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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 스크랩 환영합니다 이종호의 과학으로 다시보는 우리 유산
少葉 추천 0 조회 82 08.10.24 00: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종호의 과학으로 다시보는 우리 유산

 

 

석굴암  

포석정  

천상열차분야지도  

온돌  

한지  

석빙고
고려청자    

팔만대장경  

대동여지도  

수중대왕릉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요즈음 우리의 유산과 외국의 유산을 비교할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유산들이 외국 유산에 비해 상당히 과장되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한국은 1000년 전에 지어진 건물도 변변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4500년 전,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2000년이 넘었고 로마의 고대 유적 모두가 한국에서 삼국이 세워지기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이르면 자연히 목청을 높인다. 우리의 문화 유산과 외국의 유산들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볼 때 한국 것이 세계에서 최고라고 자랑했던 것이 창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빠짐없이 우리 조상들을 욕한다. 그 동안 변변한 유산하나 없이 항상 강대국에 침략 당했으며 일제 시대에는 합병이라는 수모도 당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줏대도 없고 과학적인 사고력도 없으며 선조가 물려 준 유산을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다고 비평한다. 그러나 모든 일을 칼로 무 자르듯 단정할 수 없듯 외국 것과 우리 것을 일 대 일의 잣대로만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것이 외국 것에 비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것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없이 외국 것에 대한 정보가 많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자랑할 만한 유산이 많다. 그러나 우리 유산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도 무주견적인 평가를 해 왔기 때문에 우리 것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것은 일방적으로 우리 것이 최고라고 과장하는 반면에 어떤 것은 얼토당치 않은 비난과 혹평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어느 쪽이나 우리 것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기술과 정신이 들어 있는 우리의 유산을 다시 한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교적 합리적인 방법 중에 하나가 객관성을 갖고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잣대를 현대 과학적인 면에서 본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이 만들어 질 당시의 상황을 도외시하게 되는 단점이 생기게 된다. 우리들의 유산을 현대 과학적인 면에서 바라보되 그것이 만들어졌던 바로 그 당시의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석굴암  

 

 

신라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735년 세운 석굴암은 중앙의 본존불 높이가 3.4m에 이르며 대좌까지 합쳐 5m나 되는 큰 불상으로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각 부분이 부드럽고 세련된 솜씨로 조각되어 있다.

석굴암이 세계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것은 신라 사람들의 지혜와 재능을 짜내 만든 종합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열대지방인 인도에서는 부처를 서늘하게 모시기 위해 기원전 100년경부터 바위에 굴을 파 그 속에 탑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이 풍습이 4세기경 중국에 전해졌다. 이러한 석굴 신앙이 7,8세기초 우리 나라에 전해졌지만 신라에는 큰 바위산이 없었기 때문에 신라 예술가들은 새로운 방법을 창안했다. 산을 파내어 굴을 만들고 조각된 돌들을 조립한 후 흙을 덮어 중국이나 인도의 석굴사원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더구나 석굴암은 외국에 있는 대형 건축물이나 유산에 비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는 건축상의 특수성이 있다.

정교함과 화려함 때문에 찬사를 받고 있는 스페인의 아람브라 궁전에 사용된 조각품의 재료는 석고다. 석고판을 정교하게 찍어내어 천장이나 벽에 붙인 것으로 시공 기간도 고작 3,4년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이나 파리의 노틀담 성당의 정교한 수많은 조각상을 보고 사람들이 경탄하지만 재료는 활석 다음으로 경도가 낮은 석회석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상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옷의 주름도 실제 사람이 옷을 입은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조각상의 재료도 대리석이다. 대리석은 석회석과 거의 같은 성분으로 다소 경도가 높을 뿐이다.

동남아 불상, 불탑의 정교한 인물상 조각을 보고 놀라는 사람도 많다. 겉보기에는 매우 단단한 돌처럼 보이지만 그 조각들은 대부분 진흙과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다. 미술 시간에 석고로 모형을 만들 듯 진흙으로 조각상을 정교하게 만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것이다.

