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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번저널' 10주년 행사로 이뤄진 '수필 공모전'에 당선되어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올릴까 말까 고민하고 창피하지만, 좋게 잘 읽어주세요~~~
제 글은 1막으로 시작합니다. 1막의 의미는 이민 온 첫해부터를 의미하오니,
읽으실때 이해의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멜번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나의 첫 이민 인생은 죽어라 하고 오직 Hello 와 Thank you 만 들리다.
이민을 준비하면서 영어회화 새벽반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만해도 난 영어에 대한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영어를 잘해서라기보다는 영어에 대한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없으니
영어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환상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도대체 이민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한국보다는 아이들에게 좋을 것 같았고, 새로운 환경의 삶에 막
연한 도화지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남편의 화려하고 고품격 경력 탓에 영주권이란 걸 손쉽게 받을 수 있었고, 그 이후 4개월 만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뭘 가져 가야 하는지, 뭘 안 가져 가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정보도 없이 장롱에서
부터 오븐까지 무식하리만큼 바리바리 싸서 짐을 실어 보냈다.
내 부모, 형제에게 나의 이민이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운 여름에 온풍기를 미친 듯이 틀어 댄 격이 되어
버렸다.
“가서 뭐해 먹고 살려고 하냐?”, “형제 하나 없는 곳에서 놀기 좋아하는 네가 어떻게 지내려고 하냐?”에
서부터 “너 영어 못하잖아. 어떡해 말할래?”까지 염려와 걱정보다는 그 순간 떨어지기 아쉬운 마음을 작
심하고 내게 쏘아 부어대는 애잔한 말들이 뾰족한 송곳의 극치였다.
그러면서 준비하기 시작한 이민 보따리……
드디어, 비행기 티켓에 적혀있는 날짜가 오늘이구나.
다행히 일요일 오후 시간이라 점심은 친정 식구들과 할 수 있었고, 서너 시간 전에 시댁에 들러 시부모
님께 인사 드리고 뒤로 돌아서는 순간 눈물이 왈~~칵. 시어머님의 ‘잘 살아라’라는 말이 왜 그리 내 작
은 가슴을 더 할 수 없이 오그라들게 만드는지……
엄마가 우는 모습이 창피함 보다는 나의 다짐이 무너질까 봐 아이들 앞에서 더 이상 눈물을 보일 수가
없었다.
도착한 공항에선 마지막까지 마중 나온 친정 대식구들과 형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어른들의 눈
은 이미 토끼 눈으로 변한 지 오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 녀석들은 대궐보다도 넓은 공항이 놀이
터인양, 뛰어다니기에 정신이 없었다.
출국하기 전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를 처음으로 안아 보았다. 그 순간 어린 아이가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큰 소리로 우는 서글픈 울음 소리를 난, 아버지에게서 들었다. 마지막 울음 소리가 가슴에 사무치는 그
눈물은 지금도 내게는 하나의 크나큰 덩어리이자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 나에겐 소리조차 내
지 못할 울음일 텐데……. 그런 막내 딸은 아버지의 울음을 가슴에 안고 돌아섰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큰 조카 녀석이 싸이월드에 올려 놓은 공항 사진에 “아무것도 모르고 신나 하는
조카 녀석들 모습이 더 슬프다”라고 적어 놓은 사진을 보고는 또 한번의 슬픔이 장시간 동안 나를 괴롭
혔다.
다시 안 볼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울음이 멈추지 않는지……공항 직원들에게는 전혀 낯선 광경이 아닐 것
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저렇게 울면서 왜 들 나가지 하겠지?
이유도 모르고 엄마 따라 울기 시작한 둘째와 막내에겐 신기한 비행기 탑승이 금새 눈물 뚝~ 웃음
가득~한 얼굴로 엄마,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장 12시간 만에 도착한 곳이 멜번 공항이다. 짐을 찾고 공항 입국 심사 대에서 뭘 그리 이것저것 물어
보는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뭐라 하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고, 남편 뒤에서 세 아이들과 피난민의 보따
리 같은 짐가방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지켜봐야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우리 가족
은 이민 전에 특별한 사전 답사도 없었고, 그저 남편이 일주일 동안 휘~~리릭 다녀간 곳이 바로 이곳 멜
번이다. 그때의 무식함과 용감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아이러니이다.
