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11) 롤러장
디스코텍 대체 장소… 즉석 미팅도
박자가 빠르고 흥겹고 멜로디가 쉽고 중독성이 강하며 맛으로 치면 한여름 달큼하고 시원한 탄산음료 같은, 이른바 유로댄스 음악이 쿵쾅거린다. 디제이가 신청곡 받는 곳도 있다. 혼자 가는 법은 거의 없고 친구들과 몰려가야 재밌다.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금방 어울려 논다. 초등생을 포함한 10대가 99% 이상이다. 자녀가 여기 가는 걸 극구 말리거나 금하는 부모는 드물었으나 그렇다고 내켜하는 건 아니다.
웬만한 도회지 동네마다 성황을 이루던 롤러스케이트장, 줄여서 롤러장, 당시 발음대로 '로라장'의 전성기는 1980년대다. 그러나 영화 '친구'에서 까까머리 단발머리 고교생들이 젊음을 발산하던 그 롤러장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실외 롤러장도 있었지만 실내 롤러장이 제격이었다. 음향시설 좋고 바닥 재질 좋은 운동장급 '럭셔리' 롤러장이 있는가 하면, 바닥 고무가 찢어지고 주름 잡힌 동네 상가 2층 영세 롤러장도 많았다.
인라인스케이트만 타본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발밑 앞부분에 스토퍼(브레이크)가 달려 있고 네 바퀴인 롤러스케이트가 촌스러워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80년대 많은 청소년은 폼 나는 '자가용'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롤러장은 롤러장 그 이상이었다. 댄스 음악에 몸을 맡길 수 있으니 디스코텍의 대체 장소다. 단순히 '타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모두 섞여 다방구 같은 놀이도 했다. 내내 이성 친구 손잡고 타거나, 처음 만난 이성에게 타는 법 가르쳐준다며 슬쩍슬쩍 스킨십도 감행했다. 즉석 미팅이 가능할 때도 있었다.
'롤러스케이트장의 요란한 풍경, 라디오 효과처럼 이것은 또 계절의 웬 계절 위조일까.
… 어떻게 저렇게 겨울인 체 잘도 하는 복사 빙판 위에 너희 인간들도 결국 알고 보면 인간모형인지 누가 아느냐.' 이상(1910-1937) 수필 '산책의 가을'에 이렇게 롤러스케이트장이 등장한다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당시 서울 파고다 공원 근처에 실외 링크장이 들어서 있었다고 하니 역사가 제법 유구하다. 그때나 80년대나 '요란한 풍경'은 마찬가지.
김훈 에세이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며'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아래와 같이 롤러스케이트로 바꿔놓고 싶은 분들이여, 세월은 또 그렇게 흘러갔다. '나는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젊은이들의 뒷모습을 볼 때 이 대도시 속에서 원시림을 느낀다. 두발로 땅을 딛고 걸어 다니던 종족에 견주어 볼 때, 발바닥에 바퀴를 달고 미끄러져 가는 종족들의 세계는 얼마나 가볍고 경쾌한 것인가. 그래서 롤러스케이트는 인간 직립 수억만 년 역사 속의 혁명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개벽이다.' ▣
[추억 엽서] (12) 가족계획
'영구불임시술자 우대' 아파트 분양도
'무턱대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알맞게 낳아서 훌륭하게 기르자',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내 힘으로 피임하여 자랑스런 부모되자', '신혼부부 첫 약속은 웃으면서 가족계획', '적게 낳아 엄마건강 잘 키워서 아이건강',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출산율 높이는 게 국가의 미래 사활이 걸린 문제로 인식되는 요즘이지만, 여성 1명이 가임기간(15∼49세)에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합계출산율 6명을 절반으로 낮추기 위해 1960년대 중반에는 '3명 자녀를 3년 터울로 낳고 35세 이전에 단산하자'는 3·3·35 캠페인이 시행됐다. 그러나 출산율 세계 최저 수준인 지금은 결혼 후 1년 내 임신하고 2명의 자녀를 30세 이전에 낳자는 1·2·3 캠페인이다. '한 자녀보다는 둘, 둘보단 셋이 더 행복합니다.'