이에 비해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화강암은 경도가 높아 섬세한 조각을 하기 아주 힘든 재질임에도 석굴암의 모든 불상은 그야말로 완벽할 정도로 섬세하고 우아하다. 화강암은 장석, 운모, 석영 등 서로 다른 재료로 되어 있어 예상치 못한 결 때문에 쪼개지기 쉽다. 마무리 단계의 실수로 조그만 부분이 떨어져 나가도 어김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위험을 모두 숙지하고 숙련공들이 조각한 것이 석굴암이다. 다르기 매우 어려운 화강암으로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제작 과정을 거쳐 완벽한 배율과 아름다움을 갖춘 석굴암. 그래서 비록 규모는 작아도 세계 어느 문화재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포석정  

 

 

경주 포석정은 측벽을 다양한 크기의 63개 석재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높이는 20cm정도인데도 폭은 15cm정도로 매우 안정된 구조로 되어 있다. 원래 포석정은 고래 모양을 따라 만든 수로로 물을 흐르게 한 후 물위에 띄운 술잔으로 술을 마시며 시를 읊고 노래부르며 즐기도록 만든 것이다. 술잔이 자기 앞에 오면 옆에 놓아 둔 술을 술잔에 따라 마시면서 시를 한 수 짓는데 시간이 늦거나 제대로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셨다.

이러한 것을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시회(詩會)로 부르는데 중국의 동진시대부터 유행했으며 일본에도 여러 유적이 있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포석정이 중국, 일본과 달리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잔이 어느 자리에서 맴돌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체역학적으로 와류(渦流:회돌이)현상이 생기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회돌이 현상이란 주흐름에 반하는 회전현상으로 소용돌이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회돌이 현상을 만들어 술잔이 돌게 한 것은 실용적 면에서 매우 특이한 예다. 공학적으로 볼 때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설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면 물이 흘러가는 면에서 충돌이 일어나 에너지 분산이 일어나므로 효율적으로 매우 불리하기 때문이다.

우주선을 발사하기 직전 액체 연료 탱크 안에 있는 액체연료의 온도를 목표 온도까지 순간적으로 올릴 때에도 이같은 문제점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주선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시 사용되는 액체연료 탱크의 설계나 각종 음료의 살균을 비롯한 실용적 용도를 위해서는 회돌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설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포석정에 이런 고차원적 과학기술이 접목되었다고 설명하면 그런 현상을 우연히 발견, 건설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포석정에서 회돌이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연히 발견되어 시공될 수 있는 것이 아?. 회돌이가 형성되는 각 단면의 형태가 다르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10여 곳의 회돌이가 생기는 곳 중에서도 2개의 주 회돌이 현상이 나타나는 곳은 매우 세심하게 돌의 곡선을 깍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회돌이 형성 부분에 따라서 구조를 달리 만든 것은 신라인들이 유체이동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실무 공학적 면에서는 가능한 발생되지 않도록 하는 회돌이 현상을 역으로 자유롭게 나타나도록 설계했다는 점에서 포석정은 아무리 과찬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선조들의 이런 업적은 결코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고도의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흔히 고대 천문사상은 별자리로 왕권의 흥망을 해석하는 정도로 이해되지만 한국의 천문은 체계적 과학으로 정착된 것이었다. 이런 증거는 평안남도 증산군 용덕리 외새산의 별자리가 새겨진 고인돌 무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인돌 무덤의 뚜껑 돌 겉면에는 80여개의 구멍(별을 의미)이 새겨져 있는데 돌의 중심부에는 북극성이 그려져 있다. 별의 밝기를 반영하듯 구멍의 크기가 각각 달랐는데 세차운동을 감안한 연대 측정결과, 기원전 2900년의 하늘을 보여주었다. 같은 고인돌 무덤에서 발굴된 질그릇 조각의 연대 측정도 4930년(오차 741년)으로 나타나 적어도 기원전 2900~3000년전 한반도 선조들이 천문을 세밀하게 관측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천문학을 설명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천상열차분야지도'. 고조선 말기(기원전 500년경)에 그려져 기원전 355년경에 돌에 새긴 이 천문도에는 282개의 성좌, 1463개의 별이 들어있다. 이 그림은 사영법에 기초, 북극을 중심으로 천체를 평면에 옮겨 놓은 것인데 각 별들이 비교적 정확하게 제자리에 그려져 있으며 춘, 추분점의 위치, 28수의 기준별에 대한 좌표, 황도와 적도, 황도와 백도의 경사각들에 대한 값이 수치로 주어져 있다. 또 별자리 이름을 서양처럼 모양새를 본 따 붙인 것이 아니라는 점도 특이하다.

