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종단 분규와 치욕적인 10.27법난은 자주적인 불교 개혁이 없을 때 치루어야 할 대가가 어떤가를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불교 개혁의 당위성이 자리잡았지만 개혁은 뼈를 깍는 아픔을 감내할 자세가 수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시기부터 불교개혁의과제를 종단, 불교단체, 승려, 재가불자 등 불교계 구성원이 공감하였다. 그러나 그 이행과정에는 적지 않은 문제점이 제기되었는데 그것은 개혁의 주체와 대상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불교계의 초점은 개혁이었다.
10.27법난으로 큰 상처를 입은 종단은 우선 종헌을 새로이 정비하였다. 해인사에 칩거해있던 이성철 종정이 취임하면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를 내었고, 그는 종정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서울 출입을 일체 마다한 이력을 보여주었다. 한편 종단은 신흥사, 불국사, 석굴암, 낙산사를 총무원 직영 사찰로 지정하였는데, 이 조치도 혁신의 노력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법난까지 당한 불교계의 자기 스스로의 변신은 간단치 않았다. 그 즈음 나타난 불국사와 월정사 주지를 둘러싸고 전개된 추태는 개혁의 당위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1982년에는 종권의 핵심인 총무원장이 4번이나 교체되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불교 개혁의 움직임은 종단보다는 종단 외곽의 불교단체, 수좌, 학인, 재가불자 등에서 자생적으로 가시화되었다. 이에 불교계 내의 다양한 개혁의 목소리와 파장이 종단으로 다가서는 현실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불교 개혁의 태동은 민중 불교운동에서 나타났는데, 그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사원화 사건이었다. 1981년 초부터 시작된 사원화 운동은 세간의 승가화, 즉 이상적인 승가공동체를 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이 운동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tfvo와 민주 세력의 분열 등 사회 전반적인 민주화 후퇴를 반성하는 운동권 내에서 촉발되었던 현장준비론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이에 불교계에서도 이론 추구에 대한 한계를 절감하는 가운데 민중불교의 거점을 개별적인 사원에 두려는 자생적인 움직임이 노정되었던 것이다. 그 움직임은 칠보사, 묘각사, 개운사 등지에서 일어났다. 그중 불입종의 묘각사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던 그룹이 공권력에 탄압을 받았기에 일반적으로 사원화 사건하면 바로 묘각사 거점 움직임을 지칭한다.
묘각사의 사원화 운동은 심포지엄 개최, 불교 야학의 실천, '청년여래'의 발간 등을 통하여 민중 불교의 이념을 구현하였다. 이 움직임 중에 대표적인 것은 불교 야학이었는데 문화 총림 여래사, 여래사 불교연구회는 이 운동의 다양성을 말해주는 명칭이었다.
마침내 이 운동은 서울, 전주, 부산, 인천, 청주 등지에서 실시된, 혹은 준비중이었던 불교야학연합회의 결서응로 나아갔다. 그러나 1981년 말 공권력에 의해 불교사회주의라는 단정으로 150여명이 연행되는 탄압으로 더 이상의 활동은 하지 못하였다. 당시 그 움직임의 핵심인물이었던 김법우, 최연, 신상진은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이 사건은 보수적인 불교계에 자못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
이같은 움직임은 진보적인 대불련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소장 승려 50여명으로 구성된 전국지도법사단의 발족은 대불련의 내실과 위상강화에 일익을 주었다. 대불련 사무총장이었던 여익구는 민중불교의 이념을 담은 '불교의 사호사상'(민족사)을 1980년에 발간하였으나, 발간 직후 판금 당하였다. 1985년 여익구가 발간한 '민중불교 입문'은 '불교의 사회사상'과 함께 청년 불교 개혁을 열망하는 신도들의 필독서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불교 개혁의 움직임은 승가대학의 학인에게서도 자생적으로 제기되었다. 1981년 7월 13일-16일, 중앙승가대에서 개최된 전국 청년 승가 육화대회는 바로 그 예증이었다. 여기에 모인 100여 명의 학인들은 3박 4일간의 공동 생활을 하면서 불교계 현안 문제를 검토하고 불교 운동에서의 승려의 역할을 고민하였다. 소장 승려가 주축이 되어 종단 개혁을 목적으로 활동한 선림회와 교림회가 등장한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이어서 조계종 종책연구소의 설립과 불교사회문화연구소의 활동이 그 뒤를 이었다. 특히 불교 사회문화연구소는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던 여익구와 정승석이 실무를 담당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종단 제도개혁안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 연구소의 지향은 불교의 위상과 승려의 역할에 대한 자각의 유도를 통해 불교 본연의 역할 회복에 있었다.