1960년대 초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가족계획사업을 포함시킨 정부의 노력은 이후 20년 넘게 필사적이었다. 가족계획요원들이 방방곡곡에서 교육과 피임술 보급에 나섰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정관수술을 무료로 받으면 훈련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가족계획사업을 둘러싸고 시골마을에서 일어나는 웃지 못할 일들이 펼쳐지는 영화 '잘 살아보세'(2006)에서 마을 이장 변석구(배우 이범수)는 정관수술하고 받은 돈으로 사간 고기를 맛있게 먹는 자식들을 보며 말한다. '지 애비 XX 묶은 돈으로 잘도 처먹는다!'
주공 반포아파트 청약 열기를 다룬 1977년 9월 15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또 어떤가. '아파트 분양에 불임인파. 시술자끼리 경쟁. 현장에서 부인 병원 보내 수술받기도.' 당시 불임시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후순위를 받은 박모씨(71)의 하소연은 이랬다. "45세 이상 사람들은 효과 없다고 보건소에서 무료 시술을 해주지 않는다. 늙은 사람은 아파트에 살아보기도 힘들게 됐다." 공공 부문 건설 아파트 청약에서 영구불임시술자를 우대키로 한 탓에, 영구불임시술자 명의 청약통장에 프리미엄 20만원이 추가로 붙던 그 시절이다.
'폐경기 여성도 불임시술해야 하느냐'는 문의가 빗발쳤다는 그때로부터 20년 지난 1997년에 와서야 영구불임시술자 우대조치가 삭제됐으니, 합계출산율이 72년 4.14명, 82년 2.42명, 92년 1.78명 급기야 2002년 세계 최저 수준인 1.17명으로 감소하는 사이 정부 정책은 또 그렇게 뒤늦기만 했던 것인가. 무릇 시대의 변화는 이문구 연작소설 '우리 동네'의 시골 민방위 훈련 시간처럼 잠깐이다. '한시버텀 니 시간 인디, 출석 부르는 디 한 시간, 담배 참 한 시간, 부랄 까라는 소리(정관 수술 권고)루 한 시간씩 잡어먹다 보면 잠깐인걸 뭐.' ▣
[추억 엽서] (13) 빵집
단팥빵과 우유 앞에 놓고 설레던 미팅
한 조각 빵이 근심하며 먹는 잔칫상보다 낫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이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사랑은 잼처럼 달콤하지만 빵 없이 잼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이런 명언명구들로 볼 때 빵은 빵 이상이다.
'빵집 그 이상의 빵집'으로 궁핍의 시대에 선망의 눈길을 모았던 빵집이 있다. 제과명장이자 제과업체 회장 김영모(55)씨는 다니던 초등학교 앞 빵집 진열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 허기를 달랬고, 빵 부스러기 하나라도 얻어먹는 날이면 그 환상적인 맛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사랑이 꽃피는 빵집, 일명 '얄개시대' 빵집도 있다. 단팥빵, 소보로빵, 크림빵과 우유나 엽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수줍게 맞은편을 힐끔거리는 교복 입은 여고생과 남고생들. 사실상 금지된 남녀학생 간 미팅이 어느 정도 공공연하게 그러나 눈치 보며 이루어지던 곳. 탈선(?)이 있으면 단속도 있는 법. 암행 감찰에 나선 선생님에게 들켜 학교·학년·반 그리고 이름을 대야 했던 불운한 청춘도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의 무늬 속에 빵집 하나가 각별하게 새겨지는 일도 없지 않다. 시인 이시영은 '리치몬드 제과점'에서 "지금도 리치몬드를 생각하면 첫사랑의 애인처럼 달콤한 군침이 돈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출근길에 "오븐에서 막 첫 과자를 꺼낸 듯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골목을 올랐고, 누가 전화를 하면 "달뜬 음성으로 거기 마포서 옆 리치몬드에서 기다리라 해놓고 부리나케 달려 내려가곤" 했으니, 그 출근처란 마포경찰서 근처에 있던 창작과비평사였다.