일제시대에는 이 천문도가 중국의 천문도에서 따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천문도의 별이 1463개로 중국 삼국사기의 천문도 '삼가성도'의 1464개와 흡사하며 원본이 주나라나 한나라 시기의 천문도와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천문도의 별자리 형식을 대조 분석한 결과 북두칠성을 제외하면 같은 별자리가 없다는 점,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춘, 추분점 위치결정에 이용하던 '인성'이라는 별자리가 있는데 '삼가성도'에는 없는 점 등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더 많았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이다. 세계적으로 남아있는 고대 석각천문도로는 1241년에 만들어진 '순우천문도(중국 소주소재)가 있지만 이는 고구려의 석각천문도보다 무려 9세기나 늦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말기에 당나라 군사들이 쳐들어 왔을 때인 672년 대동강에 빠뜨렸는데, 다행히도 이미 제작해 두었던 탁본 한 장이 조선 초에 발견되어 그것을 대본으로 하고 수정을 가해 1395년에 제작됐다. 그후 숙종 13년(1687년)에도 동일 내용의 석각천문도를 만들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온돌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약 100만년전부터 구석기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인공적 주거는 대체로 기원전 5000년경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초기 움집에서는 움의 내부에 화덕 자리를 두어 난방했지만 주상주거로 발전하자 당연히 난방 방식이 달라졌다. 이때 나타난 것이 온돌이다. 반면 한반도 남쪽은 상대적으로 온난해 바닥 밑이 비어있는 마루방, 대청이 발달되었다.

 


남쪽에서 발달한 대청은 계속 북상을 시도하고 온돌도 '호시탐탐' 남하를 시도, 마침내 서울, 경기지역에서 대타협을 한다. 마루와 온돌이 한집에서 공존하는 이중구조가 나타난 것이다. 이런 만남은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북방식 굴뚝   남방식 굴뚝


온돌은 열의 전도를 이용한 복사난방 방식의 일종이다. 방고래를 통해 화기(火氣)를 보내 달궈진 구들이 방출한 열로 난방을 하는 것이다. 방바닥을 고루 덥혀주기때문에 습기가 차지 않고 화재에도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재래식 온돌은 아궁이와 굴뚝 등을 통해 손실되는 열량이 많기 때문에 실제 열효율은 30%에 불과, 에너지 면에서는 매우 불리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난방만 했을 때의 비효율적인 면을 보완하기 위해 취사도 함께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야말로 선인들의 지혜하고 할 수 있다.

 

방 전체 온돌의 구조


현대화는 우리에게서 온돌을 빼앗아갔다. 공간에 따라 실내에도 방열기를 설치하거나 증기나 온수 순환, 스토브나 페치카 등으로 난방을 한다. 전자를 복사난방이라고 하고 후자를 대류난방이라고 한다.

대류난방은 국부적으로 방열 부위의 공기만 고온이기 때문에 급속히 상승함으로써 천장 밑은 가장 높은 온도가 되고 바닥은 낮은 온도가 된다. 사람이 서있는 자세에서 머리부분은 고온이고 발 부분은 낮은 온도가 되는 두열족냉(頭熱足冷)이 되는데 이것은 건강상 좋지 못하다고 의학자들은 지적한다. 고온의 공기는 공기중 산소분자의 운동속도가 급격히 빨라지고 팽창되어 분자간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므로 결국 고온의 공기를 호흡하면 심폐내 산소분자의 숫자가 작아지게 된다는 뜻이다. 반면 온돌은 발바닥을 포함한 신체가 직접 온돌에 접촉하므로 쾌감을 얻는 동시에 혈액 순환을 촉진시키므로 과학적이고도 이상적인 난방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사라지는 전통 기법이 외국에서 호평을 받는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리가 외국 것에 심취해 있는데 반해 우리의 장점을 높이 평가하는 외국인들의 안목이 부럽기만 하다.