그런 멜번의 첫인상은 나에게 그저 청명하게 높은 시퍼런 하늘과 눈 돌리면 온통 초록색 나무뿐이었다.
지나가는 차 소음에 첫날밤은 설쳤어도, 멜번이 처음으로 준 숙제를 우리 부부는 하나씩 풀어야만 했다.
아니, 우리 부부의 숙제라기 보다는 남편의 숙제라고 해야 더 맞는 것 같다.
그 큰 숙제란 서울에서 보낸 짐이 도착하기 전에 집 구하기. 지금처럼 인터넷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다
면 얼마나 좋을까? 부동산에 들어가 Rent lists 을 가져오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였다.
그리고, 이때 내가 처음으로 사용한 영어가 바로 “Can I have a rent lists?” 였다. 성공적으로 lists 를 받
아나오면서 ‘영어! 뭐 별거 아니네’ 라는 끔직하게 못난이스러운 자만감은 당연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 이후로 죽어라 하고 귀를 쫑긋 세워도 오직 Hello 와 Thank you 만 들리고 말하는 이기적인 대화만이
한참을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집을 구하면서 한 번의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우리 가족은 한국인이 거의 없는 조용하고도 조용한 남
쪽 바닷가 근처에 전형적인 오지타운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2004년 8월에 시작한 우리 가족의 이민 역사는 멜번이 던져준 첫 번째의 큰 숙제를 잘 마
무리 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아이들의 숙제로 이어지는데……
제 2 막
드디어 만끽하다.
아이들 학교는 그냥 집 앞에 보내면 되겠지 라는 전형적인 한국 아파트에 사는 아줌마
생각이 예상이 빗나갔다. 첫째가 중학생이라 랭귀지 스쿨의 의무 2텀을 몰랐던 것이다. 다행히 기다림
없이 곧바로 랭귀지 스쿨에 등록을 할 수 있었고, 둘째는 집 앞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과 막내도 집 근처
코너에 자리한 childcare centre 에 등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순조롭고 조용히 자리를 잡아갈 무렵, 큰 녀
석에 생각하지 못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랭귀지 스쿨? 우리 아들녀석에겐 그저 탈선의 한 길목이었을 뿐이다. 수많은 또래의 이민자 아이들이 모
이다 보니, 새롭지만 십대에게 불필요한 호기심과 환심에 눈이 멀어 투우사 하는 성난 소의 뿔처럼 날카
로워진 녀석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밀려드는 쓰나미를 막을 수 없을 듯, 십대의 이기적인 폭풍도 잡
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시간이 지나면 순한 어린양의 얼굴로 돌아오는 것이 순리인지 너무나도 다행스럽
게 일찍이 아들녀석의 깨달음으로 인한 제자리를 찾았다, 한 텀을 더해야 로컬 학교로 보내준다는 랭귀
지 스쿨 교장의 입장에 아들은 반격이라도 하듯이, ‘로컬 학교로 옮기기만 하면 더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말에 도대체, 여기서 누구의 말을 더 믿어야 하는걸까? 교장의 판단 아니면 아들녀석의 판단인지, 갈등
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것처럼, 아들 녀석의 판단을 믿어 로컬 중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그 후 얼마가 지나고, 완벽한 영어는 아니었지만, 첫 Report 에 Advance maths 과정에서 all A 를 받았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English 에서도 all B+ 를 받아왔으니, 어찌 아들녀석에게 믿음이 안 생기겠는가.
고슴도치가 제 세끼 예쁜 것처럼, 나 역시 내 아들에게 그랬다.
조용하고 속 깊은 둘째 역시 영어가 미숙하기는 매 한가지지만 방과 후 여러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
스럽게 호주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더불어 엄마의 친구까지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크나큰 행운을
안겨 주었다.
