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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만남은 인연이요 운명이다!
학산초등학교 25회 빛바랜 졸업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 추억과 그리움 그리고 아쉬움이 묻어난다. 이 사진 속 주인공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겨울철 난방이 되지 않는 교실에서 장작불 난로위에 양은으로 만든 사각 도시락을 올려놓고 들깻잎, 짠 김치, 곤짠지, 고추장에 마른멸치와 보리쌀 섞인 밥... 먹을 게 없어 배고픔에 시달리던 국민학교 시절의 김치냄새가 진동하는 점심시간 교실을 한번쯤은 떠올려 보고 싶어질게다.
특별히 먹을게 없었던 시골에서 어머니가 집에서 먹던 보잘 것 없는 반찬을 싸온게 부끄러웠고, 행여 짓궂은 남학생 친구들에게 들킬까 책보를 덮어쓰고 점심을 먹던 여학생의 순진하고 아름다웠던 모습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그 당시 지금은 매일 아침 마다 먹는 계란 프라이도 특별 매뉴로 손 꼽히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배고픈 시절이었는지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분유를 끓여 주던 점심시간을 애타게 기다렸고, 비스켓 같은 과자와 몇 개씩 나눠주던 건빵, 우유가루로 만든 이름모를 과자 등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고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이 사진 속에는 너무나 가난했던 어린시절의 아픔과 추억이 숨어 있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간 느낌마저 들게다.
잠시나마 회포어린 옛날로 돌아가서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막걸리 사발이라도 기울이면서 추억을 회상하고 싶은 생각에 고향으로 당장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쉽게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벌써 40년의 세월이 흘러 버렸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에 보석처럼 영롱한 추억들이 비온 뒤 강가에 스멀 스멀 피어 오르는 물안개처럼 하나 둘 아련히 떠 오른다.
5월이 되면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스승의 날에 어머니가 달걀 한 꾸러미를 선생님께 갖다 드리라고 해 어머니의 엄명을 차마 어기지 못하고 담임선생님 자리에 선물을 몰래 갖다 놓고 행여 누군가에게 들킬까 도둑질한 사람처럼 부끄러워 교무실을 도망치듯 나왔던 일도 희미하게 생각난다. 국민학교 다닐때의 추억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고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아니 대못처럼 내 가슴속에 깊이 박혀 뽑으려야 뽑을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게 옳은 표현이다.
우리가 다녔던 학산국민학교는 두 반도 아닌 한 반뿐이였다. 학교를 왔다 갔다 하면서 친구들의 부모님이 일하러 가시는 모습을 자연스레 볼 수 있었고 평생을 농사일에 바쳤던 그 힘든 여정을 체험할 수 있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쭉 한 학급뿐이어서 학년이 바뀌어도 의견 충돌로 다투거나 힘 겨루기 같은 싸움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저절로 주먹의 서열이 정해져 버렸다. 6년 동안 같이 뛰어 놀며 공부하는 동안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레 가족 같은 친한 사이가 돼 버렸다.
스타들이 즐비한 학산25회 동기들아!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그때 행복했던 추억을 한 번 끄집어 내어 보자.
공부 잘하고 잘 생기고 달리기까지 잘해서 국민 학교 6년 동안 줄곧 반장과 성적 1위를 놓치지 않고 여자친구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던 한기, 지금도 그 인기는 동창회 때마다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였지... 그 지칠줄 모르는 인기는 언제쯤 끝날지 기약도 없구나... 매 학년마다 우등상 수상자 명단에서 이름이 빠지지 않았던 마구실 사는 임문수와 지금은 뜻하지 않게 일찍 하늘나라로 가버린 예쁘고 똑똑한 복남이 까지...
하지만 공부보다는 놀기가 좋아 뒤 떨어지는 공부 때문에 부끄럽게도 방과 후 나머지 공부를 했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친구들도 몇 명 있어서 마음이 아프구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공부는 아이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옭아매는 쇠사슬이나 다름없지.