한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년)과 구텐베르크보다 70여년 앞서 금속활자로 찍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일명 직지심경, 1377년)을 선조들이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알지만 이와 비견, 결코 떨어지지 않는 우리 종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발간된지 55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지질 보관에 문제가 있어 열람조차 불가능한 암실에 보관되어 있다. 반면 한지는 천년 세월을 견뎌내는 것은 물론 삭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다. 인사동의 헌 책방에 가면 천년이 넘은 책들이 푸대접을 받고 있을 정도다.

고려 종이의 명성은 조선으로 이어져 한지가 중국과의 외교에 필수품으로 여겨졌고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에 고려 종이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한지의 질이 명주와 같이 정밀해서 중국인들은 이것을 비단 섬유로 만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한지는 중국과의 외교에서 조공품으로 많이 강요되었다. 한지의 강한 특성은 한지를 몇 겹으로 바른 갑옷의 예에서도 볼 수 있다. 옻칠을 입힌 몇 겹의 한지로 만든 갑옷은 화살도 뚫지 못했다 한다.

 

한지의 우수성은 창문용으로 사용되는 창호지의 열적 성능에서도 잘 나타난다. 필자가 한옥에서 사용하는 창호지와 현대 기술의 산물인 창유리와의 열적 성능을 비교하니, 에너지 파동이래 많은 건물에서 사용되고 있는 값비싼 이중 창문(페어 글라스)보다 한지(창호지)를 사용한 단순한 이중 창호지 문의 열적 효과가 높았다.

창호지의 가장 큰 장점은 현대 문명 기술이 만들어 낸 어떤 종류의 창문 재료보다 실용성이 높다는 점이다. 창호지는 눈에 안 보이는 무수한 구멍이 있어 방문에 발라두면 환기는 물론, 방안의 온도와 습도까지 자연적으로 조절된다. 온돌에 장판을 발라 생활했던 우리의 주생활은 방안에 습기가 많은 것이 문제점이었으나 이 습기를 창호지로 자연 배출되도록 유도해 쾌적한 생활 공간이 되도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습기가 많으면 그것을 빨아들여 공기를 건조하게 하고, 공기가 건조하면 습기를 내뿜어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게 하는 신축성을 가지고 있는 것. 그래서 창호지를 흔히 '살아있는 종이'라고도 한다. 창호지가 자연 현상에 이처럼 순응하는 성질은 모두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우리 한지를 최고의 종이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 우리들은 질이 좋지 않은 종이라 천시하고 한지에 비해 질이 떨어지는 외국의 펄프 종이가 좋다고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 것을 무조건 좋다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지만 무조건 경시하는 것도 큰 문제다. 우리의 훌륭한 유산을 잘 지키고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한지를 절대 천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석빙고  

 

 

우리 유산 중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과학적인 것으로 석빙고를 꼽을 수 있다. 석빙고의 외견은 단순한 고분 형태다. 빙실 공간이 주변 지반에 비해 절반은 지하에, 절반은 지상에 있는 구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석빙고에 무슨 대단한 과학이 들어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석빙고의 유래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노례왕(24~57년)때 이미 얼음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도 지증왕 6년(505년)에 얼음을 보관토록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석빙고의 규모는 대부분 30평 이상, 적은 경우에도 10평이 넘었다. 석빙고에 저장하는 얼음의 두께는 12cm이상이 되어야만 했다.

빙고의 바닥은 흙다짐이나 흙다짐 위에 넓은 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 자연 배수되게 했다. 빙고 구조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빙실 천장을 아치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형식은 전체를 아치로 만든 구름다리나 성문들과는 달리 일정 간격으로 세우고 이를 구조재로 해 그 사이를 석재로 쌓거나 판석을 얹었다. 석재는 화강석으로 규적은 대체로 0.5톤 정도. 석빙고 건축 때 철물과 회를 많이 사용했는데 철물은 석재와 석재 사이가 서로 분리되지 않도록 삽입했다. 회를 많이 사용한 것은 봉토 조성 때 진흙과 함께 혼합해 외부에서 물이나 습기가 침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용도였다. 천장에는 빙실 규모에 따라 환기구멍을 만들었다. 환기공은 봉토 밖으로 나오게 해 그 위에 환기공보다 큰 개석을 얹어 빗물이나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않게 했다.