배낭 메고 엄마, 아빠 오기를 울면서 기다리던 막내도 “엄마! 늦게 데리러 와!” 하면서 눈물 인사 대신 세
상에 하나 밖에 없는 미소로 인사하는 어느 덧 4살짜리 꼬맹이 막내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아가면서, 우리 가족은 주말이 되면 지도 책과 도시락만 들고, 멜번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간 곳이 그 유명한 Great Ocean Road. 장시간의 운전에도 피곤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 웅
장하고 거대함의 광경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반면 세 아이들에게는 “저 돌땡이가 다예요?”라고
시시함을 느낀 첫마디였다. 하지만, 오고 가는 길에 그 끝도 보이지 않는 평원의 들판 속에 양떼와 소떼
는 달력에서나 봐왔던 이국 배경을 실감하는 느낌이란 자연의 감동 그 자체였다.
리틀 펭궨 Parade 로 유명한 Phillip Island 는 또 다른 멜번 야생동물들인 코알라, 와라비, 캥거루 등등 호
주하면 연상할 수 있는 야생 동물들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 내 마음을 더 움직였던 것은
펭귄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 어머니와 같은 진한 모성애라는 것이다.
이렇게 여행가는 곳마다 그 모습과 광경에 반하기도 하지만, 자연이 주는 마음 속 느낌의 선물을 오랫
동안 잊을 수 없었다.
제 3막
왜 여권을 감추지.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의 적응은 페달을 달은 것처럼 무섭게 안착되어갔다. 하지만,
남편과 나는 사소한 말다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잦아졌고, 드디어 남편과 나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40세 넘어 늦은 나이에 취직을 한다는 건 처음 생각과 달리 쉽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남편과 나는 거의
24시간을 껌 딱지처럼 붙어 있는 서로의 눈치 보기에 여염이 없어져 갔다.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잘 기
억은 나지 않지만, 부부싸움이란 게 원래 사소한 것에 목숨 걸고 싸우니 아마도 그런 일상 속에 일부분
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아이들과 나의 여권을 챙기며, 현관문을 부여잡고 남편에서 협박과 유치한 공갈을 친 적도
있었다. 공항에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티켓도 없으면서 그 넘의 여권은 왜 그리 챙겼는지……. 그 이
후 어느 날, 남편이 여권을 어디다 숨겨버렸는지, 한 동안 보이지 않았다.
3년이 되어가면서 아이들의 안정기와 달리 우리 부부에겐 통장잔고가 줄어들 때마다 피가 바짝바짝 마
르듯이 반가워할 수 없는 불안감이 더해져 갔고, 도대체 언제쯤이면 안정적인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의 대한 고민에서 쉽사리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래도, 부모 덕에 한국에서는 큰 돈 걱정, 집 걱정 해 본
적 없었던 우리부부에게는 완전 치명적인 결정타가 아닐 수가 없었다. 이 시기가 우리 가족 이민이래 최
대의 위기이자 남북 전쟁보다도 극한 우리 부부의 38선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남편과 나의 전쟁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복에 겨운 사치스러움이라는걸 깨달았다. 아빠, 엄마 손
에 이끌려 이민을 오게 된 우리 세 아이들이 너무나 잘 자라주고 있는 반면, 우리 부부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은 셋 아이들의 눈과 마음이 무서워 더 이상은 무의미한 싸움을 할 수 없었는데, 하늘의 도움이었는
지, 생각하지 못했던 남편의 40세 넘은 늦깎이 취직이 우리 가족에게 청솔 같은 바람으로 다가오게 되었
다.
지금은 우리 부부에게 그런 부부싸움으로 인한 아픔이 와도
언젠가는,
조금 오래 걸려도,
그 시간이 지나갈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동안의 기억이 세월에 흐름에서 때로는 하나의 추억이 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언젠
가는 지금과 다르게 인생의 주름살과 세월의 흰머리가 늘어선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 속에서 같은 그
추억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지금의 나의 옆 사람이기 때문에......
제 4막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다.
제일 어린 나이에 이민을 온 탓에 막내의 한국어 수준은 실력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형편없다. 말은 하지만, 읽고 쓰는 건 6살짜리 한국꼬마의 수준이
아닌 겨우 4살 정도나 될까 싶을 정도로 막내의 한국어에 대한 고민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런 고민이
아지랑이처럼 타오르기 시작할 때 막내가 만루 홈런을 날렸다.
