아니라면 야간산행을 할 기회도 적어지고, 밝은 낮 산행이라면 그냥 앞서 훌쩍 가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처럼 여겨지던 일들도 이렇게 어느 순간부터는 하나의 기억으로 남아 되새김질을 해야만 생각나는 것이 우리의 인생사던가. 신선봉 갈림길에 이르면서 제법 나무들에 상고대가 피어나고 있었다. 산을 가득히 메우고 있던 안개, 보다 정확히는 작은 물방울들이 나무에 달라붙어 찬바람을 맞으니 저렇게 하얀 꽃을 피운다. 자연의 신비가 별것인가. 안개속의 습기와 찬바람, 그리고 습기가 자리 할 거처만 있으면 저렇게 하얀 꽃들이 여지없이 피어난다. 나무가 가진 원래의 꽃이 아니라 흰색의 꽃, 자연은 생존을 위한 꽃을 피우지 않더라도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해 내는 것이다. 신선봉 갈림길을 지나면서 녹지 않은 눈은 제법 많아진다. 아무래도 북쪽 사면이라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고 바람도 많이 불어 녹지 않은 듯하다. 아직 어둠은 여전하다. 시간은 7시가 다 된 듯 한데 아직 소백의 북쪽 언저리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늙은맥이재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단단히 채비를 해야 했다. 길은 물론 산은 온통 눈 천지고 사면의 나무들은 모두 백색의 드레스를 입고 한껏 자랑을 하고 있다. 행인이 지난 발자국이 거의 없다보니 길을 찾아 눈을 헤쳐 올라야 하는 산길. 일행은 멈춰서 눈산행에 대비한 채비를 갖춰야 했던 것이다. 일단은 스패츠도 하고, 찬바람에 대비한 재킷도 입어야 하고, 장갑도 제대로 다시 챙기고--
산도 나무도 모두 흰색. “안뇽하세요~~ 앙드레*이에요~~”로 비음 섞인 인사를 하시던 어느 분이 생각난다. 이 순백의 세상에 그분을 기억해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껏 방송에서 본 정도인데-- 그렇다. 한 사람의 아이덴티티는 이렇게 강하다. 어떤 이유로, 특히 나쁘지 않은 이미지로 다른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다는 것. 이건 행복이다. 대단한 영광이다. 그분은 그러할 진데, 이 몸은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누군가에게 기억될 수 있을 까? 모를 일이다. 산행중 특별한 기억이 될 만한 일을 남에게 해 준적도 없고, 일상을 살아가며 그저 조용히 두드러지지 않게 없는 듯 살다보니 어느 누구에게 기억되기는 쉽지 않으리. 이제부터라도 기억되는 사람으로 남게 해 볼 까? 아니다. 나는 그저 조용히 드러내지 않고 사는 것이 나만의 아이덴티티 이다. 사방은 나뭇가지위에 가득 피어난 상고대천지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앞사람 발자국 맞추기에 급급해도 온천지에 설화가 가득하니 행복하다 오욕에 찌든 마음까지 하얗게 변한다. 그래서 순백의 아름다움이라 하는가. 그래 순백의 아름다움. 이 순간이나마, 적어도 이 순백의 세상에서 산행하는 동안이나마 티끌하나 없는 순수한, 그 깨끗한 영혼이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너무나 하얀 백지상태의 영혼. 소백의 능선을 행하는 긴 오르막은 눈과의 싸움이다. 물론 눈은 그저 움직임 없이 쌓여 있는 것에 불과하니 결국 스스로와의 싸움이라고 해야 할 까? 도전과 응전이 아니라. 도전의 여정. 무수한 사람들의 응전이 없는 도전을 위해 걸어왔으리라. 금요일, 자료실에 들렀다. 야심차게 세운 금년 목표. 대간완주와 더불어 100권 이상 독서. 다행이 이 두 가지 목표를 사실상 달성한 셈이다. 아무튼 지난 금요일 대출한 책 중 하나가 산악작가 박인식의 ‘사람의 산’. 거기서 익숙한 이름하나를 발견했다. 산악인 ‘이태식’ 설악산 토왕폭아래에서의 눈사태로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분이지만 그분이 그처럼 유명한 산악인일줄은 미처 몰랐다. 토왕폭등반의 전설이라는 사실을-- 단지 내가 기억하는 그분은 가금 파도소리도 드리고 갈매기가 끼욱 끼욱 소리내며 나르는 마산 부둣가 허름한 공장건물 2층의 방에서 웅크리고 있던 모습이다. 더하여 방안에 텐트도 있었고, 버너로 라면을 끓이고 계시던 모습도-- 언젠가 내가 갔을 때, “네가 00이냐? 