그러나 이 연구소에서 검토하고 총무원 기획실에서 마련한 승단 제도 이원화와 계율 완화 등 종단 개혁의 시안 내용이 1982년 8월 공개되자, 그 비판이 적지 않아 당시 총무원장이 이를 백지화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 내용은 승단을 수행승과 교화승으로 이원화하고, 교화승에게는 육식과 대처를 허용하는 혁명적 방안이었다. 교단 운영은 수도승 중심으로 하되, 교화승은 포교 행정등에 전념케 한 것이었다. 또한 교화승은 짧은 머리에 사찰 밖을 나갈 시에는 외출복을 입도록 하였다. 이 방안을 '종단제도 개혁 시안'이라고도 하는데, 총무원 내부의 여론 수렴을 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언론에 노출되어 종단 내외의 거센 도전으로 좌초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 안은 당시 만연된 은처승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검토, 촉발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앙일보는 이 내용을 8월 13일자 1면 톱기사로 특종보도 하였다.
불교 개혁의 출범 2
이렇듯이 각 분야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불교개혁 세력들은 불교 개혁의 추진과 민중불교 실현을 위해 1983년 7월 17일 범어사에서 전국청년불교도연합대회를 개최하였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는 주제로 열린 그 대회에서는 전국의 소장 승려, 수좌, 학인, 청년불자 등 2천여 명이 운집하여 사부대중의 결속과 그를 통한 불교운동을 천명하였다. 여기에서 결성된 전국청년불교도연합은 출가와 재가를 넘어선 주체적인 역량 확보와 불교자체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청년불교도백서'를 발표하고 지속적인 개혁을 위한 청년 불교도 연합을 결성하였다. 또한 전문 41조의 회칙을 통과시키고 집행부도 구성하였다. 즉 회장에 김지형, 부회장에 배조웅, 김영국, 사무총장에 이성문을 선출하였다.
사원화 운동에서부터 전국청년불교도연합에 이르렀던 이같은 움직임은 출가자와 재가자가 개혁운동의 단체에서 접점을 이루었고 그들의 지향이 불교개혁으로 가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 깊은 것이었다. 그런데 불교개혁의 노력이 점차 구체화되던 그 당시에 불교계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신흥사 승려의 살인 사건이었다. 1983년 8월 6일 발생한 그 사건은 신흥사 주지 신임 주지(김혜법)의 부임과정에서 그를 반대하는 전임주지(조운영)츠긔 폭력 사태에서 야기되었다.
신흥사 사건이 일어나자 종단, 신도회, 언론, 신자 등은 그 문제점 해결을 위한 대책을 다양하게 개진하였다. 종단도 사태 해결을 위한 모색을 거듭하면서 '종단 정화 중흥 백서'를 발표하였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황진경과 종회 의장이었던 서의현은 그 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나 불교계 내외에서 봇물처럼 나오는 불만의 목소리를 진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청년불교도 연합은 개운사에서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종단의 자율정화와 종단의 퇴진을 주장하고, 종회의 폐회 후 조계사에서 호법구종법회를 가졌다. 단식을 통해 그 의지를 결속하는 가운데 대학생 17개 단체도 동참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8월 27일 종단의 원로회의는 집행부와 종회의 사퇴와 해산을 결의하였다. 비상사태를 선언한 원로 승려들은 그 해결책으로 그해 9월 5일 조계사에서의 승려대회의 개최를 선언하였다. 원로회의 그 대책은 향후 종단의 진로를 모색한 새로운 전기를 제공하였다.
1천여 명이 참가한 그 승려 대회에서는 불교 개혁과 정법 수호운동을 다짐하면서 비상종단 출범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즉 종헌 122조를 신설하여 종권은 일단 원로회의로 이관하였다. 9월 8일 김서운이 총무원장에 임명되고, 9월 15일 종헌 122조에의거 종단 운영비상조치를 단행하였다. 그 내용은 비상종단 운영회의법 통과, 비상종단 운영회의 출범 등이었다. 마침내 9월 28일 비상종단운영회의를 개최하여 의장에 박영암, 부의장에 강석주와 정초우가, 상임위원장에 김서운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기존 집행부가 조계사를 점거하였기에 집행부가 조계사 인수시 공권력의 도움을 받았는데, 당시 김서운 총무원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집달리들이 쇠망치로 부순 조계사 담벽의 구멍을 통해 조계사로 진입해야만 되었다.
이같은 우여곡절하에 등장한 비상종단은 종단 개혁이라는 과제를 안고 실천해야만 했다. 한편 이성철은 종단개혁에 관심을 갖고 7인 제도개혁위원을 직접 임명하기도 하였다. 그 7인은 혜정(만공문도 대표), 벽파(용성문도 대표), 초우(통도사 대표), 일타(해인사 대표), 보성(송광사 대표), 녹원(본사주지대표), 혜암(선원 대표)이었다. 이 7인의 제도 개혁위원은 비상 종단의 제도 개혁실행위원회(암도, 진철, 정대, 지하, 송산, 지형, 설정, 원택)에서 검토, 발의한 안을 다듬는 과제를 맡게 되었다.