오랜만에 도시락 싸 들고, Dandenong 산을 가고 있는데, 건강하면 어디 빠질 곳이 없는 둘째와 내가 멀
미를 하기 시작했다. 이 Dandenong 산길이 진부령의 꼬불꼬불 한 길도 아닌데, 심하게 멀미를 하는 것
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왜 점점 더 촌스럽게 변하는지 모르겠다고 남편에게 말하면서도, 둘째와 나는 좋은 공기
도 싫고, 오랜만에 보는 새도 싫고, 그냥 차 밖으로 나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갑자기 막내가 뒤에
서 “엄마, 아빠 나도 멀미해요” 하는 것이다.
남편 왈: “네가 무슨 멀미를 해? 너 지금 말짱한데?”
막내 왈: “아니, 나도 멀미 있다고요?”
“homesick 있잖아요. 나~ 집 멀미 한단 말이에요.”
남편 왈; “어, 집 멀미? 그런 게 어디 있어?”
막내 왈; “homesick, 그게 집 멀미지 뭐긴?”
차에 있던 우리 가족 모두 으하하하하~~~~순간 온 가족이 배꼽 빠져 라고 웃고 있는 중에도 막내는 왜
가족들이 웃는지 영문도 모른 체 뭘 잘못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민 초기에 아이들 학교 보내 놓고, 방과 후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안전부절 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
다. 엄마가 내색하면 아이들이 참고 있던 영어의 스트레스가 쏟아져 나올까 봐, 그게 무서워 힘들어하는
녀석들을 알면서도 철저하게 모른 척 할 수 밖에 없었던 마음이 아팠던 시간들이 있었다. 큰 아이와 둘
째와는 달리 막내는 한국말을 완전히 배우기도 전에 영어를 배워야 하는 혼동이 당연히 있었고, 점점 늘
어만 가는 영어와는 달리 한국어는 가족들 이름도 못쓰는 상황이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동네에 갓 이민 온 한국 가족을 만났을 때 동갑내기인 친구가 한국 책을 줄줄 읽
는 것을 보면서 한국어를 읽을 줄 모르고 있던 5살 우리 막내의 자존심을 건드린 계기가 지금은 소설 ‘선
덕여왕’을 평가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모국어 찾기에 성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막내를 통해서
또 한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언어의 습득은 학습을 통한 배움보다는 자연친화적인 방법이 최고의 효과
최대의 가치라는 것이다.
부모의 선택에 의해 이곳에 와, 다른 두 가지 문화를 익히며 배워가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청국장이 제일 좋다는 막내와 먹거리 풍부한 길거리가 제일 그립다는 둘째, 아직도 한국 음악에
익숙한 큰 녀석,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 한국적인 정서와 호주적인 정서를 잘 이해하며 걸맞게 받아들여
잘 자라주길 하는 마음이다.
제 5막
“엄마 아직도 이거 해?” 라는 말을 듣지만, 그래도 후회라는 말은 쓰지 않겠다.
이민생활 5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눈물 주룩주룩 흘리며 후회하지 않은 시간이 없었다
고 하는 그런 새빨간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다.
영어란 것으로 인해, 눈물 한 바가지 쏟은 적도 있었고, 아들 녀석 방황으로 한 대야 퍼 부은 적도 있었
으며, 사무치는 쓸쓸함을 주체 못해 눈물 바다를 만든 적도 있었다.
영어를 못해 무시를 당한 것보다도 내 스스로에게서 들어나는 자괴감이 더 무섭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
만, 지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잠잠해지는 파도와 같이 우리 가족에겐 편안함의 행복이 이어지고 있다.
대입준비를 앞에 두고 자신과의 승부를 향해 달려가는 아들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싸움
에 견뎌야 할 인생의 첫 과정이고, 한국의 맛과 정서를 가장 그리워하는 둘째도 차근차근 잘 견디어 주
어 지금은 당당히 제자리 매김하고 있고, 가방 메고 Childcare 둥근 창문에 턱 개고 매달려 짜장범벅이
아닌 눈물범벅으로 마음 아프게 하고, 영어는 커녕 대장금 노래를 달달 외워 노래한 막내가 지금은 한해
한해 또 다르게 적응해 가며 맞이한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다섯 번째 맞이하는 해가 되었다.