많이 컸다”는 단 한마디-- 아주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분은 그 첩첩산중 나의 고향마을에서 토담집 하나를 나누어 살았었다. 1985년 설날 아침. 산악사고로 사망했다는 짤막한 TV뉴스가 영상으로나마 그를 본 마지막이다. 책 속에서 그 형님의 이름 석 자를 보았을 때 그 설렘은 특별했다. 그래서 퇴근길 지하철 내에서 불편한 안경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글을 읽었다. 언젠가 그분의 행적을 간단히 정리해 볼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눈쌓인 비탈길을 열심히 오르다보니 서서히 날은 밝아온다. 어둠과 안개. 두요소가 지배한 혼돈 속에서 이제 하나를 벗어나니 그나마 살 것 같다. 사면에서 만난 상월봉 가는 길. 어떻게 할 까? 잠시의 갈등. 아무도 가는 이가 없다. 길이라도 빤히 나 있다면 오를 수도 있겠다만 작은 짐승발자국 하나 없다. 그래! 간들 무엇 하리. 이렇게 안개가 심한 날 조망도 제로(0)일텐데-- 그래서 그냥 국망봉 길을 올라간다. 드디어 능선에 올랐다. 아무래도 이전과는 바람의 세기가 조금 강해졌다. 그러나 길을 걷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한 바람은 아니다. 다행이다. 아침먹을 시간이 다되었는데 바람까지 심하게 분다면 그야말로 잠시 다리쉼을 하는 것도 여의치 못할 것 아닌가. 겨울 안개 때문에 보이는 것은 없다. 오직 눈과 하얀 상고대를 인 나무들뿐이다. 국망봉 가는 길 어느 쯤. 바람이 조금 외출한 듯한 곳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추운날 산행시의 가장 큰 애로는 식사 하는 것, 어떤 땐 도시락에 손이 얼어붙을 정도인 경우도 있다. 다행히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니다. 장갑을 벗은 손이 그렇게 시럽지 않았다. 다행이다. 선바위님의 삼각깁밥이며, 산들레님의 따뜻한 쑥국이며. 포스트님의 따뜻한 물이며-- 그 틈에서 도시락을 내어 입에 넣는다. 따뜻한 물에 말아서 대충-- 일생에 한 한번 뿐인 식사이거늘 이렇게 대충 떼우면 안되는데-- 그래도 제왕처럼 먹자. 멋있게 폼나게-- 연이어 일행들이 도착하고 저마다 자리를 잡는다. 눈밭에서 라면도 등장했지만 이미 포만감이 자리하고 있어 정중히 추가 투입을 사양했다. 필요한 량을 넘어서면 그만큼 움직임도 둔할 것 같아서--
뒤이어 도착한 일행들이 식사를 마치기 전에 먼저 일어섰다. 가만히 있으니 한기도 느끼고 해서 빨리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먼저 가겠다는 인사를 하고 막 출발하려는 순간. 그야말로 금년 대간 마지막 산행을 엄청난 불상사로 마감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커다란 바위를 밟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바위위에 자리한 투명한 얇은 얼음이 나의 발을 사정없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스틱을 잡고 있던 손을 얼른 짚었으나 나의 얼굴과 바위는 불과 1cm미터의 공간만을 남기고 뽀뽀, 아니 엄청난 입맞춤을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던 것이다. 고치령 고갯마루, 단종과 금성대군을 모신 산신각에 목례를 하며 무사산행을 빌지 않았던들 나의 얼굴은 온전하지 않았을 것이며, 적어도 이빨은 몇 개는 부러져 엄청난 금액의 돈을 요구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아찔한 순간. 천우신조로 커다란 사고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조금만 신의 가호가 없었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산행이 될 뻔 것이다. 휴우--. 그래! 하나도 조심이고 둘도 조심이지-- 국망봉을 향한 길, 여전히 눈쌓인 산길과 하얀 상고대가 가득한 나무들. 바위는 얼음이 얼어있어 상당히 미끄러웠다. 유비무환이라고 아이젠을 신었다. 조금의 불편함보다는 안전함이 상위의 가치 아니던가. 