각자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빵집 이름은 각자가 속한 세대의 기억이다. 일제강점기부터 60년대 중반까지 ○○당이 주류였다. 1945년에 창업한 태극당과 고려당, 그리고 1947년에 창업한 영일당(크라운제과 전신)이 대표적. 이 시기에 창업한 빵집으로는 뉴욕제과(1945)와 독일빵집(1952)도 있다. 60년대 말부터 ○○당, ○○제과, ○○빵집 등이 각축을 벌이다가 70년대에 들어와 외래어가 유행했으며, 80년대에는 ○○제과가 대세였고 90년대 이후 베이커리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도회지 웬만한 동네마다 하나쯤 있었던 독립 제과점은 프랜차이즈 제과점에 밀려 이제 매우 드물다. 김천 역전사거리 뉴욕제과점 막내아들 김연수가 자전적 단편 '뉴욕제과점'(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서 전하는 그 쇠락의 정황이 사뭇 긴 여운을 남긴다.
"뉴욕제과점은 우리 삼남매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필요한 돈과 어머니 수술비와 병원비와 약값만을 만들어내고는 그 생명을 마감할 처지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며칠에 한 번씩 팔지 못해서 상한 빵들을 검은색 봉투에 넣어 쓰레기와 함께 내다버리고는 했다. 예전에는 막내아들에게도 빵을 주지 않던 분이었는데,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것이었던가?" ▣
[추억 엽서](14) 쥐잡기 운동
"쌀을 지켜라"… 국가가 벌인 쥐와의 전쟁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나 선생을 할 때나 다 쥐 잡는 날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쥐를 잡아서 꼬리를 잘라 학교로 가져가야 했다. 아이들마다 한 달에 몇 마리씩 할당량이 있었다. 그때는 참으로 쥐가 많고 크기도 했다. 쥐는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었다. 우리는 시궁창에서 죽은 쥐를 건져 꼬리를 잘라 말리곤 했다."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시인 김용택이 전하는 쥐꼬리 수난사다.
1966년 3월 2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쥐를 잡아 꼬리를 보건소로 가져가면 마리당 5원씩 보상하기로 했다니, 보상금 노린 쥐사냥꾼도 없지 않았을 듯. 보사부와 농수산부는 물론 사실상 전 정부 차원의 국가사업이었고 가장 강조된 사항은 '일시에 다 같이 잡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전국적으로 쥐약 놓는 날짜와 시각까지 제시됐다. 쥐약은 각 동네 반장 이장을 통해 무상으로 공급됐고 '미끼는 부락 공동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쥐 잡기가 정부 주도로 시작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라지만 군사작전을 방불케 조직적 거국적으로 시행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고, 보건위생보다 식량자급 목적이었다. 1970년대 초 통계로 우리나라의 쥐를 1억 마리로 쳤을 때 쥐들이 축내는 양곡이 연간 32만t에 달했다. 1970년 1월 26일 시작된 제1차 쥐 잡기 사업에서 '4300만 마리를 잡아 106만6천 석의 양곡 손실 방지 효과를 올렸다'는 당시 대통령에게 보고된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면 가히 놀랄 만한 효과다. 각 도별로 마릿수까지 할당 지시했던 그 시절이다.
매년 봄가을 학생들은 쥐 잡기 표어와 포스터를 만들고 쥐꼬리 수집하느라 바빴다. 쥐 잡기가 어디 쉽기만 했을까. 쥐를 많이 잡는 쌀집에서 쥐꼬리를 얻거나 오징어 다리를 불에 그슬리거나 재를 묻혀 발로 비벼 쥐꼬리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물에 불리거나 삶아 말리고 흙에 문지르기도 했다. 오징어 다리에 물감을 묻히는 위조 예술작품(?)마저 있었다.
그렇게 잡은 쥐에서 가죽을 모아 가공한 수출품도 있었으니 지금은 전설이 된 일명 '코리안 밍크'다. '대한뉴스' 1972년 제868호를 보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표창한 수출유공업체 한국모피공업은 "못 쓸 것으로 알려진 쥐가죽을 여자 오버코트, 모자, 핸드백 등 각종 옷감과 장신구 자재로 가공하여 올해 25만 달러 수출을 목표로 수출 진흥에 힘쓰고" 있었다.