오늘의 현실은 아이들에게 영어를 배워야 하는 위치로 자리가 바뀐 지 오래됐고, 부엌 귀둥이건, 화장실
선반이며 이것도 모자라, 이부자리 배게 아래에 몇 년째 바뀌지 않는 엄마의 영어 책을 보면서 막내의
무서운 말 한마디 ‘엄마 아직도 이거 해?’라는 말을 듣지만, 이 엄마는 어쩔 수 없는 졸업장 없는 평생 학
생이라야 한다.
무섭게 밀려왔다가 금방 잔잔해지는 파도가 내 자식의 형상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묵묵히 지켜봐 준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하늘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세 아이들에게 얻었으며, 이민 5년 차 평범한
아줌마인 나에게 지금 생각이 드는 건, 여기 호주 멜번에서 내가 살아갈 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 살아갈 날들이 더 소중하기에 지금의 이 순간도, 앞으로도 난, 후회라는 말을 하
지 않을 것이다.
제 6막
제한 없는 경우의 수에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잔소리와 너희들을 믿는 것뿐이다.
생전 전화 안 하는 녀석이 전화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동생들을 데리고 엄마, 아
빠가 외출한 틈을 타 ‘이때다’ 하고 게임이란 게임팩은 거실 한 가운데 모조리 꺼내놓고, foxtel 녹슬까
걱정스러워 보지도 않는 TV 소리는 동네가 떠나가라 하고 틀어 놓았는데, 갑자기 가족들이 들어 닥치면,
동생들 앞에서 체면 구겨지는 최악의 사태를 면하기 위해서다.
그런 자연스러운 행동들은 도대체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떡해 그리 잘 터득을 하는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다.
호주의 청정 고기 탓에 엄마보다는 머리 하나하고도 반을 더해 커버린 아들녀석. 위로 쳐다보면서 잔소
리하고 남은 건 오직, 엄마의 뻐근한 뒷목덜미일 뿐이다. 그런, 아들 녀석이 언제부터인지 컴퓨터에 앉
아 영양가 없는 연애기사를 보는 대신, 수학 기출 문제를 찾기 시작했고, 자정이 넘어 TV 속에서 흘러나
오는 정체 모를 오락 소음 대신 방문 틈으로 세어 나오는 반딧불 같은 불빛으로 공부하는 아들녀석의 뒷
모습 속에 감춰진 믿음이 보이지 시작했다.
그 이름난 명문 사립 학교를 보내지도 않았고, 고급 과외를 시키지도 않았지만, 나와 남편의 교육적 방
향은 흔들리지 않았다.
방부제 없는 인생이 너희들의 인생이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민을 선택했기 때문에, 내 아이들은 밥벌
이의 지겨움보다는 말 그대로 인생에 즐거움의 묘미를 만끽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런 진
심을 아이들도 느꼈는지 아들의 수석 졸업 소식과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했을 때 그 기쁨이란 세상의 무
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그야말로 세상의 주인이었다.
엄마가 너희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엄마는 너희들 대신해서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다만,
엄마도 아빠도 10대 시절의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음을 잊지 말아주길 바란다.
그 안의 10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와 그 속에 있는 10대의 자아를 도와주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이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최고의 영양제. 이 엄마도 할머니의 지겹고 제한 없는 그 잔소리를 들
으면서도 그때는 알지 못했던, 그 잔소리와 너희만을 위한 믿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영양제라
는 것을 몇 십 년이 지나고, 너희들을 낳고,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아들, 나의 두 딸들이 세상에서 진실된 가치로 살아가게 되는 그 날들을 엄마는 오늘도 생각한단다.
그리고, 사랑하고 고맙다.
