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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7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본문 : 요한복음 11장 24절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새번역>
누군가 저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음이 있는, 믿음이 충만한 말을 고르라고 한다면 저는 지체 없이 ‘임마누엘’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 말이 저에게는 가장 믿음이 있고, 믿음이 충만한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이 떠오르십니까?
그렇다면 반대말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음이 없는 말은 바로, ‘믿음은 믿음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이 말을 위로삼아 자기만의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아 가던 이들에게서 늘 들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믿음은 교회 안에서 예배드릴 때나 존재하는 것이지, 교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현실이기에 믿음은 아무 필요도 없는 희망고문과도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기 일쑤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맞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믿음보다 현실을 자각한 이들은 더 빠르게 블랙홀 같은 현실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곧 믿음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삶이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금도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 분들은 각자 마치 이사 온지는 꽤 되었는데 아직도 정리 되지 못한 방을 마음마다 가지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예배를 드리고, 신앙생활을 진행하고 있다면 사실 깨끗하게 정리되어야 할 일 인대, 그건 머릿속으로의 생각이고, 좀처럼 정리가 잘 되지 않는 것도 어쩌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 고민을 끝내고 믿음 쪽으로 방향을 틀기를 기대하며 기다려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거나, 믿음과 현실 사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사실상 믿음에 대한 우유부단함을 덥고 포장하기 위한 방법은 아닐까요? 사실 이미 믿음으로 결정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신앙인대,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 우유부단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버리지 못하고 소유하면서 말입니다. 저 역시 아직 그 선상에 놓여 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답답한 우유부단함이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기 위하여, 또한 앞으로 찾아올지도 모를 수많은 위기의 현실들 앞에 무너지지 않도록,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르다의 여러 가지 대답에서 이 우유부단함으로 표현되는 믿음과 현실 사이의 고민을 발견하고, 그 고민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 또한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함께 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공감과 회복과 기도가 있는 시간이 되길 소망해 봅니다.
마르다의 집에 큰 슬픔이 찾아 왔습니다. 바로 오빠인 나사로가 죽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이 남매와 친하게 지내던 예수님도 그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향하셨습니다. 그 곳에는 이미 많은 유대 사람들이 위로하러 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가고, 마리아는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인사도 하지 않고 이런 말을 남깁니다. 여기서부터 바로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마르다와 예수님과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1절, 새번역>
여러분은 이 말이나 말투가 어떻게 들리십니까? 저는 아무리 살펴봐도 원망으로 들리는 말입니다. 평소와 같지 않은 말투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마르다 입장에서의 이 원망은 타탕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도, 계신 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물다가 여기로 오시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만 들어도 달려와 주실 줄 알았는데, 달려와 고쳐 주실 줄 알았는데, 절대 죽지 않게 하셨을 텐데, 마르다의 입장에서는 야속하게도 바로 오지 않고 늦게 도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르다의 이런 원망 섞인 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마르다는 방금 말을 너무 마음대로 했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요? 이렇게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요한복음 11장 22절, 새번역>
이 말은 어떻게 들리십니까? 믿음의 언어로 들리십니까? 죽은 오빠가 예수님이 하나님께 구하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그동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입술로만 고백하는 말이었을까요? 결과는 조금 후 대화에서 바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예수님은 마르다의 우유부단한 태도와는 다르게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23절, 새번역>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사실 이미 제자들에게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2일이나 더 머물러 있었던 것도 사실은 이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일 죽임이라고 이미 제자들에게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1장 4절, 새번역>
이 예수님의 말에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답하실까요? 믿음의 언어는 ‘아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기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던 우유부단했던 마르다는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에 이렇게 대답하게 됩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요한복음 11장 24절, 새번역>
아쉽지만 조금 전 마르다의 22절 고백은 믿음의 고백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부활에 대해서 믿습니다. 하지만 마르다가 생각하는 부활은 마지막 날의 부활이었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다시’라는 말은 그 때를 말하는 것으로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언뜻 보면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맞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현실적인 대답일 뿐이었습니다. 믿음의 고백이 아닌 현실적인 대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바로 이 순간 예수님은 갑자기 마르다에게 너무도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5~26절, 새번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라, 부활 사건도 일어나기 전이라, 이 사실을 믿은 것에는 상당한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은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는 개념을 처음으로 듣게 되는 마르다입니다.