다른 사람들은 잘만 가는데 ‘자라보고 놀라 토끼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이미 한차례 큰 위기를 모면한 이몸으로서는 걸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울 밖에-- 자욱한 구름과 겨울 아침 안개 탓에 이 아름다운 소백의 능선에서 보는 조망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굽이치는 산과 들의 조망을 대신해 저렇게도 아름다운 상고대를 피워낸 것은 아닐까? 하얀 상고대마저 없었다면 이번 소백산행은 그야말로 그 의미가 90%는 줄어들었을 터. 그나마 이런 모습을 연출한 이 대자연이 고마울 뿐이다. 국망봉.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에 안고 삼베옷 하나만 입은 채 서라벌을 뒤로하고 천리 길을 떠났다는 마의태자. 그가 저 남쪽 신라땅을 굽어보며 눈물을 흘렀다는 곳. 그래서 국망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던가. 대간길 여기저기에 마의태자와 관련되어 전해지는 옛이야기가 한둘이 아니고 보면 그의 슬픔이, 그의 한이 대간마루의 고봉들처럼 크고 깊다는 것 아닐까.
이곳 소백은 신라불교의 길목답게 봉우리마다 불교식 이름을 얻어 있고, 그 너른 품안에 명찰을 안고 있는 곳이지만 한편에서는 한과 설움의 아픈 전설을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치령은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먼 영월 땅에 유배돼 어린 나이에 숨져간 단종과, 조카와 같이 유배되어 목숨을 잃은 금성대군의 영혼이 쉴 곳을 찾는 곳이며, 이곳 국망봉은 이미 그 이전 나라 잃은 설움을 눈물로 달래며 신라땅을 떠난 마의태자의 설움이 당긴 곳이 아니던가. 더불어 죽령은 숱한 이별과 아픔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애초 불국정토를 꿈꾸며 그 이름 하나 하나까지 붙여 주었던 곳이 각종 한이 굽이굽이 서린 곳이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어쩌면 이런 불교적 이상을 품고 있는 곳이기에 많은 사람이 찾아들고 또 그 아픔을 토해낸 곳일 수도 있다. 아무튼 소백은 봉우리 봉우리의 이름과 그 속에 자리한 아픈 옛이야기들이 있어 더욱 소중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산하임에 틀림없으리라. 국망봉 표지석은 차디찬 바람 탓에 하얀 상고대로 덥혀있다. 마치 마의태자가 입고 온 색이 바라고 여기 저기 헤어진 삼베옷 마냥 그렇게 하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먼저 길을 나선 일행들 중 카메라를 지니고 잇던 분이 아무도 없는 관계로 증명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멍뚱멀뚱하다 길을 간다. 국망봉을 지나 비로봉을 향하는 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철쭉이 한창 피어나던 계절에 소백을 찾았을 땐 그저 평범한 능선길 이었던 것 같은데 무수한 철쭉 군락과 이리저리 오르내리는 산의 품새가 예사롭지 않다. 하긴 부처가 계신 비로에 이르는 길인데 그리 쉽사리 다다를 수 있다면 묵언정진, 면벽수행, 10년 좌선 등등의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불국의 영역에 다다르기 위해서 이정도 고통만 감내해야 한다면 이몸도 정작에 도인, 아니 도를 깨치고도 남았을 것이리라. 금방 다다를 것 같은 길은 한참을 오르내리고서야 비로봉이 보이는 갈림길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 유명한 소백산 칼바람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곳. 채비부터 단단히 해야 했다. 그 모진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아니나 다를 까. 어의곡으로 내려서는 삼거리 이정표에 다다랐을 때는 바람의 세기를 여실하게 보여주려는 듯 이정표에 다닥다닥 붙은 상고대가 그야말로 매서운 칼날처럼 날카롭다. 습기가 달라붙자말자 매서운 찬바람이 사정없이 얼려버렸다는 듯 그렇게 서릿발처럼 붙어 있다. 와! 대단한 바람이여-- 행여 떨어트려 뒷사람들이 볼 수 없을까 두려워 조심조심 움직이며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는 소백의 아름다운 초원을 가르는 계단위로 올라선다. 