시인 황인숙(50)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쥐 잡기에 대한 작문을 하면서 쥐덫에 잡힌 쥐가 죽음을 당하는 걸 보면서 느낀 불쌍함을 썼다고 한다. ('인숙만필') 쥐 잡기 장려 취지의 작문 시간에 쥐에 대한 연민을 글로 적은 어릴 적 시인의 마음씀이 천생 시인이다. ▣
[추억 엽서] (15) 동시상영관
스크린엔 비 내리고 발 밑으로는 쥐가…
동년배 작가 박완서와 최일남은 젊은 시절 어느 날 서울 삼선교 근처 동도극장에서 서로 스쳐 지났을 가능성이 있다. "개봉관에서 실컷 상영한 다음에야 차례가 돌아올망정, 동도극장은 명화만 틀었지. 거기서 '미녀와 야수'도 보고, '자전거 도둑'도 보고, 마르셀 까르네 감독의 '인생유전'도 보았지."(최일남 '돈암동')
"동도극장이 단골이란 건 엄마에게도 반 친구들에게도 비밀이었지만, 따로 친구들하고도 곧잘 극장출입을 했다. 어둠 속에서 교복의 흰 깃은 단박 눈에 띄게 돼 있어서 날쌔게 안으로 구겨 넣고 시치미 떼고 앉았다고 누가 학생인 걸 모를까마는 세상을 감쪽같이 속여먹은 것 같은 쾌감을 맛보곤 했다."(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배우 이순재가 대학시절 하루 종일 죽치던 곳도 동도극장이다. 기억 저편의 이름들 대왕, 성남, 계림, 미아리, 삼양, 아폴로, 세일, 영보, 천지, 동일, 연흥, 우신, 동양, 평화, 오스카, 새서울, 중화, 금성. 재개봉관을 이류극장, 동시상영관을 삼류극장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모두 19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락했다. 바야흐로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의 시대가 오고 있었던 것. 이류 개봉관으로 분류되던 미아리 대지극장, 영등포 명화극장, 서대문 화양극장 '영웅본색'의 전설도 그야말로 전설이 됐다.
동네 상가 삼류극장 풍경도 마찬가지. 동네 안경점 예식장 광고할 때부터 줄곧 비 내리는 열악한 스크린 위로 관객들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는 자욱한데, 앞 사람 머리가 스크린의 아래 절반 가까이를 가리기 일쑤다. 발 밑으로 쥐가 기어 다니고 휴게실 난로 위에선 오징어가 몸을 비튼다. 국산 에로영화 한 편 '때리고' 달아오른 얼굴을 휴게실에서 식히노라면 어느 사이 스크린에는 주윤발이 쏘는 총탄이 난무한다. '미성년자 관람불가'에서 '불'자는 무소용.
시인 배용제는 '거추장스러운 날들이 주머니 속에서 뒹굴던 한때, / 그때 나 삼류극장의 어둑한 통로를 걸어 / 환각의 세계로 잠입했었네'(삼류극장에서의 한때1)라 말하고 시인 유하는 '파고다 극장을 지나며―80년대의 끄트머리에서'를 통해 이렇게 회상한다. '끈질기게 그 자리를 지키는구나, 파고다 극장 / 한땐 영화의 시절을 누린 적도 있었지 / 내 사춘기 동시상영의 나날들 / 송성문씨 수업 도중 햇살을 등에 업고 빠져나온, / 썬샤인 온 마이 쇼울더, 그날의 영화들은 / 아무리 따라지라도 왜 그리 슬프기만 하던지 / 동시상영의 세상 읽기가 / 나를 얼마나 조로하게 했던지.' ▣
[추억 엽서] (16) 주택복권
"준비하시고~쏘세요!"
과녁이 빠르게 돈다. "준비하시고~쏘세요!" 눈 깜짝할 사이 과녁에 꽂히는 화살. 복권을 사지 않은 이들도 괜히 살짝 긴장한다. 짧은 스커트 미녀들이 어떤 부분에 꽂혔는지 화살을 살짝 들어 보여주고 싱긋 웃는다. 지켜보던 많은 복권 구매자들의 시름을 초대가수의 노래가 달래준다. 이 유구한 방식은 1979년 이후 '쏘세요'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떠올리게 만든다는 이유로 공이 빠져나오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주택복권 추첨 방송 시간 다방 안은 술렁거렸다. 미스 김의 살가운 당첨 응원에 커피에서 쌍화차로 주문 급변경하는 '사장님'들도 많았다. 한 주 내내 주머니 속 복권 한 장을 만지작거리며 고된 하루하루를 견뎠다는 이들도 많다. 흥청망청 당첨금 탕진에 가정파탄 패가망신은 요즘 로또 시대와 마찬가지.