여기서 믿음과 현실 사이의 고민이 생겨난 첫 번째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 이해의 영역’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를 믿기는 믿었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을 수 있는 만큼만 믿어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자면 자신이 믿고 싶은 만큼만 믿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만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사두개파 사람이 아니었기에 당연히 부활을 믿고 있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마르다의 부활에 대한 고백도 그리 특별한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저 일반적인 개념으로,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의 부활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우리를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그저 영웅정도로만 생각하고, 예수님을 나의 필요를 채워줄 신으로만 생각하고, 예수님은 그저 여느 신 중에 하나의 신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이 땅을 구원할 메시아로도, 우리의 생각 영역으로는 도무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영역의 분이시라는 것을, ‘Another Level’이라는 것을,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저 내 생각으로 예수님의 영역을 제한해 버리고는 그저 그 정도의 신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에 대해서 정말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한 사람 밖에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영상으로, 사진으로 접했어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의 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든 클릭 한 번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정말로 그 산이 어떤 산인지는 전혀 모릅니다. 그 무지가 우리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의 고백은 언제나 ‘한계’를 잊어버린 고백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구원할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에 대한 이해의 영역이 있어야만 바로 현실을 뛰어 넘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 공동번역>
예수님을 나의 영역 안에 제한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주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지 않고,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죽음을 바라보지 않고, 죽음을 이기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현실 위에 역사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믿음과 현실 사이의 고민은 단 번에 깨지게 됩니다. 이미 믿음은 현실을 초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르다의 대답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믿음이 아닌 그저 대답이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7절, 새번역>
참으로 멋진 고백입니다. 하지만 많이 부족한 고백입니다. 마르다는 이런 고백을 반드시 덧붙였어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입니다! 예수를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네, 제가 믿습니다! 예수님!” 하지만 그녀의 고백은 그저 베드로의 고백정도로만 끝나게 됩니다. 여기서 두 번째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의 특징이 등장합니다. 바로, ‘진짜 신앙고백의 부재’입니다.
왜 현실 앞에서 자꾸 무너지는 줄 아십니까? 그 현실과 맞설 수 있는 신앙고백이 삶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현실을 이겨내기는커녕 그 현실에 대고 나의 믿음을 선포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기에 오늘도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왜 그토록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구태여 믿음을 선포했을까요? 그냥 속으로만 알고 있으면 되고, 믿으며 되고, 간직하고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부끄럽고 쑥스럽게 꼭 고백하고 선포해야 할까요? 네!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반드시 고백하시고, 선포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로마서 10장 10절, 새번역>
그래서 언제나 예수님은 복음을 소개하신 것이 아니라 선포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그저 방문판매하는 물건 정도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신앙의 고백이었기에, 그래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누가복음 8장 1절, 새번역>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선포했습니다.
그 무렵에 침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마태복음 3장 1절, 새번역>
빌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선포했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사도행전 8장 5절, 새번역>
믿음을 고백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사도 신경을 외우는 것만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하게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권면하십시오. <디모데후서 4장 2절, 새번역>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 중이십니까? 그러면 현실을 향해 신앙고백을 선포해야 할 때입니다. “현실아! 네가 얼마나 나에게 위협적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믿음을 이길 수는 없을 거야! 온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세상보다, 너라는 현실보다 크고 위대하시기 때문이야! 나는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이야! 나는 절대 너라는 현실에게 굴복하지 않을거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장 33절, 새번역>
이 예수님의 선포가 바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놀라운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 새번역>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시고 현실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하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계속해서 성경은 너무 재밌게도 이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마르다의 여동생 마리아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분명 마르다에서 마리아로 시선을 옮겨간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 대, 신기하게도 마리아도 똑같이 마르다처럼 달려 나와 예수님께 똑같은 말을 함으로 시작됩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2절B, 새번역>
그런데 태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마르다는 그냥 와서 말한 것이지만, 마르다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으로 호소한 것이지만, 현실을 바라보았기에 실망스러운 말투와 행동이었지만,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가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아래에 엎드려서 울면서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리아의 진심을 알아주던 이들이 너무도 많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마리아와 함께 있으면서 그를 위로해 주던 유대 사람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서 나가는 것을 보고, 무덤으로 가서 울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를 따라갔다. <요한복음 11장 31절, 새번역>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 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지셨습니다. 마리아가 얼마나 진심으로 행동하고 있는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원망이 아니라 간곡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시니, <요한복음 11장 39절A, 새번역>
그런데 뜬금없이 갑자기 마르다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너무도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며 예수님을 막아섭니다.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B, 새번역>
역시나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우유부단함은 믿음의 고백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짜 고백이 아니었음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금 마르다를 권면하십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요한복음 11장 40절, 새번역>
“마르다야! 내가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았니? 현실을 선택하지 않고, 믿음을 선택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거야!” 다시금 마르다를 일깨워 주십니다. 마르다 역시 너무도 사랑하십니다.