계단위 고무판조차 얼어 그냥 지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아이젠 덕분에 그런대로 무사통과. 바람은 날려버리려는 듯 거세게 몰아친다. 그 유명한 소백산 칼바람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나. 오히려 반갑다. “바람아 불러주어 고맙다.” 비로봉 가는 길은 초원을 걷는 느낌이다. 비록 풀들은 말라 차디찬 눈 속에 갇혀있지만 그래도 고개를 내민 놈들이 정신없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소백능선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이 아름다운 풍광. 이 맛에, 저 모습에, 힘든 산길을 헤쳐 온 산꾼들은 위안을 얻으리라. 보람을 얻으리라. 그리고 희열을 느끼리라. 계단위고 난간이고 심지어 밧줄에 까지 날카로운 얼음덩이들이 바닷가에 드리워진 폐 밧줄에 붙은 어린 홍합들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바람을 이기지 못한 놈들은 휘고 비틀어지면서 까지 그 모양 그대로-- 이참에 김동리의 ‘등신불’이 생각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찌들고 불에 탄 형상 그대로 부처가 된 등신불. 비로봉 가는 길에 얼어붙은 습기 덩어리에서 세상의 온갖 고뇌를 다 안고 숨져간, 그리고 하나의 불상으로 다시 태어난 등신불을 생각한다. 그래! 이 소백산 비로봉, 아니 부처가 산다는 이 봉우리는 인간의 온갖 고통을 대신하는 그런 부처가 머물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일까? 무시로 이사람 저사람이 놓고 간 돌멩이들이 작은 탑을 이루고 있다. 각자 소원을 담아 저 돌멩이 하나하나를 얹어 놓았으리라. “건강” “합격” “승진” “사업번창” 뭐 이런 세속적인 바램을 담아-- '몸의 빛, 지혜의 빛이 두루 비치어 가득하다'는 비로자나불(부처)처럼 이 비로봉이 그 뜻 그대로 온 세상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람은 거세다. 그 바람 속에서 증명사진을 찍기도 싶지 않다. 멋있는 모습, 웃는 모습 대신에 찬바람에 얼굴을 찡그린 모습이 뭐 그리 좋으련만 그래로 佛國에 왔다는 징표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연이어 뒤따르던 일행들이 도착하기 시작한다. 다시 죽령을 향하여 출발. 연하봉 내려가는 능선은 비로봉을 오를 때 보다 더 고통스럽다. 오름길에서는 바람이 옆으로 불어와 견딜만 했지만 이곳에선 정면으로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모자를 눌러썼다. 그래도 아주 낮은 기온이 아니기에 견딜만 하다. 긴 초원의 능선. 길 우측엔 주목나무들이 바람에 떨고 잇다. 고산에 자란다는 특성 때문에 타고난 숙명 인 듯. 늘 남들보다 눈도 많아 맞고, 바람도 많이 안는 주목. 그런 인고의 세월을 견딘 덕에 그 줄기는 붉게 빛나고, 천년을 살아 내고, 죽어서도 천년을 간다고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길지 않은 생에 많은 풍파를 거친 이 몸도 저렇게 끈질 지게 오래 살 수 있을 까?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관건이거늘 이 몸 살아있는 동안이나마 열심히 노력하고 열심히 사랑하고---무엇이든지 열심히 해야 겠는데-- 길은 아름다운 초원을 벗어나 다시 상고대 가득 피어난 잡목 숲으로 접어든다. 여전한 서리꽃. 진종일 이 순백의 꽃들 속에서 노닐자니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저 산아래 세상에, 아니 우리가 등지고 나온 저 도회의 거리엔 아직 무수한 인간 군상들이 떠돌고 있는데, 우리만이 이 아름다운 황홀의 세상을 거니는 특권(?)을 누리고 있으니-- 이는 밤을 잊고 먼 거리를 달려온 부지런한 자들에 대한 자연의 보상이리라. 자연이 내린 선물. 그래! 부지런한 사람만이 이 선물들을 받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것이리라. 서리꽃의 숲속이나마 이제 바람이 거의 없다. 때문에 재킷을 벗어 배낭에 넣고 짚업티 하나로만 길을 가기로 한다. 한결 몸이 가볍다. 외부를 감싸고 있던 옷하나를 벗었을 뿐인데 몸은 가뿐하다. 인간을 잔뜩 감싸고 있는 겉치레만 걷어내도 이 세상은, 이 세상 사람들은 한결 업그레이드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해 질 까? 