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차에 대한 글 중에서 자주 보는 글귀가 있는데요.
추병량이 70년대에 광동에 가서 광동의 습창법을 배워서 숙차를 만들었다둥,
운남에서 보이차 기술자를 광동으로 파견해서 배워오게 했는데
안 가르쳐줘서 실패하고 결국 미인을 파견해서 성공했다는둥,,,
이런 설들이 있는데요.
아시다시피 숙차는 쇄청모차를 조수악퇴법으로 가공해서 만드는 보이차이고요.
습창법은 완성된 차를 고온다습한 창고에 놔둬서 조기 숙성시켜 버리는 방법입니다.
즉 길이 다릅니다.
운남에서 광동으로 기술자 파견했는데 안 가르쳐 줘서 미인을 파견했더니 되더라~~는 설은
70년대 공산당 중앙통치 시대에 무슨 안 가르쳐 주고 미인 파견하고 그럽니까?
기술자 파견하면 무조건 가르쳐주는 것이죠..
숙차의 기본 제작 방법은 중국 전통의 흑차 기술이라고 봐야 맞다고 봅니다.
사천 귀주 호남 광서등의 흑차 기지에서 수백년간 흑차를 만들었는데요,
제 견해는 이 흑차 제작의 방법이 보이 숙차의 기본 기술이라 보시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원래 흑차 만드는 방법이 조수악퇴 방법입니다.
물 뿌리는 부분이 숙차보담은 덜 하지만 역시 물 뿌려서 습열 발생시켜서 발효를 시킵니다.
흑차 만드는 과정 보면 흑차 모료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창방에 빽빽히 쌓아놓고 굴을 뚫어서 통풍겸 통로로 삼기도 합니다.)
가끔 물도 뿌리면서 장기간 발효시키는데 기본 원리가 숙차와 같습니다.
대신 좀 더 경발효에 속합니다.
사천 호남 귀주처럼 전통적으로 티벳에 흑차를 공급하는 기지 역할을 했던 운남에서
이 흑차 기술을 이용해서 숙차를 만든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흑차는 보통 완전 숙성한 대엽을 원료로 해서 만들고
숙차는 좀 더 여린 잎들도 사용해서 만드는 그런 차이가 있고요.
또 악퇴발효를 좀 더 많이 해서 중발효의 차를 만드는 점도 차이가 되겠습니다.
조수 즉 물 사용이 더 많은 면도 있습니다.
간략하게 말씀 드리면
조수악퇴의 방법은 70년대 운남에서 개발된 숙차의 방법이 아니라
수백년간 사용했던 흑차 제작법의 발전이라고 본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 흑차 제작법은 역사적으로 티벳등지에 공급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작법이었고요.
티벳인들이 요즘도 생차는 싫어하고 숙차는 입에 딱 맞아 하는데요,
아마도 이런 인과관계에 기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88년 보염패 긴차를 제가 티벳에서 대량 발견할 수 있었던 이유도
티벳인들이 생차 안 마시는 이유 때문에 소모되지 않고 남아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티벳 얘기가 나와서 말씀인데요.
인터넷에 티벳의 역사를 1300년으로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고,
당나라의 문성공주가 티벳에 와서 차를 보급했다는 이상한 설을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이런 설 틀린 말입니다.
1300년 전이면 티벳에 고급 문자가 만들어져서 보급되던 때입니다.
1300년전에 이미 퇸미쌈보자라는 학자에 의해 티벳어 문법책이 다섯권이 나왔더랬습니다.
이전에는 퇸미쌈보자가 산스크리트어에 기초해서 문자를 창조했다고 했지만
현재의 티벳학계에선 창조가 아니라 "정리하고 정비"했다는 설을
더 유력하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퇸미쌈보자 이전에 "샹송어와 샹송문"(지금의 카일라스가 일대의 지역이 "샹송"지역입니다.)이 있었다 하구요.
우리 한글이 오백년의 역사에 불과한 거에 비하면 엄청 일찌기 문자를 개발해서
대중이 사용했던 문화민족이 티벳 민족입니다. 티벳의 역사는 그쪽에서 2만 5천년으로 봅니디,
또 찻잎을 문성공주가 보급했다는둥의 말은 일부 무식하고 티벳문화를 왜곡하는 중국인들이 떠드는 설에 불과합니다.
(문화왜곡과 침략의 일환인데 힘이 중국에 있으니 정설처럼 돌아다니는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왜곡된 걸 모르는 외부인들이 왜곡된 사실을 전파하니 진실이 전도되는 거죠. 속상합니다.)