제 7막
서울 촌놈이 왜 그리 먹고 싶은 게 많은지……
멜번에서 7년을 살면서 올 겨울은 참 지겹고 길게 추웠다. 장작을 패고, 떼는
솜씨는 선녀와 나무꾼에 나오는 그 남자가 울고 간 정도의 실력이 되었지만,
함박눈은커녕 싸리 눈도 내리지 않는 멜번 겨울이 이제는 봄 맞이를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한국 음식이 그리워지는 건 아마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과 평생의 절반을
한국의 장맛을 먹고 자란 우리들이기에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면 너무나 충분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왜 그리 먹고 싶은 게 많아지는지…… “여보, 뭐 맛있는 거 없을까?”하는 소리가 난 영
어보다도 더 무섭다. 김치를 담가 먹는 것 만으로도 첫해는 스스로 대견하다 위안을 했었고, 이제 족발
은 기본메뉴에 고추장, 청국장까지도 그렇다 할 수 있다. 추어탕, 장어탕은 내가 안 먹어도 가족들 건강
챙기는 보양식이니 이것도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잖아~바로 삭힌 홍어요리다.
시장가도 남들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것들이 우리 남편 눈에는 왜 그리 잘 보이는지, 뭣 모르고 홍어
사다, 삭혔다가 동네에서 추방 당할 정도의 혹독하게 구린 홍어냄새. 하지만 그 맛과 향을 그리워한다기
보다는 그 정취를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에 올해도 그 혹독한 구린내를 어김없이 맡았다.
내가 탁월한 음식 솜씨를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멜번이 평범한 아줌마를 거부하다 보니 척척 박사에
요리 전문가로 만드는 재주가 있음은 명백한 사실인 것 같다.
결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이민생활 7년의 시간에 나의 생각은, 멜번은 아무것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은 물론, 그 어떠한 정답을 가지고 있는 우선 순위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졌다는 것과 그 따스함 속에 나와 내 사랑하는
가족들이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곳 멜번이라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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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처럼 입가에 미소를 짓으며 잼나게 읽었습니다.
이민의 연식의 오래 될 수록 안정감을 찾기보다는 불안감이 더 강해지는 것 같기도하구.
아뭏튼 요즈음 소주 한잔하면서 넉두리를 주고받을수 있는 편안한 친구가 멜번땅에 있다면..
한결 이민생활이 수월할 것 같은데...조만간 제가 자리한번 만들겠습니다. 돼지껍데기에 소주한잔...
킬리만자로님 가정에 항상 기쁨과 사랑만이 가득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짝짝짝....... 대상 받을만해요.... 특히 공항엔 어떻게 나가는지... 티켓도 없으면서 여권을 챙긴다는 말에 극 공감이.... 정말 부부싸움하면 멜번은 갈곳이 너무나 없어.. 차안에서 도 닦던 생각에 웃음이 나요... 넘 재밌게 있다 달걀 삶는 것을 잊어 버리고 글에 빠져 있었는데 주방에서 딱딱 소리..... 놀래 뛰어가보니 물 다 졸아버리고 맥반석 달걀이 되있네...힝!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이 오가네요.
진!!!!짜~~~~잘쓴다, 자스민님~~~와우!!!
쟈스민님~^^ 잘 읽었습니다..언제나 느끼는거지만..참 알콩달콩 잘 사시는 것 같아요..아이들도 잘 키우시고 내조는 물론...음식솜씨가 젤루 부럽다는..^^
다..큰 놈들 덲꼬온 저와..
또 다른 생활이라는.
앞으로 즐거운 일들만 생기길 바라겠습니다~행복하세요~~~
저도 앞으로 호주에서 살아가야 할날들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과연 잘할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들구요!
하지만 도전하고 또 도전해야 겠죠 정말 잘읽었습니다
현재 제가 느끼고 부디치고 깨지는 일이 다 들어 있네요....그리고 참 좋은 재주를 많이 가지고 계시네요...부럽습니다
제가 만약에.. 이민을 오지 않았고.. 그리고 아이들도 없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글을 다 읽고 난 이런 느낌이.. 없었을 거 같네요. 쟈스민님의 마음을 드러내주셔서,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꾸벅~
생생한 감동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안에 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이 이 마음을 찡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