70년대 새마을 운동이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시절, 국민학교 졸업식 때 우등상과 6년 개근상은 삽을, 1년 개근상은 낫을 상품으로 받았는데 나는 운 좋게도 삽 2자루에다 낫을 한 자루 받아 우리 아버지는 없는 살림에 막걸리 한 말을 학교에 내시고 껄 껄 웃으시며 아이처럼 좋아 하시며 집으로 오셨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면 부모가 행복해 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그래서 크레파스로 어설프게 그린 내 그림이 조선일보 방우영 사장상까지 수상하던 날, 그 기쁨은 하늘을 찔렀지... 그런 자그마한 나의 꿈이 오늘 내가 이 길을 걷도록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 달리기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마치 노루처럼 잘 달려서 운동회 때 마다 청군 백군 대표팀으로 고정 출전했던 우리의 국가대표 고병태와 임영락이... 나는 운동회 때 6명씩 나눠 뛰는 달리기에서 4위를 주로 했는데 그때 병태와 영락이의 천부적인 달리기 실력이 너무나 부러웠고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타고난 재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때에는 달리기를 잘 못하도록 나를 낳아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부질없는 원망도 했었다.
그리고 공부도 잘했지만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거의 20리길 학교를 걸어서 결석 한 번 하지 않고 학업에 열중하던 청골 사는 천종이, 이 친구는 이제 고향 안동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그럴듯한 가게를 운영하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나름 성공 반열에 올라 학산 25회를 빛내는 자랑스런 대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은 반드시 성공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진리를 실천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또 거제도에서 좋은 직장 다니며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두종이는 어떻고, 중년의 행복이란 이런 것이라네 하며 마치 정답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너무 부럽다. 우리 25회 동기생들 중 성공모델 1위로 꼽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자랑스런 친구들아 사진이지만 모두 만나서 반갑고 너무 너무 보고 싶고 사랑한다.
중학생 키보다 더 큰 기섭이와 영일이, 누가 농삿꾼의 자식이 아니랄까봐 힘 좋고 듬직한 모습이 자랑스럽구나. 국민학생이 어른같네... 체육시간 그 당시 남학생들보다 키와 체격이 더 큰 여학생들이 더 이상 감출 수 없을 만큼 불룩 솟아난 가슴을 숨기지 못하고 가슴을 출렁거리며 달리기를 했을 때 남학생들은 그 모습이 신기하고도 우스워 키득키득 거리며 웃었고, 그 말 못할 고민과 아픔에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던 여학생들아 그땐 나도 나쁜 아이들의 무리속에 속한 공범자였기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때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 그때 한 순간의 잘못을 이해해 줄 수 있겠니?
지금 초등학교 6학년이 된 딸을 키워보니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성장속도가 빠르다는 걸 이제야 알았으니까 부족한 이 친구를 이해하고 용서해 주렴.
우리가 다녔던 국민학교 시절에는 학교폭력이나 왕따 문화 같은 건 없었지. 먹고 사는 데는 고민이 있을 수 없었고 항상 마음만은 부유했었지. 시험점수 때문에 서로 시기하며 질투하고 미워하는 아이도 없었기에 행복했었다.
지금처럼 학생들의 교복이나 다름없는 노스페이스 의류나 나이키, 뉴발란스 같은 부를 과시할만한 신발 같은 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 대신 빡빡머리에 고무신이나 실내화를 신고 다녔던 청순하면서도 앳돼 보이는 여학생들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너무 인상적이고 아름다웠지.
친구들아 국민학교 다닐 때 좋아했는데 다른 친구들에게 들킬까봐 부끄러워 “사랑한다. 우리 친구하자”며 말하지 못했던 여자 친구나 마음에 두고 있는 여학생이 이 사진 속에 아직까지도 네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면 학산카페 25회 주소록에서 전화번호를 찾아 용감하게 카톡이나 전화 하렴.
너의 사랑 고백에 여자친구가 “너무 늦었다. 잊어 달라”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이제는 자신 있게 “그 때 너를 많이 좋아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손이라도 한 번 잡고 노래방에가서 김상진의 ‘고향이 좋아’ 노래나 나훈아의 ‘고향 역’이라도 함께 부르면서 추억을 회상해 보는게 어떻겠나?
이제는 어머니가 돼 버린 여자 친구들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중학교 진학대신 도시 공장이나 농삿일을 해야만 했던 안타까운 친구들아! 끼니도 때우기 힘든 살림에 중학교 보내 달라고 말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는 자식에게 다 해 주지 못해 서럽고 소리 없는 말 못할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니?
70년대를 살아온 우리들에겐 한결같은 아픔이 있지? 배움의 길을 막아버린 가난, 못 배운 한은 넘어가지 않는 목엣가시였지? 무슨 중죄라도 지은 양 평생 주눅들게 했지. 어른이 된 지금 자식들 공부 가르치는 기쁨은 못 배운 설움을 잊게하는 그 이유가 되겠지?