여기서,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세 번째 이유를 발견합니다. “현실의 무게감”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현실은 너무도 명확합니다. 믿음은 한 없이 가벼운 말장난 같아 보이고, 현실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무게감을 느끼며 믿음 위에 현실을 올려 믿음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네, 현실은 무겁습니다. 참으로 견딜 수 없을 만큼 힘이 들게 만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견딜 수 있는 시련만 주신다는 말씀은 거짓말처럼 들립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의 무게감을 조금도 덜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한 가지 잊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함께 들어줄 예수님이 곁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함께 나누자고, 아니 내게 맡기라고,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내가 들어주겠다고 하시는 분이 옆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혼자 억지로 들고 서 있기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찬송가 337장 후렴>
이 예수님을 잊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새번역>
나사로가 잠들어 있던 동굴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본인이 선포하신대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신 후, 마치 마르다가 처음에 했던 말, ‘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라는 말에 힘을 실어주시고, 마르다를 격려하는 마음을 담은 듯, 나사로에게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요한복음 11장 41절B~44절A, 새번역>
할렐루야! 정말 놀라운 기적의 현장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현장입니다. 분명히 나사로와 마리아는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다도 흔들리긴 했지만 다시 믿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놀라운 기적을 함께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기뻐함을 뛰어 넘어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사건의 마지막 단락의 기록입니다.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요한복음 11장 45절, 새번역>
똑같이 슬픈 일을 자매가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분명히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는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다른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현실을 선택했던 마르다의 이름이 아닌 믿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 마리아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매듭을 짓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을 택한 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에 수많은 일들이 놓여 져 있습니다.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우리의 신앙은 결코 요동치지 않습니다.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도 없고, 우유부단한 모습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어떤 일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시험도, 시련도, 아픔도, 눈물도, 답답함과 안타까움도 우리 인생 가운데 찾아올 것입니다. 서서히 다가오기도 하고, 갑자기 나타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소용돌이치듯 흔들리시겠습니까?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기 시작하시겠습니까? 우유부단함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시겠습니까? 말씀을 놓으시겠습니까?
믿음을 ‘내 이해의 영역’ 안에 가두지 않아야 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장 3절, 개역개정>
진짜 신앙고백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셔야 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9~20절, 새번역>
현실의 무게감은 믿음의 존재감보다 결코 크거나 무겁지 않습니다. 현실만을 바라보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드넓은 하늘이 펼쳐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도울 것입니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돕겠다. <이사야 41장 13절, 새번역>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이제 그만 고민을 끝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젠 우유부단함과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제 믿음 위에 일하시는 하나님이 되도록, 믿음을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말씀을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마지막으로 이 찬양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같이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네 주께서 이 땅 고치실 것을
우리는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네 주 예수의 이름 높이 서리라
담대하라 감사하라 기뻐하라 송축하라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
그 약속 능히 지키시리라 그 약속 능히 지키시리라
#오늘의말씀#믿음과현실사이 #믿음과현실사이에서 #믿음과현실 #요한복음11장24절 #마르다의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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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곁에계신다 #찬송가337장 #마태복음11장28절 #믿음의존재감 #예레미야33장3절 #사도행전4장19절
#이사야41장13절 #믿음을선택하라 #하나님을선택하라 #말씀을선택하라 #우리는기대하고기도하며기다리네 #모든상황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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