 


장동순 교수는 석빙고가 반지하 냉동창고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메커니즘을 분석했다. 즉 단열재로 사용한 볏짚이나 갈대의 존재 여부 및 얼음을 충진량에 따른 계산 결과를 분석한 것이다.

얼음의 충진량이 50%인 경우 짚이 없을 때는 석달후 얼음량 감소가 6.4%, 여섯달후 38.4%가 되는 반면, 짚이 있을 경우 석달후 얼음량 감소는 0.04%, 여섯달후 얼음량 감소는 0.4%에 불과했다. 얼음 충진량이 100%인 경우 짚이 없을 때는 석달후 얼음량 감소가 9.2%, 여섯달후 51.8%로 절반 이상 감소한 반면, 짚이 있을 경우 석달후의 얼음량 감소는 2.8%, 여섯달후에는 18.4%나 되었다. 얼음의 양과 볏짚의 유무에 따라 얼음 저장 능력이 조절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했다는 뜻이다.

여름에 항상 얼음을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은 세계적으로 거의 유례가 없다는 것을 부연하면 우리 조상들의 슬기에 으쓱해질 수 있을 것이다.



고려청자  

 

고려자기는 황록, 황갈색도 있지만 비색청자가 가장 뛰어나다. 비색이란 중국 월나라에서 나던 청자로 당나라 때 천자에게만 바치던 것이다. 이 색의 특징은 맑고 선명하며 깨끗하고 윤기가 도는 것이다.

고려의 순청자기술은 12세기 전반에 절정에 달했다. 유약을 입히는 기술이 세련되어 날렵한 자태를 가질 수 있게 했고 여기에 상감청자까지 개발된다. 상감이란 쉽게 말해 그릇표면에 무늬를 파고 그 속에 백토나 흑토를 메워 청자의 푸른 바탕에 백색과 흑색의 무늬를 장식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의 개발로 고려청자는 그 아름다운 푸른색에 흑백의 선명한 도안이 화사하게 장식되기에 이르렀다. 상감은 금속과 나전칠기에서 이미 보편화된 기법이지만 청자에 응용되어 세계 도자사에 있어 독보적인 장식기법으로 인정되고 있다.

고려청자는 많은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흙과 불의 조화이지만 그 비밀은 아직도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근 청자의 비취색을 재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나 엄밀한 고증과 현대 과학기술을 동원해도 100% 비색(秘色)을 재현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1982년 강진에서 이색실험이 있었다. 요업공학과 교수들이 청자조각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만든 유약과 강진 도예공들이 개발한 자연 유약중 어느 것을 사용해 만든 청자가 더 아름다운 색을 내는가를 비교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승부는 과학자들의 패배로 끝났다. 도예공들의 청자가 누가 보더라도 비색에 더 접근했던 것이다.

과학자들은 청자 비색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노력으로 초기 고려청자와 청자의 발생에 있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월주요 청자, 상감청자의 태토와 유약을 비교했다. 여기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역대 월주요 청자의 태토에서는 인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으나 강진의 청자에서는 0.04%~0.05% 소량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유약의 경우도 초기청자에서는 인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으나 상감청자에서는 0.89%, 월주요에서는 1.7%나 함유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비취색의 상감청자는 태토와 유약 모두에 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실험 결과에도 불구하고 인이 청자의 색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청자의 색은 유약뿐만 아니라 가마의 온도, 불 때는 연료, 소성 방식 등 여러 가지 요소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인이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색깔을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에 양보를 하지 않고 있다.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이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251년 완성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판은 총 1513종, 6844권, 8만 4685매로서 국보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표적인 대장경판 한 장의 크기는 가로 72,6cm, 세로 26.4cm, 두께 3cm 정도인데 양끝에는 나무 조각을 붙이고, 네 귀퉁이에는 구리 장식을 달았다. 글자는 대개 23줄로 각줄마다 14자씩이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은 조선 초기 개수한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 건물의 중요 기능은 경판을 보호하고 장기간 보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적절한 환기와 온동 및 습기 제거를 위해 건물 외벽에 붙박이 살창을 두었다. 특히 벽면의 상단과 하단,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달리함으로써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 상단과 하단부를 돌아 나가도록 절묘한 건축 기술을 발휘했다.