이제는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렴.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는 어려운 가운데서 오로지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신 훌륭한 분들이셨고, 하늘나라에서 우리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지켜보며 “너희들은 2세들을 열심히 공부시켜 생전에 이루지 못한 공부에 대한 한(恨)을 풀어 달라”고 소망하고 계실지도 모른단다.
고무 줄 놀이, 공기놀이하던 꿈 많던 소녀들아 지금도 동안(童顔)이고 예쁘지만 40년 전 너희들의 모습은 티 없이 맑고 천사처럼 귀엽고 아름다웠지. 어렸을 때 너희들 중에서 마음씨 착안 아이가 내 아내가 돼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남학생들도 있었다는 걸 너희들은 알고 있었니?
5.6학년 때 우리 담임선생님이셨던 훌륭하신 김주복 선생님,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를 해 주신 4학년 때 담임 권오식 선생님, 그리고 김호진 교장 선생님까지 선생님에 대한 강렬한 캐릭터가 생각난다.
한기.기복이와 함께 교장선생님 관사에서 어깨동무, 구월산 유격대, 손오공, 철인28호 등 만화에 흠뻑 빠졌던 기억도 아름답다. 선생님 관사에서 먹었던 입맛 당기던 맛있는 반찬과 참기 어려웠던 환상적인 반찬의 유혹, 억제하기 힘들었던 식탐의 기억들까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없던 입맛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
어른이 된 지금 농삿일이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농삿꾼인 아버지 어머니가 흘렸던 땀방울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나오는지를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알았다.
뽀빠이, 비가, 월남사탕, 하얀 알사탕, 그리고 유통기한도 없는 소라빵...
이제 학산국민학교는 아이들도 선생님도 모두 어디론가 다 떠나고 언제 헐릴지 모를 도시의 재개발 현장의 마지막 한 채 남은 철거를 앞둔 가옥처럼 덩그렇게 외롭게 고향을 지키고 있다.
마지막 남은 이 추억이 서린 학산국민학교 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내 국민학교 시절의 모든 아픔과 추억이 싹뚝 잘려나갈까 두렵고 나는 우리 쌍둥이에게 아빠는 어떤 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머리가 혼란스럽다. 마치 태풍이 휩쓸고 간 바다처럼 내 어릴적 추억이 흔적없이 연기처럼 사라진다면 어떻게 하나... 이런 악몽도 가끔 꾼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고 인연이었다. 아니 숙명이었다고 해야 옳다.
마치 되돌려진 시간속에서 없어진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변화되고 새로워진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우정이 있었고, 우리들의 성장과 사랑이 공존했던 학산국민학교의 추억을 영원히 가슴에 안고 행복하게 살아 가길 바란다. 친구들아 고맙고 사랑한다.
어렵고 힘들 때 이 사진을 보면서 어릴 적 꿈과 희망을 잊지 말고 용기를 내며 살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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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배님 인물들이 다 출중하십니다.저희 때 보다 성숙한 모습 들이네요.
우리 동기생들이 59년, 60년, 61년 62년생까지 크게 3년까지 차이가 나서 그럴겁니다. 어머님의 말씀에 따르면 옛날에는 태어나서 원인모를 병으로 아이들이 잘 죽었답니다. 얼마나 슬펐겠어요.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이고 어릴적에 무척 많이 아파서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데요.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별 탈없이 건강하게 회사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선후배님들 중에 이런 이유로 태어나서 1년이나 2년 뒤에 호적을 올린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럴리가 있습니까?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31회 후배님들이 더 똑똑하고 슬기롭고 인물도 훨씬 좋을 겁니다. 그러니까 장가나 시집 못간 후배가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으니깐요. 저는 제가 이런 얼굴로 장가를 간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학산 동문들은 비록 얼굴은 영화배우가 아니지만 친구를 배려하며 마음씨 좋고 인정이 많은 점은 올림픽 금메달 감이잖아요?
사진속 주인공들은 같은 추억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기에 이글을 보고 다들 공감 하시면서 끄때 그랬었지 하시겠네요 얼굴엔 미소를 지으면서요...
우리 여자 동기생들중에서 몇 명은 시집가도 될 만큼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고 늘씬하잖아요. 그 때 맘에 드는 여자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할 걸 그랬어요. 그러면 쪼그만 한게 까불고 있네. 했겠지요? 우습네요. 누구는 누구를 좋아한다고 놀리던 기억이 머리속을 맴도네요. 우리후배님들도 그랬었나요?