중국인들이 티벳의 역사에서 문성공주를 너무 띄워서
티벳인들은 문성공주 오기전엔 티벳사람들 다 발가벗고 다녔느냐며 불편해합니다.
당나라는 티벳과의 전쟁에서 대패를 하고 점령을 당했던 나라인데
그래서 문성공주도 조공으로 바친 경우에 해당하는데 현재의 중국쪽의 티벳역사서에는
下嫁라고 마치 주인집에서 종한테 시집을 가주신 것처럼 표현합니다.
당나라 때만해도 운남 지역은 티벳의 힘이 닿는 곳이었습니다.
사천의 대표적 차산지인 아안도 티벳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찻잎 많이 나는 운남이 티벳 바로 아래에 있고
고개 하나만 넘으면 티벳인 사천 아안이 있었는데
어째서 문성공주가 찻잎을 처음 보급했다는 설이 나올 수 있습니까?
황당한 설들입니다.
사천의 아안을 중국 발음으로는 야안이라 하는데요, 티벳어 "야앙"의 음역입니다.
야크의 꼬리라는 뜻입니다. 원래는 티벳 지역이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지금은 티벳인들 다 철수하고 주로 한족들과 한족화된 소수민족들이 주로 삽니다만...
또한 티벳이 소와 양고기를 많이 먹기 때문에 차가 필요하다~는 말도 있늗데요.
티벳인들은 양고기 잘 안 먹습니다. 일부 지역의 티벳 사람들만 먹습니다.
회피하는 음식중의 하나입니다.
소고기도 그닥 많이 먹지 않습니다.
한 집에 일년에 한 마리 잡아서 일년 내내 식용합니다.
또 소량의 보리만 있었다고 하는데 티벳에 보리 많이 납니다.
역사적으로 모두 몇년 먹을 양 쌓아놓고 살았습니다.
또 감자 많이 먹구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만약 광동인들이 원래 광동에 숙차 기술이 있었다~또는
추병량이 직접 광동에서 기술 배워왔다고 말했다~ 라고 한다면...?
광동이 아니라 그 옆의 광서에 숙차 기술이 있었을 겁니다.
엄밀히 말하면 숙차 기술이 아니라 흑차 기술이죠.
광서에서도 전통적으로 흑차를 만들어서 티벳에 공급했었습니다.
추병량이 습창 기술을 배워서 숙차를 만들었다면 웃기는 말이 되겠구요.
습창은 창고 기술이거든요?
숙차가 창고 기술인가요?
하나는 제작 기술이고 하나는 보관 기술인데 왜 둘을 같이 보느냐는 거죠?
추병량이 정말 광동에 가서 숙차 기술을 배웠다면 광서의 흑차 기술을 배워왔을 가능성이 클겁니다.
아니면 광동에서도 흑차를 만들었던 역사가 있을 수도 있겠구요.
광동에서 만든 보이차인 광운공병을 보면 흑차 기술인데요,
이 제작법을 가지고 광동에 이미 숙차 제작법이 있었다~ 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이치로 보아 저는 이 숙차 제작법은 역시 흑차 제작법의 계승이 된다고 봅니다.
첫댓글 제가 잘못알고 있었던 부분도 있네요. 차를 마시는 사람으로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네요.감솨합니다.
살이되면 안됩니다. 다이어트 해야되요~~ㅎㅎ
저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
중국 도자사 학술자료에는 티벳은 당나라에게 눈에 가시였다고 합니다
군사력은 당나라가 우위에 있었지만 여러 환경조건 때문에 쉽게 물리칠 수 없다고 여겨
의붓 딸인 문성공주를 시집보냈다고 합니다
이 때 茶에 관한 기록은 없는데 밀교였던 티벳에 문성공주가 불교문화를 전파하였다는 기록은 등장합니다
이는 비사문천 님 글과 대동소이한데 친교정책으로 시집을 보낸 것이 옳다고 봅니다.
중국쪽 자료는 자기들 입맛에 맞게 기록되는 게 많습니다. 당시에 당나라가 까불다가 티벳군대가 쳐들어와서 장안을 점령 했었거든요. 티벳인들이 저지대에서 살기 싫어서 철군해버려서 당나라 살아남았구요. 군사력 당연히 티벳이 강했었구요.당시의 왕인 송짠칸보가 당나라에서는 문성공주, 네팔국에서도 공주 조공 받았었구요. 당시 티벳은 밀교는 아니었고(밀교는 불교입니다.대승불교 발전의 마지막 단계가 밀교입니다. ^^)본보교였는데 이때 불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문성공주가 불교문화를 전파했다는 건 과장된 겁니다. 당나라의 주류 불교는 선종이었고요, 티벳이 받아들인 불교는 밀교였거든요.