비상종단은 그간 논의된 진보적인 불교 개혁안을 수렴하여 6부대중제도, 승려교육강화, 본사제의 폐지와 교무원, 교구제 실시, 사찰재산 관리의 공영화, 불교의식 재정비, 신도관리의 개선 등을 마련하였다. 6부대중제도는 기존 4부 대중에 중간 교역자층인 교화승 2부를 추가하여 재가자의 교단 참여를 제도화한 것이었다. 당시 이 개혁안은 8인 제도개혁 실행위원의 지난한 작업과 종정이 지정한 7인 제도개혁위원의 심의를 거쳤고, 합동회의를 통해 문제점을 조율한 것이었다. 마침내 1984년 7월 7일 그 종헌 개정안은 제 6차 비상종단운영회에서 통과되었다. 그러나 그 개혁신안은 종정, 원로회의, 교구본사주지연합의 반대에 부딪쳤다.
특히 이성철 종정은 종헌의 내용에 이의를 갖고 1984년 7월 14일 종정 사퇴를 선언하였다. 이성철은 종헌의 내용중 4부 대중 고수, 교역자 신분을 평신도로, 상임위원회에 절대 권력을 부여치 말 것, 교정회의 의원 직선선출, 승려교육고 포교 강화 등을 개진하였다.
당시 비상종단에서 제정한 종헌의 내용 중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것은 교역자(전법사, 전교)문제였다. 이는 기존의 4부 대중에서 포교 전도의 확충을 위하여 새로운 대중으로서의 교역자를 둔다는 것이 그 요체였다. 이것이 문제되기 이전에는 종단의 구성은 승려, 교역자, 신도 즉 6부 대중으로 대별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으나, 이를 승려의 대처로 이해한 부류의 반발로 수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법사는 신규 종헌에 반영되기 이전에 이미 기존 종헌 제 8조에 의거하 SRY역자법이 공포됨에 따라 시행되었다. 서류전형과 면접 등을 통해 선발된 98명의 제 1기 전법사의 품수식은 1984년 7월 15일 거행되었다.
또한 문제시 된 것은 종정의 비상조치권이었다. 이는 종정의 권한 강화라는 측면과 종단 분규를 전제로 하는 비상조치는 곤란하다는 의견간의 대립이었다. 종정 사퇴라는 암초에 직면한 비상종단주도자들은 종정이 제기한 종헌의 내용을 수정하였지만 이후 행보는 여의치 않았다.
마침내 종정의 사퇴를 계기로 종단은 비상종단측과 그에 대응된 8월 1일 해인사에서의 전국승려대표자대회를 주도한 중진 승려로 대별되었다. 당시 중진 승려들은 비상종단을 이면에서 주도한 소장승려들을 종권 장악을 목적으로 종헌을 개정한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러나 비상종단 소장승려들은 종정이 이의 제기한 것은 모두 반영되었고, 종정의 언급으로 대두된 7인제도위원회의 승려들도 동의하였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불교개혁의 출발 3
해인사 대회에서는 새 종헌의 무효와 비상종단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오녹원을 총무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성철 종정의 종정 사퇴 번의를 종도의 이름으로 촉구할 것도 결의하였다. 중진승려측은 집행부 구성의 여세를 몰아 조계사와 종단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불교 개혁의 열망을 안고 출발한 비상종단은 현실의 높은 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에 하차하였던 것이다. 비상종단을 주도한 일부 승려들은 비상 종단 총무원을 범어사에 두려는 움직임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28일 비상종단 운영회의 관련 승려(서벽파, 이성무, 이도수, 김지형)들이 조계사를 일시적으로 강제 점거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 사태는 총무원장 오녹원과 비상종단측의 정초우가 화합을 위한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것으로 무마되었으나 그 후유증은 단순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비상종단측 승려들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었던 것이다.
종단에서 밀려난 비상종단측의 승려들을 '소장승려'로 명명하였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종단 내부에 개혁 지향적인 승려들이 자리잡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들은 그 후 민족불교연구소(소장 이성문)와 한국청년승가회(회장 임송산)를 조직하여 소장그룹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지향은 당초 청년 불교도연합에서 논의되었던 개혁의 성향을 모두 담아내지 못하였기에 개혁적인 '종권파'라는 별칭을 얻었던 바에서 나타나듯 일정한 한계성은 갖고 있었다. 그러나 비상종단은 불교계에 개혁의 불씨를 심었다는 면에서는 의미가 적지않았다.
비상종단의 출범을 계기로 나타난 미세한 움직임은 출가와 재가가 일시 개별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비상종단 내에서 출가자 중심의 종단 운영에 대한 재가측의 반발을 말하는 것이다. 비상종단에 참여를 거부했던 개혁적인 승려들은 현장포교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으나, 1985년 5월 4일 출범한 민중불교운동연합(의장 여익구)에 가세하였다. 출가와 재가 연합체인 민중불교운동연합은 불국정토 건설, 자주적 평화통일 달성, 민중불교 확립이라는 강령에서 보이듯 불교 자주화보다는 반독재민주투쟁과 민중운동을 중점 실천하였다. 민불련은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기관지 '민중법당'을 발간하였다. 그러나 지도부가 인천의 5.3 사태에 가담하여 당국에 구속, 수배당하면서 급격히 퇴조하였다. 거기에는 과격한 투쟁과 폭력을 용납하지 않았던 기성 불교계의 시각도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