우리나라 정기발행복권의 출발 주택복권은 1969년 당시 판매가 100원 당첨금 300만원으로 월 1회 50만 장 서울에서만 발행됐다. 서울 서민주택이 200만원 안팎이던 시절이다. 발행 목적은 저소득층 주거안정사업 지원. 주 1회 발행은 1972년부터였고 1등 당첨금은 1978년 1000만원, 1981년 3000만원, 1983년 1억 원, 2004년 5억 원이 됐지만 복권 통폐합과 로또 열풍 속에 2006년 폐지됐다.
주택복권 당첨되려면 꿈이 필수였나 보다. 돼지 한 마리가 새끼 수십 마리를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왔다는 식의 돼지꿈은 고전적이고, 조상님 꿈, 모르는 여인이 자기 집에 들어와 애를 낳는 꿈, 배우자 몰래 외도하는 꿈, 집이 홀랑 불타버리는 꿈, 총 맞고 죽는 꿈, 산신령이 나타나 복권 사라 말해 줬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꿈 등 다양하다.
평생 복권과 담 쌓고 지내다 우연히 산 복권이 당첨되기도 했다지만 상당수 당첨자들은 매주 구입하는 열성파들이었다. 당첨에 얽힌 꿈은 열성파들의 자기충족적 예언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간절히 바라며, 당첨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일종의 주문을 건 결과가 범상치 않은 꿈이었을 듯. 작가 한승원이 '어린별'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복권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되살피게 한다.
"가난한 구두닦이 청년이 주택복권을 한 장 샀는데, 그것이 당첨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들떠서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었고, 술도 많이 마셨어요. 얼근하게 취한 다음 그 청년은 구두닦기 도구들이 들어 있는 통을 강물에 던져버리며 말했습니다. '이제 잘 가거라, 이 더러운 구두닦기통아. 나는 너 없이도 잘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집에 들어간 다음 술에서 깨어나 보니 당첨된 복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첨된 복권을 그 구두닦기통 속에 넣어 놓았던 것입니다." ▣
[추억 엽서] (17) 교복
쑥쑥 자라던 시절… 한 벌로 3년 버텼다
1983년 교복자율화 시행 이전 교복은 교복 그 이상이었다. 요즘 중고생들의 각양각색 교복과 '그 시절' 교복은 의미가 사뭇 달랐다. "이 옷을 중학교 3년 졸업할 때까지 입어야 혀. 알았제?" 중고교 시절을 동복 한 벌, 하복 한 벌 각각 한 벌씩으로 지낸 시인 김용택의 어머니 말씀이다. 3년 입을 옷이니 처음 살 때는 몸보다 훨씬 크다. '3학년쯤 되면 그럭저럭 옷이 맞았다. 그때쯤 되면 옷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지가 길어 걷고 다녔기 때문에 3학년이 되기 전에 이미 접은 속이 떨어져서 어머님은 재봉틀로 튼튼하게 단을 만들어주곤 했다.' (김용택 '이 옷으로 고등핵교 3년을 마쳐야 혀')
남학생 교복은 턱 찌르고 목 욱죄는 딱딱한 목둘레를 고리로 채워야 했다. 한자 중(中) 또는 고(高)자 금속제 표지가 달린 모자 쓰고 교표 새겨진 띠쇠 달린 허리띠 차고, 멜 수 있는 끈은 없고 손잡이만 달린 학생가방을 들면 등교 준비 끝. 목둘레 고리 풀고 웃옷 단추 몇 개 풀고 소매 말아 올리고 모자 삐딱하게 얹은 반항 패션도 많았지만 등교 때 완장 찬 규율부 학생들 눈길은 매섭기만 하다.