@비사문천 그래도 당시에 당나라의 불교인 선종도 티벳과 교류를 하긴 했습니다. 다만 주류는 되지 못했구요. 윗 댓글에서 이때 불교가 들어왔었다는 것은 주로 인도의 밀교가 들어왔단 말씀이고요.
@비사문천 (1) 이 문제에 흥미가 생겨, 혜능(전설적인 인물이지만...)의 생몰연대를 확인해 보니, 638년에서 713년으로 나오네요.
그리고 당태종의 딸인 문성공주가 송찬간포에게 시집간 해가 641년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시간상으로도 문성공주와 선불교는 관련이 없겠지요.
(2) 당나라 사상계를 지배한 종교는 도교와 불교인데.....
선불교가 당대에 발생하긴했지만...당나라 왕실에서도 선불교를 좋아 했겠는가는 좀 의문스럽습니다. 지배계층에서는 대체로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선불교를 좋아하지 않지요.
@황이엔지 그렇겠네요...그 뒤로 좀 있다가 선종이 티벳 일부에 잠깐 유행하기는 했었습니다. 인도에서 온 전통 대승불교와 선종 돈오사상의 논쟁이 발생하기도 했었어요.
도자사에는 밀교가 주로 성행했는데 문성공주가 중국식 불교를 가져왔다..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자국에 유리하고 티벳 점령을 합당하게 포장하겠지요.
sbs, kbs에서도 이것을 기본으로 제작하여 방송을 하기도 하고...많이 배웁니다.
그런 부분 틀리는 거 의외로 많습니다. 방송국들의 오류도 물론 많구요. "밀교였는데 중국식 불교를 가져왔다" 라는 말 자체가 오류가 있는 말이거든요. 밀교고 불교이고요, 중국식 불교는 선종도 있고 천태종 정토종도 있고 역시 밀교도 있거든요. 물론 다 그 원류는 인도구요.
@비사문천 당시 티벳에는 "본보"라는 무속신앙이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동아사이 무속신앙의 원류라 생각하는데요, 상당히 방대하며 시스템이 갖춰진 무속신앙 체계 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인도의 대승불교인 밀교가 들어오게 됩니다.
나라가 힘이 있어야 역사왜곡도 당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는군요. 제갈공명이 차씨를 가져다 운남에 심었다는 말도 이해가 안갑니다. 보이차 씨앗을 운남이 아닌 어디서 가져왔을까요? ~ㅎㅎ
남의 나라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 나라 역사를 자기 스스로 왜곡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황이엔지 프랑스처럼 매국노 청산 제대로 안하면 두고 두고 고생한다는 교훈이죠...
나라가 힘이 없으면 왜국놈들한테 왜곡 당하고, 국민이 힘이 없으면 매국노들한테 왜곡당하고요...제갈공명 얘기 참 코미디죠?ㅎㅎ
@비사문천 일제청산 못한 것이 우리역사에서 뼈아픈 부분이고, 지금 많은 사회적 문제의 출발점이죠.
@황이엔지 그러니까요...ㅜ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넵~ 감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전부 맞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누가 도용해 논문 발표하기 전에
정리하셔서 박사학위 받으셔야겠습니다~^^
ㅎㅎ 동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차학과 학생이면 이 부분 정리 심화 해서 논문쓰면 박사학위 가능할지도 모르겠어요.ㅎㅎ
@비사문천 숙차에 대해 설왕설래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결국 윗글들 이야기가 맞다 생각합니다.
무조건 박사 패스 ^^
@하니 박사님 한테 박사 또 하라고 하면 어찌 되는건지요~ㅎㅎ
좋은글 감사 합니다
흑차!!! 육보차가 운남 조수악퇴발효차의 어머니()
육보차 뿐만 아니라 중국 차산지 대부분의 흑차가 그 어머니이기도 하구요, 운남 자체에 흑차가 있었으니 운남 흑차가 운남 숙차의 어머니라 해도 맞겠죠. 직접 말하면 그냥 전통 운남 보이차가 현대 보이 숙차의 어머니라 하겠구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