이 간단한 차이가 공기의 대류는 물론 적정 온도를 유지하게 한다. 경판전 안에서 향을 피워보면 향이 각 전체를 한바퀴 돈 뒤에야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판고 전체의 온도도 1.5도 차이밖에 나지 않으며 더구나 가장 추울 때와 더울 때의 차이가 10~15도를 넘지 않는다. 정밀 조사에 의하면 해인사주변 습도는 연중 인근 지역에 비해 6~10%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건대로라면 경판은 썩기 쉽다. 그럼에도 경판이 온전히 보존돼 온 것은 해발 645m에 있는 판고가 지역 특성상 3개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으로부터 1km쯤 북쪽에 위치, 바람이 항상 불어 자연적 습도조적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또 경판각 시설 자체가 기막히게 조절 기능을 하고 있다. 현재 경판은 5단으로 된 판가 각 단에 빼곡이 세워져 있는데 이 때문에 밑에서부터 맨 위까지 경판 사이 틈을 통해 바람이 지나면서 골고루 습도를 조절해 준다. 목재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라는 나무를 골라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가 놓았다가 꺼내어 소금물로 경판을 삶은 후 그늘에 말렸다. 소금물은 벌레나 곰팡이 서식을 막아주고 나무진이 목질 내부에 골고루 스며들도록 해 뒤틀림이나 갈라짐을 줄여준다.

경판에 옻칠을 한 것도 장기 보관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일반적으로 글자를 새기고 교정작업을 마친 목각판은 표면에 먹물을 칠하거나 콩이 전즙과 송연으로 처리한 뒤 판가에 보관하는 것이 보통인데 특별히 옻칠을 했다. 목각판에 옻칠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옻칠이 벗겨진 마구리 등이 다른 부분보다 훼손이 심한 것으로 보아 옻칠 자체가 경판 보존에 큰 역할을 하였음을 증명한다.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이전의 지도는 모두 부정확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고구려는 영토 확장과 잦은 왜구 침입 때문에 국토에 대한 지리학적 고찰과 지도 작성이 매우 활발했고 백제에는 '백제지리지'와 지도책 '도적'이 있었다.

특히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기리고차(記里鼓車)라는 거리 측정을 위한 반자동 기구를 우리의 선조들이 개발, 사용했다는 것이다. 1441년에 제작되었다고 하는데 홍대용(1731~1783)의 "주해수용"에 그 구조가 나와 있다. 기리고차는 바퀴의 회전수에 따라 울리게 되어 있는 종과 북의 소리를 헤아려 거리를 측정한다. 수레가 반리를 가면 종을 한번 치게 하고 수레가 1리를 갔을 때는 종이 여러 번 울리게 하였으며 수레가 5리를 가면 북을 울리게 하고 10리를 갔을 때는 북이 여러 번 울렸다. 기리고차의 경도 1도 거리는 108Km이며 현재 그 값이 110.95Km이므로 측정값 오차가 3%미만이었다.

김정호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거의 없는데도 가장 많이 기론되는 것은 흥성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 그가 '대동여지도'의 인본을 조정에 바치자, 나라의 기밀이 누설될 위험이 있다고 여긴 조정대신들이 그를 옥에 가두어 죽이고 판각(板刻)을 몰수하여 소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허무맹랑하게 날조된 이야기이다. 김정호의 옥사설이 날조되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근거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 김정호가 죄인으로 체포되었다면 '대동여지도'의 판각뿐만 아니라 그 인본(印本)이나 전사본(轉寫本)까지 모두 압수 당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동여지도'의 전후 두 차례에 걸친 인본과 사본 및 '청구도'의 전사본 등이 아무런 수난을 겪은 흔적이 없이 잘 전해오고 있다.

둘째, 김정호가 죄인으로 처형을 당했다면 그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발행된 유겸산의  '里鄕 見聞錄'에 김정호에 대해 함부로 싣지 못했을 것이다.