'하얀 춘추복을 입을 계절의 여학생들은 멀리서 보면 모두가 순결하고 예뻐 보였다. 남학생들이야 가을, 겨울, 봄 세 계절 내내 검은색 동복을 입었으므로 이름표의 모양과 색깔로만 학교를 구분할 수 있었지만 여학생들은 달랐다. 쎄일러복도 있었고 허리를 잘록하게 매서 아랫단의 주름을 강조한 옷도 있고 자주색이나 남색 끈으로 리본을 매기도 했다.' 은희경 소설 '마이너리그'가 전하는 여학생 교복 사정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인가.
'총총히 정독도서관을 향해 비탈진 언덕길을 올라가느라 땀이 슬맺힌 교복 차림 여학생들의 쇄골 안쪽 살갖.' 교복 입은 여학생 훔쳐보던 그 시절 남학생들 가슴 설레게 만드는 작가 김연수의 관찰이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교복을 개조하는 학생들도 제법 있었다. 바지 아래통을 넓혀 나팔바지를 해 입고 교모 챙을 한껏 구부리고, 핀으로 치맛단 줄여 입는 게 고전적이다.
교복 튜닝의 최고수들은 멀쩡한 교복 안과 바깥을 뒤집어 입는 속칭 '우라까이'(뒤집기를 뜻하는 일본어 우라가에시)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복 뒤집기가 반드시 멋 내기 개조만은 아니었다. 오래 입어 색이 너무 바랬지만 새 교복 살 형편이 못될 때, 형제끼리 물려 입을 때도 이루어졌다. 이럴 경우 보통 왼쪽에 있는 웃옷 윗주머니가 오른쪽에 있게 되니 창피했다는 이들도 있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이 유명한 구절은 고등학교 졸업식 때 교복 찢고 연탄재 뒤집어쓰는 파괴로 과격하게 실현되곤 했다. ▣
[추억 엽서] (18) 월급봉투
이것저것 제하면 남는 건 빈 봉투…
"가불하는 재미로 출근하다가 월급날은 남몰래 쓸쓸해진다. 이것저것 제하면 남는 건 남는 건 빈 봉투. 한숨으로 봉투 속을 채워나 볼까. 외상술을 마시면서 큰소리치고, 월급날은 혼자서 가슴을 친다. 요리조리 빼앗기면 남는 건 남는 건 빈 봉투. 어떡하면 집사람을 위로해줄까."
월급쟁이의 애환을 노래한 최희준의 '월급봉투'(1964)다. 누런 봉투에 손으로 쓴 월급명세가 적혀 있고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린다'는 문구가 찍힌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현찰. 가불이나 외상값이 많지 않다면 월급날 퇴근 발걸음만큼 가벼운 게 또 있을까. 그러나 월급날 한 잔의 유혹은 즐겁고도 치명적이었으니, 외상값 갚으러 술집 갔다가 다음 달치 외상을 지기 일쑤였다.
가장들은 월급날 저녁 밥상의 반찬 가짓수를 기대해도 좋았다.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를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그날 유독 공손하고 우렁찼다. 아내에게 월급봉투를 건넬 때의 뿌듯함이란. 그러나 내색하기 힘든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명세표와 돈을 꼼꼼히 대조하는 알뜰한 아내를 어떻게 속인다? 월급봉투 하나를 더 구하거나 해서 명세표를 위조할 수만 있다면. 학창 시절 성적통지표 조작으로 조작의 역사를 마감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아!
첫 직장에서 처음 받은 월급봉투는 월급봉투 그 이상이었다. 부모님께 빨간 내복도 사드리고 동생에게 용돈도 쥐어주고 애인과 영화라도 한 편보다 보면 금방 바닥나는 쥐꼬리 월급이었지만, 마음만은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첫 월급봉투는 사회인으로서 제 앞가림 겨우 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월급날 귀가 만원버스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했다. 은행에서 월급을 위한 현금을 인출해가는 경리직원을 노린 날치기 사건도 종종 있었다.