우리 형님사진은 찾기가 참 쉽네요^^
선배님 늘~건강하시고 행복한 날들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이나 오바마 대통령처럼 잘 나가는 사람은 금방 눈에 띄게 됩니다. '군계일학'이라고 하나요? 후배님의 맏형님이신 영락이 친구도 학창시절 여자친구들 한테 인기가 아주 많았어요. 이름을 밝히기 곤란하지만 그 당시 스캔들이 아주 많았지요. 여학생들이 서로 짝꿍할려고 아주 난리였지요.
역시 인기의 비결은 무엇보다도 잘 생긴 외모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장님 아드님 아닙니까? 이장님 아들은 얼굴도 안보고 시집 온다는 말이 있던데 셋 쌍둥이 엄마는 얼굴도 안보고 시집온거 맞죠?
자랑스런 셋 쌍둥이 아빠, 초등학교 시절에는 이름을 날렸지요. 우사인 볼트 (Usain St. Leo Bolt, Usain Bolt) 처럼 이 친구는 운동회만 기다렸을 겁니다. 날렵하게 생겼잖아요. 또 새마 본토의 텃세도 대단했구요. 청골, 새터 아이들은 볼트의 밥이 였죠. 학교 끝나고 오늘은 안 만났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린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게되는 행복했던 추억쯤으로 이해 하면 되겠지요.
예 그랬지요.누구누구는.마음속으로만 간직한채로...지금만나면 그때 그랬지라고 껄껄웃곤하지요.
미희 후배님 이름이 너무 예쁘시네요. 누가 그런 예쁜 이름을 지어 주셨나요? 저는 얼굴을 기억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름처럼 예쁘실것 같아요. 앞으로도 컴맹 선배들을 많이 지도해 주시고 동문끼리 아름다운 고향의 정을 함께 나눠요. 저의 이름은 교장선생님이셨던 저의 외삼촌이 지은 이름인데 무성할 무 터 기 듣기에 웃음이 나오지만 저는 제 이름에 불만 같은 건 없어요. 오히려 자랑스러워요. 중학교 시절에 국사선생님이 총칼이라고 부르며 무척 이뻐해 주셨어요. 제가 학급 미화 담당을 했거던요.
선배님은 어느분이신지,,,,?저는 잘모르겠는데 저를 아시는것 같습니다^^죄송합니다 너무한참 선배님이라서 잘 알지를 못하겠습니다
천안에서 근무하고 있는 큰 형님한테 물어보면 될겁니다. 나는 후배님을 잘 알고 있는데 저를 잘 모른다니 약간 섭섭하네요. 하기사 제가 유명 연예인도 아닌데 모르는게 당연할 겁니다. 궁금증을 가지고 사는 것도 좋은 겁니다. 무엇이든 비밀이 있어야 신비스럽게 느껴지거든요. 저는 신비스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임무기 선배님 실명으로 글을 올리시면 더욱더 친해질 것입니다.
실명을 다 고백했잖아요. 영섭 후배가 궁금해 하는 건 저의 실명이 아니고 저의 실체가 궁금한 겁니다.
선배님 고맙습니다.예쁘게 봐 주셔서, 저의 이름은 부모님 두분께서 지어주셨답니다.그래도 옛날치곤 촌스럽지 않던 이름이죠.
산골짜기 촌에서 미래를 예견하시고 이름까지 고민을 많이 하셨을 두 부모님의 깊은 안목에 놀랍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름처럼 대한민국을 위해 아니 학산국민학교의 명예를 위해 '미희'라는 이름을 한국을 넘어 세계에 각인시키시길 바랍니다. 화이팅!
감사합니다 선배님...세계로 보다는 학산 안에서만 열심히 살렵니다.부모님 자주 찾아뵙고 ....지난 목욜안동와서 아직 있습니다
행복을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습니다. 내 부모님을 내 자식을 남편을... 극진히 사랑하면서 학산국민학교 출신이라는 명예와 긍지를 가지고 학산국민학교 이름을 더욱 빛내 주세요.
초등2학년때 전학간 친구를 일년전에 만났는데 친구들 이름을 까먹을까봐 집와서 매일외웠다고
하더라구요..공감가는글 잘읽고 갑니다^^
지루하게 긴 글 읽고 따뜻한 마음을 남겨주신 후배님께 고맙다는 인사 올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