나 또한 가식의 세계에, 허식의 습관에 익숙해져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산에서나 아니 마음 속 깊숙한데서나마 그 허례와 허식을 걷어내자. ‘주홍글씨’처럼 박혀 늘 따라 다니는 그놈의 이 세상살이를 훌훌 벗어 내자. 제1연화봉 표지판이 보인다. 봉우리는 저 위인데 왜 표지판은 이 길목에 있는가. 길이라도 나있다면 올라가 보련만 이렇게 먼발치에 이름표를 남기고 정장 봉우리는 찾는 이 없다. 접근금지인가? 그래서 그냥 간다. 남쪽 사면. 아주 흐린 햇볕이지만 그래도 영상의 기온을 보이는지 눈이 녹는다. 인간이 느끼는 것은 그렇지 못한데 자연이라는 놈은 미세한 차이도 용케 인식한다. 그래서 단 영점(0.) 몇 도의 차이만 있어도 녹아내리고도 하고 얼기도 하고-- 남쪽 비탈의 눈은 녹고, 북쪽 비탈은 그대로 얼어 있고-- 같은 시간 같은 곳에 내린 눈이지만 작은 위치에 따라 그들의 운명은 확연히 달라진다. 남쪽에 내린 눈은 영주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 700리 굽이굽이 돌고 적시어 구포를 지나 다대포 바다로 들 것이고, 북쪽에 내린 눈은 그 오랜 시간 이 산에 머물다가 단양을 통해 남한강으로 흘러 양평을 지나고 양수리를 거쳐 서울을 돌아 김포만으로 들 것이다. 불과 몇 미터, 몇 센티의 차이로 이들은 아주 다른 길을 가야 한다. 물론 거대한 바다에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어디 이러한 다른 운명이 이들 분수령에 내린 비나 눈뿐이겠는가. 같은 집에서 같은 부모사이에 태어난 형제도 그 운명이 다를 수 있고, 시골학교에서 6년동안 같이 자란 동무들도 서로 완전히 다른 생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보니 이번 가을 모임엔 대간산행을 이유로 참서하지도 못했다. 그날 귀가 간지러웠던 이유가 그것일까? 제법 긴 계단을 내려간다. 힘들게 올라오는 일행들 몇이 보인다. 저들 내려가는 우리가 얼마나 부러울까? 그러나 이 시간 하산을 위해 새벽부터 잠안자고 땀흘리며 올라왔다는 사실을 생각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내려섰던 길은 연화봉을 행해 다시 올라간다. 몇 걸음 앞서간 듯 하던 태수님과 선바위님은 그 종적을 찾기 어렵다. 아프다는 무릎이 다 나아 오늘은 날아갈 것 같은 것인가? 포스트님과 영일만님 이렇게 셋이서 눈길을 밟으며 간다. 볼일 한번 이라도 볼라치면 멀어지는 일행들 때문에 마음 놓고 쉴 수도 없다. 이것 역시 삶의 교훈이라고 해야 하나? 같이 길을 가다고 한 범 멈칫하면 뒤쳐진다는 것-- 우리집 애들이 이런 것을 좀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부모의 욕심 탓인가? 요즘들이 애들에 대한 불만이 자꾸만 높아만 간다. 때론 감정을 주체하기도 힘들고--. 나의 부모님들도 그랬을 까? 그렇지는 않으셨는데-- 영일만님은 전화 통화에 바쁘다. 기다려 줄 수도 있으련만 따라올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앞서 갔다. 드디어 연화봉에 올랐다. 진흑속에서 자랄망정 깨끗하고 순수하다는 연화. 그래서 불교적 상징의 하나가 된 꽃. 그 하얀빛, 연분홍빛 꽃봉오리가 그려진다. 제법 많은 산꾼들이 올라와 있다. 넓은 시야.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없다. 여전히 안개구름이 온 산하를 덮고 있기 때문. 이 소백의 능선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산줄기들을 보고 싶었는데, 소백은 순백의 서리꽃만 보라는 뜻인지 좀처럼 하늘을 열지 않는다. 도솔도 비로도 묘적도 그리고 상월도 그저 마음속으로만 보일 뿐이다. 아! 이 안타까움이여-- 저 산아래 어디 쯤엔가가 고향인 포스트님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 역력하다. 그 커다란 연화봉 표지석 뒤에 작은 (산火조심)팻말 하나가 있다. 그리고 눈을 조금만 크게 떠보면 글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노산 이은상 님의 ‘산악인의 선서’ 산악인의 선서 이 은상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노산 선생의 말씀처럼 대자연에 동화되어 아무런 속임도 꾸밈도 없이 자유, 사랑, 평화의 세계만을 구현할 수 있을 까?