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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택이 일본 대학생활 동안 달리 야학 학생들 위해 가지고 왔던 종. 나중에 마을에 불이나면 치곤했던 이 종이 지금도 달리 경로당에 걸려 있어 그의 고향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 ||
대부분의 천재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시대에 사회가 재능을 알아주지 않아 불운한 삶을 살게 되는데 울산이 낳은 천재 강정택(姜鋌澤)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망국 국민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이런 어려움 속에서 익힌 학문은 한국동란 중 납북으로 이 땅에서 제대로 펴보지 못했다.
강정택은 1907년 11월 1일 울산 남구 신정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강영수는 울산 병영의 진위 대장이었고 어머니는 울산의 거부로 해방 후 종하체육관을 울산시에 기부한 이종하의 누나 이유송이었다. 강정택은 1남 2녀 중 장남이었다. 그가 태어날 무렵 부친은 조선군이 일본군에 의해 해산되는 바람에 직장을 잃어 실의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그의 가족들은 이종하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살았다.
강정택은 울산초등학교 졸업 후 가정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중구 성남동에 있었던 구멍가게에서 점원 생활을 했다. 가게가 있었던 곳은 옛 성심 병원 자리로 공교롭게도 나중에 그의 부인이 병원을 운영했던 장소가 된다.
울산성장의 시대...국도 7호선시대-17
일본 수재 모인 동경제일고 졸업해
입양문제로 평탄치 못한 결혼생활
외삼촌 이종하를 졸라 중학교 입학
미국행 앞두고 6·25 발발…납북돼
그는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가게 노름꾼들의 잔심부름까지도 했던 모양이다. 이 생활에 싫증을 느낀 그는 어느 날 외삼촌 이종하를 찾아가 중학교에 보내어 달라고 떼를 썼다. 강정택은 이때 “나와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중학교로 진학해 앞으로 훌륭한 사람이 될텐데 나는 가게에서 노름꾼들의 심부름만 하다가 일생을 마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더니 이종하가 이 말을 듣고 감동해 그를 중학교에 보내주었다고 한다.
외삼촌의 도움으로 그가 경북고보로 진학한 것이 1923년 이었다. 그가 발군의 실력을 보인 것은 이 때부터다. 입학 후 학업성적이 우수해 장학금을 받았던 그는 당초 생각도 못했던 일본의 고등학교까지 진학하게 되는데 이것은 순전히 경북고보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한 교장 선생 덕분이었다.
경북고보를 졸업한 후 그가 진학했던 학교는 동경제일고등학교였다. 일명 ‘일고’로 불리는 이 학교는 일본 수재들이 모두 모이기 때문에 한국 학생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학교였다. 그런데 조선의 지방 중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이 학교에 합격했으니 일고 교사들 모두가 놀랐다. 이들이 얼마나 놀랐나 하는 것은 강정택이 일고에 합격한 후 일고 교장이 한국으로 직접 나와 그의 학교 성적을 확인했고 또 경북고보 교장이 일본으로 들어가 강정택이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장학금을 줄 재력가를 찾아 나선 데서 알 수 있다.
이때 그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이 일본의 거부 시부사와 케이조(澁澤敬三)였다. 시부사와는 이때 은행장이었는데 나중에는 일본의 대장성대신이 된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강정택이 시부사와로부터 받은 장학금이 월 100원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군수가 받은 월급이 20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돈은 대단히 큰 액수다.
일고 졸업 후 대학을 진학한 것이 1928년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집안이 어려운 점을 감안해 의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이종하와 시부사와는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종하는 그가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고 시부사와는 한국이 독립되면 농업을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농과대학을 권했다. 그는 시부사와의 권유를 받아 들여 동경제대 농업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방학 때면 울산으로 와 야학을 열고 지역사회 계몽에 나서기도 했다. 그가 울산에 오면서 학생들을 위해 갖고 온 종이 지금도 달동 경로당에 걸려 있다. 이 종은 처음에는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데 사용되었지만 나중에는 마을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종을 쳐 사람들을 불러 모았기 때문에 ‘불종’이라고도 불렸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진학 한 것이 1931년이다. 이때도 그는 방학 때면 울산으로 오곤 했는데 1936년에는 울산에 와 달리(達里)를 중심으로 한국농촌에 관한 연구를 해 이를 석사 논문으로 제출했다. 이때 그가 동경제대 학생들과 함께 수집해 간 각종 농기구가 아직까지 일본에 남아 있는데 울산박물관은 지난해 이를 일본에서 가져와 전시했다.
결혼은 1934년 했다. 신부는 경북 성주 출신으로 일본여자의과대학을 졸업, 일본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던 이간난(李簡暖)이었다. 결혼 후 그는 일본에서 교수로 있었는데 부인은 시가가 있는 울산으로 와 평화의원을 운영했다. 결혼 후 그는 아들 딸 각 한명씩을 두었다. 당시 그의 행동 중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다. 하나는 부부가 헤어져 산 것이고 두 번째는 장남 주용을 낳자마자 바로 외삼촌에게 양자로 보낸 것이다. 이러다 보니 주용은 성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항렬도 높아져 졸지에 아들이 형제의 촌수가 되었다. 이와 관련 그는 부인에게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 외삼촌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세손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외삼촌에게 아들을 낳으면 주겠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인으로서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대구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강정택의 딸 경옥(70)을 만났다. 그런데 이 딸은 지금도 “당시 아버지가 왜 하나뿐인 아들을 외삼촌에게 주어 어머니가 그렇게 상심하도록 만들었는지 이해 할 수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결혼 후 부인은 울산에서 2~3년 동안 병원을 운영하다가 일본으로 들어가 강정택과 함께 살았다. 이때 그는 여전히 연구에 전념했기 때문에 가정 경제는 전적으로 부인 몫이었다. 장남의 입양문제로 오랫동안 속을 썩였던 부인은 이 한을 풀기위해서인지 이후 다시 쌍둥이를 낳았으나 산후가 좋지 않아 쌍둥이도 사망하고 부인도 우울증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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