월급봉투의 시대가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은행들이 온라인 전산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한 1980년대 초라고 한다. 중소 제조업체들 상당수는 이후로도 월급봉투를 유지했지만, 주거래 은행의 압박성(?) 권유를 이기지는 못했다. 군 장병들의 월급도 중앙경리단에서 각급 부대를 거쳐 월급봉투에 담아 지급하던 것에서, 2006년부터 곧바로 장병 개인 온라인 계좌로 입금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1957년부터 44년을 봉직하며 받은 월급봉투와 급여명세서를 빠짐없이 모아두었다는 김민수 명예교수. 이 노학자에게 월급봉투는 무엇일까? 그것은 월급봉투에 적힌 액수의 가치로 결코 환원시킬 수 없는 삶의 곡절과 영욕과 흘린 땀과 그 밖의 또 다른 소중한 그 무엇이리라. 최희준의 '월급봉투'가 겪은 운명을 빼먹을 뻔했다. 심의에 걸려 노래가 나온 지 1년 뒤에 금지에 묶이고 말았으니 이유인 즉, '남한 인민들이 이렇게 못산다'는 식으로 북한에 이용당할 소지가 있다는 것. 월급봉투도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였다. ▣
[추억 엽서] (19) 상이용사
나라 위해 '전쟁의 상처' 짊어진 그들
오른팔이 잘려 갈고리를 대신 단 상이군인이 와서 술하고 돈을 내놓으라며 번득이는 갈고리 팔을 허공에 마구 휘둘러대고 떼를 부린다. 연씨는 상이군인을 이렇게 다독거린다. "왜 비굴하게 그들에게 당신들 때문에 불구가 됐으니 이것 내놔라 저것 내놔라 하는 구차한 손을 벌린단 말이오? 총대 메고 싸우던 시절의 기백으로 되돌아가 남은 수족이나마 성한 사람들보다 갑절로 더 움직이면서 장하게 살아봅시다." 김소진의 장편소설 '장석조네 사람들'의 한 대목이다.
팔에 갈고리를 달거나 의족을 하고 목발을 짚기도 한 상이용사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기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부정적이다. 남의 집 대문을 무단으로 밀고 들어와 대청마루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다짜고짜 돈을 요구한다. 시내버스 안에서 갈고리로 의자나 손잡이를 보란 듯이 탕탕 두드리며 물건을 강매한다. 훈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며 식당이나 유흥업소에서 술 달라 밥 달라 생떼 쓰며 무전취식한다. 아무 상점에나 들어가 돈을 갈취한다.
이런 상이용사의 갈고리 손은 폭력, 행패, 생떼, 무법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상이용사에 대한 부정적 편견 탓에 취직이 여의치 않아서,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됐다는 거짓말을 하고 겨우 취직할 수 있었다는 상이용사도 있다. 그러나 6·25 전쟁의 상흔을 평생 짊어지게 된 상이용사들의 일리 있는 항변, 우리가 귀담아 듣지 않았던 항변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우리의 생활을 정부가 제대로 챙겨주지도 않고 변변한 일자리를 얻을 수도 없으니 구걸이라도 해야 했다.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도 없으니 때로는 거칠어지기도 했다.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가? 바로 당신들과 나라를 위해서다. 전쟁 통에도 온전한 몸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냉대하는데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 6·25 전쟁뿐이겠는가. 일제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가 한쪽 팔을 잃은 아버지와 6·25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 아들의 '수난이대'(하근찬 소설)가 있는가 하면, 월남전에서 부상당하거나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 받는 상이용사도 있다. 박진성 시인의 '밤나무에 묻다'에 나오는 '명수 아버지'가 더 이상 없기만을. "절름발이 명수 아버지는 간암 선고 받고 목매달았다. 신촌리 윗말 밤나무에 매달려 밤이 되었다. 어린 내 볼에 그가 얼굴 부비면 밤송이처럼 환하게 열리던 공포, 한쪽 다리에 월남 원시림 품고 그이는 금강으로 갔다."
물론 전시(戰時)가 아니더라도 평상시 작전이나 훈련 수행 중 큰 부상을 당해 장애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 베이징에서 열릴 장애인 올림픽에 탁구 대표선수로 참가하는 해병대 출신 상이용사 이해곤(55) 선수. 1988년 서울 대회 이후 여섯 번째 참가하는 그가 다시 한 번 금메달의 영광을 누리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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