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절망과 포기도 없이 나아갈 수 있을 까? 구도의 일념으로 정진하는 새내기 수도승처럼 이 긴 여정의 대간길을 시작한 것은 자신을 이겨보자는 것이었는데, 이제부턴 자유, 평화, 사람의 참세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가치 부여를 다시 해 봐야겠다. 좀 더 거시적이고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산행한 것이라 말해야 겠다. 이제부터 산길은 산길이 아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는 물론 자동차까지 달릴 수 있는 곳. 연화봉을 내려와 불과 4-50미터쯤 가면 이제는 더 이상 산길이 아닌 것이다. 연화봉위에 이동통신설비 공사를 하는지 몇 분의 사람들이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다. 그분들. 이렇게 배낭메고 산에 오는 우리들을 보면 ‘팔자 좋다’고 생각할 까? 그들이나 우리나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은 동등한데--. 다만 그 일하는 시간이 다를 뿐이지 않는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길 한편에 천문대가 자리하고 있다. 저 둥근 돔에 들어가 밤하늘 별을 보면 얼마나 아름다울 까? 어린 시절. 쏟아질 듯 가득한 하늘의 별을 보면서 나는 작은 망원경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 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래서 어린이 잡지 중간쯤 누런 종이에 녹색으로 인쇄된 통신판매 광고를 보면서 망원경과 현미경을 너무나 갖고 싶어 했었다. 결국 그 어떤 것도 가질 수 없었지--. 아마 그 때 나에게 그것들이 주어졌더라면 나는 화학이나 생물, 물리학, 천문학을 좋아했을 지도 모른다. 고리타분한 인문학 대신에 살아 숨쉬는 자연과학을 했을 것이다. 설사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결코 그것들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지독히 가난한 산골 촌부의 아들이었기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라면 다시 되돌아가고 싶으련만-- 뒤따르던 영일만님는 급하게 앞으로 가신 것일까? 일행은 포스트님과 둘 뿐이다. 터덜터덜 이런 저런 얘기하며 길을 걷는다. 자동차 바큇자국이 난 쪽으로만 눈이 녹았다. 그래서 그 틈으로 사람들이 다닌다. 내려가는 사람. 오르는 사람 모두. 길은 그런 것이다. 아직 죽령에 도착하려면 한참을 가야 한다. 서두를 이유도 없고 해서 느긋하게 걸어 본다. 여전히 서리꽃은 가득하고 하늘의 구름은 이제야 비켜나는 듯하다. 길게 내려서는 길이었으면 했는데 시멘트 포장길은 한껏 위로 몸을 솟구친다. ‘이래서는 안되는데--이게 뭐야--’ 마음은 약간의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확트인 제2연화봉의 전망대다. ‘그럼 그렇지. 오르막에 대한 대가는 있어야지--’
넓은 테크위에 도착해 배낭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과일 하나를 꺼낸다. 달콤한 과즙이 목줄기를 타고 넘어 간다. 다시 기운이 난다. 바람과 습기가 만들어 놓은 꽃은 나무마다 어김없이 피어 있다. 갈색 낙엽송 위에 핀 서리꽃은 이른 봄 핀 복숭아꽃 같은 느낌이다. 점차 구름은 비켜나 하늘을 열어 준다. 덕분에 저 건너 산봉우리도 모습을 드러낸다.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가슴속 가득한 모든 것을 쏟아내 버리고 싶다. 다시 내려서는 산길. 아니 포장길 카메라를 들고 오르는 산꾼이 적지 않다. 아름다운 소백의 풍광을 담기 위함이겠지. 그래 나도 이후부턴 저런 여행을 하고 싶다. 어둠을 헤치고 산을 오르기 보다는 카메라를 들고 여유롭게 자연을 담는 여행-- 긴 다리품 끝에 굽이 헤엄치는 죽령길이 보인다. 퇴계도 넘고 안향도 넘고 이율곡도 넘었을 고개가--- 더불어 나의 대간행의 마침표도 보인다. 아듀-- <에필로그> 죽령휴게소에 도착해 회장님 내외분께서 끓여놓으신 돼지김치볶음은 일품이었습니다. 