셋째, 김정호와 가까웠던 최한기, 최성환, 그리고 국가 기밀 지도를 제공해 주었다는 신헌 장군 등이 연루되어 어떠한 처벌이라도 받았어여 할 텐데 신헌은 오히려 대원군 시절에 병조판서, 공조판서 등의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렇다면 이렇게 김정호가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는 전설리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일본의 조선 통치에 결정적으로 유익한 역할을 하였던 김정호에 대해 일본인들이 감사하게 생각하는 동시에 일본과의 합방에 반대했던 조선 정부의 무능을 비판한 것이다. 한국을 합병한 일본인들로서 조선의 각 지역에 대한 정보를 자세하게 소개, 조선의 자원을 수탈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김정호와 같이 입맛에 맞는 조선인은 없었던 것이다.



수중대왕릉  

 

1967년 7월 24일 신라시대의 문무왕릉이 경북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인 동해에서 발견됐다. 토함산 석굴암으로부터 일직선상에 있는 수중에 십자형 암석이 석관 형태로 놓여있다는 것이다. 가운데 못에 깔려 있는 거북이 등 모양의 큰돌이 길이 3.7m, 두께 1.45m, 너비 2.6m로 그 밑에 문무왕의 납골을 모신 용기가 있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 석관은 주위의 돌과 판이하게 다른데다 동해의 맑은 물이 30cm정도로 덮여 있어 물 밖에서도 잘 보인다. 한국일보사가 주관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의 결론을 토대로 곧바로 사적 158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 대왕암은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아니고 산골처라는 주장이 학자들로부터 계속 제기돼 왔다. 바위가 인공이 아니라 천연석처럼 보인다는 주장이 가장 큰 논제의 주안점이었다. 그들은 해중릉침의 복개석으로 주장된 돌은 사리장치(舍利藏置)를 덮은 인공적인 석관 덮개가 아니고 자연석임이 틀림없다고 재차 확인했다. 복개석 밑바닥은 돌과의 사이에 공간이 뜨고 그 일부분만 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왕암이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장소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능침 구조는 아니며 그 일대의 바다에는 대왕암에 버금갈 전설과 신비에 싸인 바위들이 많다고 주장했다.

대왕릉이 문무왕을 화장한 후 유골을 바다에 뿌린 산골처임을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문무대왕비문에 '나무를 쌓아 장사 지내다(葬以積薪)',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硏骨鯨津)' 등이 "삼국사기"의 내용과 똑같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백 번 양보해 대왕릉이 수중릉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복개석'이라고 주장하는 거북 모양의 돌을 들어내고 그 밑에 납골장치가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1991년 '기후 변화의 환경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국제 회의(CIES)에서 지구는 과거 100년 동안 해면이 1년 평균 1.0~1.5mm의 속도로 상승하고 있으며 최근 50년간은 상승속도가 가속되어 1년에 2.4mm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서울대학교 박용안 교수는 탄소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빙하기 직후인 7000년 전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6.5m, 4000년 전에는 3m, 2000년 전에는 2.5m낮았다고 했다. 이렇게 볼 때 대왕암이 수중릉이라면 지난 1300년동안 수심이 적어도 2m 가량 높아졌으므로 현재 수중릉으로 알려진 덮개석을 덮고 있는 수심은 최소한 2.5m는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재 석관 위로 물의 깊이는 30cm밖에 되지 않는다. 즉 현재 수면의 높이로 판단해 볼 때 당시의 석관이라고 주장하는 덮개석은 수면보다 최소한 2m 이상 높은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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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조선의 화약무기], [조선시대에도 비행기가 있었다?], [한국의 核주권 “비핵화선언은 파기됐다, 우리도 농축하...],

[시대별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전력비교], [조선시대 환도 패용법], [배달겨레의 종가인 부여계 국가들이 동아시아를 제패했...]을

 

/나의 이야기/면에 있는 [대한제국 왕실복원??]을

 

/엽기,황당/면에 있는 [쥐나, '짝퉁' 들고 나섰다가 국제전시회서 망신], [中 광산.건설업자들, 고대 배달겨레문명 발상 유적지 ...],

[쥐나의 잔혹하고도 엽기적인 형벌]을

 

보다 자세한 것은 [몇 가지 추려본 간략한 게시물 목록들], [역사와 관련해 몇 마디 논평해본다....]를 참조하세요.  

 

이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문화재나 유적들에 관한 자료들이 많으니 직접 본 블로그의 게시물들을 둘러보면서 찾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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