작은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소주와 함께 먹는 그 맛. 실레를 무릅쓰고 두그릇이나 비웠지요. 얼큰하게 술이 취해 왔습니다. 덕분에 버스에서 잠시나마 곤히 눈을 감을 수 있었지요. 금년 대간산행의 유종의 미를 거둔다고 '민트님'께서는 케잌을 준비하셨고, 대장이신 '무량태수님'은 캔맥주를 돌렸답니다. 그리고 처음 참여하신 체약산님은 금일봉을 찬조하셨지요. 아 참. 저랑 대간 입산동기인 '안나님'은 지난 밤 범계역 탑승 장소까지 나오시어 그 좋다는 복분자를 건네 주셨고, 덕분에 일행은 아주 맛나게 잘 마셨답니다. 아무튼 이들 모든 분들의 수고와 정성 때문에 아주 행복한 하루 산행(이틀산행이라고 해야 하나?)을 마쳤답니다. 다시 한 번 이은상님의 글(산악인의 선서)을 되뇌어봅니다. 속임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 평화, 사랑의 참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천년샘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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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랫구간 마루금을 모두 밟은 것을 추카 드립니다. 남은 2구간안전산행 하시고, 완등하는날 한잔 하시죠 그리고 어김 없는 후기 대단하십니다. 저는 산가는 것 보다 후기 쓰라면 더 어려울것 같습니다. 아침 식사후 출발할때 정말 아찔 했습니다 천만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많이 도와 주심을 다시 한번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실 내년에는 바쁜일이 많아 금년처럼 자유롭게 산행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시간내어 다닌 것이랍니다.
천년샘물님도 일년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감동깊은 산행기도 고맙고요...대간병에 중독되여 무리한 산행도 해보시고... 아뭏턴 금년 한해는 천년샘물님 께서는 잊지못할 한해가 될것 같군요. 새해에도 기억에 남는 멋진산행을 무탈하게 종주하시길 바랍니다.
힘들때 마다 도와주시어 감사합니다. 아직 내공이 쌓이자면 멀었지만 아무튼 한해동안 그나마 지구력은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천년샘물님의 후기를 읽다보면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새롭습니다. 백두대간이 끝났다고 산죽회 버리지 마시고 일요산행에서 뵙겠습니다.
사실 백두대간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많은 산행중 하나일 뿐이겠지요. 가급적 시간되는 대로 대간팀에도 붙어보고(아주 여유롭게--) 다른 산행도 해야지요~~~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시기에 이렇게 멋진 글로 천년샘물님을 표현하시나 봅니다. 산행후기 잘 보았습니다. 내년에 바쁘실거라고 하시는데 그래도 짬을 내셔서 일요산행때 뵙기를 바랄께요.
그래도 산행은 계속해야 하는데---. 일요산행도 짬짬이 즐겨야 하겠지요--
2기도 가끔 놀러 오세요.. 가족같은 분위가 물씬 나는 2기가 그리워져서 내년에는 시간나는대로 저도 출정합니다.. 천년샘물님의 후기는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남쪽 구간 다 했나요? 산친구 없으면 연락하세요--
갑자기 천년샘물님의 산행후기가 궁금하여 열어보니 벌써많은 분들이 선독을한 이제서야 봅니다.
역시 꼭 읽어야하는 멋진글입니다. 그날의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대간종주 축하드리며 또 볼날기다립니다.
감사합니다. 당분간은 대간행에서는 볼 수 없겠지요? 조만간 함께 하길 기대합니다. 즐거운 성탄,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만사형통 하옵시길---
그래도 2기에 가끔 오실꺼죠~~~~멎진후기 남겨주셔서 그날의 힘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네요..
감사합니다. 이제는 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